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선비의 모습을 생활 속에서 보여주신 나의 스승
윤대식(영남대 명예교수)
나는 요즘 세태로 치면 조금 늦은 나이에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1986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국책 연구기관(현 국토연구원)에서 3년 6개월 동안 근무하다가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유학했던 오하이오주립대(The Ohio State University) 도시계획학과에서 진정한 선비의 참모습을 보여준 스승인 Professor Philip Viton을 지도교수로 만나게 되었다.
당시 Philip Viton은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교수로 있다가 오하이오주립대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오하이오주립대에서는 내가 그의 첫 번째 박사과정 제자가 되는 행운을 안게 되었다. Philip Viton은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정도 많았다. 미국의 경우 군 복무가 우리나라처럼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를 취하다 보니 대부분 대학(학부)을 졸업하고 바로 박사과정을 밟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미국 토박이들은 20대에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 다반사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도 20대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잠시 Philip Viton을 소개하면, 전형적인 미국 백인으로 아버지의 직장으로 인해 이탈리아 로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훤칠한 키에 신사적인 용모를 가졌지만, 정장에 넥타이를 맨 그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는 아이비리그 명문인 브라운대(Brown University)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미국 서부의 명문 캘리포니아 버클리대(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경제학과에서 교통경제학과 교통수요분석을 주요 연구분야로 하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아마 도시계획학과가 소속된 공과대학의 교수 가운데 유일한 경제학박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미국 유학을 가면서 지도교수가 이미 Philip Viton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나는 당시 그곳 교수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내가 특별히 지도교수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박사과정 입학허가를 하면서 교수들 간의 협의에 따라 잠정적으로 Philip Viton으로 지도교수가 배정된 것이었다. 나는 유학을 가면서 지도교수에게 한국의 토속적인 기념품을 선물로 가져가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여서 한국의 접이식 부채를 사서 가져갔고, Philip Viton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전달했다. 그는 학생들한테 어떤 선물도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값이 별로 나가지 않는 기념품이어서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연구실을 방문할 때마다 내가 가져간 접이식 부채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거의 1년 이상 그의 책상 구석에 놓여 있었다.
내가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당시 행정고시 출신의 교통부 사무관이 도시계획학과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왔다. 그는 나를 찾아와서 지도교수로 배정된 Philip Viton을 찾아가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서울올림픽 기념주화를 주었더니 받지 않더라고 했다.
Philip Viton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리고 1년 365일 계절에 따라 한두 가지 옷만 바꿔가며 입고 다녔다. 특별한 취미도 없는 듯했고, 별다른 스포츠도 즐기지 않았다. 학교 주변에 있는 그의 집에서 걸어서 출퇴근하면서 건강을 챙기는 것 같았다. 공부와 연구 외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따뜻한 인정을 좀처럼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권위적이지도 않았다. 교수와 제자 사이에 갑을(甲乙)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원칙만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연구조교나 강의조교에게 과도한 일을 맡기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사적(私的)인 일을 시키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당시만 해도 다른 학과의 일부 한국인 유학생들은 박사학위논문은 거의 다 준비했는데 지도교수가 계속 일을 시키기 위해 박사학위논문 심사와 졸업을 미루는 일이 많다고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다.
