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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시 등단. 1982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종교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인도철학과 박사과정 2013년《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제 34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 시집『세상의 모든 최대화』『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가 있음.
황유원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민음사 2015. 12 제34회 <김수영 문학상>
[책소개]
”긴밀하게 돌아가는 초현실적 상상 기계
최대한으로 솟아오르는 감각, 정밀하게 쏟아지는 이미지
제3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가 출간되었다.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데뷔하여 남다른 사유의 깊이와 언어적 발랄함으로 주목을 받아 온 황유원 시인의 첫 시집이다. 이 시집은 근래 가장 첫 시집다운 첫 시집이며 가장 의미심장한 시집이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시집이 될 것이다.
[편집자 리뷰]
■ 솟아오르는 감각
몸속에 팽이를 돌려 놓고 서서히 거기빠져들어 본다 -「달팽이 집을 지읍시다」에서
황유원의 시편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해서 가장 큰 것으로 나아가며 몹시 거대한 것을 놓아두고 매우 미세한 것을 발설한다. 자칫 혼란한 요설로 비칠 수 있는 이러한 작업 태도를, 황유원은 단단한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두려움 없이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행하고 있다. 시인은 일상적 풍경을 서술하며 난데없이 돈키호테의 풍차가 되길 소원한다. 텅 빈 운동장에 비가 내리는 일에서 완전한 소멸을 발견한다. 심지어 빵 조각에 달라붙은 개미에게서 지옥의 풍광을 잡아채기도 한다. 무엇으로든, 무엇에서부터든 감각은 발생하며 그것은 상상의 영역 바깥에까지 솟아오른다. 팽이의 윗면에 그려진 문양이 팽이의 운동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미지가 되는 것처럼 스스로 팽이가 되어 버린 시인의 손끝에서 하나의 감각은 솟구쳐 올라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원래와는 다른 것, 원래보다 많은 것, ‘원래’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 하염없이 나아가는 미지의 것으로.
■ 총칭되는 파노라마
마당은 공룡 인형들로 무너질 듯하다. 한때 지구의 주인이었던 것들이 이제 작은 고무 인형이 된 채 마당을 걸어다니다 이렇게 문득 정지해 있는 것이다. 누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 -「공룡 인형」에서
한번 솟아오른 감각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다른 차원의 물질처럼 세계를 부유하며 온갖 이미지를 생성해 낸다. 이미지는 다층적 의미를 만들고, 넓게 펼쳐진 의미망은 해석의 욕구를 통제한다. 황유원의 시는 한 세대 앞선 선배인 2000년대 젊은 시인의 영향을 받았지만 시를 어려움 혹은 소통불가능성의 영역에 방치하지 않고, 되레 시의 앞섶을 잡아 멀리 끌고 간다. 해석의 가능성을 멀리 에두르지 않았으며, 풍부하게 길어지는 시에도 리듬의 긴장감을 바짝 쥐고 있다. 또한 250페이지가 넘는 시집의 물리적 볼륨감만큼 품고 있는 세계의 폭이 무한정하다 .황유원의 시는 공룡의 화석처럼 지구 곳곳에 시추되어 그 뜨겁고 시커멓고 필수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다가, 공룡의 멸망을 불렀던 외계의 운석처럼 기이하고 압도적인 충격을 던진다. 또한 공룡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끼류처럼 우리 세계의 곳곳에 내려앉아 끈질긴 시적 생명력을 뽐낸다. 그리고 현시대의 다족류마냥 믿을 수 없이 활달하게 거처를 옮겨 다닌다. 제34회 <김수영 문학상>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시는 이토록 길고 깊으며 멀고 가까운 파노라마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 세계가 바로 황유원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이다.
■ 심사평에서
관념이 아니라 현상의 운동성으로 존재의 심연과 높이를 끊임없이 열어 보려고 하는 끈질긴 리듬. 한 점에서 시작해서 큰 무늬가 퍼지고, 그물이 펼쳐지듯이 그 무늬들의 꿈틀거리는 육체가 하나의 음악처럼 세상을 감싼다. -김혜순(시인)
비의적이며 묵시적 언어가 여타의 종교성을 벗어나 신성성 자체로 나아가고 있다 -조연호(시인)
얼음의 밑바닥을 흘러가는 물결처럼 적막하고 견고한 시 세계를 전편에 걸쳐 유지하고 있다. 사념적인 요소 역시 날 것으로 엉뚱하게 등장하여 시 세계를 망쳐 놓지 않고 낱말 하나하나의 내부로 스며든다. -서동욱(시인, 문학평론가)
■ 작품 해설에서
여기 새로 탄생한 조선어 연금술사가 있다. 그 혀는 랭보의 혀를 닮았다. 옛날에, 쇼팽이 나타났을 때 슈만이 그렇게 했던 전통에 따라 모자를 벗을 것. (……) 그에게는 죽는 시늉하거나 아픈 척하며 군중을 모은 기존의 작태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활달했다. 모든 랭보들의 특징은 징징대지 않는다는 것. 부채 의식 없이, 급가속으로 상상의 세계를 야금하는 대장간은 우리 시에서 차려져 본 적이 별로 없다. -성기완(시인,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
작품 해설 │ 성기완조선어 연금술사 통관보고서 218
황유원 시인의 첫 시집이다. 두 페이지 이내의 시는 없고 거의 모든 시가 세 페이지가 넘는 아주 두꺼운 시집. 글자보다 소리로 가득찬 시집. 해설을 쓴 성기완 시인의 말을 빌리면 이 시집에서 ‘소리는 텅 빈 전체의 유일한 존재증명이면서, 동시에 커넥터.’
