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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마하연론 제3권 釋摩訶衍論 卷第三
용수 지음
벌제마다 한역
이인혜 번역
龍樹菩薩造 姚秦三藏筏提摩多奉 詔譯
이제까지는 총식이 일체법을 거두어들이고 생하며 공덕과 허물을
원만히 갖추었다는 점을 밝히는 부문[摠識攝生圓滿門]에 관해 설하였다.
다음으로 총상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 이리저리 분석하는 부문[說摠相剖分散說門]을 설하겠다.
【論】 무슨 뜻에서 각의 측면[覺義]을 말하는가?
마음의 체[心體]는 염(念)과 상(相)을 떠났다.
염과 상을 떠난 것은 허공계와 동등하여 어디나 두루하지 않음이없는,
한 모습의 법계로서 다름 아닌 여래의 평등법신을 말한다.
이 법신(法身)에 의거해서 본각(本覺)을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본각의 측면은 시각(始覺)의 상대적 개념으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각이란 다름 아닌 본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으로 시각의 측면[始覺義]을 말하는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게 되고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설한다.
한편,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 이름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니라고 한다.
【釋】 위 글은 두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본각의 요지만을 간략하게 안립하는 문[略說本覺安立門]이고,
둘째는 시각의 요지만을 간략하게 안립하는 문[略說始覺安立門]이다.
본각문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청정본각문(淸淨本覺門)이고,
둘째는 염정본각문(染淨本覺門)이다.
시각문도 두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청정시각문(淸淨始覺門)이고,
둘째는 염정시각문(淸淨始覺門)이다.
어째서 청정본각이라 이름하는가?
본유(本有)의 법신(法身)이 무시이래로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어 항상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염정본각이라 이름하는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무명(無明)의 훈습을 받아 생사에 유전하면서끊일 때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청정시각이라 이름하는가?
무루(無漏) 성품인 지혜가 한량없이 많은 모든 번뇌를 벗어나 어떤 무명의 훈습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염정시각이라 이름하는가?
시각반야(始覺般若)가 무명의 훈습을 받아 염법과 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몇 가지 각(覺)은 모두 지(智)의 부류에 속한다.
어떠한 이치를 증득해야 심제 전체[體分]가 될 수 있는가?
성품진여[性眞如]의 이치와 허공(虛空)의 이치를 증득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이치에는 각각 몇 가지 종류가 있는가?
각각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을 두 가지 진여라 하는가?
첫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이고
둘째는 염정진여(染淨眞如)이다.
허공의 이치도 진여와 마찬가지다. 무엇을 청정진여라 하는가?
두 가지 청정한 각에 의해 증득된 진여를 말하니, 훈습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무엇을 ‘염정진여’라 하는가?
두 가지 염정의 각에 의해 증득된 진여를 말하니, 훈습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허공의 이치도 진여와 마찬가지다.
무슨 취지로 ‘본각’이라는 명칭을 굳이 붙이며, 본(本)이라는 글자와
각(覺)이라는 글자가 구체적으로 갖는 각각의 차별된 특성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본(本) 자와 각(覺)자에 각각 열 가지 뜻이 있네.
그들의 체(體)는 동일하나 글자의 특성이 각각 차별되기 때문이니
본에는 근(根) 등의 뜻이, 각에는 경(鏡) 등의 뜻이 있다네.
【釋】본(本)과 각(覺)에 각각 열 가지가 있다.
무엇이 본(本)의 열 가지 뜻인가?
첫째는 뿌리 근(根) 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나무의 뿌리가 가지와 잎사귀와 꽃과 열매 등 나무의 모든 부분을 잘 버팀 해 주어 무너지지 않도록 하듯이,
본유(本有)의 법신(法身)이 모든 공덕을 잘 버팀[住持]해 주기 때문이다.
둘째는 본래 본(本)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본유의 법신은 무시이래로 원래 그렇게[自然] 성품이 있는 것이지
어떤 시점을 가지고 거기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멀 원(遠)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본유의 법신이 소유한 덕은 한계를 나눌 수 없을 만큼 중중무진한 오랜 곳[久遠]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스스로 자(自)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본유의 법신은 나[我] 스스로가 나를 이루는 것이지 남[他]으로부터 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바탕 체(體)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본유의 법신은 지엽적인 덕 모두에게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성품 성(性)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본유의 법신은 전변(轉變)의 뜻 없이 항상성을 갖고 건립해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머물 주(住)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본유의 법신은 무주(無住)에 머물러 가고 옴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항상 상(常)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본유의 법신은 요지부동한 실제(實際)로서 유전(流轉≻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견고할 견(堅)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본유의 법신은 바람 같은 모습을 멀리 떠나 금강(金剛)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견고하기 때문이다.
열째는 모두 총(摠)자의 특성을 갖는 본이다.
본유의 법신은 광대하고 원만하여 어디에나 두루하지 않은 곳 없이 공통의 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상이 본(本)이라는 글자가 갖는 열 가지 뜻이다.
무엇이 각(覺)의 열 가지 뜻인가?
첫째는 거울 경(鏡)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의 지혜[薩般若慧]는 청정하고 명백하여 티끌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열 개(開)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의 지혜는 아무 장애 없이 문을 통과해서 방에 이르듯 하고 모든 것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보기 때문이다.
셋째는 한 일(一)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의 지혜는 유일하게 독존하는 것이라 비교를 통해 헤아림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벗어날 리(離)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의 지혜는 해탈의 자성을 갖는 것으로서 갖가지 모든 결박을 벗어낫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가득찰 만(滿)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의 지혜는 무량하게 갖가지 공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비출 조(照)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의 지혜는 큰 광명을 방출하여 무량한 모든 경계를 빠짐없이 비추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살필 찰(察)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의 지혜는 항상 끊임없이 분명하여 미혹과 산란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드러날 현(顯)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 지혜의 청정 한 체 가운데는 정품(淨品)의 권속이 다 현전(現前)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알 지(知)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의 지혜는 일체법에 대해서 궁극까지 추구하기 때문이다.
열째는 깨달을 각(覺)자의 특성을 갖는 각이다.
살반야의 지혜에서 나오는 모든 공덕은 오직 깨달음에서 나오는 비춤뿐
이라서 하나 하나의 법 그 어느 것도 깨달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이 각(覺)이라는 글자가 갖는 열 가지 뜻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본(本)자와 각(覺)자의 뜻은 단 한 가지 대성법신(大性法身)에 의거하지만
차별된 특성[義]을 기준으로 다르게 해석한 것이므로 본과 각 자체에 근거한다면 아무런 차별이 없다.
여기서 말한 것은 두 가지 본각 중에 어느 본각에 해당하는가?
염정본각(染淨本覺)이 아니라 청정본각(淸淨本覺)에 해당한다.
염정본각이라는 글자는 어떠한 차별된 뜻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염정본각(染淨本覺) 중에도 열 가지 뜻이 있으니
앞에서 말한열가지 특성이 각각성품을 떠난다는 뜻을갖기 때문이라네.
【釋】 이 염정본각(染淨本覺)도 각각 열 가지 뜻을 갖는다. 어째서 그런가?
앞에서 말했던 열 가지 뜻 각각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다[不守自性]는 뜻을 갖기 때문이다.
글자의 특성이 어디에 해당하는지는 앞에서 설한 내용에 의거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각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음이 아닌 같음, 다름이 아닌 다름이므로, 이런 뜻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그렇다[皆是]거나
전적으로 아니다[皆非]라고 할 뿐이다.
무슨 이유로 시각(始覺)이라는 명칭을 굳이 붙이는가?
시(始)라는 글자와
각(覺)이라는 글자가 갖는 각각의 차별된 특성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시작 없는 때로부터 미혹하거나 산란한 때가 없었고
오늘에야 비로소 처음 깨달았기에 시각(始覺)이라 이름한다네.
【釋】 시작 없는 때로부터의 시각반야(始覺般若)는 미혹하거나 산란한 때가 없었다.
미혹할 때가 없었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처음 깨닫기 때문에 ‘시각’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시각은 전에는 미혹했다가 후에 깨닫는다는 뜻에서 시각이 아니다.
미혹한 때가 없다는 것이 이치로 보나 지금의 현실로 보나
항상 처음이라는 뜻에서 시각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 시각은 두 가지 시각 중에 어느 것에 해당하는가?
염정시각이 아니라 청정시각에 해당한다.
염정시각이라는 글자는 어떠한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청정시각(淸淨始覺)의 지혜는 자성(自性)을 고수하지 않기에
염법의 훈습을 받으니 이런 이유로 염정각(染淨覺)이라 이름한다네.
【釋】 청정시각은 비록 미혹한 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염법의 훈습을 받아 연(緣)에 따라 유전(流轉)찬다. 이런 뜻에서 염정시각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무슨 이유로 진여(眞如)라는 명칭을 굳이 붙이는가?
진(眞)이라는 글자와 여(如)라는 글자는 어떠한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성품진여[性眞如理] 이치의 체는 평등하고 평등한 하나라 하나라거나
많다는 모습이 없어 이런 이유에서 진여(眞如)라고 이름한다네.
【釋】 성품진여의 이치는 절대적으로 평등하여 오직 동일한 한 모습일 뿐이며,
한 모습도 없고 많은 모습도 없나. 한 모습이 없으므로 동일만 연[同緣]을 멀리 떠났고
많은 모습이 없으므로 차별된 연[異緣]을 멀리 떠났다. 이런 뜻에서 ‘진여’라고 이름하였다.
이러한 진여는 두 가지 청정한 지혜로 직접 증득하는 것이다.한편,
진(眞)자와 여(如)자에 각각 열 가지 뜻이있다.
무엇이 진의 열 가지 뜻인가?
첫 번째 뿌리 근(根)자의 특성을 갖는 진으로부터 열 번째 모두 총(摠)자의 특성을 갖는 진까지이다.
이와 같은 진(眞)의 열 가지 뜻은 앞서 말한 본(本)의 열 가지 뜻과 분리되지 않은 채 원래부터
상응하고 동반하는 관계에 있다. 이런 이유에서 동일한 명칭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무엇이 여(如)의 열 가지 뜻인가?
첫째 거울 경(鏡)자의 특성을 갖는 여로부터 열 번째 깨달을 각(覺)자의
특성을 갖는 여까지다. 이와 같은 여(如)의 열 가지 뜻은 앞서 말한 각(覺)의 열 가지 뜻과 분리되지 않은 채
원래부터 상응하고 동반하는 관계에 있다. 이런 이유에서 동일한 명칭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열 가지 진의 이치는 본유의 법신이 덕의 방편을 갖는다는 뜻이며,
열 가지 여의 이치는 살반야의 지혜가 각의 방편을 갖는다는 뜻이므로,
이러한 까닭에 거듭 언사를 붙여 이와 같이 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진여 중에 어느 진여에 해당하는가?
염정진여가 아니라 청정진여에 해당하다.
염정진여라는 글자는 어떠한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청정진여의 이치는 자성을 고수하지 않으므로
염법의 훈습을 받기에 염정진여라고 이름한다네.
【釋】 청정진여(淸淨眞如)는 무시이래로 절대 평등하고 자성이 청정하여 생도 없고 멸도 없고
가고 옴도 없으며 머무는 처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여이치의 성품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에
연을 따라 움직이고 전변한다. 이런 이유에서 염정진여(染淨眞如)라고 이름한다.
이 진여는 두 가지 염정의 지혜로 직접 증득하는 것으로서, 분리되지 않은 채 원래부터 상응하고 동반하는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은 이치는 앞에 설한 내용을 관찰해서 같은 부류끼리 맞추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이유로 허공(虛空)이라는 명칭을 굳이 붙이는가?
허공이라는 글자는 어떠한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허공에는 열 가지 뜻이 있으니 체(體)는 비록 같으나
무애(無礙) 등으로 뜻이 각기 차별되기 때문이라네.
【釋】 성품 허공의 이치에는 열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가림이나 걸림이 없다[無障礙]는 뜻으로서, 허공은 색법(色法)에 가림이나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두루하다[周遍]는 뜻으로서, 허공은 어디든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평등(平等)하다는 뜻으로서, 허공은 가려내거나 선택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넓고 크다[廣大]는 뜻으로서,허공은 분할되는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모습이 없다[無相]는 뜻으로서, 허공은 색상을 끊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청정하다는 뜻으로서,허공에는 티끌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요동하지 않는다[不動]는 뜻으로서, 허공은 이루어지거나 파괴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유가 공하다[有空]는 뜻으로서, 척도를 가지고 잴 수 있는 한계를 끊었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공도 공하다[空空]는 뜻으로서, 허공은 공에 대한 집착까지도 떠났기 때문이다.
열째는 얻을 것이 없다[無得]는 뜻으로서, 허공은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을 허공의 열 가지 뜻이라 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는 특성[義]과 작용[用]에 따라 차별을 말한 것이다.
만일 체(體)를 기준으로 논한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이 허공의 이치는 두 가지 청정한 지혜로 직접 증득하는 것으로서,
분리되지 않은 채 항상 상응하고 동반하는 관계에 있다.
여기서 말한 허공은 두 가지 허공중에 어느 것에 해당하는가?
염정허공(染淨虛空)이 아니라 청정허공(淸淨虛空)에 해당한다.
염정허공이라는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청정허공의 이치는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 까닭에
염법의 훈습을 받으므로 염정허공이라 이름한다네.
【釋】 청정허공(淸淨虛空)은 열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청정허공에는 더러운 모습도 없고 깨끗한 모습도 없으니, 허공의 성품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 까닭에
능히 염법의 훈습을 받아 연(緣)에 따라 유전한다. 이런 이유에서 염정허공(染淨虛空)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능훈(能熏)과 소훈(所熏)의 건립과 그에 따르는 논란 등 갖가지 문제에 관해서는 광설분(廣說分)에 가면
이치가 자연히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제까지는 글자가 갖는 특성을 밝히는 부문[字事門]을 설했다.
이제부터는 본문의 글을 차례로 해석하는 부문[隨釋門]을 설하겠다.
‘무슨 뜻에서 각의 측면[覺義]을 말하는가?’
라고 한 구절은 총구(摠句)에 해당하고, 그 아래에 이어지는 문장들은 모두 별구(別句)에 해당한다.
총(摠)이란 모든 각을 통틀어 나타내는 말이고, 별(別)이란 모든 각의 차별된 특성을 설한 것이다.
별구 중에서 우선 청정본각과 청정시각을 설하고, 이어서 염정본각과 염정시각을 설한다.
그 순서를 보면 설하는 내용[相]을 알 수 있다. ‘마음의 체[心體]는 염(念)과 상(相)을 떠났다’고 한 구절은
청정본각을 말한다. 마음[心]은 자성청정심을, 체(體)는 본유법신의 체를 말한다. 심과 체가 이러한 뜻을
갖기에 본각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염과 상을 떠났다’는 것은 청정하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해 쓴 말이다.
즉, 큰 무명의 망념을 멀리 떠났기에 ‘염을 떠났다’ 하였고,
네 가지 무상(無常)한 상을 떠났기에 ‘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번뇌 권속은 이 다섯 가지 유위(有爲)를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본무(本無)를 들어서 권속이 모두 공함을 나타낸 것이다. ‘염과 상을 떠난 것[者]은’이라고 한 구절은 청정본각을 성취한 사람[人]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놈 자[者] 자는 말의 성분상 인칭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허공계와 동등하여 어디에나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이라고 한 구절은 청정본각을 성취한 자는 열 가지 덕을 구족하여 허공의 이치와 같아졌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한 모습의 법계’라고 한 구절은 청정본각을 성취한 자는 자신이 증득한 진여법계와 화합하여 아무런 차별 없이 한 맛, 한 모습을 가졌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다름 아닌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라고 한 구절은 수승하고 모한 두 가지 이치를 잘 증득한 청정한 각자(覺者)란 다름 아닌 법신여래의 자성 자체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이 법신(法身)에 의거해서 본각(本覺)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 구절은 본유법신(本有法身) 자체의 성품과 공덕 중에 귀의처를 삼아서 ‘청정본각’이라는 명칭을 건립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이제까지 청정본각에 대해 설하였고,
다음으로 청정시각에 대해 설하겠다.
