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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저널
외연(外延)과 이미지의 융화
이제 화창한 봄이다. 봄은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이다. 이러한 반복행위는 전적으로 자연 섭리에 의해서였다고 보편적인 개념으로 돌려버린다면 시인의 혜안慧眼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외부의 잡다한 사연들이 시인의 상상력과 융합하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 질 것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항상 새로운 사물이나 현상들을 찾아다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일상이건 영혼의 문제이건 구분하지 않는다.
현대시의 발상이나 동기는 이와 같은 외적인 대상에서 많이 수용하고 여과하는 특성을 보게 되는데 지난 달 몇 작품에서 이러한 현상을 유추할 수 있다. 대체로 시각적인 이미지의 투영에서 일차적인 정감들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따라 다양한 시적 구도를 형성하고 주제를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외연外延의 개념들이 현대시에서 주제를 더욱 명징하게 나타나게 하고 그 개념에서 작품과 연결하는 시법이 성행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하나의 소중한 체험이며 시적 원류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래된 추억의 찻집에서
따뜻한 커피잔을 꼭 싸안고
선녀 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를 듣는다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들
따뜻한 입김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모락모락 장미꽃 향기를 피운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삶의 흔적 남기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허세虛勢라도
우리 그렇게 살아야 하겠지
짙은 어둠 속에서
혹독한 겨울바람을 밀어내며
산 넘어 남쪽 봄 햇살을
키우는 사람들.
--안호원의 「영종도의 밤」 전문
우선 안호원은 특정지역인 ‘영종도’를 한 공간으로 설정하고 ‘밤’이라는 시간성을 융합하여 ‘삶의 흔적’과 ‘허세’에 대한 이미지를 ‘파도’와 ‘겨울바람’ 등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는 결국 ‘남쪽 봄햇살을 / 키우는 사람들’로 이미지를 압축함으로써 그 시간과 공간에서 생성된 ‘상처’를 치유하려는 인본人本을 근저로 하고 있어서 그가 시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의도와 주제를 도출하고 있어서 그는 한적한 밤의 섬풍경에서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를 추출하고 있다. 그가 함께 발표한 「그대는 누구신가요」와「별이 되어」도 ‘먼 길을 떠날 인생’이거나 ‘거친 혼에 불지르다 이승을 떠나’ 등의 어조가 우리 인간들의 생멸生滅의 문제에 그의 상상력이 집약되면서 존재의 의미를 다시 음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건
살아남은 병졸들의 성지순례
살기殺氣를 닦아내는 엄숙한 고행
한 점 불빛으로 흔적을 더듬으며 음미하는
물과 바람의 앙상블
한 발짝이 한 소절의 기도이고
한 모금의 침묵은 한 아름의 고해성사
산허리 감아 도는 바람을 타고
숨 가쁜 날개짓으로 비상한다
수미산 정상
무한대로 뻗은 어느 외계의 별밭
꽃피는 천국인들
이보다 더 황홀하진 않을 것 같은데
동녘에 번지는 어스름 핏물
저 붉은 도돌이표
어둠 이은 자리에 돋아나는 피멍든 발가락
수미산은 사라지고
사바로 돌아가는 길은 아득하다.
--박은우의 「야간산행」 전문
한편, 박은우도 ‘야간’이라는 시간성과 ‘산행’이라는 가시적인 체험을 융합하면서 ‘성지순례’나 ‘고행’이 ‘한 점 불빛으로 흔적을 더듬으며 음미하는’ 인간의 실재 혹은 그 실재에서 파생된 고뇌가 용해되어 있다. 그가 야간에 산을 오르는 일은 곧 ‘수미산 정상’을 향하는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심에서 가장 높이 솟아있다는 그 산을 향해서 밤에도 오르고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세계에서의 ‘한 소절의 기도’이며 ‘한 아름의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수미산’을 찾아갔으나 ‘수미산은 사라지고’ 다시 ‘사바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결국 그도 인본의 문제에 대해서 심도深度 있는 고뇌가 상존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박은우 역시 「장례식장 소고」와「남이섬의 타조」에서도 영안실에서 ‘간추려보면 고작 3막 4장의 짧은 연극인데 나는 얼마나 진솔한 연기로 이 세상에 감동을 주고 기쁨을 주었을까’ 또는 ‘섬에 갇힌 그가 도시에 갇힌 나를 동정한다’는 등의 어조도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고뇌의 일단이 형상화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이제
물고기의 등뼈와 벌레의 수의, 불임의 씨방들이
전설로 묻혀버린 그 강가에서 돌아와
오래오래 익은 눈빛으로 물을 긷고
착한 입김으로 가마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도공에게
비취빛 막사발로 태어나고 싶었는지 몰라
--이주리의 「도공과 막사발 2」 중에서
여기 이주리는 ‘도공과 막사발’의 상관성을 통해서 인간의 인연을 중시하고 있다. ‘네가 나의 호흡이 되었을 때 / 나는 비로소 폐를 얻었다’는 시적 상황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절망도 삶 안의 일’이라는 단정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사물의 진지한 대화는 요즘 현대시의 흐름에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다. 다만, 그가 구사하는 화법에서 ‘모르지’, ‘였을지도 몰라’, ‘싶었는지 몰라’, ‘흙이었는지 몰라’ 등 불확실성으로 언어를 종결하는 것은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강조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지라도 어법의 산만함으로 주제가 감소할 우려가 있음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나는 河心이 되기 위해 물을 본다
얼마나 포개고 또 포갠 물냄새냐
하루 종일 물을 보면 세상의 내력을 알게 될지
물은 파란만장의 노정을 증명하듯 도도하다
어떤 빛깔로 과거의 생애를 기록하게 될지
내 안에 흐르는 수로를 알게 될지
나를 깨닫고 나를 확인하는 학습이 물에 있다
귀를 스치며 흐느끼는 선율이 우원한 지금
아무리 물을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정일남의 「안양천에서」 중에서
지난달에는 ‘문단순례’로 ‘응시동인’ 편을 수록하고 14명의 동인 작품 28편이 소개되었다. 모두가 중견인 이들이 질량감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정일남의 작품이 우선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는 ‘안양천’이라는 공간에서 응시凝視하는 ‘河心’이 그의 ‘생애’와 연관짓는 이미지로 변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깨닫고 나를 확인하는 학습이 물에 있다’고 단정함으로써 비단 ‘안양천’의 물뿐만 아니라, ‘물’에서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관조의 미학을 살피고 있다.
이 특집에 동인으로 참여한 조인자도 「황지黃池 연못」에서도 ‘발원지의 물처럼 쉬지 않고 흐를 수만 있다면 / 다시는 이별하지 않고 은하를 이루어 / 저 먼 별까지 흘러가 보리’라는 어조로 물과 우리 인간들과의 상관성을 적시하고 있다. 이처럼 정일남과 조인자의 ‘물’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이무원과 김송배의 「물 詩」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무원은 ‘망망대해를 보고 싶어 왔다고 했다 / 세상이 다 물 없는 망망대해지 / 꼭 물이 있어야겠느냐고 했다’라고 ‘물’과의 암묵적인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너의 정체는 항상 애매하다
물안개였다가 이슬방울이었다가
더러는 만유의 웃음이다가
문득 험상궂은 폭력이다가
아아, 천태만상의 반전이다가
일엽편주 온몸으로 감싸는
그 평온의 정체
너는 언제나 질곡의 시간을 거슬러다가
가을 햇살에 젖은 옷을 말리다가
더러는 영혼을 만나러 떠나다가
다시 환생의 계곡에서 한 음절 선율로 흐르다가
호수이거나 바다이거나
한 줄기 미풍에 밀려
수줍은 듯 얼굴 묻어버린
최후의 그 정체는
내 온몸을 관류하는 생명수였다가.
이 「물 詩」는 연작으로 쓰는 필자의 작품으로 ‘상징의 물’이라는 부제가 달려 잇다. 물의 이미지는 생명성이다. 그러나 ‘물안개’와 ‘이슬방울’이 ‘웃음’과 ‘폭력’ 그리고 ‘천태만상의 반전’으로 돌변하는 형상의 이미지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그는 『물과 꿈이』라는 저서에서 물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에서 시적 발상을 하게 된 것이지만 공자나 노자의 물에는 미치지 못한다.
