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국민들이여!
수호믈린스키의 자유해방 사상으로
러시아 침략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지키시라!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우크라이나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우크라이나에 수호믈린스키 국립대학교가 있다.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대학교다.
수호믈린스키 국립대학교는
수호믈린스키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대학교다.
수호믈린스키는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의 이순신 장수처럼 우러름 받는 우크라이나의 민족 영웅이다.
또한 수호믈린스키는 전 세계에 가장 영향력 높은 교육 사상이론가이다.
수호믈린스키는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 나치 제국주의와 싸워 소비에트 사회주의(옛 쏘련)를 구했고,
나치 치하의 조국 우크라이나를 해방시켰다.
수호믈린스키는 히틀러 나치 제국주의와 싸우던 해방 전쟁 막바지 고비, 1945년 부인을 잃었다. 역시 부인도 히틀러 나치 침략군과 싸우던 게릴라 전사였다.
수호믈린스키 부인은 나치 침략군에 붙잡혀 산 채로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
그때 한 살 먹은 갓난아기 딸이 있었다.
참혹한 전쟁에서 갓난아기는 기적같이 살아 나 아버지를 기려 세운 수호믈린스키 국립대학교의 교육학 박사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수호믈린스키 선집] 출간 일로 전자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인연으로 [수호믈린스키 선집]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 출간했다. ([선생님들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생각의 뿌리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호믈린스키 교육 사상과 이론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지금도 나라 곳곳에서 연구되고 실천되고 있다.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은 한 때 서구 유럽과 동유렵의 베스트셀러였다.
수호믈린스키의 교육학은 교육자들뿐만 아니라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수호믈린스키의 교육학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아이들은 하나하나 저마다 별처럼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
수호믈린스키 교육 실천론이 집단주의 성격이 감한 옛 사회주의 권과 개인주의 성격이 강한 서구 유럽에서 공통으로 지지와 환영을 받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진보 학자 박노자 교수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 수호믈린스키다.
지금도 수호믈린스키 교육 사상과 이론은 지구의 어느 나라 어느 곳 어느 학교에서 실천되고 있다.
이런 남다른 인연으로 맺어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으로 화염에 휩싸여 간다는 소식에 분노와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삼차 세계대전의 서막인가. 아니면 아프가니스탄의 재연인가. 둘 다인가,
섣부른 예측이길 바란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악마의 혼,
도스트예브스키가 쓴 '악령'이다. 악령.
정치가 푸틴에게 종교의, 주술의. 문학의 표현이 맞지 않다고, 좀 더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 속에서 바라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눈에는 푸틴의 얼굴에 악마의 혼, 악령이 보인다.
본 것을 안 봤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코로나 판데믹 같이 푸틴이 무섭다.
푸틴은 악마이기 때문이다.
푸틴은 인두컵을 쓴 악마다.
악마는 전쟁을 먹고 산다.
악마는 평화를 가장 무서워한다.
평화를 죽여야 악마는 산다.
러시아 국민들은 이제는 안다.
푸틴은 악마라는 것을.
푸틴은 지신에 대한 국내의 정치적 불만,
자신을 독재자를 넘어 악마로 보는 국민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가 푸틴의 손아귀에 들어간 지 이십여 년이 넘었다.
푸틴은 러시아를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러시아는 푸틴의 개인 소유가 되었다.
푸틴은 히틀러, 차우세스쿠, 이디 아민, 무가베 급의
악마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푸틴의 종말을 앞 당길 것이다.
악마의 최후의 만찬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여
수호믈린스키의 자유해방 사상으로
러시아 침략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지키시라!
전 세계 인민은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며,
전쟁 반대의 길에 동참할 것이다.
힘 내시라! 우크라이나 국민들이여!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수호믈린스키(ВАСИЛИЙ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ХОМЛИНСКИЙ)
1918년 러시아제국 헤르손 현 알렉산드리야 군 바실리예프카 마을 목수 가정에서 출생. 농촌청년학교 졸업 후 크레멘추크 의과 기술학교 입학, 1939년 폴타바 사범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키로보그라드 현 오누프리예프 구 시골학교에서 우크라이나어와 문학 교사로 활동.
제2차 대전 참전. 1941년 7월 적군(赤軍) 입대. 청년 정치부 지도원으로 서부전선과 칼리닌 전선에서 전투, 스몰렌스키 전투와 모스크바 근교 전투 참전. 1942년 1월 포탄 파편에 심장 아래 중상. 기적적으로 소생하여 우랄 병원에서 퇴원.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우드무르츠키 자치공화국의 시골 학교 교장으로 일함. 고향으로 돌아와 1944년부터 인민교육부 오누프리예프 지역 분과장이 됨. 1948년부터 죽을 때까지 우크라이나 키로보그라드 현 오누프리예프 구 파블리시 마을 중등학교 교장으로 일함. 1955년 「교장은 교육과정의 조직자」라는 주제로 칸디다트 학위(준박사. 한국이나 서구의 박사학위에 해당) 수여.
수호믈린스키는 휴머니즘 원칙, 아동 인격의 높은 가치를 인정하는 원칙에 바탕을 둔 독창적인 교육체계를 만들었다. 교육 과정과 교사 및 학생 집단의 창조적 활동은 이러한 가치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호믈린스키는 공산주의 교육에 대해, 당의 명령을 고분고분 수행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인격들>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수호믈린스키는 ‘즐거운 노동으로서의 교육’이라는 체계를 만들었다. 학생들의 세계관 형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교육에서 교사의 언어, 서술의 예술적 문체, 아동과 함께 옛날이야기와 예술 작품을 만드는 작업에 중요한 몫을 할당했다. 수호믈린스키는 <미 교육>을 위한 복합적인 미학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런 교육체계는 권위적인 교육과 대립했으며, 공식적인 교육계로부터 <추상적 휴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쑤호믈린스키의 사상은 「공산주의 교육에 관한 에세이」(1967)와 다른 저서에 나타난다. 그의 사상은 많은 학교들에서 구현되었으며, V.A. 수호믈린스키 국제협회와 국제 수호믈린스키 연구협회, 수호믈린스끼 교육박물관(파블리시 학교 소재. 1975년 건립)이 만들어졌다.
수호믈린스키는 청소년 교육을 다룬 30권 가량의 저서와 500편 이상의 논문을 썼다. 그의 삶은 아동과 인격의 교육 그 자체다. 아이들에게 덕성을 가르치고 그들을 시민으로 교육시켰다.
수호믈린스키는 소련 교육학 아카데미 명예회원(1968), 교육학 아카데미 후보(1955), 우크라이나공화국 공로교사(1958), 사회주의노동영웅(1968) 이다.
1970년 우크라이나 공화국 키로보그라드 현 오누프리예프 구 파블리시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