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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제7대 국왕.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휘는 유(瑈), 자는 수지(粹之)이다.
1. 대군 시절
아버지 세종이 충녕대군이었던 시절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이듬해인 1418년에 세종이 왕위에 즉위하였지만 5세 무렵까지 사저에서 자랐다. 이유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세종의 즉위 이후 잇따른 국상 등으로 적절한 시기를 잡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인 문종은 일찍이 입궐했고, 바로 밑의 동생인 안평대군부터는 세종의 즉위 이후 출생하여 태어날 때부터 궐에서 자랐기에 그와 형제들의 가장 큰 차이를 사저에서 지낸 기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 곁에서 떨어져 뛰놀며 자란 것이 그의 탁월한 체력과 운동 신경, 자유분방한 성품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입궐한 후 1428년 대군에 봉작되었고, 진평대군(晉平大君) → 함평대군 → 진양대군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최종적으로 받은 군호는 수양대군. 그래서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수양대군이라 흔히 불리지만, 왕자 시절은 진양대군으로 불린 시절이 1433년 이래 12년간으로 제일 길었다. 수양으로 군호가 바뀐 건 한글 반포 1년 전인 1445년(세종 27년)이다. 그리고 왕위에 오를 때까지 10년 동안 수양대군으로 불리게 된다. 그래서 휘나 묘호보다도 왕자 시절의 군호가 더 유명한 임금이다.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1417년 태어나 1418년 세종 즉위 이후 1441년 세손이 태어날 때까지, 그는 조선 왕위계승 서열의 잠재적 2순위였다. 즉, 1421년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위계승 서열의 절대적 1순위가 된 형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뜨거나 혹은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그 다음 왕위는 세자의 형제들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고, 그 경우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은 서열상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물론 형제계승의 경우 양녕대군 - 효령대군 - 충녕대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열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나, 병치레가 잦고 결혼 후 세자빈만 두번 바꾸고, 후궁을 셋이나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14년 동안이나 아들을 보지 못한 형을 보면서, 적어도 수양대군 본인은 내심 왕좌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만 24세가 되던 1441년 세손이 태어나면서 그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한참 혈기왕성하던 시기에 겪은 이 경험은 그의 이후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2. 형과 동생 사이에서
성군에게서 나온 무인 기질의 아들로 평가받지만 세조는 문(文)에도 뛰어났다. 활쏘기를 좋아했음에도 "책을 다 읽기 전에는 활을 잡지 않겠다."라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와 형이 워낙 걸출해서 상대적으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피리를 잘 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귀신이 궁궐에 나타나 피리를 불자 문종과 같이 있던 수양대군이 "이 아우(= 수양대군 본인)의 피리 실력이 조선에서 제일이라 자부함에도 저리 잘 불지는 못합니다. 이는 필히 귀신이 부르고 있음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단순한 자뻑은 아니었는지 악기를 연주하자 세종이 칭찬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내용도 있다. 다만 수양대군의 재능을 곧이 곧대로 믿기도 어려운게 사실 수양대군의 재능을 칭찬하는 기사는 대부분 세조실록에 나와 있는 기록으로 이 기록을 믿는다면 13살짜리 애가 노루를 7마리나 잡는 등 상식선에서 믿기 어려운 기록들이 많다. 그 기록 중에 실록에서 가장 과장이 많은 총서 부분에 가장 왜곡이 많다는 세조실록이라는 것도 문제다. 오히려 세조실록 기록과는 반대로 세종실록에는 도리평에서 낙마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 세조실록에 나오는 대로 엄청나게 무예에 뛰어났다고 보기는 사실 힘들다. 거기에 능력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적 능력에서는 동생 안평대군도 뛰어났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형 문종의 경우 아버지에 버금가는 완전체로 측우기와 화차를 설계한데다 화포 전문가에 직접 진법을 만들 정도로 군사 전문가였다. 세종이 와병 중일 때는 대리청정을 맡아서 국정을 잘 처리해 세종후반기 마지막 10여년을 실질적으로 조선을 통치하면서 능력을 발휘했으며 세종 사후에도 토목의 변으로 혼란스러운 동아시아 정세속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글씨도 컴퓨터로 프린트한 듯 정갈하지만 글씨를 잘 쓰는건 형 문종과 동생 안평대군도 마찬가지였고 안평대군은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결론적으로 수양대군은 여러 면에서 뛰어났지만 칼질 외에는 뭘 하든 형은 한 수 위에서 놀고 동생들도 거기에 버금갔기에 비교당하는 둘째였다. 그런데도 결국은 이 사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존재감이 있는 입지를 굳힌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나 한비자가 극찬하는 이상적인 군주형에는 미달했던 게 사실.
시기도 시기지만 수양대군의 능력이 형제들 가운데 각별하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진짜 능력이 각별하게 뛰어났던 인물은 문종으로 장자이면서 세종 못지않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셋째 안평대군도 정무를 담당하는 과정 속에서 훌륭한 실력을 보였으며 세종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능력이 뛰어났다. 수양대군은 체격은 뛰어났지만 능력 부분에서는 형과 동생보다 딱히 뛰어나지 않았는데, 잘했다는 무예 부분도 개인적으로 무술을 잘했다 수준이지 지도자로서 군사를 다루는 능력은 왕자 시절에는 두각을 드러낸 게 없었다. 왕이 된 후에도 세조의 군제 개편으로 조선군이 심각하게 약체화된 사실을 생각하면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으며, 여진족 정벌도 세조의 군사적 무능함을 신숙주, 남이 등의 실무자들이 커버해준 것에 가깝다. 결국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장자가 능력마저도 모든 부분에서 뛰어나다보니 애초에 수양대군이 끼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두고두고 조선의 왕권이 신권에게 견제를 당하게 되는 큰 빌미를 제공해준 실책을 범하게 된다. 본인의 의도와는 반대로 후대에 소위 군약신강의 상황을 연출한 것.
3. 야심만만한 왕자
3.1. 공신 이유
세종 치세에는 세종의 아들 가운데 문종 다음으로 공이 많은 아들로 알려진 세조이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석가모니의 공덕을 <석보상절>을 한글로 지어 아버지에게 바치자, 세종은 감동하여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특히 무예에 무척이나 능하여 무예에 상대적으로 서투른 형에게 우월감을 느꼈는데, 아버지의 전례를 생각해서 자신이 세자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듯.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왕자 시절의 대표적 일화를 소개하자면, 겨울날에 사냥을 갈 때 가벼운 여름옷 차림으로 사냥을 했다고 하며 일부러 늙고 병든 말을 골라타서 말이 지쳐서 넘어지려 하면 말 위에서 뛰어서 착지하는 묘기를 아버지와 형에게 일부러 보여줬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소맷자락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양팔을 크게 휘둘러 소매를 펄럭거리며 걸어다녔다고 한다. 부왕 세종대왕은 이를 두고, "너 정도의 힘을 지닌 사람은, 마땅히 이런 옷을 입어야 될 거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걸 두고 "너는 힘이 세니까, 이런 행동에 불편한 옷을 입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 기록은 세조실록의 총서에나 나오는 거고 정작 세종실록에는 낙마한 기록이 그대로 나온다.
아무튼 문무겸전의 인상이 강하기 때문인지, 세종의 뒤를 이어 문약한 문종 대신에 문무를 겸비한 세조가 즉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는데, 사실 문종은 절대 문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문종이 학문을 중시하고 무예 면에서 세조보다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문종의 기록을 읽어보면 건장한 체격에 무예에도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마저도 확실치 않다.12 문종이 유약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건 그저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몇 년만에 병사했다는 이유 하나 뿐이지, 그 외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절대 학문 하나에만 몰두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문종의 무예가 세조보다 딸렸다는 게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이는 개인적 무력만 보고 말한 것이지, 문종은 군사적 측면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다. 병법서인 <동국병감>이 쓰여진 건 문종의 지시였으며, '문종화차'라 불리는 화차의 개량도 문종이 직접 설계한 것이며 당시 중구난방이던 환도의 규격을 법으로 제정한 것 또한 문종이었다. 또한 진법에도 조예가 깊어서 고려 때의 진법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오위진법' 또한 문종 때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과학 기술과 화약에 박식하여 장영실의 도움을 받아 측우기도 제작하는 등 성리학에만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왕은 중앙이나 후방에서 백성과 군사들을 통치하고 지휘하는 역할이다. 학식과 정략이나 지혜가 풍부해야 하고 냉철함과 신료들의 의견을 듣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자리이다. 당시 천만이 되는 백성들을 거느리는 상황에서 단순히 무예가 뛰어나 적들을 쓰러뜨리는 무장형 존재가 아니다.
3.2. 찬탈을 위한 처세
문종이 세종 후반기에서부터 병치레가 잦았고 결국 즉위 3년 만에 사망한 것은 당뇨가 심각하여 몸이 너무 쇠한 아버지 세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 데다 양친상을 너무 충실하게 지내는 등 무리했기 때문으로 원래는 병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문종이 심각한 병을 자주 앓았던 데다, 문종마저 일찍 사망을 할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웃어른이 없는 상태인데 손자는 너무 어리므로 세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다.
게다가, 세종대왕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장유유서의 순서를 거슬러 왕이 된 자신에 이르기까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약한 것을 매우 걱정해서 장자 계승을 통해서 왕위 정통성을 강화하기를 절실하게 원했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이건만, 적장자 계승 원칙이 왕실에서부터 계속 지켜지지 않는다면 조선이라는 국가의 명분과 건국 철학은 흐지부지되며 싸그리 무너지는 것이다. 세종은 왕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회 질서를 우려하여 문종에게 왕위를 승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문종은 아버지의 생각을 단지 자기 아들이 왕이 된다는 것 말고도 조선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했지만, 수양대군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후계자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걸출한 형이 있는데 둘째가 그럴 생각을 가질리가 만무하다.
문종은 병치레가 잦았던 것 이외에는 국왕으로서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고, 세종의 치세 마지막은 사실상 문종의 치세에 가까울 정도로 8년간의 대리청정으로 실무 경험도 풍부했다. 의외로 간과하는게 대리청정은 단순히 업무대행 정도가 아니라 세자를 사실상 다음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종이고 사도세자의 경우는 예외에 가깝다. 세종의 입장에서는 명분뿐만 아니라 능력을 보더라도 굳이 세자를 갈아치울 이유가 없었다. 세종은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대리청정을 위한 첨사원을 설치하고 남면하고 앉아 조회를 받으며 1품 이하 관리는 모두 신(臣)이라 칭하도록 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군사권까지 전담하는 등 형 문종은 수양대군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정통성과 아버지의 신뢰를 받았다.
수양대군은 사극과 달리 형 생전에는 존재감을 거의 철저히 감추고 엎드려 있었다. 정말 영화, 드라마에서처럼 만만해 보이는 형이었으면 조카에게 했듯이 형을 압박하여 옥좌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심지어 단종 즉위 이후에도 한동안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올 정도로 저자세였다. 영화 관상이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오만방자하게 굴었다면 김종서와 대신들이나 단종이 수양대군을 살려둘 리는 없었다. 다만, 아주 찍소리도 못 낸 것은 아니어서 이미 야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몇 차례 말했던 바도 있고, 도첩증이 없어서 체포된 승려를 멋대로 풀어주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형이나 조카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하는 미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적어도 절대 남한테 자기 속을 보이다가 화를 자초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수양대군의 성격은 자신 스스로를 숨기고 교활하고 음흉했다고 봐야 한다.
앞에 언급한 사건들 역시 문종이 동생의 신세한탄 한번 들어주고 만다는 정도로 관대하게 넘어가준 것이 컸다. 이때 문종이 날려버리겠다 마음먹었으면 수양대군은 꼼짝없이 숙청당했을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돌발 행동들은 자신의 세력 과시나 야심 표출보다는 적당히 사고뭉치 이미지를 만들어서 문종의 권위에 도전할 마음이 없다고 어필하기 위한 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인 양녕대군의 사례와 막강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문종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다. 실제로 이게 어느 정도 먹혀들었는지 형 문종은 동생의 야심을 다소 과소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울고불며 단종을 보필하는 김종서와 그외 대신들에게 우국충정의 절대 충신인 양 난리를 쳤는데, 사실 이 충신 코스프레는 단순히 가식으로 치부할 것은 아니었다. 문종이 오래 산다면 수양대군은 형과의 관계만 생각했으면 됐다. 계속 나대고 다녀도 형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늙어죽을 때까지 마음 편하게 유유자적 보낼 수 있었다. 이는 아버지 항렬 대였던 세종과 양녕대군의 관계를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사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가시적으로 어린 조카와 야심만만한 삼촌이라는 관계로 설정될 수 있었고 여기서 수양대군이 살짝만 야심을 보여도 바로 중신들의 견제를 받는 형국으로 발전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왕자들도 마찬가지.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첫째 아들, 즉 장자이기 때문에 세종이 장자 계승을 바랐던 것과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단종이 즉위한 상황에서 함부로 야심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역모다. 설령 본인이 진짜 역모를 계획하지 않았다 해도, 어디서 누가 역모 비슷한 걸 꾸미다 걸려 한 번이라도 이름을 언급하면 그대로 끝장이다. 결국 수양은 어물거리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죽을 바에야, 어느 정도 야심이 있는 한 차라리 진짜 역모를 계획하자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3.3. 문종 독살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문종의 종기 또한 수양대군이 키웠다는 말이 있다. 전순의라는 문종의 어의가 종기 치료법과는 정반대의 치료법을 쓰고, 활쏘기 등 혈기가 들끓는 활동을 삼가지 않게 하는 등으로 문종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의가 무능했냐고? 전혀 아니다. 그 유명한 <의방유취>의 공저자이며, 그가 지은 <식료찬요>에서는 지금 보아도 매우 선진적인 온실을 설명해 놓았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문종 독살설이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신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그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조선 시대 임금의 치료를 전담하던 의관들은 왕이 사망하면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죄목으로 탄핵되는 것이 관례였다. 전순의와 함께《의방유취》를 저술한 노중례도 중궁과 수양대군의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위가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고, 효종이 사망하자 의관 신가귀는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단종 원년에 관례대로 의금부에서 전순의의 죄를 논했음에도 그에 대한 단죄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였다.
단종 1년(1453년) 1월 4일 전순의, 조경지, 전인귀 등은 방면되고, 전순의는 내의원에 다시 출사한다. 탄핵된 지 채 7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에 불복한 신하들은 방면과 내의원 출사가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됐다. 그럼에도 상소가 끊이지 않아 전순의에 내린 처벌은 ‘내의원에 출사하지 말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전순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므로 가산을 몰수, 처자를 관노로 영속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종 2년에는 고신과 과전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전순의는 완전히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이후 전순의의 출세는 더욱 놀랍다. 세조 1년 계유정난과 더불어 개국공신이라 하여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세조 2년에는 첨지중추원사로 임명된다. 세조 3년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벌되면서 적몰된 가산(家産)을 받았으며 세조 7년에 행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조 10년에는 종 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반면, 여기에 반론이 존재한다. 문종의 죽음은 독살과는 관계없고, 본인의 스트레스 + 건강 악화에 따른 결과라는 것.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는《KBS 역사저널 그날 - 계유정난 편》에서 문종 독살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에 사망하여 삼년상을 치른 뒤, 이어 1450년에 세종이 훙하여 다시 삼년상을 치른 탓에 기력이 쇠하였을 것이라고.
상주로서 장례를 치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상주가 되어 삼일장을 치르고 난 뒤에는 온 기력이 다 쇠한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고 건강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사흘만 장례를 겪어도 이런데 이걸 3년 내내 겪고 1년 후에 또 3년을 겪는다면 항우장사라도 버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문종 역시 풍채가 좋고 무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으나 총 6년이나 상주 노릇을 이어서 한다는 건 누구라도 몸에 무리가 갈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양자가 모두 결합한 결과일 수 있다.
4. 계유정난과 즉위
(세종대왕이 재위하던) 왕자 시절부터 야심을 드러냈다. 만약에, 문종이 오래 살았거나 하다못해 수렴청정할 어른이라도 있었다면 정변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태종 때의 이화처럼 어디까지나 종친의 수장으로 정치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종의 죽음 후에는 그의 일반적인 정치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세조는 한명회나 홍윤성, 권람 등을 심복으로 삼은 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못지않게 야심찬 동생 안평대군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물론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도 하나의 세력이다.
