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사
1. 한반도 인근의 교회
2. 한국 교회의 탄생과 시련
3. 신유박해(1801)
4. 교회 재건운동(1802~1830)
5. 조선교구 설정(1831)
6.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
7. 기해박해(1839)
8. 병오박해(1846)
9. 박해 속의 성장
10. 병인박해(1866)
11. 조선의 개방과 신앙의 자유
1. 한반도 인근의 교회
1) 중국 교회
중국에는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가 전해진 적이 있다. 당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다시 전해져 성행하였다. 명나라 말기 1582년에 예수회 마태오 리치 신부(利瑪竇, 1552~1610)가 마카오에 도착함으로써 천주교의 중국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양은 물론 중국 학문에도 능통했던 마태오 리치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교우론 交友論>>(1595), <<천주실의 天主實義>>(1603) 등 22권의 한문서학서(漢文西學書)를 저술하였다. <<천주실의>>와 판토하 신부가 지은 <<칠극 七克>>(1614) 등은 발행 직후부터 중국 내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조선에도 알려져 후일 한국 교회가 탄생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2) 일본 교회
일본 교회는 1549년 예수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일본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하비에르 신부의 뒤를 이은 토레스 신부는 적응주의 선교 방식으로 일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일본의 계급적 구조를 잘 이해한 그는 포르투갈 상선의 일본 출입을 선교 활동과 연계하며, 각 지역의 영주인 다이묘[大名]들과 접촉하여 그들을 입교시켰다. 일본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포르투갈어 발음을 따라 기리시단[吉利支丹]이라 불렸다. 다이묘들 중 명문 출신의 기리시단들을 기리시단 다이묘라 하였다.
임진왜란은 천주교가 조선과 직접적인 접촉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평정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반대세력을 억제하고 해외무역의 길을 열기 위해 조선 침략전쟁을 계획하였다. 그는 1592년에 조선을 침략하며 불교 신자인 가토 가요마사[加蕂淸正]와 천주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아우구스티노]를 선봉으로 내세웠다.
조선에 파견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는 2,000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신자인 그는 예수회에 청하여 군종 신부 한 명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요청에 따라 1593년 12월 조선 땅을 밟게 된 예수회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 군인들을 대상으로 사목하였다. 이어 예수회 프란치스코 데 라구나 신부와 일본인 수사 한 명도 조선에서 활동하였다.
군종 신부들은 버려진 조선 아이들 200여 명에게 대세를 주었고, 조선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접촉은 어려웠다. 하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 중 수천 명이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이 때문에 한국 교회의 기원을 임진왜란 때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 일본 교회의 역사로 간주하기도 한다. ‘교회(敎會)’라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안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역사로 보기는 어려우나 신자의 유무(有無)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달리 볼 수도 있다.
2. 한국 교회의 탄생과 시련
1) 사행로(使行路)를 통한 교류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평양, 의주를 거쳐 중국 북경에 이르는 사행로는 세계로 열려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가톨릭 성가 287번)에 나오는 “동지사 오가던 길.....”의 동지사(冬至使)는 매년 파견되는 사신으로 사행의 대명사로 불린다. 이 길을 통해 중국에서 저술된 서양 신부들의 저술들이 조선에 전해졌다.
조선에 최초로 전해진 한문서학서는 1603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천주실의>>다. 서양의 자연과학서적들과 함께 조선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지던 이 책들은 18세기 후반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신앙의 수용으로 발전하였다.
2) 한국 교회의 탄생
① 주어사 강학회
강학(講學)은 여럿이 모여 공통된 주제를 놓고 질의, 토의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거의 유학에 국한된 것이었다. 한국 교회와 관련이 있는 주어사 강학회는 1779년 12월에 있었던 모임을 말한다. 권철신(암브로시오)이 주도했던 이 모임에는 정약전, 이벽 등 당대의 수재들이 참석했다. 본래 원시유학(原始儒學)을 논하는 장이었을 것이나 이벽이 참석함으로써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한 검토도 이루어졌다.
