吏曹回 啓(이조회 계) 판서 김병학(判書 金炳學)
경상도내(慶尙道內)의 유생(儒生)과 진사 신 유교목(進士 臣 柳敎睦)등의 상언내(上言內)에 사연인 즉
그들의 사는 향내(鄕內)에 고부제학 신 김계행(故副提學 臣 金係行)은 호(號)를 보백당(寶白堂)이라고 하는데,
덕기(德器)가 원대(遠大)하고 문사(文詞)가 박흡(博洽)한데 충직(忠直)하고 청백(淸白)함이 그의 천성(天性)이고
도학(道學)과 명교(名敎)는 실로 연원(淵源)이 있나이다.
성종(成宗)의 성시(盛時)를 당하여 이력(履歷)하신 관벌(官閥)이 사서(司書)에 명백(明白)하게 등재(登載)되여
있음이 이러하며 무오사화(戊午史禍)에는 세 차례나 고문(拷問)을 당하였고 초하루를 다섯번이나 자나도록
구금(拘禁)되었어도 마음이 동요(動搖)되지 않았으니 평소의 행동(行動)에 과오(過誤)가 없었나이다.
선정(先正)에 문충공 신 김종직(文忠公 臣 金宗直)과 더불어서 교분(交分)이 감히 깊어서 탁마(琢磨)하는 더함과
도의(道義)의 맺음이 지금 점필재문집내(佔畢齋文集內)에 있는 증시(贈詩)에서 가히 보고 알 수가 있습니다. 고 했으니
학술(學術)과 충절(忠節)이 이처럼 소저(昭著)했는데도 표창(表彰)을 받지 못했음이 결례(缺禮)된 득 하오니
증직(贈職)을 내려서 그의 명성(名聲)을 세우는 것이 합당 할줄로 아나이다.
그러하오나 일이 은전(恩典)에 관계(關係)된 것이 오니 신조(臣曹)에서 감히 독전(獨專)할수는 없아옵기에 상(上)의
재가(裁可)를 내리시와 예조(禮曹)에서 품의(稟議)하심이 어떠 하신지요.
이에 대하여 임금은 윤허(允許)하셨다.
무오 시월 일 에 좌승지 신 모가(戊午 十月 日 左承旨 臣 某)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김병학(金炳學)=조선시대 문신(文臣). 字는 경교(景教),號는 영초(頴樵),시호,문충공(諡號,文忠公),본관안동(本貫安東),
이조판서,수근(吏曹判書,洙根)의 아들, 현종때 진사가 되고 철종(哲宗)2년에 문과급제하여
고종(高宗)2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대원군과도 가까웠다.
유교목(柳敎睦)=1771년 영조(英祖41)生.字는 정오(定吾),號는 졸재(拙齋), 원지(元之)의 8세손이며 헌조(憲祚)의 아들.
순조(純祖 14년)에문과급제,병조좌랑,사간원정언(兵曹佐郞,司諫院正言)을 거처서
홍문관 부수찬,형조참의,우승지,김해부사,납언(弘文館 副修撰,刑曹參議,右承旨,金海府使,納言)등 역임.
사서(史書)=역사의 책, 사관(史官)이 쓴 글.
교지(教旨) 증직사령(贈職辭令)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通政大夫 弘文館 副提學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에
김계행(金係行)께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오위 도총부 부총관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經筵 義禁府 春秋館事 弘文館提學 同知成均館事 五衛 都摠府 副摠管)으로
증직(贈職)하니,
충효청백(忠孝淸白)하고 도학연원(道學淵源)으로 증직(贈職)함을 승전(承傳)하였다.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조선시대 경연청(經筵廳)에 속한 종이품(從二品)벼슬. 일명 동경연 이라고함.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의금부(義禁府)에 속한 종이품(從二品)벼슬.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춘추관(春秋館)에 속한 종이품(從二品)벼슬.일명 동지사(同知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성균관(成均館)에 속한 종이품(從二品)벼슬.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홍문관(弘文館)에 속한 종이품(從二品)벼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오위(五衛)의 군무(軍務)를 총괄(摠括)하던 관청.
조선의 군제(軍制)는 고려 공민왕때 설치한 삼군도총부제(三軍都摠府制)를 계승하였음.
아경분황고유문(亞卿焚黃告由文) 戊午 증직 고유문 유치명(柳致明)
공유(恭惟)하니 우리선조(先祖)청백(淸白)함을 숭보(崇寶)하신 그 유풍(遺風)이 영원(永遠)하게 임금께서도
감동(感動)하시어 전고(前古)에도 특수하심 나는 가상(嘉尙)하셔서,
이조참판(吏曹參判)높은 작위증직(爵位贈職)으로 내리셨네,
아름답게 작위(爵位)에 올라 그의 덕(德)에 배합(配合)되었네,
오래되어도 표창(表暢)되시니 민심(民心)모두 감격(感激)합니다.