지난 달에도 요즘 전국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책, 함께 읽자’가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에서 ‘황금찬 시 읽기’로 열려 대중 속으로 접목하는 시 읽기 운동이 고조되고 있다. 성춘복, 이성교, 김지향, 최은하, 김송배, 김년균, 한분순, 홍금자 등이 참가하여 시를 읽었다. 여기 필자가 읽은 확금찬 시인의「진실의 나무에게」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언제나 하늘의 입을 열고 / 진실을 이야기하는 / 너 나무여/바다 같은 귀를 열고 /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 / 외로운 과실이여/ 지금은 21세기 / 진리를 위하여 / 저 언덕을 넘어야 하고 / 산악 같은 세파도 / 잠재워야 하느니 / 너 진실한 나무여/ 이성의 칼날은 선한 꽃인데 / 불의를 일삼는 / 오늘의 녹슨 파편들이 / 이 시대의 홍수처럼 / 흘러가고 있다/나무여 / 이 시대의 선한 나무여 / 사랑과 이해의 열매를 / 열리게 하라 / 간혹 구름이나 / 새들이 날아와 길을 묻거든 / 나무여 / 사랑과 이해의 길이 / 여기 있다고 말하라/ 나무여 / 말하려나 / 진실의 길은 언제나 / 등불 앞에 있다고 / 말하려나.(문학저널 2009. 4.)
의문형 어법과 인식 단정
지난 2월에는 우리 문학이 활성화하는 계기가 마련된 기분이다. 문화관광부와 조선일보 그리고 한국문인협회에서 공동으로 책 읽기 문화 캠패인 ‘책, 함께 읽자’라는 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책을 읽지 않았으면 이런 운동까지 벌여나 하고 하나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국가나 공공기관 단체에서 책 읽기에 동참하여 저자들을 직접 초청하고 작품을 낭독하고 문학에 관해서 정담을 나누는 일은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일차로 ‘김남조 詩 읽기’를 실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김남조 시인이 직접 참가하여 ‘나의 시에 관하여’라는 간단한 문학세계의 소개와 함께 김후란, 허영자, 오세영, 김선영, 이향아, 김송배, 한분순, 이승하 등이 김남조 작품과 자작시를 읽어서 문학적 분위기 확산과 동시에 활성화의 여건 조성에 기여했다.
누구라도 그를 부르려면
속삭임으론 안 된다
자장가처럼 노래해도 안 된다
사자처럼 포효하며
평화여, 아니 더 크게
평화여, 천둥 울려야 한다
그 인격과 품위
그의 출중한 아름다움
그가 만인의 연인인 점에서
새 천년 이쪽저쪽의 최고 인물인
평화여 평화여
부디 오십시오,라고
사춘기의 순정으로
피멍 무릅쓰고 혼신으로 연호하며
그 이름 불러야 한다
--김남조의 「평화」전문
이러한 운동은 3월에도 연중 계속된다. 문협에서는 3월 17일,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황금찬 시 읽기’와 28일에는 경주 동리 . 목월문학관에서 ‘박목월 시 읽기’ 그리고 3월 말에는 원주 구룡사 선방에서 ‘김소월 시 읽기’를 개최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시 읽기 운동은 프랑스의 시축제 ‘시인들의 봄(le printemps des poetes)’이다. 매년 3월이면 전국 규모로 열리는데 올해는 3월 2일부터 15일까지 제11회째 행사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대중들을 위한 가장 광범위한 문학적 행사이다. 올해에도 예년과 같이 학교, 문화예술협회, 병원 등 약 1만 5천 곳에서 시인들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 공연예술가, 아마추어 시인 등이 참참여하여 시 낭송, 시 전달하기, 시 짓기와 같은 행사들을 연다. 때로는 작은 마을의 한 사람이 시에 대한 사랑을 동네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시 써붙이기 행사와 우체부들이 시가 담긴 엽서 3백만개를 우체통에 넣어 전달하고 국철과 지하철, 휴대폰 회사 등 공기업들이 행사를 돕고 있다.
지난 2월 16일 ‘시인들의 봄’ 축제 조직위원장 장 피에르 시메옹과 가진 ‘조선일보’인터뷰 기사처럼 거국적으로 시행하는 시 읽기 운동이 부럽기만 할 뿐이다. 각설하고 지난 호 작품을 읽어 보자. 우선 눈에 띄는 부분이 의문형 어법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문장에서 의문형으로 자문(自問)하면서 해법을 찾아나가는 것은 시법의 한 형태로서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너무 남발하면 인식의 단정에 혼란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점에 유념하게 된다.
- 김기억의 「향기 없는 국화」: 남향의 햇빛이 멀고 / 내 정성 부족해서 인가.--중략--국 화꽃 향기 언제쯤 / 볼 수 있을까.
- 박영수의 「뇌성(雷聲」: 한번 보시겠습니까? // 주치의 김박사가 / 청록색 보자기에 싸온 / 핏덩어리 살을 불쑥 / 들어 올리며 그림을 그려가며 / 수술결과를 설명한다.
- 이자야의 「미열」: 문풍지를 흔들며 / 너 우느냐 / 종일을 두고두고 / 창 앞에서 / 너 무 슨 사연에
- 이세종의 「갈대의 눈물」: 갈대가 물었다 / 너도 나만큼 / 흔들리느냐고 / 거센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고?
- 이옥선의 「팽나무가 있는 길」: 저물어진 산자락에 슬픈 이야기를 숨기 듯 / 길 위에 나 부랑거리는 시간은 / 술이 익어가는 것처럼 /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숙성시키겠지 요
- 배명자의 「밤비속의 상념」: 어제 날아오르던 하얀 나비 / 어느 처마 밑에 젖은 날개 접 고 있을까
- 김영진의 「바람아, 꽃을 때리지 마라」: 욱신거렸던 만큼 / 세월 사이 빠져나간 시간 / 물관 타고오는 길 뜨거울 때 / 하얀 꽃 피워내면 / 그리움 자국 / 꽃잎으로 웃어질 까
대체로 살펴본 작품들에서 이처럼 의문형 어법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표현법은 주제의 명징(明澄)을 위해서 인식 단정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기억이 ‘내 정성 부족’의 의문으로 곧 ‘국화꽃 향기’라는 해법을 찾고 있으며 박영수는 ‘한번 보시겠’느냐는 일상적인 물음으로 ‘수술결과’를 확인하는 형태로 시법을 전개하고 있다.
이자야는 ‘무슨 사연’의 해명을 위해서 ‘우느냐’라는 의문이 증폭되고 있으며 이세종은 직접 ‘갈대’가 일상인에게 묻고 있다. 갈대의 흔들림이 ‘너도 나만큼’이거나 ‘너도 나처럼’이라는 의인화에서 던지는 메시지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옥선은 ‘그리움을 숙성시키겠지요’라는 미확인에 대한 신뢰를 예상하는 물음이지만 ‘팽나무처럼’이란 직유가 반복됨으로써 ‘팽나무 있는 길’이라는 사물적 소재가 곧 ‘그리움’이라는 등식을 약하게 할 우려가 있다.
배명자도 ‘있을까’라는 의문은 미확인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며 불확실성 시대의 고뇌이기도 하다. 김영진 역시 ‘웃어질까’라는 ‘그리움’에 대한 자문이 불명확한 기대가 그의 내면에 잠재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김영진은 마지막 연에서 다음과 같이 인식을 단정하면서 시적 결론을 유로하고 그의 진실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하고 있다.
짧은 생애 지나간 자리
견딜 수 없는 살갛
제 삶의 궤도로
거친 바람의 발목을 잡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네
바람아 꽃을 때리지 마라
그렇다. 이와 같은 의문형이나 자문의 어법은 바로 그들이 탐색하면서 구가하려는 주제의식으로 나아가는 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적으로 시인들이 인식을 단정적으로 적시하면서 진실을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배명자가 ‘수면의 강 속에 잠겨 / 밝은 햇살 꿈꾸는 / 나비의 하얀 날개짓 소리가 들려온다’라는 단정과 이세종이 ‘그날 이후로, 나는 / 더욱 흔들리며 / 갈대처럼 야위어만 갔다.’거나 박영수가 /갑자기 / 오늘 하루가 시위더난 활처럼 / 바빠진다.‘ 또는 김기억이 ’나를 멀리하고 / 창밖의 햇살로만 / 머리 내미는 국화잎‘이라는 결론적 어조가 이러한 의문형 수사법을 보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의문형 어법에 의하지 않고 바로 인식 단정의 결론을 제시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밤톨 같은 크기로 하루가 모여든 자리
켜켜이 포갠 지친 그림자가 등장한다
백촉 전등이 등장인물을 고르고
밤이 깊을수록 신이 난 그림자놀이
때로는 낱알로 어울려 넋두리 찧는
즐겁고 신나는 참새방앗간 무대다.
