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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에서 제정 러시아는 두만강 하구를 사이에 둔 이웃나라였다. 동해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일본보다 가깝고, 압록·두만강으로 길게 국경을 접해 있는 중국을 이은 이웃나라였다.
조선 말기에 러시아와 관계는 러시아가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하여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유·개척하면서 시작되었고, 1894년 한러조약이 체결되면서 공식화되었다. 1904년 일제의 러일전쟁 도발로 양국의 국교가 한동안 단절되기도 하였지만, 러시아와 관계는 한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이주개척으로 성립된 연해주 한인사회는 항일민족운동과 관련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인이 러시아 연해주로 최초로 이주한 시기는 경흥의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연추煙秋, 현 크라스키노 부근의 지신허地新墟에 정착한 1863년 무렵이다. 이주 초기단계에는 특히 함경도와 평안도의 영세농민이 그 선도가 되었다. 그들이 월경하여 이주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간도 이주
의 경우와 같이 연이은 흉작과 왕조 말 부패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연유하였다.
그후 시베리아 연해주 이주한인은 해마다 증가하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1900년을 넘으면서 10만 명에 가까웠고, 1910년경에는 10만을 훨씬 넘었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30만 명까지 호칭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인의 시베리아 연해주 이주개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그 한 가지는 이주한인들이 연해주 개척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할양받은 이후 극동에서의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을 건설하고 시베리아철도를 부설하였으며, 황무지와 금광·삼림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연해주 개척사업에 한인 이주민의 피와 땀이 큰 몫을 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이주한인이 이와 같이 시베리아 연해주 개척에 공헌하면서 그곳에 한인사회를 이룩하여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5조약 및 1910년 국치 전후부터는 조국독립운동의 해외 중요기지로 발전시켜 한국독립운동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로부터는 국내에서 수많은 의병과 민족운동가가 망명하여 한인의 이주개척을 더욱 촉진시키는 한편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국민회國民會·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 등의 항일결사를 조직하고 계동학교啓東學校·한민학교韓民學校 등의 민족주의 교육기관도 설립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장차 있을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처음 광복군光復軍이라 칭하던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은 국내의 민족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외 한민족의 민족의식과 근대의식을 고조시켜 거족운동을 일으킬 것을 기약하게 되었고, 1914년에는 독립군광복군을 양성·지휘할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까지 건립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연해주는 1919년 3·1운동 때까지 한국독립운동
의 해외중심기지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민족주의를 지탱·발전시켜간 보루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을사5조약 전후로부터 3·1운동 발발 때까지 민족수난 초기에 국내외 민족운동자 가운데 러시아 연해주를 한번도 왕래하지 않고 활동한 사람은 이승만·신규식·김구 등 미국이나 중국 등지로 직접 망명한 몇몇 인사를 제하고는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뿐만 아니라 3·1운동 이후에도 연해주지역은 서북간도와 동일하게 독립군을 편성하여 무장을 갖추고 두만강을 향하여 항일전을 벌이는 기지로 더욱 그 지위를 높여 갔다. 특히 서북간도를 포함하는 남북만주의 독립군에게 공급되는 무기의 대부분이 연해주로부터 조달되었던 것이다. 또한 3·1운동 직전 그곳에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와 그 휘하의 항일유격대가 편성되어 항일운동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됨으로써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1920년대 조국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자취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863년 이래 이주개척이 시작되어 성장한 연해주 한인사회는 제정러시아와 그를 이은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후의 공산 소련의 대한인정책에 따라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1930년대까지 꾸준히 발전해 갔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두 민족수난을 극복하려던 열망에 따라 서북간도에서와 같이 한민족의 슬기와 땀과 피의 결정이라 하겠으며, 그대로 우리 근대사의 중요 국면이었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시베리아 연해주 한인사회가 이와 같은 의미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1937년을 고비로 본국의 역사와 유리되는 슬픔 도정을 걸었다. 그것은 구소련 당국이 자국 내 소수민족 동화 지배책의 일환으로 극동 연해주지방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수만리 떨어진 황무지인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 집단이주시켜 이후 그들의 새로운 개척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구소련 내에서의 일이었기 때문에 개방이 시작된 근년래 까지도 그 진상을 정확히 알 길이 없었지만 1937년 9월 소련 비밀경찰인 케·페·우가 동원되어 그해 말까지 수십만에 달하는 한인들을 시베리아철도 화차에 태워 황량한 반사막 목초지대인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평원에 실어 놓았다. 이러한 강제이주는 한인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전혀 알지 못하던 돌발적인 운명이었기 때문에 가산을 정리할 수도 없었으며, 수십만의 한인 대열이 짐짝처럼 몇 백 대로 이어지는 화물 차량에 실려 불안 속에 수송되었다는 말만이 고국동포에게 유전되었다. 더욱이 이와 같은 강제이주를 앞두고 소련당국은 그동안 한인사회를 이끌던 지도급 인사 수천명을 공산혁명을 선도하였던 아니던간에 무참하게도 ‘피의 숙청’을 감행했던 것이다.