생각하니 우리선생 품성(稟性)하시길 강직(剛直)하시어 더럽히지 않으시고 궁경(窮境)에서 편하셨네,
만년(晩년)에 와서 출사(出仕)하시어 그 진로(進路)열리셔서 십년동안 요직(要職)에서 임금님을 계도(啓導)하셨으나
운세자연(運勢自然)성쇠(盛衰)있어 진퇴(進退)하심 득정(得正)하셨네,
세 번이나 고문(拷問)받은 그때더욱 탁월(卓越)하셨다네,
마침내는 산림(山林)에서 경학(經學)만을 현구(硏究)하셔서 믿고 따르는 후학(後학)들 와서 그의 낙(樂)을 더하셨다네,
그에 도(道)가 있아오니 이에 존향(尊享)하나이다.
후손(後孫)들이 계통(系統)을 이어 높은 유촉(遺躅) 오래되니 세대 또한 변천(變遷)하여
이미 사당훼패(祠堂毁敗)해서 왕은(王恩)받을 곳 없다가 이에 재사성취(齋舍成就)하여 반본(返本)하는 정이나이다.
슬프기만 하오이다.
분향(焚香)하고 고제(告祭)하니 거의 강림(降臨)하옵소서.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유치명(柳致明)=철종(哲宗)떼의 학자, 字는 성백(誠伯),號는 정재(定齋),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순조(純祖5년)에 문과급제,지평,정언(持平,正言)등을 거처 호남장시도사(湖南掌試都事),
누차 대사간을 지내고 병조판서에 이르고 철종3년 장헌세자를 추승소청하다 탄핵받아 상원(詳原)귀양.
가의대부(嘉義大夫)의 위계에 올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보직 되었다 사망.
이경분황개제시의절(貳卿焚黃改題時議節) 신주개제(神主改題)할때 의절 유치명(柳致明)
원차(院次)에서 개제(改題)하는데 밀암(密庵)이 가례(家禮)를 인용(引用)해서 추증(追贈)한 것만 고(告)하는데는
오직 증직(贈職)받은 위(位)에만 고(告)하는 것이다.
그러면 응계선생(凝溪先生)의 위(位)에는 고유(告由)할 필요가 없는듯 하나 한 사당(祠堂)안에 계시니 아마 모두
제존(祭尊)은 있어야만 할듯하나 적실(的實)한 근거(根據)도 없으니 감히 단언은 할 수가 없으나 위패(位牌)를
개제(改題)하는 데는 묘내(廟內)에서 할지 강당(講堂)에서 할지는 오직 여러분의 의논을 거처 처결(處決)해서
「개제(改題)할 신주(神主)는 사당(祠堂)의 동서(東西)방향으로 있음」개제(改題)한 뒤에는 본위(本位)로 돌려서
봉안(奉安)해야만 할 것이다.
가례(家禮)를 고제(考祭)하면 가묘(家廟)에서 개제(改題)한 뒤에는 신주(神主)를 원래자리에 봉안(奉安)하고
바로 내려와 서고 비요(備要)에는 재위자(在位者)와 더불어서 모두 재배(再拜)해서 사신(辭神)하고 물러 나와서
다시 고제(告祭)한다는 조문(條文)은 없으니 원차(院次)에도 또한 참조해야 할듯하다.
한강선생(寒岡先生)은 말하기를「이안제(移安祭)는 상양(商量)해서 감품(減品)하여 단헌(單獻)으로 하라」고 하고,
대산(大山)은 말하기를「이안(移安)하는 고유(告由)는 한그릇식 만으로 약식(略式)으로 전례(奠禮)를 행하고
개제(改題)할 때도 또한 참조해서 혹은 두 그릇식 으로 서직(黍稷)과 희생(犧牲)은 없이하여 개제(改題)할 때의
예식(禮式)은 가례(家禮)에 자세(仔細)히 있으니 참고(參考)로 함이 어떠할까?」
가묘(家廟)에서도 분향(焚香)을 하는데 이에 조매(祧埋)를 했다면 서원(書院)에서 행해야 하고 배위(配位)의
증직(贈職)은 원중(院中)에서 행제(行祭)하는 제전(祭典)은 없는 것이나 일찌기 성흠(聖欽)을 대했다면 차라리
재사(齋舍)에서 행한다는 말이 있으나 지금에 들으니 본가(本家)에서 지어서 한다면 별도(別道)로 글을 지어서
본손(本孫)이 제(祭)를 행할때 고유(告由)를 하고 원위(院位)에서는 추증(追贈)한다는 뜻만을 고(告)할 뿐이고
다른말은 없는 것이다.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位牌).주로 밤나무로 만들었음.
상양(商量)=생각해서 분간 하는것.
이안제(移安祭)=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제사(祭祀).
희생(犧牲)=신(神)에게 제물로 바치는 산양 또는 소나 돼지,어떤 목적을 위해 몸을 바쳐 모든것을 돌보지 않는것.
한강(寒岡)=정구(鄭逑)의 號.선조,광해군때 학자(學者),字는 도가(道可),시호(諡號)는 문목(文穆),본관청주(本貫淸州),
과거를 보지 않고 퇴계(退溪),남명(南冥),대곡(大谷)의 삼현(三賢)에게 학문을 닦았으며,여러벼슬을 사양함.
