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럽다
瓦也 정유순
날씨가 칙칙하며 분위기가 쓸쓸하고 스산할 때 우리는 ‘을씨년스럽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어원은 1905년 이후부터 쓰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스럽다’가 변한 말로 여기서 을사년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조선과 한일협상조약을 맺은 1905년을 말한다. 을사년에 체결되었다고 하여 이 조약을 보통 을사조약(乙巳條約)이라고 하는데, 일본이 조약의 기본요건도 무시한 채 강제로 맺었기 때문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한다.
<을씨년스러운 김포 조강저수지>
올해 2025년이 을사년이다. 지금부터 120년 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떄 사람들은 온통 침통하고 참담한 분위기에 빠졌고 아주 치욕적이고 슬픈 일이었기 때문에 그때 이후로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느낌이 들 때면 을사년의 기분 같다고 하여 ‘을사년스럽다’고 하게 되었다. 실제로 1908년에 나온 <빈상설>이라는 소설에 ‘을사년시럽다’는 표현이 처음 나온다.
<한강하류의 철책선>
이해조(李海朝)의 신소설 <빈상설(鬢上雪)>은 개화기 축첩 제도의 악폐와 그에 따르는 악랄한 불법적 행위를 비판, 규탄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일종의 교훈 소설이면서, 결국에는 주인공(정길)이 외국 유학길에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 신교육의 필요성을 부르짖던 시대적 흐름에 동조하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계급타파 의식이나 신결혼관, 신교육관 등의 개화 의지가 표출되어 있어 새로운 시대 의식을 보여주는 신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 빈상설 표지 - 네이버 위키백과>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 대한제국(이하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對韓政策)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1904년 8월 22일에는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덕수궁 중화전>
<한일협약도 만평 - 네이버 위키백과>
그사이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국제관계를 주시하며 한국을 보호 국가로 삼으려는 마수(魔手)를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러자면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열강의 묵인이 필요하였으므로 일본은 열강의 승인을 받는 데 총력을 집중하였다.
<구 러시아 공사관>
먼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을 맺으며 양해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가쓰라와 태프트 - 네이버 위키백과>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 한다는 설이 유포되어 우리 조야(朝野)가 경계하고 있는 가운데, 1905년 10월 포츠머스회담의 일본 대표이며 외무대신인 고무라[小村壽太郎],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郎] 등이 보호조약을 체결할 모의를 하고, 11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을 한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하야시곤스케 - 네이버 위키백과>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拜謁)하고 “짐(朕)이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본 왕의 친서를 보여주며 일차 위협을 가하였다. 이어서 15일에 고종을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들이밀었는데,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서 조정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토 히로부미 - 네이버 위키백과>
1905년 11월 17일에는 일본 공사가 한국 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하였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게 되었다. 이날 궁궐 주위 및 시내의 요소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선 가운데 쉴 새 없이 시내를 시위행진하고 본회의장인 궁궐 안에까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이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어전회의에서는 일본 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을사늑약협상장소 - 덕수궁중명전>
이에 이토가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을 배알하고 정부 대신들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 공사가 이토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憲兵)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贊否)를 물었다.
<을사늑약협상장면>
이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이때 권중현 등 여러 명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이토는 ‘침묵은 묵시적 동의’라며 찬성을 강요했다.
<을사늑약협상장면>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 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을사오적- 네이버 위키백과>
이 조약은 모두 5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의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내정(內政)을 장악하는 데 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개항장과 13개의 주요 도시에 이사청(理事廳)이, 11개의 도시에 지청(支廳)이 설치되어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일본통감 관저와 하야시곤스케 동상 사진>
<거꾸로 박힌 하야시 곤스케 동상>
또한 이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우리 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의 주한 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조약체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권과 병력 동원권, 시정 감독권 등을 보유한 최고 권력 기관으로 우리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는 권한을 가진다.
<통감관저터>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 투쟁도 각지에서 활발히 벌어졌다. 주영대리공사 이한응(李漢應)은 제1차 한일협약 이후 강대국들이 일제의 이익을 대변하며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데 항의하다가 자결하여 애국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후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이상철(李相哲), 김봉학(金奉學), 등은 조약체결에 죽음으로 항거하였으며, 민종식(閔宗植), 최익현(崔益鉉), 신돌석(申乭石), 유인석(柳麟錫) 등은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충정공 민영환>
고종은 을사늑약이 강압에 의한 무효임을 알리고자, 1907년 6월 15일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압력을 호소하기 위해 이상설(李相卨)과 이준(李寯) 이위종(李瑋鍾), 등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언론사와 기자회견만 하고 말았다. 결국 이준은 헤이그에서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악랄하게도 일본 통감부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준(李寯) 열사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준 열사>
위의 모든 것들이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걸 잊고 있다. 일본이 힘을 갖게 만든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까맣게 잊고 있다. 주영 대리공사 이한응 열사를 자살하게 만든 <제2 영일동맹>을 잊고 있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탄, 우리 고대사와 민족정기를 말살한 일제강점기를 모두 잊어버린 것 같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데…, 정말 을씨년스럽다.
<통감관저 터에 조성된 기억의 터>
# 별첨 : 을사조약
일본국 정부(日本國政府)와 한국 정부(韓國政府)는 두 제국(帝國)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주의(利害共通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실지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이 목적으로 아래에 열거한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東京)에 있는 외무성(外務省)을 통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監理指揮)할 수 있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領事)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京城)에 주재하면서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궁중에 알현하는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 정부는 또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理事官)을 두는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밑에 종래의 재한국일본영사(在韓國日本領事)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職權)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 사무를 장리(掌理)할 수 있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의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 정부에서 상당(相當)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記名) 조인(調印)한다.
광무(光武)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
메이지(明治)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환구단 황궁우>
https://blog.naver.com/waya555/223729245295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역사를알아야 의식있는 국민이됩니다.
고맙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겪어보진 않았지만 부모님께 자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바로 자금이며 미래입니다.
저는 일본으로 유학 등등 11년을 살다가 한국에 왔고 지금도 여행업에 있어서 일본 통역 번역 기관 방문 스루가이드까지 하느라고 일본 출장을 많이 다닙니다다 그래서 더 문화나 역사공부를 할수밖에 없는데 자꾸 역사에 등장시기 인물들 자꾸 기억이 희미해지고 잊어버려져요~~
그런데 올해 을사년이고 이런 아픈 역사와 슬픔에 녹아나는 언어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은 늘 의아해 했는데 정말 좋은 유익한 이야기 좋은 정보 다시 상기 시켜주어서 고맙습니다~~^^ 미래를 향하여 홧팅 폴짝~~~~~^^^
고맙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울 수 없는 과거 역사 때문에
먼 나라가 되어서 안타까워요.
서로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하며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와야님!!
역사에 해박한 지식과 논리에 놀란 마루아 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