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 상 1장, 3장]
‘필자지언야(必子之言也)’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이내 ‘필자지언부(必子之言夫)’라고 하였으니, ‘야(也)’ 자는 오로지 당시만을
한정하지만, ‘부(夫)’ 자는 훗날의 무한한 폐단까지 포함한다. 글자를 사용하는 방식의 오묘함이 이러한 부분에 있다.
고자로부터
“생(生)의 본능을 성(性)이라고 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흰색을 흰색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라고 질문하였으니, 맹자는 진실로
말을 안다. 고자가 이미 “그렇다.”라고 대답한 대목 아래에 무한한 좋은 말이 있다. 그러므로 말이 급해져서 ‘왈(曰)’ 자가 없는 것이다. 또
고자가 “생의 본능을 성이라고 한다.”라고 했을 때 곧바로 개와 소와 말의 성으로 물었어야 하는데, 다시 다른 ‘백(白)’ 자를 거듭 언급하면서
능수능란하게 기세를 꺾었다. 고자로 하여금 입을 벌려 크게 삼키고 다시 뱉을 수 없게 한 후에, 이 어리석은 사람을 커다란 주먹으로 쳐서 죽인
격이다. 고자는 이미 입이 벌어진 채 다물지 못하고 눈을 떴지만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연즉(然則)’으로써 ‘왈연(曰然)’을 이었으니, 이는
바로 이미 죽은 뇌를 우레로 다시 친 격이다.
[고자 상 4장]
고자의 도는 모두 인의(仁義)가 외면에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자신의 논리가 여러 번 꺾이게 되자 문득 말을 반쯤 바꿔서 “인은
내면에 있고, 의는 외면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다만 옹색하게 한쪽을 빌려서 한쪽을 가린 격이다. 어른을 어른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는
고자가 마땅히 “저들이 어른이기에 내가 그를 공경한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내 “저들이 어른이기에 내가 그를 어른으로 여긴다.”라고 하였다.
‘경(敬)’ 자는 나의 내면에 있기 때문에 재빨리 이 글자를 피하고, ‘장(長)’ 자를 ‘피장(彼長)’ 뒤에 이음으로써 의가 밖에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고자는 ‘장지(長之)’의 ‘지(之)’ 자도 역시 나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깨닫지 못하였다.
아우를 사랑하는
사례로 미루어 보면, 초(楚)나라 사람의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는 것도 ‘초나라 사람의 어른을 공경하며’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대로 ‘장(長)’
자를 썼으니, 그의 속임이 심하다. 이미 늙은 말을 가엾게 여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곧바로 인정하고 가르침을 청했다면, 그의
지기(志氣)와 타고난 품성이 군자의 무리가 되기에 넉넉한 자였겠지만, 이기기 좋아하는 사심이 하늘이 부여한 밝음을 왜곡시키고 손상시켜서 끝내
소인유(小人儒)가 되고 말았다. 세상 사람 중에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세태에 휩쓸려 돌아올 줄 모르는 고자와 같은 자이니,
슬프다.
이미 “인은 내면에 있다.”라고 했기 때문에 앞 구절에서 먼저 “내 아우면 사랑한다.”라고 말했고, 이미 “의는 외면에
있다.”라고 했기 때문에 뒤 구절에서 먼저 “초나라 사람의 어른을 어른으로 여긴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역(亦)’ 자를 써서 경솔하게
‘내 어른〔吾之長〕’이란 말로 방향을 틀었으니, 고자의 말재주는
견백(堅白)을 주장하는 궤변론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만약 “초나라 사람의 어른을 공경하고, 또 내
어른을 공경한다.”라고 말했다면 분명 의는 내면에 있는 것이다.
[고자 상 5장]
맹계자(孟季子)가 ‘과(果)’ 자를 써서 남의 말을 뒤집을 줄 알았으니, 그는 완전한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맹자의 이치에 맞는
말을 따르지 않고, 집요하면서도 자주 이치에 맞지 않는 고자의 이야기를 잘못 따랐으니,
산이 무너져 내리듯이 악을 따르는 세속의 행태가 모두 이와 같아서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이 휩쓸리는 듯한
모습이다. 마치 미친 사내가 바른길을 버려 두고 가시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니, 어찌 진월인(秦越人
편작(扁鵲))의 신침(神針)을 구해서 그의 마음 구멍을 통하게 할 수 있겠는가. 아, 애통하다. 책을 읽는
자들이 이러한 부분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돌이켜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데, 끝내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병의 뿌리가 다만
시기심의 ‘시(猜)’ 한 글자에 있다.
