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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 비전중앙교회 주일오전예배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노라
<요 15:15-19>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복음 15장 16절은 여러분들이 죽을 때까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했다.’ ‘내가 너희를 택했다.’ 이는 굉장히 의미 있는 말씀이고, 우리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택했다 하는 이 사실을 머릿속에 넣어두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할 때 늘 어려운 일들이 있잖아요, 힘들고 어렵고 이럴 때 ‘주님이 나를 택했구나,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주님께서 나를 선택했다.’ 이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음생활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생활 하면서 아무런 의심도 없었고, 여러 가지 많은 도전 가운데서도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변함 없이 하나님을 잘 섬겨왔다.’ 그렇다면 굉장히 좋은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 많습니다. 수많은 회의와 번민을 느낍니다. 도전과 갈등, 심지어는 방황과 타락 등의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믿음 생활을 계속하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성경을 알아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어느 순간에 믿음을 주셔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고, 그리고 예수를 믿는 성도의 삶으로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고 공부하게 됩니다. 굉장히 신기하잖아요. 그러니 성경을 알아서 예수가 믿어진 게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주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이 알아지고 깨달아진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치예요.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어요. 말씀을 읽는 도중에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말씀을 알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주라는 것이 믿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 말씀을 사랑해야 하고, 말씀을 좀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습니다. 몇 번 읽을 땐 잘 모릅니다. 왜 모르냐면, 어렵기도 하고, 성경에 대해서 깊이 있게 좀 알자 하는 생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교회 다니고 하니까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해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읽어 가면, 언어 자체도 옛날 문체이고, 의미 자체가 굉장히 어렵기도 하고, 용어가 또 어려운 게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읽어 갑니다.
읽어 가다가 이제 교회에서 설교 말씀을 듣고, 성경을 공부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성경에 눈이 조금씩 뜨입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옛날에 보이지 않던 내용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굉장히 발전하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발전하면 좋은데, 어느 순간 성경을 보다가, 서로 상충 되는 듯한 말씀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우리가 성경을 배울 때는 이렇게 배웠는데, 말씀을 보니까, ‘아, 그게 아닌 거 같기도 하다.’라고 혼자 생각하기도 합니다. 고민도 합니다.
성도들이 혼란을 가장 많이 겪는 문제가 바로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굉장히 혼란을 많이 겪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가운데서, 구원에 대한 혼란이 좀 있고, 성경을 볼 때 내가 잘 몰라서 아직 몇 가지 의문스러운 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확실하다. 주님의 구원은 변함이 없다.’라고 믿어지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이건 아무나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게 아무나 믿는 거 같으면, 조금만 예수를 알면 다 그냥 믿어지겠죠. 그런데 이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참 비밀입니다. 성경이라는 것 자체가, 특히 구원은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이것은 알게 되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이게 개방되면, 성경은 혹은 구원은 비밀이라고 표현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이 비밀은 일부만 알고 있다는 말이에요. 딱 그분들에게만 알려져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좀 상충 되는 말씀이 몇 가지 있어도, 그냥 본인이 하나님의 자녀임이 믿어지고, 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확실히 믿어지는 것은, 내 지식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서, 사도들이나 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표현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오해하거나 갈등하기도 합니다. 한번 보세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라는 내용을 성경에서 접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그렇게 배우고, 지도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러면 ‘믿음은 행위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에 문제가 좀 있지 않나?’ 하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성경 내용을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표현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믿음이 아니라 성도의 올바른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들도 상당히 많다는 겁니다. 또한, 분명히 구원을 받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조금 알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이 믿음을 중심으로 한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 웨슬리안 쪽의 행위 중심의 교단들은,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살지 못하면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식의 가르침을 줍니다. 