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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핑크 - Good Morning Baby
“그래서 도경수한테 바나나 우유를 줬거든? 막 괜찮은데……이러는 거야! 내가 아니라고 다음에 또 빌리려고 주는 뇌물이라면서 주니까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는데 진짜 그때 심장이 딱…….”
“…….”
“야, 내 말 안 들려?”
“나 지금 떡볶이 먹고 있거든? 밥통은 그냥 뚜껑 닫고 조용히 있지?”
“…….”
“너 일부러 돈 안 가져왔지.”
“아, 아니야! 진짜 몰랐다니까? 분명 가지고 나왔는데…….”
변백현의 야심찼던 바나나 우유 전달해주기 계획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벅찬 성공의 드라마로 마무리되었다. 그때의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꽁꽁 싸매져있던 겉껍질이 통쾌한 소리를 내며 벗겨졌고, 이내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알맹이가 도드라져 나왔다. 그에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진 내가 날아갈 듯 웃으며 묵묵히 가방만 싸고 있던 변백현에게 다가가‘오늘은 내가 쏜다!’라는 말과 함께 당당하게 스파게티 집으로 끌고 갔고, 선불이라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세상 그 무엇보다 떳떳한 얼굴로 지갑 안에 들어있어야 할 2만원을 찾았지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내 손에 잡히는 건 어딘가 많이 허전한 감이 드는 단돈 만 원인 것이었다. 머쓱하게 한 장을 꺼내 놈을 바라봤다. 삐쭉거리는 꼴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었다. 우물쭈물 한참을 망설이다‘나 돈 없는데 너 혼자 먹을래?’라는 내 호의는 변백현의‘죽고 싶지’단 네 글자에 사정없이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다소 신분이 대폭 하락한 떡볶이 집에서 저녁을 즐기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 물론 변백현이 아니라 나 혼자 즐기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분식은 가끔씩 먹어줘야 제 맛…….”
“…….”
“아, 배부르다. 더 먹을래……?”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건 어때?”
“아,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다음에는 꼭 사준다니까?”
“됐다, 내가 여자한테 빌붙어서 밥 얻어먹고 사는 등신도 아니고.”
“…….”
“뭐, 뭘 보는데.”
“……아니었어?”
“죽고 싶지 네가.”
“아니, 장난인데.”
마지막 남은 떡볶이를 입에 넣은 채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변백현에게 말대꾸대신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떡볶이도 잘 먹을 거면서 괜히 싫은 척은. 속으로만 삭혔다 속으로만. 변백현 덕분에 도경수 얼굴도 잘 감상했으니까. 성취감에 휩싸여 다소 추하게 웃고 있던 내 얼굴을 유심히 노려보는 변백현이었다. 아직도 쌓인 게 남았나. 일부러 돈을 안 가져 온 것도 아닌데 계속 이렇게 비열한 사람 취급을 당하니 나도 마음이 영 편한 것은 아니었다. 꼭 돈 안 갚고 도망가 버린 사람 같지 않느냐. 뾰로통한 얼굴로 나도 맞은편의 사람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나도 잘못한 거 하나 없으니까. 여전히 말없이 서로만 보다 먼저 날 움직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변백현이었다. 예고 없이 내 쪽으로 손을 뻗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두 눈이 감겨졌다. 이건 아까 체육시간하고 같은 레파토리였다.
“넌 내가 손만 뻗으면 눈 감더라? 내가 너 패냐?”
“아, 아니 갑자기 뻗어서…….”
“이리 와 봐.”
“응?”
“묻었어, 입에.”
“어디? 내가 닦을게.”
“여자들이 여기, 여기? 하면서 여러 번 되묻는 거 싫어해서 그래, 이리 와 봐.”
