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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환자의 증상경험
(손명자, 배정규, 정신분열병과 가족, 2003, 저서의 6장)
이 장의 목적은 ‘환자가 조현병으로 인하여 어떠한 경험을 하는가’를 소개하는 것이다. 환자의 경험은 증상에 따른 경험과 회복과정에서의 경험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장에서는 전자만을 다룰 것이다. 회복과정에서의 경험은 앞의 ‘재기의 철학’에서 기술되었다.
조현병 진단기준에 명시된 증상은 망상, 환각, 횡설수설, 이상한 행동, 음성증상인데, 이는 진단에 필요한 기준일 뿐, 환자들은 실제로는 더 많은 증상들을 경험한다. 이 장에서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증상을 나열식으로 소개할 것이며, 그때의 환자의 심정을 설명할 것이다.
우리들 대다수는 정신병 증상을 겪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특이한 경험이기에 보통사람들로서는 미루어 추측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환자의 입장이 되어 그의 경험을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환자를 돕고자 한다면 환자의 경험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환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족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환자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하면, 조현병은 한 인간의 비극이다. 그의 경험과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조현병은 가족의 재난이 된다. 왜냐하면 가족 서로를 이어줄 연결고리가 없고, 상처를 치유할 묘약이 없기 때문이다. 조현병에 대한 이해는 그 병을 신비스러운 무엇으로 여기지 않게 하며 비밀스러운 어둠의 장막으로부터 이성의 햇살 아래로 병을 드러내 준다. 병을 이해하게 되면서, 병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두려움으로부터 서서히 슬픔으로 변한다. 우리를 위하여, 이것은 의미있는 변화인 것이다.” (토레이의 책 6쪽)
환자의 경험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환자의 고통과 절망을 함께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본 장을 공부해 나가면서 가족들이 환자의 입장에서, 환자의 심정으로, 환자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1. 사고장애
사고장애에는 사고과정의 장애와 사고내용의 장애가 있다. 사고과정의 장애란 사고의 흐름이 잘못된 것으로서, 이를 ‘연상의 이완’이라고 하며, 사고내용의 장애란 엉뚱한 생각을 사실로 믿는 것으로서 이를 ‘망상’이라고 한다. 먼저 ‘연상의 이완’을 살펴보고, 그 뒤에 망상을 살펴보겠다.
1) 연상의 이완
일반인의 경우 생각은 앞뒤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일정한 방향성과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즉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관련된 내용을 조리있게, 순서적으로 차근차근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현병이 발병하면 이것이 어렵다.
환자들의 생각은 앞뒤의 연결성이 부족하거나, 토막토막 단절되어 있어서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은데, 전문가들은 이를 ‘연상의 이완’ 또는 ‘연상의 해이’라고 한다. 정신의학 교재에 수록된 환자의 편지를 예로 들어 보자.
“부모님 전상서.
햇빛을 등지고 글월로 소식을 전합니다. 시간의 흐름이 늦은 것 같군요. 이 몸은 내 몸이 아이요 바로 여러분들의 노예입니다. 존경하는 어머님! 감사합니다.
1969년 2월 2일 먼지가 뭉쳐서 떨어졌다. 즉, 부활이 됐지! 맛있게 라면을 먹다. 인내로 이성을 가져라. 노력 MP환자. --발산은 능력을 가져야. 완전무결. 실패하라! 재 출발. 2월은 왔다.” (「정신의학」, 169쪽)
이 예를 수록한 교재에는 “물론 이 환자의 횡설수설 가운데서 환자가 인내와 노력으로 실패를 이겨내고 재출발을 하여 새사람(부활)이 되려는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렇듯 그 의미를 다소나마 파악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아예 의미 파악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환자가 연상의 이완을 보일 때, 가족들로서는 환자가 동문서답을 하거나, 대화에 집중을 못하거나, 앞 뒤 두서가 맞지 않는 말을 하거나, 갑자기 엉뚱한 말을 지껄이거나, 혼자서 계속 중얼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환자 본인도 자신의 생각이 두서가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답답해한다. 회복된 환자들이 보고한 증상경험을 통하여 환자의 입장에서 이를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설명하겠다.
① 환자의 경험 : ‘자극의 홍수’와 ‘생각의 질주’
대다수 환자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오르거나,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빨리 전개되어 고통을 겪는다.
“내 생각은 뒤죽박죽된다. 나는 어떤 것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지만 그 생각을 마치지 못한다. 대신에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과 관련된 온갖 것들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토레이의 책 18쪽)
“나의 문제는 너무나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당신은 어떤 것, 예를 들어 재떨이에 관해 생각할 때, ‘이건 담배를 끄는데 쓰는거야’라고 생각할 뿐이지만, 나는 재떨이와 관계된 것들을 한꺼번에 수십가지나 생각한다.” (토레이의 책 10쪽).
“내 생각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책 한 페이지를 읽으려 해도 한참 걸리는데, 그 이유는 단어 하나로 인하여 열가지 서로 다른 생각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45쪽)
“생각의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으며, 결국 복잡하게 뒤엉킨 채로 끝났다. 아니 사라졌다. 나는 전혀 그것의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45쪽)
이처럼 환자들의 머리 속에는 한 번에 한가지 생각만 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이 이것저것 동시에 떠오른다. 그런데 이들 중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이고, 어느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를 종잡을 수가 없다.
이를 ‘자극의 홍수’, 또는 ‘생각의 홍수’, ‘생각의 질주’, ‘정보과잉’, ‘과중부하’라고 하는데, 환자들은 이를 ‘동시에 두세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라고 하거나 ‘동시에 수십통의 전화를 받는 것 같다’라고 비유한다.
② 환자의 경험 : ‘통제불능감’
이러한 상황에서 환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생각을 몰아내거나, 생각의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환자에게는 생각이 마치 자신의 생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내 생각은 그 자체의 생명과 방향성을 지닌 듯 했다. 그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생각은 자신의 의도를 내게 알려 주지 않은 채, 그것에 관해 생각해 볼 틈도 주지 않은 채, 나를 끌어 들였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어떤 것을 행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는데, 정말로 조금이라도 생각한 흔적이 없었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46쪽)
환자는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심한 두려움과 공포를 경험하며 또한편으로는 분노를 느끼게 된다. 생각이 뜻대로 되지 않는 중에도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를 알아내려고 애를 쓰며, 결과적으로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여 망상을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관련없는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이 제멋대로인 것에 대하여 ‘누군가 생각을 내 머리속에 집어 넣는다(사고주입망상)’거나, ‘누군가 내 생각을 조종하고 있다(피조종망상)’고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③ 설명방식 : 여과장치(필터)의 손상
일부 전문가들은 ‘환자가 왜 자극의 홍수에 빠지는가’에 관한 가설을 내놓았는데, ‘조현병 환자는 뇌에 입력되는 자극들 중 불필요한 자극을 걸러내는 여과장치(필터)가 손상되어 있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이 설명에서 주장하는 필터라는 개념은 아직까지는 가상적인 개념이다. 그 주장을 좀더 상세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림 6-1>. 인간의 정보처리과정
<그림 6-1>처럼 인간의 뇌는 정보를 처리하는 기관이다. 어떤 한 순간에 우리의 뇌에 입력되는 자극의 양은 엄청나게 많다. 뇌가 이 모든 자극을 모두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불필요하다. 따라서, 인간의 뇌는 어떤 한 순간에 가장 중요한 자극만 선택하여 받아들이며, 불필요한 자극은 여과장치(필터)에 의하여 미리 걸러내어 진다.