싯뻘건 입술로 수다떠는 미스양과
어제 다녀간 복덕방 영감 누렁니까지
휘영청 보름달도 틈새로 얼굴 들이고
궁금한 것마다 찬찬히 훑고 간다
술잔에 담긴 남루를 마시는 사람들,
오늘을 열심히 산 그들의 연극무대다.
-- 김용욱의 「포장마차」전문
화려한 장신구는 겉모습일 뿐
느릿하게 토해내는 소리는
그녀의 고단한 삶
굽은 몸과 상처뿐인 넋은
별빛 없는 밤의 동반자
여울목에 흘러보낸 눈물
소(沼)에 묻어버린 이야기
돌고 돌아온 강물 같은 리듬으로
연주자의 시린 가슴을 어른다
-- 조수형의 「색소폰 부는 여자」중에서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보아온 의문의 요소가 배제되었다. 시적 상황 설정에서부터 결론까지 보편적인 시법으로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어떤 표현법이 현대시의 구도와 주제의 적시에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언어를 매체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각자 시인들의 관습에 따라 의문형이거나 아니면 인식 단정의 어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김용욱은 ‘포장마차’가 밤이면 ‘오늘을 열심히 산 그들의 연극무대’라는 단정적 어조로 우리들 삶의 애환을 잘 표징하고 있다. 스토리가 보편적이기는 하나, 시간과 공간을 응시하면서 연극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그림자놀이’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조수형 역시‘별빛 없는 밤의 동반자’인 ‘색소폰 부는 여자’의 ‘고단한 삶’이 곧 우리들의 삶이며 애환이다. ‘연주자의 시린 가슴’에서 유추하는 ‘굽은 몸과 상처뿐인 넋’과 ‘여울목에 흘려보낸 눈물’ 등의 어조는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남겨진 민초들의 현장이다. 이와같이 시의 표현에는 의문형으로 상황을 설정하는냐, 바로 인식 단정의 어법으로 하는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황설정과 전개와는 달리 한 편의 작품에서 승화하는 주제의 명징성을 현대시는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인상 당선작인 조경화의 「어떤 기원」에서 ‘나를 향해 부끄럼 전하는 세상 일 / 세상 바깥에 버리며 가고 싶다’거나 최현숙이 「내 안에서 나를 찾는다」에서 ‘피안의 저 언덕을 향해 전진하는 / 나에겐 등대가 필요하다’는 등의 어조도 다른 큰 절차 없이 인식을 단정하는 일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문학저널 2010. 5.)
삶의 시간 혹은 시간의 삶
현대시에서 삶의 시간이라는 것은 곧 시적 발상이나 소재의 취택에서 많은 영향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편력이 되고 다시 재생할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 되어서 시적 구도에 이미지와 주제를 정립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우리 시인들은 이러한 삶과 시간 혹은 시간과 삶에 대한 깊은 사유(思惟) 속에서 유영(遊泳)하고 거기에서 획득한 진실은 언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 표현은 그 시인의 시적 진실로써 인생관이 되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가치관의 창출을 위한 다양한 지적요소들을 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또는 삶)의 체험을 저 유명한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F.M. Dostoevskii)는 그의 작품에서 두 갈래로 묘사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 하나는 작품「카라마조프家의 兄弟」에서 ‘인생은 낙원이어요. 우린 모두 낙원에서 살고 있는 거여요. 다만, 우리가 그걸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죠. 만약에 우리가 그걸 알려고만 한다면 이 지상에는 내일이라도 낙원이 이루어질 거여요’하고 낙원을 말했으나「악령」에서는 ‘인생은 고통이며 공포다. 고로 인간은 불행하다. 그러나 인간은 인생을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고통과 공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고통과 공포를 적시해서 낙원과 서로 대칭적인 표현으로 작품의 모티프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소설이라는 허구적 요소가 작가의 구상에서 서로 다르게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 작가의 원천적인 삶(인생)의 체험을 원류로 하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소설에서는 인생의 진실을 대전제로 해서 전개하는 스토리가 다양하다는 점이 우리 시와 약간 괴리(乖離)되게 현현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시는 이러한 체험의 일단이 작품 속에서 용해되어 많은 시간을 통해서 진실로 정제되어 표면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한 시인(개인)의 인생론과 동일시하고 있어서 시인의 정서는 지적으로 승하지 않으면 개인의 독백으로 멈춰버릴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지난 달『문학저널』에는 이와 같은 삶의 문제가 시간성과 병행함으로써 시적 효용을 더욱 절실하게 분사하고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받는 작품들이 많이 읽을 수 있게 한다.
유한한 존재의 슬픔
사랑은 그늘을 먼저 봐야 한다
에덴의 낭만에서 인간으로 변신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나팔소리는 두렵다
--중략--
우연은 절대 아닌 널 부르며 하루 또 살아낸다
--조경화의「사는 게 때론 힘들다」중에서
우선 조경화는 ‘사는 게 때론 힘들다’는 제목에서 유출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고통과 공포’를 주된 의미로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이것이 그에게서 하나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현실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유한한 존재의 슬픔’이 그의 사유에서 숙성된 진실이라는 주제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너무 노출된 설명적으로 제목을 정하고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나팔소리는 두렵다’는 화자의 어조는 바로 그가 진솔하게 수용하는 현실적인 고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특집으로 발표한 작품을 필자가 단평으로 해설을 붙인 바 있으나 여기에서도 그는 ‘삶의 궤적’을 탐색하는 작품들로 심취해 있었다. ‘자비를 베풀어야하는 표정은 당연한 시간에서 / 우왕좌왕 거릴지언정 비겁하지는 않다 / 내가 살아온 시간도 자랑거리가 많다(「오늘 나는 이렇게 살았다」중에서)’거나 날숨 뱉어 크게 호흡하며 살자(「그대여 아직은」중에서)’ 그리고 ‘지나간 푸른 날은 / 투명한 그리움으로 두고 살자(「슬프지는 않지만」중에서)’는 등의 어조는 그가 그 궤적을 재생하면서 창조된 인생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이해하는 그의 문학으로 인간정신의 무한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의 작품은 실존주의와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만큼 인간과 삶에 대한 양면적인 조화를 농축하고 있다. 이처럼 조경화의 작품들은 ‘나’와 ‘그대’라는 화자를 통해서 다변적인 상황을 제시하여 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의 무한성을 조화하여 인간의 정신과 심리작용에 많은 여적을 남기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숨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호흡한다는 의미다
즉 삶이다
삶에도
부모나 타인의 덕으로 밥이나 축내며
무위도식하는 있으나 마나하는 삶
남이야 하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꾀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서슴없는 이기적 삶
이 세상에 필요치 않는 삶이다
--박창목의「참살이」중에서
박창목은 ‘참살이’의 교시적인 메시지를 통해서 ‘삶’을 적시하고 있다. 일반론적인 어조를 통해서 삶에 대한 의미를 투영하고 있는데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은 보편적인 삶에서도 ‘무위도식하는’ 삶이나 ‘이 세상에 필요치 않은 삶’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는 다시 ‘그래도 기왕이면 / 어려운 이웃을 위하고 / 나라가 내게 뭘 줄 것인가를 바라지 말고 / 나라를 위해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 큰 그릇의 이타적 삶도 좋겠지만’이라고 ‘참살이’에 대한 인간의 경각심을 분출하고 있다. 이러한 어조는 그의 작품 「가시가 된 편린」에서도 ‘앞만 보고 달리는 / 세월은 날카로운 가시가 있었다 // 백년을 못살면서 / 천년을 살 것처럼 버둥거린 학(鶴)이 / 가시에 찔린 만신창이 된 가슴으로 / 회색빛 도시에 갇혀 있다’고 적시함으로써 그가 구현하려는 인생의 탐색이 ‘세월(시간)’과 함께 형상화하고 있다.
