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의 여행
1404 김주영
나는 지금 2015년 6월 5일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구례고등학교라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말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3년 일찍 태어났다면, 5년 10년 일찍 태어났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처럼 학교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어떠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자, 그럼 먼저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1999년 6월 18일 새벽 2시 7분, 한 아이가 힘차게 세상에 나왔음을 알린다. 동글동글하고 탄탄한 얼굴, 우렁찬 목소리. 사내아이이다.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이고, 귀여운 내 새끼. 어쩜 이리 귀여울까?”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눈물을 닦은 뒤, 어머니와 아버지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이 아이의 이름은 뭐라 해야 할까?”
“음……. 주인 주(主)에 빛날 영(煐)자를 써서 ‘주영’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이의 이름이 정해지는 순간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행복해진다.
2000년 6월 18일, 1살 생일을 축하하는 돌잔치가 열렸다. 이 잔치에는 온 가족들이 다 모여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돌잔치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돌잡이’이다. 아이 앞에는 세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연필이고, 또 하나는 돈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마이크였다.
“과연 무엇을 잡을까? 나는 마이크를 잡을 것 같아요.”
“아니죠. 연필을 잡을 거예요,”
어른들은 서로 자신의 말이 맞을 거라며 옥신각신 한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연필을 집었다. 연필을 잡으면 문관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만약 그때 그 순간 연필을 잡지 않고 마이크를 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아마 노래를 잘 불러 장차 가수가 되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지나고 지나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아이는 원래 자주 전학을 다녀서 친구를 많이 사귀지는 못했는데 아버지가 귀농을 하고 싶다하셔서 전학을 가야 했다.
“주영아, 정말 슬프고 힘들겠지만, 이제 그만 맘 정리하려무나. 알겠지?”
“싫어, 난 여기서 살 거야! 다른 데로 전학 가기 싫단 말이야!”
아이는 가기 싫다고 떼를 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아이가 잠든 새벽, 몰래 짐을 챙기고 나를 실어서 구례라는 곳으로 내려가게 된다.
따스한 아침 햇살에, 정신이 든 아이는 주변 풍경을 보고 깜짝 놀란다. 부산에서 보던 높고 커다란 건물은 없고 넓고 넓은 평야가 쭉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게 된 학교는 ‘용방초등학교‘라는 곳이었다. 교장선생님과의 상담이 끝나고, 용방초 5학년 아이들과의 첫 만남이었던 것이다.
“안녕, 난 주영이라고 해. 김주영. 앞으로 잘 부탁해.”
서로 어색한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니 그 전부터 전학을 많이 다녀서 많이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했었다. 성격이 친화력이 있고 적응력이 좋았다면 친구를 훨씬 빨리, 그리고 많이 사귀었을 지도 모른다. 그 때 5학년은 총 8명이고 전교생이 20명이 조금 넘는 작은 학교였지만, 작은 학교였기에 큰 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선생님과 학생, 선배와 후배와의 친근함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 성격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탓에 조금 무뚝뚝하고 말을 많이 안 했었는데 선생님들과도 친근하게 지내고 선배와 후배 간에 친하게 지내면서 점점 성격이 많이 고쳐졌다.
또 다시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교에는 읍에 있는 학교, 면 지역에 있는 학교, 타 지역 학교에서 모이고 모여 24명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반이 만들어졌다.
“안녕, 난 .......”
…
“안녕, 난 주영이라고 해. 3년간 잘 지내보자.”
역시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반은 한 반이고 3년 동안 같은 반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서로 친근하고 배려하면서 살지만 이제는 그냥 친구가 아닌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경쟁자로서의 친구로서 3년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난, 구례 관내 중학교에서 올라오고 타 지역에서도 전학을 온 112명의 입학생과 3개월을 보내고 있다. 서로 서먹서먹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좋은 일이 있을 땐 같이 웃어주고, 슬픈 일이 있을 땐 같이 슬퍼해줌으로써 서로의 우정을 쌓아간다. 중학교의 생활이 전부가 아닌 더 큰 바다로 들어와 힘을 키우고 있는 우리에게는 앞으로 ‘사회’라는 더 큰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3월과 6월, 모의고사와 중간고사를 보고 시험 점수를 본 나는 깊은 한숨이 나온다.
‘아……. 과연 내가 인문계를 온 게 잘한 일일까?’,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잘 할 수 있었는데, 그 때 공부를 좀 더 했더라면 결과가 더 좋았을 텐데.’
내 꿈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화학연구원이다. 두 번째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중·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다. 내가 만약 연구원이 되면 어떻게 될까? 내가 만약 평범한 회사원이 되면 어떻게 될까? 내가 만약 화학 선생님이 되면 어떻게 될까?
약 3년 뒤, 고등학교 3년이 된 나는 인생에 있어서 갈림길이 될 수능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수능을 잘 보면 좋은 대학교를 갈 것이고 수능을 잘 못 보면 조금 덜 좋은 대학교를 가게 될 것이다. 요즘은 흔히 SKY라고 하는 삼대 대학교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고 무시를 받는다. 하지만 요즘은 ‘SKY', '명문대’라고 불리는 곳을 다니는 대학생들도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취업난’ 시대이다. 서울대, 고려대 같은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이 안 되는데, 지방에 있는 대학교는 오죽할까? 그래서 지금 고등학생들은 서울대, 고려대 같은 대학교를 가기 위해서 죽어라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들이 흔히 말하기를,
‘서울대만 가면 인생이 확 달라질 거다.’, ‘지방 대학을 가면 아무것도 못한다.’,
‘지금 고등학교 3년이 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등등.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그 말을 들었을 땐 ‘그게 무슨 말이지? 설마 그러겠어?’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3
번의 시험을 보고 관련 대학과 관련 학과의 등급 컷을 찾아보니까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이제는 심각하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신다.
아빠는 ‘지금 잠을 자면 그 꿈을 꿀 것이고, 지금 공부를 하면 그 꿈을 이룬다.’ 라고 말해주셨고 엄마는 ‘공부를 하든 실
컷 놀던 선택은 네가 하지만 후회는 하지 마라’라고 말해주셨다. 이 말에는 따끔한 충고의 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있다. 이 순간 공부를 한다면 나는 인생이 확 바뀌어 있을 것이고, 이 순간 놀고 있다면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 돼 있을 것이다. 선택을 한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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