이렇게 3각 구도를 이뤄서 대치하던 상황에서, 엽기적이게도 안평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세력과 연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1대 1대 1의 구도가 이제는 1대 2의 구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고명대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세력이 더 강했다. 만약 고명대신-수양대군-안평대군의 과두제 구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단종이 친정을 하면서 기존 세력을 흡수, 와해시킬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단종의 재위는 안정적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접근한다면 유력 종친인 안평대군은 스스로 과두제적 균형을 깨뜨림으로써 제 명을 재촉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 측에 가까웠던 소장파 세력들이 수양대군 세력에 암중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실질적 저력으로 보면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적을 타개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급기야는 1453년 10월 10일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척살하고 동생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후에 정권을 잡았으며, 2년 뒤인 1455년 윤6월에 단종에게 선위받는 형식을 취해 조선 제7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일각에서는 "세력에서 뒤쳐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너무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포장하지만 근거없는 얘기다. 할아버지 태종이 피바람을 일으키면서까지 금지한 사병을 기르고, 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삼아 일을 추진한 것을 생각해보면 궁지에 몰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그가 그냥 양녕대군처럼 실권없는 왕실의 어른으로 편하게 살고 싶었다면 자신의 세력을 포기하고 알아서 엎드려서 조용히 살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야망이 있으며, 자기가 가진 힘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과 5번째 동생 금성대군이 꾀한 단종 복위 운동이 있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단종도 죽음을 맞게 되어서 그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아무리 능력있는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피로 얼룩진 군주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사에서 친족을 가장 많이 죽였던 왕이다. 기본적으로 이복 형제들과 조카는 물론 동복 형제들까지도 죽였다. 폭군 연산군과도 비교가 안 된다. 광해군이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소성대비를 폐했다고 인조반정이 발생한 것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안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 꽤 친했다는 사실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성삼문은 정난공신으로 3등 공신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수충정난공신으로 사간원 좌사간 대부에 임명된다. 이 때는 1등 공신 12명, 2등 공신 11명, 3등 공신 20명이다. 이렇게 43명이다. 또 세조가 즉위하는 좌익공신에도 3등 공신에 이름이 올랐다. 떨거지들이 포함된 경우에는 머리수를 튀기기도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가지치기를 한 경우에는 1등 7명, 2등 12명, 3등 25명 해서 44명 밖에 안된다. 어느 정도냐면 정인지가 2등 공신이고, 정창손과 이징석 등이 3등 공신이다.
성삼문이 단종의 입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말도 있지만, 같은 사육신 중 한 명인 유성원이 공신 책봉문을 쓰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숨어있다가 들키는 바람에 억지로 써야했다는 야사(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에 수록된 내용) 등을 보아 당시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소장파'들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한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즉위 후에 또 한 번 공신을 책봉했는데 3등공신이 2천명 이상이다. 거기다가 박팽년도 매우 높이 평가해서 그를 회유하려고 많이 노력했다지만... 그 결과는 모두들 아는대로.
5. 치세
5.1. 즉위 당시
즉위했을 때 39세였다. 이는 건국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던 초대 태조 이성계(58세)와 2대 정종(42세)에 이어 역대 조선의 국왕 중에서 3번째로 고령이다. 4번째는 37세에 즉위한 형 문종(3살 터울)으로 이후 태종(34세), 광해군과 경종(33세)이 뒤따른다.
5.1.1. 법전 편찬과 공신의 부상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을 명하여 시작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이미 세조 13년(1467년)에 《병술대전(丙戌大典)》이라고 불리는 《호전(戶典)》과 《형전(刑典)》은 이미 완성이 되었으나 그 외 법전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느라 성종 즉위 후 15년이 지나서야 최종적으로 반포될 수 있었다. 전 왕조 고려가 6전식(六典式) 법전을 완비한 바가 한번도 없음을 고려해 보면 한반도 왕조 최초의 국가 공인 성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은 세조 최고의 업적이라 해도 무방하다. 한편으로는 태종처럼 6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걷는 만큼 쓴다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원칙아래 효율적 정부운영을 위한 재정(수입)-예산(지출) 시스템인 공안(貢案)-횡간(橫看)과 같은 여러가지 제도를 재정비해서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다. 다만 그 과정에서 시국과 정치를 토론하는 경연도 폐지하고 집현전(集賢殿)도 문을 닫아버리고 대신 왕의 직속 기구인 예문관을 강화시켰는데 이는 단종 복위 운동의 후폭풍이었다. 그래서 집현전의 기능이 예조로 넘어갔다가 다시 성종 대에 부활되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弘文館)이다.
6조 직계제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반대급부로 공신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탓에 세조 사후 이 공신들이 훈구척신이 되어 왕권을 견제하게 된다. 이것은 정조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신권을 억눌러서 왕권을 강화해놨는데 후대의 왕들이 이것을 유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돼서 오히려 친위 세력들이 권신이 되어 도리어 왕권을 제약하게 된 것이다.
5.1.2. 악법 폐지
폭군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민생에 꽤 관심이 깊었다.
세종대왕 때의 나름 악법인 "수령 고소 금지법"이 폐지가 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 수령 고소 금지법을 시행한 근본적인 이유는 지방 토호들을 견제하고 중앙 집권을 시행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지방관들이 토호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있을 정도로 토호들의 세력이 강했으며 중앙에서 나온 지방관을 트집 잡아 고소하는 경우가 허다했다.30 그러나 이 즈음에는 호족들의 세력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유향소를 폐지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등, 직접적인 방법을 쓰려한 것으로 보인다. 행차 때마다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의견을 들은 것도 이때였다. 스스로 롤모델로 삼은 당태종처럼.
그러나 민생은 나아질 기미조차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부리는 측근 세력들인 한명회, 봉석주, 홍윤성 같은 이들의 패악질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가서 민심을 살피면 무엇하는가? 자신이 부리는 측근들의 온갖 부정 부패와 비리를 눈감아 주고 있는데, 이들은 예사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았고,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쳐 냈어야, 이들의 수탈이 멈추고 민생이 좋아질텐데, 정작 이들의 비리를 다 눈감아 주면서 나가서 민심을 살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파리들만 잡고 주위의 호랑이들은 전혀 잡지않은 셈이다.
또한 수령고소금지법을 폐지하였으나 지위를 보장할 대책은 생각하지 않아 수령의 권위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수령이 지방세력에게 삥을 뜯기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된다. 결국 이 법은 성종시기 다시 부활하게 된다.
5.1.3. 진관 체제
군사적으로도 업적을 남겨서, 문종의 5위 진법 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의 편제를 바꾸었으며 지방에 전국 55개의 진을 설치하여 진관 체제를 마련했다. 물론 이는 세종대왕 때부터 정비된 군사 제도의 결과인 면도 있다.
군사를 정비하여 1460년에 신숙주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크게 들쑤시고 돌아왔고, 이시애의 난 직후에는 남이, 강순 등으로 하여금 태종 - 세종대왕 시대부터 조선 변경에서 골치를 썩인 이만주를 참살하는 개가를 올렸다.
정해서정과 관련한 기록 일부의 내용은 이렇다. 토벌 작전 당시 세조는 이만주가 몸을 숨겼을 가능성이 높은데 괜히 서둘렀다가 명나라에게 조선이 실수를 해서 놓쳤다는 트집을 잡힐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으며, 그렇기에 조선군이 출동에 신중을 기할 것을 명했다. 세조의 명대로 조선군은 진격 속도를 늦춰 이만주의 소굴에 신중하게 진입하였는데 정작 당시 이만주는 본인의 병력을 타지로 원정 보낸 상태였고 본인은 참모 이하 일족들과 함께 무방비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조선은 태종 시절부터 조선 국경에서 악행을 일삼던 이만주를 제거하는 대성과를 매우 손쉽게 거둘 수 있었다. 작전 종료 후 강순은 장계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만주 이하 200명을 죽이고, 이후 명나라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으므로 철군합니다."였다.
다만 이러한 세조의 북방민족 강경책은 이전부터 수많은 여진족들이 자진해서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던 여진족 관리 체계를 크게 뒤흔들었고 또한 실전을 통해 다듬어진 정예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하여 조선의 병력이 방치된 채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한계도 보인다. 덧붙여 진관체제는 지방 군사력 통제로 인한 부작용이 심했으며 적군의 대규모 침공에는 불리했던 허점이 많은 군사 체제였다.
5.1.4. 모범
자신 스스로의 꿈이자 정통성이 아닌 자신의 의지만으로 된 임금으로서의 책임감과 열정이 대단히 강해서, 재위 기간 중 매우 정열적으로 일을 했으며 몸가짐을 검소히 했다. 왕이 왕궁에서 무명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또한 그는 술 파티를 아주 좋아했는데, 자신은 술은 좋아하나 한 여자만, "중전 정희왕후 윤씨만 끔찍히 사랑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신하들이 "전하, 이제는 후궁 좀 들이시는게 어떻겠사옵니까?"하고 청하자 "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점잖게 거절했다. 실제로 세조의 여자는 중전 정희왕후와, 후궁으로는 반정 전에 맞이한 근빈 박씨와 소용 박씨 뿐이다. 근빈(謹嬪) 박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본관이 다르다고 하니 박팽년의 누이일 가능성은 없다. 대신 후궁이 적어서 그런지 자식도 적다.
5.1.5. 소용 박씨 일화
그런데 그 후궁들 중 소용(昭容) 박씨는 덕중이라는 이름의 여인인데 아들도 일찍 죽었고 중전인 정희왕후만 바라보는 애처가 세조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외로워진 그녀는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에게 연달아 구애하다 사단을 낸다.37 소용 박씨는 궁인 출신은 아니고 세조가 잠저 시절 첩으로 맞이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내관에게 구애 편지를 보냈다가 기겁한 내관이 세조에게 고해 특별상궁으로 강등당했고, 다시 잘생긴 걸로 유명한 왕족 구성군에게 구애 편지를 보냈는데 제정신인 구성군 역시 덕중과 불륜을 저지를 리 없어서 두 번째 구애 편지 역시 바로 세조에게로 갔다. 첫번째는 관대하게도 덕중의 불륜을 눈감아준 세조였지만 덕중이 정신을 못 차리고 또 구애 편지를 보내자 세조는 급기야 조정신료들에게 자신의 가정사를 적나라하게 까발려버린다. 결국 분노한 세조에 의해 편지를 배달한 내시 둘과 소용 박씨 모두 죽임을 당한다. 또 기생관도 독특하여, 기생들을 아예 여자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기생들이 술자리에 나올 때는 아예 얼굴에 분칠을 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5.1.6. 기타 치적
교과서나 두산 백과, 위키 백과 등에 나오는 공식적인 주요 치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특히 실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6조의 권한이 세조 이후 크게 상승하였고, 귀신도 부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던 삼정승의 위세를 경계하여 도승지와 삼정승이 서로를 견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중국처럼 왕까지 유린할 수 있는 강력한 권신이 나타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이시애의 난(1467년)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농민들을 괴롭히는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조선의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국방력 신장과 신무기 개발에 지속적으로 힘써 호적(戶籍), 호패제(戶牌制)를 강화해 한국사 거의 최초로 전국적 인구 조사40에 성공했고 최초의 조직적인 지방 군사 지휘 체계인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처음으로 방위 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다. 군제(軍制)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에 거진을 설치했다.
북방 개척에 힘써 1460년(세조 6년) 북정(北征)을 단행, 외교에 매우 유능한 신숙주와 특출한 군사 능력과 특유의 잔인성(?)을 가진 홍윤성으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을 토벌케하고, 1467년(세조 13년)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 남이, 어유소 등으로 건주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 백성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5.1.6.1. 직전법 실시
과전(科田)을 혁파(革罷)하고 직전(職田)을 설치하였다.
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 8월 25일 갑자 5번째기사
세조 12년(1466년) 경제 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현전직 관료에게 모두 사전(私田)과 급료를 지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 수입을 크게 늘렸다.
세조 이전까지는 은퇴, 퇴직한 사람과 그 유가족에게도 현직 관료와 똑같이 토지를 주었으나 이로 인해 조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자 세조 12년(1466년)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직전법(職田法)을 밀어 붙였으며, 자신이 아끼고 비호하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職田法)만은 철저히 따르게 했다. 이때 전직 관료를 토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고, 관료의 과부나 자녀 등 유가족에게 지급하던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 등도 폐지하였으며 그 지급액도 과전(科田)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성종 1년(1470년)에 또 다시 직전법(職田法)의 단점을 시정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과전법(科田法) 체제가 붕괴하고 조선의 재정이 불안해진 근본원인은 세조 본인이 자신의 쿠데타를 도운 공신들에게 공신전(功臣田)을 남발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職田法)을 따르게 했다고는 하지만, 남발한 공신전(功臣田)은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거두어지지 않고 조선의 경제력, 잠재성을 영구적으로 깎아먹고 말았음을 감안하면 이를 치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5.1.6.2. 잠실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왕비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농민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훈민정음으로 번역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잠실(蠶室)이란 지명은 세조가 만들어 냈는데, 왕족에게 누에치기를 널리 하게 했다. 그때 누에를 키우는 곳이 지금의 잠실이 되었다고 한다.
5.1.6.3. 역대병요
즉위 전에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 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을 편찬했으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 제도를 개혁했다.
1465년(세조 11년)에는 발영등준시(拔英登俊試)를 시행해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고,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번역 활동에도 전념하여 여러 불경과 운회(韻會)를 직접 번역했다. 법전의 세분화로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 · 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법인 경국대전은 기존 관습법을 주로 사용하던 전대와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조선이 중세 국가를 넘어 근세 국가로 평가받는 중요한 도약점이다.
5.1.6.4. 불교 관련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년)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신미46, 김수온 등에게 법화경, 금강경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 50권을 필인(畢印)하기도 했다. 이후 몇몇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각사와 신륵사, 수종사 등의 중건을 지원하였으며, 기타 강원도의 월정사, 상원사, 경기도 파주의 보광사, 경기도 남양주의 수종사와 양평의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직접 방문하여 시주하고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이 시기 한국의 불교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전국 각지로 흩어진 대장경판과 불화, 불교 서적 등 손실되어 후대에 단절될 뻔한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불교 문화유산들을 강력한 왕권을 동원해 보존 · 재정비하는 사업을 크게 벌였기에, 현대 한국에 있어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만큼이나 후대에 큰 이점을 안겨준 군주로서 재평가되기도 한다.
5.1.6.5. 면리제의 시작
면리제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면리제는 한국의 땅과 마을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연구하여 만든 지방 행정 체계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도 우리 나라의 주요 행정 구역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5.1.6.6. 한글과 서적 보급 활성화
명실상부한 세조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정통성 면에서 세조는 왕위 찬탈자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따라붙으며 비판을 받는 군왕이지만 해당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용상에 앉을 자격이 있는 군주였다는 해석도 또한 가능하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 훈민정음, 즉 한글이 조선의 공용문자로 탄탄하게 자리잡도록 기반을 닦은 것은 세조였다. 조선이라는 왕국이 현대 한민족(대한민국 / 북한)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이 한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은 세조의 업적으로써 후대에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해 창제된 것이긴 했으나 세종의 의도와는 달리 보급은 부진했고, 이러한 훈민정음이 조선팔도에 널리 보급된 것은 다름아닌 세조 치세에 들어서이다. 세조 이전에 훈민정음은 단순히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보조적인 문자의 역할을 했다면, 세조 시대 이후부터는 한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의 공용문자의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세종대왕의 소망을 이루어 준 인물이 왕위찬탈자이자 그의 아들이기도 한 세조였던 것이다. 세조 치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민족은 한국 고유의 문자를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세조 치세는 서적의 보급이 확산된 시기이기도 했다. 한명회와 권람, 신숙주가 지방의 서원들에 썩혀두던 서적들을 몰수해서 성균관의 도서관을 장려했으며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고대의 고조선과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국가 의식, 민족 의식을 고양시켰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글 갑인자인 갑인자병용한글활자를 만들게 하여 양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책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고려왕조 시대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인 직지심체요절은 시기상으로만 세계최초일 뿐 실제로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은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와 비교하여 전무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렇게 300여년이 지나 조선 세조 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킨 진정한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정비 등 일련의 편수,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밖에도 오륜록(五倫錄),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동국지도(東國地圖),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등의 편찬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특히 신미(승려) 등을 기용해서 훈민정음 번역 및 보급업무를 맡게 했는데 그 결과로 훈민정음으로 번역된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전국에 유통되었고 세조가 직접 불경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특히 월인석보의 경우 최초의 한글 불경이자 최초로 한글 금속활자로 쓰여진 책이라는 의의가 있다.
이렇게 한글 서적의 발행량이 늘어나기 시작되면서 한글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5.1.6.7. 묘지 조성 비용 절약
세조는 자신이 죽으면 빨리 흙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니 무덤에 불필요하게 큰돈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사후 조성된 광릉은 한반도 회곽묘의 효시이며 기존의 돌방무덤과 달리 비용과 인력을 많이 절약하였다. 왕실이 검소하게 왕릉을 조성했으니 사대부들도 이를 따랐다.
5.1.6.8. 기타
규형(窺衡), 인지의(印地儀)라는 토지측량기구를 직접 발명,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빛나는 종묘제례악의 개념이 이때 바로잡히고 사실상 완성되었다. 그 외에도 세조가 직접 기보법인 오음약보(五音略譜) 등을 창안하기도 했으며 대악후보와 같은 책을 통해 세조의 높은 음악적 치적을 살펴볼 수 있다.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다. 대군 시절 세종대왕 대에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의 제조에 참여하였고, 이후 세조 시기에 정축자(丁丑字),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중 갑인자와 을해자는 조선 초기, 중기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 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5.2. 철혈 통치
조선은 전제군주제 국가로서 왕권이 신권보다 강한 것이 지극히 정상인 시대였다. 이러한 전제군주제 특유의 철혈 통치는 세조 때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원구단을 세워, 이전에는 정통제 몰래 실시하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도 대놓고 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도성 한복판에 큰 부지를 확보하여 불교 건축물인 원각사를 지었을 당시에는 신하들이 반발하지 않고 되려 좋은 기운이 감돈다는 찬사를 했을 정도로 세조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다.