아직도 먼 길 돌아
언 강 풀리는 봄을 기다리는 너는
갈대숲에 숨어 보이지 않고
지천명의 반나절쯤
지나온 나는
자주 강가에
주저앉는 내 마음
--김병렬의「겨울의 강변에서」중에서
한편 문학저널문인회 제4회 글 낭송회 특집으로 수록된 김병렬은 ‘겨울의 강변에서’ ‘언 강 풀리는 봄을 기다리는 너’와 ‘지천명의’ ‘나’를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인식의 범주는 자아와 존재라는 거대한 철학과 상관하면서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조는 ‘내 기억의 자취를 더듬어 / 떠나는 나를 / 그대는 아는가’와 같이 화자가 ‘나’와 ‘그대’로 분화해서 상호 대칭으로서 의문을 표출하면서 체험이 곧 인생의 지표나 가치관의 정립을 위한 성찰의 현시로 현현되고 있다.
바람 가는 곳
거기에 가섭봉 가는 한 줄 길이 있습니다
산모롱이 돌아
다신 안볼 양으로 흩어진 낙엽들 모아
쌓아 놓는 바람줄기 따라가면
낙엽더미 위에
이끼로 법어 달고 앉아
어느 중생을 제도하려는 건지
빛바랜 부도에도 죽비 같은 삶이 보입니다
가섭봉 으르는 길은 낙엽 밟는 길
밟히는 낙엽의 독경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주검들의 노래인지
그 노래 덮고 정지국사 누워있고
그 노래 딛고 의상대사 지팡이는
천년을 살고 있습니다
한지 같은 햇살
머리 위에 얹고
묵언으로 바람줄기 따라 오르면
선에 든 가섭존자 숨소리가 바람으로 어깨동무 합니다
그곳에 가섭봉 가는 한 줄 길이 있습니다
--이태희의「가섭봉 가는 길」전문
한편 이태희도 ‘가섭봉 가는 길’에서 응시하거나 관념적으로 응집한 사유의 지향점이 불교의 정지국사와 의상대사 그리고 가섭존자가 시어로 등장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거나 ‘빛바랜 부도에도 죽비 같은 삶’을 통한 인생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을 때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달아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를 연상하게 하는데 이 또한 삶에 대한 성찰의 의미를 축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의 소재는 경기도 양평에 소재한 용문산의 주봉인 가섭봉으로 가는 길이다. 그에게는 ‘바람 가는 곳’이 ‘한 줄 길’이며 ‘이끼로 법어를 달고 앉아’ 있으며 ‘밟히는 낙엽의 독경소리’를 들으면서 ‘묵언’으로 성찰의 자아를 탐구하고 있다.
또한 이택규는 ‘어설피 입 오므리고 / 다리 붙잡고 / 가슴 오므리는 / 이것 / 혹 내 안에 거짓부처가 / 도사리고 있음이 아니런가(「헛깨달음」중에서)’라는 어조로 ‘입의 예(禮)’와 ‘발의 격(格)’ 그리고 ‘가슴의 깊이’를 통한 성찰의 언어가 투영되고 있다. 장준영 역시 ‘쉼 없이 달리고 / 숨차게 돌아가는 / 삶의 여정을 멈추고 / 그대 안에서 쉬고 싶다 // 포근하고 / 따뜻하고 / 향기로운 / 그대 안에서 쉬고 싶다(「그대 안에서 쉬고 싶다」중에서)’고 이제 ‘쉬고 싶다’는 기원으로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려는 정리의 의미를 엿보게 한다.
입춘바람이 내는 고음의 휘파람소리 들으며
그 길에 기대어
햇살 한줄 잡고 쉬고 싶은 한나절
누가 이름을 그리 부였을까
-- 김정서의「세월」중에서
이와 같이 ‘쉬고 싶은 한나절’로 기원의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의 진원지는 삶과 시간의 동시적인 개념에서 우리들의 체험이 형상화하는 중요한 시적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김정서의 ‘햇살 한줄 잡’는 일이나 이태희가 ‘바람 줄기 따라 오르는 일’이 모두가 시적 발상과 주제의 천착을 위해서 체험을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외에도 김태희의 「푸른 산」과 황인오의「산다는 것」, 김영숙의 「셍각나무의 아침」등의 작품들이 삶과 시간의 병행을 조감하면서 일상에서 창출하는 시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하고 있다(『문학저널』 20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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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의 시적 상관성
새해 벽두부터 문학단체들은 새로운 사업의 계획과 실행을 위한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문학과 문단의 실정으로 보아 아주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문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문학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서 지원이나 동참이 아직도 미흡하다는 지적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연초에 문학단체장들과 문화부장관이 신년인사 겸 식사를 함께 했다는데 그 자리에서 우리 문학의 진흥발전을 위한 제언들이 많이 나왔다는 후문이지만 그렇다할 가시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새해의 계획 중에서 한국문인협회는 ‘환경詩 읽기’를 개최해서 작년부터 이어오던 ‘책 함께 읽자’를 지속적인 사업으로 활성화하겠다는 취지를 천명하고 있다. 이날은 자작시 중에서 환경과 관련된 작품을 골라서 낭독을 하고 평소에 간직했던 환경문제에 대한 소견도 발표해서 대내외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어쩌면 우리 문학이 지금까지 인간의 인성과 인본에 주안점을 두고 소재나 주제를 설정하여 자아 인식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면 자연 파괴나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등한시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구와 인간은 새로운 비젼으로 상호 방향 설정을 하지 않는다면 공멸(共滅)은 뻔한일이 될 것이다.
각설하고 지난호『문학저널』에서는 ‘문단순례-청송시인회(청시동인)’ 특집으로 28명의 회원 작품 56편을 수록하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동안 연마한 실력들이 잘 표현된 수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버리고 버린다
비워 가벼워지기 위하여
엉킨 시간들을 가지런히 손에 감는다
어쩔거나 이젯껏 살아왔던 집에서는
정다이 지내오던 이웃들의 사랑으로
기억의 공기 속을 떠다녔는데
장롱 위의 기억, 쪽마루의 추억을 앞세우고
뒤돌아 휘-휘 둘러보며
문턱을 넘어설 때에는
가슴이랑 이랑마다 그리움이 한 짐이다
--곽윤영의 「이사를 간다」중에서
곽윤영은 ‘이사’라는 보편적인 일상에서 ‘비워 가벼워지기 위'한 정서가 시간성과 함께 작용하여 ’그리움이 한 짐‘이라는 대칭적 개념을 시적 상관성으로 어조를 조절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思惟)의 일단은 그가 ‘이사’를 가면서 상상된 ‘장롱 위의 기억’이나 ‘쪽마루의 추억’들이 어쩌면 비우는 정감으로 형상화해서 그것이 결국 ‘그리움’이라는 새로운 체험으로 각인되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공허의식은 인생에서 무상이라는 다른 철학으로 승화하는 심리적으로 전환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되는데 이는 물질적인 채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재창조를 통해서 존재를 인식하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김미외가 ‘많다는 것은 / 지나친 근심이다(「폭설 내린 날, 월롱역에서」중에서)’라거나 김사라가 ‘끝내 나를 따라와 / 그날 그 빈자리에 수시로 / 눈물은 폭우되어 내리고 / 아무런 대책도 없이 / 나는 허물어진다(「연가」중에서)’, 또한 김인숙이 ‘이제 주인 잃은 뜨락에 / 추억의 창을 빠져나온 / 바람만 오갈뿐 / 팽팽한 세월만 빈 집을 지키고 있다(「창호지문」중에서)’는 등의 어조가 비움에 대해서 다양한 이미지의 창출로 시적 진실을 구현하고 있다.