시인은 수줍게 어느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시의 긴 길이가 곧 영감의 증거라고 느낍니다. 긴장감을 포기하더라도 유창한 리듬은 꺠고 싶지 않거든요.”(현대시 3월호, 181쪽)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미지와 그 중심을 이루는 리듬감 덕분에 하나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키워드를 꼽자면 ‘비, 소리, 음악, 겨울’.
*** 팽팽한 긴장감 주는 전개방식/ 소설을 읽는 듯 지루하지 않아
2013년, 한 문예지에서 그의 시를 처음 읽었다. 신인문학상 등단작이었다. 전자기타를 싣고 가는 기차에 대해, 풍차의 거대한 육체미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거침이 없었다. 맛있는 말의 향연 속에 깊이 배어 있는 그의 사유를 읽고 또 읽었다. 하루 이틀이 아닌 여러 날이었다. 고백하자면 질투심이었고 동경이었다. 절대 앞질러 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이었다. 그때 나는 막 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질 때였다. 그가 황유원이다.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2013년 문단에 나온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이번에 첫 번째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를 발간했다. 뿐만 아니라 이 처녀 시집으로 제34회 김수영문학상까지 수상했다.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의 무한한 상상력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 같다. 보들레르는 그의 책 <파리의 우울>에서 산문시를 '리듬도 각운도 없이 음악적이며, 혼의 서정적 약동에, 몽상의 파동에, 의식의 소스라침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친, 어떤 시적인 산문'이라고 정의했다. 황유원의 시는 지극히 운문적이며 반복적임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의 이 말이 떠오른 것은 사소한 낱말 하나하나가 가지는 거대한 산문적 힘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책 제목인 '세상', '모든', '최대화'라는 낱말은 이미 그의 사유가 얼마나 깊어질지 어디까지 뻗어나가고 싶은지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에서는 허기가 느껴진다.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끊임없이 바닥까지 내려가도 도대체 채워지지 않는 허기, 그리고 멈추지 않는 혼잣말. 이젠 끝일 거야, 생각하면 거기서 한 발 더 내려가고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곳에서 다시 소곤소곤, 잘 들어 봐, 저기 얼굴이 있지? 저기 우리가 있지? 그래, 내 목소리는 저기 납작 엎드려 있잖아 아니 저 루마니아의 텅 빈 운동장에 있을 지도 몰라 하고 말을 하는. 그래서 황유원은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이고, 우리는 페르시아 왕처럼 무조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시는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전개방식으로 한 편 한 편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그 단어들이 부딪히거나 어우러지면서 새롭게 연상되는 무수한 사유와 공간이 또 다른 즐거움을 만들어 주기까지 한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서동욱은 황유원의 작품들을 얼음의 밑바닥을 흘러가는 물결처럼 적막하고 견고하며 사념적인 요소 역시 날것으로 엉뚱하게 등장하여 시 세계를 망쳐 놓지 않고 낱말 하나하나의 내부로 스며든다고 했다. 몸속에 팽이를 돌려놓고 서서히 거기 빠져들어 보는 것이('달팽이 집을 지읍시다' 중) 그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다. 너무나 무심한 얼굴로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놓고 그 돌멩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미세한 파동과 주위 사물들의 움직임을 나와 세상과 종교로까지 최대한으로 확장시킨다. 나선형으로 선회하기도 하고('새들의 선회연구' 중)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던 소년시절로 돌아가기도 하고('크레파스로 그린 세계 열기구 축제' 중) 폐허가 된 마당에서 공룡이 되어보거나('공룡 인형' 중) 엔터 키와 스페이스 바로 반가사유상을 불러들이기도 한다('초겨울에 대한 반가사유' 중). 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객체가 아닌 주체로 새가 되고 소년이 되고 공룡이 되고 반가사유상이 되는 것이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는 시가 나는 좋다. 머리를 뚫고 나온 손가락처럼(이성복 시인 '무한화서' 중) 몸에서 바로 꺼내야 자신만의 목소리로 파닥거리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황유원의 모든 시가, 심지어 그가 듣는 빌리 홀리데이의 음색이 그리고 어두운 방안에서 홀로 연주하는 그의 기타 소리가 너무나 매혹적이다. 당신에게 그를 소개하고 싶다. 그가 말한 등 푸른 생선같이 차가운 하늘 아래 아니면 키틴질의 밤에 이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를 한 번 펼쳐보시길. 나는, 나의 사랑은, 나의 외로움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스스로를 최대한으로 열어 놓고 혹은 풀어 놓고. (소설가의 평)
시인 서윤후, 황유원 “시와의 마주침”
대화를 읽으면 관측되는 기후
서윤후 시인은 1990년 정읍에서 태어나 2009년 월간 현대시에 등단했다. 올해 첫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을 냈다.
약력으로는 시인의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만난 시인은 약력보다 어려보이거나 나이가 들어 보였다. ‘관측되지 않은 기후’를 시인의 시와 대화에서 읽어내려가 보았다. 첫 번째 낭독한 시는 황유원의 「새처럼 우는 성 프란체스코를 위한 demo tape」, 서윤후의 「오픈북」이었다.
