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호라오)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마카리오스, 복들이 있다) 하시니라(요 20:29).”
(레게이 아우토 호 예수스 호티 헤오라카스 메, 도마, 페피스튜카스 마카리오이 호이 메-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 크나큰 오역이다.
“그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도마야 나를 호라오(보다) 하고 믿는구나, 나를 에이돈(보다) 아니하고 믿는 자들은 복들(마카리오스)이 있다.”
본문에서 ‘보다’라는 단어가 ‘호라오’와 ‘에이돈’으로 각기 다른 두 단어로 나온다.
1) ‘호라오’는 보다, 깨달음의 눈으로(속사람의 눈) 보는 것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2인칭으로 ‘헤오라카스’다.
2) ‘에이돈’은 보다, 육신(세상)의 눈(자기 믿음)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동사,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으로 ‘이돈테스’다.
‘보다’로 번역한 두 단어가 각기 다른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그 뜻을 구별하지 못하고 같은 뜻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다.
이 문장은 의문사가 아니라 감탄문이다. 예수께서 휘장 곧 육신(몸과 마음)으로부터 벗어난 또는 깨어난 도마를 칭찬하는 내용이다. 에고의 눈, 세상의 눈, 육체의 눈, 지식의 눈, 경험의 눈, 도덕의 눈, 자기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에이돈)으로부터 벗어난 자는 복들(마카리오스)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미 도마는 육체의 눈(겉 사람)으로 보는(에이돈) 마음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눈(속사람 :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 안에서 보고(호라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반드시 겉 사람을 통해서 보는(에이돈) 눈을 제거하고 깨달음의 눈으로 보고(호라오) 듣고 만지는 체험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도마는 변하는 눈과 손(에이돈)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깨달음의 눈과 손을 자신 안에서 찾은 것이다. 이것이 ‘호라오’다.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만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칭찬을 하신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바로 이 길이다. 깨달음은 유대인이나 그리심산(축복의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애굽에서 떠나 가나안 땅(에레츠) 안에 도달해야 한다.
내면에서 나오는 깨달음은 이 세상(몸과 마음)과 완전히 거꾸로 가는 마음이 청정해지는 길이다. 그래야 이미 와 있는 생명의 법으로 자신 안에서 하나 되어 보고 만질 수(호라오) 있게 된다.
그 생명의 그 빛(근본)!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