좋은 말을 들으면 절하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신우(神禹)가 되는 이유임을 누가 알겠는가. 한번 맹자에게
절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만고토록 아성(亞聖)인 맹자를 배울 수 없었으니, 하우(下愚)를 어찌하겠는가. 하우를 어찌하겠는가.
[고자 상 6장]
사단(四端)은 모두 정(情)이니, 맹자가 “그 정으로 말하면 선(善)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한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맹자가
이전 성인이 미처 말씀하지 않았던 바를 밝혀 드러낸 것은 다만 성선(性善) 두 글자뿐만이 아니다. ‘추확(推擴)’ 두 글자는 더욱 간절하고
지극하다. 비록 성선을 알더라도 만약 미루어 확충할 줄 모르면 걸주(桀紂)가 될 뿐이다. 도를 아는 자가 시를 지어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도다.”라고 하였고, 공자가 또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성(性)이 선하지 않아서 억지로 선을 해야 한다면, 어찌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선도 있고 불선(不善)도 있다고
말한다면, 걸주의 불효도 타고난 본성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고자 상 8장]
산에 대해서 ‘산의 성〔山之性〕’이라고 한 것은, 산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산의 본분 전체를 곧장 들어서 성(性)이라고 하였다.
사람에 대해서 ‘사람의 정〔人之情〕’이라고 한 것은 사람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성이 움직여 정(情)이 된다. 사람은 선(善)을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정’이다. 만약 ‘이것이 어찌 사람의 성이겠는가’라고 말했다면 뜻이 모호해서 절실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이
발용(發用)된 것에 대하여 특별히 ‘정’ 자를 거론한 것이다.
대개 성이 발하여 정이 된다고 하는데, 어찌 이처럼 형편없는가. 정은 진실로
그렇지 않은데 양육을 잘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읽는 자가 만일 이 ‘정’ 한 글자를 참으로 절실하게 마음속으로 깊이 안다면, 요순이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진실로 뼈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있을 것이다. 성현의 글은 글자 하나에 담긴 의미가 이와 같다.
[고자 상 9장]
기필코 ‘왈비연야(曰非然也)’로 끝맺은 대목은 글의 기운이 호탕하고 글의 뜻은 엄절하며 부친 뜻은 분하고 한스럽다.
[고자 상 10장]
만약 무턱대고 의롭게 죽는 것을 삶보다 심하게 바랄 수 있다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분명 구차하게 큰소리치는 말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물고기나 곰 발바닥의 맛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물고기와 곰 발바닥으로 먼저 비유를 들었다. 진실로 완전한 바보이거나 지극히
완악(頑惡)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군들 ‘의(義)’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은 ‘의’를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가장 뛰어난 자는 이 말을 구실로 삼아서 ‘의’가 삶과 더불어 나란할 수도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의’의
아름다움이 삶의 즐거움보다 훨씬 뛰어나서, 마치 곰 발바닥과 물고기의 맛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는 것처럼 여기겠는가. ‘의’의 아름다운 맛이 곰
발바닥을 대신할 수 있음을 알았다. 맹자는 ‘의’에 대해서 과연
“추환(芻豢)이 우리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참된 맛을 아는
자이다.
그렇지만
동쪽 무덤 사이에서 걸식하는 자는 물고기도 먹고, 육고기도 먹으며, 통째로 구운 것도 먹고, 고깃국도
먹으면서 다만 실컷 배부른 것만을 아름다움으로 여긴 것이니, 어떻게 곰 발바닥의 맛이 물고기를 구운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겠는가.