② 이승훈의 세례와 한국 교회
1783년 겨울 이벽은 절친한 친구인 이승훈을 찾아가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는 이승훈이 천주교에 대해 더 알아오기를 부탁했다. 이벽은 가능하면 세례도 받을 것, 종교 예식을 소상히 알아볼 것 등을 당부했다.
북경의 북당(北堂) 성당에 도착한 이승훈은 1784년 그라몽(Grammont)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선교사를 보낸 적이 없는 작은 나라에서 스스로 찾아와 세례를 청한 것은 그 자체로 놀라움이었다. 이승훈은 세례를 받기 전에 박해를 각오할 것, 첩을 두지 않을 것 등을 약속하였고 귀국길에 천주교 서적들과 성물 등을 가지고 왔다. 이승훈은 이벽(세례자 요한)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초기 교회가 발전하였다.
③ 명례방 사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을사년(1785)에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행하던 천주교 집회가 추조(형조) 관원들에게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1784년에 탄생한 한국 교회는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졌다. 명례방(명동) 출신의 김범우는 이벽과 친교를 맺고 지내던 중인(中人)이었다. 그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후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1785년 봄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요한), 권일신 등이 이벽의 주도로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던 중 순찰을 돌던 관원들에게 적발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모임이었기에 모두 형조로 끌려갔으나 대부분 남인 양반이었으므로 곧 훈방되었고 중인 김범우만이 감옥에 갇힌 후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는 유배형을 받았으나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1786년 가을에 사망하였다.
④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모방(模倣)성직제도라고도 하는데 교계제도를 잘못 이해한 조선 신자들이 스스로 성직자를 임명한 것을 말한다. 명례방 사건 이후 권일신, 이승훈 등은 오히려 좀 더 조직적인 방법으로 선교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성직자를 뽑아 보다 효율적인 선교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승훈, 권일신, 이존창,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최창현 등 10명을 신부로 임명하고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 고해성사의 경우 처음에는 남자들에게 국한되었으나 여성 신자들의 간청에 의해 확대되었다. 잘못된 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교세는 빠르게 확대되었다.
신부로 임명된 유항검은 교리서를 숙독하던 중 자신들의 행동이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문의하기 위해 1789년 윤유일(바오로)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성사집행의 중지, 신자들을 격려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이듬해 한국 교회는 성사를 간절히 원하는 신자들에게 성직자를 파견해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이때 윤유일은 성직자 파견 약속과 함께 미사 도구, 포도주 제조법 등을 배워가지고 돌아왔다.
3) 신해박해(진산사건)
1790년 윤유일이 두 번째로 파견되었을 때 구베아 주교는 사제 파견 약속과 함께 제사 금지령을 조선 신자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유교의 기반 위에서 천주교를 이해했던 양반 신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1791년 진산(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관할이었음)에 사는 윤지충(바오로)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신자인 어머니는 평소에 자신이 죽거든 천주교의 법에 어긋나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일렀었다. 윤지충은 외종형인 권상연(야고보)과 상의한 후 상례는 정중하게 갖추되 음식 차리기나 신주를 모시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윤지충이 조문도 받지 않고 어머니의 시체를 버렸다는 소문으로 번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체포되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것을 강요하자 윤지충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며 거절하였다. 둘은 12월 8일에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천주교 반대와 탄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4) 주요 공동체의 현황
초기 한국 교회의 중심지로 네 곳을 꼽을 수 있다. 서울의 명례방(명동) 일대, 경기도 양근(양평) 지방, 전라도 전주와 진산 지방, 충청도의 내포(內浦) 지방이다. 명례방 사건에서 보았듯이 명례방은 신자들의 정기적인 모임이 있던 곳으로 사건이 발생하기 전 초기 교회의 중심지였다.
주어사와 천진암이 위치한 양근 지방은 한국 교회로의 전환점이 마련된 곳이다. 천주교가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적 단계에서 신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이곳에서 마련되었다. 권일신을 중심으로 하여 천주교세가 확산되었고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윤유일, 최인길, 지황 등이 중심 인물이다.
