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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3의 눈...금단의 비밀(태을금화종지) 2/4
어느 날 한 왕이 그의 영리한 광대를 불러 어전에서 지팡이를 주고 말했다. "이 지팡이를 벼슬의 증표로 삼고 너보다 훨씬 훌륭한 바보를 찾을 때까지 갖고 있다가 그 바보를 찾거든 그에게 주어라." 얼마 루 그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왕은 그 광대의 진실을 확신하고 그를 보기 원했다.
광대가 왔을 때 왕이 말했다. "먼 여행을 떠나게 되어 너를 불렀다. "
"어디로 가시는데요? " 광대가 물었다.
"먼먼 나라, 저 세상이지"
"폐하, 폐하의 여행과 그 곳에서 머물 일을 위해 준비는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안했단다. 나의 귀여운 바보야."
"그곳에 가면 폐하를 환영할 친구는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 왕이 대답했다.
그러자 광대는 슬픈 듯 고개를 떨구고는 그 지팡이를 왕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폐하, 이 지팡이를 가지십시요 이것은 폐하의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준비도 없이 다른 세상에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폐하 외에 어느 누구도 이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
삶은 죽음과 저 너머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대가 만약 죽음과 저 너머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바보다. 그대는 훌륭한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삶이란 단지 기회일 뿐이다. 그대가 아는 이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요, 진정한 삶을 얻기 위한 기회일 뿐이다. 진정한 삶은 이 삶의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일깨워져야 하고 깨달아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쉬 잠이 들며 아직 자신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생명인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면 소위 그대의 전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기나긴 꿈에 불과하게 된다. 그것은 달콤할 수도 없다. 그것은 악몽이 될 것이다.
진정한 삶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사는 것은 흙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사는 나무와 같다. 그것이 바로 삶에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없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들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광휘를 그대가 보지 못하는 이유이다. 예수는 천국이 너희 속에 있다고 거듭거듭 말했다. 그러나 그대들은 황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들에 있는 백합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우냐? 솔로몬의 부귀영화조차도 이만큼은 아름답지 못하였다."
백합은 그토록 아름다운데 사람은 왜 그토록 추한가. 왜 사람만이 추한가? 앵무새나 공작이나 사자나 사슴이 추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추함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작은 공작이고 사슴은 사슴이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가 붓다나 그리스도나 크리슈나일 때, 그의 전 존재를 깨달았을 때만 사람이다. 그렇지 않는 이상 그대는 어둠 속에서 헤매며 산다. 무의식의 깊은 동굴에 사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의식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대의 의식은 매우 희미하며 순간적이다. 그것은 매우 얇은 피부이다. 피부 두께 정도도 되지 않아서 조금만 긁어내도 그대는 곧 그대의 의식을 잃고 만다.
누군가가 그대를 모욕한다. 한마디 말,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대의 의식은 사라지고 그대는 격분과 분노와 폭력과 파괴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잠시 동안 그대의 인간성은 사라져 버리고 그대는 다시 거친 동물이 되어 버린다. 사람은 동물 이하가 될 수도 있다. 그의 추락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천사 이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올라가는 작업이요, 고된 일이라서 드물게 일어난다. 그것을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힘든 노역을 필요로 한다.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일은 배짱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가 표면에서 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에 관한 진실이 될 수 없다.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그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그대의 진실을 보기 위해 꿈으로 파고들었던 이유이다. 이 아이러니를 보라. 그대의 실체가 그대의 실체 속에서가 아닌 꿈속에서 탐구되어야 하다니 그대는 자신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는다. 그대가 그렇게도 거짓되고 많은 가면을 가지고 있어서 그대의 참얼굴을 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꿈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꿈과 꿈의 분석으로조차도 그대의 참 얼굴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분석하려고 하는 자가 누구인가? 프로이트도 그대만큼 무의식적이다. 무의식적인 한 인간이 다른 무의식적인 사람의 꿈을 분석하게 된다. 그의 해석은 매우 제한되게 되어 있다. 그의 분석은 그대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투영이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똑같은 꿈에 대해서도 프로이트식( Freudian ) 분석가와 융식(Jungian) 분석가 그리고 아들러식( Adlerian ) 분석가의 해석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더 많다. 그대는 헷갈릴 것이다. 똑같은 꿈이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된다. 그들은 그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융의 신봉자는 말한다. 저는 융의 신봉자로서 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그대의 꿈들은 그대의 진실을 말해줄 수 없다. 의식적인 행위조차 그대를 드러내지 않는데 어떻게 해서 잠 속의 행위들이 그대를 드러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전히 프로이트는 올바른 궤도 위에 있다. 약간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꿈을 넘어 아무런 생각도 꿈도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 마음의 차원까지 가야 한다. 모든 생각들‥‥‥ 그리고 꿈은 사고의 일종이다.
