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시문학 신인상 작품 심사기
시작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사생寫生이다.
이 사생은 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도 한다. 현대시의 창조적 이미지는 그 사생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시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은 화가를 지망하는
이들과 비견될 수 있는 사생의 훈련이 요망된다. 사생을 구성하는 요소는 대상에 대한 관찰, 통찰, 상상, 표현이다. 신인상 작품 심사기를 쓰면서
사생의 중요성을 화두로 삼은 이유는 많은 응모작품들이 사생의 부족으로 탈락되기 때문이다. 신인상에 선정된 김미연, 김미옥, 김해빈의 시편들은
사생의 관문을 통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성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어서 심사위원들에게 큰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김미연의 「재래시장」은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평범하지 않은 풍경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독자의 눈을
놀라게 한다. 그것은 대상에 독특한 색채色彩를
입히는 그의 상상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대상이 객관화되고,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이미지의 세계가 형성되고 있다. 그의 이미지
조형기법은「빈집」에서도 빈집과 어둠의 관계를 통찰하여 간결하고 선명한 사유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의 갠지스강 」은 삶과 죽음의 현장과
거기서 분출되는 에너지가 단순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시의 건강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그의 개성적인 이미지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대상에 대한 그의 통찰력과 상상력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하고 기대감을 갖게 한다.
김미옥의「아스피린」은 한 가족의 서사적敍事的인
이야기가 사물성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빚어내는 신선한 감각이 시의 바탕을 튼튼하게 형성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세련되고 섬세한 묘사가 자리 잡고
있어서 고통, 희망, 행운 등 돌출하는 관념어의 위태로움을 지워주고, 규격에서 벗어난 자유로움까지 느끼게 한다.「행복빌라」도 현실의 무거운
서사敍事에서
벗어난 시적 사유가 감성적인 언어감각과 잘 결합하고 있다.「시를 쓰는 딱따구리」는 자신을 시의 캐릭터로 만들어서 비유와 풍자, 공연시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의 무한한 가능성을 감지하게 한다.
김해빈의 시편 중 「그루터기 명상」「코스모스의 질감」은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그의 시적 자세와 시각이 흥미를 끈다. 「그루터기 명상」은 야금야금 넓어져가는 골프장이 함축하고 있는 인간의 야욕과 그 주위에서
위축되고 죽어가는 자연 속 생명체들을 그루터기의 독백으로 그려내고 있으며,「코스모스의 질감」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저평가 받는 일용직의 서러움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사생의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삶의 무게와 질감이 생생하게 묻어나는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그러나「달의 하늘」에서 보여주는 우주적인 상상력은 그의 또 다른 세계 즉 형이상적인 사유의 가능성도 느끼게
한다.
김해빈의 시편들은 작품 심사과정에서 논의의 단계를 거쳐야 했다.
이미 시집을 발간하여 기성 시인으로 활동하는 시인을 굳이 신인의 대열에 끼게 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인상에 당당히 응모하여
<시문학> 출신 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과 자세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에도 충분한 타당성이 있어서, 논의의 과정을
거친 끝에 후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그의 작품을 심사 대상으로 올리게 되었음을 부기하며, 신인상에 당선된 김미연, 김미옥, 김해빈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고 대성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문덕수 유승우
심상운(글)
신인상
수상작품
김미연
재래시장
달빛을 팔고 있다
상추 다발에도 오이
다발에도
달빛이 내려와 물감을 풀고
있다
외계의 운석이
날아와
충격 하나 옆구리
친다
지폐 몇 장으로는
살 수 없는 신묘한
그림이
시장의 후미진 구석에 널려
있다
날개마다
흙담장 너머로 들리는 엿장수
가위소리
선홍의 전설이
살아난다
쭈그리고 앉은 노파의
눈에서는
유년의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깊게 파인 주름의
계곡으로
수천 개의 별들이 떨어져
내린다
빈
집
어둠이 들어와 산다
어쩌다 지나가는
바람이나 구름이
어둠에게 말을 건다
저들의 선문답
집안 가득 널부러진다
깨진 거울 조각에
내려앉은 별 하나
어둠에 부딪혀
부서진다
먼 하늘을 향해
찢겨진 비닐 조각
창밖으로 손을 흔든다
영월행 기차
허무의 경계를 넘어
쉰 목소리로 달린다
어머니의 갠지스강
갠지스강 화장터 뒷켠에서 장작만 자르던
그녀
비릿한 지구 한 덩이 거꾸로 퍼 올리고
있다.
