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다르마의 깨달음
신
인간이 원하는 것은 일용할 에너지다. 인간은 빵이 아니라 에너지로 사는 동물이다. 갈림길 앞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에너지다. 우리는 믿음으로부터 에너지를 조달한다. 구체적으로는 호르몬이다. 호르몬을 만드는 것은 무의식이고 무의식이 가리키는 것은 공동체다. 궁극적으로 믿음의 대상은 공동체다.
종교의 근거는 공동체를 따르는 인간의 사회적 본능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그렇게 하는게 맞다. 공동체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갈 때 인간은 편안해진다. 종교는 가족에서 씨족과, 부족으로 공동체의 규모를 키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믿는 것이며 종교는 공동체의 규모를 확대한다.
인간은 추상적인 사고에 약하다. 개인이 공동체의 의사결정 중심과 연결되려는 심리라고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므로 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은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신은 수염난 할아버지가 아니다. 인격체가 아니다. 우주의 의사결정 구조 그 자체다. 신은 우주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존재가 원래 메커니즘이다.
인간이 의지하는 공동체가 반드시 사람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일관성을 원한다. 어제와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같은 나이기를 원한다. 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가기를 원한다. 그것은 당당함, 자연스러움이다. 호연지기는 그곳에 있다. ' 이 산이 아닌게벼 '하고 가던길을 되돌아오는 것은 고통이다.
변덕부리지 않고, 자해하지 않고, 자충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계속 가려면 더 큰 단위의 집단이 필요하다. 세상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사건은 개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코끼리의 여러 부분과 싸운다. 어제의 적과, 오늘의 적과, 내일의 적이 같은 코끼리의 귀와, 코와, 상아다. 하나를 상대한다면 그것은 신이다.
종교
석가의 구원은 개인구원이다. 개인구원이 달성하는 믿음과 사랑은 에너지의 동원에 한계가 있으므로 모든 종교는 대승의 집단구원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몰려갈 때의 관성력 곧 경로의존성에 빨대를 꽂고 일용할 에너지를 빼먹으려는 것이다.
원시 기독교는 내일이나 모레쯤 예수가 부활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쳤다. 카톨릭의 보편주의는 집단구원이라는 점에서 대승불교와 통한다. 집단구원은 경쟁집단이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교도가 있고 이단세력이 있는 이유다.
종교는 개인구원에서 집단구원으로 발전하며 집단의 규모를 키운다. 개인은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려고 한다. 집단이 커지면 집단 내부의 계급질서가 믿음의 방해자가 된다. 집단에 가입한 다음에는 집단을 장악하여 권력을 쟁취하려고 하므로 갈등이 발생한다.
인간은 힘을 얻고자 한다. 개인구원은 자기를 다스리는 힘이다. 집단구원은 집단을 통제하는 권력이다. 더 나아가 신을 다이렉트로 만나려고 한다. 직통계시를 받았다는 주장은 예로부터 많았다. 기독교는 직통계시를 이단으로 규정하지만 방언, 예언 등으로 은사를 인정한다.
기독교인은 은사를 받으려고 한다. 신과 통하는 능력을 얻으려고 한다. 인간은 초능력을 원한다. 이는 선종과 통한다. 선종은 완전성을 추구한다. 완전성은 대표성으로 나타난다. 대표자 한 명에 의해 단박에 구원된다. 간단히 스위치를 눌러 근원의 동력원과 연결하면 된다.
낮은 차원에서의 몸부림은 의미가 없다. 더 높은 세계로 올라서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이는 대표자 한 명에 의해 가능하다. 갯벌에 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가 일제히 떠오른다. 한 명이 백신을 발명하면 전 인류가 혜택을 본다. 칼뱅이 예정설 개념은 선종불교와 유사하다.
궁극적인 대표자는 신이다. 신의 계획이 인간의 구원을 결정한다. 개인구원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집단구원으로 사회를 다스리고, 직통구원으로 우주와 일체가 된다. 석가의 해탈구원은 개인구원이다. 에너지의 방향성을 깨닫는 원효의 화쟁론이 선종의 직통구원과 통한다.