백매원(百梅園)을 제자를 가르침에 힘씀,선조25년 임진왜란시 의병을 일으켜 싸웠음.
강릉부사(江陵府使),강원감사(江原監使),성천부사(成川府使),충주목사(忠州牧使),안동부사(安東府使),
광해군(光海君)때 대사헌(大司憲)으로 소(疏)를 올려 임해군(臨海君)을 구했음,
사후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정주(程朱)와 같이 모셨으며,성주(星州)에서는 동강서원(東岡書院)을 세웠다.
대산(大山)=이상정(李象靖)의 호.1710~1781년 정조 때의 학자(學者),字는 경문(景文),본관한산(本貫韓山),
홍조(弘祚)의 5세손 외조부(外祖父)인 밀암 이재(密庵 李栽)문하(門下),영조11년 문과급제,
안동(安東)에서 도(道)를 강의하여 많은 학자들이 따랐고,학문은 도산(陶山)의 전통을 이었다고 한다.
개제고사(改題告辭) 戊午 김대진(金垈鎭)
업드려 아뢰 나이다 선생(先生)은 충효(忠孝)와 청백(淸白), 도학(道學)과 명절(名節)로써 특히 표창(表彰)을 받아
이조참판(吏曹參判)의 증직(贈職)이 내렸으니 사문(斯文)의 영광(榮光)이고 사림(士林)의 경사(慶事)로 소아다.
우러러 신위(神位)에 새 관작(官爵)을 합(合)해서 쓰려고 이에 길인(吉日)을 택해서 장차(將次)로 개제(改題)하기
위해서 삼가 청작(淸酌)과 어과(魚果)로서 고유(告由)하나이다.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김대진(金垈鎭)=1800~1871년 자(字)는 태수(泰秀), 창수(昌秀)의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유집(遺集)10여권있음.
정경청 증시상언(正卿請 贈時上言) 己未 정경으로 증직을 청할때 상소 방예손 병학(傍裔孫 炳學)
업드려 아뢰옵니다.
명신(名臣)을 표창(表彰)함은 국가(國家)의 성전(盛典)이고 현사(賢師)를 존숭(尊崇)함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입니다
조정(朝廷)에 있어서는 간쟁(諫諍)하는 풍절(風節)을 세우고 가정(家庭)에 있어서는 청백(淸白)한 지조(志操)를 가져서
가히 교화(敎化)에 유익(有益)이 되고 퇴속(頺俗)을 격려(激勵)하는 사람은 어찌 일대(一代)의 명신(名臣)이고
백세(百世)의 현사(賢師)가 아닐까요?
신(臣)들은 성세(盛世)를 만나서 문헌(文獻)을 구비(具備)하고 교화(敎化)가 소명(昭明)하오니 만약(萬若)에
일행일절(一行一節)이라도 높으디 높게 숭상(숭상)한 것이 있다면 모두 포장(褒奬)하고 인양(闉揚)해서
그 증직(贈職)과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이 서로 이어져 있는데이때를 당해서 만약(萬若)에 경명(耿明)한 임금이
일월(日月) 밑에서 묻혀 있고 고귀한 난(蘭)이 우로(雨露)아래 덮혀 있으니 이것은 신(臣)등의 책임인 것입니다.
신(臣)등이 사는 도내 안동지방(道內 安東地方)에는 성종(成宗)때 부제학 신 김계행(副提學 臣 金係行)이 호(號)를
보백당(寶白堂)이라고 하는데 신(臣)등은 청(請)하오니 그의 거룩한 행적(行蹟)에 만분의 일 이나마 진술(陳述)하려
하나이다.
김계행은 바로 고려태사 휘 김선평(高麗太師 諱 金宣平)의 후예(後裔)로서 어려서 부터 영민(穎敏)하여 덕기(德器)가
원대(遠大)하고 문사(文詞)가 광박(廣博)했으며 충직(忠直)하고 청백(淸白)함이 그의 천성(天性)이며 도학(道學)과
명교(名敎)가 실로 연원(淵源)이 있나이다.
