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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족한 사람이 여기 갈멜산 기도원에 와서 신학생 훈련원에 오신 신학생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반갑고 기쁘게 생각하며 앞으로 두 시간 동안 하나님의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은혜로 피차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귀중한 시간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 자신에 대한 간증과 함께 경건과 거룩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저 자신에 대한 간증과 함께 경건과 거룩이라는 주제로 강의 또는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나의 삶과 사역”이라는 제목과 “여생의 소원과 기도” 라는 제목으로 으로 저에 대한 간증을 하고 그 다음 “회개와 성결” 이라는 제목과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신부” 라는 제목으로 경건과 거룩에 대한 강의 똔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나의 삶과 사역” 인천 예순교회(2016.12.20 오전 11시)
고전15:10
부족한 사람이 오늘 2015년 12월 20일 주일 여기 인천 예순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박남일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박남일 목사님은 지난 달인 11월 9일 경북 상주에서 모인 목회자 선교협의회 모임에서 만났는데 저 보고 오늘 예순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오늘 여기 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으니까 “나의 삶과 사역” 이라는 제목으로 저에 삶과 사역에 대한 간증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오늘 “나의 삶과 사역” 이라는 제목으로 간증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살아온 지난 날들을 되돌아 볼 때 저는 사도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물론 저는 사도 바울처럼 수고를 많이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5,16). 물론 저는 아무에게도 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저의 고백으로 삼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죄가 많은 저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셨습니다. 사실 어거스틴이 고백한 대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비관주의자가 되어 절망할 수 밖에 없지만, 하늘과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서 소망과 기쁨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나의 삶과 사역” 이라는 제목으로 저에 삶에 대한 간증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째로, 저는 어릴 때부터 순교자들의 피와 생명을 체 받으며 살았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안주와 신의주와 평양에서 보내면서 일제와 공산치하에서 핍박을 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린 신앙의 선배님들이 물려 준 영적인 유산을 몸으로 체 받으며 살았습니다. 신의주는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님들이 일제 하에서 핍박을 받은 곳이었고, 평양은 최봉석, 주기철, 김화식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님들이 일제와 공산치하에서 핍박을 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신의주 제이교회에서9년 동안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목회 사역을 했고 후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2년 동안 목회 사역을 했는데 신의주와 평양에 계실 때 자주 감옥에 붙잡혀 가서 감옥생활을 하셨습니다. 저는 10살 11살 때 평양 서문박교회에 다녔는데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로부터 “주일성수의 신앙”과 “새벽기도의 신앙”과 “순교의 신앙”을 배우며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의 신앙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평양 제오 인민학교에 다닐 때 주일날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교회에 간다고 2년 동안 매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고 때로는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을 굽히지 않고 감옥에 자주 가시는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양 사동 탄광에서 복역 중이신 아버지를 찾아 갔습니다. “주일성수”와 “예배”의 자유를 찾아 서울로 가서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만 11살 되던 해인 1948년 8월 사랑하는 어머니와 세 동생들과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북에 두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38선을 넘던 날 밤 우리 일행은 경비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위협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지 않고 혼자서 온 힘을 다해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을 넘고 파 밭을 달리고 강을 건너면서 40 여분 동안 달려서 남쪽 땅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도 느꼈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초가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청년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저를 기차에 태워서 서울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주소 하나를 가지고 서울에 왔는데 서울에 사시던 이모님을 만나게 되어 이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고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밤에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지만 영락교회에 다니며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들어가기를 원하는 서울 중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도 했습니다. 저는 적극적이고 모험적이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소년으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순교자들의 피와 부모님의 순수한 믿음과 희생적인 사랑으로 되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저는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시절 신앙의 선배님들로부터 “회개”의 신앙과 “은혜사모”의 신앙을 전수 받았습니다.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저는 부산에까지 피난 갔다가 다시 대구로 올라와서 3년 동안 그곳에서 중학교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했고 “새벽기도”를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이성봉 목사님께서 석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빠지는 일이 없이 모조리 좇아 다니며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집회 때마다 재미있고 은혜로운 말씀을 전했고 특히 “회개”의 메시지와 “은혜사모”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하셨는데 저는 그 말씀들을 헐떡거리며 받아먹곤 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회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요 주님의 소원이며 뜻이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고 복음의 대지이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 “물 고기가 혹 물을 떠나서 사는 법이 있어도 신자들이 은혜 떠나서 사는 법이 없다.” 저는 “회개”와 “은혜사모”의 신앙이 너무너무 귀중한 신앙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둘째이고 신앙생활이 첫째였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기도를 받곤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께서 나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 나의 기도 제목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저를 알아보시고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묻지도 않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를 해 주시곤 했습니다. 아마 3년 동안에 안수기도를 10번 이상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기도 때문에 제가 평생토록 목사의 일을 하게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합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대구 어떤 교회에서 잘비스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통역을 하셨습니다. 어느 시간에 잘비스 목사님이 죄와 허물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죄와 허물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회개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제가 무슨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회개했는지 기억이 되지는 않지만 제가 앞으로 나가서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회개를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은혜사모”의 신앙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삼 년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고등학교에 다니면서 3년 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그 다음 서울대학교에 다니면서 4년 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교회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던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기도회 시간은 물론 설교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고 그리고 “은혜사모”와 “전도”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는데 그 메시지들이 저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재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회개”하고 “은혜를 사모”하면서 “새벽기도”를 빠지는 일이 없었고 새벽기도 후에는 남산 어느 숲으로 올라가서 30여분 이상 더 기도하고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연초마다 3 일 동안 하는 금식기도에 빠지는 일도 없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서울의 삼각산과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회개”와 “은혜사모”의 메시지와 함께 “전도”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했습니다. 2만 8천 여 동네에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즉 2만 8천 여 동네마다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갔습니다. 왕십리 들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 토요일과 주일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서울고등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들판에서 예배 드리기가 불편해서 근처에 있는 학교의 교실 두세 개를 빌려서 학생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막을 구해다가 천막을 치고 천막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한양제일교회」라는 간판을 달았습니다. 저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서울대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전도”와 “목회”를 계속했습니다. 