만약 맹자의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나는 물고기도 포기하지 않고, 곰 발바닥도 포기하지 않겠다. 둘을 다 얻는 것이 좋으니 누가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맹자가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의’가 삶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세속의 선비가 분명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반복 해석해서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밝히면서, 다만 두 구절의 말을 한번은 곧장
말하고 한번은 뒤집어 말함으로써, 의리가 더욱 밝아지고 뜻이 더욱 지극해졌다. 두 번째 절(節)은 생사(生死)를 거듭 거론해서 앞의 첫 번째
절의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의리에 대해 해석하였다. “구차하게 얻는다.〔苟得〕”라고 할 때의 ‘구(苟)’ 자는 구차하게 얻은 삶의 맛이
물고기처럼 맛이 없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심함이 있다.〔有甚〕”라고 할 때의 ‘심(甚)’ 자는 의로운 죽음의 맛이 곰 발바닥처럼 맛이 좋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세 번째 절은 ‘가령〔如使〕’이라는 말로 시작해서 내가 기필코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리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네 번째 절은
‘이 때문에〔由是〕’라는 말로 시작해서 문장의 기세가 솟구쳐 올라 듣는 사람이 상쾌해진다. 다섯 번째 절은 ‘이렇기 때문에〔是故〕’라는 말로
시작해서 본래의 주제를 다시 비추었고, ‘비독(非獨)’으로 이음으로써 여섯 번째 절을 일으켰다. 여섯 번째 절은 생사를 판결하는 일을
제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음을 밝혔다. 일곱 번째 절은 만종(萬鍾)의 녹(祿)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이 그 본심을 상실하는 것을
밝혔다. 여덟 번째 절은 나에게 아무런 보탬이 없는 만종의 녹을 물리침으로써 현자(賢者)가 본심을 상실하지 않는 이유를 밝혔다.
본심이라는
것은 내가 하늘에서 받은 것으로, 삶을 살아가는 진실한 이치이다. 만약 외물(外物) 때문에 삶의 진실한 이치를 상실한다면,
그러한 삶은 거짓이 되니 어디에 삶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보통 사람의 삶은 살아도 죽은 것이며, 현자의
죽음은 죽어도 산 것이다. 한 번의 죽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보통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고, 현자는 죽었어도
오히려 산 것이다. 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보통 사람은 제대로 살았던 적이 없으며 현자는 죽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현자가 구차한 삶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마침내 오래도록 사는 이유가 된다. 맹자가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다.”라고 말했으니, 진실로
맞는 말이다.
아, 누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삶을 버리는 줄 알기나 하겠는가. 가령 사람마다 모두 진정으로 진실한 삶을 살기를 크게
원한다면 무덤 사이의 술과 고기가 비록 산과 바다처럼 쌓여 있더라도 동쪽 성곽의 진흙에 불과할 뿐이다. 등창이나 치질을 앓는 가련한 자는 핥아
주는 사람 없이 냄새나는 침상에서 문드러져 죽게 될 것이다.
대체로 글을 짓는 사람은 이치에 도달한 연후에야 문장이 절로 통하게 된다. 이치에 밝지
못하고 한갓 문장만을 일삼는 자는 잘하려고 할수록 더욱 졸렬해진다. 성현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진한(秦漢) 이래로 오직 동중서(董仲舒)와
한유(韓愈) 두 사람의 글이 볼만한 것은 이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맹자》를 읽으면 문장에 보탬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로
맹자가 말하는 의리의 실제를 모른다면 비록 만 번을 읽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 장을 깊이 살피고 완미하여 그 이치가 실제 그러하다는 것을
터득한다면, 나열하여 서술하다가 모아서 요약하고, 종횡으로 올렸다가 내리며, 호방하고 굳세다가 갑자기 가라앉히는 서술 방식에 무한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것이다. 문장에 뜻이 있는 자 역시 마땅히 종신토록 외워야 할 것이다. - 이는 근세(近世)에
‘의(疑)’와 ‘의(義)’를 쓰는 큰 방법이다. 그러나 의리가 실제로 그러한 것이지, 한 구절 한 구절 더 깊이 파고들어 가는 것이 문장을
부질없이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님을 모른다면 본받으려고 해도 할 수 없다. -
[고자 상 11장]
성현께서 인(仁)을 언급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직접적이고 절실하게 사람을 일깨우는 대목으로 이 장(章)만 한 곳이 없다.
