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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전 6:7-9)
대민성결교회 / 이석민 목사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라고 파스칼은 말한바가 있습니다.
누구나가 생각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인간이 나름대로 생각하여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애써 보지만 그 모든 노력이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되다는 것을 성경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정립하였습니다.
자신의 목적이 오직 유대종교에 심취해 있을 때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3장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며,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사람을, 나쁜 생각은 나쁜 사람을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의 생각을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빌립보서3장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서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창조주요, 통치자이심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알았습니다. 이 신적인 지식을 알 때 그 나머지의 것은 전부가 쓸데없는 지식이었고, 해로운 것이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치 촛불이 태양 빛 앞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바울이 가진 학벌이나 가문이나 혈통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배설물'은 개에게 던지는 것으로 음식찌꺼기나 똥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을 깨닫고 과거에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이처럼 가치관의 변화가 있습니다. 자신의 취미도, 생각도, 인생관도 바뀌어 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이야 바울처럼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도들 가운데에서도 삶의 목적을 정하지 못하고 대충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이 큽니다.
오늘 본문은 삶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임을 교훈하여 주고 있습니다.
전도서6장9절에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눈으로 보는 것'이란 자신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즐기며 만족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공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불확실하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또 다른 것을 꿈꾸는 헛된 욕심을 말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 곧 현재의 삶으로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것이 헛된 욕심에 끌려 일평생을 불안하고 근심 가운데 사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이 다 이것 뿐 이라면 이것도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삶에 만족하며 평안과 낙을 누리는 것이 헛된 욕심을 좇아 방황하며 근심하여 평안과 안식을 잃어버린 것 보다 낫지만 그러나 여기서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낙을 누리는 이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인생이 이것 뿐 이라면 이것도 헛되다고 한 것은 현재의 삶에서 만족하고 평안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임을 전도자는 암시하고 있습니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에 인생을 소비하지 않고 성도 된 우리로서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입을 위하는 것(7)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사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장사라 할지라도 먹지 않고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지혜자도 먹어야 하고, 우매자 도 먹어야 합니다. 부자도 먹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도 먹어야 하고, 누구나 다 먹어야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식욕은 차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먹어야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생의 목적은 단지 먹고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것이 햇수만 연장시키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생존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자들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먹어도 아니 먹어도 주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온통 우리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입니다. 절대로 나를 위해서 나의 욕망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목적이 정해져 있습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목표가 아닙니다. 한참 생각해야만 얻어지는 결론이 아닙니다. 연구해서 얻어 지는 결론도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도 확연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목표가 하나님입니다.
고린도전서6장19-20절에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은 내가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되어야 됩니다.
빌립보서2장12-13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와 같이 성도 된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그 계획을 나타내기 위해 일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에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헛된 일에 분주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편39편5-6절에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정말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생 속에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실상 가서 만져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없는 그림자입니다. 아름다운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저 구름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 그런 것이 인생입니다. 실로 바쁩니다. 우리 가운데 바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바쁩니다. 그런데 실제는 사람들이 가치 있는 일보다 가치 없는 일에 바쁘게 지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니요 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헛된 일을 하느라고 그렇게 바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누가 취할는지도 모를 그 재물을 쌓느라고 그렇게 바쁘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현대인들은 먹는 것을 찾아다니느라 바쁩니다. 옛날 보리 고개 시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문제였지만 지금은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해야 하는 시대를 만났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맛 집을 찾아다니는 식도락가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현대인은 아무음식이나 먹지 않고 웰빙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본성은 먹고 마시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 욕망을 부추기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방송국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먹 거리 방송을 내보냅니다. 새로운 맛 집이 어디에 생겼고, 또 먹는 사람을 비추면서 이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보여줍니다. 우리의 먹성을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 많은 음식점들이 있고 돈만 있으면 산해진미의 음식을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정말 건강을 위해 맛있고 좋은 음식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고 전국에 운동열풍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잘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여기 매여서 건강이나 웰빙이 우상처럼 되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산해진미의 음식을 먹는다 할지라도 식욕은 다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본절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인생의 헛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출세가 인생의 목적인 줄 알고 땀 흘려 수고해서 출세 해 보았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헛되다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버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줄 알고 땀 흘려 수고해서 돈을 벌고 보았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헛되다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쾌락이 인생의 목적인 줄 알고 몸부림 쳐서 쾌락을 탐닉해 보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헛되다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수고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결론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수고하여 자기의 입을 위하는 것도 다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하여 먹고 마시는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캐나다에 서식하고 있는 갈매기는 이동할 때 언제나 V자 모양으로 이동을 하는데, 한 번도 쉬지 않고 1609Km를 날아간다고 합니다. 4천리입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456Km입니다. 거의 부산왕복을 2번 정도 하는 거리입니다.