아이들 60여명과 어른들 40여명이 모였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시작한 초라한 개척교회였지만 어떤 교인들은 “우리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감동과 도전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과 같은 귀한 분들의 가르침과 기도와 사랑으로 되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대학생 시절 신앙의 친구들과 함께 “새 생활운동”을 일으킨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대학에 진학할 때 세 분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명신홍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가기 전에 대학교에 가서 무엇을 전공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역사학이나 영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결국 저는 한경직 목사님의 조언을 따라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릅니다. 4년간의 역사공부는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었고 저의 안목을 넓혀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문리대에서 공부할 떼 전공은 다르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손봉호 김상복 이형기 이명섭 친구들을 만나서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 문리대 안에서 “새 생활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1960년 4. 19가 일어나던 때 한국의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쌓여 있었습니다. 4. 19 직후 서울 문리대 교정 안에 한 편에서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국민 계몽운동” 발대가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5, 6명의 기독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새 생활운동"이 태동되고 있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이 시대에 우리 신앙의 친구들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몇몇 친구들이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서 진지하게 논의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합의한 결론은 “새 생활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부조리한 실태를 조사한 뒤 문리대 소 강당에서 그것을 발표한다고 공고했습니다. 소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에게 밀수로 수입되는 커피와 양담배의 일년 분 밀수 액이 대전시 인구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 값과 같다는 조사 내용을 발표하자 학생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문리대 학생 수백 명이 방학이 시작되던 6월부터 거의 한달 동안 매일 새벽부터 함께 모여 밤늦게까지 다방과 공원과 시장과 극장과 댄스 홀과 요정과 국회 등을 찾아 다니며 “새 생활운동"을 펴 나아가자고 호소했습니다. “새 생활운동”은 사회 변혁을 내 세웠지만 근본적으로는 윤리운동이요 신앙운동이었습니다. “새 생활운동”이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되었고 나중에는 장 면 정부의 “신 생활운동”으로, 박정희 정부의 “새 마을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젊은 시절 신앙의 친구들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신앙의 친구들과 함께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이 평생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의 친구들과의 교제와 협력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넷째로, 저는 신학과 역사신학을 공부하면서 역사적 안목과 양면성 그리고 삶의 지혜를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저는 당시 용산에 소재한 총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교수진은 박형룡, 명신홍, 한철하, 최의원, 오병세 등의 교수님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저는 특히 한철하 박사님으로부터 학문적 도전과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총회신학교에서 세 학기 공부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의 훼이스 신학교로 유학하여 신학수업을 계속했습니다. 무턱대고 돈 백 불을 가지고 미국군함을 타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넉넉하게 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훼이스 신학교에서의 유학생활은 넉넉하고 즐거운 시절이었습니다. 1964년 훼이스 신학교를 졸업한 후(B.D. 학위 취득)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석사과정에서 교회사를 전공했습니다(Th. M. 학위 취득).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신의 도성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역사이론」이었는데 이는 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전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 신학원에 입학하여 석사과정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했는데 한 해 동안의 수학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습니다(S.T.M. 학위 취득). 역사신학 교수 자로슬라브 펠리칸 박사의 강의는 명 강의 중의 명 강의였고 그 분은 제가 만난 교수들 중의 교수요 학자들 중의 학자였습니다. 펠리칸 교수의 지도를 받아 쓴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교부들에 나타난 이사야서의 메시야적 해석」이었습니다. 예일대학에서 수업하던 시절 교회사의 대가인 라토렛 교수님과 베인톤 교수님과 친분을 갖게 된 것은 너무너무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 중 여름 방학에는 물론 학기 중간에도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훼이스 신학교에서는 건물 청소, 식당 웨이터 일, 인쇄소 일 및 건물 페인트 하는 일을 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시절에는 화장실 청소, 식당 웨이터 일, 화학 도금 공장 일, 정원 가꾸기 일, 주택 페인트 일,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판매 일 및 접시 닦기와 백화점에서 판매원 일등을 했습니다. 예일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주로 학교 도서관 일을 했고, 아이오와에서 공부할 때는 주로 주택 페인트 하는 일을 했습니다. 요사이는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공부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일하던 일들 중 주택 페인트 하는 일과 정원 가꾸는 일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열 아래서 이층 또는 삼층 주택 벽의 낡은 부분들을 베껴 내고 보수한 후 그곳을 깨끗하게 페인트 하는 일과 넓은 정원의 풀을 깎고 흐트러진 화단을 깨끗하게 새로 단장하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하다 말고 풀밭에 들어 눕곤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낡은 집이 새 집으로, 흐트러진 정원이 단정한 정원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바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일대학 신학원에서 석사학위(S.T.M.)를 취득하고 졸업할 때 에드워드 흄 휄로우십을 받았는데 그 상금의 대부분을 총신대학에 손양원 목사님 기념 장학금으로 일부를 한국의 개척교회 후원금으로 보냈습니다. 몇몇 학교 박사 과정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는데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 입학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장학금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해당되기 어렵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그만 헌 자동차에 짐을 모두 싸 가지고 무조건 아이오와시로 달려갔습니다. 종교학과 주임 포렐 교수님을 만난 다음 "장학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나에게 해당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달려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포렐 박사님이 저를 한참 쳐다보시다가 그러면 할 수 없이 그 장학금을 나에게 줄 수 밖에 없다고 해서 저는 그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포렐 교수님은 제가 살 수 있는 숙소까지 마련해주셨고 나중에는 저를 조교로 써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무작정 모험적으로 막가파로 돌진해 나가므로 저의 일생을 헤쳐 나가곤 했습니다.
저는 아이오와 시에 있는 동안 광활한 옥수수 밭과 연못들로 이어진 자연을 즐길 수 있었고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인 학생 가정들과의 교제를 증진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오와 시에는 아이오와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인 교수와 공부하는 한인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 30여명이 살고 있었는데 한인들 사이에 별다른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인들이 만나는 장을 마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운동회, 야유회, 회식 등을 마련했고 "아이오와 소식지"를 만들어 한인들간의 경조사를 알리며 교제를 증진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한인회가 만들어 졌고 수년 후에는 한인교회까지 만들어 졌습니다. 저는 한인들뿐 아니고 외국 학생들과의 교제를 증진하는 일도 도모했는데 많은 즐거움과 성과가 있었습니다. 인생은 만 남이고 나눔과 기쁨인 것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오와 대학에 머물면서 아이오와 대학, 아퀴나스 신학원, 드뷰크 장로교 신학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박사학위 프로그램에 등록을 하고 리써치 위주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매고니글, 포렐, 드러먼드 교수 등의 지도를 받아 완성한 철학박사 학위(Ph. D.) 논문의 제목은 「두 도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훈에 나타난 종말관의 기능」이었습니다. 학위논문에서 제가 취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종교적 욕구(visio Dei)의 성취 가능성의 관점에서 본 현세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인간이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발전해 가는 역사의 한 점을 점유하고 있는 데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두 도성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었습니다. 두 도성은 미래적이면서도 현세 실현적인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종말론적 역사관의 특징은 양면성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양면성은 어거스틴의 두 도성에 대한 개념, 현세관, 교회관 및 국가관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어거스틴의 “역사적 안목”과 "양면성"은 저의 평생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의 선배님들의 가르침과 특히 역사적 안목과 양면성의 진리를 터득함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다섯째로, 저는 귀국 후 “목회사역”과 “교수사역”과 “선교사역”을 시작하면서 “고난”의 의미를 습득하고 “고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12월 학위논문을 완성한 후 1973년 1월 예일대학으로 다시 와서 리써치 펠로우로 한 해를 지냈습니다. 긴장과 억압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마음으로 독서와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바로 그 때 뉴욕을 방문한 조동진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의 선구자인 조동진 목사님과의 만 남은 저의 연구와 사역의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동진 목사님은 제가 유학을 마친 후 후암교회에 교육 목사로 오라는 말씀과 귀국하기 전에 풀러신학교 선교 신학원에 가서 선교학을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저는 본래 남의 말을 쉽게 잘 듣는 터라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 해 연말 저의 생애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73년 11월 11일 저의 둘째 아이 철원이가 “뇌수종” 이라는 불치의 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3년 12월 말 아내와 함께 3살 된 혜원이와 생후 1개월 된 철원이를 데리고 대륙을 횡단해서 캘리포니아 파사데나 풀러 신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여행 도중 철원이의 병세가 악화되어 시속 140여 마일 속도로 30여 시간을 5분만 쉬고 계속해서 서부 사막지역을 달려서 로스안젤스 췰드런스 호스피탈에 도착했습니다. 