‘심(心)’은 신체 장기의 명칭이다. 심장이라는 장기가 있는 것은 금수나 사람이나 똑같다. 하지만 사람은 인의 이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금수와
다르고 어떤 세상 만물보다도 가장 신령하다. 그러므로 “인은 사람의 마음이다.”라고 말하고, 이를 풀이하기를 “인은 마음의 온전한 덕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마음을 잃어버리고도 찾을 줄 모른다면 또한 금수일 뿐이다. 몸뚱이는 비록 완전해도 사람이 아니니, 곡식의 씨앗이 부패하면 껍질이
온전해도 곡식이 아닌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곧장 “인심이다.”라고 말했으니, 대개 마음이 마음답게 되는 이유는 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인이
사상(四常)을 통괄하고 하늘과 짝하는 까닭이다.
곧장 “의는 길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사람의 길이다.”라고 말했다. 이 길로 다니지
않는 것은 풀숲과 물 웅덩이로 다니는 뱀이나 가시나무 사이로 다니는 승냥이와 같은 따위이다. 오직 사람만이 이 길로 다녀서 구주(九州)에 이르고
깊은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니, 이 어찌 사람의 길이 아닌가.
굴원(屈原)이 요순은 이미 도를 따라 바른길을 얻었고, 걸주는 좁은 길로 군색하게 걸어간다고 하였다.
걸주의 악(惡)을 지적하면서 ‘첩경군보(捷徑窘步)’라고 한 말은 어찌 헐후어(歇後語)가 아닌가. 그러나 이미 사람의 길을 잃었다면 뱀이나
승냥이일 뿐이다. 이들을 배척하면서 금수라고 한 격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보태겠는가. 후세에 말 잘하는 선비가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이태백(李泰白
이구(李覯))의 〈상어(常語)〉는 망발이 아닌 것이 없지만 “사람마다
인의를 실천하면 온 세상이 다 탕왕ㆍ무왕이 될 것이니, 누가 그의 군주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대목은 심하다. 소인유(小人儒)가 하늘과
성인을 업신여김이 마침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는 제대로 독서하지 않은 소치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오히려 문장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으니, 한갓 문장만을 추구하는 자들의 끝은 으레 이와 같다. 그렇지만 이태백의 글솜씨를 보면 아주 볼품없으니, 도를 알지 못하면서 어찌
문장을 잘할 수 있겠는가.
‘애재〔哀哉〕’ 두 글자를 가장 자세하게 음미해야 한다고 한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여 눈물이 흐르게
한다.
[고자 하 6장]
순우곤(淳于髡)은 이미
“천하를 손으로 구원하고자
하는가?”라는 말을 듣고 응당 심하게 위축되고 부끄러워했어야 하는데, 맹자를 시기하는 마음이 안에 팽배해 있어서 어리석은
계책을 떠올렸다. 명실(名實)의 선후(先後)에 대한 이야기로써 의리(義理)에 끌어 붙여 화제를 꺼내 말하기를 “인자(仁者)도 진실로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였으니, 맹자가 “군자는 또한 인할 뿐이다.”라고 대답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답변을 듣는 순간 마땅히 그만두었어야
했다. 그런데 또 “현자(賢者)가 나라에 아무 유익함이 없다.”라는 것으로써 제 말의 증거로 설정하려고 하였으니, 맹자가 “침삭(侵削)이나마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말을 듣자마자 곧 그쳤어야 마땅한데, 또
구(謳)와 곡(哭)을 비유로 들어서 곧장 현자가 있으면 자신이 반드시 알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의도는 진정 맹자를 압도하려는 것이었다. 어찌 맹자가 “군자가 하는 바를 중인(衆人)들은 진실로 알지 못한다.”라고 말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여기에서의 ‘고(固)’ 자는 흡사 5백 근짜리 철퇴로 정수리를 쳐서 쪼개 뇌수와 눈알이 그 자리에 낭자한 것 같다. 순우곤이 만약
죽거나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는 본래부터 성(性)이 없는 놈이다.
[고자 하 13장]
자만하고 좋은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천리 밖에서 찾아오는 사람을 막는다는 것은 군주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선비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이 대목은
순 임금은 선(善)을 남과 함께하였고, 주공이 세 번이나 음식을 뱉어 냈으며, 안연은 “가득해도 비어 있는 것처럼 여겼다.”라는 대목과 참고하여 함께 보아야 성인을 배우는 방법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