4천 리를 그 새들이 날갯짓하면서 한 번도 쉬지 않고 날아가는 것입니다. 공기 저항을 적게 받기 위해서 비행기처럼 V자로 날아가고, 그리고 제일 앞선 갈매기가 공기 저항을 많이 받아 가장 먼저 피곤해지는데, 피곤하면 뒤로 물러가고 다른 갈매기가 앞에 서고, 이렇게 서로가 질서 정연하게 교대하면서 4천 리를 날아가는 것입니다. 참 지혜로운 새입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스프링복 이라는 산양들은 미련합니다. 넓은 초원의 풀을 뜯으며 즐기다가 풀이 조금 적어지면 모두 긴장을 하게 되고, 앞서가는 산양들이 좋은 꼴을 먹어서 뒤에는 좋은 것이 없으니까 서로 앞질러서 좋은 꼴을 먹으려고 경쟁하고 다투다가 결국은 마냥 달린답니다. 그러다 절벽을 만나면 앞의 양들은 서는데 뒤의 양들이 밀어 부치는 바람에 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마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새나 짐승이나 지혜로우면 평화롭게, 복되게 삽니다. 미련하면 복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지혜는 지식보다 범위가 넓고 더 중요합니다.
지식은 현재와 과거의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혜는 현재와 미래의 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지식은 외워서 얻을 수 있으나 지혜는 하나님을 알아야 가질 수 있습니다.
지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성품입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1장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인간은 누구나 지혜가 부족합니다. 인간으로 사는 사람은 예외 없이 다 지혜의 결핍자요 부족자 들입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지혜를 얻어서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지혜는 내가 가진 지식을 잘 활용하는 기술입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가정생활에도 교회 생활에도 사회생활에도 무슨 일을 하든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기도해야 지혜를 얻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인본주의로 이성적으로만 사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매일 매일 삶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죄라고 가르쳐주며 또한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성과 세속적인 지식과 경험으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영적인 태만과 교만을 내어버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지혜도 다 좋은 것은 아닐 수 있음을 본절에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즉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이것은 '스스로 유식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난하게 산다면 무식한 사람보다 실제적으로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인생을 어떻게 행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론적으로는 잘 아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 앞가림조차 못하는 가난뱅이라면 그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저렇게만 배워놓으면 부러울 게 없겠는데.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 지혜가 우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늙고 나니까 초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나 박사 학위가 열 개씩이나 있는 총장이나 미련해지기는 마찬가지고, 어리석어지기는 마찬가지인 것을 알았습니다.