입원을 시킨 후 우리는 풀러 신학교 기숙사에 여장을 풀고 1974년 1월부터 풀러 신학교에서의 연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철원이의 이야기를 계속하면 생후 2개월 된 철원이가 뇌 수술을 하기 전 의사가 전해 주는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수술 후 철원이가 장애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철원이가 장애아가 된다면 내가 철원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저는 그렇다고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의 깊은 고민과 기도 끝에 저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철원이가 내 아들이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저의 사고의 변화는 사람들을 보는 저의 시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본래 착하고 아름답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을 좋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덜 착하고 덜 아름답고 덜 신앙이 좋은 사람들도 꼭 같이 사랑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 "너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느냐?" 라는 준엄한 책망이 들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목회 사역과 교수 사역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조동진 목사님의 권면으로 1974년 1월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 가서 리써치 어쏘우시에이트로 8개월을 지내며 선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풀러 선교신학원에서의 선교학 수업은 저의 학문연구와 사역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신학과 사역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신학이라는 학문을 인간의 삶의 처지 즉 목회 및 선교 현장과 연결시키며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철원이의 삶과 죽음은 저의 목회와 선교 사역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거름의 역할을 했습니다. 만 1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74년 10월에 귀국하여 후암교회의 교육목사와 총신대학의 강사 그리고 조교수의 사역을 시작했고 조동진 목사님과 함께 선교 사역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저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특히 불치의 암 환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위로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목회 및 선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함께 철원이의 삶과 죽음을 통한 “고난”의 의미를 터득함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결국 “보석”이 된다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여섯째로, 저는 목회 사역과 교수 사역과 선교 사역을 시작하면서 인생이란 만 남과 나눔과 기쁨이란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974년 귀국 후 후암교회와 영안교회와 강변교회에서의 목회 사역과 총신대와 합동신학교에서의 교수 사역을 한 평생 함께 해 왔고 선교학을 가르치며 선교 사역에도 함께 참여해왔습니다. 저는 지난 40 여년 동안 목회 사역과 교수 사역과 선교 사역을 함께 해 오면서 "인생이란 만 남과 나눔과 기쁨"이란 사실을 더욱 더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생 삼도, 인생 오도, 인생 칠도" 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복음 삼도, 신앙 오도, 선교 칠도" 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29년 동안 목회하면서 “교제”와 “봉사”를 목회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교회의 표어를 “서로 돌아보고 기쁨으로 섬기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힘쓴다”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5가지 목표 중의 하나를 “북한 동포를 돕고 선교하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저는 29년 동안 목회하면서 어린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 신자들과의 친밀한 “교제”에 최선을 다했고, 불우한 이웃을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북한 동포를 “돕고” “선교”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순수한 “교제”와 “봉사”에는 순수한 “기쁨”이 따르는 것을 발견하고 체험하게도 되었습니다. 결국 신앙의 선배님들과 순교자들을 바라보면서 “회개”와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신앙을 몸에 지니고 실천하면서 살자고 권면하고 또 권면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로부터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제사라고 생각하면서 2005년 4월 8일 아침 강변교회에서 방지일, 김창인, 강원용, 조용기 목사님 등을 모시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주제를 가지고 회개의 모임을 가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변교회에서 은퇴하기 전 5년 동안 매년 11월 한달 동안 매 주일 방지일, 김창인, 정진경, 이종성, 강원용, 림인식, 김준곤, 조향록, 홍순우 목사님 등 원로 목사님들을 모시고 신앙의 선배님들의 귀중한 말씀들을 들으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의 선배님들의 가르침과 교회 성도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곱째로, 저는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 지도자들과 교제하면서 선교와 연합 사역에도 관여하게 되었는데, 합신 교단 선교부를 만드는 일에 기여했고, 한국 복음주의협의회, 한국 동반자 선교협의회, 한인 세계선교협의회, 한국 세계선교협의회, 소련선교회, 아시아 복음주의협의회, 세계 스포츠선교협의회 등 선교 단체들을 만들고 발전하게 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회개와 십자가 복음으로 연합하고 협력하자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2015년 1월 1일 오후 2시 임직각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 기도회”가 모였는데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교단과 연합기관들의 대표들을 포함해서 2천여 명이 참석해서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렸는데 부족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면서 회개와 간구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 회개와 간구의 고백을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신 것을 이 죄인은 잘 알면서도, 한 평생 민족의 구원은 물론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마음도 몸도 생명도 바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반 화해적이고 반 평화적이고 반 통일적인 아니 반 하나님적인 반역과 위선의 죄를 짊어지고 이기적으로 정욕적으로 살아온 것을 뉘우치며 북녘 땅을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동족 상쟁의 삶을 살고 있을 때 선지자 에스겔에게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라”(겔37:18) 라는 민족 통일의 사명을 주시고 남북의 통일을 이루게 하셨지만,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민족 통일의 사명을 망각한 채 우리 자신들만 위해서 이기적으로 그리고 세속적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분단 7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남북의 화해는커녕 남남의 갈등과 한국 교회의 분열만 조성하면서 분노와 증오와 정죄와 위선을 몸에 지닌 반 화해적이고 반 통일적인 삶을 살아오고 있는 죄를 뉘우치며 북녘 땅을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부끄러운 우리 죄인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죄를 회개하는 일이고 그리고 우리 북녘 동포들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불순종의 죄를 통회 자복합니다. 북녘의 동포들이여! 우리들의 무정함과 적대시의 죄를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전혀 자격이 없지만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구원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제물이 되신 것처럼, 스데반 집사와 손양원 목사님이 그 뒤를 따른 것처럼, 우리들도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조그만 제물들이 될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여기 모인 부족한 우리들의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조만간 우리들에게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여덟째로, 제가 은퇴 후 지난 8년 동안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계속해서 쓰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한 평생 저의 삶에 대한 “계획”을 정해놓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근심도 걱정도 없이 “계획”도 없이 길이 열리는 대로 그저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즐겁게 달려가곤 했습니다. 2008년 1월 8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퇴한 그 다음 주일부터 매 주 한 두 교회씩 지난 8년 동안 주로 2, 30여명의 성도들을 가진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설교를 한 것도 저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작은 교회들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저런 모임에 와서 설교와 강의를 해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국내뿐이 아니었습니다. 두 석 달에 한번씩 선교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중국, 연변, 일본,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 남미, 독일, 카나다,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말레이시아, 아프리카 지역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같이 부족한 사람을 이곳 저곳에서 불러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부족한 사람이 찾아가는 것을 그렇게도 고마워하니 저는 하나님과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릴뿐입니다. 건강도 주시고 필요한 물질도 주시고 환경도 주시고 즐거움과 기쁨도 주시니 더욱 더 감사합니다. 저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 대부분의 경우 담임 교역자들에게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래서 부탁 받은 설교 제목을 가지고 정성껏 설교 준비를 하곤 했는데 설교 준비하는 시간이 저에게는 보람과 의미와 즐거움이 가득한 아주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100명 이하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는 교인 숫자에 맞는 떡과 초콜릿을 가지고 가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이들에게는 떡과 초콜릿과 함께 스티커를 나누어주곤 했는데 모두들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또 와 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일년에 한 번씩 또는 두 번씩 방문하는 교회들도 생겼고 서너 번씩 방문하는 교회도 생겼습니다.