사육신의 하위지는 세조가 추구하는 6조 직계제에 반대했다가 격노한 세조에게 사모 째로 머리를 잡힌 채 끌려나가기도 했다. 당시 세조는 그를 참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5.2.1. 술자리 일화
공신들도 예외가 없어서 대신의 수장 중 하나인 정인지도 세조에게 숱한 분노를 산 적이 있는데, 한 예로 연회에서 풍수지리에 대해 논하다가 정인지가 평양과 개성이 어째서 한양만 못한 도읍인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풍수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갔다간 전하께서 잘 모르시니 못 알아들으실 겁니다."라고 말했다가 "이게 원로 대신이라고 대접해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혼내주고 싶지만 술 취해서 그런 거니 한 번 봐준다라고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게다가 세조는 세종대왕, 소헌왕후, 문종, 의경세자의 장례에 깊이 관여하여 장지를 잡는데 일조하는 등 풍수지리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자존심과 권좌심이 높은 세조에게 "너 이거 모르지?" 라고 대놓고 무시했으니 취기에 눈이 돌아가 버린 것. 그 외에 "너" 라고 부르거나 말년에는 "상왕"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인지 외에도 병조 판서를 지낸 이계전 역시 술자리의 피해자다. 이 사람의 조카가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 그래서 사극 왕과 비에서 이개가 죽기 직전 절명시를 읊으면서 이계전을 쳐다보자 이계전이 시선을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의 대유학자인 이색이다. 술 자리에서 이계전이 세조에게 "술이 과한 듯하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권하자 격분하며 병조 판서의 머리를 붙잡고 사정없이 곤장을 친 뒤, 애정을 담은 행동이였다라는 식의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실록의 원 표현은 이렇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나와 같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좌익 공신의 높은 등급에 올려 놓으려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세조 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16일 기사
야사에 나올 법할 스케일로 신하를 욕보인 이 이야기는 분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5.2.2. 강맹경과 권람
그의 철권 통치의 또 다른 희생자로는, 강맹경과 권람이 있는데 갓 영의정에 임명된 강맹경과 우의정에 임명된 권람이 잔치를 벌이는 세조에게 "술을 마시고 놀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라고 간했다가 세조가 분노하면서 "야, 우리가 술먹고 논지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금껏 내가 못마땅했다고 그런거냐?" 식으로 말했다. 경악한 두 대신은 허겁지겁 하면서 해명을 했으나, 세조는 이들을 갈아치워서 좌의정 신숙주를 영의정에 앉히고, 이인손을 우의정에 앉히니 강맹경과 권람이 정승에 임명된 지 고작 5일 만이었다. 역대 영의정 중 최단임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세조는 강맹경과 권람을 파직했음에도 녹봉만은 정승으로 일하던 때처럼 지급할 것을 명했고, 이에 강맹경과 권람이 궐밖에서 엎드려 사죄했는데 이에 마음에 약해진 세조가 그들을 불러 "경들이 옳은 말을 했는데, 내가 너무 심했다."라면서 그들의 자리를 원상복구 시켜주니 영의정 신숙주는 4일 만에 좌의정으로 돌아가 신기록을 갱신하고, 이인손도 우의정 자리를 내놔야 했다.
심지어, 야사 용재총화에는 예문관 문신들을 한여름에 뜰 가운데 앉혀 놓고, 하루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며 근무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세조는 "능히 춥고 더운 것을 견뎌 본 후에야 백성들의 고충을 느끼고 큰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을 신하들에게 시킨 셈이다. 사실 신하들만 시킨 건 아니고, 이때 세조 자신은 창문을 닫고 솜옷을 입은 채 화로를 방 가운데 켜놓은 채로 정무를 봤다고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때는 한여름이었다.
이 외에도 신하들을 장난으로나 왕권에 도전할 시 구타하거나 욕보이는 일화는 꽤 많다. 신하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 어쩌면 이 사례들은 모두 신하들이 함부로 왕에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휘어잡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5.2.3. 비판
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도 저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포함한 삼정승은 국가의 최고위직으로 신중을 기해야하는 자리인데 그냥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덜컥 날려버리고 며칠 만에 다시 원상 복귀 시키는 등의 행위는 다시 말해서 세조가 국가 통치 체제를 스스로 무시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신하들을 막 대한다고 왕권이 강해지는게 아니다. 저 경우에는 왕권 강화가 아니라 그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무제와 당태종을 유난히 좋아했으며, 한 고조 유방과 송태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방의 경우는 공신을 멋대로 토사구팽시킨 인물이라 배울 게 없는 인물이라고 깠고, 송태조 조광윤은 뭔가 우유부단하고 화끈한 맛이 떨어지는 카리스마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어쩌면 자기와 정반대여서 그럴지도 그래서 조광윤이 도끼 자루로 자기 공신을 깐 신하의 이빨들을 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양반 재위 기간 동안 자기가 화끈하게 결단한 것은 그게 유일하구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다만 한고조 유방의 경우 신하들과의 의를 저버린 행동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했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능력은 꽤 칭송하였다. 1462년에 세조가 직접 저술한 병법서인 병장설 유장편 서문에서 직접 군사적인 측면에서 수양제를 비판하는 반면 한고조는 띄웠다. 항우를 관광보냈으니 당연하지
군사들을 다스릴 때 일일이 귀에다 대고 명(命)할 수 없기 때문에, 형명(形名)의 분수를 받들어 나아가고 물러남과 합치고 흩어짐을 미리 정하고, 싸움에 임할 때 한 가지 형세만을 항상 고수할 수 없기 때문에 변칙을 내어 새로운 명령을 기별해 통하고, 기회를 틈타 정도를 쓰거나 기계(奇計)를 쓰는 것이다. 만약 산천이 가로막혀 있으면 꿰뚫어보기 어렵고 100리 길에 군진이 잇달으면 말을 통기하기 어려우므로, 한 부대가 적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일제히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병법을 아는 자는 고개를 숙이며 적합한 장수에게 군율을 맡기는데, 한나라 고조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반면에 병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군신을 믿지 못해 여러 군사들을 움켜쥐고 직접 다스리는데, 수나라 양제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병법가의 대요는 이것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마음으로 국가의 대계를 체득해서 사졸의 마음과 힘을 얻어 위기에 임해 적변을 제어하고 사방에서 승리를 얻는 방법과 같은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병법에 달려 있지 않다. 그렇기에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유장편 희유제장 서문 중(세조)
5.2.4. 권람의 시
언젠가 권람이 세조를 유방에 비유하여 칭송하는 시를 올리자 "뭐? 유방? 공신을 파리 잡듯이 죽여버린 배울 게 없는 양반을 감히 나랑 비교해? 과인은 공신들이 반역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절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야!"라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이 발언만 보더라도 그의 체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세종과 문종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세조는 이 말대로 토사구팽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세조 최대의 실책으로 남은 것을 잘 생각해보자.
5.2.5. 재정의 분리
아버지인 세종은 고려 시대의 분할적 재정 운용의 폐해를 문제시하였다. 쉽게 말해 왕실에서 쓸 돈은 왕실에서 걷고 개경에서 필요한 돈은 개경에서 걷는 방식.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중앙에도 세원을 파악하는 호부와 회계 출납 같은 거 해주는 삼사가 따로 있고 또 세금 걷는 건 일선에서 또 따로... 때문에 세종은 왕실 재정을 따로 안 챙기고 전부 중앙 재정으로 편입시켜서 현대와 같은 이른바 '국용전제'를 완성시켰다.
반면 세조는 절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내수사를 설치하여 다시 왕실 재정을 분리시켰다. 결국 쉽게 말해서 왕실을 위한 딴주머니를 찼다는 소리다. 아무튼 내수사는 고종 때까지 혁파됐다가 부활했다가 계속 반복되지만 중요한 것은, 세조 이후 왕실이 호조에 손 안벌리고 따로 왕실을 위해 돈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관둔전이라는걸 설치해서 고려 시대와 똑같이 관청이 따로 자기들 경비를 세금으로 걷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 세종이 그토록 개고생을 해서 고쳐놨지만 세조가 이걸 개악하고 이후에 조선의 재정 제도는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정치혼란을 거치면서 간단히 박살나버렸다.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러한 분할 재정의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잡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6년 독립협회 만민 공동회에도 재정 일원화는 중요하게 논의된 개혁안이었으니 뒤집어 보면 분할 재정이 조선 시대 내내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내수사 자체가 세조 이전까지만 해도 있던 것으로 세종 12년인 1430년에 궁중의 특수 물품을 조달하던 내수별좌를 내수소라 명칭으로 개칭한 이후 단종 때까지 기록이 있었으며 이때 당시에 내수소에 별도의 토지와 노비가 다수 배정되었는데, 특히 함경도에는 내수소 소속의 해척(海尺 : 해변 어부)·응사(鷹師 : 매 사냥꾼) 300호가 지정되어 있어 하나의 관서라기보다는 국왕 직할의 궁방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전근대에는 다 국고와 왕실 재산이 따로 있었다. 국고는 아무래도 왕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반면 왕 자신은 어떤 이유로 사적으로 돈 써야 할 일이 생기는데 그걸 국고에서 쓸 순 없다보니 결국 국고와는 또다른 왕실 재산을 만들 수 밖에 없다. 심지어 현재도 마찬가지라 영국 왕실은 아직도 왕실 재산이 따로 있다. 즉 세종이 워낙 파격적이었던거지 세조가 특별히 잘못한건 아니다. 오히려 내탕금은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는걸 감안하면 마냥 비판하기는 뭣하다.
5.2.6. 기타
다만 세조는 쿠데타 과정에서 대량학살, 숙청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겉으로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정통성이 워낙 낮은 쿠데타였기 때문에 반정에 참가하지 않은 신하들을 계속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불안한 처지였다. 대간들의 입을 틀어막은 것도 단순히 신하들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간의 힘을 키워주고 그들에게 매사의 옳고 그름을 논하게 하면 세조의 쿠데타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을 되새기고 공유할 신하들이 많아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 체제 안정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한 이후로도, 세조가 포섭했다고 생각했던 신하들 중에서도 계속 반정이나 이탈이 일어났다.
세조가 단순히 멍청해서 개인적인 취향만으로 반정공신들을 우대한게 아니라, 공신들을 숙청했다간 바로 세조에게 불만을 품은 다른 신하들의 쿠데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불안한 정치적 입장의 한계도 컸다는 것이다. 아랫 문단에서 후술되듯이 실제로 세조 말년에는 반정공신들의 패악질이 세조 본인이 보기에도 도를 지나치게 커지고, 슬슬 공신들의 힘을 빼도 반정까지 일어나지 않을것 같다고 느꼈는지 구 공신들의 힘을 빼려는 시도도 했다. 그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 죽어버려서 묻힌 감이 크지만.
5.3. 인사 정책
훈구 공신들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살인이나 월권행위가 심해지자 집권 중반 이후 세조는 나름 공신 견제를 위해 왕족, 왕실 외척, 사림파를 등용한다. 왕실 인사로는 구성군 준, 외척으로는 남이, 사림파로는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 그밖에 정몽주의 문하생 등을 새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권한은 세조가 죽기 전까지 성장하지 못했고, 오히려 남이나 구성군 등은 훈구 공신들의 견제를 받아 제거된다. 그러나 사림파는 이 당시에는 훈구세력과 크게 부딛치지 않아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김종직은 세조에게 등용되었지만 세조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긴 것 같다. 그가 김종직을 직접 만나보고는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같다는 말을 하여 김종직이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설이 있다. 1463년(세조 9) 여름 김종직이 그의 친불교 정책에 반발하여 불사(佛事)를 하지 말 것을 간언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464년(세조 10) 7월 김종직은 다시 세조에게 실무 잡학을 장려한다고 질타하여 그는 이때 크게 분노하였다. 김종직은 그에게 "사학과 시학은 본래 유자의 일입니다만 나머지는 잡학(雜學)이고 미신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라는 취지의 상소를 올렸으나 세조는 듣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종직은 끝까지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그의 분노를 샀다. "김종직은 내가 잡학을 장려한 까닭을 알 것인데, 참으로 경박하다"며 세조는 분노했지만 김종직이 사림의 지도자였고, 지나치게 강성해진 훈구 공신들을 내심 두려워하여 김종직을 내치거나 크게 처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훈구대신들을 쳐낼 수 없었던 건 세조의 정당성이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단종이 후일의 연산군 급 막장이었다면 모를까 뭔가 평가를 하고 싶어도 할 건덕지가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나이였던 걸 뚜렷한 명분도 없이 무리해서 쳐낸 것이라 세조는 정당성의 취약함에 늘상 시달려야 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지지해주는 훈구파만이 유일한 버팀목이라 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하들을 더 죽이는 것만은 그만하자는 주의였는듯 한데 계유정난 때 살생부까지 작성해서 죽여댔으니 더이상 죽여댔다가는 능력있는 인재들이 없어서였던 면도 있을 것이다. 당시 급제한 김종직이 당시 실학에 포함되던 잡학을 배우라는 세조의 의견에 반발했지만 의외로 살아남았고 한명회와 신숙주도 이시애의 난 때 목숨을 건졌다. 술에 과하게 취해서 술자리 중 하면 안 될 말실수를 자주 했던 정인지도 살아 남았다. 이런 마인드로 바뀌었던 데다 계유정난 때 목숨을 걸고 자신을 끝까지 따라준 킹메이커들인 한명회, 신숙주를 필두로 하는 많은 공신들에게 토지 혜택을 마구 퍼주는 바람에 (가장 문제가 심각한 것이 바로 이 토지 혜택 부분으로 세조는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하였는데 공신전은 법제상으로는 몇 대 지나고 나면 회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회수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세조 이후로는 지속적으로 조선의 고질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외에도 다른 공신인 권람, 구치관, 정창손, 이사철, 김질, 박원형, 박종우 등도 큰 벼슬에 제수했다.
워낙 술을 좋아하고 공신들과의 의리를 중요시여겨 잦은 술자리를 가졌던 터라 아침에는 숙취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래 늦어도 6시 정도에는 시작되어야 할 왕의 일과가 세조 때에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외척들도 후하게 대했는데 자신의 아내인 정희왕후의 집안 형제였던 윤사분, 윤사흔 형제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고 또 한명회와도 사돈을 맺었으며 정인지와도 사돈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어머니의 외척인 심회에게도 정승 자리를 주었을 정도다. 그리고 예종의 장인인 한백륜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고 정희왕후의 인척인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 등과 성봉조 등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다. 그 외에도 왕실의 인척인 윤사로, 윤필상 등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인수대비의 사촌오라버니인 한치형과 역시 왕실의 인척인 신승선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이후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은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신도 너무 커져버린 공신들이 걱정되었는지 남이, 구성군 같은 신 공신들을 이용해 한명회, 신숙주, 권람 같은 구 공신들을 견제할려고 했고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해서 이시애의 난을 기점으로 신 공신 세력을 형성하며 구 공신들을 견제하고자 시도하는 모습도 보였기는 하다. 문제는 얼마 안 가서 세조가 질병으로 사망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는 것. 이것은 이후 남이의 옥사를 기점으로 신 공신은 소멸하고 구 공신을 필두로 훈구파로 명명되는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근간이 되고 말았다.
예종도 구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잘 안됐고 성종도 구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사림파들과 친위 세력들을 등용했지만 이것마저 잘 안됐다. 그 탓에 입지가 더욱 강화된 구 공신들이 권신들로서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성종 시절에는 세조 본인의 바람과 반대로 신권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너무 커져버리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성종 즉위 이후부터 시작된 원상(院相)은 조선시대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서 국왕이 병이 났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國政)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임(原任)·시임(時任)의 재상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주재하게 한 임시 관직이었지만 세조의 공신들로 구성된 원상은 1467년부터 1476년까지 무려 10년간 지속됨으로써 왕권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굉장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원상(院相)
결과적으로 세조와 공신들의 대결은 공신들이 성종 시절까지도 상당 기간 동안 국정을 좌우함에 따라 공신들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예종, 성종 때 의도치 않게 신권이 더 강해지게 되는데 세조가 실제보다 오래 재위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나아졌으리라 판단하기는 어렵다. 구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 공신 세력을 양성한 처사 자체가 크나큰 실책이고 이 실책이 그나마 그가 일찍 승하하여 이 정도에서 봉합된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세조가 양성하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등등인데 남이가 구성군을 질투하여 둘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는 점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자광은 남이의 역모 사건을 고변했을 뿐 아니라 후일 연산군 대에 이르러 무오사화의 시발점이 되어 놓고는 연산군을 배신해 중종반정에 참여하는 등 권력을 쫒아 박쥐와도 같은 행적을 보여주었다. 이쯤 되면 이들이 과연 제대로 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신 공신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성장했다고 해도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갔을지도 의문이다.
