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발견
지구가 돌고 있다면 지구의 자전 때문에 정면에서 초속 463미터의 속도로 맞바람이 불텐데 바람에 날려가지 않겠는가? 바람은 나의 밖에서 부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밖을 본다. 인간은 언제나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갈릴레이의 관성은 안이다. 힘은 두 가지다. 외부 작용이 아니면 내부 관성이다. 다른 사람이 외부 작용을 말하니까 갈릴레이가 내부 관성으로 받아친 것이다. 초속 463미터 맞바람이 외부 작용이면 관성은 지구 내부의 중력에 잡힌 관성이다.
진리의 발견은 쉽다. 남들이 외부를 말할 때 내부로 받아치면 된다. 남들은 무조건 외부를 말하게 되어 있다. 내부의 구조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답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 천재의 통찰은 내부를 정하는 안밖의 경계를 어디에 긋느냐에 있다.
천재의 통찰
모르는 사람은 외부를 보고 아는 사람은 내부를 본다. 옳고 그르고 간에 마키아벨리가 처음으로 정치시스템 내부를 들여다 본 사실에 식자들은 점수를 준다. 하느님께 기도를 한다거나 부처님께 팔만대장경을 바치는 것은 내부를 보는 자세가 아니다.
근대과학과 봉건시대를 가르는 기준선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권력을 도덕과 종교에서 분리한 최초의 근대인이다. 근대인과 봉건인은 문명과 야만처럼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이들 사이에 물리적인 제압은 가능하나 수평적인 대화는 불통이다.
근대인과 봉건인은 시선의 방향이 다르다. 보는 방향이 다르면 대화할 수 없다는게 본질이다. 과학인과 주술인은 시선의 방향이 다르다. 같은 나라에 살아도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내적 가치를 보는 사람과 외적 가격을 보는 사람은 공존할 수 없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대략 허튼소리지만 처음으로 마음 내부를 들여다 본 사실은 평가할만 하다. 마음 내부에는 집단 무의식이 있고 동물적 본능이 있다. 마음은 호르몬 민감도다. 결국 뇌과학이 답을 내겠지만 프로이드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 내부를 봤고, 케인즈는 구체적인 정책 내부를 봤고, 내시균형은 더 구체적인 의사결정구조 내부를 봤다. 아담 스미스는 차를 봤고, 케인즈는 엔진을 봤고, 존 내시는 핸들을 봤다. 내부를 본 사람과 더 내부를 본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정상의 사유
세상이 복잡하지만 처음부터 복잡했던 것은 아니다. 상호작용을 거치며 점차 복잡해져 가는 것이다. 천재의 업적은 세상이 복잡해지기 전에 사건의 초기 발단 부분을 공략하여 이루어진다.
천재라고 해서 용 빼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천재는 정상부를 건드린다. 정상은 지극히 단순하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이것이 아니므로 저것이다. 천재의 직관적 판단은 방향이 다르다.
아인슈타인의 사유는 대단한 것인가? 성과가 대단할 뿐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텐징 노르가이는 에드먼드 힐러리가 시키는대로 그냥 서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선택지는 둘이다. 위가 아니면 아래다. 아래로 내려가면 실패하고 위로 올라가면 정상이다. 단지 위를 보기만 하면 된다. 아인슈타인은 단지 위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아래는 답이 없으니까.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사유하기는 쉽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인데 이것이 아니므로 저것이다. 물질의 속성이 답이 아니므로 시공간이 답이다. 순진함으로 무장하고 방향을 틀기만 하면 된다.
단순성의 힘
세월호 침몰의 원인은 내부의 밸런스가 깨진 것인가, 외부의 잠수함이 받았는가? 답은 안이다. 외부 작용이 원인이라면 금방 드러난다. 외부에서 작용해도 내부에 받아주는 부분이 있으므로 역시 안을 살펴봐야 한다.
밖은 환경이 간섭하므로 복잡해져서 우연에 지배된다. 안은 좁다. 비좁은 내부에 압력이 걸려 부분들이 결합되므로 단순해져서 필연에 지배된다. 천재의 직관은 밖에서 안으로 방향을 틀어 구조의 필연을 보는 것이다.
