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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한국학대학원 2026-2 '조선후기음악사'(이정희교수님) 수업에서의 발제 내용의 일부입니다.
『서울공연예술사』,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11. 해당 절(213-236쪽)은 송혜진이 저술하였다. 이 글은 해당 내용을 요약하여 싣고, 발표자의 생각을 파란 글씨로 표기하였다.
| Ⅰ. 머리말 Ⅱ. 본문 1. 국가의 의례음악 정비 1) 기본음 제정과 악기 제작 2) 아악곡 선정과 연주 3) 신악 창제와 전승 4) 악학궤범 편찬 | 2. 국가의례의 음악 1) 제례와 음악 2) 궁중의례와 연향 음악 3) 궁중음악 연주 4) 대표적 연향음악 3. 국가 음악기관 4. 한성의 음악풍경 Ⅲ. 추가 자료 요약 |
Ⅰ. 머리말: 조선 전기 한성의 공연문화의 구성
| 국가의 음악정책(禮樂) | 유교적 세계관의 풍류 활동 → 고려음악 전통이 새로운 양식으로 변화 |
| 불교의례 음악문화 : 억불정책→무속·민속 등과 결합(토착화) | 무격의 제사 → 유교식 제례로 변모 |
☞ 저자는 조선 전기 한성의 공연문화를 위와 같이 네 가지 양상으로 구분하여 제시하였으나, 실제 논의는 국가의 음악정책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민중의 음악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본 발제에서는 이러한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문화사』 시리즈 가운데 관련 내용을 요약·정리하여 발표문 말미에 덧붙였다.
Ⅱ. 본문
1. 국가의 의례음악 정비
1) 기본음 제정과 악기 제작: 세종의 박연 등용과 예악 정비
(1) 樂學 연구 독려
(2) 악기 제작사업 추진: 편경·율관 제작, 악기도감 설립, 조선 표준음고 제정, 편경·편종 제작
☞ ‘조선 표준음고’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에서는 세종 9년 9월에 이를 정하였다고 서술하였으나, 『세종실록』의 해당 시기 기사에서는 이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세종 9년 5월 15일 기사에는 중국의 황종경을 기준으로 12율관을 제작하고 거서로 이를 교정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따라서 본문의 ‘표준음고’는 이러한 황종 및 12율의 음고 정립을 지칭하는 현대적 서술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아악곡 선정과 연주
(1) 기존의 아악은 『주례』에 맞지 않았기에 전거(典據)에 근거한 연구를 진행하였음.
→ 이 때 정한 아악으로 제례와 하정례에도 사용하며 완비된 아악 연주시대를 엶.
☞ 하정례가 제례와 함께 아악의 주요 사용 대상으로 정비된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세종대 하정례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하정례는 단순한 신년 하례가 아니라 전국의 관료와 지방이 국왕에게 축하와 복속의 뜻을 표하는 국가적 조하(朝賀) 의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제례와 하정례에서 공통적으로 아악이 사용된 것은 두 의례의 성격이 동일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제례가 신과 인간의 질서를 예악으로 구현하는 의례였다면, 하정례는 국왕과 신하 사이의 정치적 위계와 국가질서를 예악을 통해 가시화하는 의례였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2) ‘회례연에서도 기존의 향·당악 연주와 여악의 춤 대신 아악과 남악을 써야 한다’는 논의 시작됨.
→ 세종 “이전에 향·당악을 사용하던 회례에 아악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 “회례연 전반부에서 아악, 후반부에서 향·당악 사용”이라는 맹사성의 절충안 채택.
☞ 각 발언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관련 『세종실록』 기사를 확인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먼저 회례에서 여악의 사용을 반대한 것은 당시 여악의 성격을 어떻게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한 세종이 “남악이 족히 볼 만하면 가하다”고 언급한 것은 어떠한 의미인지 궁금하다. 아울러 맹사성이 제안한 ‘먼저 아악을 연주하고 향악을 겸용하는’ 방식이 아악과 향악을 둘러싼 논의에서 어떠한 의미의 절충안이었는지도 궁금하다.
|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맹사성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신 회례(會禮)에 여악(女樂)을 쓸 수 없다.’고 하니, 만약 여악을 그만두고라도 남악(男樂)이 족히 볼 만하면 가하거니와, 만약 음률에 맞지 않으면 어찌할까.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복색이 아마 중국과 같지 않은 듯한데, 그를 곁에서 보기에 어떨까. 중국의 풍류를 쓰고자 하여 향악(鄕樂)을 다 버리는 것은 단연코 불가하다." 하니, 사성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과연 그러하옵니다. 어찌 향악을 모두 버릴 수야 있사오리까. 먼저 아악을 연주하고 향악을 겸해 쓰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문무와 무무의 의복 제도도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 甲午/受常參, 視事。 上謂孟思誠曰: "人言會禮不可用女樂, 若罷女樂, 而男樂足觀則可矣, 若不合音律, 則奈何? 且文武舞者之服, 恐不似中原, 其於旁觀何? 欲用中朝之樂, 而盡棄鄕樂, 斷不可也。" 思誠對曰: "上敎誠然。 何可盡棄鄕樂乎? 先奏雅樂, 而兼用鄕樂可矣。 |
3) 신악 창제와 전승
4) 악학궤범(1493) 편찬
2. 국가의례의 음악
1) 제례와 음악
(1)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제례아악은 국가 중대사
(2) 연주된 음악
➀ 제례아악(세종 때 완비된 아악): 사직, 문묘, 선농, 선잠 등에서 연주
➁ 제례속악(세조 이후 정비된 신악): 종묘(세조 이후 보태평, 정대업)
☞ 제례아악에 대하여 ‘풍운뇌우’ 언급이 없었으나 추가해야 함.
