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옛말이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감정이 없던 시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좀 어리둥절한 적이 있다.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까마귀가 내 고향에서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알고
고향 까마귀라고 반가워했단 말인가. 여기에는 참 애틋한 우리 조상들의 정서가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떤 이유로든 고향을 등지고 물설고 낯 설은 타향땅에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다가
고향 근처에서 살다 온 사람만 만나도 반갑기 그지없고 까마귀처럼 아무 제약도 없이
훨훨 날아다니는 날 짐승에 빗대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일 게다.
천리타향 미국 땅에 이민 와 살면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향이 그립고 유년시절의 추억이
자꾸만 새록새록 생각나곤 한다.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연, 지연에 얽매이고
나이를 따지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남가주에서도 같은 고향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얼마 전 경상북도 어느 시골 면 소재지인 내 고향 이야기를
나눌 ‘고향 까마귀’를 만난 일은 가벼운 흥분마저 생긴 사건이다.
내 고향 경북 상주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으로 옛날부터 곶감과 누에
그리고 쌀이 유명하다고 해서 삼백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졌다.
지금은 시로 승격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군이었고 그 밑에 18개 면이 소속된
큰 행정 조직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화서면은 교통의 중심지였고 지대가 높아
여름에도 시원한 편이고 겨울에는 엄청 춥고 눈도 많이 오는 지역이었다. 농촌인구는 점점 줄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한 학년에 여섯개 반이 있을 정도였으나 최근에는 학년당
한 학급을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라고 하니 왠지 가슴이 허해지는 기분이다.
내가 이곳 신문에 글을 올리며 경북 상주가 고향이라는 걸 가볍게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같은 교회 어느 권사님이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교회에서 만나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외갓집이 상주라 자주 간 적이 있다는 것이다. 상주가 워낙 넓은 지역이라 면이 다르면
사실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아 반신반의하며 대화를 이어 가다 보니 같은 면이었고
시장통의 약국과 식당 이름도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친정어머니는 거기서 나고 자랐으니
분명 내 학교 선배이실 거라고 하는 것이다.
외갓집에 자주 다닌 정도로도 아직 그 지방 곳곳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머니의 연세를 가늠해 보니 나보다 족히 30년은 선배여서 얘기를 하다 보면
부모님들끼리는 어쩌면 서로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사라도 드리고
고향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한 번 만나 뵙고 싶다고 청했으나 권사님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어린다. 애석하게도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기억을 거의 잃으셨고,
이 머나먼 이국땅 요양병원에서 힘겨운 말년을 보내고 계신다고 한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도란도란 옛 추억을 더듬으며 추억여행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면사무소 담장을 끼고 우람하게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와 그 고장에서 제일 높은
봉황산하고 이어지는 감나무골 모습과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여름에는 미꾸라지를 잡던
무동 저수지도 기억을 더듬으며 얘기를 하다 보면 지금은 기억에서 잊혀진 고향의 퍼즐을
맞추어 낼 수도 있었을 텐데. 얼마나 반가우셨을까.
큰 도시도 아니고 면 소재지 시골에서의 추억을 공유한 고향 까마귀를 미국 땅에서 만날
좋은 기회가 있었건만 한발 늦은 것이다.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살아계시는데도
기억을 잃어버려 고향을 떠올리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그렇지 않아도 연세가 들어 늘 고향을 그리워하셨다는 얘기엔 가슴이 먹먹해진다.
철없던 청년기 한때 시골 출신이라는 게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도회지 출신 또래들에 비해
촌스럽기까지 해 내 고향을 싫어한 적이 있다. 대도시에 나와 살다 보니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아무 볼 것도 없고 산으로만 둘러싸인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전깃불도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고 나서 처음 들어 온 그런 시골에서의 유년시절이
좀 부끄럽기도 했고, 대도시에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공부했더라면 더 좋은 학교에 가고
사회적으로도 더 성공했을 거라는 어쭙잖은 상상도 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환갑을 지나 노년의 길목에 접어들어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살다 보니
내 고향이야 말로 안온하고 따뜻한 어머니의 품 같은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마음대로 내 나라 내 고향을 오 가지도 못하지만, 그냥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땅에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며칠 푹 쉬고 오기만 해도
이 험한 세상을 다시 살아 낼 힘을 얻을 것만 같다.
그래서 정말이지 고향 까마귀라도 보면 엄청 반가울 거 같다.
미국 땅 여기저기 살고 있을 더 많은 고향 까마귀를 만나보고 싶어진다. 끝.