봄 향기 한 자락이
나와 함께 앉아 있다
무릎에 놓인 손등
눈비와 바람을 거부하지 않고
세월의 빈 시간을 여이며
살아온 삶의 길목을 회상하는가
거친 얼굴에 겉도는 화장이
내 가슴에 물기를 돌게 한다
사월 초하루
이제 스러짐이
비우고 받으면서
풍요로운 눈길 담아본다
어디쯤 무지개로 걸어둔 심원(心願)
이제사 그 깊이만큼 돋아난다
봄 향기 한 자락
나와 함께 일어선다
--마정애의「사월 초하루」전문
들어오는 것만으로
가슴 졸이던 맘 다 풀린 듯
기다려 서 계시던 그 얼굴은
하늘로 돌아간 아버지 자리를
메우지 못한 채 비어 있고
--박경임의「그 자리 그렇게」중에서
여기에서도 비움의 미학을 전제로 해서 시적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우선 마정애가 ‘세월없는 빈 시간을 여이며 / 살아온 삶의 길목을 회상’하거나 ‘비우고 받으면서 / 풍요로운 눈길을 담’는 형상의 어조는 시간성이 우리 인간과의 상관으로 현현되어 비움에 관한 시적 진실을 탐색하고 있다. 또한 그는 첫 연 도입부분에서 ‘봄 향기’가 ‘나와 함께 앉아 있다’는 상황이 마지만 연에서 결론으로 ‘나와 함께 일어선다’는 대칭이 시적 구도를 상대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시적 묘미를 현란하게 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공감대를 확대하고 있어서 시법의 향상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한편 박경임도 ‘하늘로 돌아간 아버지 자리’가 ‘메우지 못한 채 비어 있’어서 이 비움의 이미지에서 탐색하는 삶의 진실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가슴 조이는 삶의 기슭’과 ‘긴 세월에 쓰러질 듯 고향집 사립문’과 연계해서 ‘그 자리 그렇게’라는 숨겨진(혹은 낯선) 어휘로 비어 있음을 적시하고 있다.
이 비움의 미학은 단순한 공허의식에서 추출하는 허무주의와는 약간 다른 차원의 이미지가 감지되고 있다. 이는 현실 인식이나 자아의 의식에서 갈등요소나 고뇌의 현장을 탈출하여 정도(正道)의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정신의 갈망, 말하자면 구도자와 같은 정적(靜的)이면서도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마라는 ‘본시 있던 나에게로 되돌아 간다’는 것을 차원 높게 현현하는 시법을 말한다. 박일소가 ‘초록 잎새 바람결에 / 가늘게 떨고 있는데 / 마음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숲에서」중에서)’라거나 박종욱이 ‘태양이 낮게 뜨는 해질녘 / 돌아보면 / 모두가 떠나갔구나(「설경에 서서」중에서)’ 또는 백은숙이 ‘욕망을 갈아엎고 / 하늘과 소통을 끝낸 시간 / 투명한 미소 방긋방긋 일어나 / 무욕의 깃발 펄럭인다(「겨울동화 속으로」중에서)’는 등의 어조도 채움을 예비하는 비움의 원류를 현시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 아무도 듣지 않고 /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공간에 / 장삼자락 감추어둔 한을 펼친다(박후자 의「눈 오는 날」중에서)
- 누구라도 중생들은 무거운 속세 내려놓고 / 마음의 오욕을 털어버리고 / 흘러가는 그름은 바람에 묻혀 / 근심 걱정 씻겨간다(김하영의「연주암」중에서)
- 한번 쏟아지면 것 잡을 수 없는 외골수의 기억들 / 그 위로 비밀스런 빛이 훓고 지나간다 (방지원의「바코드」중에서)
- 세상일 다 버리고 오직 하나만 위해 가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윤 옥의「그는 누구 일까」중에서)
- 잃었던 길이 조금씩 보이는 저 무지개빛 부활(이난오의「먼 유배지에서 2」중에서)
- 가질 수 없어 / 부를 수밖에 없는 그대 / 늘 사무친다(임선영의「노래」중에서)
- 내 마음 이끈 호숫가에 / 살포시 내려앉아 / 세파에 할퀸 깃털 손질하며 / 내 몫만큼의 보금자리 혼신으로 닦았다(정신성의「둥지를 벗어난 새 한 마리」중에서)
- 빛과 그림자로 잠시 머물다 돌아가는 / 족지(足指) 따라 밟으며 / 물소리 바람소리 / 당신 의 말씀으로 듣는다(차정현의「만추」중에서)
이와 같이 보편적인 소재에 투영하는 시적 의식의 흐름은 동류의 주제를 창출하려는 진실에서 출발한다. 우선 박후자는 언어의 절제나 비움에서, 방지원은 비움과 채움의 교차에서, 윤 옥은 정신적 혹은 가치관의 비움으로, 이난오는 존재 실체의 비움, 임선영은 사물의 실체와 가치성을, 정신성은 삶을 통한 정신적 구명을 현시하고 있으며 김하영과 차정현은 불심(佛心)에 근원을 둔 정신적인 해탈의 비움을 갈망하고 있는 특징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조경화는 ‘일상의 탈출에 성공한 지금은 / 우주의 미아로도 행복한 축복의 시간입니다(「여행을 떠나며」중에서)’ 또는 ‘벗어나려 하면서도 절대로 놓지 못하는 오늘에 충직히 / 상기됐던 모든 가면은 벗어놓고 잔치를 끝낸 / 고단한 얼굴빛도 편안함으로 돌아왔다(「여행에서 돌아오며」중에서)’는 어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떠나며’와 ‘돌아오며’라는 상반된 개념으로 비움과 채움을 대칭적으로 현시하고 있다.
김현기 역시 ‘바람으로부터 오는 소리 / 연못 가득 대화를 담아 / 너 없어도 너와 / 밤새도록 이야기 한다(「바람 속 연못」중에서)’는 어조는 첫 행으로 처리한 ‘-영준이-’라는 특수 화자를 설정한 점으로 보아서 ‘너 없어도 너와’가 상징하는 시법은 상당한 의미를 암묵적으로 적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수산나도 ‘저 살 오른 바람결 간데없고 / 갈색 깊이가 빈 들녘을 휘몰아칠 때면 / 한 아름 간직할 수 있는 / 추억, 가슴에 묻겠소(「주말농장에서」중에서)’네서 그가 도입부분으로 설정한 ‘별을 심겠소’라는 심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제시하고 ‘간데없고’와 ‘간직할 수 있는’이라는 대칭적 시의 구도로 비움과 채움의 메지시를 투영하고 있다.
이처럼 청시특집 이외에도 비움과 채움을 적나라하게 적시한 작품은 정민욱의「깡통」에서 그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채움으로 침묵하는 것보다
비움으로 받아줄 수 있는(배려)
깨질 듯 소음으로
말할 줄 아는 (소신)
알 수 있는 느낌으로
바람을 그릴 줄 아는(여유)
버려진 관심보다
꽃도 심고
작은 물고기도 키우고
더러움도 받아주는
그저 말없이 담아주는(포용)
또 다른
소리의 파장으로 건네는 관심
이렇게 ‘채움’의 ‘침묵’보다는 ‘비움’의 표용을 상호 대칭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다. 박은우도 ‘어제도 그제도 순도 높은 알콜로 지우고 지웠어 / 명치 속 묵시록도 거짐 다 지워져가 / 넌 아직도 / 그 자갈밭의 가시나무를 지우지 못한 거니(「유리창」중에서)’라고 ‘자갈밭 가시나무’에 대한 상징은 비움(혹은 지움)을 강하게 메지시를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비움과 채움의 미학이 시적 구도나 주제의 승화에 얼마만큼의 진실을 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심도 있게 연구해볼 과제로 남는다.(『문학저널』 2010. 3.)
‘생명의 힘’과 ‘사랑의 불꽃’
2010년, 경인년의 새해가 밝자마자 폭설이 쏟아졌다. 그것도 몇 십년만의 일이라서 모두가 무방비의 제설재난으로 혼란을 겪은 일이 어제처럼 느껴진다. 길도 미끄럽고 기온도 영하 몇 십도에 머무르니 외출은 삼가고 집에서 오랜만에 독서에 몰두하면서 시 창작에 관한 의문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 ‘시란 무엇인가’라는 쾌쾌묵은 물음 앞에서 주눅이드는 현시점의 정서는 아무래도 안일한 사유, 언어의 고갈, 체험의 미축적, 존재의 불감증 등이 복합적으로 전신신경에서 반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유발하고 있다.
사실 작년 5월에는 종합 월간지와 계간지에 월평을 5개 잡지에 집필하고 시창작 강의 3개처, 시집 해설과 문협 행사참석 등으로 과로한 결과는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동안 모든 집필을 중단하고 몸 추스르기에 몰두하여 이젠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여기에는 40년 넘게 피워온 담배를 끊어버린 기적(?)을 이루기도 하고 그 결과로 체중이 늘어나서 동네 개천을 달리면서 땀을 흘리는 진풍경까지도 연출하고 있다.
