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가·작곡가. 출신지·가계·학력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대중음악 연주가와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시점은 불분명하나, 1933년 무렵부터 음반회사와 공연 무대, 방송에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1933년 <긴 한숨>, 1936년 <애달픈 신세> 등을 작곡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한 예가 보이며, 1935년 11월 동양극장 개관 기념으로 열린 배구자(裵龜子)악극단 공연에서는 편곡과 지휘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까지는 작품 수가 많지 않고 음악 활동이 활발한 편도 아니었다.
1938년 이후 오케(Okeh)레코드에 전속되어 주로 편곡을 담당했고, 오케레코드 관련 공연단체인 조선악극단에서 조선음악구락부(朝鮮音樂俱樂部), 즉 C.M.C악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43년까지 편곡을 담당한 작품은 현재 20여 곡 정도 확인된다. 1943년 후반부터는 조선악극단에서 나와 성보(城寶)악극대·현대극장(극단 이름)·조흥(朝興)연예대 등에서 작곡과 편곡 등 음악을 담당했다.
해방 이후에는 현대가극단·국도(國都)가극단·K.P.K악단 등에서 음악활동을 했는데, 1950년 6월 K.P.K악단 광고에 이름이 등장한 이후로는 행적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1957년 당시 활동하고 있던 대중음악가 명단을 거의 모두 수록한 「한국무대예술인명감」에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르면 1950년에서 늦어도 1957년 이전에 사망했거나 음악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치는 않으나 6·25전쟁 중에 사망했거나 행방불명되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