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가시에 찔리다
양상태
이른 아침. 이슬떨이의 바짓가랑이를 흠뻑 적셔 놓은 이슬. 풀잎이 이슬의 무게가 버거워 가만히 내려놓을 때 이슬은 마지막인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양손으로 젖 먹던 힘까지 쓰며 붙잡으려 안달 하다 떨어진 곳은 찔레꽃 가시. 이슬이 가시에 찔린 것이다. 쪼개지는 아픔을 감내하면서도 끝을 바라지 않았다. 가시에 찔려서도 뒤따라온 이슬에 중심을 잃고 흘러내린 이슬은 땅 위로 내려와 가녀린 풀포기의 양분이 되고 숨어 지내던 말똥구리의 목을 적시고 나비들에게는 입맞춤을 선물하다가 비로소 햇볕에 산화散花하고 만다. 이것이 이슬의 마지막 모습이려니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짜장면 한 그릇에 오백 원 하던 시절. 둘이 합해 오백 원이 모이면 짜장면 한 그릇을 나누기보다 병무청 아래 ‘세종 집’에서 병어회에 막걸리 두 되를 나눠 마시던 친구가 있었다.
휴대전화도 없었던 시절. 기가 막히도록 어떻게 약속하고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는지는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하여튼 만나고 부딪히고 비비며 지내왔다.
미원 탑 아래 전 다방(전신 전화국)에서 아니면 그 뒤에 있는 우 다방(우체국)에서 만나서 성냥개비 쌓듯이 우정을 쌓고 다져왔다.
세월은 덧없는 것. 이슬이다.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가족의 부양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눈 안에 흙을 맞이하는 날까지 영원하리라 믿었던 자네와 나.
둘 중에 어느 한쪽이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상황이 있었다. 이래저래 고민 끝에 비닐하우스를 임대하고 방울토마토를 경작하여 배분하자는 제안에 자네는 그 돈을 그냥 주면 어떻겠냐고 했다. 결국 도움이 되지 못하여 미안할 따름이다. 그 후로 대화의 상대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도 군 시절 장교였던 자네가 위수 지역을 이탈하면서까지 찾아와 준 것에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간간懇懇히 떠오르는 것이 그리움인가. 사라졌다가도 다시 맺히는 이슬처럼 가슴에 맺히는 것이 그리움인가. 그리움이 있어 기다린다. 기다림은 몹시 힘이 들어도 마음을 설레기도 한다
나이에 나이를 더하면서 자네와 같은 좋은 친구를 곁에서 볼 수 없다는 쓰라린 마음에 술을 붓는다. 만나기만 하여도 풀어질, 부질없는 감정. 서로 팽팽하게 당기며 알량한 자존심을 무엇 하러 세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효과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 아닌가 싶다.
사라졌던 이슬도 아침이면 다시 맺히는데 우리의 우정은 언제나 다시 맺힐 것인가.
찔리는 아픔보다 덧없는 이슬(눈물)이 나에게는 절상折傷으로 다가온다.
자네와 나는 함초롬히 맺혀있는 영롱한 이슬이어라.
첫댓글 이슬을 보면서 옛 친구와의 우정과 단절을 회상하셨나봅니다.
사람관계에서 금전이 개입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죠.
사람의 적당한 관계를 구분한 어느 분의 싯구가 떠오릅니다.
'불이 꺼지지 않을 만큼
얼음이 녹지 않을 만큼'
아직 남은 시간 많습니다.
두 분 꼭 우정의 잔을 높이 드시기를요.
고맙습니다.
감기인데, 푹 주무셔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