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세월의 속도는 나잇대와 비슷하다고 한다. 70대는 시속 70km, 80대는 80km로 세월이 지난다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한 달, 한 해가 어찌 이리 빨리 가는지 멀미 날 지경이다.
나이 들수록 세월이 유수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하루를 여삼추처럼 길게 느낀다. 뭘 해도 느려터진 시간은 도무지 갈 마음이 없는 듯하다. 더군다나 나이를 먹으니 밤에 자주 깨고, 잠이 줄어 새벽에 눈이 떠지곤 한다. 하루 24시간이 이리 긴 줄은 나이 들을수록 깨닫게 된다. 그래서 노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의 하나는 [하루 시간보내기]가 아닐까 한다.
나는 여기에서 노년기의 여러분이 지루한 하루를 어떻게 벗어나면 좋을지 함께 고민해 보려 한다. 이 글에서 시간보내기는 평범한 노년을 보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이틀이 멀다 하고 골프 치거나 일 년 중 몇 개월 해외여행하는 사람은 이 글의 주대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보내는 주변 지인들도 하루 시간보내기의 어려움을 실토한다.
시간보내기는 경제적 여유와 건강에 많이 좌우된다. 시간보내기가 정말 힘들다는 것이 일자리가 절실한 사람들에겐 사치스러울 수 있다. 그들도 당장은 아니어도 일에서 벗어나면 자신만의 시간보내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보통의 노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신체 여기저기 고장이 나 일상 영위가 불편하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고혈압, 당뇨 등 한 두 가지 약을 복용하고 있다. 이 글은 우리 주변에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 노인 - 시간은 많고, 몸 어딘가 불편해 적극적인 활동은 어렵고, 비용을 많이 들여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많이 주저되는 - 의 하루 시간보내기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러분의 시간보내기 대상은 무엇인가. 몇 개의 대상(items)으로 하루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지금의 시간보내기 대상은 충분한가. 그렇다면 여러분이 보유하고 있는 시간보내기 상자에는 어떤 종류와 몇 개가 들어 있는가. 새로운 아이템을 찾고 있는가. 새로운 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시•상]이란 말은 만들어 보았다. 하시상은 "하•루 시•간보내기 위한 아이템을 넣어 둔 상•자"를 줄인 말이다.
평범한 노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의 하루 시간보내기는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도시에 거주하는 친구, 지인, 동창 등 내 주변 사람들이 참여하는 주요 활동들을 정리해 보았다. 하루 시간보내기 활동은 크게 모임참여, 취미활동, 배우기 그리고 기타 등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동창, 종교, 직장 등의 동호인 모임으로 등산, 바둑, 당구, 골프, 걷기 등이다. 여기에 사회 또는 종교단체에서의 자원봉사, 환경보호 활동 등이 포함된다. 대개 지나친 음주와 연관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둘째는 취미 활동으로 서예, 그림, 목공, 도예, 텃밭, 사진 찍기, 새, 꽃 등의 관찰, 노래, 책 읽기(도서관 탐방 포함), 숲 관찰 및 탐방, 그리고 수영, 자전거 타기와 같은 스포츠활동 그리고 요리하기 등이 포함된다. 취미활동은 평소에 해 오던 또는 하고 싶었던 것으로 비교적 규칙적으로 참여하는 활동들이다. 여기에는 취미와 관련된 본인의 경험이나 보유한 기술을 여러 경로를 통해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누는' 활동(재능기부, 경험전수)도 포함된다.
셋째는 배우기 활동으로 어학, 컴퓨터, 요리, 요가, 악기다루기, 그림, 서예, 시조 읇기, 창(唱), 피트니스, 수영 등이다. 여기에는 취미활동과 연관된 유•무료 강좌 듣기도 포함할 수 있다. 나이들어 배우기는 맘같이 숙달되지 않는다. 두어달 배우다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꾸준한 노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투지와 서투름도 받아들이는 목표하향의 아량이 요구된다. 배우기에 참여하면 그 안에서 소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시간보내기 활동 내 새로운 아이템이 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기타 활동으로 손주돌보기, 공원 등 배회하기, 공공기관의 각종 프로그램(앞의 세가지와 연관된 활동) 참여 그리고 여행하기 등이 있다.