가까이 보이는
생(生)
평생을 이고 온
물항아리 내려놓는다.
붉은 담석덩어리 이제
흐물거린다.
어머니는 저잣거리에서 어느
날
부끄러움을 놓아
버리셨다.
바라나시 기차역
몽골사막에서 불어오는
흙바람
삶과 죽음이 뒤섞인
곳
열두 살 소녀 뱃사공은 뭇 목숨의 활줄을
끊어
강에 화장재를
뿌렸다.
새벽까지 울고 있던
강
그녀는
밤마다
강을 밀어 올리고
있다.
신인상 수상작품
김미옥
아스피린
할머니는 토끼 표 ABC로 이산의 슬픔을
이기셨고
어머니는 종근당 사리돈으로 가난을
견디셨다
사는 건 고통이고 진통제는
희망이었다
둘 사이는 이스트로 부푼 빵처럼 화기가 아랫목에
가득했고
부풀고 부풀다 가끔 터지기도
했었는데,
미워하지도 않았지만 서로 불쌍해하지도
않았다
사철 그림 같은 아버지
대신
할머니는 병아리 장사도 했고, 어머니는 사과 행상으로 나서기도
했지만
우리 집에는 팔지 못한 사과가 늘
넘쳤다
어느 해 토끼 표 ABC가 단품 된지 얼마 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꽃상여를 뒤따르며 사무치게 울던
어머니
종근당 회사가 건재하니 아직 어머니는
안심이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통증이며 그리움이며
절망인
그럴 때마다 먹는
아스피린
어쩌다 목에라도 걸리면 쌉싸름한 씀바귀
맛
사르르 내려가 녹여줘 매 순간 숨바꼭질하듯 만나는 행운 같은
것
때로는 올라오는 생목을 즐기며 앞으로 가야
한다
중독된 희망
행복 빌라
옛날 진흥요업 근처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엎어놓은 사발 무덤을 갈아엎고 세워진
집들
모든 둥지는 결국 죽음을 위해
세워진다
그 중 음습한 이곳은
세상이 밀어낸 사람들을 받아 준
성지
어쩌면 땅 밑을 향해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구도자인지
모른다
대낮에 지하방에 누워
있으면
죽어서 들어갈 관도 이렇게
아늑할까
미리 연습하는 것 머리끝이
쭈뼛거리지만
살아서 못 갖는 집이면 죽어선들 가질 수
있을까
긍정과 체념을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곤
했다
꿈자리에 자주 나타나던 그림자는 어느 시절
귀신인가
한 번도 날 괴롭히지 않는 고마운
그들
녹슨 우체통은 으름장을
게워내고
소음은 층층에서
쟁쟁댔지만
음기에 둘러싸인
이곳에선
이상하게도 배짱이
두둑해졌다
가끔 용케도 이곳을 탈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곧바로 신입이 들어와선 빈집은
없었지
하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
그늘이 만들어 놓은 서늘함
속에도
푸른 수맥의 등쌀은
지치지 않고 흐르는
것을
시를 쓰는
딱따구리
빨간 머리 딱따구리가
전두엽 골짜기에서 신호를
보낸다
내가 아직 매력적이야?
