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O 3.0
아들 녀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공부하던 책들을 정리하여 제 방 앞에 쌓아 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 책더미 제일 위에 ‘DUO 3.0’이 놓여 있었다
무심코 그 책을 집어 들어 몇 페이지 들추어 보고는 난 그 책에 빠져 들고 말았다
‘스즈키 요이치’라는 일본인이 쓴 어휘학습서로써 절대로 중복되지 않는 단어들로 구성된 560개의 문장을 통하여 약 7,000개 정도의 어휘를 공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데 무엇보다도 책을 보면서 따로 사전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점이 아주 맘에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바로 결심을 하고는 행동에 옮겼다
‘일단 무조건 이 책을 열 번을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이 책을 항상 갖고 다니자’가 일차 행동 목표였는데 10개월 후 술집에서 책을 잃어 버릴 때까지 이 책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물론 하루도 빠지지 않았으며 비오는 날도 우산과 함께 들고 다녔으며 손님을 만나러 갈 때도 항상 들고 다녔다.
무슨 책인데 그렇게 들고 다니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항상 영어를 다시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이 책을 보는 순간 필이 왔다’
‘어휘력이 첫째 난관이라고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젊은 시절 깨작거리기만 했었던 Vocabulary 22000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이 책으로 시작하면 되겠구나 하고 느꼈다’
‘난 이 책을 무조건 열 번을 볼 것이다’
430쪽의 약간 두툼한 책을 들고 다니면서 무조건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가장 많이 시간을 낸 장소는 당연히 지하철 이었으며 휴대하기 편한 가느다란 돋보기도 장만하여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갈 때도 복잡하지 않으면 읽고 또 읽었다 어휘설명에 발음기호가 있어서 열댓번씩 입속으로 웅얼거리곤 하였다
책의 편집도 아주 맘에 들었는데 어휘설명에 등장한 동의어나 이의어가 궁금하면 책 뒤의 인덱스를 통하여 바로 찾아 볼 수 있어서 560 문장을 순서대로 읽어 나가며 어휘설명을 통하여 새로 등장하는 어휘의 뜻을 공부하며 동의어와 이의어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전을 찾을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이 점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해서 10개월이 지나는 동안 책을 6번 반을 정독하게 되었다 기억력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오십이 넘은 나이라 그런지 두세번 볼 때까지도 계속 낯이 설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 슬슬 아 요거 한번 본 놈이다 싶은 게 늘어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곤 슬슬 재미가 나기 시작하였다 사실 지금까지 공부가 재미있었던 기억은 별로 없었는데 그리고 손에서 책을 놓은게 얼추 30년은 넘었는지라 나 스스로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이 책의 놀라운 점이 하나 더 있었다. 560개 문장의 어휘들이 중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법책에 등장하는 각종 구문형식이 망라 되어 있던 것 이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책 홍보 시에 이러한 장점을 왜 부각시키지 않았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 책은 결국 나처럼 책 내용을 무대보로 믿고 미련스럽게 반복해서 공부하는 사람에게 어휘에 대한 기본 전력 구축에다 보너스로 기본 문형에 대하여 익숙해지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나는 ‘아’하고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카피 ‘마법의 560문장’에 대하여.
왜 ‘마법’ 이라고 했는지 그리고 일본, 한국, 대만에서 300만부나 팔렸는지...