제가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지니게 된 보람과 즐거움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다양한 교파의 여러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한국교회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교회가 내가 목회하던 강변교회뿐이 아니고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작은 교회들이라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좀 더 넓은 마음을 지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여러 교회들을 바라보면서 여러 교회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품게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라남도 경상남도 전라북도 경상북도 충천남도 충청북도 강원도 경기도 거제도의 여러 지역을 제 아내와 함께 둘이서 즐겁게 운전하며 달리면서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산들과 강들과 바다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했습니다. 제주도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금수 강산들이었습니다. 운전 기술도 늘었고 전국 지리에 익숙하게도 되었습니다. 저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주시고 달려 갈 수 있는 건강과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평생 사례를 받았는데 이제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 사례를 받지 않게 되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선교지에 달려갈 때도 사례는 받지 않습니다. 이곳 저곳에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조금씩 펼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평생 건강이나 돈을 걱정한 일은 거의 없었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셨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은 남은 생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 풍족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대로 약한 대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만나서 나누며 가볍고 기쁘게 살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부족한 죄인을 아직도 버리지 않으시고 심부름꾼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그리고 부족한 죄인을 반갑게 맞아주시는 한국의 여러 교회들과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생의 소원과 기도” 한복협 월례 기도회(온누리교회 2016.1.8 오전 7시)
첫 번째 저의 소원과 기도는 “부족한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다가 죽게하시옵소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시51:17). “회개”는 신앙생활의 입문일 뿐 아니라 과정이고 출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참회”를 계속해서 가장 많이 가장 처절하게 한 사람이 다윗과 사도 바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믿음의 선배님들인 길선주,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이성봉, 김치선, 한경직, 박윤선 목사님들께서도 평생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귀한 종들로 쓰임을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회개”와 “참회”와는 거리가 너무 먼 위선과 독선으로 가득한 죄인중의 죄인이지만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을 따라서 남은 여생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조금이라도 드리면서 살다가 죽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두 번째 저의 소원과 기도는 “부족한 죄인으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등 온갖 부끄러운 죄악들을 날마다 조금씩 벗어버리고 거룩함과 성결을 조금씩이라도 몸에 지니고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거룩함과 성결을 몸에 지니고 살라고 가르치는데 우리들은 너무나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죄악의 늪에 빠져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저는 중학생시절 대구에서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회개”와 “성결”의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성결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고 듣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거룩함과 성결과는 거리가 너무 먼 부끄러운 죄악들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는 죄인중의 죄인이지만 신앙의 선배님들께서 지니고 사셨던 “거룩함”과 “성결”의 부스러기를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고 살다가 죽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세 번째 저의 소원과 기도는 “부족한 죄인으로 하여금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지니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아주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8,1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마9:36).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7:48).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목사님들의 믿음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긍휼과는 거리가 너무 먼 배타적인 죄인중의 죄인이지만 남은 여생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조금이라도 펴면서 살다가 죽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네 번째 저의 소원과 기도는 “부족한 죄인으로 하여금 인종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분쟁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저들과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들도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9).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2:3). 저는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남은 여생을 남북과 세계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면서 살다가 죽기를 소원하며 바랍니다.
다섯 번째 저의 소원과 기도는 “부족한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북한이든 아프간이든 어디든지 달려가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면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모두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했습니다(엡5:2). 스데반 집사와 폴리캅 감독과 토마스 선교사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께서 몸을 제사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놀라운 축복들을 베푸셨습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탐욕적인 죄인중의 죄인이지만 신앙의 선배님들을 따라서 누군가를 위하여 드려지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기를 소원하며 바랍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고백하신 대로 “이미 진 은혜의 빚과 죄의 빚을 갚기 위해” 저도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기를 소원하고 바랍니다.
여섯 번째 저의 소원과 기도는 “부족한 죄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고 하늘에 있는 아버지 집을 바라보는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우리 주님과 신앙의 선배님들이 모두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8복을 말씀하시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했습니다(마5:1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2) 라고도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항상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마라나타” 즉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길선주, 이성봉, 손양원 목사님들께서도 늘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사셨습니다. 저는 너무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죄인중의 죄인이지만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과 패니 크로스비처럼 세상에 대해서는 소경이 되고 하늘과 아버지 집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다가 죽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회개와 성결” 기독교학술원 사경회 설교(포도나무교회 2015.11.23 저녁7시)
살전5:16-18, 마11:15, 계2:7
부족한 사람을 기독교학술원 사경회에 초청해주시고 말씀을 전하게 해 주신 김영한 박사님과 여주봉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사경회의 주제가 “회개와 성결” 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저는 “회개와 성결”의 메시지를 평생 전하신 이성봉 목사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경회 첫날 저녁인 지금 “이성봉 목사님께서 전하신 회개와 성결의 메시지” 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들이 믿음의 삶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믿음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면서 닮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은, 믿음으로 요셉은, 믿음으로 모세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11:4-32).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믿음의 생활을 바로 하려면 독생자를 보내주신 성부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성자 예수님과 우리들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고 의지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한국교회의 믿음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면서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십자가의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님 닮은 가난과 고난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에 지니고 사신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들을 바라보면서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밖에 없는 죄인중의 괴수인 저를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만들어주신 분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평양 서문밖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과 같은 신앙의 선배님들이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고 존경하면서 배우려고 하는 열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한 제가 평생토록 신앙의 선배님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배우려고 애를 쓰면서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는데 그 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참석하며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인도하신다고 하면 어느 곳이든지 찾아가서 부흥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그분의 설교는 중학생인 저에게 너무 재미가 있었고 감동적이었고 은혜로웠습니다. 저는 부흥회 도중 이성봉 목사님이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는 성경 구절을 미리 암송했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성경을 찾지도 않고 즉시 암송하므로 이 목사님의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그때 이 목사님께서 자주 찾아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 중에는 시50:15과 시37:4-6과 시81:10, 렘33:3 등이 있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곤 했는데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 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시곤 했습니다. 제가 중학생 시절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자주 듣고 안수 기도를 열 번 이상 받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강의를 2000년 5월 1일 신촌 성결교회에서 했는데 그 때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 이라는 제목으로 한 강의를 그대로 옮기려고 합니다.
머리말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부흥사 이성봉 목사(1900-1965)는 우리 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간지 어언 35여년이 지났지만 그분이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가슴에 남기고 간 주님 사랑의 뜨거움은 아직도 냉랭해진 우리들의 가슴에 모닥불을 피우는 영원한 불꽃이 되고 있다. 그분은 한 평생을 편안하게 살지 않았으므로 장수하지 못하고 65세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위하여 다른 사역자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 값진 삶을 산 것이었다. 금년은 하나님께서 이성봉 목사를 이 땅에 보내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세기에 십여 명씩 당신이 크게 쓰시는 마음에 합한 종들을 이 땅에 보내시곤 한다. 하나님께서 황폐해진 이 땅을 긍휼히 여기사 길선주, 김익두, 이성봉, 주기철, 손양원, 박윤선, 한경직 목사님들과 같은 충성된 종들을 다시 보내 주시기를 기원한다.
나는 중학생 시절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때 이성봉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자주 참석하며 은혜를 받곤 했다. 그분의 설교는 중학생인 나에게 너무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고 은혜로웠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으며 목사가 될 것을 굳게 다짐하곤 했다. "나도 이성봉 목사님 같은 부흥사가 될 수는 없을까?" 이와 같은 생각과 소원을 품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서울로 돌아와서 공부할 때 종로 거리 악기 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저 스피커에서 유행가 대신 이성봉 목사님의 재미있고 은혜로운 「천로역정」강화가 흘러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가곤 했다. 그만큼 나는 이성봉 목사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 목사님의 팬이었다. 나는 여기서 이성봉 목사님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1 이성봉 목사의 삶은 은혜 체험적 삶이었다.
한 사람의 삶은 교육과 지식과 기술 습득에 의해 형성되는 면도 없지 않으나 청소년 시절에 받았던 신앙적 감화와 은혜 체험들에 의해서 형성되며 한 평생 계속되는 영적 체험에 의해서 완성된다. 기독교적 삶은 교육과 지식에 의해 형성되는 삶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신앙적 감화와 은혜 체험 즉 영적 체험들에 의해 형성되고 완성되는 삶이다.
이성봉 목사의 삶은 신앙적 감화와 은혜 체험에 의해서 형성되고 완성된 삶이었다. 소년 시절 이성봉은 어머니로부터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았다.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이인실씨와 김진실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성봉은 복음이 간리에 전해진 해인 1905년(6살때)부터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평양 근교 중화읍으로 이사한 후 온 가족은 평양 선교리 감리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기쁘게 했고 어머니는 아들 성봉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성경을 읽게 했다. 성봉은 6살 때 이미 신약을 일독했고 예배당에서 "누구든지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시오" 하면 즉시 기도를 해서 칭찬을 받기도 했다. 소년 이성봉은 어머니를 따라서 김익두 목사가 운영하던 황해도 신천의 경신소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김익두 목사의 신앙적 감화를 받으며 김익두 목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청년 시절 이성봉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손길을 체험했다. 청년 이성봉은 17세 경부터 한 동안 반항과 타락의 생활을 했다.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 못했다. 1920년 6월 24일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대신 과수원에서 과일을 싣고 평양에 가서 팔아 가지고 그날 밤 술집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 밤 늦게 "노자 노자"를 부르며 돌아 오던 중 기자묘 앞길에서 오른쪽 넓적다리에 통증을 느끼고 쓰러졌다. 골막염으로 다리를 절단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로부터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3년 동안의 투병생활은 청년 이성봉으로 하여금 기도와 말씀에 사로 잡히게 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에 붙잡히게 만들었다.