그래서 또 그 가르침이 맞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뭔가 상당히 갈등하게 돼요, 은연중에 마음속에 ‘성도는 올바른 행동이 없다면 구원을 잃어버리기도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술이라는 것은 우리가 굉장히 가까이 접하는 거란 말이에요. 많이 취하든 적게 취하든 술은 들어가면 취하는 것인데. 그러면 술만 먹었다 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그런 말씀도 있고, 그다음에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라’ 그랬어요.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또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없는 자다’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없는 자다’, 이건 무슨 말입니까?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이 형제라는 것은 가족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을 다 사랑해야 하는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나는 어떻게 되냐, ‘그리스도 안에 없는 자다’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겁니다. 이런 종류의 말씀들이 성경에 어쩌다가 나오는 게 아니라,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켰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 내쳐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굉장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일단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감동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실 때, 저자의 사고나 저자의 지식, 배경 등도 충분히 고려해서 쓰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볼 때 여러분은 반드시 저자의 의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저자가 왜 이런 말씀을 했는가 하는 걸 알아야 하고, 그다음에 어떤 말씀이든 문맥을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몇 구절만 끄집어내어서 이것이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내리게 되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는, 다른 것도 필요한 게 많지만, 반드시 그 저자가 원래 말하고자 한 원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이걸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부분부분 끄집어내어 보아선 안 되고, 문맥을 보셔야 해요. 또한, 이 성경이 쓰인 시대적인 상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해요. 어떤 사람에게 썼는가, 어떤 교회에 썼는가, 그다음에 어떤 형편에 있을 때 이 말을 했는가 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성경을 심각하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들의 특징이 저자의 원래 의도라든가 맥락이라든가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판단하고 결론 내리다 보니, 이상한 교리들이 많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하면서 ‘너희가 믿으면 구원받으니까 성도의 행동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까? 아니면 ‘너희가 믿고 구원받았으면 똑바로 살아야 한다, 행동 똑바로 해야 한다. 너 만약에 행동 똑바로 안 하면, 너 구원받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야 합니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해요? ‘술 취하지 말라’, 성경에 그래놨거든요. 그리고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했거든요. 성경에서 이 저자가 술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하는데, 그러면 ‘술 먹어도 된다. 술 취해도 된다.’ 이렇게 기록해야 합니까? 아니잖아요. ‘술 취하지 마라, 너 술 취해서 그렇게 방탕하게 살면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수 없다’라는 식의 강력한 표현도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하잖아요. 자기 자녀가 지금 굉장히 몸이 약하고 아파서 아주 힘들어하고 있잖아요. 이게 너무 길어지면 부모가 “그냥 빨리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겠나?”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말은 빨리 죽으라는 뜻이 아니에요. ‘건강하게 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그런 강력한 표현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집니까? 여러분들 항상 기뻐지던가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그랬거든요.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가 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감사하지 못할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불평불만 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거든요. 성경은 원론적인 당위성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겁니다. 그런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는 겁니다. 애를 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자들이 어떤 성경을 기록할 때의 그 의도를 모르면, 거기 나오는 특정한 몇몇 문장을 자칫 이상하게 해석하게 될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그랬잖아요. 여러분, 사랑이란 게 쉬운 일입니까? 보통 우리 인간들의 사랑은요,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본능적인 습관입니다. 어린 아기들도 보면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벌써 호감을 느끼고 가까이하려고 해요. 뭔가 약간만 부담이 생기고 조금 싫은 게 있으면 애들도 가까이 안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경의 ‘형제를 사랑하라’, 즉 ‘모두를 사랑하라’ 하는 말씀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 뒤에 ‘이렇게 형제 사랑을 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없다’라는 표현까지 하거든요. 그러면 당연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잖아요, ‘형제를 사랑하라’ 이거는 ‘미워하지 말라’는 뜻이라고요. 그 사랑을 정말 너희들이 실천을 좀 하라는 이런 이야기예요. 요한이 ‘형제를 사랑하라’ 이 말을 할 때,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사랑이 되고 그래서 말한 건 아니라는 얘깁니다.