비인도적인 강박과 학대 속에서 강제이주된 한인이 당도한 곳은 인가가 즐비한 촌락 하나 없는 사막과 초목 천지의 황무지였다. 아무런 생활대책도 마련되지 않았고, 한인들에게 지급된 것은 텐트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이후 소련 한인의 역사는 철의 장막에 가리워져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본국의 한민족의 역사에서 더욱 멀어져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90년을 넘으면서 전세계적 추세였던 개방정책이 공산 소련 전역을 진동시켜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소련의 급속한 해체를 보게 되었으며, 그 결과 러시아를 비롯한 십여 개의 독립국가연합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개방의 와중에서 비로소 중앙아시아 한인의 사정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약 43만 내외의 한인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러시아 등지를 중심으로 15개 공화국에 정착하여 생업을 영위하며 최근 ‘고려인협회’를 조직하여 그들의 권익을 신장시켜 가고 있다. 다행이 근년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강제이주된 한인의 명예회복도 법제상으로 이루어졌다. 그후 중앙아시아
한인들은 강제로 떠났던 연해주로 복귀하는 현상도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근대사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검토해야만 할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이 러시아 한인사회는 비록 그 성립과정에서는 민족의 시대적 고통을 안고 출발한 것이지만, 이는 결국 근대 한민족 역사의 한 단면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이주한인이 항일민족운동사의 측면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위상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항일민족운동자들은 1910년 경술국치 전후로부터 급속히 국외독립운동기지화가 추진되던 서북간도와 시베리아 연해주지방을 합칭하여 ‘해도간海島間’라 부르기도 했다. 시베리아 연해주의 ‘해海’ 자와 서북간도의 ‘간間’ 자를 합쳐 부른 이곳은 중국과 러시아에 걸친 광활한 지역으로 비교적 왕래가 자유로워 망국한을 품은 한인의 ‘신천지新天地’로 등장한 지역이었다. 또한 대한제국 시절 하와이와 미주 본토 및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이 ‘해도간’을 특히 ‘원동遠東’이라 불렀다. 그들은 서구인이 아시아를 ‘원동East Asia’이라 하는 뜻과는 달리 백두산을 한 가운데 두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연한 연해주와 북간도, 그리고 서간도의 신천지가 민족의 옛땅故地일뿐 아니라 앞으로는 ‘한인의 공화국’이 되기를 바라고 부른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그곳이 나라를 잃고 국내외 각지에 흩어진 한민족의 ‘부흥기지’가 되어 ‘대한大韓’을 광복하자는 염원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해도간’ 혹은 ‘원동’지역은 한민족에게는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은 민족 고지였다. 상고시대부터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
영역으로서 민족국가의 발달과 민족문화 형성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 영토라고 생각되지 않는 애착심이 있었다. 그러므로 1910년 전후의 민족운동자들은 그곳을 한국독립운동의 최적지로 생각하였다. 러시아 한인사회의 대표적 국학자라 할 계봉우桂奉瑀가 쓴 「아령실기俄領實記」의 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우리 고대의 역사를 소고溯考하여 보면 오소리烏蘇里 일대연해주-인용자나 남북만주가 모조리 ‘주신’虞曰肅愼 夏曰州愼 周曰朝鮮 金曰珠里申 淸曰珠申의 구강舊疆이었다. 차지此地를 사舍하고 영예로운 역사도 없고 위대로운 인물도 없고 광대廣大로운 판도版圖도 없다. 그런데 탕자패손蕩子敗孫된 우리의 조선祖先이 청전靑氈의 유업을 자보자수自保自守치 못하고 타인에게 허여許與함은 엇진 까닭이뇨. 또 그나마 근근 보유하였던 반벽건곤半壁乾坤 곧 삼천리 금구金甌, 조국강토-인용자로 흑치노黑齒奴, 일본인-인용자의 완농물玩弄物로 하야 아직도 광복치 못한 금일에 처재處在하야 선천고사先天古事와 갓흔 ‘주신’ 구강을 담론함은 마치 죽은 아해를 과긍誇矜
함과 다를 바 없으나 우리 민족이 다시 ‘주신’ 고토에 이식되야 그 수십만으로 산하는 금일임으로 더욱 고구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압록, 두만 이남을 광복하려는 군사상 동작으로 논하면 그 기지가 적의適宜하고 그 생취生聚가 중다衆多하야 57년전1864년-인용자 처음 이식되던 그 시時에 천연天然이 우리 장래를 위하야 예비하셨던 것이다. 註1)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과 신채호 등이 우리 고대의 영역을 백두산을 한 가운데 두고 압록강·두만강을 허리에 띠고 남북만주와 한반도에 걸치는 것으로 잡고, 북쪽으로는 흑룡강에 합쳐지는 송화강 상류로부터 서쪽으로는 요동반도를 포함하는 요하遼河, 동쪽으로는 발해의 유적인 있는 송왕령宋王嶺, 우수리스크를 포함한 오소리강烏蘇里江이동의 연해주까지를 경계로 한 것은 이와 같은 민족 고지의 개념에서 연유한 주장인 것이다. 그 밖에도 이들 지역이 독립운동기지화에 유리한 점은 1905년 전후에 시베리아 지방까지 휩쓴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러시아의 제1차 혁명의 물결과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근간으로 한 1911년 신해혁명 전후의 중국의 사상적 조류가 한국독립운동을 동조 내지 후원하는 경향이 컸던 까닭이다.