내리막길에서 손을 놓은 자전거의 속도
큰 날개 휘저어
춤을 추는 것처럼
다들 모여 어서
춤구경이나 하라는 것처럼
새들이 도망
갔다 도망
갔다 도망갔고
도망갔다 도망
갔으나
끝내 도망가지지 않는 잡새들
훌훌 휠휠 훨훨
(황유원, 「새처럼 우는 성 프란체스코를 위한 demo tape」 중)
대화를 읽으면 관측되는 기후가 있다. 소나기를 맞지 않았는데, 춥지? 하며 건네는 찻잔 속의 소용돌이, 침묵은 희미해진다. 펼쳐 놓은 표정에 네가 없어 틀린 예보, 체온에 깜박 속을 뻔한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두꺼워진다. 영영 보지 않을 책처럼, 또 만나자는 약속처럼 시작과 끝의 모든 구절은 반복된다.
(서윤후, 「오픈북」 중)
서효인 두 분 다 첫 시집에서 고른 시일 텐데, 이 시를 처음 낭독하는 시로 고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황유원 제가 새를 좋아하는데, 이맘때 새를 보러 많이 나가거든요. 새들이 짝짓기 철이 되면 요란하게 울어요. 3년 전 봄에 새들의 소리를 듣고 이 시를 썼던 것 같아요. 그때도 봄이고 해서 생각이 나 골라 봤습니다.
서윤후 이 공간과는 무관할 수 있지만 이 시를 신도림 빈 브라더스에서 썼습니다. 시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제목을 고친 작품이기도 했고요. 물론 이 시는 헤어지는 의미가 더 크지만, 지금 여기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가까워지잔 의미도 있어서 골랐습니다.
서효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죠. 오늘 주제는 ‘까페에서의 마주침’입니다. 공간과 잘 어울리는 주제인데, 연관해서 최근에 겪은 인상 깊은 마주침이 있었나요? 꼭 카페나 최근이 아니더라도요.
서윤후 저는 카페를 좋아해서 다양한 곳을 다니는데, 제일 좋아하는 카페 중 하나가 이수역에 있는 아트나인이에요. 전 여자친구가 자주 가던 곳이었고 카페를 알게 된 것도 그 친구 덕분이었는데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얼마 전에 시집을 내고 대담을 하는데 거기에서 하게 된 거죠. 여자친구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았는데…… 별로 안 나더라고요(웃음) 마주침이 아니라 헤어짐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렇게 공간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 같아요.
황유원 1월 말인가? 아침부터 눈이 오더라고요. 카페에 잘 안 가는데 ‘아, 이 눈을 보고 느낌을 받고 싶다’ 해서 삼청동에 있는 카페에 갔어요. 창가에 헐벗은 은행나무를 보는데 말벌집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있는 거예요. 지금도 바람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생각나요. 그 자리에서 쓴 시가 오늘 발표할 시입니다. 그게 최근에 일어난 마주침이었습니다.
서효인 황유원 시인은 새, 비, 개미 같은 일상적이고 작은,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두고 스케일이 큰 시를 씁니다. 아까도 말한 벌집 같은 것도 어떻게 시로 승화했는지 궁금해지네요. 질문 하나씩 더 해보겠습니다. 두 분 다 첫 시집을 냈어요. 첫 시집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텐데요.
황유원 시집에 옛날에 쓴 시도 있고 최근에 낸 것도 있는데 옛날에 쓴 시 중에는 꼴도 보기 싫은 게 있어요. 그런 마음 반이 있고요, 반쯤 끝나고 반쯤 안 끝난 느낌이랄까.
서윤후 스무 살 때 등단을 했는데, 학교에서 친구들의 반응은 ‘그럼 김경주, 황병승 시인 만나 봤어?’ 이런 거였어요. 그때는 등단이라는 게 그냥 시를 쓰고 시집을 낼 수 있는 시인이 된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더 많은 걸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책임감이 생긴 건데. 첫 시집을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저에게는 너무 이르게 온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군대에서 행군할 때 저는 출판사별로 시집이 나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민음사에서 나오면 이런 색으로 표지를 하고 책을 펴면 이렇게 펼쳐지겠다, 상상하다 보면 행군이 다 끝나 있었어요. 내고 싶던 출판사에서 첫 시집을 내게 되어서 기쁘고. 지금은 기쁜 마음 슬픈 마음, 만감이 교차합니다.
기타의 목질이 허공에서 축축히 젖어가는 자리
두 번째 낭독으로는 서연후의 「독거 청년」, 황유원의 「전국에 비」로 두 시인 모두 비가 연상되는 시를 골랐다.
나는 집에서도 가끔 나를 잃어버립니다
단 하나의 실핏줄로 터진 얼굴들을 생각하며 창백한 창문을 봅니다 실내에서 유일하게 한 일은 웅크림이라는 도형을 발명한 것뿐입니다.(서윤후, 「독거청년」 중)
어둔 밤, 창 밖으로 들려 오는 자욱한 빗소리 속에서 나는 기타를 치고기타는 허공에 나무 한 그루 심어놓지만기타의 목질(木質)이 허공에서 축축히 젖어가는 자리(황유원, 「전국에 비」 중)
이어 이 시를 고른 이유와 시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날씨, 시집 발간 전 에피소드 등을 들어보았다.