그 후 이성봉은 1925년 동양선교회 성서신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앙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깊은 회개와 은혜를 체험했다. 14살 때 기차를 타면서 12살이라고 속인 죄까지 회개했다. 당시의 성서신학원이 회개를 철두철미하게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신학교 시절에 가진 은혜의 체험은 한 평생 이어진다. 성서신학원을 졸업하자 이성봉 전도사는 목회와 부흥 사역에 투신했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계속한 수원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고 이성봉 전도사 자신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다.
수원 목회 기간 중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과로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영적 체험을 했다. "그 때 하늘로부터 참 십자가가 나타났다. 나는 분명히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를 보았다. 감격하여 붙들고 애통하며 나의 모든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나를 어루만져 주시며 천국으로 가자고 올라가시는 것이었다. 어디로 한없이 한없이 갔다. 한참 가다 보니 수정 같이 맑은 요단 강물이 흐르고 저편에서 화려하고 찬란한 천성이 보였다. 그런데 어디서 찬송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정신이 회복되며 온 몸에서 식은 땀이 쭉 쏟아졌다. 아프던 내 몸이 거짓말같이 완전히 나았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고 한 것 같이 그 후로 항상 그 환상이 나의 신앙생활을 격려하여 주고 소망 중에 살게 하고, 현실보다 영원한 내세를 더욱 그리워하게 했다." 1931년부터 6년 동안 계속한 목포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도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가(1932년에 목사 안수) 신비주의를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목포교회에서 목회할 때 신비주의로 나가는 여신도를 책벌한 일이 있는데 앙심을 품은 그 여신도의 아들에게 폭행과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1936년 신의주 동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부흥사로 활동하게 되는 데, 1937년 서울에서 모인 성결교 총회 기간 동안 이성봉 목사는 성령의 뜨거운 불세례를 체험했다. 총회 기간 동안 피곤한 몸을 잠깐 쉬고 있는데 당시 유명한 부흥 목사인 김익두 목사가 다가와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는데 그의 손이 닿자마자 너무나 뜨거워 깜짝 놀라 침대에서 뛰어 올랐다가 떨어지니 꿈이었다.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심령은 매우 상쾌했다. 그런데 그날 밤 총회 회의에서 그는 전국 부흥사로 임명되었다. 이성봉 목사는 "때때로 그 때의 체험을 생각하여 새 힘을 얻곤 했다"고 기술했다. 1937년부터 이성봉 목사는 능력의 사자로 가는 곳마다 강한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다. 1937년 용정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2,000여명이 회개하여 자복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한 해 동안에 50여회 이상 부흥회를 인도하며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이성봉 목사는 1928년 수원에서 목회와 부흥사역을 시작한 후 1965년 7월 23일 성결교 합동총회에서 "주를 사랑하자"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설교를 하고 8월 2일 주님 품으로 돌아가기 까지 37년 동안 한국과 만주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수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 수 많은 영적 체험을 계속하며 기사와 이적을 동반하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많이 일으켰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항상 경계했다. 가슴은 뜨거워야 하지만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않된다고 항상 경고했다.
지식과 기술과 경영 및 정보 습득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은혜 체험과 성령의 역사에 붙잡혀서 한 평생을 살며 사역한 이성봉 목사의 삶은 우리들에게 뜨거운 도전을 주고 있다.
2. 이성봉 목사의 삶은 구령과 교회부흥에 헌신한 삶이었다.
이성봉 목사의 삶은 구령의 열정에 불타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방방 곳곳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한 복음 전도자의 삶이요, 잠자는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 농어촌 교회까지 찾아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부흥사의 삶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심지어 청주에서 있었든 셋째 딸의 결혼식에 인사하러 올라가서도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많이 모인 호기를 노칠 세라" 생각하며 곧 이어 전도 강연을 했다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복음전파와 교회부흥이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 앞에는 세상의 부귀영화는 아랑곳 없었고 명예 지위도 거들떠 볼 새도 없이 다만 한 영혼에게라도 더 많이 전도 구령하겠다는 일념에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방회나 총회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전도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사명으로 알고 평생 감찰장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명 완수를 위해서 그의 온 정력 그의 모든 시간과 물질과 심지어 가족까지 다 희생의 제물로 주님께 바쳤다. 순회 집회하는 부흥 목사로 불가피하게 가족을 위해서 작은 집 한 채를 준비했던 일이 있는데 얼마 안가서 어떤 교회 건축에 딱한 사정을 듣고 근근히 작만한 그 집을 선듯 팔아 전도사의 손에 들려주고 가족은 셋방으로 옮아 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만주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어머니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 목사는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집회를 계속했다. "생전의 어머니를 뵈오려 가자니 불일듯 일어나는 집회를 내버리고, 굶주리고 목말라 허덕이는 양떼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어니 가자니 불효 막심하고 어떻게 할까? 그러나 전쟁에 나간 사람이 부모 병들었다고 돌아갈 수 있느냐?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저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집회를 계속했다"
이성봉 목사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고 한 교회라도 더 부흥시키기 위해서 그의 한 평생을 모두 불 사르고 말았다. 이성봉 목사는 6.25 동란 이후에는 무너진 성결교회 제단 하나하나를 다시 세우는 교회 재건 운동을 일으켰고 1961년부터 1년 5개월간 "1일 1교" 운동에 나서서500 여 교회를 순회하며 교회 재건과 교단 합동에 전념했다. 마지막에는 일체의 큰 집회나 외부 집회를 단절하고 매일 수 십리씩 걸어 다니며 농어촌 교회들을 돌아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소 구루마로 덜커덩 덜커덩 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리어카를 가지고 와서 타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전거를 타라고 하여 자전거 꽁무니에 타고 가다가 험한 길에 넘어져서 한참동안 버드럭 거리기도 하고 어떤 데서는 잘 곳이 없어서 소 외양간에서 한 밤을 지내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때로는 트럭 신세도 졌습니다. 장마통에 지게로 전도 기구를 짊어지고 걷기도 했습니다. 고장 난 차를 떠밀고 대관령에서 비를 흠뻑 맞아가며 넘기도 했습니다. 새벽차를 타고 종일 차 속에서 시달려 정신을 못 차리고 허덕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밤낮 침식을 잊고 하루에 천여리를 차 속에서 산 때로 드문드문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는 때로는 1년에 82곳의 집회를 인도했고 때로는 하루에 5, 6회의 집회를 인도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1959년 12월 8개월 간의 미국 순회전도집회를 마치고 귀국하고 나서 이성봉 목사는 이렇게 그의 심정을 술회했다. "기회를 민첩하게 사용하여 영혼 구원하는 일밖에는 나에게는 아무 취미가 없었다."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의 복음적 열정이 그의 전 생애를 불 태운 것이었다.
복음 전파보다는 "사업"확장에, 희생보다는 대우 받음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에 사로잡혀 복음 전파에 한 평생을 헌신하여 다 바친 이성봉 목사의 삶은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
3. 이성봉 목사의 삶은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청년 시절부터 철저한 회개에 기초를 둔 성결하고 깨끗한 청빈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어떤 애착을 두지 않고 살았다. 이성의 정욕과 물질의 탐욕을 항상 경계하는 금욕적 삶을 살았다. 돈과 이성의 유혹에 빠지면 목회자의 삶은 끝장이란 말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었다. 이성봉 목사는 부흥회 때마다 "허사가"를 즐겨 부르곤 했다. "꿈결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 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 가느냐"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영화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 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그래서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설교에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고 평가하며 "성경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라고 혹평했다. "복음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끝맺음 하는 느낌이다. 성경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성봉 목사의 "허무주의적 정서"를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우선 기독교 신앙은 현세 부정을 통한 현세 긍정적 신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세 부정을 통한 내세 긍정적 신앙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현세 부정적 요소가 나타나 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4:7-8).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타지리라]"(벧후3:10).