이와 같은 지역 중에서도 연해주는 1910년 전후로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까지 해외독립운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특히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와 연추가 그 가운데서도 핵심지였다. 시베리아 연해주지역은 제정러시아가 17세기말부터 지속적으로 전개한 남하정책의 결과 청으로부터 강점한 극동지역의 중요부분이다. 특히 1848년 9월 니콜라이 황제는 무라비예프Nikolai Mulaviev 장군을 동북시베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러시아가 아무르강이라 부르던 중국의 흑룡강 유역을 점
령하고 나아가 그 이남에 오소리강에서 우리나라 동해에 이르는 지역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후 제정 러시아는 1858년 애훈조약과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해 이 지역의 점유를 국제법적으로도 인정받아 러시아의 영토로 확정하게 되었다. 서북쪽은 아무르강에서부터 시작되고, 동쪽은 사할린과 연접한 타탈스키해협에서 동해에 미치며, 남서쪽은 두만강 하류의 토리土里대안에 미쳐 우리나라와 접경하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20만 7천 ㎢이고 아무르강과 오소리강 및 그 여러 지류 유역은 비교적 평원을 이루고 게다가 그 중간에 흥개호興凱湖같은 수원이 좋은 호수가 있어 농업개척에 필요한 조건을 구비한 곳이었다. 또한 연해주 동쪽에는 남북으로 뱀처럼 뻗친 시호데아린산맥이 동쪽 사면이 험준하여 바다로 급경사를 이루나 그 밖의 지역도 각종 광물이 풍부한 산곡과 울창한 삼림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오소리강 유역과 두만강 대안과 가까운 포시에트항을 형성한 포시에트지역, 블라디보스토크항이 형성된 피요트르만을 둘러싼 남오수리군 및 그 위의 수분하綬芬河지역은 농경지 개척의 적지가 되었다. 시베리아가 러시아에 의해서 영유될 무렵까지는 이 지역의 인구가 불과 1만 2천여 명에 지나지 않는 거의 미개척지대에 불과하였다. 러시아는 제1차로 아무르만 강구에 니콜라예프스크 군항을 건설하고 이어 1873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을 건설하여 극동함대의 기지화를 서둘렀다. 또한 1900년에 들어서면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를 연결하는 시베리아철도의 부설사업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동방경략을 위해서는 시베리아 전역의 개발이 병행되어야만 했고, 그에 따라 노동력을 무한히 필요로 하였다. 한인의 시베리아 이주개척의 시작과 그곳 한인사회의 성립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인의 이주개척과 한인사회의 형성은 결코 용이하지 않았고, 또한 아직까지 해명되지 못한 여러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한인의 연해주 이주는 근대 이전의 봉금시기에도 비밀리에 도강渡江경작을 하기 위한 월경이주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영주를 위한 이주였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더욱이 러시아가 이 지역을 영유하기 이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근대에 들어와 연해주 한인사회 형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주개척의 기점은 역시 연해주가 러시아령으로 편입된 1860년 직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연해주 한인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초기 독립운동자들의 기록에 1864년부터는 확실히 초기 개척선구자들의 성명과 정착촌락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봉우로 밝혀진 ‘뒤바보’의 「아령실기」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기원 4197년 갑자1864년 춘에 무산 최운보崔運寶, 경흥 양응범梁應範 2인이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 훈춘을 경유하여 지신허地新墟, 此는 煙秋 등지에 내주來住하여 신개간에 착수하니 (중략) 척식拓殖의 최선봉된 그 가적嘉績은 상탄賞嘆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때에 연추 연해안에는 한인漢人 10여 호가 유하여 혹은 증염煮鹽, 혹은 농작을 업業할 뿐이고 그 밖에는 흑정자黑頂子에 주둔한 아병俄兵 소부분이 유할 따름이다. 그 이듬해 을축1865년에 아관俄官 3인이 그 군사 10여 인과 통역 최운보를 대동하고 경흥부사에게 왕회往會한 사事가 유하였나니 차는 한아韓俄 교섭의 초보요 이민문제로 발생한 교섭이었다. 그리하여 지신허에는 한인의 부락이 완성하였는데 따라서 만주 토산인 홍호적紅鬍賊 방어책이 기起하여 한인의 자위自衛로 사포영私砲營을 설립하였다. 그 사포 중 25인이 6진鎭 등지에 잠왕潛往하여 아영俄領 이주를 지원하는 자 우마 60여 량, 마 30여 필 되는 인구를 휴래携來하는 도중에서 경흥 관군의 금알禁저을 당하여 하삼동전사下三洞戰事가 기起하
였는데 관군측에서는 안효일安孝一이 즉사하고 이민측에서는 노파 1인과 여아 1인이 소거擄去되었더라. 註2)
곧 영주永住를 위해 최운보와 양응범 두 사람이 1864년 두만강을 건너 간도의 훈춘을 경유하여 연해주로 들어간 것이 연해주 한인 이주의 기원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들의 첫 정착지가 중국과 연해주 국경 부근에 위치한 지신허로, 이곳이 연해주에 형성된 한인사회의 연원지가 되는 것이다.
