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은 이렇게 하는 것, 흥국생명배구단의 감독경질을 보며 배운다...
[감독 두 번 죽이는 '흥국생명 여자배구']... 어제(12.13) 아침 신문에 난 별로 크지 않은 기사제목이다. 기사내용을 보니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이 1년도 안 돼 감독을 2번씩이나 교체했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취미삼아 이뤄진 것이라 하니 참... 그렇다. 실력으로 말하는 프로세계의 냉정한 현실이거니, 아니면 팀을 맡은 지 오래됐거나 본인이 오래된 구닥다리거나 해서 후진양성 차원에서 사임했거니 했는데(사실 우리나라는 왜 고따위 논거를 많이 대잖는가?) 자세히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우선 팀을 맡은 지 오래됐느냐 하고 따져 봤더니 오래되기는커녕 취임한지 8개월만에 경질됐다고 한다. 나이가 많으냐 하면 올해로 52세니 적은 나이도 아니지만 명예퇴진할 나이도 아닌 듯했다. 취임한 지 오래된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면 그럼 뭐야? 그럴 때 답은 하나겠지. 실적부진인가 보다 해서 다시 찬찬히 기사를 읽어봤는데 이건 점점 미궁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다. 이번에 경질된 김철용 감독은 지난 3월 팀을 새로 맡은 뒤에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통합우승을 안겼다고 한다. 흥국생명에 오기 전에는 LG정유(현 GS 칼텍스)를 실업리그(슈퍼리그) 9연패로 이끌었던 명감독이었으니 분명 스카웃돼서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 취임한 감독이 김 감독보다 훨씬 뛰어났는가 해서 확인해봤더니 어랍쇼. 새로 부임한 사람은 전임 흥국생명 감독일세 그려. 김철용 감독이 선임되기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개월전인 지난 2월 초 해임한 황현주(40) 감독을 다시 영입한 것이다. 하긴 황 감독도 김 감독만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실력 하나는 있는 것 같아 보이긴 하다. 지난 2월 짤리기 전 흥국생명을 정규리그 1위로 끌고 가던 감독이니 말이다.
그리고 인사에는 시점이라는 것도 있는 건데 교체 시점도 참 이상하다. 지금 V-리그 개막이 2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상을 줘도 시원찮을 감독을 자른 것도 그렇고, 10여개월전 그때도 잘나갔던 감독을 자른 것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흥국생명의 인사라는 게 참으로 요상타. 지난 2월 팀이 정규리그 1위를 달리는 가운데 느닷없이 황 감독을 경질할 때 구단측의 설명은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위해 노련한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구단으로부터 수석코치직을 제안받은 황 감독은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거부한 뒤 여자대표팀 코치로 일해 왔다.
우승팀 감독이 다음 시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해임된 사건 역시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흥국생명에서 처음 일어났다. 구단은 일부 선수의 훈련거부, 감독과 선수간 종교적 갈등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고 말했지만 흥국생명은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신임 감독 물색에도 애를 먹었다. 그렇게 되면 ‘구관이 명관’이란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테지만 불과 10개월 전 ‘경험 부족’을 이유로 내쳤던 황 감독을 “헝클어진 팀 분위기를 다잡을 적임자”라며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금의환향은 아니겠지만 10개월전의 불명예를 씻을 기회를 잡았으니 황 감독 개인적으로야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마는 이렇게 다시 부를 감독을 ‘싹둑’ 잘랐던 흥국생명 구단 관계자들의 기행에 대해서는 대비해 두는 게 좋을 듯하다. 혹시 이번 시즌에도 황 감독이 팀을 1위로 올려놓더라도 우승 경험이 없으니 경험있는 감독이 필요하다며 또 자르고 김 감독으로 바꾸지 말라는 법이 어딨는가?
이를 지켜본 한 프로배구팀 감독은 “우승팀 감독을 뚜렷한 이유없이 계속 바꾸는 건 웃기는 일... 실망한 팬들이 배구까지 외면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몇 개월 사이에 감독 해임과 선임을 반복하면서 선수들까지 당사자로 끌어들여 이에 연루된 선후배 감독 간에, 그리고 감독과 선수들 간에 불신과 냉소를 뿌린 흥국생명의 처사는 단순한 ‘인사횡포’라기 보다는 저질스런 인사권의 남용이며, 스포츠 정신을 망각한 치졸한 작태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유없이 짤린 김 감독은 어떤 기분일까? 물론 이유없이 잘린 것은 아니라는게 흥국생명측의 주장이다. 한국배구연맹(KOVO)컵 직전인 지난 9월13일 선수 10명이 구단 고위층을 찾아가 김철용 감독 밑에서 더 이상 훈련할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고 철저한 조사를 거쳐 선수단 관리 소홀 등의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통상 프로스포츠계에서 중도 퇴임하는 감독에게 주는 잔여기간 연봉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 감독의 주장은 다르다. 사실상 표적조사라는 것이다. "구단이 나를 경질하기 위해 표적조사를 통해 불성실한 감독으로 몰고 갔다. 선수들에게 종교적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구단이 감독에게 권한을 주지 않고 책임만 떠밀었다"고 억울함을 나타내면서 소송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이제 누가 옳은지는 법원이 가려줄 것이고 그때까지 진실은 알 길이 없겠지만 아마도 흥국생명의 그 화려한 구조조정술이 발휘된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떨칠 수가 없다.
흥국생명의 모기업인 태광그룹은 IMF전 롯데그룹에 버금가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으며(지금도 현금보유는 남못지 않다고 함), 이른바 황제주로 칭해진 때가 있었다. 그러나 IMF이후 어찌나 구조조정을 잘했던지 계열사마다 인원을 절반씩 뚝뚝 잘라내면서도 아무런 여론이나 노조의 저항을 받지 않은 능력을 발휘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흥국생명 역시 당시 3천여명이던 직원이 4백여명으로 80%이상 줄여냄으로써 10여년간 사업비로 순이익을 내고 있는 회사가 아니던가? 지점장이 어느날 갑자기 설계사로 강등된 채 지점장을 맡는 기현상까지 보이는 그 구조조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했는데...하긴 그 댓가로 생명보험업계 4~5위던 회사는 10위밖으로 쪼그라들었다고 하긴 하더라만.
그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태광그룹의 한 섬유회사에서 구조조정 당한 퇴직자들이 흥국생명 본사 앞에서 데모하는 걸 보고 “태광그룹 본사도 아닌데 왜 거기서 그러느냐?”고 했더니 “여기는 서울 한복판이라 잘 알려지고, 구사대 횡포도 적다”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여기서도 맞지 않느냐?”고 재차 물었을 때, “그래도 여기서는 때리기는 해도 덜 아프고, 그게 미안한지 가끔 술이라도 한잔 사주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리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일화를 생각하면서 이번 감독 해임 사태를 반추해보건대 그게 감독이 잘릴 정도의 횡포였는지 선수들의 이유없는 반항 내지는 누군가의 사주는 아니었는지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다. 새로 복귀한 감독이 그렇게 또 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그래서 드는 것이다. 아무리 구조조정의 귀재라 한들 제조업과 서비스업, 그리고 프로 스포츠업의 구조조정에는 나름대로의 서로 다른 격이 있음을 혹여 흥국생명이나 태광그룹이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관련 당사자들 역시 흥국생명의 그 화려한 기술에 대해서 잘 모르지는 않는지 궁금하고 또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