조현병 환자는 뇌는 여과장치(필터)가 손상되어 있으며, 따라서 중요한 정보와 중요하지 않은 정보가 뒤죽박죽된 채로 한꺼번에 입력된다. 결과적으로,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너무 많기 때문에 환자의 뇌는 처리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말하자면 환자의 뇌는 ‘자극의 홍수’ 상태가 된다(<그림 6-2>).
<그림 6-2>. 정상적인 필터와 부서진 필터
여과장치(필터)의 손상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환자에게 유입되는 자극의 양을 줄여 주라고 권고한다.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자극을 줄이는 방법은 단순화, 규칙화시켜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소음을 줄여준다. 복잡한 곳을 피한다. 말을 짧고 간단명료하게 한다. 한 번에 한가지 말만 한다. 일상생활을 규칙화한다. 같은 일과를 반복한다.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는다. 한 번에 한가지 일만 한다. 이렇듯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자극을 줄이는 방법을 ‘스트레스관리’라고 하는데 10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한편 내부로부터 유입되는 자극이 있는데, 우리의 기억이 회상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을 줄이는 방법은 적당한 활동을 하는 방법이다. 운동, 청소, 빨래, 목욕, 음악감상 등이 좋은 방법이다.
2) 사고의 정지
앞에서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리 전개됨으로서 빚어지는 문제들을 살펴 보았다. 이제 그 반대의 경우를 살펴 보려 한다.
환자들 중에는 생각이 잘 나지 않거나, 생각이 너무 천천히 진행되어서 고통을 받기도 하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사고의 지연’이라고 한다. 그리고 생각이 완전히 정지되는 것을 ‘사고의 차단’이라고 한다.
“한참을 끙끙대며 애를 써야만 사람과 장소와 사물의 이름과 모양이 생각나는 경우가 잦았다. 단지 이름만이 아니라, 친한 사람의 얼굴이나 익숙한 물건의 모양을 머리에 떠올릴 수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 생각을 떨쳐버리지도 못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이나 모양이 생각날 때까지, 기억을 뒤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름이나 모양이 떠오르면, 또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머리에 떠올라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끙끙대야만 하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47쪽)
“나는 때때로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처음에는 즉흥적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유창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전원이 끊어지거나, 단어가 이전과는 모순되게 느껴진다. 그러면 나는 혼란에 빠지게 되며, 말을 더듬거나, 중단하거나, 자리를 피하게 된다.” (토레이의 책 22쪽)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러한 ‘사고의 지연’이나 ‘사고의 정지’를 환자가 ‘자극의 홍수’나 ‘사고의 질주’에 대응하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즉 너무나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괴롭기 때문에, 불필요한 생각을 걸러낼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생각 자체를 꺼버린다는 설명이다.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중단되는 또다른 이유는 지각장애 때문이다. 환자들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정상적인 방식으로 지각하고, 분류하고 종합하는데 곤란을 겪는다. 이에 관해서는 지각장애 부분에서 설명하겠다.
‘사고의 정지’를 경험할 때 일부 환자는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뺏어갔다(사고박탈)’고 생각하여 망상을 갖게 되는 수가 있다. 또한 많은 환자들이 ‘기억력이 없어졌다’고 호소하며, 가족들도 ‘환자가 바보가 됐다’거나 ‘지능이 떨어졌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지능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환자는 자신의 문제와 싸우고 있는 중이므로, 가족들로서는 환자를 재촉하지 말고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하며, 격려해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환자가 몰라서 묻는 것들이 있으면 한심하게 생각하지 말고 친절하게 답해 줘야 하며, 필요한 일들은 종이에 메모해 주며 기초부터 단계적으로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한다.
또한 사고의 정지가 ‘자극의 홍수에 대한 하나의 대응방식’이라는 설명이 있으므로, 이 경우에도 주변환경을 단순화시켜 주어야 하며, 적당한 신체활동을 하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3) 망상
조현병 환자는 대다수가 망상 또는 망상적 사고를 보인다. 망상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는 ‘잘못된 신념’이며, 대화나 설득으로 교정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때로 환자가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도 남들이 차근차근 설명하거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면 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이처럼 그 강도가 망상에는 미치지 않는 경우를 망상적 사고라고 한다.
대개 망상의 초기에는 환자가 자신의 망상에 확신을 갖지 못하며, 자신의 생각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의문을 품고 당혹해 한다. 그러다가 병이 진행됨에 따라 망상은 점차 체계화되고, 환자의 확신은 굳어진다.
환자의 회복수기 중에 망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상세히 묘사한 귀절이 있기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환자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에는 환청이 시작되지는 않았다고 하므로, ‘환청과 유사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는 듯한 느낌(이를 망상적 지각이라 한다)’이 있었던 듯하며, 환자는 이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망상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학기말 시험. 시험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식히려 기숙사에서 나와 친구의 자취방으로 향하였다. 길을 걷는데 비닐껍질이 내 발부리에 차였다. ‘자유시간’이라 쓰여 있었다.
‘지금까지 공부 열심히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자유시간이야. 맘껏 놀라구!’ 하고 그 쓰레기는 내게 말했다... ‘그냥 비닐껍질이야’ 라고 해버리지 못하고 ‘누가 이런 메시지를 내게...’ 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런 기묘한 일은 친구의 자취방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었다. 모두들 암암리에 내 얘기를 하는게 아닌가? 내 흉도 보고 그들이 절대로 알 수 없는 내 얘기까지. ‘이건 모함이야!’ 나는 뛰쳐 나오듯 그 방을 나와 기숙사 휴게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세상에 텔레비젼에서도 내 얘기를...... 처음엔 내가 친구들에게 실수한 게 있어 따돌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온 세상이 내 얘기라니.
‘누구야? 누가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거야!’ 난 몹시 혼란스럽고 화가 나 있었다. 그 다음 순간 ‘어떻게?’라는 의문에 봉착했다. ‘방금 내가 방에서 혼자 했던 일들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면 나를 미행하고 방도 도청했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왜?’ 라는 의문이 생겼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나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군가 나의 나쁜 점들을 벌하려 하나 보다.’
다음엔 친구, 아니 진정한 동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 편에 서서 진상을 시원스럽게 밝혀주는 이도 나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해 주는 이도 없었다.
‘너 무슨 소릴 하는거야? 그게 말이 돼?’ 이구동성이었다. ‘나만 빼놓고 이미 조직(?)이 단단하게 짜여졌구나.’