구 공신과 신 공신은 성격 자체가 매우 달랐다. 세조가 구 공신 세력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같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동지들이었고 매우 부패한 약점이 많은 이들이었기에 세조가 그들의 약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귀 영화를 보장하고 그 반대 급부로 자신에 대한 충성을 얻어내어 왕권을 강화하는데 썼던 것이다. 마찬가지 의도로 예종에게 자신과 같은 친위대를 붙여준다는 의미로 신 공신 그룹을 양성했으나 일단 신 공신 세력은 예종과 어떤 정치적인 동지적 관계를 형성할만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종은 거만한 성격의 남이를 매우 안 좋아해 즉위하자마자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였고 여기에 불만을 가진 남이가 역모를 꾀했다고67 처형당했으며 구성군의 경우 언제든지 왕권을 노릴 수 있는 종친의 위치에 있었으며68 유자광은 서자라는 위치상 당대 조선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인물이기에 예종에게 충성을 바칠지도 의문스런 인물이었다. 즉, 세조가 구 공신을 부려 왕권을 확립한 것처럼 예종이 신 공신을 부리거나 구 공신을 견제하게 할 수 있을만한 세력이 전혀 아닌 이들이었다. 이런 이들이 세조가 더 오래 살아 더 많은 권세를 확보했다면 과연 예종의 왕권 확립에 기여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나이가 있어 성종 대에 이르러 점차 권세를 잃어가던 구 공신에 비해 젊은 세대이기에 권력을 확보하고 왕권에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인물들이다. 애시당초 공신들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이들을 이용하여 왕권을 확립한다는 상황 자체가 쿠데타 동지+약점이 많은 비리 정치인들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것이지, 전혀 이런 상황을 활용할 수 없는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 신 공신을 세조처럼 부릴 수는 없는 일이고 오히려 이들이 세력화 되었으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그 시점에서 세조가 죽었기에 그만큼 수습이 된 것이지, 만약 이들의 세력이 더 강화될 때까지 세조가 살아남았다면 어떤 헬게이트가 열릴 수 있었을지 걱정스런 상황이었다.
실제 집권 과정의 정통성 혹은 정당성은 후대의 평가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이 정통성의 문제는 세조 본인에게도 문제였겠지만 이후의 국왕들에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으면서 조선의 왕권을 취약하게 만들어 신권이 왕을 견제하다못해 제대로 폭주하게 만들면서 조선을 쇠퇴시키고 끝내는 멸망으로 이끈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왕권의 버팀목이 돼줘야 할 사람들 스스로가 왕권 제어가 극심하였다. 이런 식으로 구 공신들의 입김이 강화된 결과 왕실 종친들은 법으로 벼슬길이 막혀버렸고 정치적 세력으로서 왕실 세력의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해 일각에서는 군약신강, 척신 정치와 외척 세력 성장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정작 종친들이 계유정난에 가담한 이유가 단종 즉위 후 종친 세력들이 김종서를 비롯한 원로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한다고 불만을 품었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자기 발등을 찍어버린 격.
5.4. 종교 정책
5.4.1. 호불(好佛) 군주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종 때는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 취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 일화는 그의 호불 성향 뿐만 아니라 야심을 드러내는 일화로도 소개된다. 임금도 아닌 일개 왕족이 '취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다른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는가 하면,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고 했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원각사를 세우는 등. 불교와 관련된 업적도 여럿 존재한다. 아예 정부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대량 간행하는 관청을 만들었으며, 세조가 친필로 써서 부처에게 봉안한 문서도 존재한다. 태조 이성계와 말년의 세종 이후로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마지막 조선의 왕이다.
참고로, 이 때 간행된 월인석보 같은 불경들은 언문으로 간행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조선 시대의 한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상원사 등 세조와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는 절들이 좀 있다. 다만, 이 모든 행동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세조 개인의 행동으로 처리되었다.
이런 호불 정책을 많은 인명을 살상한 세조의 속죄 의식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하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왕자 시절부터 호감을 나타냈었고 왕자 시절에 어머니 소헌왕후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외톨이 조카에겐... 그런 거 없었다. 적어도 실록 속에 나타나는 '거침없는 행동주의자이자 야심가' 유형의 인물 됨됨이를 생각하면 그가 과연 죄의식으로 고통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 불교였고 속죄 의식과 연결짓는 것은 세조를 비호하기 위한 주장일 가능성이 꽤 크다.
그의 불사에 관해 세종, 문종 때와 비교하면 매우 재밌는 차이가 있다. 세종, 문종 때는 작은 절 하나 세우는 것이나 작은 불사 하나 하는 것에도 온 조정이 거의 뒤집어 졌으나, 세조 때에는 신하들이 굽실거리면서 '이번에 새로 짓는 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합니다!'라고 아첨을 떨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료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였던 아버지, 형과는 달리 세조 본인은 신료들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세종이나 문종의 왕권 또한 상당히 강한 편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태도 차이는 세종, 문종이 '신하들이 간언하면 들어주는' 왕이었던 반면 세조 치세에는 왕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쉽게 주장하기가 어려운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또 그랬기에 그렇게 불사를 벌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5.4.2. 자연스러운 대간 견제와 재평가
실제로 유교 정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간들의 힘을 바닥까지 끌어내린 임금도 바로 세조였다. 세조 집권 이전에는 신하들이 직접 왕에게 의견을 제의하고 정사를 논하는 주장을 하는 이유와 그 근거를 왕이 함부로 묻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을 정도였다. 또 세종이나 문종이나 훈민정음 창제와 같이 불사보다 더 큰 일을 벌일 때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신료들을 설득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게다가 조선의 국가적 이념이 유교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호불 정책은 국왕 스스로가 조선의 기초를 그냥 무시했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세조가 죄없는 조카를 함부로 왕위에서 쫓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조카에게 사약까지 내렸을 뿐더러 그 과정에서 또다른 무고한 피해자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호불 정책과 별개로 세조 본인의 인간성은 불교 이념과도 영 떨어져 있던 셈이다. 세조가 자신이 수양대군이었던 문종 치세에 신하들을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 라고 평가했던 발언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조 본인에 대한 비판으로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겉모습(사찰, 불상, 불교의식 등)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불교의 가르침(생명을 소중히 함)은 가볍게 여겼으니 오히려 불교의 입장에서도 욕을 먹어 마땅한 군주다.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는 극도로 집착하면서도 정작 그 종교의 좋은 가르침은 자기가 하고 싶은 (극악무도한) 일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되면 가차없이 무시해버린 점에서 현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5.5. 한계와 비판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어쨌든 조선 왕조의 기반을 마무리한 군주다. 평이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로, "어떤 관점에 볼 것이냐?'에 따라 폭군, 패륜아에서 왕권 강화에 노력한 노련한 군주라는 평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평을 받고 있다. 다만 폭군이라는 꼬리표를 떼려면 치세나 업적이 저런 행적을 무마할 정도로 출중해야 하는데 세조의 치세는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훌륭했다고 보기도 애매해서 재평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 통들어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군주였다는 점도 그의 평가를 낮추는데 일조하고 있다.
세조는 왕위 찬탈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결여 이외에도 장기적인 국가 전략이나 정치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던 탓도 있다. 후대에 큰 부작용이 따를 소지가 큰 정책들을 별다른 대안도 없이 실행에 옮겨버렸고, 그것이 민생에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주었다는 것도 세조의 부정적 평가에 기인한다.
아버지 세종이 가까스로 완성시켰던 혁신적인 정치 문화와 우수한 제도를 일거에 날려버린 세조의 행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들 중 하나다. 아버지 세종대왕과 형 문종은 국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임금이었다. 집현전 등을 통한 지속적인 학자 배출과 토론을 통해서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긍정적인 쪽으로 강화시켰다.
세종과 문종 치세에는 신하와 군주가 상하일치하여 신하들은 군주를 존경하고, 군주는 신하들을 예로 대하여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서로 상생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세조는 조선의 정승이자 고명대신인 김종서, 황보인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았고 그 목을 저잣거리에 효수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이는 실로 세종과 문종이 쌓아놓은 인의의 정치 시스템의 실질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5.5.1. 권신의 세력화
무엇보다 세조는 전제 왕권을 통한 독재 정치를 선호해서 이러한 시스템을 철저히 왕에게 집중된 독재 스타일로 꾸준히 밀어붙였다. 주변 훈구 대신들의 왕당파가 있었긴 했지만, 이 훈구 대신들은 세종과 문종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관료가 아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형적인 도구들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세조는 태종, 세종과는 달리 훈구 대신들을 철저히 관리 및 감독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권력의 맛을 보자 차츰 타락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게 된다. 세조가 그 부패하는 절대 권력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폭군 유형에 속했던 만큼, 공신 우대 정책이 너무 과해서 그러한 권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것.
세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철저한 반대에 져주는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의해 농락만 당하기 급급한 임금들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보인과 김종서가 고명 대신으로 활동하고 황표 정사를 시행할 때 수양대군의 이러한 분노이자 배신감은 꽤나 커졌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을 직접 거뒀을 때 왕권을 유린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세조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세종과 문종은 신권에 농락을 당하고 늘 져주는 임금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함정.
오히려 세종은 반대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설득하면서 끈질기게 자기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스타일의 임금이었다. 게다가 세조 측이 엄청난 국정농단으로 홍보했던 황표정사도 그리 오래 시행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아직 제왕 수업을 받지 못한 단종을 합법적으로 후견인이 된 대신들이 일시적으로 보좌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오히려 세조의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 때문에 후대의 임금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끌어들이면서 정치 싸움의 의도치 않은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휘둘리는 왕으로 여긴 세조의 생각 자체가 매우 근시안적인 오착이었던 것.
세종과 문종은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할 때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 나가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여, 신속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필요한 난세에서는 혼란만 자초할 뿐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세종 - 문종의 치세는 태평성대였지 난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방상 중요한 사안들, 이를테면 북방개척 같은 정책들은 세조 때와 비교해도 과감함과 신속함에 있어 별 차이가 없었다.그 아버지와 형이 쌓아놓은 국방력을 과감히 갉아드셨다.
5.5.2. 계유정난 미화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지만,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평온한 시대였다고 볼 근거가 꽤 되는 편이다. 단종이 섭정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선대 왕의 충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단종에겐 흠결 낼 수 없는 명백한 정통성이 있었으며 김종서, 황보인 등이 그의 왕권을 제약한 바는 결코 없었다. 수양 측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엄청난 전횡을 저질렀다고 선전했지만, 실제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딱히 그렇게 볼만한 근거도 부실할뿐 아니라, 김종서, 황보인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조건부로 부여된 권력이었다. 애초부터 김종서와 황보인은 외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앙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명문 세도가의 좌장도 아니었다.
당시 조선에서 중앙의 정치명문가라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의 명문귀족가문이 아니라면 개국공신이나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가의 후예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종서의 경우 이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세종과 문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승이 되었고, 그 정승이라는 지위로 인해 어린 국왕의 보좌 역할을 잠시 맡았을 뿐이다. 그래서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은 단종이 성인이 되는 순간 무조건 반납되게 되어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기반 없는 김종서에게 권력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 > 왕의 총신 > 세도가 공식이 성립할 만큼 왕권이 강력하다는 뜻이다. 세도가 > 왕 공식이 성립하는 훗날을 생각해보면...
때문에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처럼 막가는 성향의 인간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는, 생각보다는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어려운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이 수양 대군의 탁월한 결단력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향후 국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긍정적 평가를 받긴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즉 탁월한 판단력과 결단력은 좋은 군주의 자질이었을 지 모르나 그게 좋은 왕의 덕목이 아니었다는 것. 조선판 풍신수길
사실 세조 입장에선 저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근본적으로 보면 계유정난의 명분은 없다. 단종은 적법한 절차를 걸쳐 즉위한 정통성이 완벽한 왕이며, 김종서와 황보인이 권신이었다고 볼 근거도 부족하다. 단종이 왕위에 부적합한 천치였던 것도, 나라가 파탄지경이 난 것도 아니다. 즉, 계유정난은 근본적으로 세조가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서 멀쩡한 왕실을 뒤엎은 것이다.
물론 단순히 권력욕에 눈이 뒤집혔다기보단 자신을 좋게 봐주던 문종이 죽고 난 뒤 즉위한 단종이 아직 어려 왕권이 탄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어느 정도 있던 수양대군이 자칫 오해받으면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왕이 되고 싶어서'나 '내가 목이 달아나기 전에 선수쳤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명분을 만들어내려면 '당시는 혼란한 시기였다' 그리고 '저놈들은 천하의 간신이었다'고 폄훼할 수 밖에 없었다.
5.5.3. 역량 차이
이 부분에서 태종과 세조 사이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 한계점을 거론하는 단락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실정은 세조의 이 일방주의 성향에서 기인하고 있다. 특히 세조가 명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친족을 학살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집현전을 없앤 것만 봐도 더욱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육신 문제도 얽혀 있었겠지만, 사실 수양대군은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단순한 탁상공론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을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단정지었다. 이것이 이어져 결국 피를 보고야 만 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었다.
그렇다고 세조의 수많은 업적들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지나치게 냉혹하고 권력에 유난히 병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을 가졌던 탓에 저지른 실책과 과오들이 그 업적을 덮고 남을 정도로 굉장히 심각하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십 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에서 그의 왕위 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 행위는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무척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두드러진다. 태종이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역모를 생각했던 이유로 제거하고, 공신인 이숙번을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냈던 반면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 공신인 한명회를 자신 인생의 참모이자 친구라는 명분으로 잘 대해주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혼인 관계까지 맺어 외척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5.5.4. 정통성 문제
세조 치적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왕권 강화에 기반을 다졌다는 것은 단종을 몰아내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자신 스스로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흔히 세조를 태종에 비교 하는데, 세조와 태종은 명분과 그 행동 사이즈가 차이가 컸다. 특히 태종 시절에 경우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앉히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사실상 명분도 태종에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우선 차장자인 형 이방과를 왕으로 앉힌 후에 정당한 세자책봉을 통해 집권하면서 집권의 명분을 치밀하고 착실하게 만들었다.
태종과는 다르게 세조가 단순히 배신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여기있다.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정치 기반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 충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과 문종때 워낙 잘 길을 닦아 놔서 적정 수준의 간신과 충신이 섞여 있었다. 단종이 단명했기 때문에 그 치적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 단종이 계속 이어 나갔다면, 앞서 언급한 정통성 문제 또한 해결이 되고(문종에 이어 2대째 장남이 이어가는 상황), 단종 본인만 조심하면 문종 때까지 이어졌던 강화된 왕권이 흔들릴 이유도 없기 때문에 지지 기반을 보나 환경을 보더라도 더 나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일한 단점은 단종이 너무 어렸다는 것인데, 그당시가 조선이 개국하고 고작 5대째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자.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은 나이라고만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국정 수행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이기에 좋은 스승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쫒아낸 조카 단종은 조선 시대 통틀어 가장 정통성이 충분했던 군주 중 한 명이였다. 그런 단종을 딱히 능력을 검증할 틈도 안주고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이런 단종에 대한 아쉬움 역시 세조의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5.5.5. 법 체계 파괴
일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조선의 법 체계였다. 이전의 법 체계에서는 법 조문이 있으면, 왜 이런 법이 만들어 졌는지,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이런 부분들이 먼저 기록되고 이후 이에 대한 처리 등이 나열되는 방식이었는데, 세조는 이런 방식이 답답하다고 여겨 이를 싹 잘라 버리고, 어떤 형벌에 해당하는 죄는 무엇 무엇이고, 형량은 어떻다 라는 식으로 깔끔하게 보이도록 정리했다. 하지만 이는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문제가 점점 생기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이런 조항은 왜 생겼는지, 왜 이렇게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는지 이 부분을 전부 다 잘라 버려 오히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했는지를 찾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업무 처리에 효율이 떨어지게 되는 문제를 가져왔다.
당장 자신의 시대에서야 사람들이 왜 법 조문이 만들어 졌는지 당사자들이니 알고 있으나, 이후 세대를 고려한 정보들을 모두 날려버림으로써 문제를 가져온 것. 당장 세계의 황당한 법 조문이라고 만들어진 인터넷 문서를 봐도 시대 상황이 바뀐 상황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법들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조문들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안다면, 현실에 맞게 개정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쉬운데 이 부분들을 날려 버렸으니 법률 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5.5.6. 집현전 폐지
또한 큰 실책 중 하나로 집현전의 폐지를 들 수 있다. 물론 사육신을 위시한 자신의 반대파 대부분이 집현전 출신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이런 자문 기구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국왕 자문 기구의 역할은 뒤에 홍문관, 규장각 등이 계승하기는 하지만 일단 한번 끊어진 맥락을 연결시키는 것도 어렵다.