☞ 제례속악에 대하여 문소전·연은전(유황곡), 둑제 등 (정동방곡) 추가해야 함.
2) 궁중의례와 연향 음악 (연회=嘉禮의 일부로 중시됨)
(1) 세종의 연회: 조화의 지도력 발휘
• 임금과 신하가 서로 허리와 다리를 붙들고 춤을 춘다거나, 즉석에서 농부에게 일노래를 부르게 한다거나, 임금이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춤을 추고, ’밤샘할 계획’이었음을 말하는 세종.
• 매년 2회 전 국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양로연: 경치 좋은 곳을 선택하여 즐겁게 노는 축제를 열도록 하고, 궁궐의 술을 단지 채 하사하고 궁중음악 연주단을 파견.
(2) 세종은 백성들의 일상에서 소비되는 악무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음.
• 밤새 궁중 안에까지 들리는 풍악과 노래 소리에 사헌부에 금지하도록 명함.
• 풍악을 잡히고 제사지내는 자(凡有作樂聚衆淫祀鬼神者…) 등을 엄벌하도록 명함.
• 예조에 기생을 불러들여 연회를 벌인 관리들의 직을 박탈함.
☞ 해당 논의가 세종대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나 시기적 범위의 설정 근거가 별도로 제시되지 않은 점은 아쉽다. 세종대를 중심으로 서술할 필요성이 있었다면, 그 이유를 명시하여 논의의 범위를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 표제에는 ‘궁중의례’가 제시되어 있으나, 본문의 논의가 궁중의례라는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표제에서 ‘궁중의례’를 제시한 의도와 그것이 본문의 논의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근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 아울러 본문에서 사용한 ‘궁중의례’의 개념적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궁중의례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례를 포괄하는 개념인지, 국가의례 또는 오례(五禮)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에 대한 개념적 설명이 제시된다면 논의의 범위를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3) 궁중음악 연주
(1) 가례에 음악을 연주하는 예
➀ 국왕이 예를 행하기 위해 출궁할 때, 국왕의 공식 문서를 이동할 때, 주요 행사에서 배례할 때, 행례를 마치고 환궁할 때
☞ 『악학궤범』 권2 「속악진설도설」의 전정고취·전후고취·전부고취·후부고취 관련 기록을 종합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➁ 예연(禮宴)에서 의전 주악 외에 향악과 당악이 절차에 따라 연주되었다.
☞ 여기서 말하는 ‘의전 주악’이라는 것이 배례의 〈낙양춘〉, 국왕의 출궁·행차에 사용된 〈여민락령〉·〈여민락만〉, 환궁에 사용된 〈환궁악〉 등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2) 악학궤범의 25가지 궁중 연향
➀ 권2에 따른 구분
| 구분 | 해당 의례 |
| 등가악대와 헌가악대로 구성 | 친경적전 |
| 헌가악대 악공 수만 제시(정재인원×) | 대사례, 모화관 친열, 종친 관사 등 |
| 헌가악대와 정재로 구성 | 정전예연을 비롯한 대부분 연향 |
| 헌가악대와 정재 + 학연화대처용무 | - |
☞ 각 구분의 의미와 그에 따른 차등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본문에서 언급한 『악학궤범』 권2의 관련 내용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는 권2 「속악진설도설(俗樂陳設圖說)」의 ‘정전 예연 때의 여기·악공의 배립(正殿禮宴女妓樂工排立)’에 수록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 학연화대처용무를 일반 정재와 구분하여 별도의 유형으로 제시한 이유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구체적인 설명을 찾기 어렵다. 다만 학연화대처용무가 여러 정재가 결합된 대규모 공연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규모와 구성상의 특수성으로 인해 별도로 구분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였다.
4. 한성의 음악 풍경
1) 성현의 『용재총화』
(1) 客人宴享, 장악원 악인들의 연습과 연주시험, 태평관에 왕래할 때 동리의 사면이 모두 음악인과 기녀의 집, 숭례문 밖의 노래비(歌婢), 우리집 옆에 살던 이들이 늘 비복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
(2) 옛적의 풍습에 대하여는
“잔치를 베푼 뒤에 악을 하였으며, 먼저 전두(수고비 조로 주는 금품)를 갖춘 뒤에 기생을 청하였다. 음악은 <진작>만기, <자하동>, <횡살문> 등 곡을 연주하게 하고, …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으되 떠들고 주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고 한 반면, 근래의 잔치에 대하여는
“…술이 끝나기도 전에 번거롭고 조급한 관현(管絃)을 뒤섞어 날랜 장고와 빠른 춤을 추되 쉴 줄 모른다. … 글을 갖고 청하는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영관(伶官)이 음악을 제대로 연주할 수 없게까지 되었다.”