‘어째서 그런가?’라고 한 구절은 법문을 청하면서 묻는 말이니,
청정시각을 건립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청한 것이다.
물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어떤 중생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본유법신이 원래부터 무량한 성품의 공덕을 갖추고 있으며
항상 깨끗하고 밝고 항상 자재하여, 이런 특성에 의거해서 본각이라는 명칭을 붙였다면 이러한 본각은 언제,
무슨 인연으로 일체 무량한 공덕을 구족하여 본각이라는 명칭을 얻는가?”
만일 이에 대해 “이 본각에는 큰 지혜력이 있어서 모든 허물과 근심을 잘 끊어 없애는 공능을 가졌고
무량한 모든 공덕을 구족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 본각은 전에는 미혹했다가 뒤에 깨달은 것이므로
본각의 밝음이라 할 수 없다. 이 공덕이 모든 허물과 근심을 갑기 전에는 숨어 있다가 끊은 뒤에 드러난다고 한다면, 그것을 두고 자성이 밝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혹할 때와 깨달았을 때에 따라 숨고 드러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본유(本有)라는 뜻이 성립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허물과 근심을 항상 끊는 것이라면 더 이상은 끊을 필요가 없고, 모든 공덕을 항상 구족하고 있다면
더 이상은 구족할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 본래의 끊음과 본래의 덕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덕이나 허물이 원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장애가 본래부터 끊겨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끊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일체의 공덕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갖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각(覺)이란 시각을 뜻하는 것이지 본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각(覺)이란 시각(始覺)을 말하며 불각(不覺)이란 무명(無明)을 말한다.
만일 이 두 가지를 떠나면 그것을 본각이라 이름한다.”
무슨 뜻에서 이렇게 말하는가?
본유법신은 그 자체의 성품과 공덕 중에 귀의처를 삼기 때문에 본각이라 이름하므로,
본문에서 ‘어째서 그런가?’라고 물은 것이다.‘본각의 측면은 시각(始覺)의 상대적 개념으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은 저러한 의문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답을 내려 준 것이다.
즉, 마명(馬鳴)논사 스스로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청정본각은 본래부터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어서 건립한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비방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허물과 근심이라 한 수도 없고 공덕이라 할 수도 없다.
언어의 길이 끊겼고, 심행의 처소가 멸한 것이로되 언설을 가지며,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무량한 성품의 공덕을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다.”
본각이라는 명칭을 붙인 이유는, 무시이래로 청정시각이 있어서 큰 지혜의 힘과 큰 정(定)의 힘을 발하여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무량무변한 허물과 근심의 바다를 항상 물리치며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무량무변한 공덕의 정품(淨品)을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다는 뜻에서다.
이 청정시각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저 청정본각이라는 명칭을 세운다. ‘왜냐하면 시각이란 다름 아닌 본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은 시각의 근거를 밝힌 말이다. 즉, 자연(自然)의 시각이 저 본각과 동일하기
때문이며, 시각을 상대로 해서 본각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 두 가지 각의 훈습(熏習)은 각각 어떤 차별된 양상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청정본각과 청정시각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모든 염법을 멀리 떠나 허공같이 담담하고 밝다네.
그러므로 이 문(門) 가운데에는 능훈(能熏)의 염법(染法)도 없고
소훈(所熏)의 정법(淨法)도 없으며 오직 자가(自家)의 덕뿐이라네.
【釋】 이 두 가지 각(覺)에는 능훈과 소훈의 차별이 없고 오직 자신[自家]의 진실한 덕(德)만 있다.
그러므로 이 문에는 능훈과 소훈을 건립할 수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문 중에 있다는 훈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훈습이 있다고 한 것은, 염법과 정법이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가 구족한 훈습이라는 뜻이다.
이 훈습은 어떤 것인가?
흰색처럼 깨끗하다. 『삼신본유계경(三身本有契經)』에서 “본유본각과 본유시각에는
오직 덕의 훈습만 있을 뿐, 허물과 근심의 훈습은 없다. 완전한 전[滿轉]만 있을 뿐,
부분적인 전[分轉]은 없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청정시각에 대해 설하였다.
다음으로 성품을 떠난 두 가지 각에 대해 설하겠다.
‘무슨 뜻으로 시각의 측면[始覺義]을 말하는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게 되고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설한다’고 한
구절은 성품을 떠난 두 가지 각, 즉 본간과 시각을 공통적으로 나타낸다.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이
있게 되고’라는 구절은 성품을 떠난 본각을 말하며,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설한다’고 한
구절은 성품을 떠난 시각을 말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본각반야(本覺般若)는 자성(自性)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염법의 훈습을 능히 받아내서 저 염법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니, 이것이 바로 본각이 성품을
떠난다는 뜻이다. 한편 시각반야(始覺般若)는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염법에 의지해서 이제
비로소 일어나 저 염법의 광란을 입으니, 이것이 바로 시각이 성품을 떠난다는 뜻이다.
시각반야는 모든 장애를 끊고 모든 공덕을 증득하는 공능이 있는데,
어째서 시각의 지혜가 염법의 광란을 입는다고 말하는가?
허물없는 법에다가 모든 허물과 근심을 건립하여 장애를 끊어 없애기 때문이며,
덕이 없는 법에다가 모든 공덕을 건립하여 이치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시각은 어느 시점에서 망법[妄]을 여의게 되는가?
극해탈도(極解脫道)를 얻는 때에 가서야 완전히 떠난다. 저 때에는 무념(無念)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완전[滿]훈습과 부분[分]훈습 두 가지에 관해서는 앞으로 분명히 보여 주겠다.
이제까지 두 가지 각의 요점을 간략히 안립하는 문[略說兩覺安立門]에
관해 설하였다. 다음으로 두 가지 각을 자세히 설하여 결택하는 문[廣說兩覺決擇門]에 관해 설하겠다.
【論】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가?
범부인(凡夫人)은 전념(前念)에 악을 일으켰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후념(後念)을 그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각(覺)이라 이름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불각(不覺)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이승(二乘)의 관지(觀智)를 갖는 자들과 처음 발심한 보살 등은
염이 달라짐[念異]을 알아차려
염에 이상(異相)이 없다.
거칠게 분별하는 집착의 상[麤分別執著相]을 버렸기 때문에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 등은 염이 머무는 줄[念住]을 알아차려 염에 주상(住相)이 없다.
분별하는 거친 망념의 상[分別麤念相]을
떠났기 때문에 수분각(隨分覺)이라고 이름한다.
보살지를 끝까지 다한 이는 방편을 만족하여 일념에 상응한다.
이들은 마음이 처음 일어날 때 알아차려 마음에 초상(初相)이 없다.
미세한 망념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심성(心性)을 보아 마음이 상주하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만일 무념(無念)을 관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의 지위로 향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였다.
또 마음이 일어나는 경우 가히 알아차릴 최초의 상[初相]이란 것이 없으나 초상을 안다고 한 것은,
즉 무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두고 각(覺)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이들은 본래부터 염념이
끊임없이 이어져 한 번도 염을 떠난 석이 없기 때문에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고 이름한다.
무념을 얻은 자는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심상(心相)이 무념과 동등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시각(始覺)과 차이가 없음을 알 것이다.
사상(四相)은 동시에 존재하여 전혀 자체로 성립함 없이, 본래 평등하고 동일한 각이기 때문이다.
【釋】 위 단원은 시각을 자세히 설하여 결택하는 부문[廣說始覺決擇分]이다.
윗글은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사상을 건립하는 문[建立四相門]이며,
둘째는 분수에 따라 얻어지는 각을 건립하는 문[建立隨覺門]이다.
사상문(四相門)에도 네 가지가 잇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거칠고 무거운 과환(過患)이 되는 사상이다.
둘째는 미미하고 세밀한 과환이 되는 사상이다.
셋째는 무상한 공덕의 사상이다.
넷째는 상주하는 공덕의 사상이다.
긴 시간에 일어나므로 거친 사상이라 하고,
짧은 시간에 걸쳐 일어나므로 미세한 사상이라고 한다.
허물과 근심은 처음 일어나는 덕과 상위되기 때문에 무상의 상[無常相]이라 하고,
허물과 근심과 상위되는 덕은 항상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상주하는 상[常住相]이라고 한다.
수각문(隨覺門)에도 두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완전한 각을 밝히는 문[滿覺門]이고,
둘째는 부분적인 각을 밝히는 문[分覺門]]이다.
하나뿐인 각을 밝히기 위해 만각문을 시설하고, 각과 불각을
빠짐없이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분각문을 시설한다.
무슨 이유로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사상을 건립하는가?
십신위(十信位)로부터 나아가 극해탈도(極解脫道)에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떠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짧은 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사상을 건립하는가?
인연에 의해 생긴 법은한 찰나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비로소 일어난 사상[始起四相]이라 하는가?
멸(滅)을 일으키면 멸이 멸하고
이(異)를 일으키면 이가 달라지며 주(住)를 일으키면
덕(德)이 머물고 생(生)을 일으키면 덕이 생한다.
그러므로 비로소 일어난 사상이라 한다.
과환(過患)을 다른 말로 공덕이라 이름하며,
지금 비로소 일어나므로 무상(無常)이라 이름한다.
무슨 이유로 항상 머무는 사상이라 하는가?
이제 비로소 일어난 덕은 본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동일한 종류의 각이라 하는가?
각과 불각에는 둘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각불각(覺不覺)이라고
하는가? 각이 염법의 훈습을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한 차례를 보면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상에는 두 가지 차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전후차례(前後次第)이고
둘째는 구유차례(俱有次第)이다.
전후차례라고 한 이유는
저 시점이 없을 경우에는 전후의 차례가 없기 때문이며,
구유차례라고 한 이유는 저 시점이 있을 경우에는 전후가
일시(一時)이기 때문이다.
무시(無始)는 염법을 끊을 때를 기준으로 하며,
유시(有始)는 산란할 때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구유차례의 사상은 어떠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생상과 주상과 이상과 멸상 이와 같은 네 가지 상은
일시가 곧 전후가 되는 것이어서
점차적으로 전득(轉得)되는 것이 아니라네.
일시(一時)이기 때문에 동시에 함께 있으며
전후이기 때문에 차례를 갖는다네.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상을 이루고
다르기 때문에 네 가지 상을 이룬다네.
【釋】 구유차례의 사상이란
첫째는 생하는 상[生相],
둘째는 머무는 상[住相],
셋째는 달라지는 상[異相],
넷째는 멸하는 상[滅相]이다.
이러한 네 가지 상은 일시에 일어나기도 하고 전후를 가지고 일어나기도 한다.
무슨 이유로 일시(一時)라고 하는가?
얻어지는 것이 동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전후라고 하는가?
거칠고 미세한 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점차적으로 전득(轉得)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일시에 일어난다는 뜻을특별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무슨 이유로 구유(俱有)한다고 하였는가?
일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차례라고 하는가?
전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동시적으로 있는 것이기에 하나라 하고,
거칠거나 미세하기 때문에 네 가지로 말한다.
이 가운데서 일시라는 것은 어느 시점에 해당하는가?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진심(眞心)을 훈습하는 시점을 말한다. 이 시점에서는 사상을 동시에 일으키는데,
일체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이 어디에나 두루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무량한 번뇌를 건립하여 자성청정심을 덮어 가림으로써 근원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다.
그러므로 구유의 사상이라고 한다.
무슨 이유로 생상(生相), 나아가 멸상(滅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각각의 글자들은 어떤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큰 무명주지(無明住地)가 본각(本覺)을 훈습하는 때
세 가지 미세한 상을 생하므로 생상(生相)이 라 이름한다네.
【釋】 근본무명이 본각을 훈습할 때 세 가지 상을 생하기 때문에 생상(生相)이라 이름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독자적인 힘에 의해 일어나는 업상[獨力業相]이고,
둘째는 독자적인 힘에 의해 작용에 따라 일어나는 상[獨力隨相]이고,
셋째는 화합하는 데서 일어나는 요동의 상[俱合動相]이다.
무명의 체(體)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의 업(業)을 취하므로 독력업상이라 한다.
본각의 체를 취하는것이 아니라
본각의 작용을 취하므로 독력수상이라 한다.
화합동상을 취하는 까닭에 구합동상이라 한다.
이 세 가지에 공통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에 생상(生相)이라 이름하며,
최초로 생하는 위치[初相]에 명칭을 세웠기 때문에 생상이라 한다.
주상(住相)이라는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주상(住相)에 네 가지가 있으니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지상(智相)과 상속상(相續相)이라네.
이것을 네 가지 주상(住相)이라 한다네.
【釋】 주상(住相)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전상(轉相),
둘째는 현상(現相),
셋째는 지상(智相),
넷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다.
이것을 네 가지라 한다.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은 네 가지 상에 머문다[住]는 명칭을 붙이는가?
여기서 말하는 머문다는 뜻은 다음과 같이 경우에 따라 차별된다.
전상(轉相)을 중심으로 설하는 경우, 심식(心識)의 훈습을 머물러 지탱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주상이라 한다.
현상(現相)을 중심으로 설하는 경우, 색상(色相)의 훈습을 머물러 지탱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주상이라 한다.
지상(智相)을 중심으로 설하는 경우, 차례를 갖고 여섯 가지 분별지(分別智)와 상응하는 염법을 머물러 지탱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주상이라 한다.
상속상(相續相)을 중심으로 설하는 경우, 분별사식(分別事識)이 연속적으로 염오되게 지탱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주상이라 한다. 이상은 거친 분위[麤分]가 아니라 미세한 분위[細分]에서 말한 것이다.
이상(異相)이라는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이상(異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이라네.
이와 같은 두 가지 상은바로 인집(人執)의 부류에 속한다네.
【釋】 이상(異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집작하여 취하는 상[執取相]이고,
둘째는 명자를 헤아리는 상[計名字相]이다.
이 두 가지 상은 인집(人執)의 부류에 들어간다.
무슨 이유로이 두 가지 상에 ‘이상’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집착하여 취하는 상을 중심으로 설하는 경우, 일체 무량한 차별상을 능연(能緣)하여
그 상들을 따라 거친 분별식으로 집작하여 자신과 달라져서 다른 것을 이루므로 이상이라 이름한다.
명자를 헤아리는 상을 중심으로 설하는 경우, 상에 따라 명칭을 붙이는데, 그 명자에 의거해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상이라 이름한다.
멸상(滅相)이라는 글자는 어떠한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멸상(滅相)에 두 가지가 있으니
기업상(起業相)과 과보상(果報相)이라네
앞의 이심(異心)을 허물어
고(苦)를 받게 하기 때문에 멸(滅)이라 이름한다네.
【釋】 멸상(滅相)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업을 일으키는 상[起業相]이고,
둘째는 업에 얽매여 괴로움을 받는 상[業繫苦相]이다.
이 두 가지 상은 앞의 이위(異位)를 허물어 고통의 윤회를 받게 하기 때문에 멸상이라 이름한다.
또 윤회의 고통을 받을 때 일체의 무량한 선품(善品)을 멸하기 때문에 멸상이라 이름한다.
또 업을 일으킬 때 불성(佛性)의 선근(善根)이 점점 훼손되어 없어지기 때문에 멸상이라 이름한다.
이제까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상[俱有四相]에 관해 설하였다.
다음으로 전후를 가지고 일어나는 사상[前後四相]을 설하겠다.
전후로 나타나는 사상은 그 특성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멸상ㆍ이상ㆍ주상ㆍ생상 이러한 네 가지 상은
지혜의 힘이 열등한지 수승한지에 따라 늘고 줄어듦이 같지 않다네.
【釋】 전후의 차례를 가지고 나타나는 사상이란,
첫째 없어지는 상[滅相],
둘째 달라지는 상[異相],
셋째 머무는 상[住相],
넷째 생겨나는 상[生相]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상은 지혜의 양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듦이 같지 않다. 무슨 뜻인가?
신위(信位)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 중에 하나가 없고 세 가지가 있다.
삼현위(三賢位)에 있는 사람에게는 둘은 없고 둘은 있다. 십지 중에서
제구지(第九地)에 있는 이에게는 세 가지가 없고 하나가 있다.