우리는 에너지 출력부에 있다. 출구에서 입구를 바라보는 관점을 뒤집어엎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식이 부모의 존재를 깨닫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자신이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는 깨달음이 진짜다. 신의 팀에 소속되어 신과 함께 세상을 디자인하는 깨달음이 진짜다.
유심론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동물이며 일용할 심리적 에너지는 필요없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유물론자의 사고는 그게 농노를 부리는 노예주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의 입으로 표현된다. 농노들은 빵만 있으면 된다. 농노는 토지에 가두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에 가두어진 가축은 밥만 주면 된다. 유물론은 인간을 가축으로 보는 비뚤어진 관점이다.
소작인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도시에 자녀를 뺏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지개혁을 하는 순간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 모든 소작인과 농노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고 한다. 왜? 자신도 도시로 탈출하고 싶기 때문이다. 농노는 토지에 묶인 존재다. 농노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다. 유물론은 농노를 토지에 가두고 노비를 무지에 가둬놓아야 안심된다는 노예주 사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일용할 에너지를 원한다. 사랑과 믿음은 개인구원이고 잠든 세상을 깨우는 강한 에너지는 집단의 무의식에서 나온다. 집단의 권력에 빨대를 꽂는 것이 의리다. 인간은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려고 한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가짜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 고아 소년이 내게도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게 깨달음이다. 그러나 어린이 포지션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는 것이다.
신의 바깥에서 어딘가에 있다는 신의 존재를 어렴풋이 깨닫는게 아니라 직접 신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원래부터 신의 일부였으며 잠시 파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양자역학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자연히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물질은 매개에 불과하다. 관객은 극장의 스크린을 보지만 관객이 보는 것은 영화이고 스크린은 단지 매개할 뿐이다. 우주에 여러가지는 없고 하나의 여러가지 모습이 있을 뿐이다.
다르마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과 같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적과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에너지의 동원구조 곧 파워트레인의 유지가 중요하다. 에너지는 샘과 같아서 부지런히 퍼내지 않으면 막힌다. 샘물의 용도는 중요하지 않다. 샘이 막히면 안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고 원인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노무현처럼 천하에 큰 불을 질러서 천하대란을 일으켜야 한다. 불을 끄는 것은 신의 역할이고 불을 지르는 것은 인간의 역할이다. 에너지의 공급에 성공하면 성과는 다른 곳에서 조달해도 된다. 내가 심은 과일을 다른사람이 수확해도 상관없다.
많은 사람이 본래 목적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우연히 뒷패가 맞아 대박을 터뜨리곤 한다. 내가 쓸만한 것을 만들면 뒤에 온 사람이 그것을 써먹어도 무방하다. 원래 고생해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자 따로 있고 그것을 이용하여 돈 버는 사람 따로 있다. 발견한 사람은 전율한다. 돈보다 전율이다.
내 안에 에너지가 흘러 넘쳐야 한다. 열정과, 존엄과, 흥분과, 긴장과, 설레임과, 호연지기가 있어야 한다. 사랑, 행복, 쾌락, 성공, 불로장수 따위는 결과 측 언어다. 원인 측 언어를 얻어야 한다. 원인은 무언가의 만남이고 결과는 무언가의 결별이다. 사건은 만남에서 시작되어 헤어짐으로 종결된다.
세상은 근원의 동력원에 의해 전부 한줄로 연결된다. 모든 존재는 탄생의 경로에 빚을 지고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은 반드시 있다. 뒤에 가는 사람은 앞서가며 길을 개척해놓은 사람 덕에 쉽게 간다. 그러므로 의무가 있다. 그것이 '의하여'다.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뒤에 청구서가 따른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열정이다. 열정은 흥분에 의하여, 흥분은 호르몬에 의하여, 호르몬은 무의식에 의하여, 무의식은 대본에 의하여, 대본은 역할에 의하여, 역할은 권력에 의하여, 권력은 의무에 의하여, 의무는 의리에 의하여, 의리는 동료에게 빚을 진 것이다. 에너지의 연결고리가 다르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