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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광 진도군 향우회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전남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화이트보스 추천 0 조회 41 11.01.20 18: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내고향 굴포리는....

남도석성을 나와 저수지인줄 알고 들어가 보니 바닷가 선착장이 보인다. 한 바퀴 돌아보고 배중손사당으로 향한다. 18번국도를 이용 조금가 만나는 남선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굴포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벌써 배중손사당이 바닷가 옆에 자그마하게 보인다. 잠시 건너편 바다 끝을 보기 위해 굴포 조선소 위로 올라선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잠시 맞은 후 다시 배중손 사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진도의 용장산성, 남도석성, 그리고 배중손장군하면 생각나는 것이 삼별초의 난 이다. 삼별초가 반란군이라 하지만 주체성으로 보면 그것만도 아니다.

역사는 학자들한테 맡기고 우선 배중손에 대해 알아본다. 배중손 [裵仲孫] - ?∼1271(원종 12). 고려 후기의 장군. 서반의 장군인 동시에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이었던 까닭에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배중손이 역사에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의 경력은 자세하지 않다. 단지 임연(林衍) 부자 계열에 속하는 무인으로, 대몽 강경파의 선봉에 서서 비타협적 항전의 계속을 주장한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 ▶▷≫

[사당 건너편 굴포 조선소 앞마당에서 건너다 본...]

몽고를 방문하고 개경에 돌아온 원종이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단행하고 삼별초에 대해서는 강화도에서 철수해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왕은 강제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삼별초는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새 정부를 수립한 뒤 강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배중손 등은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섬 주민들과 병사의 이탈을 엄중히 방지하였다. 또한, 도내에 있는 몽고인을 베어 단호한 대몽항전 태도를 보였다. ▶▷≫

그리고 강화도에 보관된 국고를 접수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다. 배중손 등의 지도로 이들은 새 정부 수립 3일 후에 진도(珍島)로 본거지를 옮겼다. ≪고려사≫의 기록은 수비병의 탈주와 민심의 동요로 인해 삼별초가 강화도를 포기한 것처럼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른바 심입해도(深入海島)는 역대 대몽항쟁책에서 최고·최후의 전략으로 배중손이 이를 실천했을 뿐이다. 진도로 옮긴 삼별초는 도내에 방비의 성곽을 구축하고 웅장한 궁전을 지어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

[입구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마침내 이 소식은 본토에도 전달되어 전라도·경상도의 주민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삼별초는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노획해 재정에 충당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해 토벌하게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단독으로 삼별초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몽고와 연합해 공략했는데도 번번이 실패하였다. 고려군의 지휘관은 김방경(金方慶)이며, 몽고군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아해(阿海)였으나 뒤에는 흔도(欣都)로 바뀌었다. ▶▷≫

흔도는 몽고 왕 세조(世祖)의 조서를 배중손에게 전달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배중손은 몽고군이 철수하면 전라도를 자기의 영토로 삼아 몽고에 내부(內附)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배중손의 이 제안은 앞서 자비령 이북 서북면 60여 성을 들어 몽고에 항복한 최탄(崔坦)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작전상의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전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진도 공략에 여러 번 실패하자 이듬 해(1271) 5월 홍다구(洪茶丘)가 몽고의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

[열여있는 좁은 문으로 잠시 들어서면...]

그래서 김방경·흔도의 휘하에 있던 연합군과 합세해 격전 끝에 간신히 진도를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결국 삼별초의 새 정부 군왕인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한 듯 그 뒤의 소식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별초의 여당은 진도 함락 이후에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김통정(金通精)을 지휘관으로 삼아 2년 간이나 더 항전을 계속하였다.

[배중손장군 사당인 정충사(精忠祠)...]

고려 중기의 무장으로, 삼별초의 반란 지도자였다. 1270년(원종 11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가 단행된 후 조정에서 항몽세력의 근거를 없애기 위해 삼별초를 폐지하고 병적을 몰수하자 삼별초의 지휘관으로서 야별초의 지휘관 노영희와 공모하여 몽고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였다. 왕족 승화후 온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자 함선 l,000여 척을 징발하여 정부의 재화와 백성을 싣고 강화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행하여 진도에 궁궐을 세운 후, ▶▷≫

[배중손장군 동상...]

남해 연안과 나주·전주에까지 출병하여 관군을 격파하고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이듬해 상장군 김방경과 몽골의 흔도가 거느린 여몽 연합군의 총공세로 삼별초의 항몽군이 격파당하고 군사와 함께 전사하였다. 김통정이 그 후 삼별초의 잔당을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가 최후의 항쟁을 계속하다가 73년(원종 14년)에 평정되었다.

[배중손장군 동상...]

1270년(원종 11) 5월 15일 임유무 무인정권이 정변에 의하여 붕괴되고 5월 23일 개경에의 환도가 결정되자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반몽 집단은 크게 동요하였다. 개경정부는 이들을 회유하는 한편 5월 29일 삼별초를 혁파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6월 1일 배중손은 삼별초를 움직여 왕족 승화후 온(溫)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고 아울러 대장군 유존혁(劉存奕)과 상서좌승 이신손(李信孫)을 좌, 우 승선(承宣)에 임명함으로써 몽고에 복속한 개경정부를 배격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

[배중손장군 사당인 정충사(精忠祠)를 측면에서...]