한인의 연해주 이주 기점을 알려주는 또 다른 기록은 치타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에서 발간하던 『대한인정교보』의
「한인 아령이주 오십년 기념」이라는 제목하의 논설이다. 그 논설에서는
한인 아령이주 50년 기념에 대하여 우리는 정성을 기울여 찬성하노라. … 이번 기념식에 50만 우리 동포로 하여금 ① 한족韓族이라는 관념과 ② 이대로 가면 아주 멸망하고 말지니 자제에게 새로운 생각을 넣어주어 독립한 대한국 국민이 되든가 아라사 사람이 되더라도 아인俄人과 평등된 국민이 되어야 할 생각을 주고 3. 지나간 50년 동안에 다른 여러 민족이 어떻게 활동하였는가를 알려 우리도 50년 동안 활동하면 족히 남부럽지 않게 될 줄을 확신케 할지니라. 註3)
고 하여 1914년을 첫 이민 이래 한인 이주 50주년으로 계산하고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기념행사는 한인의 민족운동 결사인 권업회 주관하에 추진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권업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기념예식은 루력러시아력-필자주 9월 21일로 정하였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극동역사 중에 한인이 이 날에 처음으로 이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고로 이를 의거하였다 하며, 처음에 이주한 곳은 지신허이나 회집의 편의로 예식 거행할 처소는 해삼위로 정하고 1,000원 예산으로 한국식 기념비를 목허위포시에트-필자주에 세울 터이라 하며 한인 이주역사를 편제하되 그 재료는 각 지방으로 수집하여 한국문, 아문으로 각 한 벌씩 발간한 사건 등이며 … 註4)
위에서 볼 때, 그 기념행사의 내용은 첫째로 1914년 9월 21일 해삼위에서 기념대회를 개최하는 일, 둘째로 기념비 건립, 셋째로 연해주 한인이주사 편찬 등의 세 가지로, 한인의 결의를 새롭게 할 목적이었으며,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그 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전시체제로 전환되는 속에서 모든 기념사업이 중지되고 말았다.
위 인용문 가운데 러시아측 기록에 의거해 9월 21일로 기념 일자를 정했다는 대목이 특히 주의를 끈다. 곧 이주 한인들이 러시아측 기록을 열람하였고, 그 기록에 의거해 이주기점을 설정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점은 1863년을 이주 기점으로 설정한 다음의 러시아측 기록을 살펴보면 더욱 신빙성을 지니게 된다.
최초의 ‘한인 주민들이 1863년 남오수리구역에 나타났는데, 당시 이길 수 없는 궁핍과 기아로 인하여 조선에서 이곳으로 피난왔던 13가구가 정착하였다’. 1863년 9월 21일에 노브고로트 국경초소장이 연해주 군지사에게 ‘한인들
이 지신허강가에 정착하여, 거기에서 열심히 농사짓는다’고 보고하고 그들에게 빵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註5)
즉 1863년 9월 21일 노브고로트 국경초소장이 연해주 군지사에게 한인들이 지신허 강가에 정착하여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고 보고하고, 그들에게 빵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명기된 ‘9월 21일’은 위에서 보았듯이 한인이주 기념일로 예정한 날짜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측의 또 다른 기록도 위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즉 1863년부터 1928년까지의 한인이주 실태를 분석한 소비에트 극동관구 토지관리부 토지개량부장 마마예프는 「극동지방의 조선인문제」에서 ‘13가구가 포시에트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대동공보』에서는 한인이주 역사를 기술하는 기사 가운데 위의 러시아측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이 있어 특히 주목된다.