제십지(第十地)에서는 거친 일부[麤一分]는 없고, 미세한 일부[細一分]는 있다.
여래지(如來地)에서는 사상이 하나도 없이 완전히 청정하다.
그러므로 늘어나고 줄어듦이 같지 않다고 한 것이다.
이제까지 사상을 건립하는 문[建立門]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본문의 글을 따라 해석하는 부문[隨釋門]을 설하겠다.
저 사상에 의거해서 각(覺)의 차별된 특성을 밝히면,
다섯 가지 위(位)가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십신위(十信位),
둘째는 삼현위(三賢位),
셋째는 구지위(九地位),
넷째는 인이 원만한 위[因滿位],
다섯째는 과가 원만한 위[果滿位]다.
앞의 네 가지 위에 각각 네 가지 국면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방향을 잡아 닦아 나아가는 자[趣向行者],
둘째는 수행의 인이 되는 상[修行因相],
셋째는 수행의 인상과 과상[行因果相],
넷째는 훈습을 떠난 상과 훈습을 동반하는 상[熏離俱相]이다.
다섯 번째 위에는 단지 세 가지 뿐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능히 원만을 성취하는 자[能圓滿者]고,
둘째는 염법을 대치하는 행상[對治行相]이고,
셋째는 완전하게 구경을 성취한 상[滿究竟相]이다.
이렇게 설한 차례에 따라 관(觀)을 닦아야 한다.
첫 번째 위(位)는 본문의 ‘범부인(凡夫人)’이라고 할 구절에 해당한다.
이는 방향을 잡아 닦아 나아가는 자로서 십신(十信)의 위에 있다.이 위에서는 불퇴전(不退轉)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범부’라고 이름한다. 각자(覺者)라는 명칭은 삿된 정[邪定]을 이미 벗어난 자에게 붙이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전념(前念)에 악을 일으켰음을 알아차린다’는 구절은 수행의 인상[修行因相]을 나타낸 것으로서
십신에 들어가기 전을 말한다. 이들은 두 가지 멸상이 큰 허물과 근심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갖가지 모든 악업을 빠짐없이 지어서 일체의 한량없는 고과(苦果)글 두루 받고 쉴새없이 항상 오취(五趣)와
사생(四生)에 윤회한다.
그러다가 이제 선지식의 묘한 인연과 성인의 설법과 청정한 법칙을 받아서 십신위로 들어가 모든 악업이 지극히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고통스러운 모든 과보가 실제로 즐거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알기 때문에,
본문에서 ‘전념에 악을 일으켰음을 알아차린다’고 하였으니, 이는 멸상을 깨달았다는 뜻을 나타낸다.
‘때문에 능히 후념(後念)을 그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다’는 구절은 수행의 인상과 과상을 나타낸다.
즉, 이 위에서는 처음으로 대치도(對治道)를 일으키지만 기력(氣力)이 지극히 미약하므로 ‘때문에’라는
말을붙였다. 발심한 후에 대치도를 일으켜 자재로이 전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위에서는 전에는 항상 악업을 일으키면서도 알지 못하다가 지금 알아차렸기 때문에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악업을 짓지 않아서 멸상의 더러움을 그쳐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각(覺)이라 이름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불각(不覺)이기 때문에’가고 한 구절은 훈습을 떠난 상과
훈습을 동반하는 상을 나타낸다. 무슨 말인가? 멸상의 법이 실로 허물과 근심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려
저 멸상의 품(品)이 멸하는 일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훈습을 떠났다고 하며,
한편 저 멸상의 품은 무시이래로 체성이 청정하여 진실한 공덕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므로
훈습을 동반한다고 한다. 여기서 훈습을 떠났다. 훈습을 동반한다고 한 말들은 멀리 제십지(第十地)까지
해당한다. 또 각(覺)과 불각(不覺) 두 가지가 상즉(相卽)하는 관계로서 한 가지 맛이라는 공통성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두 번째 위는 ‘이승(二乘)의 관지(觀智)를 닦는 자와 처음 발심한 보살 등’이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이는 방향을 잡아 닦아 나아가는 자로서 삼현위를 말한다. 이 위에서는 인공(人空)의 무루(無漏)로써 자재를
성취하여 의심이나 두려움이 없다. 그러므로 이승을 보살과 함께 묶어서 전체적으로 설명한다.
이 구절은 또 모든 이승이 다 보살도를 닦아 자재로운 대각(大覺) 지위의 바다에 증득해 들어간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염이 달라짐[念異]을 알아차려’라고 한 구절은 수행의 인(因)이 죄는 상을 나타낸다.
무슨 말인가?
두 가지 이상(異相:執取相ㆍ計名字相)은 서로 간에 힘을 부여하는 관계에 있으면서 경계의 상을
집착한다. 애착을 일으켜 명자를 찾아 들어가[尋求]심은 사(思)를 통해 법에 대해 조작을 하거나
혜(慧)를 통해 법에 대해 추적하여 외경을 향해 흩어져 작용함으로써 마음을 거칠게 전변케 하는 것으로
체(體)를 삼고, 마음의 내정(內淨)함을 장애하는 것으로 업(業)을 삼는다.(顯揚聖敎論 卷1 大正藏 31, 483상)
언상(言相)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아(我)와 아소(我所)에 싫증을 내지 않고 점점
더 반연(攀緣)을 불려나감으로써 사려(思慮)가 더 늘어나 종일토록 쉴 때가 없다가,
이제 인공(人空)이 아집은구생아집(俱生我執)과 분별아집(分別我執) 두 가지로 요약된다.
구생아집이란 무시이래로 허망하게 훈습해 온 내인력(內因力)을 바탕으로 본래적으로
항상 몸에 동반되는 것이며 삿된 가르침이나 삿된 분별을 만나지 않아도
저절로 전전하는 아집을 뜻한다.
이 구생아집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끊임없이 상속하는 구생아집으로서, 제육식(第六識)에 소재하며
식소변(識所變)의 오취온상(五取蘊相)을 연하여 오취온 전체나
혹은 개별적인 것에 대해 자심상을 일으켜 그것을 실아로 집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구생아집은 미세하므로 끊기 어렵다.
마지막 수도위(修道位)에서 수승한 생공관(生空觀)을 끊임없이 닦아야 비로소 없앨 수 있다.
분별아집은 현재의 외인력(外緣力)에서 생겨나므로 몸과 본래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삿된 가르침이나 삿된 분별을 만난 뒤에야 일어나는 아집을 뜻한다.
분별아집은 반드시 제육식에만 소재한다. 분별아집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교에서 설하는 오온상(五蘊相)을 듣고 거기에 자심상을 일으켜 분별하고
헤아린 끝에 그것을 실아로 집착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교에서 설하는 아상(我相)에 자심상을 일으켜 분별하고 헤아린 끝에
그것을 실아로 집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분별아집은 드러나는[麤] 것이므로 비교적 끊기가 쉽다.
초견도(初見道)에서 일체법의 생공진여(生空眞如)를 관하는 즉시 없앨 수있다.(成唯識論 卷第1, 大正藏 31, 2상)
의 반야를 일으켜 방편을 건립하여 법공(法空)이 현전한다.
그리하여 본각청정심이 무명의 수면[眠]에 덮임으로 해서 이상(異相)의 잠에 빠져
모든 장애를 일으키고 분위마다 점점 지혜를 멀리 떠나 장애와 상응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저 꿈[夢念]으로부터 깨달음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염이 달라짐을 알아차린다고 한 것이다.
‘염에 이상이 없다’고 한 구절은 행의 인상과 과상을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시각(始覺)의 정념(正念) 중에는
두 가지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거칠게 분별하는 집착의 상을 버렸다’고 한 구절은
이상(異相)의 연(緣)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의식(意識)에는 두 가지 분별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거친 분별[序分別]이고,
둘째는 미세한 분별[細分別]이다.
거칠다고 한 것은 탐욕이나 성냄 등을 일으키며 맞고 안 맞는 경계를 잘 분별하기 때문이다.
미세한 분별은 법집(法執)의 분별로서, 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지금 본문에서 멀리 떠났다고 하는 저 거친 분별이란 미세한 분별이 아니다.
미세한 분별은 극희지(極喜地:初地)에서 여의기 때문이다.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한다’고 한 구절은 앞 구절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거친 분별까지 포함해서
훈습을 떠나거나 훈습을 동반하는 상을 나타낸 것이다.여기서 말한 유사하다[相似]는 뜻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종류를 달리하는 유사함이고,
둘째는 종류를 같이하는 유사함이다.
종류를 달리하는 유사함이란 이승(二乘)의 상사각(相似覺)을 말하고,
종류를 같이하는 유사함이란 보살의 상사각을 말한다.
인공(人空)을 닦는 이승은 삼현이 닦는 공을 본뜨기에 유사하다는 뜻을 갖는다.
방편으로 법공(法空)을 닦는 삼현보살은 정심지(淨心地)를 본뜨기에 유사하다는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상사각이라 하였다.
세 번째 위는 ‘법신보갈(法身菩薩) 등’이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이는 방향을 잡아 닦아 나아가는 자로서, 즉 제구지[九地]의 위에 있는 자를 말한다. 구지보살은 진여법계를
자신의 몸으로 삼고 반야의 실다운 지혜를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서 때와굴레를 이미 벗어났고 속박과 장애를
다 끊어 청정하고 명백하며 무애하고 자재하기 때문에 법신보살이라 이름한다.
‘염이 머무는 줄[念住]을 알아차린다’고 한 구절은 수행의 인이 되는 상[修行因相]을 나타낸 것이다. 네 가지
주상(住相)은 모든 때에 법집분별(法執分別)을 일으키므로, 성품을 떠난 본각을 수면(睡眠)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본각의 마음이 주상(住相)의 꿈에 빠지게 하여 분명히 알아차릴 수 없도록 광란의 상태에 머물게 한다.
그러다가 이제 시각반야의 해가 돋아 미혹과 산란인 주상(住相)의 어둠을 비춘다.
시각의 바른 지혜는 무분별의 성품을 가지며, 미혹과 산란의 주상은 유분별의 성품을 갖는다.
이 둘은 깨달음과 산란함의 유무에 따라 상극으로 어긋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 이러한 도리가
분명히 현전하므로 ‘염이 머무는 줄을 알아차린다’고 한 것이다. ‘염에 주상(住相)이 없다’고 한 구설은
행의 인상과 과상[行因果相]을 나타낸다.
‘분별하는 거친 망념의 상(相)을 떠났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은 주상(住相)의 연이 없음을나타낸다.
무슨 말인가?네 가지 주상은 저 생상과 비슷하여 지극히 거친 양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생상(生相)의
분제(分際)와 혼동될 소지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렇게 설한 것이니, 사유에 머물러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헷갈리기 쉬운 네 가지 주상은, 순서에 따라 극희지(極喜地)에서 삼유지(三有地)ㆍ적멸정지(寂滅淨地)ㆍ선혜지(善慧地)를 지나면서 각각 한 가지씩을 떠나므로 수분각(隨分覺)이라는 명칭을 붙였으니,
이는 앞서 말한 내용을 결론지음과 동시에 아울러 훈습을 떠난 상과 훈습을 동반하는 상을
거칠게나마 드러낸 것이다. 생상(生相)의 미세한 염은 아직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위로서 ‘보살지를 끝까지 다한 자’라고 한 것은,
즉 방향을 잡아 닦아 나아가는 자를 말한다.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사람이 해당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을 원만히 성취한 자[因圓滿者]고,
둘째는 과를 원만히 성취한 자[果圓滿者]다. 배움의 지위를 끝까지 다했기 때문에 인(因)이 원만하다 하고,
무학(無學)의 과를 얻은 자로서 구경위(究竟位)를 만족했기 때문에 과(果)가 원만하다고 한다.
첫 번째 사람은 구합동상(俱合動相)을 대치하고, 나중 사람은 독력업상(獨力業相)과 대무명(大無明)을 대치한다.
독력업상은 끊는 법이 아니므로 여기에는 대치하는 도[對治道]가 있을 수 없다. 이 아래부터는 두 가지 원만을
이룬 자를 나타내는 문장이다.‘방편을 만족하여 일념에 상응한다’고 한 구절은 인이 원만한 자를 나타낸다.
이 위(位)에는 두 가지 금강유정(金剛喩定)이 있나.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방편(方便)의 금강이고,
둘째는 정체(正體)의 금강이다.
더러움이 없는 수행자는 이 두 가지 금강에 비유되는 삼마제(三摩提)로 자신의 체를 삼기 때문에 행하는
도(道)를 들어서 행하는 사람[人]을 표시한 것이다. ‘마음이 처음 일어날 때 알아차려 마음에
초상(初相)이 없다’고 한 구절은 과가 원만한 자를 나타낸다. 과를 원만히 성취한 자는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분명히 현전하여 무엇에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어디든 다하지 않는 곳이 없다. 하나의 체인 법계로서
그것과 동등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독력업상과 근본무명이 본래 존립할 수 없다.
평등한 허공처럼 아무 모양도 없는 한 가지 모양이다. 이 모두가 최초의 염이 없기 때문이다.
‘미세한 망념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신설을 보아 마음이 상주하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이름한다’고
한 구절은 시각(始覺)이 원만해진 상을 나타내는데, 이는 드디어 무생각(無生覺)에 도달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만일 무념(無念)을 관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의 지위로 향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였다’고 한 구절은 경문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이 설한 내용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슨 뜻을 증명하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했는가? 불과(佛果)를 증명하기 위함이다. 어떻게 증명하는가?
불과위에서는 두 가지 염을 멀리 떠났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대무명의 염이고,
둘째는 미세한 업상의 염이다.
위 두 가지 염은 측해탈도에서 한꺼번에 뒤집어져 더 이상 동반하여 행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과위에는
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망념이 없다면 어떠한 염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정념(正念)이 있다.
무엇을 정념이라 하는가? 열 가지 덕과 상응하는 염을 말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벗어나고 떠나는 공덕[出離功德]으로서,
갖가지 모든 어려운 곳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둘째는 동제의 공덕[同體功德]으로서,
일체의 염법(染法)이 결국에는 자신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셋째는 상주의 공덕[常住功德]으로서,
시각에 존재하는[始有] 과실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넷째는 일미의 공덕[一味功德]으로서,
시각을 원만하여 항상 본각(本覺)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다섯째는 함께 여의는 공덕[俱離功德]으로서,
모든 염법과 정법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여섯째는 돌아와 유전하는 공덕[還轉功德]으로서,
모든 취(趣) 어디에나 탄생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일곱째는 머묾 없는 공덕[無住功德]으로서,
어느 곳이든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여덟째는 수행의 공덕으로서,
모든 중생을 위해서 만행을 닦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아홉째는 원만공덕으로서,
모든 중생을 위해서 깨달음의 도를 성취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열째는 허공의 공덕으로서, 앞서 말한 갖가지 허공의 공덕과 같이
본래부터 자성이 다 공하여 소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이상 열 가지 덕은 팔해탈도의 첫 찰나에서 전후 없이 동시적으로 행하고 일어나
한꺼번에 같이 전전하므로 이를 정념(正念)이라고 한다.
위에서 인용한 경문도 이 뜻을 벗어나지 않으니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또 마음이 일어나는 경우 가히 알아차릴 최초의 상[初相]이란 것이 없으나
초상을 안다고 한 것은, 즉 무념을 가리킨다’고 한 구절은 의심을 없애 수승한 이해를 내게 하기 위함이다.
무슨 말인가?어떤 중생은, ‘극해탈도에서 본각에 합치[會]할 때 미세한 염이 최초로
생하는데, 그때 유(有)를 안다는 것인가, 무(無)를 안다는 것인가? 만일 유를 안다고 하면 극해탈도는 당연히
무념이 될 수 없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최초의 염이 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최초의 염이 있음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무를 알아차린다고 하면 극해탈 도는 당연히 존재할 수 없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이미 최초의 염이 없는데 어떠한 염이 없다는 것을 의지해서 해탈도의 존재를 시설할 수 있겠는가?’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심을 풀기 위해서 이제 다음과 같이 자진해서 해명을 한다.