전라도 지역 신앙 전파의 중심이 된 곳은 전주와 진산이다. 북쪽의 진산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남쪽인 전주 지역에서는 유항검이 중심이 되었다. 권일신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알게 된 유항검은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과 친척, 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 및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신앙 전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지역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내포지방은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을 이르는데 초기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중심 지역은 삽교천 주변이다. 여사울 출신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고 그로 인해 복음이 이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3. 신유박해(180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를 한국 교회의 4대 박해라 한다. 공식적으로 신유박해는 1801년 1월 10일(음) 내려진 금교령(禁敎令)으로 시작하여 12월 22일(음) <척사윤음 斥邪綸音>이 발표되면서 막을 내렸지만 이미 금교령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척사윤음이 발표된 후에도 여파는 계속되었다. 척사윤음은 사악한 가르침[邪]인 천주교를 배척[斥]하는 임금의 교지[綸音]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박해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서 이후부터는 별도의 명령이 없이도 박해가 수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 박해의 원인
① 사상ㆍ종교적 요인
주자학적인 유교 문화와 사상 이외의 것을 이단시하던 조선에 천주교라는 외래 종교가 들어온 자체가 박해의 여지를 안고 있었다. 천주교의 핵심 교리는 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천지창조, 하느님의 인격성, 천주강생, 영혼불멸, 천당과 지옥 등은 그들이 보기에는 이단사설에 불과했다.
② 사회적 요인
천주교는 사회질서와 도덕 기반을 파괴한다고 여겼다. 효(孝)와 충(忠)은 조선에서 최고의 덕목인데 천주교는 하느님을 인류의 대부(大父), 우주의 임금인 대군(大君)으로 여기므로 부모와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종교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제사 문제가 발생하자 천주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로 불리었다.
또한 유교 사회는 남녀와 부부를 상하의 관계로 분명히 구분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는 부부의 동등함을 기본으로 하고, 동정생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집단이었다. 성사와 전례 거행에서 남녀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자체가 추문이 되기도 하였다.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교리 또한 문제가 되었다. 신분 질서가 분명한 조선 사회 안에서 천주교의 가르침과 실천은 사회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다. 1802년 1월 순교한 황일광(시몬)은 백정인 자신에게 사람대접을 해주자,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양반 신자들 중에는 유군명(혹은 유권명) 같이 종을 해방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천주교는 남녀도 구분 못하고 위아래도 모르는 짐승과 같은 존재들이나 믿는 종교, 즉 금수지교(禽獸之敎)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③ 정치적 요인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왕권과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받아들였다. 하느님의 명령을 임금의 명령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여기고,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든 신자들을 국가 질서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황사영(알렉시오)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는 서양 세력과 결탁하는 반국가적인 단체로 받아들여졌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굴절된 당쟁 속에서 천주교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신유박해의 시작은 이 당쟁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치적인 싸움의 결과물이었다. 노론 중심의 천주교 반대세력[攻西派]이 남인 중심의 천주교 수용세력[信西派]을 공격한 것이다.
2) 박해의 전개
1800년 6월 28일(음)에 정조가 승하하고 11살의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어린 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노론 벽파에 속한 그녀는 국상이 끝나자 정권의 핵심을 벽파 사람들로 채웠고 이후 박해가 시작되었다.
① 서울의 박해
1800년 12월 17일(음) 중인 최필공(토마스)을 필두로 신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정순왕후가 내린 금교령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은 반역죄로 다스려졌고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다.
2월 9일(음)에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이 체포되었다. 11일(음)에는 권철신과 정약종, 14일(음)에 정약전, 16일(음)에 이기양이 차례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이들 중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이승훈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하였다.
② 충청도, 경기도의 박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2월 5일(음)에 체포되었고, 2월 26일(음) 정약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후 공주(황새바위)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 여주와 양근에서는 1800년에 잡힌 신자들이 서울로 압송된 후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었다. 이들 중 5명은 1801년 3월 13일(음)에 여주 성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한명은 옥사하였다.