따다닥
저것 좀 봐
코르셋을 얼마나 조였는지 젖가슴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왕년의 배우 모니카는 본차이나
같네
딱따구리가 잠 못 들면 오늘은 날 샌
거지
온몸으로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
피가 몰렸다가 한꺼번에
터졌다거나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데
쌍무지개 눈앞에 어른댔다거나
하는
고전적 표현의 오르가슴
말이야
아까부터 모니카가 자꾸 날 자극 하네
고전적으로
코를 깎아 나라를 새로
세우든지
늘어진 지방 덩어리를
빨아들여
지루하고 단조로운 세상을 전복시키든지
하라고
불순물 뱉어내듯
가벼운 너의 노래를 클릴해줄게
따다닥
나는 왜 바쁠 때만 노래를 부르고 싶어지는
걸까
야금야금 훔쳐 먹는 별미 같은
맛
늙어가는 여배우를 보는
것처럼
유행 지난 파반느를 추는
것처럼
알배기 연어가 죽을 힘 다해 하천으로
돌아오면
미모는 다시 돌아올까
따다닥
딱따구리가 잠들기
전에
쇼핑하듯 맞춤형 노래 한 곡
지어볼까
딱따구리가 영원히 잠들기
전에
신인상
수상작품
김해빈
그루터기 명상
악성 바이러스 침입에
도도하던 콧등, 무릎까지 뭉텅
잘려나가
열 오른 숯덩이 개체가 늘어나고
있어요
골프장에서 홀인을 외치는
동안
무작정 크기를 줄인
탓으로
그물망에 걸려
나머지 키를 게이며 역겨움 견디고
있어요
비실비실한 버섯 몇
송이만
허물어져가는 나이테를
가리네요
어제는 도끼가 내리
꽂히고
오늘은 전기톱 송곳니가 정신없이
박혀들어요
야금야금 평수 넓혀가던
골프장에서
제초제를 잔뜩 뿌렸나
봐요
삼복더위에 한기가 들고 속이 메스꺼워
지네요
검정 홑이불이
필요해요
허물어져가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거든요
마지막 자존심은 제발 자르지
말아요
매미소리 따갑게 쏟아내는
숲
모든 허물 덮어주는 그런 그늘이고
싶어요
코스모스의 질감
발레리나가 해 맑은 미소
지으며
깡마른 외다리로 서
있다
무대는 한적한 전원이
아니었다
낡고 허름한 공장 옆 자재더미 사이, 햇살 비를 겨우 가진 최소의
몫이었다
점심시간은 안전한
독무대였다
지친 팔다리 감추고 한순간 최고의 표정을 위해
토르소(torso)를 고집했던 것일까
어떤 질감으로 다가가야할지 채색을
지운다
명암을 넣는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무대를 채우는 금속성 음악이
깔리면
가느다란 다리를 세워 다시 채색을
입힌다
투명으로 팔다리가
살아난다
일용직이면 어때
낡은 토시나 슈즈, 악성 음악이라도
좋다
그녀에겐 그저 남은 공연을 무사히 마치는 일 그리고 뛰어다닐
무대가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무게 그 간절한 질감을 느끼는
일이다
달의 하늘
별마로*에
올라
비 맞는 고슴도치
자전과 공전을 미루고
하현달의 선명함 찾으려다 더욱 진한 소나기
맞습니다
많은 별들이 나이가
들어
주검으로 남겨져 떠돌다
소멸한다지요
그래서
달의 하늘이 검은가요
고슴도치가 사는 별에서는 하늘이
푸르지오
다시 태어난 별은 더욱
푸르다지요
220만 광념 떨어진 은하의 형체가 합쳐지는
날
하트 곱게 그린다지요
또 다른 별을 기다리던
우주에서는
검은 하늘 위해 비가
내리고
그런 날엔
다르이 하늘 볼 수 있어
행복하답니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고 비 맞으면 나사에 가는
중입니다
파란 달하늘 찾으려
비가 고슴도치 데리려 마중
왔다지요
하지만
가시에는 빗물이 한 방울도 묻지
않았으므로
비 그치고 파란 하늘에 달이
밝겠지요
그러나
달의 하늘은 검다지요
아주 검다지요
*별마로:강원도 영월 봉래산
정상에 있는 천문대(해발 80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