소지(所知)의 상(相)은 본래 자성이 공무(空無)하고 능지(能知)의 지(智)도 본래부터 일어날 때가 없다.
이미 깨달아 들어갈[所覺] 상도 없고 깨달아 가는(能覺) 지혜도 없다면, 미세한 최초의 상이 있어서 지혜로써
그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을 안다고 설한 이유는 무념(無念)의 도리를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어째서 그런가?
법성의 이치는 비록 소지(所知)의 최초로 일어나는 상도 없고 능지(能知)에서 일으키는 시각(始覺)의 지혜도
없으나, 소지의 상과 능지의 지가 없음을 능히 통달하여 무소유의 각(覺)이 모두 공무(空無)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 우선 이러한 도리에 의지해서 이와 같이 ‘초상을 안다’고 설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두고 각(覺)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이들은 본래부터 염념이 끊임없이 이어져 한 번도 염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고
이름한다’고 한 구절은 위에서 말한 무념의 뜻을 중명하는 구절이다. 금강(金剛) 이하의 모든 중생들은
독력업상과 대무명의 염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니,
일체 중생은 누구나 염이 있기에 중생이라 이름하고 모든 부처님은 예외 없이
무념을 얻었기에 부처님이라 이름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 아래로는 시가의 경계가 어디에나 두루하고 원만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무슨 말인가?
대각을 성취한 이는 이미 피안에 도달하여, 무량한 일체 중생의 일심(一心)이 유전하여 사상(四相)을
지어내는 줄을 빠짐없이 알기 때문이다. 본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념을 얻은 자라면
심상(心相)이
생하고
머물고
달라지고
멸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나,
어떠한 이치로 이와 같이 아는가?
자신이 무념을 얻을 때 일체 중생이 평등하게 얻기 때문이니, 본론에서 말했듯이 무념과 동등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치로 한 수행자가 무념을 얻을 때 일체 중생 모두가 무념을 얻는가?
낱낱의 중생이 모두 각각 본각을 갖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한 수행자가 시각이 원만해져 본각과 동일하게 될 때 일체 무량한 중생의 본각심
모두와 빠짐없이 동일해지기 때문이니, 자신의 본각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자성본각이 중생계 어디에나 빠짐없이 두루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청정한 각자(覺者)가무념을 얻을 때 일체 중생 모두가 무념을 얻는다면,
청정한 각자가 무명을 끊을 때 일체 중생도다 무명을 끊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떠한 오류가 생기는가?
만일 시각이 무명을 끊을 때 일체 중생도 다 무명을 끊는다면 어찌하여
위에서 ‘금강 이하의 모든 중생들은 독력업상과 대무명의 염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각이라 이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가?
만일 모든 중생이 무시무명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데도 모든 부처와 동등하게 무념을 얻었다고 한다면
무념 등의 뜻은 한갓 말에 지나지 않을 뿐 도대체 실다운 내용이라고는 없을 터인데, 일체 중생이 모두 본각과
함께 시각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러한 난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두 가지 부문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자신의 종지에 입각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다른 입장에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자신의 종지에 입각해서 문세를 해결한다는 것은,
이 논에서 주장하는 종지가 일체 중생이 아무 차별 없이 동일하게 상속(相續)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있기 때문에, 한 수행자가 무시무명이 궁극적으로 끝나는 때 모든 중생도 역시 무시무명을 남김없이 끊고,
한 수행자가 시각을 원만히 성취할 때 모든 중생도 똑같이 원만하게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신본유계경(三身本有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두 가지 동등함을 근거로 정각을 성취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무명을 끊음이 동등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각을 성취함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무명을 끊음이 동등하다고 한 이유는, 내가 극해탈토를 처음 일으켰을 때 일체 중생이 소유한 무량한 무시무명이 한꺼번에 완전히 끊겼기 때문이다. 각을 성취함이 동등하다고 한 이유는, 내가 처음 성도해서 시각을 원만히 성취할 때 일체 중생 모두가 시각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 가지 동등함이라고 한다.’”
다른 입장에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원만한 자의 입장으로 중생계를 보면 하나하나의 법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한편 모든 중생의 입장에서
더없이 높으신 세존을 보면 무명의 장(藏)에 들어 아는 바도 깨닫는 바도 없지만 전적으로 청정하여 장애가 없다. 이런 이유에서 무념 등의 이치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무명장에 들어가 아는 바도 깨닫는 바도 없다고 말해도,
앞서 ‘금강 이하의 모든 중생들은 독력업상과 대무명의 염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각이라 이름하지
않는다’고 한 문장과 모순되는 오류가 없다. 이렇게 한 부분만을 제시해도 모든 면을 널리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 아래로는 갖가지 시각을 융합하여 본각과 동일하게 한다는 뜻을 설한다.
즉 쉰한 가지 단계로 시설된 불완전[分]하거나 완전한[滿] 시각이 사실상 단계에 따라서
점점 나아지는 차이가없을뿐더러, 완전하게 원만히 성취하는 극점도 없다는 뜻이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시각의 사상(四相)은 동시에 머물 수 있을 뿐 전혀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고, 본래부터 한 가지 맛으로
평등하여 자성이 원만하며 무이(無二)에 완전히 합치하여 동일한 모습의 각이기 때문이다. 본론에서 말했듯이, ‘실제로는 시각과 차이가 없음을 알 것이다. 사상은 동시에 존재하여 전혀 자체로 성림함 없이
본래 평등하고 동일한 각이기 때문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대총지계경(大摠持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멸상의 품을 깨달을 때 시가반야는 멸상을 갖는 위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다가 멸상이 없어지는 시점에서 시각도 따라서 없어진다. 이상의 품을 깨달을 때 시각반야는 이상을 갖는 위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이상이 없어지는 시점에서 시각도 따라서 없어진다. 주상의 품을 깨달을 때 시각반야는 주상을 갖는 위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주상이 없어지는 시점에서 시각도 따라서 없어진다. 생상의 품을 깨달을 때 시각반야는 생상을 갖는 위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생상이 없어지는 시점에서 시각도 따라서 없어진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시각은 스스로 일어날 능력이 없고 반드시 염법(染法)을 마주해야 비로소 일어나며,
모든 염법은 스스로 없어질 능력이 없어서 반드시 지혜의 힘을 빌려야 비로소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세히 설하였다. 본래부터 모든 염법은 자체가 공무한 것이다. 그러나 시각은 본래 없는 그곳에다가
있다는 견해를 내어 동시적으로 전전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정각(正覺)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이제까지 시각을 자세히 설하여 결택하는 부문[廣說始覺決擇分]을 설했고,
다음부터는본각을 자세히설하여 결택하는부문[廣說本覺決擇分]을설하겠다.
【論】 다음으로 본각(本覺)을 염법을 따르는 측면에서
분별하면 두 가지 상을 생하는데, 이들은 저 본각과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정상(智淨相)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이란 법력의 훈습에 의지해서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함으로써
화합식(和合識)의 상을 파괴하고 상속심(相續心)의 상을 멸하여 법신이 나타난 것인데,
지혜가 순수하고 청정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무슨 뜻인가?
모든 심식(心識)의 상은 모두 무명이다. 무명의 상은 각(覺)의 성품을
여의지 않아서 파괴될 성질도 아니고 파괴되지 않을 성질도 아니다.
비유를 들어 보자. 큰 바다의 물이 바람 때문에 파도의 움직임이 일어날 때,
물의 모습과 파도의 모습은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그치면 움직이는 모습도 따라서 멸하지만
물의 축축한 성질은 파괴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도 무명이라는 바람에 의해 움직임이 생기는데,
마음과 무명은 다 같이 형상이 없고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명이 멸하면 무명에 이어지는 상속심(相續心)의 상은 멸하지만
지혜의 성품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부사의업상이란 지정상에 의지하여 수승하고 모한 일체 경계를 지을 수
있다. 즉,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단절함이 없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본래적으로 상응하여 갖가지로 나타나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釋】 위 본론은 자세한 설명을 통해 수렴본각을 결택하는 부분[廣說隨染本覺決擇分]이다.
이 단원은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본래 갖추어진 성품지혜가 청정함을 밝히는 문이고,
둘째는 업용(業用)이 자재하고 무애하다는 점을 밝히는 문이다.
첫 번째 문은 다시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자신의 성품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르는 문[不守自性隨緣門]이고,
둘째는 모든 업장을 대치하는 문[對治一切業障門]이다.
두 번째 문도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해당하는 근기에 맞추어 배당하는 문[隨順機根契當門]이고,
둘째는 움직이지 않는 본성이 항상 적정함을 밝히는[不動本性常寂門]이다.
이 네 가지 문은 해석해 가면서 관문과 잘 맞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본각이 염법을 따른다고 한 말은 아닌 것을 가려냄으로써 취지를 드러내는 논법[簡句]이다.
여기서는 청정본각의 지혜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을 드러내기 위해 이 구절을 썼는가?
본각이 훈습을 수용한다[受熏]는 뜻을 밝히기 위함이다. 본각이 무명의 훈습을 받아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에 따라 무애하게 동시적으로 전전함을 직접적으로 밝히기 때문에 본각이 염법을 따른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字句)은 단지 따라주는 바[所隨]의 염법을 기준으로 명징을 붙인 것일 뿐이다.
이 아래로는 염법을 능히 따르는[能隨] 본각의 체상을 직접적으로 밝히는 문장이다.
본문에서 ‘분별하면 두 가지 상을 생하는데,
이들은 저 본각과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정상(智淨相)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라고 했는데,
이 수승한 두 가지 상이 저 수렴본각(隨染本覺)의
성품지혜와 본래적으로 함께 행하고 함께 전전하면서
서로 분리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본각지혜의 청정한 행상은 어떤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일체의 장애를 타파하여 법성신(法性身)을 드러내니
실다운 지혜가 청정하기 때문에 지정상(智淨相)이라고 이름한다네.
【釋】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닦아 공덕을 구족하고
지혜를 원만히 하여 법신을 장엄하는 것을 ‘지정상’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장애를 끊기 위해서는 어떤 힘이 필요한가?
가득 채우는 힘[滿足力]이 필요하다. 가득 채우는 힘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력으로 훈습해서 가득 채우는 방편의 힘[法力熏習滿足方便力]이고,
둘째는 여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가득 채우는 방편의 힘[如實修行滿足方便力]이다.
이 두 가지 방편의 힘은 무시이래로 본래적으로 상주하는 것이지 언제를 기점으로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법력훈습만족방편력에 의지하여
근본무명(根本無明)과 독력업상(獨力業相)을 무너뜨리고,
여실수행만족방편력에 의지해서
구합업상(俱合業相)과 능견상(能見相)ㆍ현상(現相)ㆍ분별지상(分別智相)ㆍ상속상(相續相)을 멸하고
근본무명과 독력업상을 무너뜨린다. 그리하여 자성신(自性身)의 체가 분명히 현전하니 이는
구합업상과 상속상 등을 멸하기 때문이다.
반야의 실다운 지혜는 순수하고 청정하며 흰색처럼 밝으니,
‘지정상이란 법력의 훈습에 의지해서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함으로써 화합식(和合識)의 상을 파괴하고
상속심(相續心)의 상을 멸하여 법신이 나타난 것인데,
지혜가 순수하고 청정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라고
만 본론의 내용과 같다.
어째서 삼현위(三賢位)와 십신위(十信位)는 드러내지 않고 생략했는가?
이제껏 설명해왔던 차례에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문(수렴본각을 결택하는 단원)에서는 근본 무명을 대치하는
일을 맨 처음에 두고,
나아가 멸상(滅相)을 대치하는 것을 마지막에 두었는가?
논의에서 시각반야(始覺般若)를 제외하여 차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다. 어째서 시각(始覺)은 범부를 등지고
성인을 향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차례로 전전[轉]하며,
어째서 수렴본각(隨染本覺)은 성인을 등지고 범부를 향해서
아래로 내려오는 차례로 전전하는가?
법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방향으로 전전하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전후로 이루어지는가? 반드시 동시적인 것이라서 전후가 없다. 이와 같은 이치는
어느 경에서 분명히 설하고 있는가? 『증설경(證說經)』에서 설하고 있다. 그 경에서 어떻게 설하는가?
저 『증설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 때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이 여래께 만 가지 질문을 여쭈었다. 그러자 여래께서는 십만 가지로
의심을 풀어주는 대답을 하여 보살의 질문에 답하였다. 질문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답하고 나서
다라니보살에게,‘훌륭한 그대여, 한 가지도 묻지 않는구나. 다른 질문이 더 남지 않았느냐?
불자(佛子)여, 다시 질문을 일으켜 자신과 남의 이익을 위해 여래께 질문하여라.
’ 이때 다라니보살이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자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부슨 인연으로 대중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잘 들으라. 모든 불자여,나는 모든 번뇌에 빠짐없이 얽혀 있던 범부에서 모든 지위를 다 거쳐바다 같은
행인(行因)을 다 채워 대각의 과(果)를 장엄하였다.나는 청정한 지위로부터모든 지위를 다 거쳐 일체
만행을 통해첫 번째인 신위(信位)를 얻어 바다 같은 무명장(無明藏)에 들어갔다.
이 두 가지 큰일은 동시적인 것이라서 전후가 없다.
저와 바다 같은 모든 대중은 다들 의심을 품고 있어서 벗어날 기약이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모든 불자를 위해 상황에 맞게 갖가지 방편으로 열어보여 주십시오.’
이때 세존께서 총지보살(摠持菩薩:다라니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잘 듣고, 잘 사유해 보아라.
내 그대를 위해 요점만을 간략히 말해주겠다.
선남자여, 위에서 말한 두 가지 큰일은
두 가지 반야의 각지(覺智)를 드러내 보여 준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시각반야며,
둘째는 본각반야다.
선남자여, 시각 반야란 무엇인가?
갖가지 번뇌에 빠짐없이 얽혀 있는 지위[具縛地]로부터 점점 벗어나서
금강지에 이르러 인행(因行)을 원만히 하여 구경도(究竟道)를 발하니,
여기서는 근본무명주지를 한 번에 끊어 깨달음의 해가 어디든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시각반야라고 이름한다
선남자여,본각반야란 무엇인가?
청정한 성품으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신위(信位) 초까지 이르러 구경지(究竟智)를 일으켜
멸상(滅相)의 품을 끊고 무명의 바다에 들어가 연을 따라 움직이고 전전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각반야라고 이름한다.’
이때 총지보살과 모든 대중이 이 말씀을 듣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즉, 제법은 한 모습이자 한 체이고, 한 모습이라는 것도 없고 한 체라는 것도 없으며,
공하여 말을 붙일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다는 것조차 공하지만 제법의 성품은 실상이며
상주하며 결정성을 가진 것이며 실유한다는 사실이다.”
이 아래는 개별적인 해석을 통해서, 수렴본각(隨染本覺)이
지정상과 부사의업 상으로 나뉘는 인연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는 내용이다.
본론에서 ‘무슨 뜻인가?’라고 한 구절은 전체 내용에 관한 질문이며,
‘모든 심식(心識)의 상은 모두 무명이다
’라고 한 구절은 전체 내용에 대한 답이다. 갖가지 희론의 식이 갖가지
반연(攀緣)의 양(量)을 일으켜 무량한 일체 경계를 사려하고 지각하여
일체 경계의 상을 집작하여 놓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모두 다름 아닌 무명의 습기에서 비롯된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본론 초반과 중반에서 거론한 두 가지 뜻
(화합식상과 상속식상)을 멸한다는 의미가 성립한다.
이 아래는 무병의 상이란 끊을 수 있는 성질인지 아닌지,
그런 차별을 드러내 보여주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명이란 반드시 끊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끊을 수 없는 것인가?
이 질문은 어떤 의심에서 비롯되는가?
만일 이 무명이 끊을 수 있는 것이라면 본각심 역시 끊어질 수 있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무명의 염법과 본각의 성품지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서 동시에 행하고 동시에 전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잠잘 때의 남자와 깨어 있을 때의 남자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함께 행하고 함께 전전
하기 때문이다. 잠자는 남자를 칼로 베었을 때 깨어 있는 남자가 다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 둘은 상속
(相續)하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편 깨어 있는 남자를 만났을 때 잠자는 남자가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 둘은 상속하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잠자는 남자와 깨어 있는 남자가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크게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반면 무명이 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성청정심이 항상 무명에 덮여 오도(五道)에 돌아다니면서 벗어날 기약이 없다. 그러므로 무명이 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크게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무명은 끊어 없앨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끊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무슨 뜻인가?무명본각(無明本覺)에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 가지 뜻인가?
