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梅月堂 선생전先生傳 /파평坡平 윤춘년尹春年 저著
선생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시습時習이요, 자는 열경悅卿이니
강릉江陵이 본관으로 고려 때의 시중侍中 김태현金台鉉의 후손이다.
증조는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낸 김구주金久桂요, 조부는 오위부장五衛部將 김겸간金謙侃이며,
부친은 충순위忠順衛 김일성金日省이요, 어머니는 장씨張氏이다.
선생은 선덕宣德 을묘년乙卯年(1435년 세종17년)에 낳았는데 生而知之의 바탕이 있어서 3살에 능히 시를 지었다.
유모乳母 개화開花(유모의 이름)가 보리 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읊어 말하기를
무우뢰성하처동無雨雷聲何處動 “비도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황운편편사방분黃雲片片四方分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진다. ”
하여서 사람들 모두가 신통하게 여겼다.
5살에 영묘英廟(세종)께서 승정원承政院에 부르시어 시로 그를 시험한 뒤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내려 주시며
제 스스로 가져가게 하니 선생이 각기 그 끝을 연이어 끌고 나감에 사람들은 더욱 기특하게 여기었다.
길에서 늙은 부인이 두부豆腐를 주며 먹도록 하니 곧 시로 읊기를
품질유래량석중稟質由來兩石中 “품질의 온 것은 두 돌 틈인데
원광정사월생동圓光正似月生東 둥글고 빛나는 것 바로 달이 동쪽에서 오르는 것 같구나.
팽룡포풍수막급烹龍炮風雖莫及 용龍을 삶고 봉鳳을 구운 것에는 비록 미치지 못하지만
최합두동치활옹最合頭童齒豁翁 가장 대머리지고 이 빠진 영감에 합당하다.
하여서 이에 이름이 온 나라에 진동하여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五歲라” 하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
나이 21살 때인 경태景泰 乙亥年(1455년 단종3년)에 三角山 中興寺에서 글을 읽었는데 서울에서 돌아온 자가 있었다.
선생은 즉시 문[戶]을 닫고 나오지 않은 것이 사흘이어서 하루 저녁에는 느닷없이 통곡하며
그 서적을 다 불사르고 거짓 미친 체하여 더러운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하였다.
이에 머리를 깎고서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혹은 양주楊州의 수락사水落寺에서 있기도 하고
혹은 경주의 금오산金鰲山에 있기도 하여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일정한 곳이 없었다.
여러 번 그 호號도 바꾸어 청한자淸寒子·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 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세조世祖께서 운수천인도량雲水千人道場을 원각사圓覺寺에서 베풀었는데 여러 중 모두가 말하기를
“이번 모임에 설잠雪岑이 없을 수 없다.”
하므로 임금이 드디어 그를 부르라고 명했는데 왔다가 스스로 절 뒷간에 빠졌으므로 여러 중이 미쳤다고 하여 쫓았다.
그러나 선생의 공부는 더욱 깊고 명성도 더욱 멀리 들려서 道를 묻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찾는 것이 千百을 헤아렸으나 선생은 일부러 미친 체하여 경망하고 조급한 행동을 하고 혹은 나무나 돌로 치려고 하였으며 혹은 활을 당겨 쏘려고도 하여 그 뜻을 시험하였다.
그 제자에 선행善行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를 섬기기 여러 해에 비록 초달을 맞더라도
끝내 버리고 가지 아니하므로 어떤 이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善行이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전에 산에 있을 때에 작은 바가지에 물을 담아 놓고 부처 앞에 꿇어앉아
아침부터 밤까지 3일이나 하였으니
禪定함이 그 같으면 곧 그가 부처이라, 내가 마음으로 심복하므로 떠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선생이 詩學에 대하여 餘事라고 했지만 그러나 격格이 높고 생각이 오묘하였다.
멀리 보통 생각 밖에 뛰어나 흥을 보내고 회포를 말하는 것도 마음대로 붓을 내둘러 종이 다하는 것을 한정으로 삼았다가 다 되면 곧 불태웠으므로 세상에 많이 전하지 못하였다.
성화成化 신축년辛丑年(1481년 성종17년)에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제문祭文을 지어서 그의 조부·부친에게 제사지내고 이내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고 여염闊閣으로 나다니다가 하루는 술을 마시고 저자를 지나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만나니 불러 말하기를 “네놈은 의당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 혹은 달밤에 이소경離騷經을 외다가 곧 통곡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 아내가 죽자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가
홍치洪治 계축년癸丑年(1493년 성종 24년) 2월에 홍산현鴻山縣 無量寺에서
죽었는데 유언으로 화장하지 말라 하였다.
선생은 평일에 늙고 젊은 두 화상을 손수 그렸고 이어서 스스로 찬贊을 지어서 절에 남겨 놓았다.
그와 종유從遊하던 선비는 홍유손洪裕孫 여경餘慶과 남효온南孝溫 백공伯恭이요,
그 제자 중[僧]은 도의道義·학매學梅이었다.
세상에서는 선생이 환술幻術이 많아서 능히 맹호猛虎를 부리고 술[酒]을 변해서 피[血]가 되게 하고
기운을 토해서 무지개가 되게 하고 오백나한五百羅漢을 청해 온다고 했지만 또한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