현역일 때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무얼 하며 보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당장은 일에 묻혀 못하지만 은퇴/퇴직 후 시간 여유가 되면,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또 사회 봉사 활동도 하자는 마음을 가지곤 한다. 대부분 이러한 생각은 막연한 것으로 뚜렷하게 정리되지 못한 채, 현역에서 벗어나거나 노년을 맞게 된다. 한 참 바쁜 일상을 보내는 시기에 십 년 이십 년 후 노년기의 시간보내기란 상상의 영역이어서 실천보다는 무지개 빛 환상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경우 50대 초 우연히 목공을 접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이 60에 퇴직한 후 십년 가까이 목공을 하며 하루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보낼 수 있었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70대 후반까지 하려던 목공은 갑작스러운 상황변화로 그치게 되었다. 목공을 접은 후, 한동안 하루 시간보내기가 막막했다. 종일 집에서 뚜렷하게 시간 보내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종일 티브이 앞에서 마냥 앉아 지냈다. 지루한 시간을 벗어나려고 동네산책이나 친구들을 만났지만 지루한 하루 시간보내기는 해소되지 않았다. 동창의 산우회, 기우회, 당구모임 등에도 기웃거려 봤는데 꾸준한 시간보내기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다 집 안으로 눈길을 돌려보니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바쁘게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게으름 피우며 여기저기 모임에 기웃거린 지 두어 달이 지나 비로소 제 주변을 둘러본 셈이다. 아내는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운동과 모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손주 돌봄, 집안일 등에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하루를 '신나게' 보내고 있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저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 보내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고지식하고 고고한 - 남잔데.. 늙은 나이에 뭘 그런 걸 해.. 배울 만큼 배운 내가 그런 걸.. - 나의 마음을 스스로 '전향(轉向)'하였다. 집안으로 눈을 돌리니 내가 할 수 있는 시간보내기는 널려 있었다. 청소, 설거지 등 집안 정리와 손주 돌봄을 아내와 나누면서 시간보내기의 숨통이 트였다. 시간보내기가 조금 수월해지니 '나'를 생각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전통가구를 만들던 내 머리와 손은 다른 무언가 하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때 찾은 것이 음식하기였다. 음식 만들기는 목공만큼 나에게 재미를 주었다.
또 현역시절 글 쓰는 것과 관련된 일을 했기에 가끔 가슴에서 꿈틀대는 뭔가를 글로 표현해 보곤 했다. 친구들에게 내 글을 보여주면 맛깔난다며 좋아해 주기에 가끔 글 쓰는 걸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이렇게 시간보내기가 원활해지자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여러가지 서예, 그림 등 배우기 활동에도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낯선 곳을 꺼려하는 내가 노인복지관 프로그램에도 참여하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보내기에 대한 준비 없이 현역을 떠나거나 노년을 맞이하게 되면, 갑작스러운 환경변화로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해 보지만, 본인에게는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중에 하루 시간보내기가 힘들어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여러분의 '하시상'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보내기 대상을 더 많이 찾아 하시상을 채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루 시간보내기 찾기는 스스로 해야 하는 애로가 있다. 그렇지만 본인이 아무리 해도 지겹지 않고 힘들어도 또 하고 싶은 활동을 찾기가 쉽지 않다. 위에 열거한 시간보내기 사례는 아주 단편적인 활동들이다. 본인의 주변을 둘러보면 보다 다양한 활동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상상으로만 하고 싶었던 또는 도전해 보려던 기억을 되살려 보자. 혹시 꿈꾸던 것이 있었다면, 그와 관련된 활동에 과감하게 도전해 본다. 평소에 적극적으로 반응했거나, 열정을 가지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되살려 보는 것도 좋겠다. 당장은 서툴러도 보람을 느끼고 다음 날 또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하시상에 넣을 수 있는 아이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주변 특히 내 가족들이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를 관찰해 보기 바란다. 살면서 나와는 전혀 무관했던 어떤 것들이 눈에 밟힌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하루시간 보내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잘할 자신이 없고 서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목공수업을 할 때, 여러 사람들이 손재주가 없는데 목공을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의외로 자신이 손재주 있다는 사람보다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오랫동안 목공수업에 참여하였다. 여러분 주변을 둘러보면 본인이 할 수 있는 '틈새'를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현재의 자신을 돌아봄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보내기의 첫걸음이다.