문, 무, 잡학에 관련된 모든 국가 전반의 일을 연구하고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했던 집현전에 비하여, 후대 자문 기관인 홍문관은 아무래도 문에 치우친 기관이었고 덕분에 성종조에는 문치적으로는 큰 치적들이 있었으나, 국방력 약화, 성리학 일변도의 정치 흐름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즉, 국가 운영의 브레인 집합소였던 집현전을 폐지함으로써 수양은 자신 이후의 국가의 성장 동력을 없애 버렸으며, 그나마 문치 부분에서는 홍문관이 이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결국에는 그마저도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으로 옹립된 중종의 잦은 옥사와 실정으로 인해 관학의 성장 동력은 멈춰버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학문은 연산군과 중종 시대를 거치면서 관학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사림들이 주도했고 사림들이 성리학에 대한 이론에 몰두하느라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큰 어려움에 처하게 했으며 그럼에도 사림의 학문은 숙종 때까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렇게 침체기에 빠진 관학은 영조와 정조 시절이 되어서야 다시 부활하게 되었으나 이후 순조 때 도로 퇴보하고 말았다.
5.5.7. 근시안적인 안목
또한, 그 자신이 왕권 강화를 위해 펼친 정책들 또한 얼마나 그가 근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공신 문제. 평생 그가 싫어하고 비판했던 인물들인 한고조, 송태조와의 공신 처리 문제를 보면, 그가 갖춘 정치력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가 드러난다. 공신 세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군주의 통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국가 운영에 큰 지분을 가진 이들은 군주에게 있어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도 있고, 힘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자신의 할아버지나, 한고조는 이를 숙청을 통하여 자신의 왕권을 확보하였고, 그가 유약하다고 비판한 송태조는 배주석병권을 통해 그들의 부귀는 보장하면서 정치적 권력에서는 떼어놓는 온건한 방식으로 공신들을 처리하였다. 덕분에 그들의 후대는 기존의 공신 세력에 대한 부담 없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고조는 부인 문제로 좀 골치를 썩었으나. 반면, 세조는 오히려 이런 공신 집단을 키워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는데, 이들 집단이 제거되지 않아, 이후 아들, 손자 대에 왕권의 제약과 옥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의 안목이 근시안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명분 없는 쿠데타를 한 것부터가 만악의 근원이지만.
5.5.8. 성종 관련
혹자는 태종이 세종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며 '악업은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어라'는 말을 똑같이 세조에게 적용시키며, 성종조의 태평성대가 마치 수양이 악업을 지어 준 덕분인 것처럼 말하나 전혀 사실이 될 수 없다. 태종이 말한 '악업'은 이방석, 이방간 등을 제거한 1차, 2차 왕자의 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척 세력이 될 수 있는 민무구, 민무질 등의 외가 세력, 심온 등의 처가 세력 등을 제거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세종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주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악업'은 오로지 자신이 권력을 찬탈하고자 일으킨 계유정난, 사육신의 옥사, 단종의 사사 등,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의 숙청이었지, 정작, 후대에 부담이 될 수 있을만한 외척과 공신 세력은 철저히 비호하면서 권력을 부여해주는 실책을 범했다. 즉, 태종의 저 말을 가지고 수양을 변호할 수는 없고, 성종이 왕권을 확립하고 치세를 만들어 낸 대부분의 공은 바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세조의 덕이 아니다.
5.5.9. 국방 정책에서 드러난 문제점
문종 때까지 세계적인 수준에 있었던 화약 병기는 15세기 후반, 즉 단종 때부터 혼란한 국내 정세81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반대 세력이 화기를 반란에 이용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 유지에 머물면서 오랜 기간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 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이라는 화기 부대마저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켰다.
모반에 사용될 수 없다
이 외에 군사적인 실책도 꽤나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서 화력을 약화시켜 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6. 상왕 등극 및 사망
1468년 아들 이황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나 9월 23일 딱 하루 재위하고 사망한다. 다만 이 상왕 기간에 아무 일도 없던건 아니라서 예종이 양위받던 날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밀려났다. 이후 벌어진 남이의 옥사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사건인셈.
사후 신료들이 묘호로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을 추천했다. 즉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신종으로 불렸겠지만, 왕권 강화를 추구했던 아들 예종은 추천안이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며 세조(世祖)를 제안했다. 신료들은 세종이 이미 있어서 세조를 생각하지 못했다고 소심하게 반항했으나, 예종은 "한나라에도 세종 따로 세조 따로 있었는데?"라고 하며 밀어붙였다. 그렇게 묘호는 세조로 결정되었다.
그 후 세조가 승하한 지 1년 후인 1469년 예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아들마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6.1. 사후 간접 디스
세조의 통치 자체가 유학을 국시로하는 조선에선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방식이었고, 비명에 죽은 어린 왕에 대한 동정심이 더해져 당대부터 김종직처럼 계유정난과 세조 본인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이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중종대쯤 되면 단종과 이른바 사육신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사림은 물론 민간에까지 널리 퍼졌다. 숙종 집권기 때 묘호가 없던 정종에게 묘호를 추존함과 더불어 단종을 복위시키면서 세조는 간접적으로 까였다. 이 때까지 단종은 "노산군"이라 불렸는데 숙종이 "노산 대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이후 다시 단종으로 복위시켰다. 덤으로 세조가 처벌하였던 혜빈 양씨와 사육신까지 모두 복권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숙종 혼자의 뜻이 아니었으며 조선 팔도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더 의의가 큰 것.
단종, 사육신, 혜빈 양씨 관련 처벌은 세조가 직접 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복권·복위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세조가 잘못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세조의 정통성이 안 그래도 약한데 단종이 정식으로 복위되면 세조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주기에 중대한 사안이었다. 조선시대는 상복을 몇 년 입는가에 대해 예송논쟁이란 아주 긴 논쟁을 벌일 정도로 예법과 정통성에 대해선 굉장히 민감했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숙종 또한 정통성의 화신이기에 대대로 이어지는 왕실의 정통성을 일부 부정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리낌 없이 행한 것이기도 하였다.
사실 숙종이 자신과 같은 정통성의 화신인 단종의 몰락을 '구국의 결단' 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하는 것 자체가 숙종 본인의 정통성을 다른 의미에서 부정하는 꼴이라고 볼 수 있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통성이 강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게 구국의 결단이면, 왕위에 오르고 싶어하는 어느 방계 왕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처럼 정통성이 강한 숙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그 왕족이 구국의 결단이라며 정당화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는 강한 왕권을 중시하는 숙종 본인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끔찍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다. 단종 및 세조 사후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조선 시대에 세조가 찬탈자이며 단종이 억울하게 왕위를 뺏긴 것이었다는 여론이 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를 기리기 위해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갖가지 이유로 과거가 자주 치러지게 되므로 특기할 사항은 아니다.
2.1. 정통성에 맞지 않는 즉위 과정
세조 치적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왕권 강화에 기반을 다졌다는 것은 단종을 몰아내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자신 스스로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흔히 세조를 태종에 비교 하는데, 세조와 태종은 명분과 그 행동 사이즈가 차이가 컸다. 특히 태종 시절에 경우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앉히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사실상 명분도 태종에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우선 차장자인 형 이방과를 왕으로 앉힌 후에 정당한 세자책봉을 통해 집권하면서 집권의 명분을 치밀하고 착실하게 만들었다.
태종과는 다르게 세조가 단순히 배신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여기 있다.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정치 기반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 충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과 문종때 워낙 잘 길을 닦아 놔서 적정수준의 간신과 충신이 섞여 있었다. 단종이 단명했기 때문에 그 치적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 단종이 계속 이어 나갔다면, 앞서 언급한 정통성 문제 또한 해결이 되고(문종에 이어 2대째 장남이 이어가는 상황), 단종 본인만 조심하면 문종 때까지 이어졌던 강화된 왕권이 흔들릴 이유도 없기 때문에 지지 기반을 보나 환경을 보더라도 더 나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일한 단점은 단종이 너무 어렸다는 것인데, 그당시가 조선이 개국하고 고작 5대째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자.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은 나이라고만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국정 수행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이기에 좋은 스승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쫒아낸 조카 단종은 조선 시대 통틀어 가장 정통성이 충분했던 군주 중 한 명이였다. 그런 단종을 딱히 능력을 검증할 틈도 안주고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이런 단종에 대한 아쉬움 역시 세조의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1.1. 정통성이 문제가 된 이유
태종은 무인정사로 아버지 태조의 정치적 입지를 몰아내고 즉위했지만 형제들 중 가장 건국의 공로가 컸기에 명분이 충분했다. 무인정사의 명분이 장자계승이었기 때문에 그 공로만으로는 명분이 충분치 않았지만 형 정종이 적자를 보지 못했고 회안대군이 섣불리 나서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잃었기에 별 문제 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 성종은 친형 월산대군과 예종의 적자이자 4살인 어린 제안대군을 제치고 예종의 뒤를 이었지만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가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또한, 제안대군은 세종의 아들이었던 5촌 당숙인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함으로써 직계 왕위와 한참 멀어졌고, 성종은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 대왕(德宗大王)으로 사후 추존하여 정통성을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세조의 적장손이자 덕종(의경세자)의 적장자 월산대군의 정통성은 성종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정희왕후의 지명 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정통성 문제는 두고두고 성종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에 성종은 세종과 두 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의 전례대로 친형인 월산대군을 배척하거나 귀양보내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또한 신하들을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고 아끼고 잘 대해주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서 정통성 문제도 점차 누그러지게 되었다. 사실 신하와 백성들 모두가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성군이 되는 게 강력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당장에 세종도 맏형인 양녕대군이 워낙 초막장이라 그렇지 바로 위의 형인 효령대군은 조용히 지낸지라 그와는 딱히 정통성 측면에서 유리할 것도 없었지만 정치를 잘 했기에 아무도 이의를 걸지 않았다.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공을 세워 즉위하였지만, 선조의 서자이자 다섯째 정원군의 아들이기 때문에 장자, 적자계승을 모두 어겼기 때문에 조선 왕 중 가장 정통성이 부족하다. 또한 선조의 양자로 즉위해 놓고선 친부 정원대원군을 원종 대왕(元宗大王)으로 추존해 정통성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인조의 정통성이 저평가받지 않는 이유는 이후 왕들이 전부 인조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인조반정의 명분도 적어도 세조에 비해서는 훨씬 충분했다.
정원군의 동복형 의안군과 신성군은 후사 없이 선조 치세(1567~1608)에 요절했고, 영창대군은 이복형 광해군에게 어린 나이(9세)에 의문스럽게 살해당했다. 게다가 신성군은 세자 후보이기도 했었고, 인조반정 당시 인조의 직접적인 공로와 명분이 확실했기에 정원군의 혈통이 인조에게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고 명의 고명 책봉을 받은 이후 인조의 정통성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정원군을 추존왕인 '원종(元宗)'으로 추존한다는 것은 선조-원종-인조의 대통을 하나로 이음으로써 정통성을 강화하겠다는 뜻이었고, 추존할 명분이 취약해 크게 비난받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통성을 내치는 짓과는 거리가 있었다.
반면에 세조는 장자계승은 어겼지만 적자이자 차남이기 때문에 '직계승통(直係承統)'으로 넘어갈 만하다. 적자>서자, 장자>차자>…라는, 즉 적장자와 그 자손 부재 시 적자이자 차남인 게 정통성으로 작용한다는 것 자체가 장자계승의 논리이다. 조카 단종을 명분 없이 내쳐 장자계승을 어겼지만 장자계승을 통해 명분을 얻었다는 것은 모순 그 자체다. 특히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는 조의제문이 사화의 발단이 된 예가 있듯이 실록에 있어 조카의 왕위 찬탈 및 살해라는 패륜 행위로 왕이 된 세조에 대한 부분만은 당시로서는 더욱 예민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만약 후대 임금에서 세조의 찬탈과 시역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현 왕의 왕위 정통성 부정→ 역모→ 숙청' 루트일 텐데 저 난폭하고 거칠 것 없는 세조 본인의 시대에는 실록의 기록에 대한 감시는 단언컨대 조선 왕조 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살벌했을 것이다.3 심지어는 사관이 배속되어 있었을 리 만무한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심복들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 게 바로 《단종실록》이다. 이를 두고 《조선국왕 이야기》의 저자 임용한 교수는 《단종실록》에 대해 '《단종실록》은 《세조실록》의 예고편이다'라는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은 태종의 신하들이 편찬한 《태조실록》처럼 수양 일파의 사관이 철저히 반영된 총체적 물이라는 것을 감안을 하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하며, 계유정난과 세조의 찬탈에 이르는 역사는 역사 해석을 실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후대의 사림파들은 세조가 조선 역사상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왕이라고 평가한다.
2.2. 패륜/도를 넘는 숙청 행위
동생들과 조카, 서모와 사돈 송현수를 죽였다.
먼저 형제 관계에서도 친형인 문종에게 엄청난 불경을 저질렀다. 계유정난 때 병조판서 민신을 살해하는데, 이때 살해당하는 장소가 형 문종의 무덤인 현릉 비석소(비석을 관리하는 곳)였다. 말이 비석소지 비석소를 보통 무덤 근처에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보면, 형의 무덤에서 사람을 죽여버린 것이다. 현대 기준으로도 고인 모욕급 행동이고, 당시 기준으로는 저주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또한, 문종의 정실이자 자신의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의 친정 일가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자,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현릉에서 파헤쳐 평민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당시 현덕왕후는 남편이자 세조의 친형인 문종과 이미 합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형수에게도 불경을 범한 것인데다, 애꿎은 형이자 선왕에게까지도 패륜과 무례를 범한 셈이다. 이것 때문에 세조가 너무나도 잘난 엄친아 형이었던 문종에게 어릴 적부터 심한 열등감과 그에 따른 자격지심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무덤터로는 최악인, 범람이 잦고 습한 지역으로 이장해버렸다. 이를 두고,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 형수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걸었고, 이 때문에 의경세자가 일찍 죽었다는 야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의경세자는 사촌동생 단종보다 일찍 요절했기에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태종조차 확실히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만든 동복형을 살려주었으나 세조는 반란 혐의만으로 동복형제들까지 살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자기 기준에서 세조의 찬탈 행위를 방해 혹은 반대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 때 사살한 역적이나 사육신 등 역모가 있었다고 해도 조카 단종은 정통성이 높았다. 명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을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냥 살해했는데 김종서 또한 청렴결백하고 흠잡을 이유가 없고 북방 개척, 뛰어난 행정 능력, 《고려사》 편찬까지 한, 아버지 세종이 신임하던 명신들 중 1명이다. 정분 또한 두 사람에 비해 행정 능력은 딸리지만 토목 사업이나 건축에는 업적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을 설계한 공도 있었다. 이러한 명망높은 대신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죽여댄 것이다.
이복동생들(한남군, 수춘군, 영풍군)도 단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죽이고 식솔을 노비로 부리는 잔학한 면모도 있었고, 세종의 후궁으로 자기에게는 서모에 해당하는 혜빈 양씨 또한 찬하려던 것을 막으려 하자 그녀도 죽여버렸다. 그것도 강제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만들어서 절로 내쫓은 다음에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친조카인 단종까지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세조인데, 심지어는 친동생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숙모였던 성녕대군 부인을 양자를 두둔한다는 이유만으로 폐서인시키는 짓도 서슴치 않고 벌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성녕대군의 장례식 때 양녕대군은 활쏘기와 음주가무 중이었고 참고 참던 아버지 태종조차 "세자는 이제는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분노했다. 그런데 양녕대군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적극 지지했다. 한마디로 존속살해에 전혀 거리낌 없이 할아버지 태종조차 정치적 목적 없으면 하기를 꺼린 일을 예사로 해댄 희대의 패륜아다. 조선의 역사상 자기의 작은 어머니, 이복형제에 더해서 동복형제까지 이렇게 마음대로 다 죽여버리고 작은 어머니를 폐서인시키는 왕은 세조 이외에는 없었다.
세조가 가장 까이는 부분은 조카 단종 관련 문제이다. 단종은 사육신 사건 때 사육신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발각되어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제로 강등당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16~17세)에 사약을 받았다. 하다 못해 세조 사후에 집권하여 후세에게 암군이라고 자주 비난받는 인조조차도 전 국왕이던 광해군을 죽이지 않고 멀리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선에서 그쳤는데 세조는 친조카를 살해했을 뿐 아니라 시체 수습도 안하고 야생동물들이 뜯어먹게 방치하는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해서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적어놓는 씨알도 안 먹힐 역사 왜곡까지 대놓고 해놨다. 훗날 중종 때 노산군(단종)의 묘소 정비를 시작하면서 단종의 최후에 대한 전모가 드러났다. 중종 대 유학자 음애 이자는 《음애잡기》에 세조실록의 기록들은 쥐새끼와 여우 새끼들이 아첨을 하는 간사한 붓장난이니, 이에 속지 말라고 대놓고 까버리는 글을 적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단종을 시해한 뒤에는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에서 파 버리는 짓도 벌였다. 바로 적장자 단종을 살아있을 때는 문종의 서자로 만들어 버린 뒤 사후에는 서자 아래인 사생아로까지 격하시킨 것. 이래놓고 왕위 찬탈 전에는 자기 측근들을 시켜서 자신을 삼촌으로 어린 주성왕을 보필했던 주공단에 비유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보였다.