박사과정 2년 차가 되던 해 그의 과목을 수강하면서 기말과제를 논문(term paper) 형태로 제출하게 되었다. 그 논문을 읽고 그가 바로 연구조교와 강의 조교들이 함께 쓰는 방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그 논문을 당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에 투고하라고 강하게 권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문장표현은 그가 약간만 수정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두 번째 저자로 그를 포함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특별한 기여가 없으니 저자가 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사양했다. 그래서 그 후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 학생 신분의 단독 저자로 그 논문을 <Transportation Research-B>라는 저명학술지에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 내 박사학위논문을 간추려서 국제학술지에 게재하기 위해 그에게 공저자로 참여할 의향을 물었다. 그때도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의 박사학위논문을 위해 통계자료를 제공한 다른 교수는 두 번째 저자로 이름을 올리겠다고 했지만, Philip Viton은 자신의 기여가 공저자로 이름을 올릴 정도가 아니라고 극구 사양했다. 그의 원칙과 생활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내가 박사과정을 밟는 기간 내내 나와 한 번도 식사를 함께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 초대한 적도 없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심사가 끝나던 날 내 가족들과 식사를 같이 하자고 그가 먼저 제안했다. 당시 나는 아내와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예약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우리 가족이 함께 갔다. 그리고 거기서 지금까지 나누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식사비용도 당연히 그가 지불했다. 박사학위논문이 통과되면 당연히 지도교수가 밥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연말에는 연하장도 서로 보내고 필요하면 이메일로 소통했다. 그러다 1998~1999년 사이 1년간 나는 인디애나주에 있는 퍼듀대(Purdue University)로 연구년을 가게 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후 바로 그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오하이오주립대(The Ohio State University)가 있는 오하이오주의 주도(州都)인 콜럼버스(Columbus)로 가서 우리 가족들은 그와 함께 식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이번에는 내가 밥을 사겠다고 했고,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 대한 호칭을 과거와 다르게 했다. 박사과정 학생 시절에는 Mr. Yun(윤)이라고 불렀지만, Mr.와 나의 성(姓)은 빼고 이름(first name)만 불렀다. 전통적인 미국인들에게 이름만 부르는 것은 가까운 친구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이제 친구로 지내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Professor Philip Viton은 10여 년 전쯤 은퇴했다. 그는 학문적 열정은 빛났지만, 물욕이나 권위 의식은 없었다. 본인에게는 엄격했고, 남에게는 관대했다. 그리고 매우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서 금방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를 오랫동안 만나면서 신뢰를 쌓게 되면서 매우 편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 그가 동양에서 온 제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제자도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면서 학문적 동지로, 그리고 오랜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그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였으며, 학문적으로는 매우 냉철한 머리를 가졌고, 마음속 깊은 곳에는 따뜻한 품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유주의자의 면모를 유지하면서 남을 대할 때는 공정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냉정한 인물로 비추어지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세속적인 가치나 허례허식에 물들어 있지 않았다. 남들과의 사교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 학과 내 교수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미국 유학 시절 그에게 배웠던 대부분 한국인 제자의 그에 대한 평가도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Professor Philip Viton은 진정한 선비의 모습을 생활 속에서 보여준 나의 스승이었다. 그는 진정한 학자였으며, 공인(公人)이었다. 그는 그가 가진 지식과 능력을 출세와 돈벌이의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돈벌이를 위한 연구, 그리고 연구만을 위한 연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연구논문은 아주 많은 다작(多作)은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력 있는 연구 결과는 저명학술지의 논문으로 남아 있다. 그의 강의는 명쾌했고, 연구를 위한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연구조교에게 맡기지 않고 그가 직접 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도 인격체로 대해 주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으며, 학문적 열정으로 가득 찬 연구자요 공정한 교육자였다. 말 그대로 그는 서양의 ‘진정한’ 선비였다. 내가 교수 생활을 하면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때 만약 Philip Viton이라면 어떤 생각과 의사결정을 했을까? 하고 종종 생각했던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그도 은퇴했고, 나도 정년퇴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를 만날 기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이제 그의 건강과 행복한 노후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
첫댓글 교수님, 정해진 주제의 글을 쓴다는 것이 마음 부담이실텐데, 흔쾌히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교수님의 글에서 보이는 Philip Viton 교수님을 간접적으로 만나면서 유학시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단 한말씀도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국내외 다소 어긋난 논문심사 사례와 또 논문의 공저 문제 등도 생각하게 합니다. 이런 스승님을 만났기에 훌륭한 학자가 되는 거다라는 사실, 또 전하는 일화들은 교수님께서 지키고 산 방향이구나를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와닫는 명문! 감사합니다.
교수님, 잊지 않으시고 사진 찾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멋진 사진을 자리 찾아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