③ 전라도의 박해
호남의 사도 유항검은 박해 초기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200여 명의 신자들이 전주, 금산, 고산, 김제 등에서 체포되었다. 주요 인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신자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서양 선박을 끌어들이려는 계획(대박청원)이 드러났다. 이 계획에 관련된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은 9월 11일(음)에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④ 주문모 신부의 순교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조선 교회의 성직자 청원에 따라 이 땅에 가장 먼저 발을 들여 놓은 중국인 성직자로 1794년 12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조선말을 배우며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고해성사는 필담으로 하였다. 간헐적인 박해로 활동의 제약을 받았지만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교세가 급증하였다. 그의 입국 이전 4천 명이었던 신자는 1801년에 이르러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피신하기 위해 한 때 황해도 황주까지 갔으나 강완숙(골롬바) 등이 잡혀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3월 12일(음)에 자수하였고, 군문효수 판결을 받아 4월 19일(음)에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주 신부의 실체가 확인되자 박해는 더욱 확대되었다.
⑤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박해는 황사영 백서(帛書 비단에 쓴 편지)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충북 배론에 피신해 있던 황사영은 신자들로부터 박해의 상황을 전해 듣고 한국 교회의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그 내용을 비단에 적었다.
황사영의 체포로 백서가 발견되었고 그는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처형되었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백서와 관련하여 심문을 받았으며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백서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대왕대비 김씨는 12월 22일(음)에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사학죄인에 대한 신문 및 처형을 연말까지 마무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유함검의 가족들이 처형되었고, 12월 26일(음)에는 16명의 신자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각 지에서 처형하였다.
3) 박해의 영향
황사영 백서에 의하면 서울에서 정식으로 처형된 신자가 300여명이라 한다. 한국 교회가 창립된 지 17년 만에 발생한 대대적인 박해는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주요 지도자들이 거의 처형됨으로써 걸음마를 내딛은 교회는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주문모 신부가 처형됨으로써 성직자 없는 교회가 되었다.
둘째, <척사윤음>의 반포로 천주교를 박해할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노, 불효한 자들, 마술자, 풍속 문란자, 방탕한 자로 규정하였다.
셋째, 황사영 백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넷째,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명목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이 제거됨으로써 세도 정권의 발판이 구축되었다.
다섯째, 천주교를 믿는 신분층의 변화가 일어났다. 양반 신자들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유배됨으로써 중인 이하의 신분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또한 더 이상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놓고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여섯째, 박해를 계기로 천주교 신앙이 보다 넓게 확대되었다.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지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이 곳곳에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4. 교회 재건운동(1802~1830)
1) 신유박해 이후의 상황
신유박해가 마무리되면서 1802년부터 박해가 잠잠해졌으나 신자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교형(敎兄)들을 지도하고 권면하고 격려할만한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 사형을 당하였다. 명문거족 중에는 여자와 아이들만이 남아 있는 집안이 많았다. 천주교의 광적인 원수들이 애써 잡으려 들지 않았던 가난한 자들과 천민들은 서로 연락도 없이 뿔뿔이 헤어져, 적의로 가득 찬 외교인들 틈에 끼어 살게 되니, 이들은 법과 일반 여론으로 큰 힘을 얻어, 신자들을 천만 가지로 괴롭히고, 그들을 종과 같이 다루었다. 입으로만 신앙을 배반하고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신앙을 보존하고 있던 수많은 배교자들은 다시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무서워서 그저 몰래 몇 가지 기도나 그럭저럭 드리는 형편이었다. 성물과 성서는 거의 모두가 파괴되었었고, 조금 남아있는 것도 땅 속에 파묻히거나 담 구멍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한국천주교회사>> 중, 10쪽)
2) 성직자 청원
지도자들이 사라진 교회는 자멸할 줄 알았으나 끈질긴 생명력은 계속되었다. 재건운동의 주역들은 초기 교회 지도급 신자들의 2세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요한)과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바오로)을 들 수 있다.
재건운동의 핵심은 성직자를 영입하는 일이었다. 신자들의 희생으로 경비가 마련되자 신미년(1811)에 두 통의 편지를 북경으로 보낼 수 있었는데 하나는 교황께, 다른 하나는 북경 주교께 보내는 것으로 1812년 초에 북경에 전달되었다.