그가 급제(及第)를 해서 조정(朝廷)에 올라서는 사헌부,사간원,성균관,승정원,육조(司憲府,司諫院,成均館,承政院,六曹)의
랑(郞) 삼사(三司)의 장(長)국자도령,홍문관부제학(國子都令,弘文館副提學)으로서 모두 당시의 영선(英選)을 극히
다 하셨으니 이것이 그의 관직(官職)의 이력(履歷)이온데 그때는 군현(羣賢)이 모두 등용(登用)되어서 군자(君子)의
도(道)가 성장(盛長)하여 드디어 현관(賢官)들이 큰 경윤(經綸)을 하였는데 김계행(金係行)은 높이 경연(經筵)에서
영수(領袖)가 되어 국사(國事)를 만나서는 논리(論理)가 정직(正直)해서 그의 진술(陳述)한 바를 굽히지 않았으니
그의 상소(上疏)중에는 천재(天災)와 시폐(時弊), 척발(斥佛)해 방사(防邪)한 사류(事類)에서 그의 수립(樹立)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더욱 그의 출처(出處)하고 거취(去就)함이 공명정대(公明正大)해서 일평생의 처사(處事)는 일찌기
선비들의 강도(講道)하던 때에 판정(判定)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우군(愚君)을 만나서 기미(幾微)를 보고서는 관직(官直)을 버리고 영영은퇴(永永隱退)하여 세상일은
모두 잊었던것 같았으나 우국(愚國)하는 일념(一念)은 종종 시영(詩詠)하는 가운데서 시작됬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史禍)가 크게 발발(勃發)하니 김계행(金係行)도 또한 따라서 체포(逮捕)가 되어 세차례나
고문(拷問)을 받고 초하루가 다섯번이나 지나도록 구금(拘禁)이 되었어도 놀라지도 않고 겁을 내지도 않으면서
처신에 안정(安貞) 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김일손(金馹孫)등 제현(諸賢)과 같이 처형(處刑)되고 유배(流配)되지는 않았어도 그의 마음 씀씀이는
사적(事蹟)은 다르면서도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18년 동안이나 암혈(岩穴)에서 폐거(廢居)했어도 홀로 화(禍)를 모면했음을 다행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스스로 안정(安靖)하였음을 다행으로 알지도 않하고 국사(國事)를 한탄(恨嘆)해서 격분(激憤)도하고 체읍(涕泣)도
하였으니 그의 강대(剛大)하고 곧은 기(氣)는 천부(天賦)에서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학문(學問)이 심수(深邃)하고 의리(義理)가 정밀(精密)함은 진실로 사우(師友)의 보익(輔益)에서
탁마(琢磨)되고 침관(浸灌)된 것이온데 선정 신 문충공 김종직(先正 臣 文忠公 金宗直)과 더불어서 금석(金石)같은
도의(道義)의 교제(交際)를 하던데서 마침내 무망(無妄)한 화해(禍害)를 받고 구금(拘禁)되는 처벌(處罰)을 면하지
못했은즉 가히 생시(生時)에는 동지(同志)고 사후(死後)에는 동전(同傳)했다고 할 수가 있으니 당시에 목숨을 바친
제현(諸賢)과 비교해서 그 물음에 높고 낮음이 있다고 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소생 등은 그의 향토(鄕土)에서 나고 자라서 그의 유덕(遺德)을 흠모(欽慕)하였에 그의 풍화(風化)가 점차(漸次)없어지고
그이 지조(志操)가 더욱 어두워 질까 두려워 해서 사당(祠堂)을 세워서 존향(尊享)을 함으로서 경모(景慕)하는
휘성(徽誠)은 조금 표시 하였아오나 국가(國家)에서 증직(贈職)하는 예전(禮典)은 인순(因循)헤서 감히 앙청(仰請)하지
못했사오나 그석은 임종(臨終)할 때의 유계(遺誡)에,
「과찬(過讚)을 해서 매석(賣石)을 하는것은 내가 깊이 부끄러워 한다」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 이였습니다.
그러하오나 다시 생각하면 전배(前輩)가 이에 천양(闡揚)할 만한 실적이 있는데도 감히 청(請)하는 혐의(嫌疑)가 있다.
그래서 이것을 위에 전하지 않는다면 신등은 도리어 현자(賢者)를 덮고 임금을 모르게해 죄(죄)를 면하지 못할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가을에 임금이 행차 하실때 도내의 유생(儒生)과 진사 유치목(進士柳致睦)등이 연명(聯名)해서
상소(上疏)하여 임금께서 이조(吏曹)에 명령(命令)하시어 이조에서 곧바로 윤계(倫啓)해서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贈職)하시는 특전(特典)을 받았음은 신(臣)등이 감축(感祝)하는 마음을 이길수가 없아오나 이미 이조(吏曹)로 부터
계청(階請)하였음은 일품(一品)을 더 높여서 증직(贈職)할 수 없는 것이 규례(規例)인가요?
선민(先民)은 말씀하시기를 「만약(萬若)에 특수한 의적(懿蹟)이 있다면 마땅히 비상한 은전(恩典)을 매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김계행(金係行)의 덕업(德業)과 유풍(遺風),문장(文章)과 기도(器度)도 국사(國史)에 명기(明記)되었고
야사(野史)에도 저명(著名) 하였습니다.
본직(本職)이 도헌(都憲)인데 증직(贈職)에 천관아경(天官亞卿)으로 한것은 진실로 명현(名賢)을 존숭(尊崇)하는
특별(特別)한 은전(恩典)으로서는 부족한 것이 옵기에 신(臣)등은 감히 외람(猥濫)되게 번진(煩陳)하는 죄(罪)를
피(避)하지 안하옵고 천리 길을 달려 와서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법사(法駕)의 앞에서 호소(呼訴)하는 바입니다.