그렇게 열심히 틈틈이 들여다 보며 ‘아’ 공부에 재미를 붙인다는 게 이런 거 였구나 하고 오버까지 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오십 중반에 아주 신선한 충격이자 쏠쏠한 재미였다
이대로 주욱 나아가면 실천에 옮기지 못했지만 항상 잊지 않고 있었던 ‘영어와 친해지기’가 머나먼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목표로 삼아도 되겠다는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 되어 버리게 되었다
3개월째에 접어 들면서 이 문장을 소리로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560문장에 대한 MP3 파일과 Text를 구할 수가 있었으며 내가 운영하는 mp3ebook 사이트에 올려 놓고는 책의 출판사인 ‘창과창’ 사의 윤창 사장님까지 만나 뵈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10개월 후, 그렇게 6번 반을 보던 어느 날 오래 만에 만취한 술자리에서 그만 책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실로 오래 만에 만나는 가슴 아픈 이별의 고통이었다 선뜻 새책을 살 형편이 못 되기도 하였지만 그동안 책을 보면서 주요 부분에 표시해 놓은 밑줄 들이 너무나 아까웠던 것이었다
책을 세 번 볼 때 까지 샤프와 지우개를 들고 다니면서 마음에 안드는 밑줄을 지우고 새로 그으면서 완성한 ‘밑줄 쫙’과 허무하게 이별을 고하게 되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고민 끝에 ‘변화’라는 신의 계시를 느끼게 되었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제 2차 DUO 3.0 학습 단계에 돌입하게 되었다
마침 4년간 쓰던 휴대폰을 바꾸게 되어 마련한 24개월 약정폰에 MP3를 집어 넣을 수 있었고 560문장 Text를 휴대하기 좋게 편집하여 출력해서는 접어서 양복 안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며 틈틈이 꺼내 읽었다 그리고 MP3를 같이 들었는데 소리를 듣는다는 점이 새로웠지만 그렇게 썩 귀에 남는 것 같지도 않고 다시 데면데면해진 어휘들도 그렇고 영 책을 읽을 때의 재미가 나지를 않는 것 이었다 결국은 장소의 자유로움은 사라졌지만 책상 앞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듀얼 모니터에다가 하나는 560문장 Text를 하나는 글 한컴사전을 띄워 놓고 DUO 3.0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 문장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가물가물해진 어휘에 커서를 올리면 즉각 옆 모니터의 한컴사전에 어휘에 대한 사전 설명이 뜨는데 아무래도 책의 어휘설명보다 방대하고 산만할 수 밖에 없어서 처음에는 마땅치 않았지만 차츰 익숙하게 되었다 그리고 단어는 괜찮아도 관용어구는 찾기가 불편하였지만 나중에는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지난 10개월, 6번 반 정독의 힘이리라. 아무튼 이즈음부터는 전처럼 영어 문장을 그냥 무시해버리던 악습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사라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일단 영어 문장을 전처럼 무조건 피하지 만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일단 뜻이 팍 들어오지 않아도 어휘들이 뭉쳐 있는 모양들이 어렴픗이나마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실로 놀라운 변화요 감격이었다
그동안 나는 대한민국의 영어학습서들에 대하여 한가지 불만이 있었는데 ‘예문’의 비현실성, 비생산성이었다. 문법책의 예문은 물론 회화책의 Dialogue Box, 영한사전의 예문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내가 새삼 깨달은 DUO 3.0의 좋은 점은 어휘력 전개도 훌륭하지만 자연스럽게 각종 문형을 익히게 해 준다는 점이었다
여하튼 나의 30년만의 영어와의 재회는 실로 우연히 찾아 왔으며 아주 강렬하였으며 현재 진행형이다. 그 날 아들 녀석의 버리는 책 더미 위에 DUO 3.0이 놓여 있지 않았더라면 55세 나에게 이러한 크나 큰 행운이 찾아 왔겠는가. 고맙다 DUO 3.0
처음부터 내 생각은 이 정도는 몽땅 외워 두는 것이야 말로 앞으로의 ‘영어와 친해지기’ 대장정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은 더 더욱 굳센 신념이 되어 버렸는데 DUO 3.0을 대면한지 1년이 다 되어 오는데 큰 진전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하루에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만 투자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대단히 감사할 만큼 영어와 한걸음 가까워지는 효과는 있었지만 암기를 위한 특별 대책이 필요하였다
그리고는 예나 지금이나 외우는 데는 쓰기가 최고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써서 외우기로 하였고 필기 방법은 종이에 쓰는 것이 아닌 키보드로 입력하기로 하면서 또 하나의 도전을 하게 되었다
평생 사용한 독수리 타법을 버리기 위해 ‘한컴타자연습’을 틈틈이 익히기로 한 것이다. 문장을 외우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자판을 보면서 손가락 두 개만으로 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시 560문장, 완벽한 내 것으로 만들기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다 외울 때 까지 치고 또 치리라
지금 나는 DUO 3.0이 가져다 준 이 회춘의 로맨스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교보문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