이성봉 목사의 신앙과 설교에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현실 교회와 사회에 대해 아주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개혁을 외쳤으며 일제의 만용과 무지를 공격하면서 일제의 멸망을 외치다가 체포되고 구속되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 또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영안이 밝은 사람은 인생의 존귀를 발견하는 한편에 또한 세상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세상을 비관하는 염세주의도 아니요, 세상을 무시하는 허무주의도 아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땅에 있으면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한 것은 더욱 아름다운 본향을 사모함이니 이 말은 천국에 목적을 두고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는 건전한 인생관을 말한다." 그는 세상에 대한 애착을 부정한 것이지 세상 안에서의 믿음의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물론 어거스틴과 칼빈의 문화변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 사회 문화 참여적 삶을 제창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과거의 교회도 마찬가지였지만, 말로는 문화변혁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이나 순교적 신앙을 주창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과 돈을 너무 좋아하는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더욱 더 그렇다. 필자는 중세의 금욕주의의 잘못도 잘 알고 요한 번연의 현세 부정주의의 잘못도 잘 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차라리 그들로부터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죽고 자신을 비우는 청빈과 순결의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겸허하게 배워야 할 것이다.
세상과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성봉 목사의 "허무주의적 정서"가 깃들어 있는 현세 초월적 청빈의 삶은 우리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다.
4.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았다. "임마누엘 하나님 제일주의 예수중심주의 성결과 사랑 순간순간 주로 호흡하고 일보일보 주와 동행하라." 이성봉 목사는 이와 같은 좌우명을 1962년 5월 8일 친필로 써서 남겼다.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동기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고, 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수원교회를 사임하고 목포로 내려가라는 교단의 지시를 받았을 때 이성봉 전도사는 "정신이 아뜩함을"느끼며 "안 가려고 많이 발버둥을 쳤"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곧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든 교회를 떠났다." 신의주교회가 1,000여명의 신자를 가진 대교회로 부흥하던 때 갑자기 총회로부터 전국 부흥사로 임명 받았다. 신의주 목회는 이 목사에게 있어서 "제일 부흥되고 제일 재미있게 일한" 목회였다. "정으로 생각하면 차마 떠나기 힘든 곳"이었다. 헌당식을 한지 사흘 만에 떠나려고 하니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고 사랑하는 목양지를 떠나 우리 밖의 양들을 찾아 험하고 먼 길을 떠났다.
전국 부흥사로 임명을 받고 이성봉 목사는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하나님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헌신의 글이었다. "일을 일으키시는 이도 여호와요 일을 그대로 이루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시니라. 창세 전에 나를 아시고 모태로부터 나를 택하시고 출생 후 지금까지 거룩하신 품 안에 영육을 보존하시고 전지전능의 손에 붙잡으사 작은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만사 합동하여 거룩한 뜻이 우리어지게 하심을 감사할 뿐이로소이다. 금번에 귀중한 사명은 벌써 만세 전에 예정하신 주님의 계획이요, 4년 전에 보여 주신 이상의 감동이 오늘에 성취될 때 일희일비의 정을 금할 길 어렵도다. 주님의 거룩한 뜻은 언제든지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한번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중대한 책임을 생각할 때 황송하고 떨리지 않을 수 없노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자신을 돌아볼 때 이 사명의 말씀이 참으로 어려워 미디안 광야의 모세가 내게 거울이 되도다. 오, 주의 권능으로 없던 내가 이 시대에 생겨나서 주의 영광 다 뵈옵고, 필요한 일을 알리어 주시는 그 사랑의 품에 있는 것은 웬일인가. 물질이나 정신이나 영이나 육이나 우리 전부가 주께로 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도상에 순간순간 최후 숨결까지 그 안에서 사라짐을 나타내겠노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불타는 주님의 사랑, 그의 가슴을 내가 알고 나를 불러 세우신 그 뜻을 알려 주시는 힘, 임하는 말씀, 인도하시는 성령에 끌리어 순종하고 복종하리니 그 잎 길에 장애와 사탄의 오묘도 무수할 터이나 그 염려와 불신앙의 죄악을 다 태워버리고 힘써 매진하겠노라. 각처에 한 핏줄 한 몸으로 지음 받은 형제 자매여, 한 순간이라도 이 그림자, 이 질그릇을 기억하시사 합심 동정의 기도를 드려 주소서. 주여 나의 믿음의 부족함을 도우소서."
우리는 이 글에서 이성봉 목사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분명하게 접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칼빈주의적 신앙과 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과 품을 친밀하게 체험하고 의지하며 그 사랑의 품에 안기면서 고난의 길을 흔쾌히 그리고 겸허하게 걸어 가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생생하게 접한다. 이성봉 목사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 순종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손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성봉 목사가 행한 수많은 설교 특히 미국 순회전도 집회 때 행한 수 많은 설교의 주제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성봉 목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정인교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기술했다. "여기서 우리는 철저히 사업의 논리와 사업가의 계산으로 오염된 현대 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한 진정한 광야의 소리를 듣게 된다."
5.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예수 중심주의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의 설교의 본문과 주제와 내용을 분석한 정인교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설교가 신약 중심적이고 복음서 중심적이며 예수 중심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성봉 목사는 "신본주의적,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갖고서 모든 본문을 풀어간다." 이성봉 목사의 사명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성봉 목사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뜨겁게 부어져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대부분의 설교에서 설교의 목표를 패역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설적 사랑에 두고 있다. 이성봉 목사가 자주 사용하던 예화 중의 하나는 "어떤 술주정뱅이가 만취하여 기차 레일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는 예화였다. 필자가 중학생 때 여러 번 들은 예화이다. 급행열차가 고동을 틀면서 달려 왔을 때 한 자비로운 사람이 고함을 치면서 일어나라고 외쳤지만 그 술주정뱅이는 들은 척도 않했다. 결국 그 자비로운 사람이 달려가서 그 술주정뱅이의 다리를 끌어 철둑 아래로 내동댕이쳤고 그대신 그는 목이 잘리고 다리가 끊어지고 팔이 잘리고 창자가 나와서 즉사했다는 것이다. 기차가 정거를 한 후 술주정뱅이는 그제서야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즉사한 사람이 조심하지 않다가 변을 당했다고 중얼거리다가 따귀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 자식아! 이 사람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 이 이야기는 패역한 죄인대신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성봉 목사는 역설했다. "기차 레일을 베고 잠자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이 설교를 하는 사람부터 온 세상 사람들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멸망의 기적은 고동을 틀면서 오는데 죄악의 술을 마시고 취생몽사로 허영의 꿈만 꾸는 것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자가 33년간 외치시다 못하여 우리가 죽을 대신, 멸망 받을 대신에 죽으신 십자가의 대속을 말하는 것이다. 성자 예수 그 머리에 가시관 쓰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셨네 이와 같이 넓고 크신 사랑에 아직 감복 않는 자야 사람이랄까."
