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시와 조자시-삼재발비>
-[출처] 야자시와 조자시, 삼재발비|작성자 유승재 http://dalbat.info/40207827333
유명한 만세력의 앞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현실적으로 수정해야 할 부분은 원서에 있다하여 그대로 답습하고 원서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고, 이것을 절대로 수정해서는 안 될 부분은 원서에 대한 한 마디의 언급도 없이 적당히 수정해서 채택하고 있는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야자시와 조자시의 문제이다. 진경산 저 ‘삼재발비’에 ‘子刻은 兩時가 있다.’고 분명히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과학적인 측면에서 논리정연한 불변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대부분의 역술인들이 조자시와 야자시를 구분하지 않고 있음은 역학계의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그런데 서술의 논리적인 구조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첫 문장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서의 내용 중에서 현실적으로 수정해야 할 내용과 절대로 수정해서는 안 되는 내용을 구분하는 기준이 제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삼재발비’라는 책의 내용은 절대로 수정되어서는 안 되는 내용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뭐가 우주과학적인 측면에서 논리 정연한 불변의 진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삼재발비’를 찾아봤습니다.
원수산은 ‘명리탐원’ 8권이란 명저를 지을 때, 수많은 고서들을 탐독하고 징험된 내용을 골라냈는데, 그 참고 서적 중에 ‘삼재발비’ 9권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나중의 오준민의 ‘동지환년주설(冬至換年柱說)’도 袁氏원씨가 말한 ‘삼재발비’ 같은 자료를 통해 논리를 견실히 주장할 수 있었다. 夜子時 처리 문제도 ‘삼재발비’에서 영감을 얻어, 원씨가 새롭게 주장을 펼 수 있었다. 모두 ‘삼명통회’의 확장 이론이라 보면 되겠다.
‘삼재발비’는 康熙강희 34년(1695) <陳晉錫진진석 序서>가 있는 걸 보아, 1695년에 일단 원고가 완성됐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을 강희 36년(1697)에 목판 인쇄했으니, 적어도 그 이전에 수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물이다. 저자는 新安신안에 사는 진문경(또는 진경산)이며, 당시 유행되던 오행에 관해 총망라한 백과사전적 내용을 자세히 담고 있다. 택일 지리 천문 역점 등 광범위하게 술어의 근원과 뜻을 밝혀놓았다. 과거 오행에 관한 것들을 그냥 답습한 것에서 벗어나, 淸初청초의 고증학 영향을 받아 상당히 합리적으로 서술하려고 했던 점이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는 淸朝청조부터 황실에서 필요한 택일이나 지리 선택 등 지극히 현실적 안위에 관한 선택술에만 치닫는 시류가 팽배해 있었던 것에서도 영향을 받아 편찬된 대작이다. 이 책은 약 40년 지나 황실에서 천문학자 매각성(1681~1763) 등을 동원해서 오행술서 완결판 ‘협기변방서’(1739 완성, 1741 발행) 36권을 官撰관찬할 때도 주요 저본이 됐으며, 이후 조선과 일본 등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 홍주 왕기(1530~1615)가 아들 왕사의와 함께 편찬한 백과사전류 ‘삼재도회(三才圖會)’(1609) 106권이 있었는데, 類書류서적 발상이 ‘삼재발비’의 편찬에 영향이 컸다고 본다. ‘삼재발비’의 현재 저본은 요녕성 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아마도 陳氏진씨가 요녕성을 근거지로 활약한 유면한 술사 학자일 수 있다. 9권이라 읽기에 부담이 가서, 나중엔 精選정선해서 [삼재발비抄要} (1997) 상하 2권이 나왔다. 이것은 인터넷 보급과 더불어 명술 수학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여파에 사회경제적 요구에 의한 술서 간행이라 하겠다. - 이상-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삼재발비가 저술된 시기가 청나라 초기라는 것입니다. 명말 청초는 서양과학이 중국에 유입되어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던 시기입니다. 둘째, 당시 유행하던 오행에 관한 이론을 총 망라한 백과사전류의 서적이라는 겁니다. 이런 서적들은 박이부정(博而不精, 넓으나 정확하지는 않다.)하기 쉽습니다. 즉 ‘삼재발비’라는 서적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야자시와 조자시를 구분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재발비’에는 한 해의 시작을 입춘이 아니라 동지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도 있는 모양입니다. 삼재발비를 그렇게 숭상한다면 야자시설뿐만 아니라 동지를 연주의 기준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 시간법에서 12시진을 각각 둘로 나누는 것은 자시만이 아닙니다. 각 시진은 초와 정으로 구분하여 모두 24개로 나누고 다시 더 세분해서 시간을 구분했습니다. 자시가 둘로 구분된다고 해서 그것이 야자시와 조자시를 나누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 첨부 파일의 내용 중에서 캡쳐했습니다. -
* 삼재발비가 삼명통회의 확장이론이라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야자시설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서는 명나라 중엽(1575년)에 편찬된 삼명통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주를 세울 때 야자시설이 수용된 것은 아닙니다. 명리약언이나 적천수천미, 자평진전 등의 청나라 때의 고전들에 언급된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1912년 원수산 선생이 ‘명리탐원’이란 저서에서 야자시설을 주장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논란이 생기게 된 것이죠. 삼명통회는 만민영이라는 분이 당시 유통되면 여러 명리설들을 모아 놓은 백과사전과 같은 책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博而不精(넓기는 하지만 정밀하지는 않다)’이라는 평을 받아 왔습니다.
만민영이라는 분의 경력을 보면 야자시설을 수록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이분은 삼명통회를 편찬하기 전까지 중국 남부의 복건성에서 관리 생활(1570년까지)을 했다고 합니다. 복건성은 대만을 마주보고 있는 지역입니다. 광동과 복건은 전부터 대외 교역의 창구역할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물론 명나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해금 정책을 취하고 대외 무역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꾸준히 대외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명의 대외무역은 민간무역의 영역에서 상당히 활발했으며 특히 은본위경제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한 중기 이후의 명은 대외무역이 활발하여 전 세계의 은을 긁어모았다. 명 조정은 공식적인 무역은 조공무역 외에는 하지 않았으나 민간무역, 비공식적인 무역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방관하는 상태였다. 가끔씩 해안선을 비워버리는 폐쇄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특히 북로남왜의 화 시기에) 일시적인 일에 그쳤다. 무엇보다도 그러면 세금이 안 들어오니까... 포르투칼이 마카오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도 명 중기이며 포르투칼이 명 지방정부에 불만을 품고 마카오를 폐쇄하자 상인들이 들고 일어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 결국 1567년 제한적으로 푸젠 성 장저우에서의 무역을 허가했으나 명나라 상인들은 그러한 제한을 무시하고 급속히 사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정부가 복건성에서 무역을 허가한 시기에 만민영이라는 분이 복건성에서 관리 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중국 남부 지역에서는 서양과의 접촉이 있던 시기입니다. 즉 만민영이라는 분이 전에 없던 야자시설을 삼명통회에 수록하게 된 배경이 서양시간의 영향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서양 문물과 과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청나라 삼재발비에 오면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되기에 이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당시에 떠돌던 (하루의 시작에 관한 여러 주장 중의 하나인) 야자시설을 백과사전식 저술인 삼명통회에서 받아들여 수록했는데,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청나라 시대 이후 점차 주장이 강화되다가 중체서용이라고 해서 서양화를 꾀하던 20세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주장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