이걸 어찌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하염없이 멍을 때리며 앞만 바라보니, 여러 번 손만 까딱 까딱 했던 게 답답했던지 표정을 찡그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놈이었다. 또 그 행동에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괜히 혼자 쓸데없는 설레발이었다. 꼼짝없이 석고상처럼 굳어 초조해진 내가 안절부절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애꿎은 눈동자만 굴렸다. 이건 웃어야 할 상황이 아니라 울어야 할 상황이었다. 남자가 내 눈앞까지 다가왔던 경험이 전무였기 때문이었다. 연애 못해본 사람의 비애였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어느새 바로 숨소리가 들릴만한 한 뼘 거리 정도로 다가온 놈이었다. 이어 난감할 정도로 가깝게 그 눈을 마주했다. 벙어리가 돼버린 나였다. 연애고자라고 큰 소리로 광고라도 한 셈이었다. 짧고도 빠르게 제 검지를 들어 내 뺨 주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긴 손가락이었다. 그와 동시에 참았던 숨이 팡하고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너는 어떻게 하면 볼에다가 떡볶이 국물을 묻히냐?”
“…….”
“존나 열정적으로 떡볶이를 흡입하셨나 봐요.”
“……그럴 수도 있지.”
“존경스러워서 그러지. 분명 떡볶이는 입으로 먹는 건데 묻히는 건 볼에다 묻히는 실력이 존경스러워서.”
“아, 진짜 변백현……!”
“장난이야, 등신아.”
“…….”
“나 오늘 먼저 간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던지 해라.”
“왜? 약속 있어?”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너 말고도 상대해줄 사람이 존나 많다는 거 알았어? 그러니까 매사에 감사하라고.”
“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떡볶이 잘 먹었다.”
다급하게 마이를 걸치며 휴대폰의 시간을 한번 확인하는 놈이었다. 아마 꽤나 급한 약속인 듯싶다. 청아한 방울 소리는 고독하게 느껴졌다. 맞은편에 사람이 없으니 배로 느껴지는 공허감은 시리기까지 했다. 급격하게 민망해져 양 입술을 말아 안으로 집어넣었다. 시장 통이 따로 없는 이 곳에서 혼자 무슨 재미로 떡볶이를 먹나 싶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천 원, 이천 원, 삼천 원……. 어떻게 하면 전 재산이 삼천 원이 남을 수 있는 거야. 그냥 차라리 만 원도 안 가져왔다고 해버릴 걸. 묵직한 책들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가벼워진 지갑과는 반비례하는 무거운 마음이 힘 빠진 다리를 간신히 지탱해준다. 엄마한테 또 돈 달라고 하면 불이 나게 혼날 것이 분명했다. 허나 변백현 그 새끼는 더 이상 얻어먹을 것이 없으면 코치를 안 해준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방이 적이었다. 몽롱한 눈으로 지갑을 다시 가방에 넣고 저려오는 몸을 집으로 이끌었다. 어느새 일곱 시만 되도 어둑어둑한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니 컴컴한 하늘 사이에 홀로 밝게 떠있는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새삼 가벼워진 내 재정상태에 대한 울적했던 기분이 사라지고 오로지 저 별 하나만 눈앞에 들어왔다.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꺾었다. 삭막한 하늘에 유일한 별 하나가 가슴을 들쑤셨다. 그 모습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도경수와 내 사이에도 저 반짝 거리는 별이 떴으면, 하는 생각.
“다녀왔습니다.”
“얼른 들어가서 손 씻고 밥 먹을 준비해.”
“아, 나 오늘 밥 먹고 왔어.”
“요즘 왜 만날 사먹고 들어와? 돈이 그렇게 남아돌아? 넌 돈 쓰는 게 쉬운 일 같지만 엄마아빠는 그거 하나 벌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똥 빠지게 일하고 너 용돈 주는 건데 그렇게 펑펑 쓰면 되겠니? 엄마는 천 원 하나 써도 손이 벌벌 떨리더라!”
“…….”
“뭘 봐? 할 말 있어?”
“아, 아니!”
만약 저기서‘엄마 나 돈 좀.’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간 용돈은 무슨 앞으로 내 인생에 용돈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에 말보다 몸이 더 빠르게 반응한 건 내가 생각해도 웃긴 상황이었다. 반사적으로 방문을 열고 몸을 숨기듯 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보이는 바닥 위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것도 잔소리감이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하루 쌓였던 피로와 쓴 맛의 걱정을 다 내던지기라도 한 듯, 침대 위로 엎어져버리는 나였다. 저절로 듣기 흉한 신음은 튀어나왔고, 자연스럽게 눈은 감긴다.
“○○○ 지각, 밖에 서 있어.”
“…….”