서윤후 자취한 지 팔 년이 되어갑니다. 이 시를 쓸 때는 제 모습을 그대로 쓰자는 게 제일 큰 취지였고, 이 시를 쓰고 제가 좋아하는 시인들에게 칭찬을 받았어요. 개인적으로 너무 감격스러웠고 이 시가 남다르다고 생각해서 가져왔습니다.
서효인 누가 봐도 자취생의 시라는 게 느껴지죠. 저도 좋았습니다.
황유원 오늘 비가 온다고 해서 비 오는 시를 골랐습니다. 가슴이 많이 아픈 시인데, 옛날 여자친구에게 작곡도 해 주고 기타를 쳐 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치다가 틀리면 저는 마음에 걸리는데, 그 분은 그런 게 전혀 없고 기타 치는 것 자체가 너무 평화롭고 좋대요. 이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어요. 한참 뒤에 혼자서 기타를 치다 생각이 나서 한달음에 썼던 시고….. 지금 읽어도 슬프네요.
서효인 구여친 특집 낭독회입니다(웃음) 시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볼게요. 황유원 시인이 김수영 문학상을 받을 때 제가 연락했는데, 나중에 시를 보고 너무 시가 길어서 놀랐습니다. 읽을 때는 시가 에너지가 있고 재밌어서 몰랐는데 물리적으로 시집을 묶으려고 보니까 두께가 상당하더라고요. 기획적으로 길이에 대한 생각이 따로 있었나요?
황유원 염두에 둔 건 있었어요. 민음사 시집 시리즈 첫 번째가 고은 시집이었는데 그거보다 두껍게 내고 싶었어요. 근데 실패했죠. 턱없이 모자라는 걸 보고 좌절했어요.
서효인 서윤후 씨 시집은 동료 시인들이 상당히 기다려왔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더욱 기대되는 시인이기도 한데요. 제목에서도 ‘동생’이 나오는데 언제까지 동생으로 머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시집에서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서윤후 시집의 제목을 정해주신 건 김소연 시인입니다. 제목을 잘 지어주신다고 소문이 나서 10개를 뽑아갔는데 10개 다 별로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나의 연못」이라는 시 구절 중 하나인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을 제안해 주셨는데 마치 제 이름을 불러준 느낌이었어요.
저는 이 ‘동생’을 여기에서 끝내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어려서 등단했기 때문에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 가장 가깝게 지나온 이야기라고 생각을 해서 썼던 거고 이제는 더 이상 어리지 않기 때문에 성장해서 어른이 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서효인 지금 스물일곱인가요? 어리지 않은 나이죠. 지금은 백세 시대가 되어서 청년 기준이 많이 올라간지라 한동안은 젊은 시인 얘기를 꽤 오래 듣게 될 텐데요, 서윤후 시인의 성장을 기대합니다.
시인의 순간
빗소리는 무엇 하나 소외시키지 않았으므로
비로소 간극 없이 이어진 세계 속에서내리는 비가 때리는 온갖 물질들이 내는 소릴 듣고 있었다
(황유원, 「인식의 힘(Notes on blindness)」 중)
황유원 <Notes on blindness>라고 멋진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비 오는 포장마차에서 친구가 이 다큐멘터리를 소개해 줬어요. 시각장애인 신학자 존 헐이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고 나서 카세트테이프에 자신의 일기를 녹음해요. 말 그대로 인식에 관한 내용인데, 다큐멘터리를 보고 바로 시를 썼어요. 제 설명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니 한 번 보기를 추천합니다.
서효인 황유원 시를 보면 시 자체가 거대한 습지 같아요. 시에 음악이라든지 하는 여러 문화적 요소들이 많은데,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인 후에 다 습기로 내뿜는 느낌입니다. 시에 나온 다큐멘터리나 음악 같은 문화적 요소를 찾아보는 것도 시를 읽는 좋은 방법이지 싶습니다.
내일 일기예보도 잘 맞히지 못하는 내가어제의 날씨도 떠올리지 못한다누가 나를 지울 때마다기억을 도난당하고 허기가 진다(서윤후, 「포기」 중)
서윤후 제임스 살터의 『포기』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쓴 시예요. 살아가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게 많아지는 나이를 겪어요.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만 목록을 세웠는데 이제는 하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아져요. 선택을 해야 될 때가 많은데 대체로 하지 않는 방향을 택하는 것 같아요.
서효인 황유원 시인 전공이 흥미롭습니다.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계시는데 소개를 해주시죠. 시인 대 시인으로는 묻기 부끄러운 질문이지만 이번 기회에 여쭤봅니다. 공부하고 있는 내용이 시에 영향을 미치나요?
황유원 영향을 미치죠. 「인식의 힘」에도 보면 반복되는 구절이 변형되어서 나와요. 지루하게 보이겠지만 산스크리트 어 구절이 기본형이 변화되면서 변주되는 식으로 써지거든요. 계속 읽다 보면 이런 시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서효인 존 헐에서부터 시작해서 산스크리트어라고 하니까 굉장히 달리 보이네요. 서윤후 시인은 시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가 있을까요?