이어 배중손은 삼별초 반몽세력을 규합하여 6월 3일 강화도를 출발하여 전라도 서남해안의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정하고 고려의 정통정부를 자임하면서 반몽고 항전을 지속하였다. 제주도를 그 배후 기지로 확보하는 한편 진도와 남해 연안이 갖는 전략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본과의 반몽고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271년(원종 12) 4월 고려·몽고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에 의하여 진도가 함락됨으로써 삼별초 정권은 붕괴하였는데 이때 배중손은 많은 군사들과 함께 최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

[배중손장군 동상...]

당시 삼별초 반몽세력의 일부는 제주도로 탈출하여 1273년(원종 14)까지 반몽 항전을 지속하였다. 진도의 배중손이 몽고군 공격군 사령관 아해(阿海)에게 진도에 오도록 초청하면서 몽고에 복속하겠다는 제안을 한 점을 들어 그가 몽고와 타협하려 하였다거나, 진도 공함시 배중손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배중손이 1271년 4월 이전에 이미 숙청된 상태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신빙하기는 어렵다.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남도성 부근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담끝 삼거리에 마련된 배중손장군 사당 안내판...]

[굴포신당유적비(屈浦神堂遺蹟碑)...]

[고산 윤공선도선생 사적비(孤山 尹公善道先生 史蹟碑)...]

이 비(碑)의 전문을 보면 - 고산 윤선도 선생(孤山 尹善道先生)은 조선 시대 중엽 시조문학의 대가로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강직한 선비였을 뿐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남다른 행적을 남기셨다고 한다. 선생은 이곳 굴포에 백정보 가량의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어 이곳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셨다. 나라의 힘이 미치기 어려웠을 때 의진 이곳에 이일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그 땅을 부려온 것은 길이 전할 만한 일이다. 여기 사람들은 선생에게 대한 감사한 마음과 이바다의 둑이 탈이 없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제전을 올리고 굿을 해왔다. 이사연을 영원히 남기고자 정성을 모아 여기 비를 세운다.
백계씀 측면에 - 서기 1991년 4월 6일 건립

[고산 윤선도선생 사적비 후면...]

고산과 해남윤씨가의 간척 -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은 고려 고종 35년(1235년) 몽고침입으로 인해 방어 목적으로 연안제방을 구축한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1256년 고종 43년 원나라의 침략에 강화로 피신하였을 때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방을 쌓았고 그 이후에도 가뭄과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에서도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해남윤씨가는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집안으로 고산은 1640년(54세)에서 1660년(74세) 사이에 완도, 진도 등지에서 간척사업을 펼친 것으로 보고 있다. ▶▷≫

[사당 뒤뜰엔 수만은 풀들이 가득...]

이때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에 130정보,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200정보 가량을 농토로 간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남윤씨가의 간척은 여러 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간척사업은 공재 윤두서를 통해 공재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는 ‘자화상’으로 잘 알려진 공재 윤두서가 살았던 고택이 있다. <당악문헌>의 공재공행장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이 나온다. “어느해 심한 가뭄으로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

[사당 내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어우러져...]

이때 공재는 백포만에 간척지를 개간하고, 염전을 만들어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화염)을 구워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 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다산은 공재 윤두서의 외손으로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공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산은 1818년(순조18) <목민심서>에 "간척사업을 위한 방조제 및 배수문 축조 방법" 등 간척에 관한 기술을 수록할 만큼 간척에 관심이 많았다. 다산의 이러한 간척에 대한 기술은 고산을 비롯한 외증조인 공재 윤두서의 간척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고 쓰인 포스트를 보고 너무 좋은정보라 생각했다. 윤선도를 사랑하시는 정윤섭씨의 글에서 인용을 해 보았다.

[한국적인 소나무가 위상을 같이하고...]

[배중손장군의 아픔은 아닐런지...]

[담장 넘어로 본 사당이 왼지 쓸쓸해 보이기 까지...]

[소나무 같은 충절이 요구되던 시절에...]

[나가기 싫어지는 발걸음을 떼어 보며...]

[사당 입구 둑방에서 건너편 굴포마을을 보면...]

[사당앞 둑방에서 내려다 본 배중손장군 사당...]

[사당앞 둑방에서 내려다 본 배중손장군 사당...]

[다시 소나무 앞에서 넘어다 본 배중손장군 사당...]

이곳 배중손장군 사당을 생각한 것은 삼별초를 생각해본 것과 같고 또 많은 학자들이 생각이 다르듯 우리의 생각도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내 뜻은 펼치지를 않고 자료들로만 채워 보았다. 이후 해변을 돌다 신비의 바닷길 기네스북 사건 때문에 길이 밀려 도망 나가다 싶이 진도땅을 떠나다 보니 벽파리 근처의 용장산성을 바로 옆에서 지나가며 들르질 못하였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자 진입차량들이 모두 없어졌다. 시간 차 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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