기원 4196년1863년-필자주에 부패한 정부 아래 탐관오리의 실정한 까닭으로 함경북도 각 군에서 우리 동포 13호가 살던 세간을 흩고 남부여대하여 뽀시트만 북편으로 넘어가니(하략) 註6)
여기서는 한인의 러시아 이주기점을 러시아측 기록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원 4196년’, 곧 1863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권업회에서 이주 50주년 기념행사를 계획하면서 이주 기점을 1년 늦게 1864년으로 파악한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지만, 1864년
대한광복군정부 건립과 연관하여 광복군을 양성하려는 등 어떤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상의 이주 기점에 관한 논의를 종합해 볼 때, 국망 직후인 1914년에 연해주 한인사회에서는 1864년을 한인사회 형성의 원년으로 상정하였다. 그 근거는 러시아측 기록에 의거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러시아측 기록에는 1863년을 이주 기점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사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 점은 『대동공보』의 관계기사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주한인의 최초 정착지가 ‘지신허’였다는 점에는 전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863년 이래 이주한인이 밀집하였던 최초의 한인촌락은 지신허였다. 이후 지신허 이주민이 해마다 급증하여 1964년에는 60가구 308명이 이주하여 227데샤지나를 점유하고 1868년에는 165가구, 1869년에는 766가구로 늘어났다. 지신허는 이후 연해주 각지에 산재한 한인촌락 가운데서도 그 규모가 매우 큰 대표적인 한인 집단 거주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강제이주로 한인이 소개된 이후 황폐되어 현재 지신허가 명확히 어디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보거나 현지 한인들의 고증에 의하면 연추에서 서남방으로 들어가 중·러 국경부근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이곳은 두만강을 건너는 이주한인들이 간도의 훈춘 등지로부터 들어오기에 편리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는 지신허강이 흐르는 평원지대로 농경개척에 유리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0년대가 되면 이곳 한인구가 1,600여 명을 웃돌 만큼 이주한인이 밀집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행히 근래 반병률潘炳律·박민영朴敏泳교수 등의 연해주지방 역사유적조사팀이 연추 인근에서 지신허 유적지를 찾아 현재 면밀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 의미 있는 성과라 할 것이다.
연해주에서는 지신허 개척에 이어 1865년에는 추풍秋風지역에 100여 호에 달하는 한인촌이 성립되었다. 여기에는 연해주지역 한인 이주개척과 항일독립운동에 큰 자취를 남기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때는 재무총장에 선임되기까지 한 최재형崔才亨일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추풍은 지리상의 위치로 볼 때 소왕령蘇王嶺이라 부르던 우수리스크의 서쪽으로, 중국에서 발원한 뒤 연해주로 흘러드는 수분하綏芬河일대를 범칭하는 광의의 지역개념으로 불리어졌다. 그러므로 이곳 역시 두만강을 건너온 이주한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수분하 유역의 평원은 농경에 적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추풍 일대에는 대소 한인촌락들이 산재해 대표적인 한인 밀집구역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지신허와 추풍에 뒤이어 1860년대 후반 이후에는 크고 작은 한인촌락들이 연해주 도처에 성립되었다. 특히 1869년 6진을 비롯한 북한지역에 밀어닥친 극심한 흉년은 궁민들의 월경이주를 더욱 촉진시키는 중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1870년부터 개척이 시작된 소왕령이라 부르던 우수리스크와 1871년 흥개호를 돌아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을 건너가 개척한 사만리, 그리고 1874년에 이룩한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開拓里의 한인촌 등은 두드러진 한인 밀집촌이었다. 그 밖에도 흑정자·녹둔鹿屯, 크라스노예셀로·도비허·남석동南石洞·와봉臥峯·시지미·아지미·수청水淸, 현 빨지산스크 등지의 개척도 이민사상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례라 할 것이다.
그 중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인 개척리는 그곳 군항의 개척과 병행하여 이루어졌으므로, 블라디보스토크 시가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었
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이 1911년 봄에 돌연 콜레라의 근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한인들을 강제로 철거시키고 그곳을 러시아 기병단의 병영지로 삼았다. 그리고 한인촌은 러시아 당국이 지정한 시의 서북편 변두리로, 개척리에서 북쪽으로 언덕을 넘어 500여 미터 되는 곳으로 옮기도록 하여 신개척리新開拓里가 생겼다. 이 신개척리는 한인이 또 다시 피땀을 흘려 새로운 시가를 건설하면서 ‘신한촌新韓村’이라 명명하였고, 러시아 이름으로 ‘까레이스까야 슬라보드카’라고 했다. 신한촌은 동서로 약 6정1정은 약 110 미터, 남북으로 약 7정의 면적으로 아무르만에 연한 산의 경사면에 위치하여 그곳에서 아무르만을 내려다보면 100여 척이나 되는 낭떠러지 밑에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절경지였다. 그리고 겨울이면 결빙하여 서남쪽으로 가는 사람과 말은 바다 빙판 위를 걸어서 훈춘·왕청·연길·화룡 등 북간도로 오갈 수 있는 곳이었다.