서윤후 저는 아이돌 f(x)를 좋아해요. 에프엑스의 독보적인 컨셉과 자기만의 길을 걷는 느낌, 외국 사진작가들에게서 보이는 독보적인 색깔, 이런 것들이 자주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서효인 요새 본인들이 느낀 시적 순간은 무엇인가요?
황유원 고지라 1편 오프닝에서 고지라 소리가 사운드 이펙트로 나오는데, 지금 만드는 사운드 이펙트보다는 뒤떨어지지만 훨씬 독창적인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장갑에 송진을 묻혀 현악기에 긁는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코끼리 소리 등을 섞어서 만든 소리라고 하더라고요. 소리가 착각이잖아요. 우리가 고지라 소리라고 듣는데 전혀 고지라 소리가 아닌 것들로 고지라 소리가 만들어지는 거죠. 그거에 대해서 시를 썼어요. 그게 최근에 느낀 시적 순간입니다.
서효인 본인이 항상 생각하는 것을 순간에서 쫓아 나타나기 때문에 시인에게는 순간이 영원일 수 있어요. 시에서 소리, 음악 등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황유원의 시 세계를 읽는 데 힌트가 될 것 같습니다.
서윤후 외할머니가 제가 시 쓰는 걸 좋아하시고 읽으려고 노력하세요. 명절 외갓집에 갔을 때 외할머니 노트들 사이에 제가 교내문학상 받은 내용이 실린 신문이 밑줄이 그어진 채로 잘 보관이 되어 있는 걸 발견했어요. 그렇게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발견할 때가 시적 순간이 아닌가 싶어요.
이어 독자들이 낭독하는 시간/낭독 독자들은 서윤후 시인이 여행에서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엽서를 선물로 받음
까페에서의 마주침, 시와 마주치는 순간
두 시인의 신작시를 발표하기 전 ‘까페에서의 마주침’을 주제로 다른 시인의 시를 골라 낭독하기도 했다. 황유원 시인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플라멩코 삽화들」, 서윤후 시인은 김행숙의 「유리창에의 매혹」을 꼽았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신작시가 발표되었고 모두 따뜻한 박수로 시에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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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의 시들
풍차의 육체미(18)
그냥 풍차가 됐으면
바람 불면 돌아가다
바람 자면 멈추는
돈키호테도
로시난테도 아닌
그냥 븅 븅
힘차게 제자리를 지키고픈
달려가서 안기고픈 남자의 규모로
븅 븅
잘리지도 않아서 영원히 자를 수 있는 공중을 썰며
븅 븅
호프나 한잔하고 부리는 호기로
정오 조금 지난 시간에 벌써 뒤풀이를 계획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일단 목부터 축이고 볼 때
그 목구멍들을 통해 넘어가는 힘으로
븅 븅
네가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보고 반한 육체미
븅 븅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보고 매달려 돌아가고 싶던 힘찬 팔
난 지금 혼자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을 비운 후 장충단공원에 앉아
문자나 주고받으며 당신들의 잡담을 엿듣고 있을 뿐인데
여긴 풍차가 하나도 없는데
난 갑자기 풍차가 되고 싶고
븅 븅
뭐라도 잡고 돌리고 싶고
뭐라도 븅 븅 돌아갔음 좋겠는데
여름바람에 감사하며
담배 피는 영감탱이들을 피해 부채 부치고 있는 할머니의
고약한 표정도 예쁘게 봐줄 수 있는
풍차가 됐으면
븅 븅
꽃받 오가는 꿀벌들의 날개 소리를
딱 100배만 확대한 음량으로
븅 븅
위풍당당
힘차게
난 버스도 안 타고 있는데
갑자기 내려서 좀 걷고 싶은 기분이고
식당에서 보던 야구경기를
여기저기 계단에 앉아 손에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이 이어서
봐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고
계속되는 경기
븅 븅 븅
계속되는 안타
붕 부웅 붕
계속되는 향기
부웅 부우웅 브응
소리를 녹음해줄 순 있지만
모양을 녹화해줄 순 있지만
지금 이 향기를 첨부해줄 순 없네
내가 풍차가 아니라서
힘찬 팔이 아니라서
마음에 드는 사실 몇 가지
부우웅븅 븅 븅
풍차는 없어도
딱 몇 초만
풍차가 됐으면
새처럼 우는 성(聖) 프란체스코를 위한 demo tape(25)
내가 다가갈 때마다
푸드득
새들이 도망갔다
참새 비둘기 까치
다 나를 피했다
있는 힘을 다해
두루미 청둥오리 수리부엉이
훨훨 훨훨 훌훌
황망한 어궤조산(魚潰鳥散)
성 프란체스코여
그대 새의 음성
투명한 예각들 부서져내린다
돌을 쪼아 조각내듯
그러나 돌멩이 하나 상처 입히지 않고
돌 틈으로 꽃 몇 송이 밀어내는 힘으로
산산조각나는 공중
번개처럼
번개가 지나가고 난 뒤의 말짱한 하늘 같은 것들 남겨두고서
공중분해되는 새들
나무 속에 숨어서
도처에서 울려퍼지는
문자메시지 오는 소리처럼
부서지는 문자들의 빛나는 꼭짓점
형태 없는 소리들에게 거룩한 이름을
새들의 자세
새들의 종종걸음
새들이 거는 전화
마이크만한 새들이 떨어뜨리는 노래
군함새 저어새 해오라기