지난 달 『문학저널』에서는 삶을 소재로 해서 인간이 소유한 희노애락(喜怒哀樂)에 대한 심도 있는 사유(思惟)를 탐색하고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어조로 보편적인 정서가 바로 인간의 삶에서 진하게 무르녹는 성찰의 진실을 읽게 된다.
누구나 마음에 담아놓은
옛 시절은
세월이 가져다 준 나만의 호출로
추억이 아름답다거나,
가슴이 아리도록 생각이 간절할 때
그리움은 스스럼없이 상처가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올 뿐이다
지나간 삶은 행복해서도
불행해서도 아닌
모두가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샘물로
너와 내가
오랫동안 간직한 과거로 남아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우리들의 서겁한 눈물인 것을.
- 손동인의 「추억」전문
결국 손동인은 과거 지나온 ‘추억’을 상기하면서 삶에 관해서 ‘너와 내’가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진솔한 어조를 분사하고 있다. 이것이 ‘세월이 가져다 준’ 그의 ‘그리움’이며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써 ‘우리들의 서겁한 눈물’이라는 진실을 추출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들에게서 흔히 사우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지만, 시간성에서 창출하려는 삶의 문제는 다양한 이미지로 파생할 수 있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아름답다거나’와 ‘가슴이 아리’다는 것, 그리고 ‘행복’과 ‘불행’, ‘만남과 이별’이라는 대칭적으로 시적 정황을 설정함으로써 시적 전개에 묘미를 가미하고 있다.
저 찬란한 빛깔이
온 세상에 생명의 힘을 충전시켜 주는 사랑의 불꽃
나는 이제 보았노라! 이 우주의 제왕을
그리고 인간들이 벌이는 짓들이 소꿉장난인 것을...
-장월근의 「동해에 아침 해 솟는데」중에서
발자국은 남기지 않고
이 삶을 지나가고 싶다
우리가 길을 남기지 않고
삶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일까
-김치원의「길내기 길들이기」중에서
이 두 편의 작품에서 우선 장월근은 ‘생명의 힘’과 ‘사랑의 불꽃’을 삶에서 정립할 지표로 설정하지만, 결국 ‘인간들이 벌이는’ ‘소꿉장난’이라는 인식이 팽창하면서 어떤 현실적인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고뇌는 김치원에게서 ‘삶의 길을’ 가기 위해 많은 의문이 상존한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 이 삶의 길을 가고 싶다’는 기원의 의지는 바로 은둔적인 삶에 대한 성찰로써 인간의 심리적 인식의 범주가 확고하게 새로운 화해의 의식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말한다.
나는 한강 가장자리 살얼음을 딛고 서서
떨어진 내 삶의 꽃잎들을 강물에 쓸어버리며
차디찬 겨울강물에 비친
울고 있는 나를 보았다
-장승기의「겨울 한강에 가서」중에서
장승기는 ‘떨어진 내 삶의 꽃잎들을 강물에 쓸어버리며’ 인생의 절망이 무엇인가를 목도하게 된다. ‘차디찬 겨울강물에 비친 /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떨어진 내 삶의 꽃잎’임을 절감하면서 ‘떠나간 그녀’에 대한 회상(또는 추억이)이 또한 시간성(겨울)과 상호 연대를 갖고 현실적 갈등과 번민이 시적 형상화로 변환하고 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하여 줄기차게 몸을 굴리며 / 죽을 힘을 다해 죽기를 거부하는 이순의 사람들.
-홍경흠의「동창회」중에서
삶을 위해, 삶을 바쳐야 하는/은백의 무수한 생명들은/밀려오는 죽음의 공로 펄떡거리고
-황인오의「만선의 기도」중에서
음미되지 않는 삶은/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었지
-박효열의「소크라테스」중에서
동네 어귀 마을에 귀를 댄 시루봉 사타구니로/꽃상여 나가던 날/구성진 눈물들이 바람처럼 죽음을 떠나보내고/동네는 고개를 꺾은 채/시름은 길모퉁이에 만장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배문석의 「살풍경 말그내」중에서
사람은 가을처럼 화려하게 살다가 죽으면/이름을 남기지만 나무는 죽어서 향기를 남긴다/그래서 부활하여 다시 나무가 된다.
-이상윤의「나무」중에서
홍경흠이 ‘죽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심리를 간과(看過)하지 못하는 반면, 황인오는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가 ‘무수한 생명들’이 ‘삶을 위해, 삶을 바쳐야 하는’ 우리 인간의 비애가 어려 있다. 그리고 박효열의 ‘소크라테스’는 단호하게 ‘음미되지 않는 삶은 / 살 가치가 없다’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한편 배문석은 ‘꽃상여’와 ‘구성진 눈물’과 ‘만장’ 등으로 ‘죽음’을 적시하고 이상윤은 ‘사람’고 '나무‘ ’부활‘ 등을 통해서 인간의 삶이 곧 생멸(生滅)에 관한 깊은 철학을 메시지로 제공하고 있어서 네 작품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어조는 누군가 말했듯이 ‘삶은 죽음의 출발이다. 삶은 죽음을 위해서 있다. 죽음은 종말이자 출발이며 분리인 동시에 한층 밀접한 자기 결합이다. 죽음에 의해서 환원은 완성 된다’는 명언이 생멸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앙드레 지드(A. Gide)는 말한다. ‘삶의 가장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죽음보다 강하며 죽음은 모든 것이 끊임없이 새로워지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삶을 허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음미되지 않는 삶’은 ‘생명의 힘’도 ‘사랑의 불꽃’도 결론적으로 포용되지 못하는 절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세상 한복판에서
나를 부등켜 안아주고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사랑보다 더 좋은 평화가
이곳엔 가득하다
-홍정연의「효재에는」중에서
이 드넓은 천지에
꽃송이로 만초하여
벌 나비는 곡창에 훨훨
참진 삶의 터전 밭에
후세의 빛나는 그림이로다
-은학표의「유은정(柳隱亭)」중에서
그러나 홍정연은 ‘이 세상’에 대한 집념이 바로 ‘나를 부둥켜 안아주’는 포용의 미학이 작용하고 있다. 은학표 역시 ‘참진 삶’을 위한 내면의 정서가 접목하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보다 더 좋은 평화’와 ‘후세에 빛나는 그림’이 암묵적으로 발산하는 이미지의 호소는 생명성의 위대한 융합과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현대시가 주관적으로 천착하는 주제를 살펴보면 대체로 생명성에 대한 인식이 주종을 이룬다. 이것이 삶이라는 방법적 사유를 통해서 시적 주제(혹은 시적 진실)을 창조하려는 시인들의 갈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재에서 인간자체이든 자연현상이든 아니면 제3차원의 형이상적이든 그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인들이 탐색하고 여망하는 주제의 중심축에 진정한 휴머니티가 내재되어 있느냐하는 철학적 요소를 가미하여 새로운 가치관으로 형상화하는 시법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연초부터 심각하게 독파(讀破)한 책은 유종호 교수가 펴낸 신간 문학평론집『시와 말과 사회사』가 특이 인상 깊게 어필하고 있다. 그의 저서『시란 무엇이가-경험의 시학』과『문학이란 무엇인가』와 함께 시 창작을 위한 이론서로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시적 언어에 심도 있게 고찰함으로써 시 창작은 바로 언어의 매체 곧 언어의 예술이 시라는 논리를 강조하고 있어서 두고두고 참고로 읽어야 하는 사전으로서의 역할도 겸하게 된다.([문학저널] 2010. 2.)
소멸 의식과 ‘낭만적’ 환상
우리가 ‘낭만적’이라고 하면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 것으로 흔히들 말한다. 일반적으로 낭만이라고 하면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거나 이상적, 낙천적인 상태를 말하는데 ‘낭만적’이라고 관형사가 되면 완전한 환상을 일컫게 되어 현대시에서는 낯설게 하기와 비슷한 정감을 발현하게 된다. 현대시사에는 낭만주의(romanticism)가 한때 풍미(風靡)한 적이 있었다. 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두에 걸쳐서 유럽을 휩쓴 예술적인 태도였다. 이는 초자연적인 것과 중세적인 것 또는 이국적인 취향을 좋아했고 감정과 공상을 존중하였으며 대담한 상상력의 구사에 의해서 문학의 시야를 확대해 나깠다.