첫째는 체와 상이 동일하다는 뜻[同體同相義]이고,
둘째는 체와 상이 다친다는 뜻[異體異相義]이다.
동일하다는 뜻은 일체 모든 법이 다 이법[理]이기 때문이다.
다르다는 뜻은 모든 공덕과 허물이 각기 차별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뜻으로 보면 무명본각은 끊어 없앨 수 없는 것이고,
나중 뜻으로 보면 끊어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제법무행계경(諸法無行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탐욕이 바로 열반이고 성냄과 어리석음도 그렇다네.이 세 가지 중에 무량한 불도(佛道)가 있네.
견(見)과 비견(非見)이 한 모습이며 집착과 집착 없음도 그러하다네.여기에는 부처도 없고
법도 없으니이를 알기에 세상에 없는 지혜[世智]라 이름한다네.
『본지계경(本智契經)』에서는 이렇게 설한다.
어두운 근본무명은 세력이 가장 크기 때문에 일체의 지혜를 장애하여 자재함을 얻지 못하게 하네.
끊으려면 반야의 칼이 필요하며 장엄하려면 공덕의 보배가 필요하다네.무명의 바다가 점점 마르면
법신의 산이 서서히 드러난다네.
본론에서 말한 대로, ‘무명의 상은 각(覺)의 성품을 여의지 않아서
파괴될 성질도 아니고 파괴되지 않을 성질도 아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비유를 들어 뜻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큰 바다란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비유한다. 이 식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넓고 크고 가득 차 있는 것이 마치 바다와 같기 때문이다. 물은 본각심(本覺心)을 비유한다. 자성청정심은 분명하게 드러나 명백한 것이 마치 깨끗한 물과 같기 때문이다. 바람은 근본무명을 비유한다. 근본불각이 움직이고 전전하는 사려와 지식의 식을 일으키는 것이 마치 바람과 같기 때문이다. 파도가 움직인다는 것은 갖가지 희론의 식을 비유한다.
이러한 갖가지 식이 움직이고 유전(流轉)하여 무상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마치 바다의 파도와 같기 때문이다. 물의 모습과 바람의 모습은 서로 분리하여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진(眞)과 망(妄)이 서로 바탕이 되어주면서 본래부터
함께 행하고 함께 전전함을 비유한다.
본각심은 스스로 일어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무명의 힘을 빌어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으며,
근본무명은 스스로 전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진심(眞心)의 힘을 빌어야 비로소 전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물은 스스로 파도를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바람의 힘을 빌어야 비로소 파도를 일으킬 수 있고, 바람은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저 물을 빌어야 비로소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에서 비유한 것이다.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라고 한 것은 본각심이 유위(有爲)의 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비유한다.
무슨 말인가? 본각진심은 본래부터 움직이는 망념을 멀리 떠났고 결박에서 벗어나 있다. 그 체성은
청정하며 모습[相]과 작용이 자재하다. 그러나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무명의 연을 따라 갖가지 상을
만들어 낸다. 마치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지만 자성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바람의 연을 따라 갖가지 파도를 만들어 내듯이, ‘바람이 그치면 움직이는 모습도 따라서 멸하지만’이라고 한 것은 근본무명이 멸하면 갖가지 희론의 식도 남김없이 멸함을 비유한다.
본각이 장애를 끊을 때는 먼저 근본무명을 대치하고 나중에 사려와
지식이 반연하는 갖가지 식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물의 축축한 성질은 파괴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본각의 지혜가 끊고 멸하는 법을 떠났음을 비유한다.
무슨 말인가? 무명이 멸하면 모든 식이 멸하는데, 본각진심은 허물어지거나 멸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바람이 멸하여 파도가 모두 그치면 깨끗한 물은 결코 허물어지거나 멸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서부터는 비유와그 비유로써 드러내려고 하는 법을 함께 드러내는 부분이니,
비유와 법을 차례대로 맞추어 보면 될 것이다.
큰 바다의 바람과 불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가?
용왕으로부터 생겨난다. 각각 어느 곳으로부터 생겨나는가?
이를테면 물은 대용왕의 머리 꼭대기에서 생겨나고 바람은 꼬리에서 생겨난다.
무슨 이유로 바닷물은 바람에 의해 흔들려 갖가지 파도를 끊임없이 만드는가?
두 가지 일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종류를 동일하게 갖는 대종[同類大種]이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법이 본래적으로 그렇기[法爾]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수대(水大) 중에 풍대(風大)가 있고,
풍대 속에는 수대가 있다 서로가 서로 속에 있기 때문에 함께 화합하여
갖가지 파도를 만들어 내서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 만일 수대 중에 풍대가 없다면
바람은 물을 움직일 수 없어야 하며, 풍대 중에 수대가 없다면 물은 바람을 따라 움직일 수 없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사대종(四大種)은 본디 함께 생하고 함께 전전하면서 서로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종이 분명하게 나타나서 지각됨에 따라 나머지 대종이 불명료해지는 것은,
상이 더해지거나 상이 멸하면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무시이래로
법이 원래 그렇다는 데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무명본각도 마찬가지다.
대용왕이란 일심법을 비유한다.
바람은 무명주지를 비유하는데,
꼬리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이 법이 하열한 형상을 갖는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물은 본각진심을 비유하는데, 머리 꼭대기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이 법이 수승하고 묘한 형상을
갖는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 준다.
수대 중에도 풍대가 있다는 것은 자성이 청성한 본각심 속에 근본무명이 있음을 비유한다.
풍대 중에도 수대가 있다는 것은 근본무명장 속에 본각의 불성이 있음을 비유란다.
이 논에서는 이상(異相)을 처음에 두고 동상(同相)을 뒤에 두는 데 본의가 있으니,
해석하는 데 따라서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불무진장계경(諸佛無盡藏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했기 때문이다.
“큰 바다 같은 번뇌 가운데 원만하신 여래기 있어 실상이 상주하는 도리를 말씀으로 베풀어 주시고,
본각의 실다운 성품 가운데 무명에 싸인 중생이 있어 한없는 번뇌의 파도를 일으킨다.
이렇게 큰 사건은 부처님이나 보살의 경계라서 범부나 이승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이제까지는 본유한 성품의 지혜가 청정함을 밝히는 문[本有性智淸淨門]에 관해 설했고,
다음으로는 업의 자용이 자재하고 무애함을 밝히는 문[業用自在無礙門]을 설하겠다.
업용자재문은 본유한 성품의 지혜를소의(所依)로 삼아 응화(應化)의 작용을 일으킴을 밝히는 문이다.
즉, 모든 수행자를 위해 갖가지로 수승하고 묘한 색상을 나타냄으로써 안근(眼根)의 경계가 되어주고,
갖가지로 수승하고 묘한 소리를 내어 이근(耳根)의 경계가 되어주고,
갖가지로 수승하고 묘한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여 비근(鼻根)의 경계가 되어주고,
갖가지로 수승하고 묘한 법의 맛을 나타내 설근(舌根)의 경계가 되어주고,
갖가지로 수승하고 묘한 삼매의 촉을 일으켜 신근(信根)의 경계가 되어주고,
갖가지로 깊은 법장(法藏)을 나타내 의근(意根)의 경계가 되어준다. 이러한 순서대로,
구족하게 성취하신 광명일월보덕(光明日月寶德)여래ㆍ
음성범향청정(音梵響淸淨)여래ㆍ
향적분류원만(香積芬流圓滿)여래ㆍ
일미무잡평등(一味無雜平等)여래ㆍ
각촉분명현상(覺觸分明顯相)여래ㆍ
지혜명 달변만여래(智慧明達遍滿如來)께서는
시기와 장소와 근기의 정도에 맞게 중생을 교화하여
이익을 줌에 있어 걸림 없이 자재하시다.
한 생각도 움직이지 않고 삼세 어디에나 두루하시고,
한 몸도 나누지 않고 시방 어디에나 가득하신 채
불사를 지으시기 때문에 업용이 자재하다는 것이다.
본론에서 ‘부사의업상이란 지정상에 의지하여 수승하고 묘한 일체 경계를 지을 수 있다. 즉,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단절함이 없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본래적으로 상응하여 갖가지로 나타나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라고 설한 것과 같다.
이제까지는 염법을 따라주는 본각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문[廣說隨染本覺門]이었고,
다음으로 성품이 정정한 본각을 자세히 설명하는 문[廣說性淨本覺門]이다.
【論】 다음으로 각의 체상에 네 가지 큰 뜻이 있는데,
허공과 동등하고 마치 깨끗한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 번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으로서,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떠나 어떤 법도 드러날 것이 없다.
여실공경의 각은 각조(覺照)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으로서,
여실하게 공(空)하지 않아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이 가운데 나타남을 말한다.
벗어난 것[出]도 아니고 들어가는 것[入]도 아니며 유실되는 것[失]도 아니고 파괴되는 것[壞]도 아니어서
상주하는 일신이니, 일체법이 진실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각은 어떠한 염법으로도 오염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지혜의 체가 요동하지 않아 무루법을 다 갖추어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불공(不空)의 법은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를 벗어났고 화합의 상을 떠나 순일하고 청정하며 밝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법출리경에 의지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빠짐없이 비추어
그들에게 선근(善根)을 닦도록 하며 염에 따라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釋】 이 단원은 청정본각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큰 뜻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앞의 큰 뜻과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허공과 동등하다는 뜻이고,
둘째는 거울과 동등하다는 뜻이다.
이것을 본론에서 ‘다음으로 각의 체상에 네 가지 큰 뜻이 있는데,
허공과 동등하고 마치 깨끗한 거울과도 같다’고 하였다.
무엇을 여실공경(如實空鏡)이라 하며, 거기에 속한 두 가지 뜻은 어떤 특설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성정본각(性淨本覺) 가운데는
사려[慮]와 지식[知]을 멀리 떠났기에 여(如)라 하며
허망한 경계를 멀리 떠났기에 실(實)이라 하며
멀리 떠났다는 뜻을 보여 주기에 공(空)이라 하니
마사부사(摩奢趺娑) 구슬로 된 거울[鏡]과 같아서
하나를 들어 보이면 하나만을 보이기 때문이라네.
【釋】 성정본각의 체성 가운데는 반연으로 사려하고 아는 갖가지 희론의 식을 모두 떠나
한 가지 맛으로 평등한 뜻을 성취했기에 여(如)라고 이름한다.
모든 허망한 경계의 갖가지 상분(相分)을 멀리 떠나 결정하고
진실한 상을 성취했으므로 실(實)이라고 이름한다.
멀리 떠났다는 뜻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에 공(空)이라 이름한다.
거울[鏡]이란 비유로 든 명칭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울은 마사부사
구슬로 된 거울로서, 나머지 유마(油摩) 등 갖가지 거울을 비유로 드는 것과는 다르다. 어째서 그런가?
이 마사부사 구슬로 된 거울을 한 곳에 두고, 구슬로 된 거울 앞에다 갖가지 돌을 쌓아 놓거나 갖가지 음식을
쌓아 놓거나 갖가지 장엄구를 쌓아 공거나 똑같은 종류의 구슬로 된 거울을 쌓아 놓으면, 그 구슬로 된 거울에는 다른 상이 나타나지 않고 오직 같은 종류의 구슬만이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실공경도 마찬가지여서,
이 거울 속에는 오직 동일한 자류(自類)의 청정한 공덕만 자리를 잡고 모여 있으며,
갖가지 다른 종류의 모든 허물과 근심이 되는 법은 다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으로서,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떠나 어떤 법도 드러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어째서 각각에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거울과 동등하다는 뜻만 드러내고 허공과 같다는 뜻은 드러내지 않는가?
한쪽의 뜻만을 들어서 나머지 한쪽의 뜻까지 겸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허공과 동등한 뜻이라고 하는가?
허공은 물들지 않고 청정해서 네 가지 장애에 덮일 수 없고, 허공은 넓고 크며 글이 없어서
삼세(三世)에 다 들어갈 수 없다. 여실공경도 이와 같기 때문이다.
‘각조(覺照)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멀리 떠났다는 인연을 드러내 보여주는 구절이다. 무슨 뜻인가?
저 마사부사 구슬로 만들어진 거울 속에 돌 등의 갖가지 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돌 등의 갖가지 법은 다 하열하고 더럽기 때문이다.
이 본각의 구슬로 된 거울 속에 갖가지 망법(妄法)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모든 염법이 다
무명불각의 상이라서 비추고 통달하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인훈습경(因熏習鏡)이라 하며,
거기에 속하는 두 가지 뜻은 어떤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성정본각의 지혜는 세 가지 세간법과모두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의 각[一覺]에 훈습되어
법신의 과(果)를 장엄하니 이런 이유에서 인훈습(因熏習)이라 한다네.
거울은 윤다리화(輪多梨花)와 같고 허공은 받아들인다는 뜻과 하나에 두루하다는 뜻을 갖는다네.
【釋】 성정본각은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 가운데 있으면서 떨어지는
일 없이 저 세 가지 세간을 훈습하여 하나의 각이 되고 하나의
큰 법신의 과를 장엄한다. 그러므로 ‘인훈습경’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무엇을 세 가지 세간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중생세간(衆生世間),
둘째는 기세간(器世間),
셋째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다.
중생세간이란 이생성(異生性)의 계(界)를 말하며,
기세간이란 중생이 의지하는 땅을,
지정세간이란 부처님과 보살을 말한다. 이것을 세 가지 세간이라고 한다.
여기서 거울이란 윤다리화(輪多梨花)에 비유되는 거울을 말한다.
윤다리화를 가져다가 한 곳에 놓아두고 갖가지 물건들을 모아다 놓으면,
이 꽃의 향기에 영향을 받아서 그 물건들이 다 맑고 깨끗해진다.
또 맑고 깨끗한 물건만이 꽃 속에 나타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갖가지 물건 속에 저 꽃이 나타날 때도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인훈습경도 마찬가지로 일체법을 훈습하여 청정한 각을 이루어 평등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허공과 동등하다는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용납해서 받아들인다는 뜻[容受義]이고,
둘째는 어디나 두루하는 하나라는 뜻[遍一義]이다.
아무 장애 벌이 갖가지 색을 용납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수용한다는 뜻이 성립하고,
갖가지 색은 오직 한 가지 동일한 종류인 큰 허공이기 때문에 어디나 두루하는 하나라는 뜻이 성립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두 번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으로서, 여실하게 공하지 않아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이 가운데 나타남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본각은 무시이래로 네 가지 허물을 멀리 떠난 자성이
청정한 상주하는 일심이다.
무엇이 네 가지 허물을 떠났다는 것인가?
첫째는 두루하지 못하는 허물을 멀리 떠난 것이니
, 세 가지 세간이 본각의 청정한 거울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不出]’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뒤섞여 혼란스러운 허물을 멀리 떠난 것이니,
일체 모든 법이 본각의 청정한 거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不入]’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허물과 근심의 허물을 멀리 떠난 것이니,
본각이라는 거울에 나타나는 모든 법은 그 어느 것도
본각의 청정한 공덕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유실되는 것도 아니다[不失]’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무상한 허물을 멀리 떠난 것이니,
본각이라는 거울 속에 나타나는 모든 법은 그 어느 것이든 상주하는
무위의 지혜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파괴되는 것도 아니다[不壞]’라고 하였다.
치우치는 허물을 멀리 떠나 중도의 실상을 원만히 하기 때문에
‘상주하는 일심’이라고 한 것이다.이 아래는 위의 내용이 나오게 된
연고를 드러내는 내용이다.
어떤 연고가 있어서 본각의 지혜 가운데 갖가지
모든 법이 저 본각과 같이 모든 허물을 떠났는가?
갖가지 모든 법이 다 진실의 체이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일체법이 진실의 성품이기 때문이나’라고 하였다.
여기서부터는 이유를 밝혀서 의심을 풀어주는 내용이다. 무슨 말인가?