시험이고 뭐고 보따리를 싸 엄마 품으로 돌아왔건만 엄마까지도 그러는게 아닌가. 난 상처를 주는 그들을 피해 내 방안으로 틀어 박혔다. 사사건건 나의 수치스런 부분까지 공공연히 떠들어대고 있는 텔레비젼도 라디오도 이젠 결코 즐길 수 있는 것이 못되었다.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가운데 ‘왜 학기도 마치지 않고 돌아왔느냐’, ‘왜 방안에만 있느냐’고 오히려 내가 묻고픈 것들을 내게 물어대던 엄마는 이젠 나를 진짜로 악당들(?)에게 내주어 버렸다. 정신병원차가 집에 와 나를 강제로 끌고 간 것이었다. (「한그루 싱싱한 소나무처럼」, 7-8쪽)
망상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리고 그것은 망상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구분된다. 가장 흔한 것은 피해망상과 관계망상이며, 과대망상이 그 다음이다.
피해망상이란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 경우 환자들은 누군가 자신을 고의적으로 괴롭힌다거나, 미행한다거나, 모함한다거나, 감시한다거나, 조롱한다고 호소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으로는 안기부 요원, 간첩 등이 거론되기도 하고, 이웃사람이나 가족 중의 한사람이 거론되기도 한다.
관계망상이란 다른 사람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이나 행동이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예로서 상대방이 자신을 쳐다 보는 것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증거라거나,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또는 다른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라거나 자신의 신상에 관한 내용이라고 믿는다. 또 가게의 간판, 노래 가사, 신문기사 내용, TV의 방송내용 등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계망상을 지닌 환자는 종종 낯선 사람을 상대로 자신을 험담했다거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며 시비를 걸거나 사과를 요구하는 행동을 보인다.
과대망상이란 자신이 아주 위대한 인물이거나, 혹은 특수한 능력을 가졌다거나,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재산이 많다거나, 학벌이 좋다고 믿는 것이다.
피해망상, 관계망상, 과대망상 외에도 다양한 망상이 있다. 예로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너무나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을 외부의 탓으로 돌려서 ‘누군가 자신의 머리속에 생각을 집어 넣는다’고 믿는 사고주입망상이 있고, ‘생각이 자신의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것’을 외부의 탓으로 돌려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는 피조종망상이 있다. 또한 ‘생각이 갑자기 정지되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것’ 또는 ‘단어의 뜻이나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 등을 외부의 탓으로 돌려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뺏어 갔다’고 믿는 사고박탈망상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고 믿으며, 그 원인을 ‘신문, 방송, 텔레비젼에 보도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송망상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텔레파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조종망상이 있고, ‘자신의 몸에 심한 병이 있다거나, 몸안에 벌레나 곤충이 들어 있다’고 믿는 신체망상이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거나 ‘자신을 유혹한다’고 믿는 색정망상도 있다. 물론 그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망상들이 있다.
이렇듯 망상의 종류는 다양하며, 망상을 갖게 되는 이유도 다양하다. 예로서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하거나 또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망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과대망상 또는 피해망상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감각경험이 변화하여 착각을 자주 경험하거나, 환각을 경험할 경우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한 끝에 망상을 갖게 되는 수가 있다. 예로서 환자가 자신의 환각경험을 설명하기 위하여 텔레파시라든가, 신의 계시와 같은 망상을 갖게 되는 경우이다.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거나 자신의 능력이 저하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그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는 망상을 갖게 될 수 있다. 예로서 사고주입망상, 피조종망상, 사고박탈망상이 이러한 경우의 예가 된다.
망상의 내용은 개인에 따라서 다르지만,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도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신이 들어왔다는 망상을 가질 수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 주변사람들이 그것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많은 환자들이 망상에 매달리며, 그것을 포기하기 어려워 한다. 한 환자의 예를 보자.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을 보게 되었고 그후 내가 절대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글로 쓰는 내용대로 세상이 바뀐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내 사상을 글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이 지구가 종말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과 이 세상을 개벽시킬 존재는 오직 나뿐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였고 조금씩 그런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구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종교망상을 버리고 나면 왜소해지거나 내가 생각하고 느껴오고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너지고 사라져 버리고 말 것 같은 불안감 등이 나를 종교망상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하였습니다.” (「한그루 싱싱한 소나무처럼」, 3-4쪽)
환자들은 망상을 버리고 나면 한동안 자신이 옳다고 믿어 왔던 모든 것에 회의가 생기며, 판단의 기준을 잃게 되어, 매사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한 환자의 예를 보자.
“머리속에 가득 차 있던 망상이 싹 물러가 버리니까 머리 속이 텅 빈 것 같고 내 힘으로 사소한 판단을 하기도 어려웠다. 예를 들면 그때 네 살이던 조카를 데리고 어린이 놀이터에 갔는데 조카가 탄 그네를 밀어 주면서 옆 그네에 탄 아이를 밀어주어야 하는지 밀어주지 않아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다음에 병원에 가서 L선생님께 여쭈어 보자 ‘자기 조카나 밀어 주는 것이지 뭐’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2년 동안 사리판단을 하고 사물과 사람에게 건강하게 대하는 것을 익혔는데 그 방법이 의문나는 점들을 리스트 적듯이 종이에 주욱 적어 가지고 L선생님께 가서 ‘선생님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한그루 싱싱한 소나무처럼」, 56쪽)
환자의 망상은 대화나 설득으로 교정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으므로, 가족들이 환자의 망상을 나무라거나,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 하면, 환자는 자신의 망상을 더욱 정교화하게 되고, 가족과 흔히 말다툼을 하게 된다. 따라서 오히려 환자의 망상이 심해지고, 가족과의 관계는 악화된다.
망상은 환자가 불안하고 힘들 때 심해지고, 편안한 시기에는 줄어든다. 또한 욕구가 좌절되면 심해지고, 욕구가 충족되면 줄어든다. 따라서 망상 자체를 다루기 보다는 ‘환자의 고통이 무엇이고, 바램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그것을 해결해 줘야 한다.
2. 지각장애
1) 환청
조현병 환자의 절반 정도가 환청을 경험한다. 환청은 ‘헛소리를 듣는 것’이다. 가볍게는 바람소리 같은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어떤 소리인지를 잘 구분할 수 없는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기도 한다. 이것은 가벼운 환청이며, 이를 이명(귀울림)이라고도 한다.
이보다 심한 환청이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환청인데, 조현병 환자의 환청은 주로 이 경험이다. 환청의 목소리는 잘 아는 사람의 목소리인 경우도 있고 낯선 사람의 목소리인 경우도 있다. 또한 한사람의 목소리인 경우도 있고, 여러 사람이 주고 받는 대화인 경우도 있다.
환자들의 회복수기에 처음 환청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있기에 이를 소개한다.
