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의 일본선교 비망록 - 7 - 일본어 학원생활
대학에서 전공은 법이었으나 실제로 접해보니 도무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중 대학 3학년 때 인터넷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PC통신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 매력에 빠졌던 나는 이 때부터 내 활동무대는 학교를 벗어나게 된다.
그 연장선으로 인하여 대학 졸업 후 IT관련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이후에도 몇몇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남부럽지 않을만큼 방황도 한 끝에 2008년부터 대형 일본어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일본어 교육에 있어서 뜻한 바가 있어서도 아니며 철저한 계획이 있어서도 아니었으며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강사모집에 응시했다.
2회에 걸친 면접과 시강 끝에 연락을 받게 되었는데 처음 맡은 과목은 일본어능력시험(JLPT) 1급 주말반이었다. 지금은 N1~N5까지 있으나 그 2009년까지는 1급~4급이었다.
여기서 비밀을 한 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JLPT 1급 시험반을 처음 맡았을 당시, 나는 아직 1급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학원측에서 제공해준 교재를 보니 이 정도라면 가르치는 데에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일본어는 동네 학원에서도 가르친 적이 없었으나 학생들의 호응은 의외로 괜찮았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일본어학원 강사생활은 순조로웠다. 처음에는 토요일 오후반과 일요일 오전반 각각 4시간 수업이었는데, 토요일 오전반까지 맡게 되고 이후에는 평일반 JPT도 함께 진행하게 되었다. 결국 주7일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몸은 피곤했으나 노력한 만큼 성과도 남길 수가 있어 대단히 만족했다.
초보강사 딱지도 떼지 않았을 당시 학원측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일본유학시험(EJU) 과목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설명에 의하면 이는 일본대학 진학을 위한 말하자면 일본유학생용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이다. 대학에 따라 본고사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많은 대학들이 EJU를 채택하고 있기에 일본유학을 하려면 반드시 응시해야 하는 시험이라고 한다.
아직 JLPT나 JPT 시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황에서 이제 EJU라는 시험, 그것도 말하자면 대학입학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책임이 막중하다.
그렇다고 학원측에서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도 경륜도 없기에 이를 수락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내 학원생활은 또 하나의 전기를 맞게 된다.
일반 시험반 같은 경우에는 강사 하나가 각자의 방식에 따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도를 하는 것으로 결과를 남길 수 있는 반면, EJU는 시험과목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느 학원이든지 한 팀으로 운영이 된다.
어쩌면 인생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입을 책임지는 입장, 더욱이 나는 EJU 일본어 고득점반을 맡게 되었기에 부담도 적지 않았으나 주변 선생님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한 번은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수업 중 ‘카이샤쿠’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는 ‘해석(解釋)’이라는 뜻으로 설명을 했는데, 어느 한 학생이 말하기를 “’카이샤쿠’라는 말, 무섭지 않아요?”라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아이들의 일본어 수준이 이 정도로 높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학생이 언급한 ‘카이샤쿠’는 ‘해석(解釋)’이 아니라, ‘개착(介錯)’이라는 단어임이 분명하다. 이는 조금 섬뜩한 뜻이지만, 봉건시대 때 죄인이 할복을 하는 경우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단어는 웬만한 일본어 참고서에도 등장하지 않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알고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능력시험반 학생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너희들의 일본어 수준이 이 정도란 말이야? 좋다. 내가 진정한 일본어를 알려주겠다.”
그 때부터 나는 최고의 일본어를 가르쳐주려고 노력을 기울였으며, 한 단계라도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직 시험일자까지 여유가 남아있을 때에는 다른 일본어시험과 달리 아이들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들과 함께 몇 년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동년배 일본인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소양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그 나이 때라면 읽었을 문학작품이나 인문학적인 교양지식도 전달해주었다.
틈만 나면 학생들과 상담하고, 다른 과목을 가르치시는 선생님들과도 상의를 하면서 아이들의 진로를 결정했으며, 부모님이 찾아오셨을 때에도 학생의 현재상황과 남은 과정을 설명해 드리기도 했다.
학원에서 일본 대학을 가려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을 느꼈다. 매시간마다 열정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을 위해서 주 7일을 고스란히 바친 적도 많았으나 입시철에 들려오는 대학합격 소식은 이 모든 피로를 해소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를 되돌아보면 뚜렷한 목적의식, 그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목표를 구체적으로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일본어강사 특별히 일본유학시험 / EJU 강사야말로 내게 주어진 천직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태평양 쪽 동북지역에서 발생한 이른바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다. 이로 인하여 일본유학을 고려했던 일부 신규 학생들이 국내로 돌렸다고는 하나 기존 학생들에 대한 여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수익은 내가 머물렀던 캠퍼스에서 1위~2위를 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해 11월 경에 발생한다.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학원 사무국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으나 몇몇 직원들에 의해 EJU 과목 강사들이 변경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나는 갑작스럽게 EJU에서 나오게 되었다. 함께 일본어를 맡고 계셨던 한 선생님은 내가 나오게 된 것이 무슨 징계인가 하고 따졌으나 그것은 아니라며 단순히 학원측 사정에 의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달부터 내 수입은 1/10로 줄게 되었고 이를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스스로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이지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일본어실력이 떨어진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름 스타강사였던 내가 하루만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내심 3년 정도 실적도 남겼으니 EJU 다른 학원에서 영입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해보았으나 감감무소식. 학원 내외를 불문하고 모두가 나에 대해서 무관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