신한촌은 신개척리와 석막리石幕里로 구성되었고 나무로 건축한 러시아풍의 작은 집이 보통이었다. 집마다 두세 개의 한국식 온돌방이 있고 한 집에 여러 가구가 모여 살아 많으면 20여 명이 동거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신한촌 외에도 규모는 작으나 한인의 집단 거주지가 세 곳이 더 있었다. 하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서남단 호신포태 밑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마치와야라는 곳으로 가르스카야라 하였고, 둘째는 대안의 지루양이란 곳으로 레닌스카야라 하였다. 셋째는 시의 동쪽 끝 마르스카야 스크보드카라고 불리어지는 한인마을이다. 신한촌을 비롯한 이와 같은 한인타운은 블라디보스토크에만 국한하지 않고 우수리스크와 하바로프스크 및 니콜라예프스크 등지의 큰 도시에도 형성되었다.
이주한인들의 생업은 주로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주한인들은 토지와 분리해 생각하기 어려운 면이 컸다. 한인 가운데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현상은 대다수의 한인이 적수공권으로 이주하였고, 본국에서부터 농업 이외의 다른 직업에 종사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점 등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다음은 군항과 철도 건설현장 등의 노동이었고, 약간 비율의 영세 상공업자도 드물게 있었다.
연해주 초기 이주한인의 인구수를 정확히 제시하기란 매우 곤란한 일이다. 한인의 이주통계는 러시아와 일본측 기록에 각종 자료가 소개되어 있으나, 모두 정확성에는 의문이 간다. 더욱이 한국측의 구체적 통계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실정이므로 연해주 한인구의 추의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인에 대한 인구통계가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건너온 유이민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주 한인들은 거주가 불안정하여 매우 유동적이었다는 점에도 있다. 또한 이주민 가운데 여호餘戶라고 부르던 비귀화 한인들이 과반수를 훨씬 넘을 정도로 다수였기 때문에 이들 비귀화 이주민은 러시아 당국과 행정적으로 일정하게 유리되어 있었던 점도 인구수 파악
에 제약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구의 추이와 그 대체적인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들 초기 이민의 규모는 이민 시작 이래 연년 증가 추세를 보여 1882년경까지 연해주 인구 구성의 수위를 차지할 만큼 급증하였다. 구라베의 『극동 노령에서의 황색인종문제』에 제시된 통계에 의하면 1882년의 연해주 총인구 92,798명 중 러시아인이 8,385명인데 비하여 한인은 10,137명으로 수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 통계의 정확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연해주 개척 초기에 한인의 왕성한 이주개척 추세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1869~1870년 두 해에는 국내의 큰 흉년으로 인해 수천 명에 달하는 대인구가 이주하게 되어 1869년 6월부터 같은 해 12월 사이에 이주한 한인수가 무려 6,500명에 이르게 되었고, 이후에도 연해주 한인구의 증가추세는 계속되어 1899년에 27,700명, 1902년에 32,298명, 1908년에 47,289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 통계는 원호元戶라고 부르던 귀화인을 중심으로 러시아 여권 소지자만을 파악한 것으로 주기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30% 이상의 비귀화 한인을 합산하면, 1908년 61,500명으로 계산되고 있다.
한인의 연해주 이민은 1904~1905년의 러일전쟁 이후부터 큰 변화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더욱 급증하였다. 일제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대한침략정책을 가속화시켜 을사5조약을 비롯하여 군대해산과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 등을 강제하면서 국내에서의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전을 군경으로 탄압하는 가운데 서북간도 못지않게 연해주지역으로 망명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0년 국망으로 말미암아 살아남은 의병, 일제군경의 투옥 학살을 모면한 구국계몽운동자, 그밖의 항일민족운동자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망명길에 올랐다. 그 가운데서도 많은 지도급 인물들이 블라디보스토크와 연추 등지를 중심
으로 하는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이들 정치적 망명자들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기지화에 중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함께 궁민들의 이주 추세도 여전하였다. 러일전쟁과 그를 이은 의병항전 탄압, 그리고 국망 이후의 무단통치,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한 농지 약탈로 농촌경제는 파탄되어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연해주 이주 한인의 출신지 비율을 보면, 함경도가 수위였고 평안도가 그 다음으로, 이들 ‘북도’ 출신이 전체 이주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을사5조약 이후 정치적 망명자의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 속에서도 여전히 ‘남도’ 출신은 드물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가 연해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두만강 일의대수만 넘으면 쉽게 월경할 수 있었다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경제적인 곤경에 처한 북한지역의 궁민이 삶의 터전을 찾아 도강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데 기인한다.