이성봉 목사는 또 다시 아기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모스크바에 흉년이 들어 어떤 아기 어머니가 며칠을 굶고 풀 뿌리라도 캐어 먹으려고 들에 나왔는데 등에 업힌 어린 애기가 젖을 먹겠다고 졸랐다. 그러나 삼 일간을 굶은 어머니 가슴에서 젖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만 그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장도를 꺼내어 젖꼭지를 찢어 피를 내어 어린 아이에게 물리니 어린 것은 피를 빨고 있고 어머니는 기절을 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비참한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대신 희생의 피를 흘리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성봉 목사는 지적했다. "우리 주님은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들을 위해 희생의 피를 흘려 주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희생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패역하여 비참하게 된 죄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 것도 없다고 거듭해서 강조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고 좇는 데서만 가능하다. "참 신앙은 예수를 통하여 신구약의 3만여 가지의 약속을 그 피로 인쳐 우리에게 주시고 성신으로 알게 하시는 지각으로 이 말씀 전부를 다 나위하여 주신 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지하며 그대로 바라고 그대로 좇고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예수란 뜻이 구원이란 뜻이다. 사람에게 제일 급선무는 구원이다.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환난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에서 구원하신다.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이 구원 받으리라 한 것은 예수는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본체요, 생명의 자본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 생명을 받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사랑하자고 호소했다. "대속의 십자가의 참된 사랑에 녹아져서 항상 감사 찬송으로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말마다 그가 가신 자취를 따라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때까지 십자가를 사랑할 것이다."
예수 사랑에 녹아진 가슴, 그리고 그 예수 사랑만을 전하는 입술과 몸을 가졌던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갖가지 불순한 것으로 오염되고 변질된 신앙을 붙잡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신한 도전을 주고 있다.
6.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회개와 중생의 복음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교파를 초월한 넓은 시야와 안목을 가진 폭 넓은 신앙과 신학을 가진 분이었지만 성결교의 사중 복음인 중생과 성결과 신유와 재림의 복음을 충실하게 신종했다. 이성봉 목사의 신앙과 설교와 사역은 무엇보다 먼저 회개를 통한 중생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새벽기도회의 시간은 추상같은 권위로 죄를 책망하는 시간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며 회개했다. 자신의 삶이 철저한 회개에 기초한 삶이었기 때문에 이성봉 목사는 항상 죄를 무섭게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역의 기초와 출발점이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이었고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성봉 목사에게는 대중들을 아부하는 설교는 있을 수 없었다. 철저한 회개를 강조했다. 이성봉 목사 자신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살려는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평생토록 스스로 크고 작은 일들을 회개하면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 12월 마지막 토요일 임신한 사모님이 목사님더러 닭을 좀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 목사는 거절했다. 때 마침 집에 찾아 온 박동형 군에게 닭을 좀 잡아 달라고 말했다. 그도 싫다고 하다가 할 수 없이 닭을 잡아 주었다. 이 목사는 닭은 잡지 않았지만 닭고기 국은 잘 먹었다. 그 이튿날 주일 아침 이 목사가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모님이 "저 수탉을 좀 잡아매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이 목사는 마지 못해 나가서 수탉을 잡다가 그만 엄지 손가락이 찢어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사모님을 실컷 원망했다. 손 가락도 아프고 머리까지 아팠다. "주일 날 아침 이거 무슨 일입니까?"라고 기도하던 중 마23장이 번개 같이 떠 올랐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여. 무거운 짐은 남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 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어하는 자여. 어제 일을 생각해 보라. 닭 죽이기 싫다고 아내에게 미루고 박군에게 미루고 그러면서도 닭국은 잘 먹었지. 바리새인 손 가락 같은 것 찍어 버려 마땅하겠지만 그만큼 둔 것도 감사해라. 너 그런 심보 가지고 강단에서 무슨 설교를 할 작정이냐? 바로 너를 잘 알아 회개하고 설교하라." 이성봉 목사는 그날 아침 하나님과 온 교우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설교했다. "주여 감사합니다. 만 번 죽어 마땅한 자식 이 만큼 징계하여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시는 나 하기 싫은 일 남에게 마루지 않겠습니다. 사랑의 채찍 감사합니다." 이 목사의 회개의 간증에 온 교우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이성봉 목사는 설교 때마다 회개를 강조했다. 회개를 통해서만 죄인이 중생하고 구원 얻어 천국 간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과 실제로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 이야기들을 항상 소개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삭개오는 철저한 회개를 했다. 회개는 천국 가는 길이요 제이의 무죄라고 하였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 개인이나 국가나 사회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회개는 또한 숨은 부끄러움 곧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다 들추어내는 것이니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를 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사람과 관련된 것은 또한 사람과 해결 지어야 한다."
이성봉 목사는 "회개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회개는 주님의 명령이요 소원이며 회개란 지.정.의.행의 전폭적인 변화라고 폭 넓게 설명했다. "회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요 주의 소원이며 뜻이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니, 복음의 대지가 회개요, 저주와 멸망을 막는 요새가 되는 것이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회개는 제이의 무죄요 향상의 별명이라 하였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그것은 지. 정. 의. 행으로 나타낼 수 있다. 1) 회개는 지적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다. 2) 회개는 정적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3) 회개는 의지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4) 회개는 행위적으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철두철미하게 회개하라."
이성봉 목사는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생이 구원의 첫 단계요 현재적 단계라고 설명하며 중생이 기독교의 기초임을 강조한다. 중생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새롭게 태어 나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구원이란 말을 중생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곤 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사람에게 제일 급선무는 구원이다. 정치가도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고, 과학자도, 철학가도, 예술가도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한다. 모든 인물들의 급선무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오늘날 이 세계, 이 사회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지배하여 멸망의 구덩이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사람이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는 말씀과 다음 말씀들에 근거하여 중생을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람이 거듭나서 중생하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1:12), 천국을 보고(요3:3),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 못하고(요일5:18), 의를 행하고(요일2:29, 죄를 범치 않고(요일3:9), 서로 사랑하고(요일4:7), 세상을 이기고(요일5:4), 산 소망을 가지고(벧전1:3), 하나님을 알고(요일4:7), 천국에 들어가서 후사가 된다(요3:5).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중생한 성도는 흑암에서 나아와 광명으로(요일2:8), 죽음에서 나아와 생명으로(요일5:24), 슬픔에서 나아와 기쁨으로(롬14:17), 자기 중심에서 떠나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고 했다.
회개와 중생의 메시지가 점점 사라져 가는 오늘에 비추어 볼 때 회개와 중생의 복음을 강조한 이성봉 목사의 신앙과 메시지는 우리들에게 심각한 경종이 되고 있다.
7.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성결의 복음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평생 성결을 추구하며 성결의 메시지를 전했다. 성결은 구원의 둘째 단계 즉 현재적 단계이다. 이성봉 목사는 "성결의 복음"이란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성결은 성결교회의 전매 특허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복음을 그대로 받아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 없으면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히12:14). 성결은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5). 이 하나님의 말씀은 결정적이다. 이 말씀 들어야 살고 듣지 않으면 죽는다. 이 말씀 들어야 복 받고 듣지 않으면 화 받는다. 이 말씀은 시금석이다. 성결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거룩하여 음란을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성결은 천국민의 자격이다. 성결은 그리스도 신부의 단장이다. 성결한 사람은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 이 중대하고 귀한 성결은 무엇으로 되는가? 말씀과 성신과 그리스도의 피와 징계의 채찍으로 된다. 하나님은 이 강산을 다 불태우고 이 강산을 온통 피바다로 만들고라도 당신의 택한 민족, 택한 종들, 택한 신도들 한 사람이라도 깨달아 성결해지면 그것으로 위로를 받으신다. 왜 그런가?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한 까닭이다."