살다 보면 사랑하다가 부딪히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이러거든요. 그런데 이런 게 많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아가면 안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사랑을 마음으로 애써 실천하고 나눠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목회를 하고 수많은 성도를 만나 보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 진짜 무섭습니다. 뒤에서 별의별 헛소리를 다 하고, 이런저런 중상, 비방, 모략이 너무 많아요.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서 뭔가 안 좋은 벽이 생기면, 서로를 진짜 마귀 대하듯이 대합니다. 제가 그런 교회에 있어도 봤고, 그런 교회에서 그렇게 회의하는 모습도 보았었습니다. 그때 내가 전도사였는데, 이건 완전히 내가 시험 들겠더라니까. 목사님과 장로님들, 그다음에 장로님들끼리 그 자리에서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막 싸우는 거야. 세상 사람들은 그러잖아요, 국회 같은데도요, 싸울 때 보면 막 문 열고 드러눕고 하면서 싸우다가도, 다 끝나고 나면 웃어가면서 악수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게 아니라고, 막 싸우고 나면요, 교회 나갈 때 딱 보세요, 얼굴도 안 쳐다봅니다. ‘저 죽일 놈’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이에요. ‘그래, 이런 식으로 너희들이 계속하면 너희들은 그리스도 안에 없는 자다, 그런 자 아니냐?’ 이거예요. 이런 식의 강조가 굉장히 많이 나온단 말이에요. ‘술 취하지 마라’, ‘술 취하지 마라’ 그래야지, ‘술 먹으라’ 그래야겠어요? ‘적당하게 먹는 건 괜찮다’ 이래야 하겠어요? 당연히 ‘술 취하지 말라’고 말을 해야지. 왜냐하면, 그것이 자칫 잘못하면 삶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그런 식의 강조를 많이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구원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강조할 때, 저자의 의도가 꼭 ‘네가 천국 간다, 지옥 간다.’ 하는 뜻이 아니라, 그 해야 할 일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또한 상당히 많습니다. 히브리서 6장 4절~6절을 보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어떤 거룩한 자리에 참여하였고 영적인 걸 크게 체험하였다 하더라도 (6절에) 타락한 자는 다시 돌이켜 회개시킬 수 없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에요. 예수 믿고 막 이렇게 하다가 타락한 자를 말하면서 타락의 기준 제시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누가 타락했다 하면 어디까지 타락해야 ‘타락’이라는 표현을 해요? 어떤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일날 교회 잘 나오다가 한두 번 교회 빠졌다고 해서, 이런 이야기 자주 하거든요, “김 집사 타락했어. 요즘 교회도 잘 안 나오고.”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그리고 또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 어느 날 기도를 쉰다고 안 하면은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 생활 저런 식으로 하고, 타락해도 단단히 타락했네” 이런 식의 표현을 많이 사용하거든요. 이건 보면 뭐 갖다 대면 다 타락이야, 그냥.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볼 때 이 저자가 왜 이렇게 기록했는가 하는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행동도 절대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고 모두 사형에 해당한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자, 보세요. 로마서 1장 29~32절에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의 행위 23가지가 나와요. 우리 성경은 22가지가 나오는데, 하나가 빠져 있어요. 원 성경에는 23가지예요. 자, 로마서 1장 29~32절에 나오는 죄에 해당 안 되시는 분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신가, 아니면 지금 영상으로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서도 여기에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한 번 보세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미워하는 것, 능욕하는 것, 교만한 것, 자랑하는 것, 악을 도모하는 것, 부모를 거역하는 것, 우매한 것, 배약하는 것, 무정한 것, 무자비한 것”, 해놓고 나서 32절에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그랬어요. 이런 걸 알고도 이런 짓을 한다는 거예요. 이게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여러분들, 보세요. 여기 해당 안 되는 사람 있습니까?
여기 하나 빠진 게 뭔 줄 압니까? 그게 화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해하지 않는 자도 사형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씩 말씀드리는 게 여러분들 간에 서로 불화가 있으면 그냥 ‘내’가 죽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잘했든 잘못했든 화해하라는 거예요. 손 먼저 내미는 게 굉장히 어렵거든요, 그런데도 찬양은 잘 하지 않습니까?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추악한 나의 마음이여, 더러운 나의 욕심이여’, 이렇게 찬양은 잘합니다. 제가 며칠 동안 이 복음성가를 계속 되뇌었습니다,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예전에 우리 이런 찬양 많이 했거든요. 이런 찬양을 그렇게 쉽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말로만 그러잖아요. 말로만 전부! 찬양은 쉽게 하면서 자신의 삶을 전혀 못 돌아보는 거예요.
355장 옛날 찬송가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이거 못 부릅니다, 제가. ‘아골골짝 빈 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용기가 안나요.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이거 전부 말뿐인 거예요, 말뿐. 우리가 그런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렇게 가식적인 인간이었나, 이렇게 추잡한 인간이었나’ 하는 그런 생각들을 며칠 동안 좀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0.000001%의 죄가 있어도 못 가는 곳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0.000001%의 죄도 없이 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그게 될 것 같아요? 마음이 늘 평안할 것 같습니까? 추악, 불의, 여기 보면, 탐심, 시기, 살인은 안 했다 하더라도, 아, 살인도 밥 먹듯이 하죠, 사실은. 왜냐면 미움 자체를 살인으로 규정하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결론은 뻔한 거예요.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마음 이거 안 됩니다. 인간의 행동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안 된다고요!