얼마간 비축해둔 힘으로
훨훨 훌훌 훨훨
겨자를 잔뜩 친 새 날개 스시
식초를 잔뜩 친 새 성대 냉면
푸드덕 파다닥
자유를 찾은 것처럼
곧 도살당할 것처럼
소쩍새 마도요 수리부엉이
귓구멍을 두들겨패는 성질머리
불현듯 시작돼서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꾀꼬리 찌르레기 섬휘파람새
내리막길에서 손을 놓은 자전거의 속도
큰 날개 휘저어
춤을 추는 것처럼
다들 모여 어서
춤구경이나 하라는 것처럼
새들이 도망
갔다 도망
갔다 도망갔고
도망갔다 도망
갔으나
끝내 도망가지지 않는 잡새들
훌훌 훨훨 훨훨
비 맞는 운동장 (41)
비 젖은 운동장을 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방울의 비도 피 할 수 없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빗줄기 하나 피할 데 없이
누구도 달리지 않아 혼자 비 맞는 운동장
어쩌면 운동장은 자발적으로 비 맞고 있다
아주 비에 환장을 한 것처럼
혼자서만 비를 다 맞으려는 저 사지의 펼쳐짐
머리끝까지 난 화를 식히기 위해서라면
운동장 전체에 내리는 비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벌서는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벤치에 앉은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아예 하늘 보고 드러누운 사람이 되어 비를 맞다가
바닥을 향해 엎드려뻗쳐 한 사람이 되어 비를 맞아 버린다
혼자 비 맞고 있는 운동장, 누가 그쪽으로
우산을 든 채 걸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작은
구멍 같아 보이는 사람이 벌써 몇 바퀴째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비 맞으며 뛰놀진 않는 운동장
웅덩이 위로 빗방울만 뛰노는 운동장에서
어쩌면 그건 그냥 운동장의 가슴에 난 구멍이
빗물에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공중을 달려온 비들이
골인 지점을 통과한 주자들처럼 모두
함께 운동장 위로 엎질러지는 동안
고여서 잠시, 한 뭉텅이로 휴식하는 동안
우산은 분명
운동하고 있었다
혼자서 공 차고 노는 사람이
혼자서 차고
혼자서 받으러 가듯
비바람에 고개 숙이며 간신히 거꾸로
뒤집어지지 않는 운동이었다
상하 좌우로 쏟아지는 여름의 십자포화를 견디며
마치 자기가 배수구라도 되겠다는 양
그 구멍 속으로 이 시의 제목까지 다 빨려 들어가 버려
종이 위엔 작은 구멍 하나만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자신을 소멸시키겠다는 듯이
가까스로 만들어낸 비좁은 내부 속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소릴
집중시키고 있었다
레코드 속 밀림(59)
1
예술은 두 종류,
차가워지거나 뜨거워지거나
목이 쉬면 빛이 바래는 가사가 있고
휘발된 노래 밑바닥에 반정부군처럼 살아남아
지구 반대편 지원군을 불러모으는 가사가 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변함없는 사실은
마음을 다하면
판은 돌아가는 거
2
봄밤, 짐승들이 합창하는
레코드 속 밀림의 고요
식지 않은 피를 싣고서 최대한 무리하지 않게
어슬렁거리는 무리들
이것이 바로 열대우림에서 맞는 봄밤
따뜻한 비를 맞는 호랑이들의 피부에 핀 착한 꽃들이 질 때
그들을 달래며 저어보는 부드러운 밀림서
호랑이는 두 종류,
찢어지거나 불타오르거나
공룡 인형(98)
마당은 공룡 인형들로 무너질 듯 하다한때 지구의 주인이었던 것들이이제 작은 고무 인형이 된 채 마당을 걸어다니다 이렇게 문득정지해 있는 것이다누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더 이상 잡아먹지도으르렁거리지도 못하고마당에 늘어져 있는 공룡들가끔 누가 와서 가지고 논다그들에게 목소리와 동작을 부여하는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가 음성공룡의 상상력에 대해서라면 생각해본 적 없지만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자신들이 작고 말랑말랑한 고무 인형이 되어아이의 몸 빌어 움직이게 될 날이 올 줄은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까마당에 저녁이 오고지겨워진 아이가 공룡들 내팽개친 채 자릴 떠나면그들은 쓰러진 채 고용하고다시 일어설 줄 모른다같은 어둠이지만한때는 이불처럼 덮고 자던 어둠이이제는 모든 움직임을 잃은 인형들을 덮어주기 위해 천천히마당 위로 깔릴 때아이는 조금 늙어 있고바람 한 번 불자중생대부터 있어 온 은행나무 앞마당에 떨어진다은행나무는 자신이 은행나무 인형이 되는 꼴을 보게 될 날은아마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하고마당은 이 온갖 것들로 인해 잠시폐허가 되어 흘러갔고오래전이라고도오랜 후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초겨울에 대한 반가사유(119)
내가 여기서 가만히 팔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저기 식탁 위
에 놓인 물병이 흔들,
리고 있다면 저 흔들림은 나만의 흔들림
에서
이 세상의 흔들림
까지.