영국에서는 워즈워드, 바이런, 키이츠 등의 시인이 등장했고 프랑스에서는 뮈세, 비니 그리고 독일에서는 노발리스 등이 활약했다. 이들은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으나 정세 변화의 관계로 흐르는 경향의 단점도 있었다. 이로 인해 19세기 프랑스 상징파가 생겨났고 영국에서는 20세기 모더니즘을 탄생시키게 된다.
우리 현대시에서도 <백조>동인을 중심으로 하여 홍사용, 이상화, 박종화 등이 낭만시를 썼으나 이것은 유럽의 낭만주의와는 본질적으로 그 양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지난 호『문학저널』에서 일별한 작품에서는 단연 김명배의 시 2편에 주목하게 된다. 참으로 ‘낭만적’인 발상이며 깊이 있는 주제를 숙성시키고 있다. 김명배의 「낭만적 . 1」에서 스스로 ‘낭만적’이라는 어조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개똥이와 별똥이는 낭만적이다
그런데 그게 무어니
나는 지금도 엉덩이네 광채를 달고
어둠속을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때로는 꽁무니에 빛나는 긴 꼬리를 달고
세상 밖으로 추락하는 꿈을 꾼다
개똥이와 별똥이는 야행성이다
그런데 그게 무어니
어쩌다가 잊어버리고 마는 세상
눈을 감았다 뜨면 여기가 거기다
우리는 왜 어둠속으로 소멸하는 거니
안 보이는 것들은 모두 하늘이다
소멸하는 것들을 위해 통곡하지 말자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없다면
잃는 것도 없다
개똥이와 별똥이는 낭만적이다
그런데 그게 무어니
김명배는 개똥벌레(반딧불이)와 별똥별(流星)의 동질적 개념에서 ‘엉덩이의 광채’와 ‘어둠속을 날아다니는 꿈’에 대한 대위적 언술로 ‘우리는 왜 어둠속으로 소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극적상황을 제시하면서 ‘소멸’ 이후의 공허와 무상무념의 주제를 극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이것은 생성과 소멸을 전제로 하는 우리 인간의 생몰(生沒)의 현실적 현상을 그는 ‘광채’를 달고 현실을 유영하다가 어느 날 사라져야 하는 운명이 명징한 이미지로 현현되고 있지만, 그는 이를 ‘낭만적’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우물에 빠진 달을 건지려다가
두레박을 놓친 날 밤엔
어머니의 은가락지만한 하늘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
누가 덥석 머리채를 잡고
끌어 올리셨더라
깨고 나면 언제나 달이
벌써 중천에 떠서 휘영청 밝으셨다
추락의 끝은 어디였을까
별 한 바가지 흩뿌려서 공양드리고
떠나고 싶은 밤
이 낭만, 누가 만든 길인가
문구멍으로도 환히 보이는 저 길을
이제는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보기 없기
어머니의 은가락지만한 하늘속으로
꿈꾸며 걸어가기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겠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어머니는 늘 나를 금 안에 두신다
그렇다.「낭만적 . 2」에서도 ‘추락하는 꿈을 꾸’는 시적 정황이 ‘날아다니는 꿈’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또한 ‘떠나고 싶은 밤’이나 ‘이제는 떠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어조도 ‘소멸’과의 동류의 이미지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똥이와 별똥이는 낭만적’인데 ‘그게 무어니’라고 의문을 제기했으나 ‘어머니의 은가락지만한 하늘 속’이 적시되므로 해서 화자 ‘어머니’에 대한 상념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아 ‘추락의 끝’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이처럼 환상적, 이상적 혹은 낙천적 담대한 어조는 그가 인생 연륜이나 문학 연륜에서 존재와 상관된 다양한 사유의 변환으로 관조나 달관의 의미도 함축되어 있음을 리해하게 된다.
배문석의「한강 크루즈」에서도 이러한 상상력의 일단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무던히 보고 싶었던 게야
저리 조바심처럼 어둠 살라냈던
간밤을 수놓았던 그 흔적에서
아득한 은하를 불러
도시를 삼킨 찬란한 선상 이야기
강이 맨살로 그 품을 넓히며
별들 불러들인 가장자리
물굽이마다 껴안은 발길
강바닥에 드리운 까닭에서
잊혀진 사람들 깊이를 잰다
비가 흘러가서 바다인 이유로
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유유히 떠가는 크루즈배는 안다
그 몸 가득 채워진 설레임에서
눈빛마다 별이 된다는 전설을
무덤가에 핀 가시엉겅퀴꽃이
별 하나씩 꽃잎에 내려 밤을 물러내 듯
가시처럼 오가는 명멸 그 시야에
깊어진 계절만큼 사랑했노라고
오늘, 강물에 편지를 쓴다
배문석도 ‘별’과 ‘어둠’에 관한 이미지가 ‘강물’과 조화를 이룬다. 결국 그는 ‘명멸’과의 환상에서 낭만적인 ‘전설’을 탐색하고 있다. 김명배의 ‘별 한 바가지 뿌려서 공양드리고 / 떠나고 싶은 밤’에서나 배문석의 ‘별 하나씩 꽃잎에 내려 밤을 물러내’는 상황들이 소멸(혹은 명멸)과 소통되는 낭만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와
날보러
도동항에 모여든 사람들
뼈도 못추리고 죽는구나
한연순의「오징어」는 단순하면서도 ‘뼈도 못추리고 죽는’ 소멸의 의식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는 ‘오징어’라는 대상사물의 형상이나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고 생멸을 이분법적 논리로 분할하면서 ‘도동항에 모여든 사람들’과 ‘오징어’의 대칭점을 함축성 있게 적시하고 있다.
그를 만난 후
난 자꾸만 그에게로 물들어 가고 있다
모난 성격
세상의 온갖 진흙은 그대로 묻었는데
내 속은 왜 자꾸만 그의 향기로 물드는지
내가 깊은 곳에서
그의 작은 뿌리로 매달려 있을 땐
잎사귀는 나의 그늘이 되고
줄기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거늘
이제 세상 가운데 홀로 선 나
세월은 발 없는 덩굴로 나를 휘감아
그의 끈으로 꽁꽁 묶었는데
너도밤나무처럼 낯선 나를 기억하며
아랫목으로 데워진
그의 품속을 기다린다
썩지 않으려고 내 속의 물기를 말리면서
박경희의「호박 고구마」에서는 시적 화자 ‘그’와 ‘내(혹은 나)’가 교감하고 있다. 이 교감이 결국 ‘썩지 않으려고 내 속의 물기를 말리’는 예비 소멸을 표징하고 있다. 이러한 의인화의 시법은 시적인 묘미를 높이는데 그 몫을 다한다. 사물을 사물 자체로 언술하는 것보다는 ‘호박 고구마=나’라는 의인법은 시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문장에서도 큰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제3인칭 대명사인 ‘그’에 대한 암시가 없다. 시의 흐름이나 내용으로 보아서 ‘호박 고구마(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나 주위의 어떤 형체로 유추할 수 있겠으나 ‘그’와 ‘나’의 대칭적 구도에서 시법을 전개했다면 더욱 공감대를 확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찌 되었거나 이 낭만적‘이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다양하면서도 새로운 정감을 유발케 하는 촉매제가 된다. 일찍이 본질적으로 낭만주의 정신을 귀하게 여긴 하이네는 낭만적인 감정이 자극될 만한 여러 가지 형상을 조형적으로 구성하는 문학적 형상이 명료한 윤곽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낭만적’인 언술이 곧 낭만주의는 아니라는 것이지만 쉬클로프스키가 주창한 ‘낯설게 하기’에 근접하는 이상과 환상이 혼합된 시법이라는 전제가 가능해 진다. 사물을 사물이미지로만, 아니면 관념을 관념이미지로만 표현되는 시적 구도보다는 ‘낭만적’ 구고가 더욱 시의 본령을 명징하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문학저널 2009. 12.)