“난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순간 ‘괜찮아’ 하고 누군가 마음속에서 말을 했다. 외로웠던 나는 그 다음부터 맘속으로 그 누군가와 얘기하는 버릇이 생겼다.” (「한그루 싱싱한 소나무처럼」, 9쪽)
이 경우와 유사하게, 한 연구에 의하면 환청은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말이 자신에게 들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 연구에 의하면, 조현병 환자에게 숨쉬면서 속으로 하는 자기 말을 못하게 하였더니 환청이 사라졌다고 보고한 환자가 많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환청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위의 예에서는 ‘누군가 마음속에서 말을 했다’고 표현했지만, 대다수 경우에는 환청은 통상적인 대화처럼 생생하게 들린다. 따라서 환자는 그것이 환청인지를 알지 못하며, 실제로 누군가가 주변에 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거나, 문밖에 나갔다가 들어 오는 등, 누구를 찿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그리고 “혹시 무슨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라고 질문한다. 몇차례 환청 경험을 한 뒤에야 그것이 환청임을 알게 되는데, 이때 환자는 매우 놀라게 된다. 저자가 상담하였던 환자의 경우를 예로 들겠다.
“어느날 방에 누워서 자려고 하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고 집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후로 낮에도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누군가 나를 놀리려고 장난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잡기만 하면 혼내 주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벌판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변에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고, 너무나 겁이 났습니다. 집을 향해서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환청은 그 자체로도 충격적이지만, 설상가상으로 그 내용이 환자를 괴롭힌다. 비록 환청의 자세한 내용은 환자들 마다 다르지만, 대개 듣기 좋은 내용보다는 환자를 괴롭히는 내용이 흔하다. 즉 자신의 행동을 일일이 간섭하거나, 자신을 욕하거나, 협박하거나, 자신에게 명령하는 목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다. 환자는 이러한 환청을 들을 때 심한 불쾌감, 두려움, 또는 분노를 느낀다. 많은 경우 환자들은 환청에 저항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환청은 어떤 능력 많은 언니도 되고, 역시 능력이 큰 어떤 아저씨도 되었다가 하나님으로 둔갑을 했다. 하나님은 쉴 새 없이 계시도 내리고 예언도 하고 명령도 하였다.
하나님은 인자하게 이 말세에 나를 메시아로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고 야릇하다 못해 신비하기까지 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빠져 들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은 돌변하여 나의 죄를 꾸짖으시며 내게 속죄를 강요했고 난 면도칼로 다리를 10cm나 그어대고 불로 손과 다리를 다섯군데나 지져 속죄하려 하였다.” (「한그루 싱싱한 소나무처럼」, 10쪽)
대다수 환자는 환청경험을 괴로워하며 환청을 듣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래서 TV나 음악을 크게 틀거나, 귀를 막거나, 허공을 향해서 주먹을 휘두르거나, 갑자기 소리를 꽥 지른다. 환청은 대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덜하며, 혼자 있을 때 더욱 심하다. 따라서 환자는 다른 사람과 계속해서 얘기를 나누려고도 한다. 이런저런 방법으로도 효과가 없으면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잠에 골아 떨어진다.
환자들은 이렇게 괴로워하면서도 대개는 가족에게 환청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환청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상담했던 그 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아무한테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를 미쳤다고 할테니까요. 그 뒤에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귀에서 소리가 들리면, 나는 큰소리로 욕을 했습니다. 내가 갑자기 욕을 하자 주변사람들이 놀라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 봤습니다.”
환자가 환청경험을 털어 놓기 위해서는 가족에 대한 신뢰감이 깊어야 한다. 환자가 환청경험을 털어 놓을 때, 가족은 환청의 내용을 듣고 놀랄 것이 아니라, 환청으로 인한 환자의 충격, 놀람, 두려움, 공포에 신경을 써야 하며, 환자에게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가족들이 당황하게 되고, 가족 자신이 놀라기 때문에, 환자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지 못한다.
환청은 내용에 관심을 가질수록 증가한다. 따라서 가족들은 환청 자체가 아니라, 환청을 겪을 때의 환자의 불안한 심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환청은 힘든 시기에는 증가하고, 편안한 시기에는 감소한다. 따라서 환청이 있다는 것은 ‘환자가 불안하고 힘들어 한다’는 신호이다.
환청은 활동을 하게 되면 감소한다. 이러한 원리를 스스로 터득하여 사용하고 있는 환자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환청이 들리면 빨래를 한다든지,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2) 기타 환각
비록 환청이 조현병 환자들이 경험하는 환각 중 가장 흔하기는 하지만, 기타 환각도 흔히 경험한다. 환각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 신체의 다섯가지 감각기관 모두에서 가능하므로, 그것이 느껴지는 감각기관에 따라 각각 환시, 환청, 환촉, 환후, 환미라고 한다. 전체 조현병 환자의 70% 정도가 환각을 경험하며, 여러 가지 환각을 동시에 생생하게 경험하기도 한다.
“약을 끊은지 보름. 며칠을 잠을 자지 못한 채 내가 좋아하는 남자 생각만 붙잡고 있었더니 그 남자가 옆에 와 있는 것이 보이고 그 남자의 핸드폰이 울리는 환시와 환청이 다시 다가왔다.” (「한그루 싱싱한 소나무처럼」, 14쪽)
환시는 환청 다음으로 흔하다. 이것은 ‘헛것을 보는 것’이다. 환시는 빛, 기하학적인 도형, 벌레, 동물, 사람의 모습 등으로 경험된다. 위의 예처럼 환시와 환청이 결합되면 실제와 같은 생생한 장면으로 경험된다. 환시는 마약중독 상태에서 가장 흔하며, 노망에서도 흔하다. 이들 정신질환에 비하여 조현병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환시가 적은 편이다.
환후는 남들에게는 경험되지 않는 냄새를 맡는 것이다. 환후를 경험하는 환자는 흔히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호소한다. 또 실내에서는 자꾸만 창문을 열어 두곤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을 피하는 행동을 보인다. 따라서 환후가 있을 때는 흔히 심한 대인관계 장애를 동반한다. 조현병보다 대인공포증에서 환후가 보다 흔하다.
