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춤추게 한 것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밝고 선한 기운이 얼굴에 드러나 보여요.”
뜬금없는 칭찬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내게 말을 건넨 사람은 수영장 안을 감독하는 여성 안전관리원이었다. 수영을 끝내고 물에서 막 나왔을 때였다. 수영복 차림이라 부끄럽고 민망해서 그냥 한번 웃어주고는 얼른 몸을 사려 샤워장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분은 어쩌다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 나누는 사이다. 새벽녘 수영장에 나가보면 항상 청소를 돕고 물놀이 안전 기구들을 정리하며 바지런하게 돌아다닌다. 평소에 일 매무새가 매우 야무진 분이라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말을 걸거나 별도 부탁할 일은 없었다. 책무가 수영장 안에서 혹시 있을 수 있는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일이라서, 매일 아침에 나와 수영하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았을지는 모를 일이다.
듣고 보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샤워장 한 편의 따뜻한 욕조에 몸을 녹이면서도, 아니 차를 몰고 집에 오는 내내 마음이 들뜨고 미소가 절로 나왔다. 집에 와서는 얼른 거울을 당겨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얼굴 어디에 어찌 생겼길래 아침부터 이렇게 기분 좋은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하나 그곳엔 어디서 본듯한 어느 노인 하나가 있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화가 진행되는 그저 그런 얼굴이었다. 윤기가 반짝였던 이마엔 어느새 깊게 주름이 패어 있었고, 팽팽했던 볼살도 홀쭉 해져 있었다. 귀 옆엔 거뭇거뭇 기미가 서려 앉고 턱선에 까만 점까지 볼썽사납게 자리 잡혀있다. 도대체 어느 구석에 밝고 선한 인상이 있는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수영장 안에 시설된 서치라이트 조명에 언뜻 그렇게 비쳐 보인 건 아닐까?
사람들은 각박한 세상살이에서도 서로 덕담도 하고 칭찬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나 역시 살아온 날들이 제법 되다 보니 어쩌다 기분 좋은 말을 듣기도 하고, 또한 나도 남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 그저 흘려듣지만 그래도 그중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칭찬 하나가 있다.
처음 직장을 얻고 일할 때였다. 한동안 같은 사무실에서 함께 근무하던 촌수로는 따질 수 없는 종친 어른 한 분이 계셨다. 곧 정년을 앞둔 선임 선배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분의 권유로 참석한 회식이 있었는데, 참석자들은 다른 부서의 인사도 많았고 대부분 연세나 직급들이 높은 분들이었다. 낮 가림이 심한 나에겐 조금 어려운 자리였다.
서먹한 분위기를 좀 살리려고 했는지 좌중에서 갑자기 나를 부르시더니 이 사람은 “정월 초하루에 먹은 마음 섣달그믐까지 가는 사람이다”라며 소개말을 해 주시었다. 조금 엉뚱한 칭찬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당시에는 어색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어느 면에서 그렇게 보셨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어릴 적 시골 아낙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촌스러운 덕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꽂혀왔다.
“정월 초하루에서 섣달그믐까지”라 함은 단순 일 년 365일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 안에는 춘하추동 운기에 따라 만물의 생장소멸(生長消滅)이 이루어진다. 즉 세상에 태어나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긴 여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생각해 보니 칭찬이라기보다는 평생토록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라는 교훈 같은 말씀이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다. 사회활동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공부할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넓은 세상 나 홀로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한때 방황하기도 했고, 부담감에 이를 악물기도 했다. 다행히 부모님으로부터 두툼한 떡잎은 얻었지만 가지를 뻗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일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홀몸으로 애써 키워주신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고 싶었다.
나름대로 이웃과의 인연을 소중히 했다. 만날 때의 첫인상보다 헤어질 때 아쉽고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잠깐의 단물보다는 신의를 지키고 거짓 없이 떳떳하게 사는 것만이 힘없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덕목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다짐들이 잘 지켜졌는지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주변엔 항상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도움이 될망정 힘들게 하거나 다치게 하는 이는 적었다.
나의 인상이 다른 사람에 선 하게 보였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은 없겠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지나온 날들이 모범 된 삶이 되지는 못했지만, 남은 생애만큼은 좋은 사람들 속에서 밝은 얼굴로 살아가고 싶다. 착한 환경은 착한 사람을 만든다. 지금까지 나를 춤추게 한 것들은 이처럼 격려하고 붙잡아 주신 분들의 칭찬 덕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끝)
첫댓글 선생님.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지는 여전히 고우세요 ㅎㅎ 그리고 보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