추신: 이 글도 한 3년 전에 쓴 글입니다. 2021년 [미주 PEN 문학] 19집에 실렸던 글이기도
한데 고향 떠나 살고 있는 회원분들이 많아 공감대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올려봅니다.
첫댓글 고향의 근처라도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글을 읽으며 송삿갓님은 정과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 생각이 듭니다.
고향이 상주라고 하셔서 예전에 방문할 기회가 생길 뻔했습니다. 제 사촌동생이 오랫동안 목회를 그곳에서 하다 이제는 통영으로 사역지를 옮겨서 그 곳을 몇번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랬었군요
상주 참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워낙 보수적인 동네라 목회는 참 어렵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이상한게요~~ 저는 고향이 서울인데도 예전엔 노래방 저의 18번지가 나훈아씨의
고향역 이였었습니다. (그런데 철도회사 일하고 부턴 기차라면 넌더리 그래서 이젠 안부름니다...ㅎㅎ)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씁니다. 고향역은 서울역 인데... 왜 그노래를 부를때 마치 제가
코스모스가 여기저기 피여 있는 어느 시골의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는 착각을 하게 되는지... ^^
독사깟님은 고향이 서울이시군요.
한때는 고향이 서울인 분들을 부러워 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정겹고 아름가운 추억이 있는 시골이 고향인게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독사깟님 엄마가 혹시 깡촌 출신아니실까?… 뱃속에 있을때 엄마가 태교를 시골 스럽게? 하셔서 뱃속서부터 세뇌? 된건 아닐까 ㅎㅎㅎㅎ 입니다
@송삿갓 네 토박이 입니다... 북촌쪽 소격동 이라고... 그런데 없어진것 같아요
@경주애인 그럴수도 있을듯 합니다. 서울인줄 알았는데 치매 걸리시고 나서 부턴... 저도 막 헷갈려요.
동경 이라고도 하고 북경 이라고도 하시고 중국말 일본말 막 하시고...그나라 그시대 노래도
하시며 분명 제평생 본 뷸교 (지금도 어머니 집에 불상들이 많이 있음) 신자 이신데도... 지금은
캐톨릭 신자라며... 가끔 기도하는것 봅니다. 이름이 맥달리나 랍니다. 흐미~~ 지금 현제 딱
16살 쯤 되신 정신 연령이 십니다.
저희 집 뒤 공원에 댕댕이랑 자주 가는데 까마귀를 많이 보게 됩니다.
까마귀가 잔디에서 사람들 떨어드린 것 주워 먹다가 우리 댕댕이가 까마귀를 쫓으니
날라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피하더니 우리 댕댕이를 향해 깎깍 거리니
우리 댕댕이가 무서워 도망쳤답니다. (저도 같이 뜀^^)
한때 한국에서는 까마귀를 재수가 없는 동물로
치부되곤 했지요.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라고 했구요. 댕댕이 덕분에 뛰고 달리는 운동을 하시니 일석이조입니다
안녕하세요? 송삿갓님
제 고향도 상주랍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올라와 많은 기억은 없지만
깻잎 냄새만 맡으면 퍽 퍼드러진 홍시가 생각납니다.
감나무 밑에는 깻잎을 많이 심었나 봅니다..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상주가 감이 많은 지역이지요. 혹시 상주 중에 어느 면인지 기억 하시나요?
@송삿갓 외남면 가막골입니다
진주 정씨만 살았던 곳입니다
@juliajung 아. 네. 외남면이요. 전 화서면.
외서면은 가본 것 같은데.
가막골. 왠지 친숙한 동네 이름이네요.
무슨 ~~골 이 붙은 동네가 많았지요.
2002년도 정수기 회사에서 스폰서를 해주면서 미국 이민을 할 수있게 되었지요. 회사 관리를 하려면 필드업무 먼저 익혀야 하는데 정수기 관리에 필요한 기술면과 지역과 연관된 도로 등의 지리를 익히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미국 생활 경험이 전무했기 꺄문에 한 일년 기술자로서 업무를 예정하고 서비스 일을 하다가 회사 사정으로 6개월만 필드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주로 백인들이 사는 부자 동네의 한인 고객들을 방문했는데 할머니와 일 돕는 라티노 여성만 집에 있더군요. 그런데 필터 서비스를 하는 제 곁에 할머니가 오셔서 계속 말을 붙이며 이것 저것을 묻는 중 고향이 어디냐고 합니다. 경상도라고 했더니 반색을하며 제 아내의 고향을 묻기에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남해 쪽에서 자랐다고 했더이 저조차 고향 사람이라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부자 아들이 효도 한답시고 한국의 부모님을 모셔왔는데 운전이 가능한 할아버지는 매일 노인들 모이시는 곳에 나가 열심히 즐기시는데 할머니는 주변에 말 통하는 이가 없는 곳에서 감옥살이 하고 있노라고 합디다. 사정이 그러하니 한국 사람만 봐도 반가운데 제 처가 고성 사람이라는 말에 저도 고향 사람이 되었더랬습니다. 아직도 그 할머니 짠하네요.