환미는 미각이 변화하여 음식에서 이상한 맛을 느끼는 것이다. 환미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환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환각이라고 하려면 음식을 먹지 않을 때도 이상한 맛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음식을 먹을 때 그 맛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을 환미라고 한다. 환미는 흔히 망상과 결합된다. 즉 환미가 있을 때 환자들은 ‘누가 음식에 독을 탔다’고 호소한다. 따라서 ‘음식에 독을 탔다’고 말하며 식사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환미가 있을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환촉은 아무것도 몸에 닿지 않았는데도 이상한 촉감을 느끼는 것이다. 환촉은 주정중독 환자가 술을 끊었을 때 금단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여러가지 환촉이 있지만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여자환자들의 경우에는 성적흥분과 연관된 환촉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경우 흔히 누군가가 자신을 등뒤에서 껴안는다거나, 매일 밤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강간한다고 호소한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환자들은 대개 환각경험을 숨긴다. 그러나 비록 숨기더라도 우리는 환자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환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까닭없이 실실 웃거나, 상대방의 말을 즉시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있거나, 심한 망상을 보이거나, 상황에 부적절한 행동을 보이거나,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난폭한 행동을 보일 때는 환각경험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3) 지각경험의 변화
환자의 지각장애 중에서 ‘환각’이 워낙 독특한 경험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전문가는 기타의 지각장애를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전문가들은 전통적으로 조현병의 핵심적인 문제는 ‘사고장애’라는 생각을 해 왔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지각장애가 조현병의 일차적 문제라고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대다수 환자들이 지각장애를 경험하고 있으며, 지각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각경험에 변화가 오면, 사고의 혼란이 오고, 대응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환자들이 망상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의 지각경험이 변화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사고의 혼란’ 역시 변화된 지각경험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① 민감성의 증가
대다수 조현병 환자들은 감각 자극이 지나치게 강렬하게 경험된다고 보고한다. 즉, 소리는 더 크게 들리고, 색깔들은 더 진하게 보이며, 빛은 더 밝게 빛난다. 그리고 바닥은 매우 반들반들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정말 그림자도 없앨 만큼 무시무시한 전기 불빛을 밝힌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깔끔하고, 반들거리며 인공적이었는데,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광물처럼 너무나 뾰족하고, 너무나 빛나고 너무나 긴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서 나는 대단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정신분열증 소녀의 수기」, 19쪽, 47쪽)
“모든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동생이 머리를 말리는 동안 드라이기 소리가 귀에 찢어지는 듯이 들렸습니다. 동생이 수건을 벽에 걸다가 떨어뜨렸는데, 그 소리가 쿵하는 소리로 들려서 화를 냈습니다.
당시에 저는 3일간이나 웅크린 채 잠을 잤습니다. 방바닥이 너무 반들반들하고 미끄럽게 느껴져서 누울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눕게 되면 끝없이 미끄러져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저자가 상담한 환자의 경험)
조현병 환자들에게 모든 것이 얼마나 강렬하게 보이는가 하는 것은 반 고호의 작품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반 고호는 조울병 환자였는데, 그의 작품들은 그가 조증상태에서 경험한 정신병 환자들의 지각방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이글거리는 태양, 붉은 대지, 새파란 풀잎들이 잘 대비되어 있다.
조현병 환자들에게는 색깔들이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에 흠칫흠칫 놀라게 되며, 빛이 너무나 밝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고, 소리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있으며, 방바닥이 너무나 반들반들거리기 때문에 미끄러워서 누울 수가 없다. 책을 보면, 종이가 너무나 밝게 반짝이기 때문에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
가족들이 보기에는 환자가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놀라거나, 신경질을 부리거나, 화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자극들이 그들에게는 매우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과잉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② 크기와 형태의 왜곡
일부 환자들은 자극이 단순히 더 강렬하게 경험될 뿐만 아니라 그 모양과 크기가 다르게 보인다고 보고한다.
“내 친구 중에 한명이 나에게 접근하였을 때는 건초더미처럼 친구가 자꾸 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내 방이 거대하여지고, 기울어지며, 벽이 반들반들하게 되어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 목소리가 음색도 음향도 없는 금속성 같았습니다. 갑자기 하나의 말만이 다른 말에서 마치 칼로 절단된 것 같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 말이 내 머리 속에서 반복되었습니다.
...... 나는 그녀의 눈, 코, 입술을 보았습니다. 나는 낯선 이의 얼굴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때 날 쳐다보는 갈색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부분 부분이 마분지로 장식된 인형을, 내 옆에 있는 조각상을 보았습니다. 아! 나는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불안했던가!” (「정신분열증 소녀의 수기」19쪽, 23쪽, 28쪽, 29쪽)
흔히 환자들은 ‘엄마가 가짜 엄마’라고 주장하는데,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환자의 눈에는 엄마가 이상하고, 달라져 보일 수 있다. 이렇듯 환자들에게는 가족의 얼굴이 달라져 보이고, 거리의 풍경이 달라져 보이며, 사람들이 이상한 몸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모든 사물이 강렬하게 느껴지고, 모양과 크기가 달라져 보이면 환자는 세상이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지며, 마치 전혀 딴 세상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경험한다. 이러한 느낌을 비현실감이라고 하며, 이때 환자는 강한 공포감을 경험한다.
③ 자극의 통합성 결여
환자들에게는 때때로 입력되는 자극이 통합성을 상실하고 각각 별도로 지각된다. 아래의 예는 회복된 환자가 자신의 증상경험을 묘사한 그림인데, 당시에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지각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 6-3>. 통합되지 않은 지각경험 (자료출처: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환자들의 회복수기에도 자극이 각각 분리되어 지각됨으로서 그들이 어떤 곤란을 겪었는지가 묘사되어 있다.
“나는 사물들을 머리속에서 종합해야만 했다. 손목시계를 볼 때면, 시계줄과 시계판과 시계침과 손목을 따로 보았으며, 그리고는 머리속에서 그것을 하나로 짜맞추어야 했다.” (토레이의 책 15쪽)
“텔레비젼을 보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화면보기와 소리듣기를 한꺼번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듯 동시에 두가지를 소화해 내지 못했는데, 특히 하나는 시각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각적인 것일 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한번에 너무나 많은 것이 들어 와서, 자극을 감당할 수 없었고, 자극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토레이의 책 15쪽)
우리가 세상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지각경험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세상에 대한 ‘안정감’과 ‘예측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만일 세상이 시시때때로 그 모습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갑자기 사물의 모양이 바뀌고, 반들거리고, 날카롭게 느껴진다면... 더욱이 사물이 통합적으로 보이지 않고, 부분 부분이 각각 따로 떨어져서 보인다면... 환자들이 이처럼 심한 지각장애를 경험할 때, 세상은 일관성이 없고, 예측불가능하며, 안정감을 상실한다. 이때 환자들은 심한 불안감, 공포감, 고독감을 경험한다.
3. 주의집중력장애
주의집중력 저하는 모든 정신질환에서 나타난다. 정상인도 고민이 있거나 우울한 경우에는 주의집중력이 저하된다. 조현병 환자도 다른 증상에 앞서서 가장 먼저 주의집중력이 저하된다. 그리고 증상이 심해지면, 주의력이 저하된다. 먼저 주의력 장애부터 살펴보겠다.
<그림 6-4>. 주의력과 주의집중력의 관계
1) 주의력 장애
우리는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주변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또 갑자기 눈앞에서 빛이 번쩍이거나, 낯선 물체가 휙 지나갈 때 자신도 모르게 그 쪽을 쳐다 보게 된다. 이러한 것을 주의력이라 한다. 주의력은 주변 환경의 변화를 즉각적이면서도 자동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다. 토끼가 주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동작을 멈추고 귀를 쫑긋거리는 것도 주의력의 예이다. 주의력은 동물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기본능력이다.
정상인들도 흔히 고민이 있거나, 어떤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주의력이 일시적으로 저하된다. 이때는 주변에서 자신을 불러도 잘 알아 듣지 못하며, 큰 소리로 불러야만 비로소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점을 알아 채게 된다. 또 어떤 생각에 몰두하며 길을 걷다 보면 아는 사람을 만나도 모르고 지나치는 수가 있다.