매우 원초적인 그리고 그림을 통한 사고, 그러나 여전히 그것도 사고이다. 그대가 사고를 넘어섰을 때 그리고도 여전히 깨어 의식할 수 있다면, 마치 잠든 사람이 잠든 중에도 그대로 깨어 있어서 자신의 존재의 깊은 핵에서 작은 불꽃으로 램프가 타고 있듯이, 그대는 자신의 본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래 얼굴을 보는 것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모든 껍데기들을 던져 버리게 된다.
그대의 개성(personality)은 단지 겹쳐지고 겹쳐진 껍데기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 이상하고도 무한한 가치가 있는 책 「태을금화종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단어 두 개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본성(essence)이고 다른 하나는 개성(personality)이다. 'personality'란 말은 가면을 뜻하는 'pusona'라는 어근으로부터 파생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배우들은 가면을 쓰곤 했다. 페르소나 (persona)는 가면을 뜻한다. 개성은 가면으로부터 왔다. 배우에 맞게 다른 가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장에게 이야기할 때 그대는 어느 하나의 가면을 사용한다. 하인에게 이야기할 때는 두말할 것도 없이 또다른 가면을 쓴다. 어떻게 그대가 똑같은 가면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주시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사장에게 이야기할 때 그대는 말끝마다 "예 ! 사장님, 예 ! 사장님"을 연발한다.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나겠지만 그래도 그대는 사장의 발에 입이라도 맞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하인에게 이야기할 때 그대는 다르다. 그때 자신의 거만한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결코 웃지 않는다. 하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그를 인간 이하로 취급해야 한다.
어떻게 웃으면서 그를 인간적으로 대해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를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해야 한다. 그는 종이다. 사장에게 이야기 하던 것과는 다른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거기 하인이 있는 곳에서 그대는 거만하게 사장처럼 남아 있다. 친구에게 이야기할 때 그대는 또 다른 가면을 사용한다. 낯선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는 물론 다른 가면이 필요하다. 그대는 많은 가면을 사용해야 하고,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상황이 바뀌는 대로 그것들을 바꾼다. 그대의 개성은 단지 가짜 얼굴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성이란 무엇인가? 본성이란 어떤 가면도 없는 그대의 본래 얼굴이다. 본성이란 그대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다. 본성은 그대가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다. 본성은 하나님이나 또는 그대가 무어라고 부르든지 간에 총체나 전체, 존재같은 것들에 의해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다. 본성은 존재로부터의 선물이다. 그러나 개성은 사회와 부모와 학교와 대학과 문화와 문명으로부터의 선물이다. 개성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가짜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이 개성을 가꾸며 본성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대가 만약 본성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완전히 삶을 헛산 것이다. 진정한 삶은 본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은 본성의 삶이다. 그대는 그것을 영혼이나 자신 속의 하나님, 또는 어떤 것으로라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를 기억하라. 껍데기는 그대가 아니며 심리학적 껍데기조차도 그대가 아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모세( Moses )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가 산에서 푸른 덤불로부터 불처럼 타오르고 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덤불은 타지 않고 있었으며 변함없이 신선하고 파릇파릇했다. 그는 이상했다. 그는 그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불이 저렇게 타고 있는데 덤불은 하나의 불꽃이면서도 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불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모세야, 너의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땅은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유대인들의 우화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불이요, 그대의 개성은 바로 덤불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원한 불이다. 그것은 그대의 개성을 태우지 않을 것이다. 개성은 푸르게 남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그렇게 많은 자유를 허용해 주어서 만약 그대가 거짓된 채로 남아 있길 원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여지며 오케이다. 그대가 가짜가 되고자 해도 허용된다. 자유란 그대가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의 본성, 불꽃이 거기에 있고 개성도 거기에 있다.
