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열전-신동문 7작성자페드라|작성시간09.06.10|조회수187목록댓글 1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신구문화사에 신동문이 있다면 신동문 옆에는 항상 민병산이 자리했다. 두 사람은 청주시절 부터 단짝이었다. 학교도 같이 다녔고 신문사에서 논설위원으로 함께 재직하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이기에 새벽의 논설위원시절부터 신구문화사 편집위원으로 동고동락할 수 있었다. 이런 두 사람이지만 딱 하나 서로 상통하지 않는 게 있다. 상통하지 못하는 걸 불화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들에겐 상통은 미비해도 불화는 없었다. 상통을 못하는 건 술과 커피였다. 신동문은 술을 좋아했고 민병산은 커피를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민병산은 다방이 방이고 신동문은 술집이 방이었다.
신동문이 이병주를 만났을 때도 명동이나 종로를 활보하며 문인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가졌지만 다방에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실로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바둑 또한 용호상박이었다. 그렇다고 프로급의 바둑은 아니었지만 아마로선 기력이 괜찮은 편이라 종종 관철동의 호랑이답게 기원에서 바둑을 두곤 했다. 바둑을 둘 때도 두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다. 민병산은 신중하다 못해 진지했지만 신동문은 호쾌한 바둑이었다. 그래서 신동문은 반상의 바둑알을 바라보며 민병산을 이겼다고 맘을 턱 놓고 있다가 신중한 민병산에게 일격을 당하기가 일수였다.
이런 두 사람이 어느 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신동문이 먼저 ‘민형, 민형이 술을 마실 줄 알면 한국에서 제일가는 멋쟁이 일거요. 그러면 우린 멋진 술친구가 됐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표하곤 했다. 그러자 민병산이 신동문을 가리키며 ‘신형, 신형이 커피를 즐길 줄 안다면 더 좋은 시가 나왔을 거야’라고 답하곤 두 사람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커피와 담배, 커피와 술,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참 가까운 거리인데 두 사람에겐 술과 커피가 멀게만 느껴졌나 보다.
신동문에게 있어 술은 벗이다. 그는 언제나 술과 함께 했고 그 자리에는 동료문인들이 함께 했다.
잠시 언니 집 얘기를 하자. 지금이야 없어졌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싸구려 막걸리 집에서 색시들이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러가며 주당들의 술맛을 당기게 하는 집들이 꽤나 있었다. 관수동의 ‘대련 집’ ‘청계 옥’을 비롯해 관철동의 ‘언니 집’이 이름 꽤나 날리든 막걸리 집들이다. 그중에서도 언니 집은 술값도 싸고 무리한 팁을 받지 않아 문인들이 언니네 집 문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주로 프로기사棋士들이 많았지만 프로기사들이래야 태반이 바둑을 두는 문인들이었다. 당연히 1차는 키가 작은 ‘꼬마 집’에서 술잔을 걸치고 ‘언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심종식, 김인, 유건재, 전영선, 김희중 등의 기사와 강홍규, 신동문, 황명걸, 박형규, 김문수, 신경림, 강우식, 양문길, 김원일, 김용성, 민병산, 장문평, 박재삼, 김성동, 민영, 윤후명 등이다.
이왕 술 얘기가 나왔으니 신동문의 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자. 32년 전 주당대회가 열렸다. 그때는 맥주가 대중에 어필하기 시작할 때라 문인들을 비롯해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참가를 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시작된 술 마시기 시합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이들이 거의 탈락하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신동문과 아나운서 임택근이다. 그러나 신동문 앞에서 두주불사한다는 임택근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날의 주당대회그랑프리는 신동문이었다.
그날 주당대회의 에피소드 중 일품은 정비석의 옷 차람이다. 땀을 흘려가며 마시는 술자리에 그는 겨울에 입는 콤비를 걸치고 나왔다. 뜨거운 열기가 내리 쬐는 날의 콤비는 무척 더웁게 보이지만 흘리는 맥주를 표 나지 않게 빨아드리는 데는 콤비가 아주 적격이었다. 그는 맥주를 반은 마시고 반은 흘렸지만 콤비는 표 나지 않게 흘리는 맥주를 흡수해냈다. 소설가 정비석만의 비법치곤 이채로운 비법이다.
이런 신동문의 주막순례에 종종 민병산이 함께 한다. ‘언니 집’의 순례도 그렇다. 모두가 한 가닥 하는 주당들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민병산의 출현은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민병산의 술집 출입이 어디 한두 번인가. 주당들이 모여드는 관철동의 술집엔 으레 민병산이 딱 버티고 앉았다. 그는 비록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지만 관철동에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술집의 터주 대감이 민병산이다.