환자들의 경우에도 상태가 심할 때는 주의력이 저하되며, 환경의 변화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즉 누군가가 방에 들어 오거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주변에서 큰 소리가 나거나 하더라도 이를 의식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환자는 멍하게 보이거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은 흔히 “넋이 나갔다”거나 “정신을 딴데 팔고 있다”거나, “정신을 놓고 있다”고 하게 된다. 환자는 몇번씩 불러야 비로소 반응을 보인다.
이때 가족들은 환자가 실제로 환경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또는 인식은 하면서도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인지를 구분하여야 한다. 환경의 변화를 실제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의력 저하를 의미한다. 반면에 인식은 하면서도 단지 반응하지 않을 뿐이라면 그것은 반항심 때문이거나 의욕 저하 때문일 것이다.
주의력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므로 웬만큼 상태가 심해도 비교적 잘 유지된다. 따라서 주의력이 저하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상태가 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외부환경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할 만큼 정신에너지가 심하게 고갈되어 있거나, 또는 다른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주의집중력 장애
주의집중력이란 한가지 일에 의도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주의집중력이 강한 사람은 시끄러운 소음, 복잡한 환경,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가지 과업에 몰두할 수 있다. 반면에 주의집중력이 약한 사람은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하면 맡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요구하거나 쉽게 짜증을 낸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도 주변 환경이 조용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는 과업에 몰두할 수 있다.
주의집중력은 보통사람들의 경우에도 피곤하거나 힘들면 저하된다. 이때에는 가벼운 잡지책은 읽을 수 있으나, 어려운 전문서적은 읽어도 머리에 들어 오지 않는다. 또 조용히 혼자 있을 때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으나, 주변에서 누가 떠들면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다.
환자들의 경우 주의집중력이 저하되면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조용하고 단순한 환경 내에서도 한가지 과업에 몰두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어려운 일을 회피한다. 사소한 일에도 ‘골치 아프다’거나 ‘머리 아프다’고 호소한다. 실제로 우리들 누구나 자신의 주의집중력을 넘어서는 어려운 퀴즈문제, 수학문제, 또는 딜레마를 풀어 보려고 노력하면 머리가 아프게 되며, 이를 우리는 ‘골치 아프다’고 표현한다. 또한 주의집중력이 저하되면, 직장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학교성적이 떨어지고, 실수를 많이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진득하지 못하고, 산만해 보이며, 안절부절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의집중력 저하는 발병 이전의 전구기부터 나타나므로, 환자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면 재발경고신호가 아닌지를 검토해야 한다.
주의집중력이 심하게 저하되면, 중요한 자극과 중요하지 않은 자극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환자들은 주의집중력의 저하를 다음과 같이 경험한다.
“내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들로서는 단지 다리를 꼬거나 머리를 긁적거릴 뿐인데, 나는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를 잊어 버린다. 차라리 눈을 감으면 대화에 집중하기가 쉽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35쪽)
이렇듯 환자들은 주변 소음, 어수선한 분위기, 사람들의 불필요한 몸동작 등에 의해서 쉽게 주의집중이 분산되며, 결과적으로, 생각이나, 말을 조리있게 하기가 어려워진다.
주의집중력이 부족한 환자를 위해서는 소음을 줄여 주고, 오붓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또한 환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시작하여 매일 조금씩 주의집중력을 키워 나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책을 못읽는 환자는 본인이 좋아하는 만화책부터 읽도록 하며, 그 뒤에 잡지책을 거쳐서 소설책 순으로 수준을 높여 나간다. 전공서적이나 영어책은 가장 높은 수준의 주의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대화도 마찬가지인데, 둘이서 나누는 대화부터 시작해야 하며, 점차 세사람, 네사람 순으로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사람수를 늘려간다. 대화시간도 처음에는 잠시동안만 대화를 나누다가 점차 5분이나 10분씩 늘려간다.
어떤 일이 자신의 주의집중력을 능가할 때, 우리는 흥미를 갖기가 어렵다. 따라서 환자가 싫증내는 일을 무리하게 시켜서는 안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매일 조금씩 더 오랜 시간 동안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4. 정서장애
1) 감정표현의 결여
조현병 환자는 겉보기에 감정이 메말라 버린 듯이 보인다. 즉, 얼굴은 무표정하고 음성은 단조롭기만 하며, 희노애락의 감정표현이 없다. 가족들로서는 환자가 너무나 변해 버려서, 가족에게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없는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들은 감정이 메말라 버린 것이 아니라, 실은 심한 감정의 동요를 경험하고 있으며, 그것에 압도되어 있다.
초기에 그들은 심한 불안감, 공포감, 죄책감 등을 경험하며, 뒤이어 엄청난 우울감, 무력감, 고독감을 경험한다. 그들은 이러한 강렬한 감정을 다루기 위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며,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간단한 일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된다.
① 공포와 두려움
전구기의 조현병 환자는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과 아무런 이유없이 몰려드는 두려움을 느끼며, 발병초기에는 심한 공포감을 경험한다.
“갑자기 엄청난 두려움이, 끝없는 두려움이 나를 압도하였는데,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참함 자체였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는 내가 두려움으로 인하여 쩔쩔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가 신경이 날카로워졌거나 기분이 뜬 것으로 생각했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56쪽)
② 죄책감
많은 환자들이 이유없는 죄책감을 경험한다. 과거에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함부로 했던 일 등, 누구에게나 있는 허물을 두고 환자들은 남들이 자신을 흉보리라 믿으며, 용서를 구한다. 심지어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일에 대해서도, 양심은 나를 잠시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나는 무언가 달리 해야만 했었다고 느꼈다. 나는 끊임없이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떠올렸으며, 그것을 잠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기도하며 용서를 빌었지만, 아무런 용서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심판의 공포가 다가왔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59-60쪽)
③ 우울감과 무력감
환자들은 우울감, 무력감, 절망감 등을 경험하는데, 손하나 까딱할 수 없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비참한 심정을 경험한다.
“만성적으로 우울해진다는 것은 출구조차 없는 단조로운 하얀색 방에 갇히는 것과 같다. 사실 우울의 본질은 완벽한 무(無)에 대한 절망, 다시 말해서 완전한 진공상태에 처한 절망이다. 무(無), 그것이 우울이다. 아무것도, 절대로 아무것도 변화될 수 없다는 숨막히는 절망감 이외에는 어떠한 색깔도, 빛도, 영혼도, 물질도, 현실도,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58쪽)
환자들은 지금까지 설명한 불안감, 두려움, 공포, 죄책감, 우울감, 무력감 등으로 고통받으며, 이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진맥진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데, 그것은 감정을 차단하는 방법이다. 즉 환자들은 초기에는 강렬한 정서적 고통에 압도 당하여 괴로워하지만 점차 감정을 차단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즉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서, 편안함을 얻게 된다. 초기의 조현병 환자의 하루하루의 삶은 고통과 악순환의 연속이다. 그들은 병이 낫고 나면, 그 시기를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다고 한다.