그대는 개성이 가짜라는 말을 듣고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왜 안에 있는 불꽃이 그것을 태워버리지 않을까'라고 불은 차다. 태울 수가 없다. 그대가 개성을 가지기로 결정했다면 불은 그것을 태울 수 없다. 그대는 개성 속에서 푸르게 남아있을 수 있다. 개성은 계속해서 보다 많은 잎들을 끌어 모을 수 있다. 그대는 더욱 더 거짓될 수 있으며 완전히 가짜가 될 수 있다. 그대는 개성의 허위 속으로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며 하나님은 간섭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자유란 전체적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이요, 인간의 영광이요, 또한 인간의 고뇌이다. 그대에게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대는 거짓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거짓을 선택할 자유가 한정된 동물들을 보자. 그 동물들은 거짓 되지 않는다. 어떤 동물도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애완 동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애완 동물들은 그대와 같이 살면서 본성이 파괴되어 개성을 갖기 시작했다. 그대의 개는 본성을 잃어 버렸다. 그 개는 화를 낼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꼬리를 흔들고 있다.
이것은 개성이다. 그는 누가 주인인지 그리고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는 외교적이 되어 버렸으며 뉴델리에 사는 사람들만큼이나 정치가답다. 그는 계속해서 그의 꼬리를 흔들어댄다. 개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낮선 사람이 들어오면 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애매해서 그는 짖어댄다. 아마 그것이 해야 할 올바른 일이리라.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는 꼬리를 흔들고 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힌트를 얻으려고 한다.
집에 들어온 사람이 친구인지 적인지, 그가 적이면 그는 꼬리 흔들기를 멈출 것이다. 그가 친구이면 짖기를 멈출 것이다. 그는 주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힌트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주인의 그림자가 되어 버렸으며 더 이상 진짜 개가 아니다. 사람과 함께 살다가는 전염된다. 그들은 파괴된다. 만약 동물들이 그대와 같이 산다면 그대는 그들을 파괴한다. 그대는 그들의 자연적인 본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문명화된 것처럼 그들을 문명화시킨다. 그대는 자연이 그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도(道)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본성은 그대가 이 세상에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개성은 세상이 본성에 부가한 것이다. 본성은 항상 반역적이며 항상 독자적이기 때문에 세상은 본성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세상은 어떠한 독존자(獨存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떼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은 반역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붓다나 크리슈나나 노자같은 사람을 절대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위험하다. 세상은 고분고분한 사람, 현 상태에 고분고분하고 기성 관념에 고분고분하며 조직화된 교회와 국가와 그리고 멍청한 정치가들에게 고분고분한 그런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사회는 복종을 요구하며 능률을 요구한다. 그대가 보다 기계적이 될수록 보다 능률적이 된다, 그대가 보다 살아있게 되면 그대는 그처럼 능률적일 수가 없게 된다. 기계는 사람보다 능률적이다. 사회의 노력이란 모든 사람을 하나의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사람을 기계로 전락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를 더욱더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라. 그를 더욱더 로보트와 같이 만들어라. 그의 의식으로부터 본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라. 그가 완전히 가짜가 되게 하라. 그를 남편이 되게 하고 그녀를 아내가 되게 하며 종과 주인, 이것과 저것이 되게 하되 절대로 본래의 자신은 되지 않도록 하라. 본래의 자기는 하나님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고분고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다른 어떠한 믿음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의 유일한 믿음은 근원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주인도 알지 못한다. 소위 이 사회라고 하는 것에게는 그런 유형의 존재가 매우 불편할 것이다. 이 사회는 인간 존재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착취하기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과 그대의 성장을 위하지 않는다. 그대가 자라는 것을 도울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대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대는 더욱더 독립적이 되기 때문에 사회는 그대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감행한다. 그대가 덜 자랄수록 그대는 의존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의존적인 사람은 믿을 만하다. 의존적인 사람은 언제나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의존적인 사람은 언제나 기댈 누군가를 필요로 하며 정말 필요로 한다. 그는 어린애 같다. 그는 부모에게 기대며 성직자에게 기대며 정치가에게 기댄다. 그는 스스로 설 수가 없다. 사회는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계속해서 수많은 껍데기로 덮어씌운다. 육체적인 발가벗음은 심리적인 발가벗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사회는 육체적인 발가벗음을 매우 두려워한다. 사회는 발가벗은 사람을 보면 당황해 한다. 그것은 시작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육체적으로 발가벗었다면 그는 제 일보를 내디딘 것이다. 이제 누가 그를 심리적인 발가벗음으로부터 막으려 하겠는가?