시간보내기 대상은 많을수록 하루 보내기가 용이해진다. 나의 경우, 목공은 하루 종일 해도 지겹지 않고 일주일 내내 해도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그렇지만 목공 하나만으로 하루 시간보내기를 했던 내가 이것을 못하게 된 순간부터 멘붕(멘털붕괴, mental collapsing)이 왔다. 못하게 된 목공을 다시 할 방법을 찾으려는 궁리에 몰두하다 보니, 다른 시간보내기를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내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시간보내기를 찾는 노력을 하면서 점차 하루가 비교적 무리 없이 지날 수 있었다. 하나의 시간보내기가 성공하니 두 번째 세 번째 시간보내기 찾는 작업은 보다 지신감을 갖게 되었다. 여러 개의 시간보내기를 보유하게 되면, 본인 스스로 시간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시간보내기는 매일 규칙적으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때 각자의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본인의 경제적 여건이나 가정의 상황, 신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조건 등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물론 노년에서의 활동은 무리하지 않고 난도가 높은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
본인에게 적합한 시간보내기 활동을 찾으려는 노력은 빠를수록 노년의 시간보내기는 수월해진다. 그렇지만 조급해하거나 늦었으니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훨씬 힘든 노년기를 직면하게 된다. 어떠한 나잇대이건 지금이 본인이 할 수 있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보내기 대상을 찾기에 결코 늦지 않다. 이제 늦었다 하며 게으른 - 이제 남은 생(生)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운데.. 눈도 침침하고 움직이기도 쉽지 않은데.. 이 나이에 고민한들 뾰족한 게 있을까 하며 포기한 -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고(告)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해도 여러분에게 '딱' 맞는(여러분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걸 하느라 피곤해졌음에도 또 하고 싶은) 시간보내기 아이템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시간보내기 활동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여러분에게 가슴 뛰는 설렘을 줄 수 있다. 여러분이 손만 뻗으면 닿을 어딘가에 아주 '사소한' 아이템이 여러분 앞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여러분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있기에, 그것은 당신의 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시간보내기 아이템을 하나둘씩 발굴하여 하시상을 가득 채우는 여러분을 상상해 보라. 매일 어떤 것들을 꺼내어 하루를 보낼지 고민한다면 분명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시간보내기는 스스로 찾아야 하지만, 외부의 충격으로 마음이 움직여 새로운 아이템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내 경우 노인복지관 프로그램에 참여하니, 몇 개 글을 써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한 동안 생각만 하고 있던 주제(主題)를 반강제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이 바로 이 글이다. 지루한 하루를 탈피하고자 노력했던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떠밀리듯 시작은 했지만, 글 쓰는 내내 즐거웠고 하루하루를 쉽게 보낼 수 있었다. 글쓰기를 마음먹고 나니 밥 먹다가, 설거지하다 또는 지하철에서 키워드(key words)를 메모하고, 글의 얼개를 엮는 과정 모두가 나의 시간보내기가 되었다. 외부의 충격으로 한 글쓰기가 나의 시간보내기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언젠가 글쓰기는 나의 하시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 하면, 시간보내기의 대상은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본인 주변의 틈새를 찾는 작업을 시작해 보면 어떠실지요. 행여 여러분 가운데 고고하게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분이 있다면, 저처럼 전향하셔서 여러분의 하시상을 채우는 '놀이'를 해 보기 바랍니다. 먼저 본인의 하시상을 꺼내보고,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머지않아 여러분의 하시상에는 많은 아이템들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채워진 하시상에서 오늘은 어떤 아이템들을 꺼낼지 고민하는 희열을 만끽하기 바랍니다.]
이 글을 끝낸 후, 나는 새로운 거리를 찾으려고 눈을 번뜩거리는 내가 조금은 대견하다. 무엇을 하는 것도 좋지만 글의 주제를 찾는 과정 역시 즐겁다. 여기에 내 글을 누가 읽어줄까 하는 기대감도 선사받게 되니, 이 아이템은 이중삼중 겹겹의 아이템이라 할 수 있겠다.
여러분도 이러한 일타쌍피 아이템을 찾는 행운을 가져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