친족은 아니지만 세조 본인과 매우 가까운 왕실의 인척도 방해가 되면 가리지 않고 죽인 전적도 있다. 단종의 장인어른이자 정순왕후의 아버지 여량부원군 송현수는 단종복위운동에 휘말려 사사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세조 본인과 매우 절친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가 단종의 장인이 된 것도 세조의 영향이 매우 컸는데 송현수 입장에서는 옛 속담처럼 모진 놈과 친했다가 정말 날벼락 맞은 격이다.
원천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다. 태종이 저지른 왕자의 난 때문에 제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신을 만나러 며칠을 기다리는 태종을 피해 도망다닐 정도였는데, 후에 상왕으로 은거한 태종의 부름에 마지 못해 만나러 왔다. 이 때 태종이 스승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직접 소개시켜 주었는데 노인이 아직 어린 세조를 보고 "조부를 닮았는데 부디 형제를 사랑해라." 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다. 오죽하면 이런 야사가 남아있을까? 그리고 태종의 스승이었기에 원천석에게 관직을 주었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나중에는 태종이 직접 스승을 만나러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까지 찾아가는데 이를 알고 원천석이 미리 피했고 결국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치악산을 가보면 태종이 행차했던 길이나 잠시 앉아있던 곳이 남아있다.
3. 신하들에 대하여
3.1. 취약한 공신 관리와 공신 세력의 비대화
기록상, 세조 본인은 상당히 금욕적인 왕이었다. 사치품 같은 것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스스로 자신의 검소함을 자주 강조하기도 했다. 세조는 여색에도 관심이 별로 없어서 후궁도 매우 적었다. 그 후궁들조차 신하들이 왕실의 장래를 위해서 라며 부린 고집을 받아준 것이다. 술을 좋아해서 신하들과 연회를 자주 가진 것 정도를 제외하면, 세조는 '개인적 처신' 측면에서는 큰 결격 사유는 없다.
그러나 사생활의 검소함과는 별개로 국가를 운영하는 왕으로서는 결코 검소했다고 보기 어렵다.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한 것이었다. 법제상으로는 몇 대가 지난 공신전은 회수하도록 되어있었지만, 실상 회수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세조의 공신들은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 부패가 심각했다. 그럼에도 세조는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았다. 일례로, 세조의 공신 중 하나인 홍윤성은 평안도의 군량미 30만 석을 혼자 다 횡령하는 짓을 벌여놓고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다.
외척들도 견제하기는 커녕 세조의 처남들인 윤사분, 윤사흔과 세조의 사돈인 한확 등을 요직에 등용했고, 세조의 또다른 외척인 정인지 역시 비리가 많음에도 오히려 계속 요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부인인 정희왕후의 인척인 한계순, 한계희, 한계미, 성봉조와 다른 공신인 최항, 정창손, 김질, 이사철, 권람, 황수신, 김국광, 김겸광 등도 요직에 등용했다. 그 외의 외척들인 윤사로, 윤필상, 한치형, 신승선, 노사신, 심회 등도 다 요직에 등용했다. 심지어 한명회의 딸을 세자빈으로 들였다. 장순왕후가 18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안 그래도 권세 높은 공신이 왕의 장인, 왕의 외조부까지 되면서 조선 후기에나 나올 세도정치 못지 않은 권세를 휘두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조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을 터다. 계유정난은 조선시대의 성공한 정변들 중 명분의 정당성이 가장 빈약한 정변이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조의제문 그리고 후대의 김종서와 단종에 대한 동정적인 평가에서 볼 수 있듯 사대부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기 어려웠으며 아예 이징옥의 난을 시작으로 단종복위운동같이 세조의 찬탈에 반기를 든 시도가 계속 벌어졌고, 이런 혼란을 틈타 말년에는 이시애의 난까지 일어났다. 참고로 세조 시절 처음으로 등용된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세조의 계유정난 소식을 듣자마자 극도로 분노하여 곧바로 조의제문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림들에게도 세조의 정변은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었다. 태종은 반정에 참가하지 않은 신하들도 상당 부분 공감해주는 명분('적장자 계승')의 쿠데타였기에 공신집단에게만 과하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지만, 세조는 그렇지 못했다.
3.2. 권신의 세력화
무엇보다 세조는 전제 왕권을 통한 독재 정치를 선호해서 이러한 시스템을 철저히 왕에게 집중된 독재 스타일로 꾸준히 밀어붙였다. 주변 훈구 대신들의 왕당파가 있었긴 했지만, 이 훈구 대신들은 세종과 문종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관료가 아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형적인 도구들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세조는 태종, 세종과는 달리 훈구 대신들을 철저히 관리 및 감독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권력의 맛을 보자 차츰 타락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게 된다. 세조가 그 부패하는 절대 권력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폭군 유형에 속했던 만큼, 공신 우대 정책이 너무 과해서 그러한 권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것.
세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철저한 반대에 져주는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의해 농락만 당하기 급급한 임금들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보인과 김종서가 고명 대신으로 활동하고 황표 정사를 시행할 때 수양대군의 이러한 분노이자 배신감은 꽤나 커졌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을 직접 거뒀을 때 왕권을 유린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세조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세종과 문종은 신권에 농락을 당하고 늘 져주는 임금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함정.
오히려 세종은 반대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설득하면서 끈질기게 자기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스타일의 임금이었다. 게다가 세조 측이 엄청난 국정농단으로 홍보했던 황표정사도 그리 오래 시행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아직 제왕 수업을 받지 못한 단종을 합법적으로 후견인이 된 대신들이 일시적으로 보좌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오히려 세조의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 때문에 후대의 임금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끌어들이면서 정치 싸움의 의도치 않은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휘둘리는 왕으로 여긴 세조의 생각 자체가 매우 근시안적인 오착이었던 것.
세종과 문종은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할 때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 나가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여, 신속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필요한 난세에서는 혼란만 자초할 뿐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세종 - 문종의 치세는 태평성대였지 난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방상 중요한 사안들, 이를테면 북방개척 같은 정책들은 세조 때와 비교해도 과감함과 신속함에 있어 별 차이가 없었다.그 아버지와 형이 쌓아놓은 국방력을 과감히 갉아드셨다
3.3. 후대에 미친 악영향
정통성을 지닌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 때문에, 이후 조선은 '반정'이라는 이름 하에 끊임없이 왕위 찬탈에 시달렸고, 수많은 왕족들이 역모에 휘말려 죽었다. 게다가 두 번은 성공했다. 물론 첫 번째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막장이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 반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러 실책으로 도덕적이지는 않은 임금이긴 했다. 하지만 세조는 유교를 기반으로 하던 조선의 기반을 뿌리째 뒤집어 놓았다는 평을 피하기가 어렵다. 특히 무오사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세조에게 있기도 했고.
게다가 상술했듯이, 세조가 키운 공신 세력은 세조 이후의 왕권을 약화시켰다. 재위 말기에는 세조 자신도 너무 커져버린 공신들이 걱정되었던지 남이나 구성군 등 이시애의 난을 정벌한 세력을 신공신들로 새로이 책봉해서 한명회나 신숙주, 권람 같은 구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18, 신공신 세력이 안착하기도 전에 세조 본인이 곧바로 사망해버리면서 결과적으로 대실패했다. 오히려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 구공신의 대반격으로 신공신들은 예종 즉위 초기에 전부 숙청당했고, 예종도 구공신들을 나름대로 견제해보려고 했지만 그 또한 재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일찍 죽으면서 실패로 끝났다.
3.3.1. 성종 관련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어린 성종의 즉위는 왕권 약화로 인한 결과였는데, 원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이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서열 3위 자을산군이 즉위한 것은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의 부득이한 사정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그가 권신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즉, 왕실에서 명백한 왕위계승자인 1위 제안대군과 2위 월산대군이 있음에도 조선 왕실은 차기 국왕 하나도 누구로 할지도 제대로 결정하지도 못하고 권신 한 명에게 휘둘린 것이다. 한마디로 권신의 뜻, 입김에 따라 다음 국왕이 바뀌는 이상한 사태가 생겨버린 것이다.
성종 즉위 초기에는 훈구파에 의해 원상제가 실행되었다. 원래 원상(院相)이라는 건 조선시대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서, 국왕이 병이 나서 부재중이거나 너무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國政)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임(原任)•시임(時任)의 재상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주재하게 한 임시관직이었지만, 세조의 공신들로 구성된 원상은 1467년(세조 13년)부터 1476년(성종 7년)까지 무려 10년간 지속됨으로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왕권을 굉장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성인이 되어 수렴청정과 원상을 다 끝내고 정식으로 친정을 시작한 성종 본인도 구공신들을 견제해 보려고 사림파들과 친위세력들을 등용했다. 하지만 이 또한 대간에 포진한 사림파들의 입지가 너무 커지면서 비논리적이고 불합리적인 비판까지 일삼으면서 이상적인 형태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또한 성종 본인이 등용했던 친위세력 역시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성종은 무신들을 등용시켜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로 돌아갔으며, 역관, 의관까지 등용시키는 시도까지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 그 탓에 위상이 더더욱 강화된 구공신들이 권신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성종 시절에는 세조 본인의 바람과 반대로 신권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너무 비대해져버리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공신들을 향한 세조의 견제는 공신들이 성종 시절까지에도 상당기간 동안 국정을 좌우함에 따라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이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는 사실은 세조가 남긴 권신집단들이 자신의 '증손자'대까지에도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세조 때 등용돼서 성종이 훈구세력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 키워준 사림 세력은 세조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을 사초에 집어넣어서 수십 년 뒤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냈다. 성종 때 사관 김일손이 위에서 언급한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서 바닷가에 버렸다', '세조의 아들 덕종의 후궁 권귀인을 세조가 찝적댔다', '사육신의 난 직후 세조가 신숙주를 통해 사육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역으로 면박을 받았다' 등의 소문들을 성종의 사초에 고대로 기록해버렸다. 아울러 《세조실록》의 공식 기록엔 '단종은 자살했고 세조가 이를 불쌍히 여겨서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러줬다'고 조작해놨지만, 중종 때까지는 소문이어야 했던 '세조가 단종을 살해한 후 들짐승이 뜯어먹게 방치했고 이후 어느 사람(영월 고을 향리 엄흥도)이 몰래 묻어 주었다.'는 기록까지도 김일손은 성종의 사초에도 그대로 기록해버렸다. 《성종실록》 집필 과정에서 이것이 발각되면서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연쇄작용을 일으켜 무오사화라는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버렸다. 다만 이는 김일손의 병크로, 무오사화를 보면 알겠지만, 기록자로써 올바른 기록을 하려 한 게 아니라 걍 김일손 한 사람만의 일방적인 잘못이다.
혹자는 태종이 세종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며 '악업은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어라'는 말을 똑같이 세조에게 적용시키며 성종조의 태평성대가 마치 수양이 악업을 지어 준 덕분인 것처럼 말하나, 전혀 사실이 될 수 없다. 태종이 말한 '악업'은 이방석, 이방간 등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척 세력이 될 수 있는 민무구, 민무질 등의 외가 세력, 심온 등의 처가 세력 등을 제거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세종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주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악업'은 오로지 자신이 권력을 찬탈하고자 일으킨 계유정난, 사육신의 옥사, 단종의 사사 등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의 숙청이었지 정작 후대에 부담이 될 수 있을만한 외척과 공신 세력은 철저히 비호하면서 권력을 부여해주는 실책을 범했다. 즉, 태종의 저 말을 가지고 수양을 변호할 수는 없고, 성종이 왕권을 확립하고 치세를 만들어 낸 대부분의 공은 바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세조의 덕이 아니다.
4. 한계와 비판
4.1. 노비 폭증을 초래한 일천즉천 제도
한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조선시대는 奴婢인구의 大擴張期였으며 奴婢制의 最全盛期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노비인구가 늘어나게 된 주요 원인은 고려시대에 마련된 ‘賤者隨母法’과 ‘一賤則賤’의 원칙이 조선왕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良賤交婚이 성행하여 良役인구를 크게 잠식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양역인구의 노비화를 막기 위해 양천간의 교혼을 금지하거나,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良人과 婢간의 소생에게는 ‘從父法’을, 그리고 奴와 良女간의 소생에게는 ‘從母法’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유 노비 인구의 규모를 늘리려는 兩班士族의 집착에 의해 결국 『經國大典』(1485년 반포)에서는 양천교혼의 소생에게 모두 ‘일천즉천’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으로 규정하게 된다.
‘일천즉천’의 원칙은 18세기에 들어와 수정되기에 이른다. 즉 양역인구의 증대를 위해 고심하던 조선정부가 ‘奴娶良妻所生從母從良役法’을 1731년부터 永久的으로 시행하면서 노와 양녀간의 소생을 모두 양인 신분으로 귀속시켰던 것이다. 더군다나 19세기에 이르러 納貢하던 內․寺奴婢의 從良(1801년), 奴婢世襲制의 폐지(1886년), 노비제의 전면 폐지(1894년) 등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1894년 甲午更張에 의한 노비제의 혁파는 법제상의 조치였을 뿐이며, 일제강점 초기까지도 노비는 殘存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던 노비가 법제상의 변화로 인해 급격히 사라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 조선시대 奴婢制의 推移와 노비의 존재 양태 -동아시아의 奴婢史 비교를 위한 摸索-《역사민속학》 2013, vol., no.41, pp. 73~99 (27 pages)
고려 시대 이래로 양천교혼은 금지됐고, 만약 양천교혼 소생이 있다면 모두 천인계를 따라 천인으로 규정됐다. 문제는 그로 인해 양역을 부담할 양인의 수가 갈수록 감소해 국방이 취약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건국 초부터 대책을 빈번히 논의했고, 1414년(태종 14)부터 노비종부법을 양인의 비처첩소생에 대해 실시했다. 그렇지만 노비종부법 실시에 따른 여러 폐단 때문에 갑론을박이 있었고, 마침내 1432년(세종 14)에 이를 폐지하고 노비종모법으로 바꾸었다.출처
그리하여 세조 때부터 이를 금지하고 종전과 같이 부모 중 한 쪽 신분이 천인이면 그 소생은 신분뿐만 아니라 역처 · 상전까지도 천인계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 내용을 『경국대전』에 법제화하였다.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비종모법
세종 때의 노비종모법은 아버지가 노비여도 어머니가 양인이라면 그 자식은 양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조가 확립한 일천즉천은 그조차 없었다. 이러한 제도적 퇴보 탓인지 그간 불법이었던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도 세조시기에 활성화됐다.
세조 때인 1461년에 일천즉천이 못 박아진 이후 노비를 줄이고 양인들을 늘리기 위해 노비종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의 맹공을 받았다. 조광조는 노비종모법과 한전론을 중심으로 하는 민생 개혁을 시도하다 사약을 받았고, 율곡 이이도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을 주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송시열은 1669년에 공사천 양처소생은 남녀 불문하고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자고 주장했다가 주위의 거센 반발과 매도에 시달렸다.
결국,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세종시절의 노비종모법이 다시금 시행됐고 그럼으로써 조선의 노비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 미만으로 크게 감소했다.
4.2. 군사 분야
세조가 남긴 업적 중 군사 분야로는 진관 체제 완성이 있다. 이전까지 조선의 지방군은 함경도와 평안도는 군익도 체제로, 한반도 남부 해안 일대는 영진군과 기선군이 존재했지만, 그 외의 내륙 지방은 마땅한 군사 조직이 없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잡색군이 편제 되어 있지만 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보니 만약 국경이 외적에게 뚫리면 내륙까지 그대로 뚫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세조는 이렇게 지방별로 나눠진 군사 조직을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1456년(세조 2년), 함경도와 평안도에만 있었던 군익도 체제를 전국 8도에 도입하고 획일화했다. 그리고 1457년(세조 3년)에는 기존의 군익도를 주진과 거진으로 나눠서 개편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관체제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존의 지방별로 달랐던 지방 육군을 정병(正兵)으로 일원화해서 지방군의 주력으로 삼았다.
또한 이시기에 조선군의 병력과 군량이 대폭 확대되었다. 보유하던 군자곡이 90만석에 달했고, 1448년(세종 30년)에 10만명이었던 군액은 18만~22만명으로 늘어났다. 군사들 중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에 정예는 10만 명에 용맹한 군사는 3만 명이라고 양성지가 말하는 기록28이 나올 정도 였다. 또한 무신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실전에서도 성과를 낸다. 일례로 1467년 조선과 명나라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0,000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 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나라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나라군의 1/5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나라군보다 병력 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다. 조선군이 건주 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30 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러한 군사력 확대에는 부작용도 있었으니 대표적인 것이 보법이었다. 이전까지는 봉족제에 따라 군사 1명당 조호가 병종과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었다. 평균적으로 3명이 한호를 이루되, 토지 소유의 빈부를 기준으로 의무자의 재산에 맞추어 부유한 집안은 1정을 1호로, 가난한 집안은 5정을 1호로 배정하고 부유한 이가 군역을 지는 경우에는 조호를 지급하지 않는 식으로 각 가구의 경제 사정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었다.