제가 집에 어머님 모시면서 우리 여동생이 어머니 돌보는 걸 봅니다. 보면 맨날 욕먹습니다. 맨날 욕하고, 이것이 어떠니, 저것이 어떠니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멀리 있는 사람은, 저도 그러죠, 조금 멀리 있다 보니까, “네가 그것도 못 참냐, 좀 이렇게 잘해 드려라. 그러면 어머니 좋아하실 거 아니냐.” 하고 말은 쉽게 하지만요, 막상 하는 사람은 또 다릅니다. 이게 참 힘들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그래요. 아마 어른들 모셔 본 분들은 알 겁니다. 나이가 들면 애가 되거든요. 그래서 요구하는 것이 많아집니다. 불평불만이 많아집니다. 조금만 뭐해도 섭섭해해요. 이게 어른이 되면 어쩔 수 없어요. 나이가 한 80세 이렇게 한번 넘어가 보십시오, 여러분들. 그렇게 안 되는가. “목사님, 나는 절대 그렇게 안 될 겁니다”라고 혹 말할지 모르는데 한 85세 넘어가 보시라고요. 그렇게 된다니까 인간이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면,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선할 수가 없습니다. 이거는 인간의 분명한 본모습이에요. 인간이 아무리 선해지려고 노력을 해도 인간은 선 자체를 행할 수가 없는 존재예요. 여기에 해당 안 되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외에도 성경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우리도 그럴 수 있으니까, 네가 예수 믿고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고 그렇게 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 믿고 난 뒤에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도의 삶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의도이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구원을 못 받는다, 하나님 나라 가지 못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려서는 굉장히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15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예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 자,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택하다’의 의미가 뭐냐면, 여러 명 이렇게 앉아 있는데, 그중에 꼭 집어낸 걸 말해요. ‘끄집어내다, 골라서 집어내다, 선택해서 딱 집어내다’라는 이런 의미가 있어요.
자, 그러면 여기에서 ‘택했다’에는 굉장히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너는 네 것이 아니다’라는 거예요. 끄집어낸 사람의 것이다. 끄집어낸 사람의 것. 여러분들은 누가 끄집어냈다고요? 여러분들을 주님이 끄집어낸 거예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이나 여러분의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에요. 전부 주님의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마인드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해요. 여러분이 택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주님을 택했다면 이건 문제가 좀 달라져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택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게 아니다. 이제 너희의 주인은 나다.’라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하나는, 너희의 주인이 나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너희를 책임지겠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내가 지킬 것’이라는 거. 여러분이 보석상에 가서, 정말 귀한 보석을 하나 딱 집어서 사 왔어요. 그게 시가로 한 1억 정도 한다 그럽시다. 그럼 그걸, 예를 들어서 시계를, 여러분이 갖고 있으면, 그 시계 마음대로 차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거 우리 같은 사람은 못 차고 다닙니다. 단 몇백만 원만 되어도 못 차고 다닙니다. 잃어버릴까 싶어서 내내 거기 신경이 간다고요. 신경이 가고, 세수할 때도 거기 신경이 가고, 혹시 누가 들고 가진 않나 싶고 말이죠. 자기 호주머니에 넣어 놓고 잊어버리고 ‘아이고 잃어버렸다’ 난리 치고 하다가, 호주머니에 손 넣어보니 있으면 ‘어, 여기 있네’ 하면서 마음이 또 확 놓이고 말이죠. 어떤 귀한 것을 딱 선택했다면, 그것을 지키려고 이렇게 엄청나게 노력을 합니다. 그와 같이 주님이 우리를 택했다는 겁니다. ‘이제 이후로는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든 사람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안 된다는 거예요. 자살은 주님의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리스도인은 자살 자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자살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자살’과 ‘희생’을 구분 못 하는 분들이 있어요. 자기가 죽게 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살리거나 하는 것은 ‘희생’이라 그래요. 자살이란 어렵고 힘들고 그래서 자기 목숨을 자기가 스스로 끊어버리는 걸 말해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희생적 죽음은 있어도 자살은 안 됩니다. 안된다고요, 본질적으로. 자살하면 구원 못 받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살하는 사람한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가만히 보니까 그럴만하더라 하면서, 자살에도 뭔가 자꾸 여지를 두려고 하는데, 이건 여지를 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자살 자체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해나가면서 3절에 딱 주님이 먼저 하신 말씀이 있어요.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그랬어요, “내가 일러 준 말로”.