이러한 이주 추세하에 1910년 전후의 연해주 한인수를 4~5만 명에서 쉽게 믿기지 않는 수십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경우의 기록까지 생겼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들을 고려해 볼 때, 연해주지역에서 이주한인의 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지는 시기인 1911년 권업회 창설 전후가 되면 약 20만 명을 추산할 수 있는 한인사회가 형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1909년 무렵 연해주 한인들이 스스로 ‘20만’으로 통칭하는 것은 사실에 근사한 수치라고 생각된다. 註7) 이는 또한 1926년경 연해주 한인수를 309,950명으로 계산한 통계수치를 고려해 보더라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한인이주가 급증하면서 두만강 대안의 접경지 일대는 한인의 내왕이 끊이질 않아 ‘국경’의 의미가 희박해졌고, 나아가 지역에 따라
서는 한인의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곧 도처에 한인촌락이 형성되어 연해주 남쪽 지방은 마치 한국 영토의 연장지를 방불할 정도였다. 한인이 밀집 거주하는 지역에는 한국식 촌락이름이 등장하였으며, 한인의 파급에 따라 1910년대가 되면 거의 연해주 전역에 크고 작은 한인촌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현재 확인되는 중요 한인촌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 신한촌, 구개척리, 석막리, 시와재, 피막동, 마투왜, 동령, 멸리채, 친거우재
연 추(크라스키노) - 상별리, 중별리, 하별리, 지신허, 바도쇠, 감투뫼, 주루허, 두고개, 새희정재, 금당촌, 향산, 녹평, 와봉
묵허우(포시에트) - 푸두장, 장서재, 연도, 마라사, 태이성, 울룽추
툴남위 - 강허재
하마탕 - 끈돌, 다리골, 큰섬, 우두거우, 산두거우, 얼두거우, 투루거우, 암밤비
수 청(빨지산스크) - 석탄동, 사명거우, 홍석동, 평사위, 큰령, 청지거우, 동개터, 신영거우, 다우지미, 인수동, 금점동, 홍거우, 투듀동, 상서재
추 풍(수이푼) - 대전자, 시화재, 허커우, 황거우, 육성, 재피거우, 로남, 홍무허, 요조리봉
화발포(하바로프스크) - 인동(한인거류지), 농평
니항(니콜라예프스크) - 개척리
아지미 - 상농평, 하농평
소왕령(우수리스크) - 동컨돌, 홍머우
보리녹개/ 리포/ 막리허/ 류정커우/ 시지미/ 창동/ 도비허 註8)
이밖에도 한인이 거주하던 촌락은 수백개 소에 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남쪽의 연추지방만 하더라도 한인 촌락이 360개에 달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하지만 이들 지명의 촌락은 1937년 한인 강제이주로 말미암아 일시에 황폐화되고 말았으며, 이런 까닭에 아직도 한인 거주 촌락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이러한 지명들이 연해주 도처에 산재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연해주 한인사회의 규모와 열기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한인의 자치기구가 성립되어 한인 자치제를 신장시켜 사회적·경제적 지위향상을 도모하였다. 한인 자치제의 근간은 본국에서 이장 혹은 동장을 두던 것과 같이 각 한인촌락마다 몇 사람의 풍속風俗을 두고, 그 중
에서 풍존風尊 혹은 노야老爺 1인을 공선하여 촌락단위의 자치를 영위하였다. 이들 임원을 중심으로 촌락내의 환난상조를 비롯하여 관혼상제의 공조, 과실상규 등 모든 대소사가 예외없이 처결되었다. 흔히 도시에서는 ‘노야’, 농촌에서는 ‘풍존’이라 칭하던 이 직임은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벼슬처럼 여겨져 퇴임 후에도 매우 존경되었으나 1910년 전후부터는 신풍조에 따라 ‘회장’ 또는 ‘민장’이라고 고쳐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한인 자치제는 이와 같은 촌락단위의 조직을 바탕으로 본국의 면사제面社制와 같은 도소都所를 중심지에 설치해서 도헌都憲혹은 사장社長을 두고 각 촌락의 모든 한인을 통할하였다. 특히 도헌 혹은 사장은 일반적인 한인의 민형사 소송을 처리하고 러시아 당국의 공인까지 받아 모든 부세를 수납하는 막강한 직권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한인사회 자치제의 구체적인 한 전형을 신한촌민회에서 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가 중심지에 있던 개척리 때부터 시행되어 오던 한민회韓民會를 1911년 시의 서북쪽 신개척리로 옮기고 그곳을 신한촌이라 명명한 후 평의원 기구를 정비하고 임원을 개선하는 한편 사업과 예산을 심의 집행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종래 임기 3년의 한민장을 1년제로 고쳐 임기 만료된 김학만金學萬의 후임에 김병학金秉學을 선출하고 이어 부회장 이동환李東煥, 서기 조창호趙昌浩, 국한문 담당·윤일병尹日炳, 러시아어 담당, 수금 김유명金有明·채성화蔡成化·강양오姜良五, 姜楊五 등의 임원을 선임하였다. 둘째, 유진률兪鎭律·김병학·이상설李相卨·이동환李東煥·안창호安昌浩·차석보車錫甫등 신한촌내 중요 민족운동자 20인을 평의원으로 선출, 중요사업과 예산 등을 심의하고 중요 임원을 선출케 하였다.