그러나 세조 때 군액을 확대하기 위해 보법을 시행하면서 호가 아닌 인정을 기준으로 계산하게 되어 1명당 2정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는 군역을 번거로운 조사와 산정 과정 없이 간단하게 부과하고 군사의 수를 크게 늘릴 수는 있었지만 보인이 맡는 경제적 부담이 심각하게 커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이전에는 가계 수준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던 군역 부담이, 세조의 보법 이후로는 일률적으로 인정을 기준으로 하게 된데다 이전보다 부담 자체도 커져서 보인들이 이를 감당할 수 없게되어 이를 피하려고 유망이 빈번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제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군역을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정병 역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 고려시대에 비유해 보면 군인에게 지급되는 군인전이 복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군역의 폐단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보법을 계기로 조선은 군인층의 붕괴와 양인의 감소가 점차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된 시점에서 조선에 제대로 된 군인층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또한, 문종 대 개편된 오위를 재개편할 때, 갑사를 5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린 것도 실책으로 꼽힌다. 원래 갑사는 5위에 골고루 편제되었고 필요시에 군관 역할을 맡아 부대를 통제하고 지휘도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조직을 의흥위 하나에 몰아넣은 것이다. 전시에 장군이나 장교가 전사하거나 사기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일선 부대가 순식간에 와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부적절한 조치였다. 아랫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지도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걸 이상적인 정치로 여겼던 세조 본인의 성향이 군사 분야에서도 반영된 셈이다.
총통위를 폐지하여 화포 개발이 약화되었다는 인식이 강한데 총통위가 폐지된 실제 이유는 화약 병기가 널리 지방군에게도 보급되고 민간에서도 염초 제조 기술이 퍼져 관영 수공업으로 염초를 공급받는 것보다 민간에서 구매하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화포 개발은 그것과는 별개로 이루어졌다. 세조가 창기병을 없애고 궁기병만 남겼다며 이를 비판하는 인식이 강한데 이미 세종시대부터 창기병과 궁기병을 별도로 분리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기병이 창과 활을 모두 다 써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고 세조는 이 인식을 공식화 시킨 것 뿐이다.
거기다가 위에 얘기한 진관 체제 역시나, 기존보다 군사 체계를 뿔뿔이 흩어놓는 바람에 기존 체계라면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을묘왜변때 조선의 남부 지역이 박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4.2.1. 국방 정책에서 드러난 문제점
문종 때까지 세계적인 수준에 있었던 화약 병기는 15세기 후반, 즉 단종 때부터 혼란한 국내 정세34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반대 세력이 화기를 반란에 이용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 유지에 머물면서 오랜 기간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 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이라는 화기 부대마저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켰다.
모반에 사용될 수 없다
이 외에 군사적인 실책도 꽤나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서 화력을 약화시켜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4.3. 집현전 폐지
큰 실책 중 하나로 집현전의 폐지를 들 수 있다. 물론 사육신을 위시한 자신의 반대파 대부분이 집현전 출신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이런 자문 기구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국왕 자문 기구의 역할은 뒤에 홍문관, 규장각 등이 계승하기는 하지만 일단 한번 끊어진 맥락을 연결시키는 것도 어렵다.
문, 무, 잡학에 관련된 모든 국가 전반의 일을 연구하고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했던 집현전에 비하여, 후대 자문 기관인 홍문관은 아무래도 문에 치우친 기관이었고 덕분에 성종조에는 문치적으로는 큰 치적들이 있었으나, 국방력 약화, 성리학 일변도의 정치 흐름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즉, 국가 운영의 브레인 집합소였던 집현전을 폐지함으로써 수양은 자신 이후의 국가의 성장 동력을 없애 버렸으며, 그나마 문치 부분에서는 홍문관이 이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결국에는 그마저도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으로 옹립된 중종의 잦은 옥사와 실정으로 인해 관학의 성장 동력은 멈춰버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학문은 연산군과 중종 시대를 거치면서 관학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사림들이 주도했고 사림들이 성리학에 대한 이론에 몰두하느라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큰 어려움에 처하게 했으며 그럼에도 사림의 학문은 숙종 때까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렇게 침체기에 빠진 관학은 영조와 정조 시절이 되어서야 다시 부활하게 되었으나 이후 순조 때 도로 퇴보하고 말았다.
단, 집현전이 세종의 능력으로 유지되었던 기관이었다는 점 또한 있다. 거기다가 집현전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명확한 규정이 없는 것이라서 변질되기도 쉬운 환경이긴 했다. 실제로 원래 집현전의 기능은 실무직 육성이 아니었고, 오히려 홍문관 쪽이 기존의 기능에 가깝다. 즉 집현전 폐지≠실무자 육성 차단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4.3.1. 악영향
집현전을 폐지하여 건전한 관학파를 양성하는 인재 집합소를 없애버려서 당대에 자신이 멋대로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일조했다.
집현전 폐지와 더불어 세종 대에 육성된 인재들을 세조가 대거 도륙냄으로써 조선의 인재풀은 일거에 박살내버렸고, 결국 이것이 세조가 그나마 있는 능력있는 공신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숙청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된다.
4.4. 계유정난 미화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지만,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평온한 시대였다고 볼 근거가 꽤 되는 편이다. 단종이 섭정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선대 왕의 충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단종에겐 흠결 낼 수 없는 명백한 정통성이 있었으며 김종서, 황보인 등이 그의 왕권을 제약한 바는 결코 없었다. 수양 측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엄청난 전횡을 저질렀다고 선전했지만, 실제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딱히 그렇게 볼만한 근거도 부실할뿐 아니라, 김종서, 황보인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조건부로 부여된 권력이었다. 애초부터 김종서와 황보인은 외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앙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명문 세도가의 좌장도 아니었다.
당시 조선에서 중앙의 정치명문가라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의 명문귀족가문이 아니라면 개국공신이나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가의 후예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종서의 경우 이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세종과 문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승이 되었고, 그 정승이라는 지위로 인해 어린 국왕의 보좌 역할을 잠시 맡았을 뿐이다. 그래서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은 단종이 성인이 되는 순간 무조건 반납되게 되어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기반 없는 김종서에게 권력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 > 왕의 총신 > 세도가 공식이 성립할 만큼 왕권이 강력하다는 뜻이다. 세도가 > 왕 공식이 성립하는 훗날을 생각해보면.
때문에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처럼 막가는 성향의 인간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는, 생각보다는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어려운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이 수양 대군의 탁월한 결단력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향후 국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긍정적 평가를 받긴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즉 탁월한 판단력과 결단력은 좋은 군주의 자질이었을 지 모르나 그게 좋은 왕의 덕목이 아니었다는 것.
사실 세조 입장에서는 저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근본적으로 보면 계유정난의 명분은 없다. 단종은 적법한 절차를 걸쳐 즉위한 정통성이 완벽한 왕이며, 김종서와 황보인이 권신이었다고 볼 근거도 부족하다. 단종이 왕위에 부적합한 천치였던 것도, 나라가 파탄지경이 난 것도 아니다. 즉, 계유정난은 근본적으로 세조가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서 멀쩡한 왕실을 뒤엎은 것이다.
물론 단순히 권력욕에 눈이 뒤집혔다기보단 자신을 좋게 봐주던 문종이 죽고 난 뒤 즉위한 단종이 아직 어려 왕권이 탄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어느 정도 있던 수양대군이 자칫 오해받으면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왕이 되고 싶어서'나 '내가 목이 달아나기 전에 선수쳤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명분을 만들어내려면 '당시는 혼란한 시기였다' 그리고 '저놈들은 천하의 간신이었다'고 폄훼할 수밖에 없었다.
4.5. 법체계 파괴
일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조선의 법체계였다. 이전의 법체계에서는 법조문이 있으면, 왜 이런 법이 만들어 졌는지,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이런 부분들이 먼저 기록되고 이후 이에 대한 처리 등이 나열되는 방식이었는데, 세조는 이런 방식이 답답하다고 여겨 이를 싹 잘라 버리고, 어떤 형벌에 해당하는 죄는 무엇 무엇이고, 형량은 어떻다라는 식으로 깔끔하게 보이도록 정리했다. 하지만 이는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문제가 점점 생기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이런 조항은 왜 생겼는지, 왜 이렇게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는지 이 부분을 전부 다 잘라 버려 오히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했는지를 찾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업무 처리에 효율이 떨어지게 되는 문제를 가져왔다.
당장 자신의 시대에서야 사람들이 왜법 조문이 만들어 졌는지 당사자들이니 알고 있으나, 이후 세대를 고려한 정보들을 모두 날려버림으로써 문제를 가져온 것. 당장 세계의 황당한 법조문이라고 만들어진 인터넷 문서를 봐도 시대 상황이 바뀐 상황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법들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조문들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안다면, 현실에 맞게 개정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쉬운데 이 부분들을 날려 버렸으니 법률 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4.6. 근시안적인 안목
또한, 그 자신이 왕권 강화를 위해 펼친 정책들 또한 얼마나 그가 근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공신 문제. 평생 그가 싫어하고 비판했던 인물들인 한고조, 송태조와의 공신 처리 문제를 보면, 그가 갖춘 정치력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가 드러난다. 공신 세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군주의 통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국가 운영에 큰 지분을 가진 이들은 군주에게 있어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도 있고,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고조는 숙청을 통하여 자신의 왕권을 확보하였고, 그가 유약하다고 비판한 송태조는 배주석병권을 통해 그들의 부귀는 보장하면서 정치적 권력에서는 떼어놓는 온건한 방식으로 공신들을 처리하였다. 덕분에 그들의 후대는 기존의 공신 세력에 대한 부담 없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고조는 부인 문제로 좀 골치가 썩었으나. 반면, 세조는 오히려 이런 공신 집단을 키워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는데, 이들 집단이 제거되지 않아, 이후 아들, 손자 대에 왕권의 제약과 옥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의 안목이 근시안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명분없는 쿠데타를 한 것부터가 만악의 근원이지만.
5. 결론 및 총평
호불호가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로,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폭군과 패륜아라는 부정적 평가와 왕권 강화에 노력한 노련한 긍정적 평가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평을 받고 있다. 다만 폭군 타이틀을 떼려면 치세나 업적이 저런 행적을 무마할 정도로 출중해야 하는데, 물론 세조의 치세가 다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훌륭했다고 보기도 애매해서 재평가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통들어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군주였다는 점도 그의 평가를 낮추는데 일조하고 있다. 심지어 칭기즈 칸과 마찬가지로 평가 자체를 해서는 안되는 인물로까지 인식된다.
세조는 왕위찬탈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결여 이외에도 장기적인 국가 전략이나 정치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던 탓도 있다. 후대에 큰 부작용이 따를 소지가 큰 정책들을 별다른 대안과 협의도 없이 무작정 실행에 옮겨버렸고, 그것이 민생에 직접적으로 큰 부담을 주었다는 것도 세조의 부정적 평가에 기인한다.
아버지 세종이 가까스로 완성시켰던 혁신적인 정치 문화와 우수한 제도를 일거에 뒤바꾼 세조의 행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들 중 하나다. 아버지 세종대왕과 형 문종은 국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군주들이었다. 집현전 등을 통한 지속적인 학자 배출과 토론을 통해서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긍정적인 쪽으로 강화시켰다.
세종과 문종 치세에는 신하와 군주가 상하일치하여 신하들은 군주를 존경하고, 군주는 신하들을 예로 대하여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서로 상생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세조는 조선의 정승이자 고명대신들인 김종서, 황보인을 비롯한 수많은 뛰어난 원로 인재들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았고, 그 목을 저잣거리에 효수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이는 실로 세종과 문종이 쌓아놓은 인의의 정치 시스템의 실질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6. 성격
현재에 남아있는 기록상으로 과시욕과 허영심이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자 시절부터 소맷자락을 남들보다 훨씬 크게 하여 그 소매를 펄럭거리며 걸었고 겨울에 강무(군사훈련)가 열리면 홀로 반팔차림으로 나섰으며, 말을 탈 때는 일부러 늙고 둔한 말을 탔는데 그러다가 말에서 낙마하게 되면 멋지게 착지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세조가 정말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허세나 부린다고 여기고 말 뿐이지만 기록에 의하면 유교서적, 역사, 역볍, 병서, 풍수지리, 음악, 악기, 궁술에 능했고, 상술했듯이 보여주기식이긴 하나 추운 한겨울에 반팔차림을 했을 정도로 건강했으며, 심지어 아버지 세종이 아들 세조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키면 착착 잘 해냈다. 이러니 자기 잘난 맛에 취하는 것도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자뻑 기질은 왕위에 오른 뒤 심해졌는데, 자신을 영웅인 양 떠들어 댔다. 스스로 영웅이라 진심으로 믿었던 건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세자에게 양위할 때 신하들이 반대하자 "운이 다한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법이다."라며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7. 당시 백성들의 인식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세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백성들은 어린 나이에 아무 죄도 없는데 시해당한 단종을 크게 연민하고 있었고 계유정난(세조의 반정) 공신들의 악을 말리지도 않는 세조를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장 계유정난의 공신 중에는 권력을 이용한 재산강탈이나 기타 만행을 서슴지 않는 자가 더러 있었고, 홍윤성과 같은 끔찍한 살인마도 존재했다. 이 때문에 당시 조선사회 전반에는 세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수많은 소문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조카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 문종의 아내였던 형수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었더니 그 자리에 욕창(한센병)이 생겼다는 것과, 단종이 이른 나이(16~17세)에 죽자 분노한 현덕왕후의 혼령이 의경세자를 죽게 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 외에도 의경세자의 죽음에 분노한 세조가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어 바다에 수장시켰다는 소문이 나도는 등 세조 치세 동안 달갑지 않은 소문이 쌓여만 갔다. 해당 소문의 경우 세조가 형수였던 현덕왕후의 시신을 능인 현릉에서 파내어 물난리가 나는 곳에 이장해 버렸던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8. 야사
많은 야사에 등장하는 임금이기도 한데 그 야사의 대부분이 그의 왕위찬탈과 그로써 비롯된 일과 관련된 내용이다. 위의 문수보살 이야기나 수종사의 설화처럼 그에게 호의적인 내용도 조금 남아있지만 그런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그의 잘못과 그로 인한 인과를 다룬 내용이며, 그 중에는 정축지변 전설처럼 그의 추악한 인성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도 있다.
고양이 문수보살 일화도 그렇다. "왜 자객이 세조를 암살하려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일단 세조 개인에게 원한을 가진 자가 있다는 반증이 되어버린다. 조선의 대부분의 독살설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들이 권력 쟁취를 이유로 하는데 비해 자객이 직접 세조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대목, 그러나 그 배후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부분을 보면 자객은 결코 권력욕으로 세조를 죽이려던 건 아니었던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럼 권력욕이 아니라면 실패하면 사지가 뜯겨 죽을 일을 왜 하겠는가? 답은 간단하다. 세조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런 건 간단히 씹어먹을 정도로 매우 증오하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배경은 이루 말할 것도 없다.
라이벌 김종서와 엮어서 (현덕왕후의 저주로 생긴)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찾아갔더니 거기의 아낙네가 사실 아버지를 비난하다 궁을 떠나버린 세조의 딸이었던데다 그 남편이 계유정난 때 살해당한 김종서의 손자였더라" 라는 야사도 있다. 야사의 끝에 따르면 세조는 그 사실을 알고 너그러워져서 자신이 죽인 김종서에 대한 속죄 같은 의미로 그 김종서의 손자를 정식으로 부마로 맞으려고 했지만, 딸 부부는 소식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이 야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다.
8.1. 불교 관련
다만 숭불 정책 때문인지 불교와 관련해서 세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야사도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등에 종기가 난 세조가 온천을 찾아가 어떤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한 후 동자승에게 "내가 왕이니 등을 밀어줬다는 것을 비밀로 해라."라고 하니 그 동자승도 "당신도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줬다고 알리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해 사라져버렸고, 깜짝 놀란 세조가 자신이 본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림과 조각으로 남겨 상원사에 맡겼다든지, 불당에 절하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자객을 알려줘서 그 보답으로 상원사에 양묘전을 내렸다든지, 속리산 법주사로 갈 때 가마 걸리지 않게 가지를 들어다 준 소나무가 기특하다며 정2품의 품계를 내려줬다든지 하는 속리산 정이품송 소나무 야사도 있는데, 이는 불교를 숭상하던 세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위의 야사들이 보여주는 세조의 나쁜 면모를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세조의 후원을 받는 불교로서는 이런 인식을 좋든 싫든 널리 퍼뜨려야만 했을 것이다.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은 이 설화들이 세조와 한명회의 사주를 받고 연출한 프로파간다라는 설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른 야사에서는 세조가 강원도에 위치한 오대산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해질녁이 되어서야 경기도 양주목 양수리에 도착하였다. 세조는 속리산을 비롯해서 오대산에 이르기까지 지난날 저질렀던 과오를 반성, 참회하고 생기는 한센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국의 명산대찰들을 찾아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세조의 행차는 화려하지 않았고, 세조가 머무르는 행궁 주위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한곳으로 모이는 양수리(두물머리)의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잠에 들었다. 잠이 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는데 세조는 "행궁 근처에 큰 사찰이 있음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대신들은 사찰이 있다고 얘기를 하지 않았냐"며 의아해 하였다. 다음날이 돼서야 찾아보라고 일렀지만 대신들은 "이곳 인근에 종소리가 들릴만한 절은 없다"며 말을 했지만 강 건너를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행궁을 떠난 대신들이 한 나절이 지나서야 뜻밖의 이야기를 했는데, "강 건너에 있는 산은 운길산이고, 산 정상 가까이에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 있으며 동굴 앞에 절터의 흔적은 있으나, 이미 폐허가 되어 사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동굴 안은 열여덟분의 나한님들이 가지런히 조성되어 있었다"고 얘기해주었다. 대신들이 무엇보다도 동굴 앞에 가까이 이르니 십팔나한상 앞쪽의 천정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니 그 소리가 큰절에서 듣는 아름다움의 범종소리와 흡사하다는 보고를 받고 세조는 "그 소리가 내 귀에만 들렸으니 분명 나한님들의 조화일 것이다"며 길을 직접 잡고 경건하게 참배하였다.