2) 부적절한 감정표현
조현병 환자들은 때로는 상황에 맞지 않는 매우 부적절한 감정표현을 보이기도 한다. 즉, 혼자서 실실 웃거나,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거나, 갑자기 울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표현은 그 순간에 머릿속에 그러한 감정표현을 하게 하는 이상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물복용으로 사고장애가 경감되면 이러한 행동도 줄어들게 된다.
“내가 말하고 있는 동안, 그 시간의 절반은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수많은 관계없는 일들을 생각한다. 내가 어떤 말을 하다가 갑자기 웃으면,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들은 내 머리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쳐갔는지를 모른다. 나는 매우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머리속에는 또다른 생각, 어떤 우스운 생각이 스쳐가는데, 그 때문에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만일 내가 한 번에 한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그런 바보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토레이의 책 37쪽)
지금까지 겉보기로는 환자들의 감정이 메마르거나, 부적절하게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들이 심한 정서적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환자에게 자신의 두려움과 공포, 죄책감, 우울감, 무력감 등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위로와 격려로서 고통스러운 감정을 덜어 주어야 한다.
또한 환자의 부적절한 감정표현방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환자의 감정을 짐작할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북함을 느끼게 되어 환자를 피하게 되므로, 환자에게 바람직한 감정표현방법을 교육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
5. 대인관계장애
조현병 환자는 대인관계를 피하고, 자기방에서 혼자 지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성격적으로 대인관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며, 대인관계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라서, 불편한 마음에 사람을 피하는 것이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나 자신과, 내게 일어나는 일과, 나를 압도하는 무력감에 대한 공포였다...... 나는 사람들과, 내 가족과, 친구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는데, 그들 때문이 아니라, 통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35쪽)
“이 말을 해서 저 애가 기분 나쁘지는 않을까. 저 애가 이런 인사를 했으니 내가 답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답례를 저 애가 듣질 않나. 내 시선은 어디다 두어야 할 지. 지금 돌아서면 예의가 아니겠지. 하나에서 열까지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몰랐다. 급기야는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1년 휴학계를 다시 냈다.” (「한그루 싱싱한 소나무처럼」, 14쪽)
따라서 환자들에게 대인관계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를 교육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사회기술훈련이라 하는데, 구체적인 상황마다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고, 설명도 해주고, 역할연기도 해보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인관계 상황을 가급적 단순화시켜 주는 것도 필요하다. 보통사람들에게도 대인관계는 참으로 복잡한 상황이다. 사람들은 솔직하지만은 않으며, 자신의 의도를 은연 중에 표현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들은 단순하고 솔직한 대인관계 상황에는 적응이 수월하나, 복잡한 상황에는 대처하기가 어렵다.
“나의 문제는 주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정서적인 교류를 기대할 때 발생한다. 나는 정서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사람들의 말과 표현방식의 이면에 담긴 수많은 과장된 요소와 숨겨진 요소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나는 직접적이고, 솔직하고, 친절한 사람을 좋아하며, 나로 하여금 억지로 꾸미거나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만드는 사회적 상황을 처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63쪽)
환자들이 특히 힘들어 하는 것은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인식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서 상대방이 화가 나 있다던지, 불만이 있다던지, 또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하는 경우이다. 이럴 때 환자들은 심한 불안감과 분노 등을 느끼며,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몰라서 쩔쩔매게 된다.
“친밀감은 내 인생의 흥미로운 주제이다. 한편으로 나는 사람들과 깊은 영적인 친밀감을 맺을 수 있지만,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것들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만큼 유능하지 못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수용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에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들의 분노나 냉소로부터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줄 수 있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63쪽)
따라서 환자와의 관계에서는 불편한 마음을 꾹 참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화가 나면 차라리 화를 내는게 낫다. 그러나 더 바람직하기는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말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에 관해서는 12장의 대화법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환자들은 대인관계기술(사회기술)이 부족하여, 사람들과 같이 있는 상황에서 두려움, 어색함, 불편함, 혼란 등을 경험한다. 따라서 사람들을 피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심한 고독감을 느끼며, 친밀한 인간관계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나는 나를 스쳐 지나가는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영원히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여! 나는 당신을 보지 못했다. 사랑을 나누어야 할 곳에 내 고뇌만이 가득찬다. 나는 절망에 울고 있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63쪽)
“나는 내가 밉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남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지도 못한다. 나는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서로간에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는 사랑하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64쪽)
조현병 환자가 고독감을 많이 느낀다는 사실은 객관적 연구를 통하여 입증되고 있으며, 고독감의 정도는 가족 이외의 친구의 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가족 이외의 친구가 많은 경우는 고독감이 덜하며, 가족 이외에는 만나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고독감이 심하다.
고독감과 관련하여 권할 수 있는 것은 같은 환자들끼리의 친분관계이다. 가족들 중에는 “환자들끼리 친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가”, “기왕이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야 배울 점이 있지”라고 생각하여 환자들끼리 만나는 것을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듯이 환자들간의 만남은 서로의 심정을 알아주고,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된다. 더욱이 환자들은 서로의 단점을 알고 있으며, 이를 서로 지적하여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같이 있는 환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의 병이 호전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도움말을 주기도 했다. 한 예로 병동에서 혼자 중얼거리곤 했었는데 환우 중 한사람이 ‘너의 병은 혼자 중얼거리는 거야’라고 말해 준 후부터 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억제해서 많이 줄어들었던 것 같다.” (「한그루 싱싱한 소나무처럼」, 18쪽)
6. 의욕장애
환자들은 퇴원후 한동안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적으며,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관심과 의욕의 저하는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세수, 양치질, 머리감기, 옷갈아입기, 이발, 목욕 등 자신의 청결, 위생, 외모에 관심이 없다. 자기 방에 틀어 박혀 늘 누워 지낸다. 집안 일을 전혀 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피한다. 직장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여가나 오락활동에 관심이 없다.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흔히 “환자가 게으르다”고 한다. 그러나, 환자는 게으른 것이 아니다. 환자는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혼란된 사고와 심한 감정의 동요와 싸우고 있으며, 한동안 온 힘을 기울여 싸우다 보면, 너무나 지쳐서 간단한 일조차 해낼 여력이 없어진다. 우리가 만일 하루종일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골치 아픈 대화를 나누며, 온 힘을 다해서 일했다면, 귀가후에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싫을 것이다. 환자들의 회복수기를 보자.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체적 쇠약에 시달렸다. 근육의 피로감을 느꼈는데,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피로감이었다. 특이한 감각이 내 척수를 타고 뇌로 올라가는 듯 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나는 허공을 응시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끔찍한 재난이 닥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59쪽)
“더 이상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것에 지쳤다...... 아무것도 노력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더 이상 화조차 나지 않았는데, 어떤 일도 화낼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화내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 용기가 놀라웠다.” (하트필드와 레플리의 책 61쪽)
퇴원후 몇 달간은 이러한 기간이 있다. 이 시기는 휴식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재충전을 위한 시기이며, 온실 속에서 새싹이 자라고 있는 시기이다.