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우리는 이미 깨끗해졌다는 거예요. 주의 말씀은 바로 능력이에요. 이 말씀은 바로 생명이거든요.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있고, 저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깨끗해진 겁니다. 과거잖아요. 이미 깨끗해졌다는 거예요. 다시 더러워지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깨끗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깨끗해졌으니 너희들은 어떻게 하라’는 내용이 뒤로 쭉 나옵니다. 성도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게 아닙니다. 아니에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게 아니고,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녀가 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실수나 실패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는 반드시 구원받습니다. 이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만약에 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켰다가 조금 마음에 안 들어서 ‘너는 이제 내 백성 아니다’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 어떤 악의 세력에 의해서 나의 구원이 빼앗긴다고 합시다. 여러분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모두 여러분들 스스로에 기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뒤에서 조종하는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 악의 세력을 내가 못 이겨서 그래요, 못 이겨서. 그래서 넘어지기도 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리고 믿음의 행위도 따라야 하는데 온전한 행위가 안 되기도 하고, 계속 이렇게 막 넘어지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서 가요.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사람에게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그분은 실수도 없고 실패도 없는 분입니다. 만약에 우리 구원이 악의 세력, 더러운 영적인 세력에 의해서 빼앗긴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공의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 안 됩니다, 그분의 능력은 능력 자체가 안 돼요. 그분의 약속은 거짓이 되고, 그분의 신실은 불신이 돼 버리며, 그분의 지키심과 인도하심도 전부 거짓이 돼 버립니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날 동안 육의 몸을 입고 살아가고, 이 육의 세계는 악한 사단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터입니다. 그러므로 육인 우리는 영적으로 강해지지 않으면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 쓰러진 이 몸은 빈손을 들고 주께 일어나 주 앞으로 갑니다.’ 성도가 어떤 상황에서 실수하고 실패하는 그 기간이 또 길 수도 있어요. 1, 2년이 될 수도 있고, 10년, 20년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평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참회의 눈물을 한없이 흘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꼭 드러나서 회개하고, 드러나서 삶이 바뀌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겁니다. 겉으로는 그러지 않더라도 많이 울고 많이 애통해하면서, 왜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살아가지 못할까 하는 그런 마음을 늘 갖고 살아는 게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그분 자체가 완전한 사랑이라 그랬어요. 성도의 거룩한 구원에 대해서 오늘 본문 말씀 15절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했습니다. 자, 표현이 좀 그렇잖아요. 우리가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모르고 그냥 읽다 보면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걸 보고 ‘이게 무슨 종을 말하는 거지?’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주의 제자들 그리고 또 우리 같은 사람이 종 아니잖아요. 제자들도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종은 죄의 종을 말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죄의 종이 아니라는 거예요. 죄의 종이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죄에 의해서 모든 삶이 지배당하는 게 죄의 종이에요. 그럼 이 죄를 가져온 게 뭡니까? 사탄이잖아요. 그러면 사탄의 종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pick up을 해서, 이제 사탄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입니다. 그래서 ‘이제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여러분들도 비록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죄의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약속의 종이고, 주님이 집어낸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우리를 뭐라고 표현했느냐, ‘친구’라 표현했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주님이 이런 표현을 했어요. ‘너와 나는 친구다’라는 표현을 했어요. 이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이잖아요. 친구라 하시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요. 13절에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건 주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너희를 위하여 버린다.’