그리고 타는 덤불로부터 나온 소리가 모세에게 말했다. "그대의 신발을 벗어라."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것이다. 그대의 모든 옷을 벗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발을 벗어라. 신발은 그대의 발을 싸고 있다. 신발은 그대의 발을 덮고 있다. 발가벗고 서라. 신발을 없이 하라. 그 신발은 개성을 나타내며 발가벗음은 본성을 의미한다. 그대는 성스러운 땅 위에 있다. 그대의 신발을 벗어라. 그대가 본성과 조우하는 순간, 내면의 타는 덤불을 만나는 순간, 그대는 신발을 벗어야 할 것이다. 그대의 모든 껍데기들을 벗어야 할 것이다.
그대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벗어 던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혁명이요, 메타노이아( metanola )이다. 그것이 생에 있어서의 전환점이다. 그때 사회는 사라지고 그대는 한 개인이 된다. 그리고 오직 개인만이 하나님에게 연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단한 의식이 요구될 것이다.
1933년 언젠가 구제프는 피터( Peters )를 불러 헨리 허드슨 ·호텔의 전 뉴욕 백화점에서 이 시범을 보여 주었다. 피터는 구제프의 젊은 제자였으며 구제프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가장 위대한 스승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전혀 관례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스승도 관례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관례라고 하는 것은 성직자의 자질이지 스승의 자질이 아니다. 스승은 언제나 혁명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멋진 실험이다.
주의깊게 들어라. 피터가 도착했을 때 그는 저녁 식사에 오기로 되어 있는 몇몇 주요 인사를 위해 접시를 닦고 야채 요리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구제프는 사전에도 있지 않은 몸의 모든 부분과 기능들에 대한 낱말들로 구성이 되어있는 '영적 학습'을 손님들에게 하기 위해 피터가 필요 했다고 말했다. 그 즈음에 구제프는 네 글자로 되어있는 낱말들과 외설적인 문구들을 마스터했었다.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열다섯 명의 복장 단정하고 예의 바른 뉴욕인들로 그들 중에는 기자와 저널리스트도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 아첨하는 듯한 무대를 올린 후에 주최자는 겸손하게 탁자에서 자신의 일(work)과 미국을 방문한 이유에 대한 손님들의 즉석 질문에 답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그의 영어선생에개 윙크를 보내는 것과 함께 갑자기 목소리의 톤을 바꾸어, 인류의 슬픈 타락과 네 문자의 허사(expletive)에 의해서나 묘사가 가능한 존재로의 탈바꿈이 유난히도 이 나라를 휩쓸고 있으며, 그래서 그 현장을 적나라하게 알아보기 위해 그가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그는 이러한 괴로운 상황의 배후 원인은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이 지성과 교양의 명령은 절대 따르지 않고 외적 욕망의 지시만을 따른데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는 특히 잘 생긴 여자 하나를 지적하면서 그녀의 옷차림새와 화장에 대해 칭찬을 늘어 놓았다. 그런 다음 아주 정중하게, 그녀의 몸치장 뒤에는 어떤 특별한 사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성적 욕구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손님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여러 종족과 국가의 성적인 관습에 대한 자세하고도 상세한 묘사와 함께 그 자신의 성적 묘기에 대한 이야기로 뛰어들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근사하고 오래된 아르마낵( Armagnac )으로 푸짐하게 대접받았을 때쯤, 손님들은 그들의 억제력을 잃고 곧 말 이상의 것이 되어버린 음담 패설의 교환에 가담하게 되었다. 구제프는 그가 모욕했던 여자와 함께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은 이제는 오입이나 그 유사한 것들이 그날밤의 스케줄에 들어 있는 것으로 믿게 되어 각각 다른 호실에서 나체의 다양한 단계들을 연출하면서 육체적으로 엉클어지기 시작했다.
곡예가 절정에 달한 바로 그때, 구제프는 팔팔하게 떨어져 나와 주연을 끝내라는 벼락과 같은 명령을 던지면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수업은 끝났다. 여러분들은 내가 저녁 일찍 했던 이야기의 타당성을 여러분 자신들의 행동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하였으며, 그 덕택으로 이제 여러분은 자신들의 진정한 실태를 부분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중요한 수업' 에 대한 댓가로 수표와 현금의 지불을 기꺼이 수락하겠다."
피터는 구제프를 알기 때문에 놀라지도 않고 기록을 했는데 들어온 돈이 수천 달러에 달했다. 모두들 떠나고 난 후 구제프는 접시를 닦고 있는 피터를 돕기 위하여 부엌으로 가 그날밤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역겨웠다는 대답이었다. 구제프는 웃으며 꿰뚫는 듯한 눈으로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역겨움이라‥‥‥ 참 좋은 느낌이군 그래. 그러나 이제는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어. 누가 역겨웠지?"