업드려 비오니 천지부모(天地父母)께서는 우러러 선왕(先王)의 예우(禮遇)를 체념(體念)하시고 허리 굽혀서는
많은 선비들의 성의(誠意)동정하시와 증 이조참판 신 김계행(贈 吏曹參判 臣 金係行)에게 특히 정경(正卿)으로
증직(贈職)을 내리시고 따라서 시호(諡號)도 내려주시어서 치화(治化)를 빛나게 하시고 사문(斯文)을 도와 주시고
특별(特別)히 왕은(王恩)을 입게 하옵소서.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천관아경(天官亞卿)=이조참판(吏曹參判)
정경(正卿)=판서(判書)
삼사(三司)=홍문관(弘文館),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세 관청을 말함.
도령(都令)=도승지(都承旨).
선민(先民)=조상(祖上).
도헌(都憲)=대사헌(大司憲).
판서(判書)=正二品,벼슬.
이조회 계(吏曹回 啓) 판서 남병철(判書 南秉喆)
경상도내(慶尙道內)의 유생(儒生)과 진사 유진봉(進士 柳進鳳)등이 상소(上疏)한 사연(辭緣)인즉,
그들이 사는 도내 안동(道內 安東)땅에 성종조(成宗朝) 부제학 김계행(副提學 金係行)이
호(號)를 보백당(寶白堂)이라고 했는데 덕기(德器)가 원대(遠大)하고 문사(文辭)가 광박(廣博)하며 충직(忠直)하고
청백(淸白)함이 그의 천성(天性)이고 도학(道學)과 명교(名敎)는 실로 연원(淵源)이 있으나 혼란(昏亂)할 때를 만나서
기미(幾微)를 보고는 관직(官職)을 버리고 우국(憂國)하는 일념(一念)이 시영(詩詠)의 가운데서 스스로 발표(發表)가
되었는데 무오사화(戊午史禍)가 발발(勃發)하니 김계행(金係行)도 따라서 체포(逮捕)되어 세 차례나 고문(拷問)을 받고
구금(拘禁)이 되었으나 이력(履歷)이 안정(安貞)하여 선정 신 문충공 김종직(先正 臣 文忠公 金宗直)과 더불어
금석(金石)같은 도의(道義)의 교제(交際)를 하였는데 문장(文章)과 학행(學行) 그러한 정충(貞忠)의 큰 절개로서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만 증직(贈職)이 내렸으니 그것은 명현(名賢)에 보답(報答)하는데 부족하와 별양(別樣)의
특이(特異)한 증직(贈職)을 받지 못했음이 결례(缺禮)이옵기에 증 참판(贈 參判)의 김계행(金係行)에게 특별이
정경(正卿:판서(判書)의 증직(贈職)을 하시고 시호(諡號)도 내리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다고 하였으니 사건(事件)은
은전(恩典)에 관계(關係)된 것이기에 신조(臣曹)에서는 감히 임의로 할수 없사와 상재(上裁)를 바라오니 빨리
예조(禮曹)로 하여금 품의(稟議)하도록 하심이 어떠할까요?
이에 대해서 임금은,「다땅히 해야한다.」 고 전하였다.
철종십년(哲宗十年)기미오월 일(己未五月 日)좌승지 신 모(左承旨 臣 某)의 주선(周旋)으로
이조(吏曹)의 계(啓)에 의해서 윤허(允許)가 내렸다.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신조(臣曹)=우리 예조(禮曹)라는 뜻.
교지(教旨)
증 가선대부,이조판서,겸동지경연,의금부 춘추관사,홍문관제학,동지성균관사,오위도총부부총관
(贈 嘉善大夫,吏曹判書,兼同知經筵,義禁府 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행통정대부,홍문관부제학지제교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行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인 김계행(金係行)에게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資憲大夫 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증직(贈職)하고 천품(天稟)이 순정(純正)하고 충효(忠孝)로 직절(直節)하며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이 있고
청백(淸白)을 면려(勉勵)했기에 정경(正卿)으로 증직(贈職)을 추가(追加)한다.
임금께서 사령(辭令)을 내리셨다.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지경연사(知經筵事)=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지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모두 正二品.벼슬.
도총관(都摠管)=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군최고위직,正二品.초에는 10명후에5명으로감축.
대제학(大提學)=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正二品.벼슬.본인이 사퇴하지 않는한 종신직임.
분황고유문(焚黃告由文) 己未 이휘영(李彙寧)
업드려 아뢰나이다
오직 선비가 가진 보배 양강(寶貝 陽剛)으로 바탕하고 정직(正直)으로 덕(德)이 되니 이에 그의 중대(重大)한것
선생댁(先生宅)의 가보(家寶)시고 그 가정(家庭)을 이루시는데는 효(孝)와 경(敬)을 독실(篤實)하시고 하물며
근본(根本)이 있어 학술연원(學術淵源)있음이랴 성리(性理)에는 스승이있고 도의(道義)에는 벗(朋)있어
그 천품(天稟)을 발휘(發揮)하여 강강(剛强)함이 확실(確實)해요.
밝은 임금을 만나시어 그 학력(學力)넓게 베풀으시고 충성(忠誠)하고 영통(靈通)하니 선비가 일어나고 백성이 즐거웠네.