그다음에 16절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했습니다.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는 주의 자녀가 되고 싶어서 자녀 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미 택함 받은 자녀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는 은총을 받게 된 겁니다. 이걸 또 깊이 자꾸 생각하면 헷갈리고 그러거든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이건 단순하게 믿으셔야 해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택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택한 거 아니잖아요. 여러분들이 ‘내가 예수 믿겠다’ 해서 믿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까? 어떤 분들은 그렇게 생각을 해요, ‘아니, 그래도 최종적으로 결국에는 내가 예수 믿겠다 해서 믿는 거 아니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 아닌 사람은요, 예수 믿고 싶다고 해서,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하고 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냥 믿는 것 같은 형식을 취할 수는 있어요. 똑같이 찬양해요. 찬송, 어렵습니까? 굉장히 쉽잖아요. 나와서 말이죠, 노래만 좀 잘 하면, 속에 그리스도가 없어도, 사람을 울렸다가 웃겼다가 다 할 수 있어요. 설교도 마찬가지,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없어도 조금만 언변이 있으면 성도를 웃겼다 울렸다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고요. 그래서 만약에 자기가 예수 믿고 싶어서 교회 와서 뭐 하다 보면요,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요한 1서 2장 19절 말씀처럼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나갑니다. 결국은 그렇게 돼 버린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집어서 택했어요. 인간 같으면 말도 안 듣고 이렇게 애도 먹이고 하면, 막 던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혹 너희를 낳은 부모는 너희를 잊을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어요. 세상 부모는 그럴 수 있다 이거예요. 그런 일이 많잖아요, 요즘은요. 애 낳으면 그냥 갖다 버리는 경우도 많고. 이건 특별한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요즘 그런 일들이 제법 일어나잖아요. 인간 세계는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자녀가 너무 말 안 들으면, “이놈의 새끼!” 하면서 부모가 자식을 죽이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기도 하고. 인간 세계는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절대적으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가면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 과정이 전체적인 예정 속에 들어 있는데, 그 안에서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기도 하고, 매를 대시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도록 늘 하나님이 수시로 침을 준다고요, 뭔가 좀 이래 되면은 또 침을 한방 놓습니다. “아이고야” 이러면서 제대로 하기도 하고, 또 돌아보다가 ‘손들고 옵니다’ 하면서 회개하기도 하고, 잠깐만 괜찮으면 또 잘못하기도 했다가 또 한 방 맞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그래서 절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이 원해서 우리를 택한 겁니다, 주님이 원해서. 우리의 선택으로 하나님이 믿어지고,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성령 역시 하나님이셔요. 이분이 우리를 그렇게 끌어가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는 감사하며 가면 됩니다.
이러한 주의 택함을 입은 성도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게, 두 가지 여기에 딱 나와요. 20절까지 보면 세 가지가 나오는데, 다 연결되기 때문에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자, 보세요. 17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이 사랑은 진짜 고결한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아름답고 귀한 것인데, 이 사랑을 인간들이 다 훼손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 거룩한 사랑을, 욕정적인 사랑이나 자기중심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으로 다 바꿔 버렸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이거는 변함이 없어요. 그래서 이 아가페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받아주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의 행위가 들어가 버리면,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제한이 된다는 이야기예요. 이건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니죠, 인간적인 사랑이죠. 우리 인간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꾸 인간처럼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사랑을 자꾸 제한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도 잘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잘못해 구원 못 받았다면, 그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어서 여기에서 나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 하나님이 인도하셔요. 이건 굉장히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사랑하셔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뿐만 아니라, 주 안에 속해 있는 성도들도 지금은 정말 사랑하고 사셔야 합니다. 아까 말했잖아요, 화해 안 하면 그것도 사형에 해당한다 그랬잖아요. 그 말은 화해하라는 거예요.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제자들이 있잖아요, 상당히 문제가 많았거든요. 자기들끼리 늘 싸우고 이러니까, ‘너희들 그러지 말아라’ 하면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 자체가 실은 성경을 완성하는 거예요, 완성.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성경 자체를 완성하는 게 사랑이에요.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바로 사랑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거예요. 그걸 부탁하시는 겁니다, 부탁.
그다음에 또 하나는 뭐예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그랬어요. 왜 그러냐면, 범죄하고 타락한 이 세상은 악의 세력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니까 예수 못 믿겠다. 저거 믿을 종교 못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저렇게 사는데. 저 목회자들 하는 짓 봐라. 예수쟁이들 하는 짓 봐라. 누가 예수 믿겠나.” 그러나 이것 때문에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 안 되는 게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류에 빠져 있어요. 성도가 성도답게 살지 못해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정도의 영향은 줄 수 있지만 이게 본질이 아니에요. 원래 본질은 세상은 성도를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보십시오. 사도들이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예수님이 무슨 나쁜 짓을 했어요? 그리고 복음을 전했던 우리의 많은 선조들이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핍박을 안 받았습니까? 어마어마하게 박해를 받았잖아요. 우리가 바르게 사느냐, 바르게 살지 않느냐와는 상관이 없어요, 복음은. 교회가 타락했느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진행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때가 되면 돌아온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다 부르셔요.