어떤 중생들은 의심하기를, ‘세 가지 세간 품에서 중생세간은 무명의 염법이 빠짐없이 가득차서
쉴 새 없이 유전하고 움직인다. 이러한 세간이 본각을 들어낸다고 한다면, 본각이 청정하여 갖가지
허물을 멀리 떠났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라고 한다.
위 내용은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또한 어떠한 염법으로도 오염시킬 수 없는
반야의 실다운 지혜는, 그 체가 요동하는 법이 없고 자성이 청정하여 무루(無漏)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음으로써 항상 중생세간을 훈습해서 청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어떠한 염법으로도 오염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지혜의 체가 요동하지 않아 무루법을
다 갖추어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무엇을 법출리경(法出離鏡)이라고 하며,
거기에 속한 두 가지 뜻은 어떤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여실불공의 법은 세 가지 허물을 벗어났고
세 가지 덕을 원만히 구족하였기에
법출리라고 이름한다네.
소연파리(銷消練頗)로 된 거울과도 같아서
공(空)은 색을 벗어났다는 뜻이네.
【釋】 무루성품의 덕은 세 가지 허물을 벗어나 세 가지 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기에 법출리(法出離)라고 이름한다. 무엇이 세 가지 허물인가?
첫 번째는 번뇌의 장애[煩惱礙]라 이름하는 무명의 염품을 말한다.
두 번째는 지혜의 장애[智礙]라고 이름하는 근본무명을 말한다.
세 번째는 희론의 식[戱論識]이라 이름하는 구합전상(俱合轉相)을 말한다. 이것을 세 가지 허물이라 한다.
성정본각의 법출리경은
이러한 세 가지 허물을 궁극적으로 떠났기에 벗어났다[出離]고 하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세 번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불공(不空)의 법은 번뇌의 장애와 지(智)의 장애를 벗어났고
화합의 상을 떠나 순일하고 청정하며 밝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무엇이 세 가지 공덕인가?
첫 번째는 순일하게 성취하는 공덕이고,
두 번째는 청정하게 성취하는 공덕이며,
세 번째는 밝게 성취하는 공덕이다. 이것이 세 가지 공덕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순일하고 청정하며 밝다’고 하였다.
어떤 허물을 벗어나서 어떤 공덕을 성취하는가?
번뇌의 장애를 벗어나서 청정하게 성취하는 공덕을 원만히 하고, 지혜의 장애를 벗어나서 밝게 성취하는 공덕을 원만히 하고, 화합전상을 벗어나서 순일하게 성취하는 공덕을 원만히 한다. 어째서 그런가? 장애와 공덕이
원래 그런 식으로 상대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울은 파리 구슬[頗梨珠]을 말한다. 비유컨대,
파리 구슬은 깊은 진흙 속에 빠지면 당장에 저 진흙 속에서 바깥으로 한 길이나 솟아오르며,
구슬을 탁한 물속에 넣어두면 막 뒤섞여 흙탕이 된다. 오직 맑은 물에 두어야 그 속에 가만히 머문다.
만일 이 구슬을 복다가(福多伽)있는 숲 속에 두면 향기를 내서 악취를 막고 그 항기가 멀리까지 퍼진다.
법출리경도 이 구슬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여기서 비유를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뜻은
본각의 자체가 청정하다는 사실이니, 사유하여 관찰해야 할 것이다. 허공과 동등하다는 비유는 색을 벗어났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허공이 대종(大種:지ㆍ수ㆍ화ㆍ풍)을 멀리 떠나 한결같이 청정하듯이,
법출리경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연훈습경(緣熏習鏡)이라 하며, 거기에 속하는 두 가지 뜻이란 어떤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중생의 연(緣) 가운데서
한량없고 끝없는 수승한 응화신(應化身)을 내어
중생심을 훈습하여 갖가지 선근을 내게 한다네.
두 바퀴로 된 꽃[兩輪花]을 불려서
법신의 과(果)를 장엄하기에 연훈습이라 이름한다네.
벽중파리(碧中頗梨)로 된 거울과 같고
수순해서 성취하는 뜻을 갖는 허공과 같으니법대로 관찰해야 하리라.
【釋】 비유컨대, 파리 구슬을 한 곳에 놓아두고 빙 둘러 갖가지 색깔의 구슬을 쌓아두면,
파리구슬은 방향에 따라서 다른 구슬의 색깔에 따라 변해 나타난다.
연훈습경도 이와 마찬가지이므로 그렇게 이름한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 수 있다.
허공은 자재한 힘을 갖기에 일체 중생이 수행하는 일에 따라서 일을 이룬다.
연훈습경도 그와 같이 일체 중생의 수행하는 일에 순응해서 건립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본론에서는 이를‘네 번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법출리경에 의지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빠짐없이 비추어
그들에게 선근(善根)을 닦도록 하며 염에 따라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본각의 큰 뜻은
모든 중생계와
모든 이승계와
모든 보살께와
모든 여래계 어디에나 두루하여 머물지 않는 곳이 없으며, 비추지 않는 곳이 없으며,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구족하고 원만하며 구족하고 원만하다.
已說摠識攝生圓滿門,次說別相剖分散說門。本曰:‘ 所言覺義者,謂心體離念相,離念相者,等虛空界。
無所不遍,法界一相。卽是如來平等法身。依此法身,說名本覺。何以故?本覺義者,對始覺說,以始覺者,
卽同本覺。始覺義者,依本覺故,而有不覺,依不覺故,說有始覺。又以覺心原故,名究竟覺,不覺心原故,
非究竟覺。’ 論曰:於此文中,卽有二門。
云何爲二?
一者略說本覺安立門,
二者略說始覺安立門。
本覺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淸淨本覺門,
二者染淨本覺門。始覺門中,
又有二門。云何爲二?
一者淸淨始覺門,
二者染淨始覺門。
云何名爲淸淨本覺?本有法身從無始來,具足圓滿過恒沙德,常明淨故。云何名爲染淨本覺?
自性淨心受無明熏,流轉生死,無斷絕故。
云何名爲淸淨始覺?無漏性智出離一切無量無明,不受一切無明熏故。
云何名爲染淨始覺?始覺般若受無明熏,不能離故。如是諸覺皆智眷屬。當證何理,以爲體分?
謂性眞如及虛空理。如是二理各有幾種?各有二故。
云何名爲二種眞如?
一者淸淨眞如,
二者染淨眞如。虛空之理亦復如是。
云何名爲淸淨眞如?
二種淨覺所證眞如,離熏習故。
云何名爲染淨眞如?二種染淨覺所證眞如,不離熏故。虛空之理亦復如是。以何義故,强名本覺?
字事差別其相云何?頌曰:本覺各有十 體雖同字事 各各差別故謂根鏡等義。
論曰:本覺各十。云何十本#一者根字事本,本有法身能善住持一切功德,譬如樹根,
能善住持一切枝葉及花果等不壞失故;二者本字事本,本有法身從無始來,自然性有,
不始起故;三者遠字事本,本有法身其有德時,重重久遠,無分界故;四者自字事本,
本有法身我自成我,非他成我故;五者體字事本,本有法身爲諸枝德,
作依止故;六者性字事本,本有法身不轉之義,常建立故;七者住字事本,本有法身住於無住,
無去來故;八者常字事本,本有法身決定實際,無流轉故;九者堅字事本,本有法身遠離風相,
堅固不動,若金剛故;十者摠字事本,本有法身廣大圓滿,無所不遍,爲通體故。
是名爲十。云何十覺?
一者鏡字事覺,薩般若慧淸淨明白,無塵累故;
二者開字事覺,薩般若慧通達顯了,無障㝵故;
三者一字事覺,薩般若慧獨尊獨,一無比量故;
四者離字事覺,薩般若慧自性解脫,出離一切種種縛故;
五者滿字事覺,薩般若慧具足無量種種功德,無所少故;
六者照字事覺,薩般若慧放大光明,遍照一切無量境故;
七者察字事覺,薩般若慧常恒分明,無迷亂故;
八者顯字事覺,薩般若慧淸淨體中,淨品眷屬悉現前故;
九者知字事覺,薩般若慧於一切法,無不窮故;
十者覺字事覺,薩般若慧所有功德,唯有覺照,
無一一法而非覺故。是名爲十。如是十種本覺字事義,
唯依一種大性法身,隨義異釋,據其自體,無別而已。此中所說二本覺中,
當何本覺?謂淸淨本覺,非染淨本覺。
染淨本覺字義差別其相云何?
頌曰:染淨本覺中 或各有十義 前說十事中各有離性故。
論曰:此本覺中,或各有十。所以者何?前十義中,各有不守自性義故,字事配屬依向應知。如是二覺同耶,
異耶?非同同故,非異異故,以此義故,或同或異,或非是同,或非是異,是故皆是皆非而已。以何義故,
强名始覺?字事差別其相云何?
頌曰:從無始已來 無有惑亂時 今日始初覺故名爲始覺。
論曰:從無始來,始覺般若無惑亂時,而無惑時,今始初覺故,名始覺。如是始覺,前惑後覺,卽非始覺,
而無惑時理,常今常初故,名爲始覺。如是始覺,二始覺中,當何覺耶?謂淸淨始覺,非染淨始覺。
染淨始覺字事差別其相云何?
頌曰淸淨始覺智 不守自性故 而能受染熏故名染淨覺。
論曰:淸淨始覺雖無惑時,而不守自性故,能受染熏,隨緣流轉,以此義故,是故名爲染淨始覺。
以何義故,强名眞如?
字事差別其相云何?頌曰:性眞如理體 平等平等一 無有一多相故名爲眞如。
論曰:性眞如理平等平等,唯同一相,亦無一相,亦無多相,無一相故,遠離同緣,無多相故,遠離異緣。
以此義故,名爲眞如。如是眞如二種淨智親所內證。
復次,眞如各有十義。
云何十眞?
一者根字事眞,乃至第十摠字事眞。如是十眞,十種本義相應俱有,不相捨離,是故同名表示而已。
云何十如?
一者鏡字事如,乃至第十覺字事如。如是十如,
十種覺義相應俱有,不相捨離。是故同名表示而已。所以者何?十種眞理本有法身有德方便,
十種如理薩般若慧有覺方便,以此義故,更重言詞,作如是示。
此中所說二眞如中,當何眞如?謂淸淨眞如,非染淨眞如。染淨眞如。字事差別,其相云何?
頌曰:淸淨眞如理 不守自性故 而能受染熏名染淨眞如。
論曰:淸淨眞如從無始來,平等平等自性淸淨,不生不滅,亦無去來,亦無住所,而眞如理性不守自性故,
隨緣動轉。是故名爲染淨眞如。如是眞如二染淨智親所內證,相應俱有,不相捨離。如是等義觀前所說,
比類應知。以何義故,强名虛空?字事差別其相云何?
頌曰:虛空有十義 體雖同義事 各各差別故謂無㝵等義。
論曰:性虛空理有十種義。
云何爲十?
一者無障㝵義,諸色法中無障㝵故;
二者周遍義,無所不至故;
三者平等義,無簡擇故;
四者廣大義,無分際故;
五者無相義,絕色相故;
六者淸淨義,無塵累故;
七者不動義,無成壞故;
八者有空義,滅有量故;
九者空空義,離空著故;
十者無得義,不能執故。是名爲十。
如是十事義用差別,若據其體,無別而已。此虛空理二種淨智親所內證,相應俱有,不相捨離。二虛空中,
當何虛空?謂淸淨虛空。非染淨虛空,染淨虛空字事差別,其相云何?
頌曰:淸淨虛空理 不守自性故 而能受染熏名染淨虛空。
論曰:淸淨虛空具足十德,亦無染相,亦無淨相,而虛空性不守自性故,能受染熏,隨緣流轉。
是故名爲染淨虛空。能熏、所熏、建立、誹謗等種種門,至廣說分,其理具顯。已說字事門,
次說隨釋門所言覺義者者卽是摠句從此自下皆是別句。摠者,通表一切覺故,別者,各各差別說故,
就別句中,先說淸淨本覺、淸淨始覺,次說染淨本覺、染淨始覺。如其次第,說相可見。謂心體離念相者,
卽是淸淨本覺。心謂卽是自性淸淨心。體謂卽是本有法身體。如是心體,卽名本覺,離念相者,
卽是顯示淸淨之義。所謂遠離大無明念故,言離念。遠離四種無常之相故,言離相。過於恒沙煩惱眷屬,
此五有爲以爲根本。是故擧本無,示眷屬皆空。離念相者者,卽唱淸淨本覺人辭。者卽人故,
等虛空界無所不遍者,如是覺者,善證具足十種德義虛空理故。法界一相者,如是覺者,於所證之眞如法界,
而共和合一味一相,無差別故。
卽是如來平等法身者,善證二種勝妙之理。淸淨覺者,卽是法身如來自性自體故。依此法身說名本覺者,
本有法身自性德中,而作歸依,建立淸淨本覺稱故。已說淸淨本覺,次說淸淨始覺。何以故者,卽請問辭,
謂欲建立淸淨始覺,作如是請。問相云何?謂有衆生作如是難,本有法身從本已來,具足無量性之功德,
常恒明淨,常恒自在,依此義故,名本覺者,如是本覺於何時中,何因緣故,具足一切無量功德,名本覺耶?
若作是說,此本覺者,有大智力,能善斷除一切過患,具足圓滿諸功德者,卽此本覺前惑後覺,非本覺明。
卽此功德斷已前隱,斷已後顯,非自性明,豈惑覺隱顯,本有之義而得成立?若作是說,常斷更不斷,
常具足更不具足。是故應有本斷本德者,此義亦不成立,無功德過故,謂一切障從本斷訖,更不待斷,
一切功德從本具足,更不待具足覺者,卽是始覺,非彼本覺。是故般若波羅蜜中,作如是說。若覺者是始覺,
若不覺者卽是無明。若離此二者,卽名爲本覺。以何義故,作如是說?本有法身自性德中,而作歸依,
說名本覺,故言何以故。本覺義者,對始覺說者,直決彼疑。謂馬鳴師自通,而言淸淨本覺從本已來,
不生不滅,非建立有,非誹謗無,或非過患,或非功德,言語道絕,心行處滅,而有言說,具足圓滿,
過於恒沙無量性德,名本覺者,當知從無始來,而有淸淨始覺,發大智力,發大定力,於一切時,於一切處,
常恒對治過於恒沙無量無邊過患之海,具足圓滿過於恒沙無量無邊功德淨品。對此淸淨始覺者故,
立彼淸淨本覺之稱。以始覺者卽同本覺者,作其所由。謂以自然始覺與彼本覺同故,得對始覺,示本覺故,
如是二覺熏習差別,其相云何?
頌曰:淸淨本始覺 從無始已來 遠離一切染湛明若虛空。 是故此門中 無能熏染法無所熏淨法 唯有自家德。
論曰:如是二覺無有能熏、所熏差別,唯有自家眞實功德故,此門中,不應建立能熏、所熏,若如是者,
於此門中,有何熏義?所謂有熏,染法、淨法不相待成。所謂卽是具足轉熏。此熏云何?
謂白白故,三身本有契經中,作如是說:本有本覺、本有始覺,唯有德熏,無患德熏,唯有滿轉,無分轉故。
已說淸淨始覺,次說離性二覺。始覺義者,依本覺故,而有不覺。依不覺故,說有始覺者,通示二種離性本始。謂依本覺故,而有不覺者,卽是離性本覺。依不覺故,說有始覺者,卽是離性始覺。此義云何?
本覺般若不守自性故,善受染熏,彼諸染法令得住止,卽是本覺離性之義。始覺般若不守自性故,依諸染法,
如今方起被彼染誑,卽是始覺離性之義。始覺般若能斷諸障,證諸功德。何故說言始覺之智,被染誑耶?
於無過法,立諸過患,斷除障故,於無德法,立諸功德,證得理故。若爾,始覺於何時中,而得離妄?