어찌 구득(苟得)하려든가 그 국사(國師) 요망(妖妄)했네 만년(晩年)에 되어 급제(及第)하여 그 명성(名聲)높으셨네,
간신폐해배척(奸臣嬖害排斥)하시어 경재(警災)해서 구폐(救弊)했네,
매양(每樣)한번 상언(上言)하면 권신(權臣)들이 넋을 잃고 계신(戒愼)함을 않 변하시어 중정(中正)으로 자립(自立)하여,
나아가선 성경현전(聖經賢傳)가지고서 은거(隱居)하시기를 맹서(盟誓)하시였네,
바른도(道)도 용납(容納)이 않되 사림화(士林禍) 극심(極심)하나 그 마음 철(鐵)과 같아 몸소 형틀 받으셨네,
광구(匡救)하심 효과(效果)없어 세번이나 고문(拷問)받고 황천(黃泉)에 먼저간 벗 생각 같이못감을 한(恨)스러워 하셨네,
뜻 밖에도 홀로 면(免)해 고령(高齡)으로 슬퍼하시니 위충(危忠)으로 후인(後人)위해 좋은 훈계(訓戒)끼치시니,
그 유풍(遺風)백세길이 유인박부(儒人薄夫) 격려(激勵)했네,
서애선생(西厓先生)께서 실기(實記)쓰고 밀안선생(密庵先生)또한 행장(行狀)짓고 애심(哀心)으로 덕(德)을 즐기시어
사당(祠堂)지어 존향(尊享)하시니,
명성(名聲)높이 들리어서 임금님도 포창(褒彰)하셨으니 충(忠)과 효(孝)의 대가(大家)호서 정경(正卿)으로 되시었네,
예림(禮林)에서 더욱 빛나 신(神)과 인(人)이 기뻐하니,
증직(贈職)받은 예전(禮典)에도 신사(紳士)들이 경배(敬拜)하네,
묵계촌(默溪村)의 시냇가에 여전하게 맑은 바람 불어오니 향례(享禮)드리오니 영령흠향(英靈歆享)하옵소서.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분황(焚黃)=죽은 후에 증직(贈職)받았을때 관고(官誥:교지(敎旨)의 부본(副本)인 황색 종이를 무덤 앞에서 태우는 것.
중정(中正)=곧고 바름, 지나치고나 모자람이 없다는 뜻.
성경현전(聖經賢傳)=성인(聖人)들이 지은 여러가지 책.
이휘영(李彙寧)=1788년생. 字는 군목(君睦),號는 고계(古溪),참판지순(參判志淳)의 아들, 퇴계(退溪)16대손(十六代孫),
순조(純祖16)에 사마시(司馬試)로 등과(登科),세자익위사세마,의금부도사(世子翊衛司洗馬,義禁府都事)
이조좌랑,동복현감,밀양부사,청주목사,사헌부감찰(吏曹佐郞,同福縣監,密陽府使,淸州牧使,司憲府監察)
후에 향리 용계(龍溪)에 은거(隱居)해서 학문에 심취함.
원문(原文) 이조회계(吏曹回啓) 판서 김병학(判書 金炳學) 觀此慶尙道內儒生進士臣柳敎睦等 上言內辭錄是乎則其矣所居之鄕 故副提學 臣金係行 號寶白堂 德器凝遠 文辭博洽 관차경상도내유생진사신유교목등 상언내사록시호칙기의소거지향 고부제학 신김계행 호보백당 덕기응원 문사박흡 忠直淸白 自是天性 道學名敎實惟淵源 時當 成朝盛際而履歷官閥 昭載史策 是如是乎尔且戊午史禍 三入訊庭 五朔拘攣 충직청백 자시천성 도학명교실유연원 시당 성조성제이이력관벌 소재사책 시여시호이차무오사화 삼입신정 오삭구련 不懾不震 素履無咎 與先正文忠公臣金宗直 交誼甚深而切嗟之益道義之契 今於集中所贈詩篇可攷而知也爲 乎㫆學行 불섭부진 소이무구 여선정문충공신김종직 교의심심이절차지익도의지계 금어집중소증시편가고이지야위 호미학행 忠節如是昭著而未蒙 崇포 似爲欠典施以 貤贈 以樹風聲 似合事宜是白乎矣事係 恩典 臣曹不敢擅편 上裁敎是白乎 충절여시소저이미몽 숭포 사위흠전시이 이증 이수풍성 사합사의시백호의사계 은전 신조불감천편 상재교시백호 㫆自該曹 稟處何如爲乎乙喩 편=人+㪅 미자해조 품처하여위호을유 傳曰允 崇禎紀元後四 戊午十月日 左承旨臣某次知啓依 允(전왈윤 숭정기원후사 무오시월일 좌승지신모차지계의 윤) <苟全公 14 世孫 金台東 옮겨씀,> |
원문(原文) 교지(教旨) 증직사령(贈職辭令) 通政大夫 弘文館 副提學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金係行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김계행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經筵 義禁府 春秋館事 弘文館提學 同知成均館事 五衛 都摠府 副摠管 贈職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오위 도총부 부총관 증직 忠孝淸白 道學淵源 贈職 承傳 충효청백 도학연원 증직 승전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
