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애굽을 거쳐 광야 사십년의 과정은 몸과 마음(코스모스)의 속성을 깨닫기 위함이다
2) 몽학 선생 아래서 복음으로 옮겨졌으면 몸 밖에 있는 스승은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야만 자유를 회복한다.
나. 본론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노몬 운 카타르구멘 디아 테스 피스테오스 메-게노 이토, 알라 노몬 히스토멘)
바른 번역은, 따라서 우리가(1인칭)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한 그 믿음(소유격)에 의하면 율법을 폐하느뇨? (율법과) 하나가 되지 못하며, 다만 율법을 세울 뿐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번역한 ‘메-게노이토’는 ‘하나 될 수 없다’라는 뜻이다. ‘기노마이’는 하나 되다. 한 몸을 이루다 의 뜻이다. 율법과는 하나(기노마이) 되지 못하며, 다만 율법을 세우는 것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성장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 율법은 폐할 수 없다.
1) 애굽을 거쳐 광야 사십년의 과정은 몸과 마음(코스모스)의 속성을 깨닫기 위함이다
애굽으로부터 광야 사십 년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속성을 자세히 알기 위한 것이다. 율법을 최상으로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쳐야 할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율법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잠시 나타나서 인도할 뿐이다. 율법은 몽학 선생으로서 이정표의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바울 사도는 몽학 선생 아래서 훈련을 받지 아니하면 복음(생명)으로 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2) 몽학 선생 아래서 복음으로 옮겨졌으면 몸 밖에 있는 스승은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야만 자유를 회복한다.
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된 성전이 세워지기까지만 한시적으로 율법을 세우는 것이다. 율법은 몽학 선생으로서 우리를 그리스도(내 안에 있다)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되면 그 이후 몽학 선생을 떠나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과는 하나 될 수가 없다. 목적을 이루었으면 잔인하지만, 몸 밖에 있는 그 스승을 반드시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그 몽학 선생으로부터 자유(해방)하게 된다.
그런데 몽학 선생이 우리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는(우리가 놓아주질 않고 계속해서 섬긴다) 것이다. 이 내용이 로마서에서 깊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자유함을 얻게 된다. 몸 밖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목적이 이루어 지면 반드시 죽어야(떠나보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율법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은 행위로 지켜야 할 것들이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약의 율법은 각자 안에서 세워질 하나님의 몸 된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