極解脫道時,方得究竟離,
於彼時中,到無念故,滿、分二事下當顯示。已說略說兩覺安立門,次說廣說兩覺決擇門。
本曰:‘此義云何?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故能止後念,令其不起。雖復名覺,卽是不覺故如,二乘觀智、
初發意菩薩等,覺於念異,念無異相。以捨麤分別執著相故,名相似覺。如法身菩薩等#覺於念住,念無住相。
以離分別麤念相故,名隨分覺。如菩薩地盡,滿足方便,一念相應,覺心初起,心無初相。以遠離微細念故,
得見心性,心卽常住,名究竟覺。是故修多羅說若有衆生,能觀無念者,卽謂向佛地故,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而言知初相者,卽謂無念。是故一切衆生不名爲覺。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
說無始無明。若得無念者,則知心相生住異滅,以無念等故,而實無有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
皆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
’論曰:卽是廣說始覺決擇分,此文中,有二門。
云何爲二?
一者建立四相門,
二者建立隨覺門。
四相門中,卽有四種。
云何爲四?
一者麤重過患四相,
二者微細過患四相,
三者無常功德四相,
四者常住功德四相。麤四相者,卽長時故。細四相者,卽短時故。
無常相者,過患相違始起德故。常住相者,過患相違,德常住有故。
隨覺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滿覺門,
二者分覺門。滿覺門者,明一覺故。分覺門者,具足顯示覺不覺故。
云何名爲長時四相?從十信位,乃至極解脫道時,方究竟離故。云何名爲短時四相?
因緣有法不過一剎那故。云何名爲始起四相?起滅滅滅,起異異異,起住德住,起生德生,
是故說言始起四相。翻過患故,名爲功德,今始起故,名爲無常。
云何名爲常住四相?今始起德,本來有故。
云何名爲一種覺耶?覺與不覺無有二故。
云何名爲覺不覺?覺或受染熏,或不受故,如其次第,說相可觀。此中四相,
有二次第。云何爲二?
一者前後次第,
二者俱有次第。前後者,彼無時中前後差別故。俱有者,
彼有時中前後一時故。彼無時者,據斷時故。
彼有時者,據亂時故。俱有次第其相云何?
頌曰:生住異滅相 如是四種相 一時卽前後非漸次轉得。
一時故俱有 前後故次第俱故成一相 別故成四相。
論曰:俱有次第四相者:
一者生相,
二者住相,
三者異相,
四者滅相。如是四相或是一時,或是前後。以何義故,名爲一時?由得同故。以何義故,名爲前後?
麤細別故。非漸次轉得者,別爲顯示一時義故以何義故名爲俱有由一時故。以何義故,名爲次第?由前後故。
如是四相俱有故一,麤細故四。此中一時,當何時耶?根本無明熏眞心時。於此時中,具起四相,
不知不覺一切諸法眞實之性周遍,建立過於恒沙無量煩惱,而能隱覆自性淨心,
還原無日。是故名爲俱有四相。何故名生乃至名滅?
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大無明住地 熏本覺時中 生三種細相故名爲生相。
論曰:根本無明熏本覺時,生三種相,故名生相。
云何爲三?
一者獨力業相,
二者獨力隨相,
三者俱合動相。獨力業相者,非取無明之體,取無明之業故。獨力隨相者,非取本覺之體,取本覺之用故。
俱合動相者,取和合動相故。摠擧此三,故名生相。生相之稱,立初生故,住相字義,其相云何?
頌曰:住相有四種 轉相與現相 智相及相續是名爲四種。
論曰:住相有四。
云何爲四?
一者轉相,
二者現相,
三者智相,
四者相續相。是名爲四。如是四相以何義故,說名爲住?此中住義隨應差別,所謂若據轉相,說其住相,而能住持心識熏習故,名住相。若據現相,說其住相,而能住持色相熏習故,名住相。若據智相,說其住相,而能住持六種漸次分別智相應染故,名爲住相。若據相續相,說其住相,而能住持分別事識連續染污故,名住相,卽是細分,非麤分故。異相字義,其相云何?
頌曰:異相有二種 執取計名字 如是二種相直是人執品。
論曰:異相有二。
云何爲二。
一者執取相,
二者計名字相。如是二相直人執品,如是二相以何義故,名爲異相?若據執取,說其異相,能緣一切無量別相,隨其諸相,麤分別識而能執著,異自成異故,名異相。若據名字,說其異相,隨相立名,依其名字,而起著故,名爲異相。滅相字義,其相云何?
頌曰:滅相有二種 起業及果報 破壞前異心令受苦名滅。
論曰:滅相有二。云何爲二?
一者起業相,
二者業繫苦相。如是二相壞前異位,令受苦輪,故名滅相。復次,受苦輪時,能滅一切無量善品故,
名滅相。復次,發起業時,佛性善根漸漸損滅,故名滅相。已說俱有,次說前後。其相云何?
頌曰:滅異住生相 如是四種相 隨智力劣勝有增減不同。
論曰:前後次第者,
一者滅相,
二者異相,
三者住相,
四者生相。如是四相隨智慧量增減不同。此義云何?以信位人闕一具三,三賢位人闕二具二,於十地中,
第九地中,闕三具一,第十地中,闕麤一分,具細一分,如來地中,四相都無,究竟淸淨。是故說言增減不同。已說建立門,次說隨釋門。依彼四相,明覺差別,卽有五位。
云何爲五?
一者十信位,
二者三賢位,
三者九地位,
四者因滿位,
五者果滿位。前四位中,各有四事。
云何爲四?
一者趣向行者,
二者修行因相,
三者行因果相,
四者熏離俱相。
第五位中,唯有三事。
云何爲三?
一者能圓滿者,
二者對治行相,
三者滿究竟相。如其次第,說相應觀。
第一位言如凡夫人者,卽是趣向行者。位在十信,未得不退,名爲凡夫。已出邪定,名爲覺者。
覺知前念起惡者,卽是顯示修行因相。謂未得入十信已前,二種滅相是大過患,
不知不覺,具造種種一切惡業,遍受一切無量苦果,常恒輪迴五趣四生,無休息時,而今以承知識妙緣,
聖說淨則,而能得入十信位中,覺諸惡業是極過失,知諸苦果是實無樂故,言覺知前念起惡,
卽是顯示覺滅相義。故能止後念,令其不起者,卽是顯示行因果相。謂此位中,始起治道,氣力極弱故,
名爲故,發心已去,發起治道,轉自在故。復次,前不覺知常起惡業,今覺知故,有慚愧心,不作惡業,
滅相之穢止息#不起。雖復名覺,卽是不覺故者,卽是顯示熏離俱相。所謂覺知滅相之法,實是過患,
彼滅相品不作滅事,故言熏離。彼滅相品無始已來,體性淸淨,實是功德,不知不覺,故言熏俱。此中字句,
遠流應至於第十地。復次,顯示覺與不覺,互相卽通,是一味故。
第二位言如二乘觀智初發意菩薩等者卽是趣向行者,位在三賢。於此位中,人空無漏成就自在,
無所疑畏,故將二乘同於菩薩,摠明而已。復次,顯示一切二乘,皆悉修行菩薩之道,
證入自在大覺地之海故。覺於念異者,卽是顯示修行因相。
謂二種異相互相與力,而能執取境界之相,發起愛著,尋求名字,分別言相故。是故無厭,我我所轉盛,
攀緣思慮更增,終日無息。而今發起人空般若,建立方便法空現前,覺知本覺淨心,爲無明眠,夢於異相,
起一切障,分分漸漸,與遠離智而共相應,從彼夢念,得於覺悟。是故說言覺於念異。念無異相者,
卽是顯示行因果相。謂始覺正念中,二種異相無所有故。
以捨麤分別執著相者卽是顯示無異相緣所謂意識有二分別而能分別一切諸法。云何爲二?
一者麤分別,
二者細分別。麤者,起貪嗔等,能善分別違順境故。細者,法執分別恒流注故,今所遠離彼麤分別,
非細分別。細分別者,極喜離故。故名相似覺者,卽是結前,幷麤顯示熏離俱相。
此中,相似義卽有二種云何爲二?
一者異類相似,
二者同類相似。異類相似者,二乘相似。同類相似者,菩薩相似。二乘人空形三賢空,作相似義,
三賢菩薩方便法空,形淨心地,作相似義。是故摠言相似覺焉。
第三位言如法身菩薩等者,卽是趣向行者。位在九地,九地菩薩眞如法界以爲自身,般若實智以爲自心。
垢累已出,縛障悉斷,淸淨明白,無㝵自在。是故名爲法身菩薩。覺於念住者,卽是顯示修行因相。
謂四種住相,於一切時,而能發起法執分別,離性本覺能令睡眠,本覺之心夢於住相,不能覺曉,狂亂而住,
今發始覺般若之日,照迷亂住相之闇,始覺正智無分別性,迷亂住相有分別性,有、無、覺、亂極相違故,
不能俱行。如是道理分明現前。是故說言覺於念住。念無住相者,卽是顯示行因果相。以離分別麤念相者,
卽是顯示無住相。緣。謂四種住相,形於彼生相,極麤現故,恐生住際互相雜亂,作如是說。止思應觀,
如是四種迷亂住相,如其次第,於極喜地、過三有地、寂滅淨地、善慧地中,各離一相。故名隨分覺者,
卽是結前,幷麤顯示熏離俱相,生相細念未出離故。
第四位言如菩薩地盡者,卽是趣向行者。此字句中,自有二人。
云何爲二?
一者因圓滿者,
二者果圓滿者。因圓滿者,學地盡故。果圓滿者,無學之果滿究竟故。初人對治俱合動相,
後人對治獨力業相及大無明。獨力隨相非斷法故,無對治道。自此已下,顯示二種圓滿者焉。
滿足方便一念相應者,卽是顯示因圓滿者。謂此位中,
卽有二種金剛喩定。云何爲二?
一者方便金剛,
二者正體金剛。無垢行者二種金剛喩、三摩提以爲自體#是故擧道而標。彼人覺心初起,心無初相者,卽是顯示果圓滿者。大圓鏡智分明現前,無所不通,無所不窮,法界一體,無有與等,獨力業相、根本無明,不能自有。
平等虛空,一相無相,無初念故。以遠離微細念故,得見心性,心卽常住,名究竟覺者,
卽是顯示始覺般若圓滿之相,而得到於無生覺故。是故修多羅說若有衆生,能觀無念者,卽爲向佛地故者,
卽是引經,贊自所說,如是經文,爲證何義?證佛果故。云何證耶?謂佛果中,
證成遠離二種念故。云何爲二?
一者大無明念,
二者細業相念。如是二念,極解脫道一時相翻,不能俱行。是故說言佛果無念。若無妄念,當有何念?
謂正念故。云何名正念?
十德相應故,云何爲十?
一者出離功德,遠離一切諸難處故;
二者同體功德,一切染法歸於自故,
三者常住功德,遠離始有之過失故;
四者一味功德;圓滿始覺,常本覺故;
五者俱離功德,遠離一切染淨法故;
六者還轉功德;周遍誕生於諸趣故;
七者無住功德,於一切處無在處故;
八者修行功德,爲諸衆生修萬行故;
九者圓滿功德,爲諸衆生成覺道故;
十者虛空功德,如前所說種種功德,
從本已來,自性皆空無所有故是名爲十如是十德與極解脫初剎那中俱行俱起無有前後一時俱轉是名正念。
所引經文,不出此義,應審觀察。又心起者,無有初相可知,而言知初相者,
卽謂無念者,卽是除疑,令生勝解。謂有衆生作如是疑,極解脫道會本覺時,微細初生知得有耶?知得無耶?
若知有者,極解脫道當非無念。所以者何?知有初念,有初念故。若知無者,極解脫道當不能有。所以者何?
旣無初念,待何念無,立解脫道。有如是疑故,今自通言所知之相,從本已來自性空,無能知之智,從本已來,無有起時,旣無所覺之相,亦無能覺之智,豈可得言有細初相,智慧可知?而有言說,知初相者,
卽是顯示無念道理。所以者何?法性之理雖無所知之初起相,亦無能知之始覺智,而能通達無所知相,
無能知智。無所有覺都非空無。是故今且依此道理,作如是說:知初相耳。是故一切衆生不名爲覺,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說無始無明者,卽是成立上無念義。謂金剛已還一切衆生#獨力業相、大無明念,
未出離故,卽是顯示一切衆生皆是有念,名爲衆生,一切諸佛皆得無念,名爲佛故。自此已下,顯示始覺境界周遍圓滿。謂大覺者,已到彼岸,遍知一切無量衆生,一心流轉,作四相故,如本,若得無念者,
卽知心相生住異滅故,以何義故,如是知耶?得自無念時,一切諸衆生平等得故。如本‘以無念等故’故。
以何義故,唯一行者得無念時,一切衆生悉得無念?一一衆生皆悉各各有本覺故。此義云何?謂一行者始覺圓滿,同本覺時,遍同一切無量衆生本覺心中,非自本覺。所以者何?自性本覺遍衆生界,無所不至故,
淸淨覺者得無念時,一切衆生皆得無念者,淸淨覺者斷無明時,一切衆生亦可斷耶?若爾,何過?若始覺者斷無明時,一切衆生皆得斷者,何故上言金剛已還一切衆生,獨力業相、大無明念,未出離故,不名爲覺?
若諸衆生,無始無明未得出離,而與諸佛,同得無念者,無念等義,唯有言說,無有實義。豈可得言一切衆生皆有本覺,亦有始覺?決斷此難,
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自宗決斷,
二者望別決斷。自宗決斷者,此論正宗爲欲顯示一切衆生同一相續,無差別故。
是故可得一修行者,無始無明究竟斷時,一切衆生亦同斷盡,一修行者滿始覺時,一切衆生亦同得滿。
是故三身本有契經中,作如是說:爾時,世尊告文殊師利言:我由二等,而成正覺。
云何爲二?
一者斷等,
二者得等。言斷等者,我極解脫道初發起時,一切衆生所有無量無始無明,一時究竟,頓決斷故,
言得等者,我初成道,滿始覺時,一切衆生皆滿足故,是名二等故。望別決斷者,擧圓滿者,望衆生界,
無一一法而非淸淨,擧諸衆生,望無上尊,入無明藏,無所覺知。皆悉淸淨,無所障㝵,無念等義而得成立,
入無明藏,無所覺知上所說文無相違過擧此一隅應廣觀察。自此已下,融諸始覺,令同本覺。
謂五十一分滿始覺,實無轉勝漸次之異,亦無究竟圓滿之極。所以者何?一切始覺四相俱時,而得住止,
皆無自立,從本已來,一味平等,自性圓滿,契同無二,一相覺故,如本‘而實無有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故。大摠持契經中,作如是說:悟滅相品始覺般若,有滅相位中,而共俱時有。
無滅時中,始覺隨無,悟異相品始覺般若,有異相位中,而共俱時有,無異時中,始覺隨無悟住相品始覺般若,有住相位中,而共俱時有。無住時中,始覺隨無。悟生相品始覺般若有生相位中,而共俱時有,無生時中,
始覺隨無。所以者何?一切始覺不能自起,當待染法,方得而起。一切染法不能自滅,當待智力,方得滅盡,
廣說乃至。從本已來,一切染法自體空無,而始覺者本無處中,作有之解,俱時而轉,不名爲正故。已說廣說始覺決擇分,次說廣說本覺決擇分。本曰:‘復次,本覺隨染分別,生二種相,與彼本覺不相捨離。
云何爲二?
一者智淨相,
二者不思議業相。智淨相者,謂依法力熏習,如實修行,滿足方便故,破和合識相,滅相續心相,
顯現法身智淳淨故。此義云何?以一切心識之相,皆是無明,無明之相不離覺性,非可壞,非不可壞,
如大海水,因風波動,水相、風相不相捨離,而水非動性。若風止滅,動相卽滅,濕性不壞。
如是衆生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心與無明俱無形相,不相捨離,而心非動性。若無明滅相續,
則滅智性不壞故。不思議業相者,以依智淨,能作一切勝妙境界。所謂無量功德之相,常無斷絕,
隨衆生根,自然相應,種種而現,得利益故。’論曰:卽是廣說隨染本覺決擇分,於此文中
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本有性智淸淨門,
二者業用自在無㝵門。第一門中,
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不守自性隨緣門,
二者對治一切業障門。第二門中,
復有二門。云何爲二?