원문(原文) 아경분황고유문(亞卿焚黃告由文)戊午 유치명(柳致明) 恭惟我祖所寶淸白 百代遺風有感 宸極 曰予嘉乃前往之特 貳卿顯秩追錫爾爵 齊徽幷躐兩位配德 無遠不暢輿情咸激 공유아조소보청백 백대유풍유감 신극 왈여가내전왕지특 이경현질추석이작 제휘병엽양위배덕 무원불창여정함격 葢惟先生稟賦剛直 不以親凂寧甘溝壑晩通桂籍進塗乃闢 十載淸要一意啓沃 道之汚隆行藏恥穀 三入桁楊罙見其卓 개유선생품부강직 불이친매영감구학만통계적진도내벽 십재청요일의계옥 도지오륭행장치곡 삼입형양미견기탁 終焉林壑潛心典學 有來信從優哉其樂 道在是矣 有儼尸祝 孱孫承緖邈焉高躅 世代遒遷已毁廟祏 無地承 恩爰就 齋屋 종언임학잠심전학 유래신종우재기락 도재시의 유엄시축 잔손승서막언고촉 세대주천이훼묘석 무지승 은원취 재옥 烏鳥其情祇增怵惕 焚黃祭告庶幾降格 오조기정기증출척 분황제고서기강격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
원문(原文) 이경분황개제시의절(貳卿焚黃改題時議節) 유치명(柳致明) 院次改題密庵引家禮告 追 贈則只告所 贈之位 然則凝溪先生位 仰不心告 但在一廟之內 恐皆有籩豆之設而未有的據 원차개제밀암인가례고 추 증칙지고소 증지위 연칙응계선생위 앙불심고 단재일묘지내 공개유변두지설이미유적거 不敢質言 改題位版 行於廟內 或行於講堂 惟在僉議處之(改題位版在堂東西向) 改題後還安本位 按家禮 家廟改題後 불감질언 개제위판 행어묘내 혹행어강당 유재첨의처지(개제위판재당동서향) 개제후환안본위 안가례 가묘개제후 奉主置故處 仍降復位 備要與在位者皆 再拜辭神而退 㪅無祭告之文則 院次亦似傍照 寒岡曰移安祭商 量減品而單獻 봉주치고처 잉강복위 비요여재위자개 재배사신이퇴 경무제고지문칙 원차역사방조 한강왈이안제상 양감품이단헌 大山曰移安告由以一籩一豆略行奠獻 改題時亦可傍照 或二籩二豆而似無黍稷及牲矣 改題之儀家禮詳之 攷見如何 대산왈이안고유이일변일두략행전헌 개제시역가방조 혹이변이두이사무서직급생의 개제지의가례상지 고견여하 焚黃家廟已祧埋則當行於書院而配位 贈典 院中無行祭之勢 頃對聖欽 有寧行於齋舍之言 今聞本家依以行之則別爲文 분황가묘이조매칙당행어서원이배위 증전 원중무행제지세 경대성흠 유영행어재사지언 금문본가의이행지칙별위문 以告於本孫行祭之時 於院位只告追贈之意而無他辭耳 이고어본손행제지시 어원위지고추증지의이무타사이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
원문(原文) 개제고사(改題告辭) 戊午 김대진(金垈鎭) 伏以先生以忠孝淸白道學名節 特蒙 褒典 贈天官亞卿 斯文有光 多士胥慶 仰惟祠板合揭新秩 玆卜吉辰將改粉題謹以 복이선생이충효청백도학명절 특몽 포전 증천관아경 사문유광 다사서경 앙유사판합게신질 자복길진장개분제근이 淸酌果鱐具由虔告 청작과숙구유건고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
원문(原文) 정경청증시상언(正卿請贈時上言) 己未 예손 병학(傍裔孫 炳學) 伏以崇褒名臣 國家之盛典 尊尙賢師 士林之公議也 夫立朝而樹謇諤之風節 居家而保淸白之志操 有可以禆益乎隆化 복이숭포명신 국가지성전 존상현사 사림지공의야 부립조이수건악지풍절 거가이보청백지지조 유가이비익호융화 激勵乎頹俗則之人也 抑豈非一代之名臣 百世之賢師也哉 臣矣身等 生逢聖世 文獻備具 化理昭明 苟有一節一行之卓 격려호퇴속칙지인야 억기비일대지명신 백세지현사야재 신의신등 생봉성세 문헌비구 화리소명 구유일절일행지탁 然可尙則靡不褒奬而闡揚之 贈其官而易其名者 比比相望 丁此之時 有若耿介之玉 埋光於日月之下 幽貞之蘭 鞱香 연가상칙미불포장이천양지 증기관이역기명자 비비상망 정차지시 유약경개지옥 