젠장, 이보다 더한 거지같은 상황이 있을까 싶었다. 잠시만 쉬는 차원으로 침대에 누워버린 내가 다음 날 아침 창문 사이로 살근거리는 햇빛과 함께 눈을 뜬 건. 어쩌다가 잠든 거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잠에 빠질 수가 있느냐고……. 너무도 매정하게 교실 문을 닫아버린 반장의 행동에 참담한 좌절감을 느끼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지각하면 청소, 그것도 일주일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교실 창가에 얼굴을 걸치고서 친구들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어제 산 화장품 자랑에 여념이 없는 애들이 처량한 내 신세를 살피려 고개를 들 리가 없었다. 이게 내 팔자인가 싶었다. 그저 먹구름만이 잔뜩 낀 암담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세를 고쳐 잡고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데…….
“……아, ○○○.”
“…….”
“안녕.”
“아, 응…….”
도경수였다. 그것도 나와 눈을 마주한 채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도경수. 예전에 내가 느꼈던 놈의 이미지에선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찌질하게 얼굴만 훔쳐보고 도망치듯 교실로 달아났던 인생에선 꿈도 못 꿀 상상 속 이야기였다. 혼자 복도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음에 엄청난 스파크가 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 거라면 도경수도 지각을 한 게 아니냐 이 말이었다. 이거 김칫국이 아니라 진짜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유치해도 어쩌겠냐. 이게 짝사랑하는 자의 특권인데.
“너도 지각했어? 나도 지각했는데!”
“…….”
“……왜 그래?”
“난 지각이 아니라, 지각 체크하는 주번인데…….”
쓸데없는 운명만을 강조하다 정작 중요한 현실을 까먹어버린 나였다. 발끝부터 차오르는 민망함에 귀까지 빨개지는 느낌은 거울을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소리를 제어시켰다. 그럴수록 파도는 더 요동칠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도경수 얼굴을 보겠냐. 날 뭐로 생각하겠냐. 지각 쟁이, 허당……그리고 병신. 지금까지 내가 경수에게 보여줬던 모든 행동은 병신. 한 단어로 정의하기에 충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니, 그냥 펑펑 울어버리고 싶었다. 민망한 상태는 도저히 달아날 기미가 없었다.
“아, 나 바나나 우유 잘 먹었어. 고마워.”
“그래……? 아, 다행이다.”
“나 바나나 우유 제일 좋아하거든.”
“아, 정말? 몰랐네…….”
하마터면 거지같은 발 연기를 하는 게 제대로 들통 날 뻔했다. 꽤 티 나는 연기 톤에 나 스스로 놀라 경직된 몸으로 놈의 표정 변화를 구석구석 살펴봤지만, 조금의 의심도 못 느낀 건지 변함없는 얼굴로 여전히 지각생을 체크하는 종이만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배려 없이 제 몸만 흔들어대던 파도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아, 진짜 다행이다.
“넌 좋아하는 게 뭐야?”
“히익-!”
놈은 전생에 저격수가 분명했다. 내 모든 걸 저격하기위해 태어난 저격수. 갑작스럽게 질문이 오니 조마조마하던 심장에 뻥 하고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모든 것이 내려앉았다. 그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이상한 비명이 튀어 나왔고, 그제야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는 도경수였다. 눈이 크니 느껴지는 양심도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어색한 웃음으로 애써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혼자만의 외로운 몸부림이었다. 놈은 신경도 안 쓰는데, 나만 혼자 창피해하고, 부끄러워하고, 무마하려 하고. 현실을 자각하고 놈이 내게 던진 질문을 천천히 곱씹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물었다. 문제의 그 ‘좋아하는 것’에 대해 멀쩡했던 머릿속은 바쁘게 일하는 시계태엽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몇 초가량이었지만 그동안에 변백현이 내게 해주었던 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나열해봤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지금의 난 그걸 꼼짝없이 증명한 셈이었다.
“나도 바나나 우유 좋아해!”
“…….”
“똑, 똑같네.”
경수가 좋아하면 거면 나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거라면 나도 싫어해라. 그건 신의 한 수였다. 변백현은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미리 대비해서 알려준 건지도 모른다.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경수도 그랬다.
“○○○, 너 혹시 변백현이랑…….”
“응?”
“아니야, 잘못 말했다.”
“왜? 뭔데?”