그렇지요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면 그랬을까요.
neweast님은 역이민하셔서 청송에 자리 잡았다고 하시니 부럽습니다. 청송. 글자 그대로
파란 소나무가 많은 깨끗하고 울창한 동네로 기억합니다. 주왕산에 가봤던 기억도 나고요
@송삿갓 추억 소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막상 청송에 와보니 소나무보다 잡목이 많네요. 동네분들 말씀에 일제 시대부터 시작하여 해방 후에도 소나무를 엄청나게 잘라냈답니다. 일제 시대에는 항공기 연료용으로 해방 후에는 목재용으로...
ㅎㅎㅎㅎㅎ 추억소환 좋치요. ㅎㅎㅎ
근데 새라는 새는 다 적군이랍니다 공기총조차 소지를 못하게 해놔서 떼거지로 무지막지 다니며 박살을 냅니다 ㅎㅎㅎ
까치.까마귀. 물까치 이놈들이 최고 문제랍니다
그렇군요
농사짓는 사람들한테는 참 성가신 존재들이지요.
고향 까마귀가 까치처럼 보이네요. 제가 새의 자태를 잘 구별할줄몰라서요. 상주 단감이 너무 맛있어 보이네요.
선인장님
사진은 까치 맞습니다
까마귀 사진보다는 까치 사진이 나을거
같아서 인터넷에서 퍼 온겁니다.
상주가 감이 유명하지요
정들면 고향이라고 해서
저는 고향이 참 많습니다 .
본적은 경남 창녕
자란 곳은 대구
서울남자 만나서 서울로...
서울에서 산 역사가 제일 오래인데도
말의 억양은 경상도 대구스타일.
경상도식 영어발음때문에 어디가서 입도 벙긋 안하고 벙어리 노릇했습니다 ㅋ.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소식이 올거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까마귀는 고향이라고...
교통수단이 발달하기전에
새들이 먼곳을 날면서 혹시나 고향쪽을 지나오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런 말이 생겼을 듯 ~ㅎㅎ.
능금꽃님하고도 족보 조사하다보면 아는 사람
나올듯 합니다 ㅎㅎ
상주하면 감이 맞죠? 까마귀 와 홍시인가요? 아님 단감?
어머니 고향이 포항이지만 저는 서울이라 제가 뛰어놀던 곳은 이제 너무 바껴서 알아볼 수 없지요. 그래 송삿갓님의 향수가 부럽습니다!!
네. 감이 유명하지요.
상주가 곶감 주 생산지이지요.
감나무에 감을 다 따고 나서 한 두개는 꼭 남겨두는 게 전통입니다. 소위 까치밥이지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어릴적 동네에나 밭에 감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엄청 많이 먹은 기억이 납니다
10 여년전에 상주에 놀러갔었는데... 그 때 경천대.. 영화세트장, 자전거박물관등으로 관광객이 서서히 몰리는 시작한 때였지 싶습니다.
'감나무' , 자랑스럽고. 한국감도 아주 달고 맛나고.. ( 제가 좋아하는 음식, 감 그리고 고구마 )
겨울 감나무아래 눈.. 쌓인 마당에서
제가차기, 널뛰기등 하는 그림이 엽서나 크리스마스카드에 등장했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양한 내용과 주제의 글 올려주셔서 읽는 즐거움이 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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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칭찬의 글 올려주시니 큰 힘이 됩니다
이곳 절친 부부가 상주 태생이지요. 저는 서울 태생이라 그런지 억양이 귀에 익숙치 않아 처음에는 무슨말 하는지 이해가 힘들었어요. ㅎㅎ
낙동면? 옛날엔 깡촌이였다고. 전기도 안들어오고 검정고무신만 신었다고... ㅎ 공부하러 읍에서 유학했다는 친구 ㅋㅋ
한국 다녀오면 집에서 재배하는 곶감도 갖다주는 친구입니다.
전 서울이 고향이지만 이젠 버지니아가 고향이 되었습니다.
아.네. 낙동면 알지요.
우리 고향 말씨가 꽤나 촌스럽습니다.
그리고 우리 동네는 면소재지 바로 옆인데도
국민학교 4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지요.
미셀님 버지니아 제2의 고향에서 행복한
생활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