인식과 기원의 순정적 언어들
현대시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시인 자신이나 시적 화자(話者)의 어조(語調)를 통해서 전달되는 메시지의 공감 영역은 그만큼 확대되거나 아니면 축소되는 매체(媒體) 작용에 중대한 역할이 따르기 때문이다. 일찍이 예이츠가 말한 바와 같이 시인의 시는 국어처럼 직접적이고 자연스런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의 언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새겨보면 시어(시적인 언어)의 선택이 그 작품에서의 비중은 절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는 조선일보에서 우리 현대시 100년을 기념으로 ‘시인 100명이 추천하는 애송시 100편’을 연재하여 시인들의 관심을 모은 바 있으나 공감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또 요즘에도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를 연재하고 있다. 정말 그 작품들이 ‘애송하는 사랑시’ 반열에 드는 작품인지도 모호하다. 어쨌거나 신문에서 시를 게재하고 독자들과 가까워지는 지면 할애는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감나무쯤 되랴 /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 그러나 그 사람이 /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 전생(全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박재삼(朴在森) 시인의 「한(恨)」(2008. 10. 15. 게재) 전문이다. 아주 편안한 일상어로 옆에서 이야기하듯이 들려주는 ‘사랑’에 관한 하소연처럼 들린다. 그렇다. 시는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인식의 언어, 그 순정적인 매력이 바로 시에서 분출하고 있다. 그가 인식하는 중요한 대목은 ‘사랑의 열매가’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다는 것이다. 곧 이승에서는 다하지 못할 사랑이라서 ‘한(恨)’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자신을 인식하는 데는 철학적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그 사유에서 추출한 인식의 언어는 그 시인의 진실이다.
지난 10월호 『문학저널』에서는 이러한 인식과 기원의 언어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사실 이 시적 언어(혹은 문학 언어)는 우리가 시를 언어예술이며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하는 단적인 설명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시와 언어의 상관성은 그리 간단하게 요약할 것이 아니다.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는 ‘무릇 시란 그 뜻을 주로 삼는다. 뜻을 세움이 가장 어려운 일이고 글로 엮는 일은 그 다음이다(夫詩以爲主 說意最難 綴辭次之)’라고 한 것을 보면 시는 그 의미(주제)를 상위에 두고 표현 언어를 그 다음으로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시는 이 주제를 명징(明澄)하게 투영하기 위해서는 마력적인 언어의 능력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 유의하게 된다.
지난 호 특집으로 수록된 ‘문단순례ㅣ영등포문인협회 편ㅣ시’에서 인식과 기원으로 나누어 그 언어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주 오래된 추억의 찻집에서
따뜻한 커피잔을 꼭 싸안고
선녀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를 듣는다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들
따뜻한 입김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모락모락 장미꽃 향기를 피운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삶의 흔적 남기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허세(虛世)라도
우린 그렇게 살아야 하겠지
짙은 어둠 속에서
혹독한 겨울바람을 밀어내며
산 넘어 남쪽 봄 햇살을
키운다.
--안호원의「영종도의 밤」전문
두렵고 떨리는 발걸음이
한 발자국씩 오르는 동안 그 가뿐 숨에서
올라야 한다 올라가야한다는
믿음이 손길 이끄는 대로
땀방울이 떨어져 바다로 간다는 그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으며
산의 품으로 안겨간다는 것을,
턱까지 차오르는 희열
사람들 지혜로는 형언할 수 없는 그 기쁨이
올라야 알 수 있다는 것도
처음엔 몰랐다
바리며 버리며 오르고 나면
그곳이 세상을 만나는 처음이라는 것을,
우정과 믿음이 더 돈독히 물결친다는 것을,
헐러 떨어진 땀방울에 쓴
가슴 벅찬 편지를 바다로 보낸다
저 울창한 숲으로 보낸다.
--星雨 裵文奭의「산행」전문
여기에서 우리는 자아를 인식하는 언어를 확인할 수 있다. 안호원은 공감각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자아를 인식하고자 한다. ‘물소리를 듣는다’는 청각과 ‘장미꽃 향기를 피운다’는 후각, 그리고 ‘파도처럼 밀려 왔다 삶의 흔적을 남기’는 시각적 이미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 그렇게 살아야 하겠지’라는 어조로 인식의 축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것은 ‘물소리’와 ‘장미꽃 향기’ 그리고 ‘삶의 흔적’을 ‘허세(虛世)’라는 존재인식의 원천(源泉)으로 대입함으로써 그가 탐색하는 인식의 범주(範疇)를 확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배문석의 자아 인식에 관 어조는 약간 복합성을 가진다. ‘산행’에서 ‘사람들 지혜로는 형언할 수 없는 그 기쁨이 / 올라야 알 수 있다는 것도 / 처음엔 몰랐다’는 어조는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산의 품으로 안겨간다는 것‘과 ’우정과 믿음이 더 돈독히 물결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가면서 터득한 존재의 방식이며 삶의 형태이지만, ‘버리고 버리며 오르’는 인간 본연의 심연(深淵)으로 인식의 한계를 확대하고 있다고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언어는 양연화가 ‘때로는 밟히거나 뽑힐까 두렵지만 / 날마다 최후라 생각하니 괜찮다 / 민들레라는 이름으로 번식의 씨앗을 품고 / 또 하루를 산다(「골목 민들레」)’거나 이경배가 ‘아직 잠 깨지 못한 나무 사이를 돌며 / 조용한 숨소리로 눈 뜨기를 재촉한다(「영등포공원의 아침」)’, 그리고 홍금자가 ‘부서지고 깨지고 / 더는 발 들일 수 없는 / 막막함 속에서도 / 꺼지지 않고 / 타오르는 불꽃(「사랑」)’이라는 어조들이 모두 자아를 인식하기 위한 이미지로 부각되고 있다.
다음은 기원의 언어이다. 이 기원은 인식된 자아가 어떤 갈등이나 고뇌에 처했을 때 이를 화해하고 조화하는 해법으로 많이 등장하게 되는데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정겨운
거울 안에
달덩이 매만져도
허물이 남지 않아 언제나 자유로운
임이여
어여쁜 그대
두 손이고 싶어라
--김진관의「선유도(仙遊島) 달맞이」끝 부분
더위에 지친 농부
지나는 길손
새들에 가지 몇 개쯤 내어줄 수 있는
넉넉한 나무이고 싶다.
--모실 김형수의「나무이고 싶다」중에서
아침부터 색색이 부끄러운 가을이
소리 없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이기호의 「침묵 달래기」중에서
감사와 사랑으로
온화한 빛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광자의 「갈대」끝 연
이러하듯이 기원의 언어는 다양하게 표현된다. 우선 김진관과 김형수는 ‘싶어라’와 ‘싶다’는 어조로 그들이 바라는 기원의 정서가 함축되어 있는가하면 이기호는 ‘좋겠습니다’로 표현하여 동질의 기원의 의지가 나타나지만, 오광자는 간절한 ‘기도’로서 어조를 조절하고 있음에 유의하게 된다. 이러한 기원의 의식은 인식에서 여과(濾過)한 성찰에서 근원하게 된다. 그 성찰을통해서 시인의 의식이 현실과 괴리(乖離)되거나 불합리, 부조화 등의 심리적 변환이 뒤따르게 되는데 이를 조화롭게 극복하거나 치유할 수 있는 방편으로 시인들이 기원의 의지로 전환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특별초대석’으로 오광자의 신작 「가을」외 14편이 모두 간절한 기도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을 보면 그는 신앙적인 어조가 아니더라도 간구(懇求)의 언어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그가 대자연(對自然)과 대인간(對人間)에서 ‘머물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을」)’에 순응함으로써 우리들의 고뇌를 화해하는 해법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이러한 기원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원(혹은 기도)하는 마음 그 자체가 정신적 순화를 위한 목적이기에 시인들의 기원은 존재문제와 근원적으로 상관성을 갖게 된다. 오광자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 풍성한 사랑을 / 함께 나누고 싶다(「과수원」)’거나 ‘잠시 머물다 가는 모습에 / 주님의 섭리 알 것만 같아 / 고개 숙입니다.(「낙조」)’ 또는 ‘목마른 영혼 하늘 문 열게 하소서(「하늘을 바라보며」)’ 등의 기원적 어조는 이와 같은 다원화한 현실에서 연약한 우리 인간들의 심안에 시인의 지적인 기원으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현대시는 근본적인 언어방법에 의해서 시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시인의 직각적인 메카니즘을 포착해서 기록하는 구도를 갖는다. 이러한 인식이나 기원의 언어는 결론적으로 휴머니즘의 지향에 시인들의 주제로 형상화하는 것은 어쩌면 시의 본령이며 탐구해야 할 시의 위의(威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인들의 순정적 언어를 통해서 인간의 순수성을 재음미한다면 그것이 바로 독자들의 공감을 확산하면서 어떤 한 음절의 교시적(敎示的)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문학저널 200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