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 십일조는 숫자 열 개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나. 야곱은 그가 십일조를 서원하였지만 그 싯점이 육체의 때로서 그 이후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적이 없다.
다. 사기꾼 같은 야곱을, 많은 훈련의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아들 자체로서 십일조가 된 것이다.
2. 본론
가. 십일조는 숫자 열 개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요셉은 열 명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려 갔다. 이것은 참 십일조의 그림자로서 숫자 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숫자 열 개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여(겉 사람의 속성) 동생을 팔았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방식을 통해서 요셉을 그의 형들(겉 사람)에게서 떼어 받아 진리의 말씀으로 훈련하시고 그의 뜻에 맞게 모두에게 좋음(토브, 온전함)을 이루셨다. 겉 사람과 속사람의 합일 관계다.
나. 야곱은 그가 십일조를 서원하였지만 그 싯점이 육체의 때로서 그 이후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적이 없다.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 권을 팥죽(비사) 한 그릇에 빼앗고 형이 두려워서,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던 길에 벧엘에서 밤을 지새던 중 꿈(비사)에 하나님을 뵙고 아침에 일어나서(비사) 십 분의 일을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던 것이다(창 28:20~22).
이 야곱의 기도에 나타난 십일조 관이 곧 유대인의 십일조 관이 되었으며, 오늘날 전 세계의 교회(돌 성전)에 퍼져 있는 사망(죽음)의 십일조 관이 되었다. 이 십일조를 하겠다는 서원은 아직 야곱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야곱의 때 곧 육체의 때에 한 말이다. 문둥병으로 병들어 있을 때였다.
야곱은 그가 서원한(자기 서원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적이 한번도 없다. 그의 세상적인 물질의 십일조는 애초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며, 받으시려 해도 받으실 수 없다. 육체의 때에는 어떤 것이든 본질을 벗어나 있으며, 죄를 더욱 더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다. 사기꾼 같은 야곱을, 많은 훈련의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아들 자체로서 십일조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것을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원래의 상태로 변화시켜서 받으신다. 이를 몽학 선생 아래서는 할례로 등장함이요, 새 언약에서는 마음의 할례 곧 십자가의 죽음이며, 생명의 빛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들이 생명의 십일조다.
그러므로 오랜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야곱을 생명의 빛으로 회복시켜서 이스라엘로 만들어 받으신다. 사기꾼 같은 야곱을 많은 훈련의 과정을 통하여 변화된 십일조를 야곱의 이스라엘로 받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속사람)을 받으시기 위해 사람의 겉 사람의 마음을 속사람으로 변화시켜서(십자가 죽음을 통해) 받으신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다면 교통(하나 됨)할 수도 없으며 받으실 수도 없다. 그 하나님의 그 아들(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통해서 지독하게 힘든 훈련을 평생토록 하게 하신다.
세상(코스모스)에 속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게 변화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온 생애를 걸쳐 험난한 훈련을 통해 이루어짐을 성경의 각 서신서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험난한 훈련을 통하지 않고 쉽게 새로운 아들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십일조 열(숫자 10이 아니다)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처음에는(겉 사람) 제물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것을 회복시켜서 받으시는데 이는 말씀과 하나님의 영(푸뉴마)으로 새롭게 하나 된 아들로 태어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본체(아르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회계만 하면, 기도만 하면 용서받고 응답하신다고 하는 것은 순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의 여정을 열사흘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사십 년 동안의 반복된 과정이 겪어야했고 그 중에서도 변화된 자들만이 스스로 자기발로 법궤를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있는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실제다. 그 이외엔 다 거짓말이고 허상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