참배 이후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신묘한 조화로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그 신력에 감복'하고 "이곳이 절터이나 나한님들의 계시가 분명하다"며 속히 절을 짓게 하였다. 절 이름은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로 울려 퍼진 뜻을 새겨 수종사라 함이 좋은 듯하다고 명을 내리고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는 등 세조에 있어 불교가 직접적으로 연관,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9. 현대의 평가
재미있는 점은 정권이나 정파에 따라서 세조를 보는 관점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면 세조와 비슷한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 등으로 집권한 정권이 있던 시절엔 잔혹한 숙청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권신들로부터 왕실을 지켜낸 필요악적인 존재라는 평가가 대세였다.
물론 군사정권 시절에 무조건 세조를 옹호하던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우영 화백은 만화에서 아예 세조의 별명을 '쿠데타 리'라고 붙였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예 5.18 당시의 전두환에 빗댔을 정도인데 《단종실록》을 100% 신뢰하고 세조의 행적을 보자면 그야말로 구국의 영웅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에 맞추기 위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도 했다.
똑같이 쿠테타로 왕이 된 인조는 왜 군사정권이 미화하지 않았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인조의 경우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최악의 흑역사 때문에 군사정권조차도 차마 미화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청나라에게 허무하게 굴복한 인조를 롤모델로 삼는 건 합법적으로 집권한 지도자에게든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에게든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쿠데타의 명분은 세조보다 인조가 훨씬 충분했다.
세조를 미화하는 사극 대다수가 계유정난을 정당화하면서 정작 세조의 진짜 업적들을 다루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도 아이러니한 점이다. 설령 다루더라도 내레이션으로 때우는 등 매우 짧고 간략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쩌면 군사정권의 세조 미화가 세조가 왕위에 있을 때 남긴 진짜 업적들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계유정난 자체를 세조의 최대 업적으로 여기는 식이었기에 세조를 미화한 사극들 또한 그 영향을 받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에도 오명을 감수한 구국의 결단자라는 식의 평가가 대세였다. 이는 세조 즉위 이후를 다룬 김동인의 역사 소설 대수양 같은 작품들의 영향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1990년대엔 《조선왕조실록》의 완역이 진행 중이었던 데다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이런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세조를 미화하는 사극들이 많이 나왔고 이러한 사극들을 접한 대중들에게 세조에 대한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
따라서 문민정부이자 하나회 숙청과 민정계 공천 탈락으로 유명한 김영삼 정부 시절엔 세조가 많이 비판받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하나회와 신군부를 싹이 다시 피어나지 못하도록 싸그리 숙청하기는 했지만, 김영삼 자신이 3당 합당으로 보수정당 소속이 된 면도 있다. 국민의 정부 시절도 역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사정권과는 관계는 없지만 권위주의 정권의 잔재가 제법 남아 있었던 측면도 있었으며, 더군다나 김대중 자신이 당선을 위해 자유민주연합과 연정해야 했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고평가해 놓은 세조를 무작정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세조의 계유정난에 명분이 없다는 인식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으로 세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확산되면서 대중적 이미지가 추락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면서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이 한글화되어서 접근성이 높아졌는데, 여기에서 세조와 공신 세력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역사를 어떻게 미화하고 조작했는지에 대해 그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 권위주의를 부정한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노무현 탄핵 사태로 인해 기성정당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었으며, 17대 총선으로 인한 정치인들의 세대교체도 더해지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는 세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많이 퍼졌다.
각종 역사 카페와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전한 2010년대부터는 계유정난 뿐만 아니라 군주로서 능력적인 부분에서도 잘못된 부분이 많았다는 혹평이 급증했다. 일각에서는 '군사정권에 의해 거품만 잔뜩 꼈고 정통성은 물론 업적과 인간성도 0에 수렴하는 암군' 수준으로 급격히 격하되었고, 잘 굴러가던 초기 조선의 정치 시스템을 무너뜨린 파괴자로서 헬조선의 발판을 만든 인물 중 한 명이라는 극단적인 악평까지 듣고 있다. 현재도 '세조(世祖)'라는 묘호가 이 사람에게 너무나 과분하다면서 수양대군 내지는 수양으로 낮춰 부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래도 2000년대 ~ 2010년대엔 21세기 이전에 세조를 미화하는 작품들을 자주 접해 온 기성세대들을 중심으로 세조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세조 미화 사극들이 꽤 나왔고, 세조가 비록 잘못은 많이 있을지언정 그의 업적만큼은 최소한 인정해 주자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2020년대에 들어서는 그 업적들마저 싹 다 부정당하고 있는 중이며, 세조를 비판하는 사극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나아가 중장년층들 사이에서도 세조의 평판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의외로 정치 성향이 보수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세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당연하지만 보수 분파 중 하나가 왕당파인데, 세조는 왕당파의 지상 윤리인 정통성을 완전히 말아먹은 패륜아다. 유교적 논리로 도저히 옹호가 불가능한 만행을 워낙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평가가 바닥을 기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위의 수정주의적 시각에서 한 술 더 떠서 아예 수양도 아닌 이유라는 휘(이름)를 그대로 부르며 왕족으로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비슷하게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이나 당태종처럼 정치력과 여타 능력이라도 좋았다면 그나마 명군으로 평가받을 여지가 있었겠지만, 조선 후기 사회적 적체의 원인을 대부분 자신이 제공했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비판을 받는다.
종합하자면 민주화 이후 한동안은 단순히 군사정권 시절 쿠데타 이미지 때문에 억지로 고평가를 했던 데에 대한 반발로 "잔혹한 숙청과 그에 대한 정당성" 정도의 인식에 머물렀다. 반면 2000년대 중반 이후의 평가는 복합적으로 변화했으며, 특히 형 문종과 조카 단종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군주주의적 시각과 함께 잊혀졌던 문종의 업적이 재평가받는 반면 세조는 새롭게 재조명되면서 부정적 평가가 증가했다.
10. 태종과의 비교
세조에 대해서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정말 많이 닮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자신의 반대파의 거두와 혈육들을 죽이고 전대 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아 즉위했으며, 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에도 능통한 능력자라는 점에다 강력한 왕권 확립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세조는 태종의 격세유전이라기보다는 능력은 매우 떨어뜨리고 폭력성과 잔혹성만 잔뜩 키운 태종의 열화판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한마디로 잔인함은 태종보다 더 하고 능력은 태종보다 한참이나 모자르다. 또한 세조는 실질적으로 왕권을 약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니 왕권을 강화하며 신생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막중한 책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태종(太宗)'의 묘호를 받은 이방원과 공신들의 힘이 비대해지도록 두어 결국 장기적으로 왕권이 흔들리게 되고 선조들(태조, 태종, 세종, 문종)이 피땀흘려 일군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든 수양대군은 할아버지를 닮기는커녕 정반대의 길을 간 인물이다. 단순히 쿠데타를 일으켰다라는 점만 놓고 비슷하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 심지어 그 쿠데타도 명분 면에서 너무나 차이가 크다.
다른 왕과 비교하자면 태종은 자기 이복형제는 죽였으나 동복형제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음에도 살려 주었고, 오히려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아들인 태종을 죽이기 위해 조사의를 시켜 반란을 일으키자 그나마 태종을 싫어하던 이들까지 모두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동복형제, 이복형제를 죽인 광해군도 자의는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의 계모는 죽이지 않았다. 심지어 연산군마저도 자신의 이복형제를 살려 주었다. 반면 세조는 자기가 보필해야 마땅한 임금인 조카도 모자라 서모인 혜빈 양씨, 동복형제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이복형제인 한남군과 수춘군 및 영풍군 등 자기에게 반대하는 일족들을 자비없이 싸그리 죽여버렸다. 반면 태종은 이복동생 이방석과 이방번은 죽였지만 동복형인 회안대군과 정적이었던 정도전의 자손은 살려주었는데 이는 쿠데타의 명분도 충분하거니와 당시 기득권층이 태종을 지지했고, 태종 본인 또한 뛰어난 정치력으로 이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결여된 정통성+집권층의 지지 결여+본인의 부족한 정치력'의 3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세조는 조금이라도 역모가 의심되거나 연관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모조리 죽일 수밖에 없었다.
태종이 신덕왕후의 무덤을 이장한 건 맞지만 단순히 그녀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이장한 건 아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도성 안에 왕실의 무덤을 쓸 수 없었는데, 아버지 태조가 신덕왕후의 무덤을 조성해 만들 때 이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태종 입장에서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유가 신덕왕후의 배겟머리 송사로 인한 잘못된 세자 책봉 문제였기에 이방원 입장에서는 명분 수립을 위해 그녀를 일개 후궁으로 격하시킬 필요가 있었으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예우하지 않는 것에 그쳤을 뿐 무덤을 정동에서 지금의 성북구 근처로 이장한 것도 후궁 수준으로 완전히 격하시킨 것도 아버지 사후에야 했다. 형 정종과의 사이도 매우 좋았다. 즉, 세조가 조카와 형제들을 죽인 일은 정당한 이유가 전혀 없는 명백한 패륜이었다. 결과적으로 세조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존재는 송두리째 뽑아버린다는 방침 때문에 단 한치의 빈틈도 없이 철저하게 말살을 해버린 것이다.
10.1. 쿠데타의 명분 차이
태종의 쿠데타는 태조 이성계가 장자 계승의 원칙을 어겼다는 것과 건국 초기라 정국이 불안정하다는 명분이 있었던 반면, 세조의 쿠데타는 오히려 멀쩡한 왕의 정통성을 해치는 행동이 되었다. 태종의 쿠데타 명분이 장자 계승이라는 원칙에 근거한 반면 세조의 쿠데타는 권신 세력이 역모를 계획했다는 주장만 내세우고 있다. 우선 태종이 아버지 태조에게 항거한 이유는 어느 정도 명분이 있었는데 조선이 건국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후계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통성임에도 태조는 정실부인 소생들인 태종의 첫째 형인 진안대군도 둘째형 정종도 아닌 정치에 아무 것도 모르는 새파랗게 어린 막내 아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버린다. 그나마 나이가 어려도 유일한 적통이라는 식의 정통성이 있다면 이 책봉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었겠지만 이복형들도 정실 부인의 소생들이라 이방석은 유교 왕국 조선에서 보더라도 태조의 2번째 정실인 신덕왕후의 차남이라 정통성이 뛰어나지 않았고 태조의 일방적인 독단으로 세자에 책봉된 것에 불과했다. 결국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능력도 출중했던 태종이 크게 반발한 것. 태종이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벌였던 동복형제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편법까지 동원하였고 숙청한 정적 정도전도 정도전의 자녀와 아우들도 살려주고 나중에 벼슬길도 다시 열어주는 관대함을 보였다. 또한 본인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명분인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둘째형 정종의 양자로 들어갔다.
반면, 세조는 동복형제부터 본보기로 죽였으며 이미 죽은 형의 묘(현릉)까지 능욕했으니 똑같은 패륜이라고 보더라도 클래스 자체가 다르다. 나이는 어리나 정당하고도 확고한 왕위 계승 자격을 가진 조카 단종을 강압적으로 몰아내고 개인의 욕망만으로 왕위에 오른 명분이 전혀 없는 찬탈이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세조 사후 시간이 흘러 세조의 후손들이 계속 왕에 즉위한 후에도 세조의 찬탈에 대해 조선에서 계속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무오사화의 원인으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시중에 발간된 어떤 책에서는 태종과 비교하며 세조를 변호하기도 하지만 애시당초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의 정통성의 유무부터 권력을 잡은 이후의 행보까지 도저히 태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패륜과 무능의 극치를 보인다. 심지어 그 책에서는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수양은 양위를 원하지도 않았는데 단종이 지레 겁먹어서 양위를 했다고 하는 말까지 하며 세조를 변호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양위 이전에 수양대군이 여러 관직을 독식하여 단종을 꼭두각시 왕으로 만들고 정치적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안평대군, 금성대군, 혜빈 양씨를 유배 보내는 등 “네가 물러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이미 권력을 다 빼앗은 다음에도 계속 이와 같은 압박을 하면서 양위받을 생각은 없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를 않는 부분이다. 이는 다른 선위의 예와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해 보아도 태조가 양위를 받는 부분과 비교해보면 태조는 3일 동안 왕위를 사양한 반면59 수양은 거의 덥썩 받는 수준임을 알 수 있다. 1~2마디 사양이야 하고 있지만 이 상황을 문자 그대로 읽지 않는 한 세조가 왕위를 받을 마음이 정말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10.2. 국왕으로서의 역량 차이
이 부분에서 태종과 세조 사이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 한계점을 거론하는 단락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실정은 세조의 이 일방주의 성향에서 기인하고 있다. 특히 세조가 명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친족을 학살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집현전을 없앤 것만 봐도 더욱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육신 문제도 얽혀 있었겠지만, 사실 수양대군은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단순한 탁상공론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을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단정지었다. 이것이 이어져 결국 피를 보고야 만 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었다.
그렇다고 세조의 업적들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지나치게 냉혹하고 권력에 유난히 병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을 가졌던 탓에 저지른 실책과 과오들이 그 업적을 덮고 남을 정도로 굉장히 심각하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십 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에서 그의 왕위 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 행위는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무척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두드러진다. 태종이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역모를 생각했던 이유로 제거하고, 공신인 이숙번을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냈던 반면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 공신인 한명회를 자신 인생의 참모이자 친구라는 명분으로 잘 대해주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혼인 관계까지 맺어 외척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10.3. 업적 차이
태종은 이후 국왕이 되면서도 조선의 기반을 단단히 쌓는데 밑거름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우선 왕권 강화를 위해 자기 아내 원경왕후 민씨와 민씨 가문의 권력 남용이 발생하자 민씨 가문을 거의 멸문지화할 정도로 싸그리 쓸어버렸고 아들 세종을 즉위시킬 때 아무 죄 없는 세종의 장인 심온까지도 누명을 씌워 숙청할 정도였다. 물론 민씨 가문과 심온은 사형당할 정도로 큰 죄가 없었는데 죽인 것이라 이는 도덕적으로는 큰 비판을 받아도 할 말 없지만 후에 세종과 문종이 태평성대에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큰 이바지가 된다. 하지만 세조는 한명회와 사돈까지 맺어가며 공신들을 방치하고 큰 권력을 줘서 훗날 후대에 훈구 세력이 형성이 되어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했다.
태종은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건국 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반면, 세조는 전혀 그런 모습도 없었고 아예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대신들의 횡포와 부패를 견제할 언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관을 싫어함에도 사관의 권한을 인정하고 대신들이 사관을 압박하는 것을 막아준 임금이 바로 태종이다. "(태종 본인이) 말에서 떨어졌다는걸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발언을 그대로 사관이 《조선왕조실록》에 남긴 유명한 사례도 태종 시기의 일이다. 반면, 사관의 활동이 가장 위축된 시기가 세조인데 찬탈 이후 조선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한 거시적인 시각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만 눈치보면 나머지는 꺼릴게 없었던 훈구파 권신 세력이 엄청나게 성장하여 세조 사후 예종을 거쳐 성종조차도 왕위 서열에서 밑이었음에도 장인어른이 한명회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인사 정책의 차이도 있는데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공신들을 숙청해서 아들과 손자인 세종과 문종에게 강력한 왕권을 부여했고 공신들도 함부로 전횡을 부릴 수 없었으며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세조는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이 죄를 범하였어도 홍윤성의 예를 보듯 너무 오냐오냐하게 관대하고 신상필벌을 흐지부지하게 하며 그들의 전횡을 묵과하여 백성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세조는 정책적으로도 선대들의 업적을 큰 비전없이 다 없애버리는 등 장기적 안목도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세조의 잘못들이 즉시 크게 문제가 터지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어 여러 왕을 거치며 오랜 기간을 지나는 동안 크게 악화된다는 것. 특히, 조선 전기 암운의 근원이던 연산군의 폭정, 중종의 잦은 옥사와 정치 혼란의 배경을 살펴보면 세조가 원인제공을 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