매광어일월지하 유정지난 도향 於雨露之中 此卽臣等之責也 臣等所居道內安東地 有 成廟朝副提學臣金係行號爲寶白堂者 臣等請略陳其懿行之萬一 어우로지중 차즉신등지책야 신등소거도내안동지 유 성묘조부제학신김계행호위보백당자 신등청약진기의행지만일 是白齊金係行 卽高麗太師金宣平之後也 自幼穎敏 德器凝重 文辭宏博 忠直淸介 自是天性 道學明敎 實惟淵源 시백제김계행 즉고려태사김선평지후야 자유영민 덕기응중 문사굉박 충직청개 자시천성 도학명교 실유연원 及其釋褐而登朝也 自柏府薇垣玉署銀臺六曹之郞三司之長國子都令弘文副學皆極一時之英選 此其居官之履歷也 급기석갈이등조야 자백부미원옥서은대육조지랑삼사지장국자도령홍문부학개극일시지영선 차기거관지이력야 時則羣彦彙征 君子道長 遂與之賁黻鴻黻而金係行屹然爲 經幄之領袖 遇事論理 正直不撓 其所陳剳中天灾時弊防邪 시칙군언휘정 군자도장 수여지분수홍수이김계행흘연위 경악지영수 우사논리 정직불요 기소진답중천재시폐방사 斥佛之類 槩見其樹立矣 最其出處去就 公明正大 一生潦霽素辦於林下講道之日 中値昏朝 見幾投劾卷懷長往 如將果忘 척불지류 개견기수립의 최기출처거취 공명정대 일생료제소판어림하강도지일 중치혼조 견기투핵권회장왕 여장과망 而傷時憂國之念 往往自發於嘯詠之間 及夫戊午之史禍大作而金係行亦從而被逮矣 凡三入訊庭 五朔拘攣而不懾不駭 이상시우국지념 왕왕자발어소영지간 급부무오지사화대작이김계행역종이피체의 범삼입신정 오삭구련이불섭불해 素履安貞 雖不得與金馹孫諸賢 同被誅竄而其心其迹二而一也 遂廢處崁巖十有八年 而不以獨免爲幸 自靖爲高 未嘗 소이안정 수부득여김일손제현 동피주찬이기심기적이이일야 수폐처감암십유팔년 이불이독면위행 자정위고 미상 不扼腕慨涕於芝焚之歎也 葢其剛大直方之氣 得於天賦 而若其學問之淵深 義理之精微 固有所磨礲浸灌於師友之益矣 불액완개체어지분지탄야 개기강대직방지기 득어천부 이약기학문지연심 의리지정미 고유소마농침관어사우지익의 雅與先正文忠公臣金宗直爲道義金石之交竟値無忘之禍 未免收司之律則抑可謂生同志死同傳而不可與當時辦命之諸賢 아여선정문충공신김종직위도의금석지교경치무망지화 미면수사지율칙억가위생동지사동전이불가여당시판명지제현 有所軒輊於其間也 臣矣身等 生長乎其鄕 欽慕乎其德 恐風節之漸泯 懼淸操之罙晦 敬妥畏壘之尸祝 粗伸景仰之微誠而 유소헌지어기간야 신의신등 생장호기향 흠모호기덕 공풍절지점민 구청조지미회 경타외루지시축 조신경앙지미성이 至於朝家褒贈之典則逡巡而不敢仰請者 以其臨終之誡有溢美沽名 吾所深恥之語故也 臣矣身等㪅伏念前輩旣有此可褒 지어조가포증지전칙준순이불감앙청자 이기임종지계유일미고명 오소심치지어고야 신의신등경복념전배기유차가포 可闡之實而嫌於干冒 隱不以聞則臣矣身等還不免蔽賢 諱上之罪矣 玆於前秋動駕時 道內儒生進士臣柳致睦等 聯名上言 가천지실이혐어간모 은불이문칙신의신등환불면폐현 휘상지죄의 자어전추동가시 도내유생진사신유치목등 연명상언 允下吏曹自該曹卽爲論啓伏蒙吏曹參判貤贈之典 臣矣身等竊不勝感祝之情是白乎矣 旣自吏曹啓請則一階之外未得超贈 윤하이조자해조즉위론계복몽이조참판이증지전 신의신등절불승감축지정시백호의 기자이조계청칙일계지외미득초증 自是規例 是乎 所先民有言曰苟有比絶俗之懿行則當酬以非常之恩典 夫以金係行之德業風裁 文章器度 輝暎乎國乘 자시규례 시호 소선민유언왈구유비절속지의행칙당수이비상지은전 부이김계행지덕업풍재 문장기도 휘영호국승 煊郞乎野史以都憲本職 升之以天官亞品者 固不足爲崇答名賢嚝世特絶之恩榮也 臣矣身等玆敢不避猥屑之誅 千里裏硏 훤랑호야사이도헌본직 승지이천관아품자 고불족위숭답명현횡세특절지은영야 신의신등자감불피외설지주 천리이연 冒死㪅籲于法駕之前爲白去乎伏乞 天地父母 仰體先朝之禮遇 頫恤多士之誠意 贈吏曹參判臣金係行特加正卿之秩 모사경유우법가지전위백거호복걸 천지부모 앙체선조지예우 부휼다사지성의 증이조참판신김계행특가정경지질 仍旋易名之典 以章治化 以賁斯文事 特蒙天恩爲白良 잉선역명지전 이장치화 이분사문사 특몽천은위백양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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