한국의 기독교가 1970년대부터 2020년까지 본격적으로 성장했는데, 그게 성도가 바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성장했다 생각하세요? 그게 아니거든요.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지만, 그러나 우리 기독교가 뭔가 잘못 살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성도가 줄어들고 자꾸 문제가 생긴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이 받고 잘못 가르치는 미혹하는 무리가 많아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말씀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말씀에서 이탈되니 ‘하나님의 말씀’다운 삶이 안 나오는 겁니다.
실제로 지금은 우리 기독교의 본질을 찾아가는 기간입니다. 여러분들은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타임에 있다는 거예요. 알곡과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하나님의 타임라인에 지금 여러분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자, 가라지를 골라내기 쉽겠어요? 쭉정이를 골라내기 쉽겠어요? 가라지를 골라내기가 훨씬 쉽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는 딱 보면 쭉쭉 뻗어 있어요. 그래서 추수 때 되면 가라지는 키가 크기 때문에 다 뽑으면 간단해요. 쭉정이가 힘든 겁니다. 쭉정이는 알곡에 딱 붙어 있어요. 알곡으로 착각하기도 쉬워요. 그걸 뜯어내는 거예요. 여러분들,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가라지는 이미 제거하시지 않았나 싶고, 이제는 쭉정이를 제거하실 차례가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자연스럽게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향하여 닥쳐오는 결정적 도전이 짐승의 표가 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가 판가름 날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그것은 때가 되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세히 안내를 드릴 겁니다, 그런 시대가 딱 들어서게 되면. 그래서 그때 아마 모든 것들이 결정적으로 판가름 될 것 같아요. 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사실은 굉장히 좋은 시대이고, 예수 믿기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그런 마지막 결정적 과정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계속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잘 지켜가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거예요. 세상이 미워해서 그리스도인은 행위와 상관없이 박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세상의 미움은 결국은 박해나 어려움으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20절에,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예수님을 왜 핍박해요? 선한 일밖에 안 했는데.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결국은 너희 말을 듣는 사람도 나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도 박해를 당했어요. 그분은 선 자체잖아요. 우리가 선한 삶을 산다고 해서 예수 안 믿을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거나 이런 것도 아닙니다. 악한 삶을 산다고 해서 우리 기독교가 전파 안 되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pick up할 자기의 자녀들을 결국은 다 태우십니다. 우리 차 몰고 가다가 pick up 하잖아요. 하나님이 딱 그런 식으로 때에 맞게 픽업하는 자녀들이 있단 말이에요. 다 하나님이 뽑아내십니다. 거기에 여러분들이 속해 있습니다. 이걸 이제 더 깊이, 늘여서 생각하면 골치 아픕니다. 그렇게는 생각하지 말고요.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반드시 이 악한 세상,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 확신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바로 전날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주님이 이겼어요. 이것은 우리도 이기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주님은 게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시고, 잡히셔서 수난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다가, 승천하셔서 지금은 주의 거룩한 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약속의 시간이 어쩌면 우리들의 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세상의 어려움이나 문제나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이겨 가기를 원합니다. 스파포드라는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 있었는데, 이분이 정년퇴임을 해서 다 마무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저 유럽 쪽에 여행을 가려고 배를 탔어요. 그런데 스파포드 이분은 뭔가 좀 할 일이 남아서 교회에서 잠시 일을 보고 가려고 먼저 자녀들과 부인을 보냈습니다. 보냈는데 그 배가 침몰해 버렸습니다. 참 안타깝잖아요. 자녀들과 부인을 잃은 고통을 당하면서 그분이 그 상황 가운데서 쓴 찬송가가 470장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큰 풍파와 환란이 다가와도 나는 주 안에서 마음이 늘 평안하다’ 하고 하나님 앞에 이런 귀한 찬양을 쓴 겁니다. 악한 사단은 여러분들을 넘어뜨리려고 지금도 많은 도전을 하고 있으니까 여러분들 끝까지 이기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뽑았고 택했으니까, 여러분들, 꼭 이걸 기억하시고, 우리는 주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가셔야 합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보다 더 정하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저 공중의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주님의 평안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집어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 이제 너희는 내 것이다. 내가 너희를 지켜준다. 내가 너희를 끝까지 책임진다.” 이 말씀을 꼭 기억하셔서 신앙을 굳건히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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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