안이 보이지 않으면 안을 만들면 된다. 한 방향으로 몰아 좁은 공간에 가두고 강하게 압박한 다음 안을 보면 된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음악이든, 영화든, 문학이든 마찬가지다. 구조론은 안을 보는 도구다.
직관의 힘
인간이 좌우대칭은 아는데 안밖대칭을 모른다. 중심과 주변의 대칭을 모른다. 주변에 없는 것은 중심에 있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사유의 방향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 등잔 밑이 어두운 이유다.
미로실험을 하는 생쥐는 가다가 길이 막히면 방향을 바꾼다. 인간은 길이 막히면 화를 내며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다.' 하고 음모론을 꺼내든다. 인간은 때로 생쥐만 못하다. 방향전환을 못한다.
갈릴레이는 방향을 바꿨을 뿐이다. 밖에서 안으로. 뉴턴은 방향을 바꿨을 뿐이다. 밖에서 안으로. 아인슈타인 역시 방향을 바꾸고 있다. 밖에서 안으로. 양자역학 역시 밖과 안의 방향전환이다.
갈릴레이가 안을 봤더니 관성이 보였다. 뉴턴이 안을 봤더니 힘의 법칙이 보였다. 아인슈타인이 안을 봤더니 광속의 불변이 보였다. 양자역학 역시 안을 봤더니 물리량의 불연속성이 보였다.
직관은 안을 본다. 모든 위대한 발견과 도약의 공통점은 내부를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모든 오류와 실패는 외부를 보고 있다. 안밖의 경계를 정하는 훈련으로 직관력을 키울 수 있다.
방향전환
세상은 구조로 설명된다. 설명explanation은 밖ex-으로 풀어낸다plan는 뜻이다. 이는 안에 감추어진 것이 있다는 말이다. 구조는 내부에 감추어진 의사결정 메커니즘이다. 그러므로 모든 설명은 구조의 설명이어야 하며 구조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의사결정 메커니즘 내부를 설명하지 않고 에너지라는 말로 퉁친다. 에너지energy는 안en에서 일ergy한다는 뜻이다. 설명explanation과 의미가 반대된다. 구조는 에너지를 조립하고 해체하는 방식이다. 에너지는 구조를 설명하지 못해 둘러대는 말이다.
세상은 방향전환이다. 모든 의사결정은 방향전환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전제는 나란함이다. 방향전환에 필요한 동력은 나란함을 버려서 얻어진다. 나란함은 차원이다. 차원을 잃을 때 나란함이 깨진 어긋남의 힘이 관성력이다. 관성이 우주의 엔진을 돌린다.
관성은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차원의 나란함을 잃는 만큼 보상된다. 물질은 한 번 방향을 틀때마다 다섯 번 차원을 잃는다. 에너지는 메커니즘 안에서 계와, 압력과, 대칭과, 축과, 지렛대를 만들어 방향을 튼다. 우주는 나란함을 도구로 사용하므로 조절된다.
인류가 구조를 모르는 이유는 구조가 밖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을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인류문명 1.0은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내부를 바라보는 시선을 얻어 인류문명 2.0으로 전진해야 한다.
메커니즘
잘난 사람은 잘난 맛에 산다. 내세울게 없는 사람은 진리에라도 매달려봐야 한다. 나라가 망하고, 경제가 망하고, 연애가 망해도 진리는 견뎌내기 때문이다. 세상이 당신을 이토록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데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동전은 양면이 있는데 인간은 한쪽 면만 본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 주는 자가 아니라 받는 자, 내부논리가 아니라 외부논리, 동의 논리가 아니라 정의 논리, 에너지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아니라 물질의 전달단위만 보려고 한다.
보이지 않으므로 보지 않는 것이다. 정상에 서지 않았으므로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는 방향전환이 있다. 위를 올려다 보던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 보게 된다. 시선의 방향만 바꾸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