이렇듯 아무런 의욕도 의지도 보이지 않는 것과는 달리, 고집이 센 것도 이 병의 특징이다. 환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기도 하고, 하기 싫은 일에는 절대로 꼼짝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환자가 어떤 일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흔히 망상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으며, 망상이 없는 경우에도 그것에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부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일을 포기할 경우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또는 자신의 자존심의 기반이 통째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환자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경우의 대표적인 예는 함구증과 거부증이다. 함구증이란 몇날며칠 동안이나 입을 열지 않는 것이며, 거부증이란 타인의 의사에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서 몇날며칠이나 누워서 꼼짝을 않거나, 식사를 하지 않거나, 방에서 한발도 나오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함구증과 거부증은 흔히 환자의 무력감과 연관되어 있다. 즉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을 때, 세상이 절망적이기만 할 때, 오직 거부만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남는다. 그는 거부를 통하여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자신이 한 인격체임을,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함구증과 거부증이 환자의 망상이나, 심한 사고의 혼란 또는 머리가 텅 비어 버린 음성증상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는 전후사정을 고려하여 추측할 수도 있고, 나중에 환자가 입을 열고 나면 환자에게 물어서 확인할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저자들이 강조하고 싶은 바는 가족들이 환자의 정상적인 반응행동을 흔히 증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환자들은 회복과정에서 병 자체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엉망으로 되어 버렸고, 장차의 희망이 보이지 않으며,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누구나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정상적인 분노, 슬픔, 불안, 좌절, 방황 등을 겪게 된다.
가족들은 이러한 환자의 좌절과 고통을 병으로부터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병 자체보다도 한 인간으로서의 환자의 고통에 더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
7. 병의 경과에 따른 내적 경험
1) 전구기의 내적 경험
처음에는 주의집중력이 저하되며, 점차로 주의력이 저하된다. 따라서, 실수를 자주 하게 되고 학업성적이 떨어지며, 직장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이러한 곤란들로 인하여 당황하게 되며, 불안해진다.
환자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일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털어 놓는다(예로써, “학교를 못다니겠다”, “직장을 그만 두겠다” 등). 가족들이 보기에도, 뭔가 불안해 하는 것 같고, 힘들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환자는 점차로 잠들기가 어려워지며, 불안감과 초조감이 고조되고 안절부절해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 주변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한다.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자신을 감당하는 일에 너무나 애를 써야 하기 때문에, 주변 일에 관심이 없어지고 혼자 틀어 박혀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종교적 현상(예로써, 계시, 텔레파시 등)으로 생각하거나, 종교적인 힘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종교적 개념에 몰두하게 되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종교활동에는 관심이 없거나, 참여하지 않는다. 대신에 해답이 없는 종교적 질문에 매달리게 된다.
점차로 증상이 심해짐에 따라 지각적 경험이 달라지고, 머리 속에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이 뒤죽박죽 되게 된다. 환자에게는 점차 모든 것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2) 활성기의 내적 경험
망상, 환청, 횡설수설, 이상한 행동, 음성증상 등을 보이면 활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에 환자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며, 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다.
환자는 이상한 집들과, 거리들, 매우 강렬한 색채들, 매우 시끄러운 소리 등에 둘러 싸여 있다. 주변 사람들도 낯설기만 하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물건들도 낯설게 느껴지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리둥절하다.
머리 속에는 이 생각 저 생각 마구 떠오르고, 도무지 한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다. 말을 하려고 하면, 생각지도 않은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생각을 잡을 수가 없고, 자신의 뜻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환자는 매일매일 온통 미친 세상 한가운데 자신만 덩그렇게 혼자 남아 있는 듯한 경험을 한다. 세상이 완전히 예측불능이고, 무엇하나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심지어는 자기자신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조차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환자는 매우 당황하고, 겁에 질리고, 극심한 공포상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환자는 방에 틀어 박혀 있거나, 잠을 못이루거나, 안절부절해 한다. 또, 주변의 사소한 일에도 매우 예민하고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환자는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환자는 나름대로 엉뚱한 원인을 찿아내어 그것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망상). 환자는 이상하고 낯선 세계에 저항하기 보다는 이상하고 낯선 세계에 이상하고 엉뚱한 방식으로 대처해 나가는 법을 익히게 된다.
환자는 이전에 비하여, 덜 불안해 하고, 남들의 시선도 덜 의식하게 되며,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환자는 여전히 힘들고 외롭고 끔찍한 상태이다.
3) 회복기(잔류기)의 내적 경험
약물복용으로 뇌의 혼란이 가라앉으면, 이상한 지각적 경험이 줄어 들고, 세상이 점차 제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환각경험도 줄어 들며,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던 것도 줄어 든다. 사람들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며, 말도 어느정도 조리있게 할 수 있게 된다.
생각도 어느정도 정리되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이 되살아 난다.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자신이 미쳤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기가 괴롭고 힘들다.
자신의 능력이 이전보다 못해졌다는 것을 경험하기는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잘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면 예전처럼 되지 않는다.
모든게 바뀌었다. 주변 사람들도 예전처럼 자신을 대해 주지 않는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 취급을 하고, 실수를 하면 구박을 하고 놀려댄다. 잘 아는 사람들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한심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지나치게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예전처럼 모든걸 잘 해 내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못한다고 실망하거나, 비난한다. 친구들도 한두번 만나보면, 대화가 안된다. 친구들이 자신을 피하기 시작하고, 연락이 끊어져 버린다.
자신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된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좋을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매사에 자신이 없다. 하는 것마다, 실수 투성이다.
약물부작용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고, 몸이 뻣뻣하게 느껴진다. 잠이 많아져서, 아침에는 일어나기가 힘들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다. 하루종일 잠만 잔다고 구박받지만, 그래도 그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잠도 깊이 들지 않고, 억지로 누워서 자는 척하고 있지만, 일어나서 움직이기가 귀찮고, 뭘 하나라도 해야 한다는게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 시기에 이러한 어려움을 인정하고,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것은 못해도 약물복용만은 자발적으로 꾸준히 하는 환자도 있다. 또,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고, 약물부작용으로 괴롭기만 해서, 약물복용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환자도 있다.
이 시기에 가족들은 의사와 긴밀히 협력하여 환자로 하여금 약물을 꾸준히 복용하고, 재활서비스를 받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한 인간으로서의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며, 재기를 향한 환자의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매사를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먼 앞날을 내다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행해야 한다.
8. 맺는 말
이 장에서는 조현병 환자들이 경험하는 증상, 즉 사고장애, 지각장애, 주의집중력의 장애, 정서장애, 대인관계 장애, 의욕장애, 병의 경과에 따른 내적 경험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정신병 환자들이 증상을 경험할 때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정신병 증상을 겪어 보지 않았고, 그것은 매우 특이한 경험이기에 보통사람들로서는 미루어 추측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환자의 입장이 되어 그의 경험을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환자를 돕고자 한다면 환자의 경험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환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족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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