“맞다, 네가 종인이한테 전해준 거 그거 왜 준거야?”
“응? 내가 뭐 줬……아니, 왜?”
“너 걔한테 공주 거울 줬잖아. 김종인이 그거 보고 기겁하던데.”
“공주거울? 아아, 그게…….”
“준 이유 궁금해서……그냥 호기심이야. 곤란하면 미안해.”
곤란할 건 없었다. 그 모든 건 변백현의 지휘 하에 일어진 일이였으니까. 마치 고교시절 부모님과 같이 골든벨을 보며 우리 딸도 저 정도는 맞추는 구나, 라는 칭찬을 듣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온 신경을 다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 백 점은 거뜬히 넘을 수 있을 텐데.
“아, 나 들어가야 한다.”
“아, 응!”
“잘 가.”
막막한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건지 때마침 수업 종은 울렸고, 눈앞에 주인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도 나 또한 그랬다. 경수는 아른거리며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그에 아쉬워할 틈도 없이 나도 등을 돌렸다. 오늘은 경수가 먼저 내게 인사를 해준 날이자, 인사를 한 날이니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걸 물어봤다는 게 가장 의미가 컸다. 나 진짜 계 탄 거 맞지? 오늘 지각한 건 다 액땜이었나 봐. 이 기가 막히는 상황을 자랑 할 위인은 단 한 명이었다. 얼른 교실로 들어가 변백현에게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 다 늘어놓을 셈이었다. 약간의 과장도 보태야했다. 원래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땐 약간의 과장도 필요한 것 아니겠냐. 느긋하던 발걸음이 점차 속도를 냈다.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변백현을 찾을 예정이었다. 마냥 즐거운 얼굴로 가방을 고쳐 매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원상태로 시선을 고정하고 문 앞에 자리 잡으면……타오와 같이 서서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변백현이 보이는 것 아니겠냐.
“뭐야, 나와 있었어? 야, 나 지금 대박이었어!”
구부정한 자세로 짝 다리를 짚으며 심드렁한 모양새로 나를 응시하고 있던 놈과 눈이 마주쳤다. 그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놈의 팔뚝을 사정없이 때리며 하늘 위로 붕 뜬 내 마음을 대변했다.
“봤어.”
“응?”
“봤다고.”
“진짜? 나 저번에 네가 알려준 대로…….”
“나 지금 매점 가, 나중에 얘기해라 그런 건.”
“야, 변백현.”
“알겠으니까 나중에 하자고.”
독이 발린 말을 내뱉는 놈의 기분을 건들고 싶지 않았다. 대답 대신 한 발자국 뒤로 몰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내 앞을 쌩하니 지나가 버린 변백현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혹시 놈이 기분이 좋지 않았을 때, 내가 눈치 없이 행동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은 나를 미치도록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래봤자 갑갑함은 풀릴 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다른 방향으로 고심을 해봐도 이렇다 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칭찬받아야 마땅한 순간이었다. 이건 내 합리화일수도 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놈의 도움 없이 순발력을 발휘했고, 그에 경수도 호의적으로 답해줬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변백현이 화낼 타이밍이라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아무 일도 아닐 거라며 또 다시 자기 위안을 했다. 힘없는 약자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어 책상에 앉아 느릿하게 고개를 내려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필통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큰 돌덩이와 함께 변백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부분에는 도가 튼 새끼였다. 한참을 가방 지퍼와 씨름하고 있는데, 그런 내 턱밑으로 익숙한 찬 기운이 느껴지는 것 아니겠냐. 그 감촉에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쭉 빼니, 머쓱하다 못해 무안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 변백현이 있었다. 놈이 들고 있는 건 초라한 빨대 하나가 꽂혀있는 바나나 우유였다.
“먹을래?”
“…….”
“미안, 아까는 타오가 자꾸 귀찮게 해서 그냥 떼어내려고 매점 간다고 거짓말 친 거야.”
“……아.”
“그래서 이거 먹을 거냐고 안 먹을 거냐고, 너 안 먹으면 내가 먹는다?”
“먹을 거야!”