이것이 실제 상황이다. 그대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대의 속마음과는 아주 딴판이다. 인류는 심하게 타락했으며 표면의 행동과 내면의 의도가 별개라는 구제프의 관찰에 대해 손님들은 마음이 상했고 화가 났었다. 그대는 설명을 늘어놓는다거나 합리화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의 변명은 변명일 뿐이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조차도 못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여자가 강간당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녀가 강간당하는 것을 원하고 있어서,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어서 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것을 불러들인다. 그녀의 어떤 제스처나, 걸음걸이, 옷차림새나 이야기하는 방식들이 모두 강간에 대한 미끼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놀라고 화가 나 격앙된 듯이 경찰서와 법정에서 싸운다. 만약 그녀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본다면 그녀는 더욱더 놀라게 될 것이다. 사건은 그녀 자신의 노력으로 욕망을 충족시켜 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면의 실제적인 동기를 모르는 채 계속해서 이런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시하라. 그 주시가 그대를 매우 예민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냥 주시하라. 그대의 진짜 동기는 무엇인가? 이것이 그렇지 않다고 그대 자신을 확신시키려 하지 말라. 그냥 하나의 거울이 되어 그대의 행위들을 바라보라. 그냥 그대 행동의 조용한 파수꾼이 되어 왜 그대가 그런 일을 하는지,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에 관하여 항상 경계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가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는 이런 일을 이야기하는 개성이요,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되는 일을 하는 그대의 실체이다. 그리고 웬일인지 둘은 서로 조절해가고 있다. 여기서 갈등과 마찰과 에너지의 낭비가 생겨난다.
내면에 하나의 욕망이 있고 바깥에는 그 반대되는 것이 있는 대부분의 경우 그 일은 일어난다. 그리고 반대되는 것은 왜인가? 반대되는 것을 통하여 그대는 그대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적으로 깊게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매우 뛰어난 것처럼 행세한다. 열등한 사람만이 뛰어나기를 바란다. 정말 뛰어난 사람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열등의식으로 고통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가가 된다. 그것만이 그들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얼굴에 '나는 의롭다'라는 표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깊은 내면에 있어서는 그 반대라는 것을 안다. 그는 죄의식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무가치함으로 깊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이제 그것을 숨기는 유일한 길은 성자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소위 성자라고 하는 자들은 죄인들과 조금도 다른게 없다. 유일한 차이라면 죄인들은 정직한데 반해 성자들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백 명의 성자들로부터 진짜 성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 이상일 뿐만이 아니라 기대 이상이 될 것이다. 99%가 가장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그대들에게만 가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위장은 너무 교묘하여 다른 사람들만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까지 속이고 있다. 사실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속여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믿을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가 성자라고 믿기 시작할 때 그때 가서야 그대 자신도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진짜 성자는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안다. 비록 온 세상이 그가 성자가 아니라고 떠들어 댈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이해는 내면적이다. 그는 곧바로 자기 자신과 조우한다. 그의 경험은 직접적이며 실제적이다. 그는 그의 본성을 안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은 신을 알고, 불멸을 알고, 죽음을 아는 첫 발자국이다.
헨리 베르그송은 금세기 초에 말했다. "과학에 의해 몸에 주어진 부가는 영혼에도 상응하는 부가를 요구한다."라고. 현대인들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영혼이 결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과학과 기술이 몸에 많은 것들을 부착시켰기 때문이다. 몸은 더 강해졌고 더 오래 산다. 뇌는 더 강해졌고 더 지적으로 되었다. 몸과 몸의 일부인 뇌에 비교해 볼 때 영혼은 매우 가난하다. 그것은 거의 무시되었고 부정되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누가 자신의 본성에 관해 생각한단 말인가. 교회나 절간에 가는 것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발을 벗어 던져야 한다. 자신의 적나라한 본성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우주와 다시 연결시킬 수 있다. 실제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거기에서 뿐이다.
첫댓글 어려서 친구가 있었는데 항상 옷을 이상하게 입고 다녔어요..그 친구가 어느날 제게 남자들이 쳐다보는게 싫다고 하는겁니다..남자들이 쳐다보는게 싫으면 옷을 그렇게 입지 말라고 했는데 그 친구가 제게 다시 연락을 하지 않더군요..본인에게 벌어지고 있는 문제는 모두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