민병산은 평론가이자 전기에 관한한 일인자다. 그가 다방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모두들 일어나 술집으로 향할 때면 민병산도 어슬렁어슬렁 술꾼들의 뒤를 따른다. 그렇다고 술꾼들이 민병산을 나 몰라라 하고 그들끼리 술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느릿느릿 따라오는 그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 술집으로 향한다. 무애주가인 그가 없는 술자리는 상상을 불허한다. 1년, 365일 술꾼들이 있는 곳엔 어김없이 민병산이 자리해 맛깔스런 말의 안주를 선사한다. 그가 없는 술집은 안주 없는 술잔이고 커피 없는 다방과도 같다.
신동문과 민병산은 어릴 적 친구다. 청주에서 초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를 몰라본 채 충청일보 논설위원으로 근무했다. 세월이 무상해서 일까. 아니다. 두 사람은 해방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쳐 4· 19가 나기 전인 50년대 말에야 얼굴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름도 다르고 얼굴이 너무 변해서 서로가 서로를 몰라봤다.
어릴 때의 신동문의 이름은 건호였고 민병산의 이름은 병익이었다. 다른 이름, 너무 변한 모습에서 두 사람은 이방인이었다.
신동문은 빈한한 선비집안에서 태어났고 민병산은 힘을 잃어가는 구한말의 이름깨나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6년간을 보내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헤어졌다. 본래 활달하고 건강했던 민병산이 어른스럽게 변하게 된 건 카이로선언문이 계기가 되었다.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문이 발표되자 중학교에 재학 중인 병익은 조국이 독립된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선언문을 복사해 돌리다가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일 년의 실형을 받았다. 그는 해방되기 2개월 전에 석방되었지만 이미 순진무구한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고통에 찬 모습만 남았다.
이런 그의 모습을 신동문인들 어찌 알아볼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은 우연찮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를 알아보고 20여년만의 해후에 감격했다.
문인들이 거주할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폐허가 된 50년대 말의 서울거리보다는 60년대의 서울거리가 조금은 안온했다고 해야겠다. 아무래도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방과 술집들이 많이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관철동, 청진동, 관수동, 무교동으로 이어지는 다방과 주점들은 문인들에겐 거주할 자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출판사나 잡지사도 종로에 터를 잡고 있었다. 민음사나 신구문화사도 관철동과 청진동에 자리 잡았다. 이후 신구문화사는 수송동으로 옮겼지만 걸어봐야 기십 미터 정도다. 그렇다보니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아침마다 출판사나 다방으로 출근을 했다. 이호철은 수송다방에 똬리를 틀었고 많은 문인들은 번역이나 다른 일거리를 얻기 위해 신동문의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그러다가 술시가 되면 관철동이나 청진동을 거쳐 명동으로 나들이를 간다.
명동엔 싸구려 막걸리집이지만 이름깨나 날리든 집들이 여럿 있었다. 명동극장 골목길에 이봉구와 수주가 드나들던 ‘은성’이, 명동입구에 있는 ‘기차 집’-같은 이름의 기차 집은 종로 뒷골목에도 있다-이, ‘25시 집’과 ‘서서먹는 집’을 비롯해 폐허의 잔흔이 지워지지 않은 흑갈색의 지하실엔 ‘할머니 집’이, 파전을 맛있게 하는 유네스코회관 뒤편의 ‘마산 집’ 그리고 천상병이 찾아낸 보물 같은 술집 ‘쌍과부 집’이 있다.
이 술집 중 아무 곳에나 얼굴을 디밀면 이미 얼굴이 불콰해진 얼굴들이 뒤틀린 나무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선 술잔을 털어 넣는다. 다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 체면치례 없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나무쪼가리에 후객들도 엉덩이를 디민다.
명동엔 천상병과 김관식 말고도 김수영과 휴전선의 박봉우와 수시로 마주치곤 한다. 그뿐인가. 수주와 이봉구 그리고 박기원도 만난다. 이렇듯 명동이나 종로는 시인과 소설가들의 거주공간이다.
다시 낮이 되면 문인들은 신동문이 있는 신구문화사로 모여든다. 김수영도 번역한 원고를 혹은 번역해야 할 원고 때문에 수시로 들른다. 그는 때때로 신동문 앞에서 씨 팔 좆 팔을 해대며 세상살이에 욕을 해댄다. 그러다가 신동문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기다렸다는 듯이 고료를 적어 그의 책상 앞에 놔둔다. 다시 사무실에 들어온 그는 김수영의 가불 장을 보고선 웃으며 경리에게 돈을 받아 손에 쥐어준다. 마포 닭장에서 곤궁하게 살던 김수영은 돈을 받아 쥐곤 마포의 닭들이 있는 계사로 달려간다.
본래 숫기가 많은 김수영은 욕 같지 않은 욕으로 자신의 숫기를 감추려 들었고 그런 김수영의 마음을 아는 신동문은 문우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 시절, 누구라 할 것 없이 참으로 어렵게 살든 시기였다. 그랬기에 그들만이 나누는 마음은 가슴 시리면서도 온기가 있다. 그 시절의 온기를 문단풍경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거리낌 없이 그렇게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