바나나 우유 하나를 들고 내 시야 근처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식욕을 자극하는 말을 내뱉는 변백현의 농락에 제대로 넘어가버리는 바보 같은 나였다. 혹시라도 정말 놈이 우유를 먹어버릴까 봐 뺏기기 전에 다급하게 손을 뻗어 우유를 쟁취했다. 또다시 거짓말이라고 장난이라도 칠까 그대로 품 안에 넣어 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아까 전은 야속했지만, 바나나 우유는 바나나 우유고, 그건 그거니까.
“그래서 도경수가 너한테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봤다고?”
“응, 그래서 내가 바나나 우유 좋아한다고 했잖아. 네가 저번에 상대가 좋아하는 거면 나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거면 나도 싫어하라고 그랬잖아.”
“아주 머리가 그런 쪽으로 잘 돌아가시나 봐요.”
“뭐, 놀려도 상관없거든? 나 지금 기분 엄청 좋아.”
“이제 혼자서도 잘하네? 나 필요 없다 이건가.”
“내가 그동안 너한테 투자한 돈이 얼만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야, 나한테 투자한 돈 그거 아까워하면 안 되는 거야, 이렇게 엄청나게 돌아왔잖아. 맞지?”
“다음 시간 뭔데? 얼른 자리 가야하는 거 아니야?”
“아, 왜 내 말 무시까냐고.”
“아, 다음 시간 뭐지? 시간표로 봐야겠다.”
“시발, 야.”
“문학? 아, 나 문학책 안 가지고 왔는데!”
시험 기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이유로 그 무거운 문학책을 끙끙거리며 집까지 들고 갔던 게 화근이었다. 어차피 주말이니까 새벽에 공부한다는 핑계는,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가져오는 것까지 까먹어버린 등신 같은 상황을 초래했다. 요 며칠 내내 도경수에게 온 신경을 쏟았던 탓에, 이렇게 정신없이 사는 사람으로 돼버리곤 했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얼른 문학책을 빌려야만 했다. 그러기에는 제일 가까운 옆 반에 가야하는데 또 그러기에는 빌릴 사람이 도경수와 김종인 뿐이라는 답답한 현실의 벽이 꼼짝없이 내 발목을 잡아버린다. 목을 졸라오는 두려움에 다시금 용기를 내었다. 일단은 살고 보자였다. 가끔은 계획에 어긋난 삶도 삶이니까.
“누구한테 빌리게?”
“옆 반에 내가 아는 애가 도경수랑 김종인밖에 더 있어? 급해, 잠깐만.”
몸은 분명 복도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난 답답하게도 원상태 그대로였다. 우악스럽게 내 팔목을 잡아챈 변백현 때문이었다. 그에 속이 터지랴 갑갑함이 몰려왔다. 순간적으로 초조함은 배가 되어 일단 힘으로 놈을 밀치려고 했다. 그마저도 같은 나이인 남자애 앞에선 다 무용지물이 돼버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나를 응시하는 눈이 그렇게나 당황스러울 수 없었다. 이건 내가 놈을 알고 처음 접해본 눈이었다. 낯간지러운 그 시선을 그대로 견딜 수가 없어 고개를 홱 하고 돌려버렸다. 또 나를 놀릴 이상한 구실을 찾고 있는지도 모를 테니까 말이다.
“너 그럼 걔네한테 빌리고 나서 또 고맙다고 뭐 사줄 거 아니야.”
“……뭐?”
“그럼 내꺼 빌려라.”
“무슨 소리야.”
“나도 지금 바나나 우유 먹고 싶거든.”
앞뒤 없는 말에 눈썹 사이를 좁혔다. 곧이어 두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뜻이었다. 우리 반 수업인데 어떻게 책을 빌려주느냐 이 뜻이었다.
“나도 바나나 우유 좋아해.”
미처 내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홀연히 등을 돌려버리는 변백현의 행동에 당황스러운 건 여전히 똑같았다. 이내 내 의아함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자신의 문학책을 들어 내 책상 위로 던지듯 내려놓는 놈의 행동에 어이없는 헛웃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지금 바나나 우유가 먹고 싶어서 자기 책 가져다 놓은 거야? 도저히 이해 못할 놈의 행동에 조종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기계가 될 지경이었다. 이어 기막힌 타이밍에 선생님이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때까지 놈은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휴대폰을 들고 제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무서울 정도로 뻔뻔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무서울 정도로 난감하고, 난감할 정도로 무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