찬 마룻바닥 위
벽에 걸린 가을 풀 거꾸로 말라가는 시간 속에서
반가사유상의 왼발바닥이 새하얘진다
창밖에는 길어온 물항아리 하나 하늘에 떠 있다
흔들흔들
출렁이다가
엎질러지는 날개들
박살나는 물항아리의
예리하고
빛나는 펼쳐짐으로
넓어지는 접촉면
발에서, 무릎으로
골반으로 가슴으로
번져오는 추위 속에
마침내 시려오는 머리.
반가사유가 뭐 별건가
시원한 바람 한 줌, 십 분여의 뻥 뚫린 환기보다 못한 것
엔터키 때리듯 벌떡!
일어나 창 쪽으로 달려가려다 말고
한 칸,
또 한 칸 스페이스바 누르듯
저린 발 뗀다
금동여래입상이 뭐 별건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하늘색이 된 하늘
창을 열고 그 앞에 선 자라면 누구라도 잠시, 확장될 것
얼굴은 활주로 같은 것
그 위를 무허가로 비행하는 표정들
자주 착륙하는 낯익은 표정들과
한번 이륙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표정들 속에서
금동여래입상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반가사유상의 사유가 새하얘지고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금동여래입상의 차이는 오로지 넘버뿐
스페이스바는 누르고
엔터키는 때린다
거꾸로 할 수 있다면
날 놀래킬 것
그럴 때마다 촛불들이 쓰러지는 저녁바다
불바다가 되는 수평선 수직선
경계선 따위
그 온갖 선(線)들
저 불이 밤바람에 옮겨붙으면, 저 불이 더 불어나면
안 된다
안 되지만
뭐 안 될 것도 없다
그럴 때마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멀리 해안도로에서 타이어 타는 냄새
물이 불어나듯
넘치는 불의 계절
물불 같은 거, 가리질 말 것
손가락도 없는 눈으로
잡을 수도 없는 구름이나 오래 매만져보는 이 늦가을, 마지막 날 아침
스페이스바 길게 누르고 있는동안 만큼
반가사유상의 사유가
엎질러지고 있는 저 하늘
여래입상 따위
엔터,
엔터,
거기 털썩
주저앉혀버려
세상의 모든 최대화 (124)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그러나 약은 치료하기도 하는 것,
병명보다 더 많은 치료제를 잔뜩 싣고 가던 기차가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
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올 때의 기분이란
그 기분 누가 알겠냐마는 환자들만은 알지,
환자들은 꿈속에서 거기까지 걸어가 그 약을 모두 주워 먹은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깨어나 기차의 차가운 몸을 이해하지 넘어진 채 몸을 뒤로 돌리던 기차를 이해하며 몸을 정확히 당신들 반대편으로 돌리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오늘밤 그들의 기도가 기차처럼 길어져 결국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돈 기도들의 속도가 기차를 조금씩 허공에 뜨게 해 마침내 이륙한 기차를 바라보며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려 복부를 강타당한 남자처럼 철로가 신물을 토할 때 신물 위로 기타가 쏟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누가 알까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꿈에서 엎질러진 아이나 알까
아무리 길게 써도 저 레일에는 모자랄 것이므로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고요한 밤, 캐롤을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린 아주아주 거룩한 밤, 깨진 전구를 뛰어넘어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산타를 엉망진창으로 때려눕히고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기타를 모두 수리해야 하는 수리공의 마음은 망가진 리프(riff)들을 밤새 고치고 있는 기타리스트밖에 모르지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나?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본 적 있니!
구겨진 리듬을 잘 펼치면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무엇까지 덮어볼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최대한 붉은 와인을 박스째 주문해
뱃속에 와인을 만 박스나 싣고 가는 기차가 오늘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누가 이해하겠냐마는
사랑을 한 박스나 마시고도 제대로 서 있는* 조니 미첼은 이해하지, 어쩌면 술집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다 이름을 아무 데서나 콸콸 쏟아버리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이해하지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
* Joni Mitchell, 〈A Case of You〉중에서.