一者隨順機根契當門,
二者不動本性常寂門。如是四門隨釋應配,本覺隨染者,卽是簡句。簡異淸淨本覺智故,此句爲欲顯示何義?
謂爲顯示受熏義故。直唱本覺受無明熏,不守自性,隨緣無㝵,俱時轉故。是故名爲本覺隨染。
卽此字句從所隨染,立名而已。自此已下,直顯能隨本覺體相,分別生二種相,與彼本覺不相捨離。
云何爲二?
一者智淨相,
二者不思議業相者,如是二種殊勝之相,與彼隨染本覺性智,俱行,俱轉,不相捨離故。如是本覺智淨行相,
其相云何?頌曰:破滅一切障 顯現法性身 實智淸淨故名爲智淨相。論曰:斷一切惡,修一切善,具足功德,
圓滿智慧,莊嚴法身,名智淨相。斷一切障,當須何力?須滿足力。滿足力者,其數幾有?
有二種故。云何爲二?
一者法力熏習滿足方便力,
二者如實修行滿足方便力。如是二種方便之力,從無始來,自然常住,不始而起,如是二中,
依法力熏習滿足方便力故,破根本無明及獨力業相,依如實修行滿足方便力故,滅俱合業相、
能見相及與現相、分別智相幷相續相。破根本無明獨力業相故,自性身體分明現前,滅俱合相等相續故,
般若實智淳淨明白。如本‘智淨相者,謂依法力熏習、如實修行滿足方便故,破和合識相,滅相續心相,
顯現法身智淳淨故’故。何故三賢及十信位略不顯示?比來次第分明顯故。何故今此門中,最初對治根本無明,
乃至最後對治滅相?爲欲簡異始覺般若悟次第故。何故始覺背凡向聖,上上去去爲次第轉,隨染本覺背聖向凡,下下來來,爲次第轉?以法爾故。如是二轉,當一時耶?當前後耶?決定一時,卽無前後。如是等義何契經中明了顯說?謂證說經。彼契經中,如何說耶?謂彼證說契經中,作如是說:爾時,陁羅尼菩薩發十千問,
問於如來。於是如來卽作十萬決疑難荅,開菩薩問。如其次第,荅彼問已,
卽告陁羅尼菩薩言:何故仁者一事不問,須問餘事?如宜佛子,更問開發爲自他利,問於如來。爾時,
陁羅尼菩薩卽承佛威神,而白佛言:世尊,何因緣故,於大衆中唱如是言?諦聽諸佛子 我從具縛凡
具經一切地圓滿行因海。 莊嚴大覺果 我從淸淨地具經一切地 將一切萬行。 得第一信位入無明藏海
如是二大事 一時非前後。我及一切諸大衆海,皆悉懷疑,無解脫時。如宜世尊,爲諸佛子,種種方便,
隨宜開示。爾時,世尊告摠持言:諦聽諦聽,善思念之。我當爲汝略說其要。
善男子,此二大事顯示二種般若覺智。云何爲二?
一者始覺般若,
二者本覺般若。善男子,始覺般若者,從具縛地,漸漸出離,乃至金剛,圓滿因行,發究竟道,
頓斷根本無明住地,覺日圓照,無所不遍。是故名爲始覺般若?善男子,本覺般若者,從淸淨性,漸漸遠離,
乃至信初,發究竟智,斷滅相品,入無明海,隨緣動轉。是故名爲本覺般若。於是摠持及諸大衆,聞此語已,
覺知諸法一相一體,亦無一相,亦無一體,亦空無言,空無言亦空,而諸法性亦是實相,亦是常住。亦是決定,亦是實有故。自此已下,別釋散說,顯示因緣,此義云何者,卽是摠問。以一切心識之相,皆是無明者,
卽是摠荅。所謂種種諸戲論識,發起種種諸攀緣量,慮知一切無量境界,或著一切境界之相,不相捨離者,
皆是無明之氣分故。卽是成立上中所說破滅二義。自此已下,顯示斷非斷之差別。此中無明當定可斷耶?
當不可斷耶?此何所疑?若可斷者,本覺之心亦當可斷。何以故?無明染法本覺性智俱行,俱轉,不相捨離。
譬如眠士夫及與悟士夫,俱行,俱轉,不相捨離。故亦不可言斬眠士時,悟士不傷,相續一故。亦不可說得悟士時,眠士空無相續同故。若言異者,過失太故,若不可斷者,自性淸淨心常爲無明覆輪,轉五道無出離時。
是故若言不可斷者,過失亦太。如是無明,亦可斷除,亦不斷除。此義云何?
無明本覺有二義故。
云何爲二?
一者同體同相義,
二者異體異相義言同義者一切諸法皆是理故言異義者,一切諸法功德過患,各差別故。若據初門,不可斷除,
若據後門,亦可斷除。諸法無行契經中,作如是說:貪欲是涅盤 恚癡亦如是 如是三事中有無量佛道。
見非見一相 著不著亦然此無佛無法 知此名世智。本智契經中,作如是說:根本無明闇 其力最大故 能障一切智令得不自在。 斷須般若劍 飾須功德寶無明海漸竭 法身山徐顯。如本‘無明之相不離覺性,非可壞,非不可壞故。
’自此已下,顯示喩說。大海者喩阿梨耶識,此識有二種義,廣大圓滿如大海故,水者,喩本覺心。
自性淸淨心顯了明白,如淨水故。風者,喩根本無明。根本不覺能起動轉慮知之識,如彼風故。波動者,
喩諸戲論識,如是諸識遷動流轉,往來無常,如海波故。水相、風相,不相捨離者,喩眞妄相資,俱行合轉。
謂本覺心不自起故。當資無明之力,方得而起,根本無明不自轉故。要因眞心之力,方得而轉。
如水不自作波浪故,當因風之力,方得作波,風不自現動相故,要資彼水,方得而現動轉相故。
而水非動性者,喩本覺心離有爲相。謂本覺眞心從本已來,遠離動念,解脫結縛,體性淸淨,相用自在,
而不守自性故,隨無明之緣,作種種相,如水非動性,而不守自性故,隨風之緣作種種波#故,若風止滅,
動相則滅者,喩根本無明滅,戲論諸識皆滅,無餘。本覺斷障,先對治根本無明,後對治慮知攀緣之諸識故。
濕性不壞者,喩本覺之智離斷滅法故。謂無明滅諸識,皆盡,本覺眞心無有壞滅,如彼風滅,諸波皆息,
而淸白水終不壞滅故。自此已下,顯示合說。如其次第應配屬焉。大海風水從誰而生?謂從龍王生故。
各從何處而生?所謂若水從其頭頂而出,若風從其尾末而出。何故海水爲風所動,作種種波,不斷絕耶?
謂由二事故。云何爲二?
一者有同類大種故,
二者由法爾故。此義云何?彼水大中,亦有風大,彼風大中,
亦有水大,互相有故,而共和合作種種波,常恒相續不斷絕焉。若水大中,無彼風大,風當不能令水動。
若風大中,無彼水大,水當不能隨風轉。何以故?以四大種俱生俱轉,不相離故。而隨一大分明,現知,
不了餘大者,增相、減相而不同故。復次,從無始來,由法爾故,無明本覺亦復如是。大龍王者,喩一心法。
風者,喩無明住地。從尾末出者,顯示此法下劣形相。水者,喩本覺眞心。從頭頂出者,顯示此法勝妙形相。
彼水大中,亦有風大者,喩自性淸淨本覺心中,有根本無明。彼風大中,亦有水大者,喩根本無明藏中,
有本覺佛性。此論本意異相爲初,同相爲後。隨釋應觀。諸佛無盡藏契經中,
作如是說:煩惱大海中,有圓滿如來,宣說實相常住之理,本覺實性中,有無明衆生,起無量無邊煩惱之波。
如是大事,佛、菩薩境界,非凡夫、二乘之所能知故。已說本有性智淸淨門,次說業用自在無㝵門。謂此門中,本有性智,以爲所依起。應化用爲一切修行者,顯示種種勝妙色相,爲眼根作境界;出現種種勝妙音聲,
爲耳根作境界;發起種種勝妙芬香,爲鼻根作境界;出現種種勝妙法味,爲舌根作境界;發起種種勝妙三昧,
觸爲身根作境界;出現種種甚深法藏,爲意根作境界。如其次第,光明日月寶德如來、音聲梵響淸淨如來、
香積芬流圓滿如來、一味無雜平等如來、覺觸分明顯相如來、智慧明達遍滿如來,具足成就,隨時,隨處,
隨機,根量教化利益無㝵自在,不動一念,遍三世中,不分一身,滿十方中,而能作佛事故。
如本‘不思議業相者,以依智淨,能作一切勝妙境界,所謂無量功德之相,常無斷絕,隨衆生根,自然相應,
種種而現,得利益故’故。已說廣說隨染本覺門,次說廣說性淨本覺門。本曰:‘復次,覺體相者,有四種大義,
與虛空等。猶如淨鏡。
云何爲四?
一者如實空鏡,
謂遠離一切心境界相,
無法可現非覺照義故;二者因熏習鏡,
謂如實不空,一切世閒境界悉於中現,不出不入,不失不壞,常住一心
以一切法卽眞實性故,又一切染法所不能染,智體不動,
具足無漏熏衆生故;三者法出離鏡,謂不空法出煩惱㝵、智㝵,離和合相,
淳淨明故;四者緣熏習鏡,
謂依法出離故,遍照衆生之心,令修善根隨念示現故。
’ 論曰:卽是廣說性淨本覺分,此四種大義中,各有二義,與彼大義不相捨離。
云何爲二?
一者等空義,
二者同鏡義。如本‘復次,覺體相者,
有四種大義。與虛空等,猶如淨鏡故。’云何名爲如實空鏡,及有二義,其相云何?
頌曰:性淨本覺中 遠離慮知如 遠離妄境實示遠離義空。 鏡摩奢趺娑 擧一示一故。
論曰:性淨本覺之體性中,遠離一切攀緣慮知諸戲論識,
成就一味平等之義故,名爲如遠離一切虛妄境界,種種相分成就,決定眞實之相故,名爲實。
爲欲顯示遠離之義故,名爲空,鏡謂喩名。然此中鏡,卽喩摩奢趺娑珠鏡。非餘種種油摩等鏡以爲譬喩。
何以故?取此摩奢趺娑珠鏡,安置一處珠鏡前中,或蘊種種石,或蘊種種飮食,或蘊種種莊嚴具,
或蘊同類珠鏡,彼珠鏡中,餘像不現,唯同類珠分明顯了故,如實空鏡亦復如是。於此鏡中,
唯同自類淸淨功德安立集成,種種異類諸過患法,皆遠離故。
如本‘云何爲四?一者如實空鏡,遠離一切心境界相,無法可現故。
何故各有二種義,而唯示同鏡義,等空之義不顯示耶?以擧一義,兼示一義故。若如是者,
云何名爲等空之義耶?謂如虛空淸淨無染,四障所不能覆,廣大無邊三世所不能攝,如實空鏡亦復如是。
故非覺照義故者,卽是顯示遠離因緣。謂如彼摩奢趺娑珠鏡中,石等諸像不現前者,石等諸法皆鄙穢故。
此本覺珠鏡中,種種妄法不現前者,一切染法皆悉是無明不覺之相,無照達義故。
云何名爲因熏習鏡及有二義?其相云何?
頌曰:性淨本覺智 三種世閒法 皆悉不捨離爲一覺熏習。 莊嚴法身果 故名因熏習鏡輪多梨花 空容受遍一。
論曰:性淨本覺三世閒中,皆悉不離,熏習彼三而爲一覺,莊嚴一大法身之果。是故名爲因熏習鏡。
云何名爲三種世閒?
一者衆生世閒,
二者器世閒,
三者智正覺世閒。
衆生世閒者,謂異生性界。器世閒者,
謂所依止土。智正覺世閒者,謂佛菩薩,是名爲三。此中鏡者,謂輪多梨花鏡,如取輪多梨花,安置一處,
周集諸物,由此花熏一切諸物,皆悉明淨。又明淨物花中,現前皆悉無餘,一切諸物中,彼花現前,亦復無餘,因熏習鏡亦復如是。熏一切法,爲淸淨覺,令平等故。復次,虛空義者,
卽有二種。云何爲二?
一者容受義,
二者遍一義。容受義者,容受諸色,無障㝵故。遍一義者,種種諸色唯同一種,
大虛空故。’如本‘二者因熏習鏡,謂如實不空。
一切世閒境界悉於中現故。如是本覺從無始來,遠離四種過。自性淸淨常住一心。
云何爲四?
一者遠離不遍之過,三種世閒不出本覺淸淨鏡故。如本‘不出故。
’二者遠離雜亂之過,一切諸法不入本覺淸淨鏡故。如本‘不入故。
’三者遠離過患之過,本覺鏡中,現前諸法無不本覺淨功德故。如本‘不失故。
’四者遠離無常之過本覺鏡中,現前諸法無不常住,無爲智故。如本‘不壞故。’遠離邊過,圓滿中實。
是故說言常住一心。自此已下,顯示因緣,何因緣故,本覺智中種種諸法,如彼本覺,離諸過耶?
種種諸法皆悉無不眞實體故。如本‘以一切法卽眞實性故’故。自此已下,作緣決疑。
謂有衆生作如是疑#三世閒中,衆生世閒無明染法具足圓滿,流轉遷動,無休息時。如是世閒現本覺者,
不可得言本覺淸淨遠離諸過。以此義故,今通而言。又一切染法所不能染,般若實智其體不動,自性淸淨,
具足無漏,常恒熏習衆生世閒,令淸淨故。如本‘又一切染法所不能染,智體不動具足無漏熏衆生故’故。
云何名爲法出離鏡及有二義?其相云何?頌曰:如實不空法 出離三過失 圓滿三種德故名法出離。
鏡銷鍊頗梨 空出離色義。論曰:無漏性德出離三過,圓滿三德,名法出離。
云何名爲三種過失。
一者無明染品名煩惱㝵,
二者根本無明名爲智㝵,
三者俱合轉相名戲論識。
是名爲三。如是三過,究竟離故,名爲出離。如本‘三者法出離鏡,
謂不空法出煩惱㝵、智㝵,離和合相故
。’云何名爲三種功德?
一者淳成就功德,
二者淨成就功德,
三者明成就功德。是名爲三。
如本‘淳淨明故’故。出離何過,圓滿何德?謂出離煩惱㝵,圓滿淨成就功德,
出離智㝵,圓滿明成就功德,出離和合轉相,圓滿淳成就功德。何以故?相對法爾故。此中鏡者,謂頗梨珠,
譬如頗梨珠淪深泥中,卽便涌出,離彼泥外,騰一丈量。若置濁水中,驅渾成塵累,唯止淸水,安住其中,
若置福多伽林中,出現香氣,㝵彼穢香,遠去而住,法出離鏡亦復爾故。此中喩詮者,喩自體淨義,住思應觀。等空義者,出離色義。謂如虛空,遠離大種,一向淸淨,法出離鏡亦復爾故。
云何名爲緣熏習鏡及有二義?其相云何?
頌曰:於無量無邊 諸衆生緣中 出無量無邊殊勝應化身。
熏習衆生心 出生諸善根增長兩輪花 莊嚴法身果。
故名緣熏習鏡碧中頗梨 空隨順成義 如法應觀察。
論曰:譬如取頗梨珠,安置一處,周帀積集種種色珠,
彼頗梨珠隨向珠色現前,轉變,緣熏習鏡亦復爾故。又譬如虛空,有自在力故,於一切所作之事中,
隨順成立緣熏習鏡,亦復如是。於一切衆生修行之事中,隨應建立故。如本‘四者緣熏習鏡,
謂依法出離故。遍照衆生之心,令修善根,隨念示現故’故。如是四種本覺大義,
遍一切衆生界
一切二乘界、
一切菩薩界、
一切如來界中,
無不住處,
無不照處,
無不通處,
無不至處,
具足圓滿,
具足圓滿。
釋摩訶衍論卷第三丁未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㓮造
『석마하연론』 3권(ABC, K1397 v37, p.1014b01-1024c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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