대단한 것 같아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평등 시리즈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사람은 나이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공부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40이 넘어가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그게 그거라는 말입니다. 50대가 되면 외모의 평등이 찾아옵니다. 예쁜 사람, 못생긴 사람은 어리고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50이 넘어가면 배도 나오고 엉덩이도 쳐지고 두리뭉실해져서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60대가 되면 성의 평등이 찾아옵니다. 남자나 여자나 평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60이 되면 남자는 순해집니다.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억새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비슷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70대가 되면 건강의 평등이 찾아옵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고만고만합니다. 다 같이 늙어가고 다 같이 병들어가는 것입니다. 80대가 되면 재물의 평등이 찾아옵니다. 먹지도 못하는데 돈이 많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집니다. 90대가 되면 생사의 평등이 찾아옵니다. 말은 살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것이 그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9절에서 말하는 지혜자나 우매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욕심을 이루려고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는 처세에 능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지혜에 대해서 아주 능란한 사람이나 이런 지혜가 없어서 늘 당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데에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끝없는 욕심 때문에 인생에 대해서 무지한 것은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아는 가난한 자는 매끄러운 대인관계를 가지는 겸손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 역시도 겸손한 것 같으나 처세술이고,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이런 행위를 가식적으로 하는 것에 불과하니 우매자나 지혜자나 사람 앞에 겸손으로 위장하는 사람이나 다 한가지로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들이 인생으로서 궁극적으로 만족을 얻는 길인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니 인생 저희들로서 지혜있다 하는 사람이나, 무지하다는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욕심을 이루려고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는 처세에 능한 사람도 다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것 뿐 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눈으로 보는 것(9)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사람에게는 오감이 있습니다.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입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외적 정보를 조합해 세상과 만나고 소통합니다. 오감 가운데서 어떤 감각에 유난히 예민한 이들도 있지만, 보통사람들에게는 시각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감 가운데서 정보인지능력이 가장 우수한 것이 시각입니다. 외부 대상들을 아름답다 혹은 추하다 하는 판단,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의 감정을 낳는 것은 시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미인이 길을 물을 때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길을 물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다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꾸미고 가꾸는 일에 열을 올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현대가 시각 중심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다고 해서 무조건 복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보는 것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창세기3장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이것이 인류 최초의 범죄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즉 보는 데서부터 생겨나는 욕망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입니다. 마음 상태가 눈빛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납니다. 마음에 욕망이 가득하면 그 욕망이 눈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런 사람의 눈은 탐욕이 번들거리는 눈이 됩니다. 욕망이 그에게 명령합니다. ‘얻어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네 것으로 만들어라’
우리의 눈을 자극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열망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들의 눈을 자극합니다. 예를 들면 좋은 집이나 옷, 가구, 사회적인 지위 등입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갖기 위해 무진장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안목의 정욕을 탐심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든지 안목의 정욕 즉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한 대학생이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하필 도박을 하는 오락실 아르바이트였습니다. 그 학생은 오락실에서 청소하고 돈 바꿔주는 일을 했는데, 손님들이 게임 하는 것을 옆에서 자꾸 쳐다보고 있다가 그만 유혹이 돼서 자기도 도박을 하고 돈을 빌리다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도박비를 마련하려고 사채를 써서 시달리다가 강도짓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미용실에 들어가 주인을 협박하여 돈을 뺐고 미용실 주인의 카드로 돈을 인출하다 CCTV에 찍혀 결국 인생이 파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학생은 잘못된 것을 자꾸 바라보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을 잘 관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든지 그 보는 것으로 결국에는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눈이 보는 것에 따라 좌우됩니다. 길을 건널 때 파란 불이 보일 때 건넙니다. 만일 우리가 아주 심한 색맹이라 그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보이면 그것은 큰 일일이 납니다. 자동차에 치일 것입니다. 이처럼 눈이 좌우하는 대로 우리는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눈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다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밝아서 온전하게 보면 우리의 몸도 밝은 것으로 바르게 인도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전도서1장8절에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살면서 눈에 보아도 만족함이 없고 귀에 들어도 만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만족함이 없는 법입니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도 바다는 여전히 다 채우지 못한 채 물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이 커가기만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림을 감상하며 관광하며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보아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본문에도 보는 눈에는 만족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손안에 든 새 한 마리가 숲속의 새 두 마리보다 낫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루터(Luther)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곧, "다른 좋은 것을 생각함보다는 현재의 좋은 것을 즐기는 것이 낫다"
많은 것을 꿈꾸고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을 실제로 즐기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하였습니다.
즉 부를 추구하는 것을 가리켜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소위 '지혜자',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머릿속에 노하우만 가득할 뿐 실제적으로 잘 사는 가시적(可視的)인 결과는 전혀 보여 주지 못하는 '공상가', 그래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저 부자를 멸시하는 것으로써 자기가 더 잘난 사람인 체 하는 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바람 잡는 헛된 일'입니다.
이처럼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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