** Amy Winehouse.
인벤션(129)
아주 깊은 기타 한 소절 정성 들여 친 후
거기 고립되기 좋은 밤이다
그 속에 밤새 눈이 내리게 한 후
철저히 나 혼자 되어
밤새 눈 내리는 소리나 듣게 하기 좋은 밤
거기 어울리는 건
망가져 땔감이 된 클래식 기타 타들어 가는 소리
불길에 공중이 녹아들어
열차처럼 기이-ㄹ게 휘어지는 소리밖에 없고
거기 낡은 양은 냄비 하나 올려놓고
방금 퍼 온 새하얀 눈 한 웅큼 올린 다음
마지막으로 나의 깊은 침묵을 얹기 좋은 밤이다
고립은 참 안 좋은 말이고
안타깝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우리에게 때때로 필요한 건 고립이어서
고립과 짝이 되어 이렇게도 한밤 지새워 볼 일인데
창밖으로 눈으로 만든 양 떼들이 온다
사람과 하나도 안 똑같은 눈사람이
눈과 끝없이 하나 되어 가는 밤
숨죽인 채 발견되는 메모 같은 것
그 메모의 여백 같은 눈송이들이 한 줄 두 줄 울다
한 장 두 장 울기도
아예(상), (하)권으로 울려 버리기도 하는 밤
고립되지 않았으면 낼 수 없었을 소리
오로지 마음만을 반영하는 악기의 한 소절이
두꺼운 고서(古書) 한 권의 냄새로 깊어져 방 안 가득
퍼졌다가
조금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무슨 빛이나
소금처럼
조금씩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다
한 번쯤 혼자 조용히
죽어 보기 좋은 밤
나는 구체적인 사실관계들로부터
몰래, 빠져나가 본다
항구의 겨울(147)
항구의 겨울, 항구한 겨울은 뺄셈이 불가능한 세계. 마냥 쌓이기만 한다. 쌓여서 오직 잊힐 뿐. 항구의 겨울, 항구한 겨울 앞에서 우린 입을 다문다. 함구한 하늘이 속으로 울고 내리던 눈이 녹는다. 내리던 눈이 녹다 말고 공중에서 춤을 춘다. 눈의 속도는 늘 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항구의 겨울, 겨울의 항구는 공중에서 천천히 짓이겨지는 춤을 마냥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다 자신을 밟고 가는 연인들을 기습적으로 미끄러트리고는 항구의 겨울, 한 구의 시체라고 읊조리면서 유쾌한 관객들처럼 웃어 보이기도. 그래도 웃음이 뺄셈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믿으며 그 믿음을 얼린다. 항구의 겨울, 항구한 마음. 몇 해 전에도 분명 비슷한 걸 얼렸었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 부두에 모여 떨고 있던 선박들의 빈자릴 쳐다봤지만, 결국 모든 것은 덧셈이겠지만, 영원히 영을 꿈꾸며. 최대한 동그랗게. 차가운 얼음을 얼린다.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술잔 속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첩첩산중 (203)
나 거기 내 눈과 귀를 두고 왔네
내가 두고 온 눈이 바다를 보고
내가 두고 온 귀가 파도를 듣고 있다니
그것들은 아직 내게 매달려 있는데
나는 거의 그날 해변가에 서 있던 펜션이 되어가네
지금은 새벽이고
그토록 가시적이고 전면적인 해무라니
수평선 너머 어디 불이라도 난 줄 알았어
바다가 자신을 공중으로 띄워 올려 바람에 날려 보낸 것들이
말 그대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지
그날
양양의 하조대
바위 위에 붙어 있던
수령 200년 된 소나무 한 그루
파도 소린 저녁부터 들려왔고
새벽에도 들려왔고
아침에도 들려왔네
자꾸 뭘 두고 온 것만 같았는데
두고 오길 잘했지
핸드폰 충전기는 안 들고 가길 잘했네
핸드폰이 꺼지자 며칠째 바다와 너와 나…… 그리고 파도 소리만이 남았지
나는 이곳에 다른 여자와 온 적이 있고
너는 이곳에 다른 남자와 온 적이 있지만
이제는 우리 둘이 이곳에 온 적도 있게 된다
1층이었던 우리는
잠시 2층이 되었다가
붕괴되는 건물처럼
다시 1층으로 나란해졌고
네 엉덩이에 치던 물결도 모두 멎었지만
기억은 엉덩이 같군
엉덩이라면 누구의 엉덩이라도 푹신할 것이다
첩첩산중 속
하나의 기억
몇 개의 연합된 기억처럼
그 안으로 쑥, 빠져들었다
다시 쑥, 빠져나올 것이다
손으로 갈기면 철썩철썩 소리를 내고
붉은 손자국을 가질 것이다
강원도의 첩첩산중 끝에서 만난 절대수평
첩첩산중은 참 좋은 말이야
중첩될수록 더욱 깊어지고
고요해지고 있었으므로
첩첩산중으로 기어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네가 내 어깨에 고개를 얹을 때마다
거기 놓이는 건 삶의 무게였고
삶이 널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네가 두고 온 눈과 귀가 삶의 무게로 흔들리고
네 눈과 귀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삶의 무게로 바다는 흔들리겠지
첩첩산중에서 기어 나올 때 차창 밖 어두운 산맥이 하늘로 높이
치켜든 엉덩이가 하릴없이 내뱉던 하품
구멍 주변에 난 털을 하염없이 쓰다듬어주는 기분으로
하나는 또 다른 하나로 이어지고
어차피 다 들고 올 수도 없는 거
두고 오길 잘했지
들고 온 것도 마저 여기 두고
다시 더 많은 걸 두러 가야만 하고
더 많은 곳에 더 많은 걸 두고 오다 보면
결국 모든 걸 두고 가야할 때가 오는 거겠지
그러니 너무 아끼지 마
나를
빈 나뭇가지 위에서 놀다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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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일상과 더위를 피해 산으로 바다로 계곡으로 휴가 다녀오셨는지요. 떠날 때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마음속에서 더 놀겠다고 떼쓰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요.
바닷물 출렁이는 눈과 파도 소리 물든 귀는 지금 어디 있나요? 안개가 들어 올리는 투명한 산, 수평선이 끊임없이 보내주는 파도와 놀던 마음은 어디에 두었나요? 게으름 피우며 더 놀겠다고 매달리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산이나 계곡에 혼자 놔두고 오셨는지요. 그래서 먹고살아야 하는 몸이 다시 사람과 일에 시달려도 한결 가벼워지지는 않았는지요.
첩첩산중에서 헤매느라 자유로우면서도 막막한 외로움, 망망대해에서 떠도는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고독은 계속 그곳에 두고, 일탈이 그리울 때 가끔 낯설게 만나기 바랍니다. /김기택(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