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7)
성택 김병총 소설가
김 송 배
나는 그를 ‘병총이형’이라고 부른다. 그의 본명은 김성택인데 1974년『문학사상』제1회 신인상에 단편소설 「빨간 우산」이 당선되면서 당시 주간이던 이어령 선생이 필명으로 지어준 것이 지금은 본명보다는 김병총(金並總) 소설가로 문단에 그 이름이 고정되어 문인들은 김병총이 본명인 줄 알고 있다.
우리 문단에는 본명보다는 필명이 정착한 경우가 많다. 박목월(박영종), 김동리(김시종), 김영랑(김윤식), 조지훈(조동탁), 김여정(김정순), 강 민(강성철), 신석초(신응식), 백시종(백수남), 최절로(최성민), 고 은(고은태), 김지하(김영일), 김지향(김복순), 김 석(김장근), 소한진(소병학), 최은하(최은규), 장석향(장중경), 허소라(허형석), 홍해리(홍봉의) 등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980년대 초반 그가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 회장 시절에 문협 세미나에서였다. 유재용, 안장환, 오영수(작고) 소설가들과 뒷풀이 장소에서 그의 호탕한 유머에 이끌리게 되고 그후 문단 행사에서부터 친하게 지냈다.
그가 마산고등학교 학생시절부터 연극에 심취하여 자기 과수원에 또래들을 모아놓고 대사를 외우고 몸짓 발짓으로 동작연습을 했다는 이야기와 195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연과 얼굴과」가 당선되어 이미 작가로서의 역량을 구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전업작가이다. 한평생을 소설 쓰는 일로 매진했다. 언젠가는 KBS문예창작반과 덕여여대 교육원에서 잠시 소설창작 강의를 하기도 했으나 고정된 직업을 갖지 않았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속에서 그는 환상적인 동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체험을 근거로 한 ‘자의식’의 강한 정신역동을 주체화함으로써 힘의 미학을 문학적 특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작품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힘에 의한 처절한 승부의 세계는 근원적으로 원시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인 힘의 속성을 현대화한 것이다.
이는 『한국문예사전』에 실린 그에 대한 소개글이다. 그가 ‘힘의 미학을 문학적 특성으로 제시하’는 것도 그가 검도 공식 유단자라는 사실이 잘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어느날 그가 대학로 나의 사무실을 찾아와서 퇴근 후 약속이 없으면 자기와 동행해 주기를 원했다. 무작정 따라 나서 곳은 손진책이 연출하는 연극 「햄릿」리허설 무대였다. 한창 배우들이 땀을 흘리면서 연습에 몰두하는 모습을 관람하다가 직접 무대에 올라가서 칼솜씨를 교정해주면서 동작을 지도하기도 했다.
아, 그렇구나. 그가 검도에 대해서는 연극과 영화에서도 지도를 할만큼 대가로 소문이 나 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배우들과 스텦들이 라면집에 모여앉아 소주를 마셨다. 여기에서도 연기 지도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열정적이다. 일주일 내내 집에서 글만 쓰다가 하루는 꼭 외출을 한다. 잡지사, 출판사, 협회 등 볼일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루에 해치운다. 그리고는 대학로에 나와서 술친구를 물색하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그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어낸다.
그의 입담은 언제나 걸쭉하다. 음담패설을 섞은 소설가 특유의 잡담은 좌중을 웃기면서 휘어잡는다. 그러나 어떤 논리나 재담의 체계는 소설의 중심축만큼 정연하게 진행된다. 그래서 소설가 지망생들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서울신문에 「소설 史記」를 연재할 때 서교동 그의 집필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침 그가 대학로에서 문인협회 문예대학 강의를 하던 중 한 시간만 이론을 들려주고 한 시간은 호프집에 모여서 좌담회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다가 나를 불러냈다. 호프집에는 수강생들이 벌써 거나해져서 강의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문제의 해답을 얻기보다는 자기 작품이 안 되는 이유를 추구하는 언성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리 자유토론이라지만 선생에게 항의하는 언변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 이유를 시인에게 물어보라며 그는 슬쩍 빠져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진땀을 빼면서 수습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수강생 몇 명과 함께 갔다. 냉장고에서 맥주 몇 통을 꺼내놓고 자신은 책상에 가서 앉았다. 책상이 두 개 있었다. 한 개는 「소설 史記」를, 한 쪽에는 지방신문 연재용 작품을 쓴다고 했다. 한 작품을 마무리 하고 다시 다른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두 곳에 벌려놓고 이쪽 저쪽을왔다갔다 하면서 집필을 하고 있었다.
그의 연재소설은 일품이다. 독자들의 흡인력을 중시하지 않으면 별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의 뇌리에는 언제나 글감과 주제로 충만되어 있다. TV문학관과 영화에서도 그의 작품은 인기를 모았다. 그의 작품『불칼』,『내일은 비』,『춤추는 맨발』, 『축제에의 약속』,『태양의 딸』,『달빛 타기』,『이별 연습』등 베스트셀러 작품들을 많이 창작했다.
서울 대학로에 그의 작품 이름으로 술집과 찻집 간판을 내건 집이 많았다. 특히 『내일은 비』가 영화화 되고나서 ‘내일은 비’라는 술집이 대성황을 이룬 적도 있었다. 그 집에는 병총이형과 함께 가면 밤새도록 무료로 술을 제공해주어 여러 차례 가서 마신 적이 있다.
그가 서울신문 연재를 끝내고『소설 史記』가 전집으로 묶어져서 어느 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내가 진행 사회를 봤다. 많은 문인들이 참석하여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그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의문이다. 사마천의 『史記』를 번역하여 소설화한 작품인데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라 얼마만큼의 호응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내일은 비』가 영화화 했을 때 원작료를 먼저 받고 흥행에 따라서 배분을 받도록 내가 권유했으나 수용하지 않고 흥행에 따라서 토탈 계산으로 계약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이었다. 이것도 얼마나 많은 흥행이 이루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도 이제 고희를 넘겼다. 그는 나와 유재용, 안장환, 이광복, 김선주 소설가들과 매월 셋째 수요일에 청진동에서 만나는 모임 ‘세수회’에서 한 달에 한번 만남을 갖는다.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었다. 몇 차례의 수술을 하고난 후 건강상의 이유였다. 얼마 전에 서울 연시내에서 만나 저녁을 함께 했다. 음식도 가려야 할 게 많다고 한다.
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그냥 요양하는 기분으로 쉬면서 책을 읽고 있어. 어쩐지 옛날의 패기가 사라져서 약간 어두운 표정이었다. 빨리 쾌차해서 소주 한 잔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2010. 12. 10/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