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남 의령군에서 부자축제가 있었고 행사기간 동안 삼영화학그룹 이종환 명예회장의 생가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리치리치 페스티벌> 기간 동안 의령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이 생가 규모와 정원의 수려한 모습에 감탄하며 관정헌의 멋스러움에 반해 언론과 개인매체인 sns에 이를 인증하는 글들이 부쩍 많아짐은 의령 방문 계기가 되고 지역의 자긍심으로 이어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각적인 경험은 빠르고 강렬하고 반응 또한 즉각적이고 솔직하다. 필자도 그 전언에 더해 몇 자 덧붙여 본다.
아래 사진은 뼈대가 올라갈 즈음의 관정헌 미완의 모습인데도 장엄해 보인다. 충실한 내재로 만들어진 생가의 외형은 정원수와 어우러져 더 운치있게 느껴진다.
우리는 흔히 기업가 이종환 회장을 떠올릴 때는 어마어마한 부의 이미지를 먼저 상상한다. 하지만 현재 관정 선생이 있기까지의 이력은 완성된 건축물처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드러나지 않는 가치는 간과하는 아쉬운 점이 많다.
관정 회장의 전재산 기부 실천은 남다른 철학과 신념 없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강한 나라> <과학 강국>을 소망하는 개인 이종환의 애국심이 그 발로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의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 대의를 품고 소신을 바친 한 사람의 일생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종환 회장 역시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엄혹한 시절을 온몸으로 견뎌낸 시절이 있었고 그 한을 후대들에게 물려 주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마침내는 수많은 젊은 인재를 길러내는 관정 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덕에 아시아 최대규모의 장학재단은 강국으로 가는 밑거름이 되고 국가의 재산이 되었다.
오늘의 결과는 늘 지나간 어제들로 만들어졌기에. 상처없는 명예가 없듯이 성공 뒤에는 용기와 아픔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 망국의 설움과 고통의 긴시절을 점점 잊고 사는 현세대와 미래세대가 이종환 회장의 도전과 땀의 의미를 새겨봤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관정 회장님과 동향이고 그 낙수효과일 지언정 짧은 시간이나마 말씀을 나눌 수 있었던 인연을 행운이라 생각한다.
부디 미래교육를 길러 내는데 평생 모은 전재산을 기꺼이 헌납한 이종환 회장의 선의가 후대들에게 생백년지천년(삶은 백년을 가고 뜻은 천년을 간다) 이어지기를 빈다.
-글 김연희 (시인. 한국작가회의. 경남의령 출신 )
폴더폰을 사용하시는 검소한 관정 이종환회장과 필자
미완의 관정헌 모습. 삼각과 나선 모양의 와로 하중을 분산하고 풍속저항에도 잘 견디게끔 설계. 한국고택의 장점을 잘 살렸음을 알 수 있다.
각 창문(창호)들은 180도 하늘을 향해 열린다. 세상에서 유일한 정각이 아닌가 싶다.
<관정헌> 내실에서. 내재로 사용된 소나무의 굵기가 대단하다. 한지를 사용한 창호는 고택느낌과 함께 빛과 습도 조절에도 한몫하고 있다.
재실이라는 공공공간을 생가내에 두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종환 회장님의 실리적이고도 베품의 성정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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