이와 같이 구성된 평의원회에서는 신한촌의 위생시설 개선비로 1년간 3,600루블을 책정, 신한촌내 한인 313호를 4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징수하는 한편 자치운영비로 호별 과금·야경비·청결비·학교비·위생비 등을 매호 또는 개인별로 차등 부과하였다. 셋째, 신한촌의 질서유지와 한인의 지위 향상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의결 시행하였다. 註9)
① 한민학교의 유지 경영은 중요한 것으로서 건축에 대하여는 먼저 이범진李範晉의 증유금贈遺金 1천 루불로 이를 충당 러시아은행에 예금하고 이종호李鍾浩를 교장으로 추천하여 일체의 사항을 관리시킬 것.
② 신한촌은 일청日淸 양국인의 개점開店을 허가하지 않는다. 러시아 관헌이 앞서 조선인에 대하여 특히 지역을 지정, 이전시킨 취지에 반하므로 일청 양국인의 잡거를 일체 금지할 것.
③ 청국인에 대하여 이미 가옥을 임대한 것은 제2항에 반하므로 1개월 이내에 입퇴立退를 청구할 것.
④ 아편 흡연은 우리 동포의 생명과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바 크다. 러시아 관헌도 또한 이를 금지시키는 현재 일체의 흡연을 금지시킬 것.
⑤ 청국인 중 수상한 자가 많다. 일몰 후 등불 없이 왕래하는 것을 금지할 것.
⑥ 도박 등의 잡기에 의하여 몸을 망치고 집을 잃는 자가 많다. 또 많은 불법행위가 잡기에 기인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일체 잡기를 금지시킬 것.
넷째,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신한촌민회 규약을 제정하여 시행하였다. 註10)
① 민장은 선거에 의하여 이를 위임함.
② 부민장은 민장이 지정함.
③ 평의원은 10인 이상을 선출함.
④ 서기는 2인을 선정함露文과 國漢文 서기
⑤ 회계는 1인으로 함.
⑥ 수금계는 4인으로 함資力 있는 자의 보증을 요함.
⑦ 학교의 경비는 본회에서 지출함.
⑧ 교사는 2인으로 하여 노어과·조선과 각 1명.
⑨ 야번은 4인으로 함.
⑩ 각호 호주의 성명과 가족의 수, 번호를 매원 1회 본회에 보고할 것.
⑪ 출입여객은 그 성명을 회에 보고할 것.
⑫ 본회에서 송결訟決할 수 없는 사건은 노국 관헌에게 보고할 것.
⑬ 호별 과금課金은 2등으로 나누어 1등 1루불 50코페이카, 2등 1루불을 매월 징수함.
⑭ 야번에 관한 비용은 1등 1루불 50코페이카, 2등 70코페이카를 매월 징수함.
⑮ 신한촌에 오는 자로부터는 청결비로 50코페이카를 징수함.
⑯ 귀국자로부터는 학교비로 20코페이카를 징수함.
⑰ 민장의 월봉은 50루불로 함.
⑱ 노문서기 월급은 40루불, 한문서기는 30루불로 함
⑲ 학교교사의 월봉은 노어과 50루불, 조선과 40루불로 함.
⑳ 야번의 월급은 20루불로부터 25루불까지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비롯하여 연해주 전역에 걸쳐 이와 같은 성격의 한인촌락을 무수히 건설, 한인의 자치를 신장시켜 가던 이주한인들은 각지의 황무지 개척과 연해주 개발에 노동력을 제공, 생활의 터전을 닦으면서 러시아내 한 소수민족의 집단사회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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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 고생하셨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도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이 바쁜 관계로 일단 눈팅만요~~~바쁜일 끝나고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출력해서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