고 비판하였다.
☞ ‘비복에게 음악을 가르쳤다’는 것이 풍류방 음악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가르쳤을까?
☞ 『용재총화』에 보이는 ‘영관(伶官)’은 음악을 업으로 삼은 전문 악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대부의 사적 연회에도 기녀와 함께 전문 음악인이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기록만으로 이들이 모두 장악원 등 국가 음악기관에 소속된 악인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2) 세종 32년(1450)에 온 명나라 사신 예겸의 《조선기사朝鮮紀譯》
: 평양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사신을 위한 연도환영을 상세히 묘사.
• 백관을 거느린 왕의 행렬은 주악대를 앞뒤에 세우고 모화관까지 거동하였고, 이를 구경하는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듦.
• 국왕 일행이 광화문 밖에 다다르면 좌우에 문만큼 높이 솟은 산대 위에서 잡희 공연
: 무동을 어깨에 태우는 재주, 땅재주와 같은 근두(筋斗), 줄타기, 죽광대, 사자무, 학무 등
☞ 실록에는 “채붕을 설치하고 광화문 밖에 잡희를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해당 공연의 시행 사실은 확인되나 구체적인 연희 종목이나 공연 양상을 기록하지 않은 반면, 예겸은 공연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3) 『세조실록』 총서의 세조의 악기 연주 기사
: 세종이 세조에게 악기를 배우도록 권했으나 악기 배우기를 뒤로 미루었는데, 어느 날 세종이 악기를 연주해보라고 하자 세조가 미리 배운 안평대군보다 거문고 연주를 잘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내용.
4) 그 외 음악 애호가들
• 당대 음악 명수들과 교류하며 가끔씩은 함께 자기도 하며 거문고 배우는 일에 심취했던 성현
• 김일손의 거문고 애호
Ⅲ. 추가 자료 요약
조선 전기 음악사 연구의 성과를 폭넓게 검토한 김수현·임영선의 연구(김수현·임영선, 「조선 전기 음악사 연구의 성과와 쟁점-2000년대 이후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제72집, 한국국악학회, 2022, 31-61쪽.)에서도 민간의 음악문화에 관한 논의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조선 전기 민간, 특히 민속적 음악문화의 구체적인 양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가 제한적이라는 점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아래 두 연구의 내용을 통해 무속이나 연희와 결부된 음악이 민간에서 폭넓게 향유되었을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조선왕조는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초기부터 무속에 대한 탄압과 배척 정책을 실시했으나 뿌리 깊은 무속을 말살하지 못했다. 이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관아 내에, 심지어는 창덕궁에서도 부근당(付根堂, 신당)이 존재했다. 부근신에 대하여 각 관청에서 정기적으로 의례를 거행했으며, 10월이나 정월, 3-4월에 정기적으로 의례를 거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수시로도 열렸을 것이다. 사림파의 집권을 계기로 무속의 사회적 기능은 사라졌으나, 개인적 기능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에 대한 이유로 이 글에서는 ‘조선왕조 무속정책의 모순’을 들고 있는데, 무속 금압의 일환으로 무격들의 도성 내 거주를 제한하였으나, 이러한 규정은 결국 도성 밖에서의 무업을 인정하는 의미가 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각종 중앙 관청 및 지방 관청의 재정의 상당 부분을 무세로 충당하였다는 점도 지적한다. -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제1장 무속의 역사적 전개 중 ‘근세의 무속’ 요약 |
| 문종실록에 따르면 광대와 서인은 주질(줄타기), 농령(방울받기), 근두(땅재주) 등 규식이 있는 연희를 담당했고, 수척과 승광대는 웃고 희학하는 연희를 담당했고, 악공은 음악을 담당했다. 승광대는 조선 초기에 사원 혁파로 인해 절에서 쫓겨난 재승 출신 또는 절에 소속되어 있던 연희자로 보인다. 고려 시대의 재승들은 승적에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었지만, 조선 시대의 재승들은 사원에서 쫓겨나 호적도 없고, 부역도 하지 않으며, 조세도 부담하지 않는 유랑 예인 신분으로 전락했다. -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제4장 전통 연희 집단의 계통과 활동 중 ‘조선 시대의 연희 담당층’ 요약 |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본문에서 언급한 불교의례 음악문화의 토착화와 무격 제사의 유교식 제례로의 변모는 단순한 종교의례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억불정책과 유교적 예제의 확산 속에서 기존의 음악문화가 무속·민속 등과 결합하거나 재편되는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한성의 음악문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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