이성봉 목사는 "거룩하고 깨끗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성도들이 성결해야 하는 이유는 성부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거룩하시고 성신이 거룩하시고 천국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고, 손과 마음과 사상과 입술과 눈동자와 감정과 몸과 영과 혼이 정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성결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순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결의 필요"라는 설교에서는 성결할 때 하나님을 보게 되고, 재림 주를 보게 되고, 귀히 쓰는 그릇이 되고, 그리스도와 혼연 일체가 되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순종하는 능력을 얻고 환난 고통에서 승리한다고 지적했다.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가 전한 성결의 복음을 오직 은혜와 오직 신앙의 복음을 전하지 못한 율법주의적인 복음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성결에다 그의 메시지를 매달아 놓고 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복음 즉 오직 은혜만(Sola Gratia)의 복음보다는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순결해 은혜와 구원과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기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i)의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성결하지 않으면 징계를 면할 길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정성구 교수의 비판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성봉 목사가 중생한 신자와 사역자의 현재적 삶에서 성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삶이 깨끗하고 순결해야 은혜와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고, 이성봉 목사가 오직 믿음의 진리를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와 복음 사역자가 성결을 상실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떠나게 되고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임한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율법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성결을 상실한 다윗을 징계하여 회복하셨다. 성결이 천국시민의 자격이 된다는 말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와 결코 상치되지 않는다. 요한 웨슬레 뿐 아니라 요한 칼빈도 경건과 성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평생 칼빈만을 신봉해 오는 한철하 박사가 최근 수년 동안 경건보다는 성결이란 단어를 선호하고 있으며 칼빈과 아울러 웨슬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적 책임을 간과하다가 이중적이고 모순된 신자의 허상을 드러내 보이게 된 한국교회에 대한 자성의 결과로 나타난 소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성결을 상실하고 있다. "오직 믿음"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순결을 유지하고 나타내는 삶은 사라지고 있다. 평생 성결을 추구하고 실천하면서 성결의 메시지를 전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
8.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신유의 복음 신앙이었다.
신유는 이성봉 목사가 23세 청년 시절부터 한 평생 친히 체험한 은혜요 그의 목회 및 부흥 사역에서 수 없이 많이 나타난 은혜였다. 이성봉 목사는 의약을 쓰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질병의 어려움을 많이 겪으면서도 한 평생 의약을 쓰지 않고 신유의 신앙으로 살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때문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신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성결교회 4중 복음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지하고, 그대로 체험하고, 그대로 전함을 나의 사명으로 알았다. 그래서 신유의 체험을 많이 하였다. 본시 나 자신이 폐디스토마로 오래 고생하여 어릴 때 별명이 깔다귀였다. 신학공부할 때에도 심히 쇠약하고 수원서 교역할 때에도 쇠약하여 몇 달 휴양하는 중 주야에 기도로 나음을 얻고 복막염에서도 나음을 얻었는데 나의 몸은 22관까지 나가는 뚱뚱보가 되었다. 특별히 황해도 송화읍 무초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화단이 일어나 머리부터 전신이 붓고 열이 과하여 집회를 중지하게 되었으나.... 참고 기도할 때에 신기한 이적이 나타나 그 밤으로 거짓말 같이 나아서 그 집회를 승리로 마쳤다... 나는 또 맹장염에서 구원 받았다. 해남에서 부흥회 하다가 맹장염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집회를 결사적으로 하였다. 너무나 고통을 당하니 송의사가 와 보고는 급성 맹장염인데 24시간 안에 수술을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사적으로 기도만 했는데 그날 밤 너무도 고통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침에 이상하게 씻은 듯 나음을 주시었다."
이성봉 목사는 그의 신유에 대한 소신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기 때문에 오늘도 그 권능, 그 사랑으로 치료하시는 여호와시니라. 그래서 나는 신유의 신앙으로 30년간 의약을 의지하지 않고 그의 손에 치료를 받아 오늘까지 나왔다. 물론 의약을 쓰는 것이 죄가 되거나 구원 문제는 아니다. 의약으로 치료하는 것은 자연의 요법이요 신유로 구원 받는 것은 초자연의 요법이다."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가 무분별하게 기사와 이적을 예찬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신비주의를 경계하며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성경은 천국을 바라보는 망원경이요, 나의 진상을 살피는 거울이다. 이 말씀은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꿀보다 더 달고 꿀 송이보다 더욱 달게 여겨야겠는데, 많은 신자들이 이 말씀을 등한히 하여 은혜를 저버린다. 성신 충만은 말씀 충만이다. 우리의 신앙이 감정과 기분으로 좌우되지 말고 이 말씀에 건전히 굳게 서야 될 것이요, 기사와 이적에 관심을 두지 말고 말씀의 지식으로 이단과 사설을 퇴치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성봉 목사가 한 평생 의약을 쓰지 않고 신유의 은사만 의지한 것은 독특한 입장이지만 그것은 그분 개인의 신앙적 소신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의 신앙을 다만 존중할 뿐이다. 이 목사는 신유의 복음을 믿는 자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신유의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란 말씀(출15:26)을 보시라. 질병으로 신음하는 교우들이여, 죄를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사이다. 환난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신유의 복음을 믿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도다."
이성봉 목사뿐 아니라 한국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회개와 기도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치유의 은사를 인정하며 신유의 은사를 통해 많은 전도와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면서도 신유와 이적 중심으로 나가는 신비주의와 이단을 경계했다. 오늘날 한 편에서는 성령의 현재적 은사들을 모조리 부인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신유와 이적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양극화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성봉 목사의 균형잡힌 신유 복음 신앙은 우리들에게 신중한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든다.
9.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재림의 복음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재림 신앙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았다. 이성봉 목사는 밤에 자다가 옆 집 방아간에서 방아 찢는 소리만 들어도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는 간증을 나는 중학생 때 직접 들었다. 이 세상은 잠간 지나는 허무한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한 재림 신앙을 가져야 하며, 재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상하고 허무한 이 세상에서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신약 성도들의 신앙이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에게 있어서 재림은 구원의 셋째 단계 즉 미래적 단계이다. 재림은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다. "예수의 재림은 하나님의 최대 계획이요, 성도의 최대 소망이다. 만물이 고대하는 소망이요 마귀를 진멸하고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당신의 신부들을 영접하시는 주의 날이다." 그리고 재림의 날이 임박했음을 지적했다. "오리라, 도적같이 오리라는 약속을 굳게 잡고 요제인가 고제인가 눈물로 기다리는 주의 재림, 천지는 변하여도 그 약속은 변치 않으시리라. 아무리 보아도 시대는 점점 절박하여 간다. 자연의 징조를 보든지, 국제 사회의 징조를 보든지, 교회와 인심의 징조를 보든지, 유대나라 독립하는 무화과 잎이 나는 것을 보면 재림의 복음을 믿는 자들의 가슴은 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깨어서 재림을 준비하여야 한다. "깨어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 밝게 켜 들고 거룩함과 인애로 신혼신을 단장하고 공중 혼연을 고대하는 신부들은 복이 있으리라." "사랑하는 나의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 택한 신부 맞으시려 언제나 오시렵니까? 일구 월심 오래도록 주님 생각 간절합니다 사모하는 나의 주님 속속히 오시옵소서."
얼마 전에 김삼환 목사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종말신앙을 상실한 것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다. 목회자의 설교에서나 삶에서 종말 신앙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종말 신앙과 재림 신앙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현세가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다. 몰트만이 지적한 대로 미래에 대한 분명한 종말 신앙은 적극적이고 책임 있는 현재적 삶을 살게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이성봉 목사의 재림 신앙은 현재와 미래에 대해 둔탁해진 우리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청량제가 된다.
맺는 말
필자는 위에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을 시도하면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은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철저하게 복음적이고 철저하게 한국교회적인 것을 발견했다. 이성봉 목사가 물려준 신앙의 유산과 삶의 모습은 바로 우리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이요 삶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 주고 물려준 처절한 회개와 성결한 삶과 천국 소망의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신앙의 유산을 고이 간직하고 배우고 개발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복음적인 사명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선교적인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회개와 부흥과 성결과 사랑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게 하시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하늘을 바라보며 부르짖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신부” 그레이스 선교교회(12.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