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오툴 부인
다음 날 아침 ,
눈부시게 화창한 날씨였다.
전 날 저녁 식사를 건너 뛰었더니 배가 많이 고팠다.
그래서 지갑을 챙겨 들고 , 식품 저장고에 채워 놓을 음식을 사러 나갔다.
갑작스레 날씨가 추워질 것을 대비해 허리춤에 스웨터도 질끈 묶어 두었다.
도로로 나가는 바깥 대문을 연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 앞에 깍아지른 듯한 장엄한 바다 절벽과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도로와 바다가 접하는 오른쪽 저편에 건물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
아마 그 곳이 마을인 듯 했다.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 마시며 ,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도로에는 높이가 3미터쯤 되어 보이는 산울타리가 있었고
길 양쪽으로는 가느다란 배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도로는 아주 작은 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정말 좁았다.
산울타리 틈새로 보이는 푸른 풀밭에는 노란 아이리스와 데이지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목에 무서운 엘리멘탈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긍정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이른 아침 시간을 보내면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아일랜드 오두막에서 한 달 동안을 지낼 수 있음을 자축했다.
마을을 향해 , 서서히 걸어 내려가다 보니 ,
펍 두개와 평범한 가게가하나 있는 교차로에 이르렀다.
` 선택의 여지가 없군 ` 나는 삐걱거리는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리면서 , 가게는 조용해졌다.
이방인이 도착한 것이다.
나는 미소를 띤 얼굴로 재빨리 식료품 코너를 둘러 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다시 평소처럼 일상적인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거리를 생각해서
최대한 가벼우면서도 많은 요리를 할 수 있는 재료들을 고른 다음 ,
계산대를 둘러 보았다.
계산대 뒤에는 주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계산대로 걸어가 계산할 물건들을 올려 놓았다.
그러자 남자는 물건들을 확인하며 , 평상시 손님을 대하듯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휴가차 놀러 온 여행객인가요 ? `
마을에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
기분 좋게 말을 걸어오는 그를 무시할 수는 없어 내가 대답했다.
` 이번 여름 동안 데이비슨씨의 오두막을 빌려서 지낼 예정이에요. `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왼쪽 눈썹을 추켜 올리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 그 집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나요 ? `
(아일랜드에는 정말 요정들이 많이 사나 봄 ㅎ )
` 왜 그 작은 이들 있잖아요. `
그가 빠르게 대꾸했다.
` 그 뿐만이 아니에요.
그 곳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출몰하는 길목이기도 해요.
그 집 바로 맞은 편에는 캠핑카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
글쎄 그 안에 아무도 없는데도
그게 덜커덩 흔들리면서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났다니까요. `
그는 부추기기만 하면 더 이야기할 기세였다.
그의 이야기는 전 날 밤에 내가 겪었던 일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고 , 나는 두려움에 몸이 떨려 왔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 레프리콘의 출몰 ` 에 대해 알고 있는 정도라면
엘리멘탈의 존재를 마냥 무시하고 지내기는 힘들 것 같았다.
화창했던 나의 하루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가게 주인이 내게 겁을 주려는 목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거다.
내 느낌에 그는 그저 보통의 아일랜드인처럼 마을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외국인을 긴장하게 만드는 짖궂은 구석이 있었다.
그의 장난스러운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 장 본 물건들을 챙겨 가게를 빠져 나왔다.
아마 그 날 모든 마을 사람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사는
데이비슨씨의 오두막을 빌린 한 미국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우리 나라 시골과 비슷 ㅋㅋ)
(참고로 아일랜드 사람들은 미국인과 캐나다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집에서 얼마나 버틸지 내기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불 보듯 뻔히 보였다.
나는 다시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다.
장 본 물건들 , 그리고 가게 주인이 건네준 이야기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다.
길 가의 울타리들을 따라 걸어갈 때는 갑자기 내 앞으로 무언가 튀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 , 몸이 뻣뻣하게 얼어 붙었다.
나는 오두막에 도착한 뒤에야 ,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건들을 내려 놓고 , 서둘러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 오두막을 내 집처럼 아늑하게 꾸미기 시작했다.
레프리콘들은 보이지 않았고 , 나도 구태여 그들을 찾지 않았다.
아마 내가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질 시간을 줬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 나는 혼자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가구를 재배치하고 , 명상 제단을 만들고 , 꽃을 따러 다녔더니 금세 시간이 지나갔다.
점점 길어지는 그림자가 태양이 지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제 벽난로에 불을 지필 시간 시간이었다.
나는 토탄 네 조각을 집어 든 다음 , 토탄 사이 사이에 공기가 잘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씩 쌓아 올렸다.
벽난로 선반에서 성냥을 꺼내 토탄 가장 아래쪽에 집어 넣었다.
하지만 불이 붙질 않았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역시나 실패였다.
짜증이 난 나는 이번 여름에 쓰려고 사뒀던 일기장을 몇 장 찢었다.
조심스레 그것을 토탄 아래에 놓고 , 불을 붙이자 종이가 활활 타올랐다.
나는 자축하며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불은 점점 사그라들다 마침내 꺼져 버렸다.
나는 불이 지필 일이 없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 여름이었으니까 !
하지만 이 곳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 아일랜드와 캐나다의 여름이 얼마나 다른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오두막은 춥고 습해서 , 아무리 따스한 날이라 하더라도 실내 온도가 17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몸을 덜덜 떨면서 불을 붙일 방법을 궁리하고 있던 그 때 ,
고개를 들어 보니 바깥 대문 쪽에 사람 머리 하나가 나타났다.
스카프를 두른 머리의 정면과 측면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삐져 나와 있었다.
대문 사이로 거칠어 보이는 손 하나가 쑥 나오더니 ,
빗장을 흔들어 문을 열었다.
몸에는 단추 두 개가 달린 , 지저분해 보이는 청회색 비옷이 찰싹 붙어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마다 옷이 펄럭였는데 ,
낡은 꽃무늬 드레스와 옷 단 아래로 제멋대로 늘어진 슬립이 보였다.
그녀는 오른 손으로는 자기 키만한 지팡이를 잡은 채 ,
진흙이 잔뜩 묻은 장화를 신고 , 현관문을 향해 걸어 왔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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