교황께 드린 편지에는 조선 교회의 탄생과 박해 후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한 후 성직자를 청하였다. 포교활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으로 서양의 배를 청하면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하였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실었다.
북경 주교께 드린 편지에는 북경 교회를 자신들의 본당(本堂)으로 언급하며 다음의 내용을 서술하였다. ① 신유박해와 주요 순교자 열전 ② 경제적 어려움 ③ 성직자가 없어 성사생활 못함 ④ 제1계명(제사문제)과 3계명(단식과 금육재 면제)에 대한 의견 ⑤ 작게 제작된 경문과 성물 요청 ⑥ 세례와 고해성사의 은총을 받지 못하므로 대사를 내려주기를 요청 ⑦ 책문에 점포를 다시 열 것을 건의. 교황님께 직접 글을 올리는 것이 도리가 아닌 줄은 알지만 애타는 마음으로 더 기다리지 못하고 보내니 번역하여 보내주시길 청하며 편지를 마무리하였다.
이런 간절한 청원에도 불구하고 중국 교회는 물론 교황청까지도 이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중국 교회에는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 로마 교황청과 연락이 어려운 상태였고 교황청 역시 프랑스 혁명(1789)의 여파로 조선 신자들의 요청에 응답할 형편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비오 교황을 1812부터 1814년까지 프랑스의 퐁텐블로에 억류하였으므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신자들의 청원은 계속되었다. 1816년부터는 정하상이 활동을 시작하여 1822년까지 9회에 걸쳐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을 왕래하였다. 1821년부터는 현석문(가롤로)과 이경언(바오로)이 정하상을 도왔다. 1824년에는 유진길(아우구스티노), 1826년에는 조신철이 가세하였다. 유진길은 1824년(혹은 1825년)에 교황청에 청원서를 보냈다. 이 편지는 1827년에 도착하였는데 교황 레오 12세와 포교성에 큰 감동을 주었다.
3) 정하상 바오로
정하상은 1795년 양근의 분원(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약종이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에 6살이었던 정하상은 어머니 유조이(체칠리아)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가산이 적몰되자 어머니는 하상과 딸 정혜를 데리고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마현)에 가서 살았다.
혼인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정하상은 집안의 박해가 점점 심해지나 신자들의 집으로 피신하여 생활하였다. 조동섬(유스티노)을 만나 더 많은 교리와 한문을 배운 뒤로는 교회 재건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하상은 1816년 겨울 만 21세의 나이로 처음 북경에 갔다. 1824년에는 역관 출신 유진길과 함께 북경을 다녀온 이후 교황에게 드리는 편지(1824~1825)를 작성하였다. 이 편지는 마카오를 거치며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1827년에 교황청에 전달되어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하상은 유진길, 조신철과 더불어 의주를 통해 유 파치피코(여항덕, 혹은 유방제) 신부, 모방(Maubant) 신부, 샤스탕(Chastant) 신부, 앵베르(Imbert) 주교 등을 조선으로 인도하였다. 한편 1836년에는 최양업(토마스), 김대건(안드레아), 최방제(F. 프란치스코)를 중국 마카오로 인도하는데도 참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정하상은 <상재상서 上宰相書>를 작성하여 교회를 변호하였다. 7월 11일에 체포되었고 9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4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5. 조선교구 설정(1831)
1) 교구 설정 과정
1831년의 조선교구 설정은 조선 교우들의 끊임없는 청원의 결과였다. 1824년(혹은 1825년) 말에 교황께 드린 편지가 1827년 교황청에 전해지면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조선 교회를 북경 교회로부터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으나 책임을 지고 조선을 담당할 선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중국인 유 파치피코(여항덕) 신부가 조선 선교를 지원하였다. 그는 1834년 1월 입국에 성공함으로써 조선에 발을 들여 놓은 두 번째 성직자가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브뤼기에르(Bruguière, 蘇) 신부도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그는 조선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태국의 샴 교구에서 선교사로 있던 브뤼기에르 신부가 적극 나서자 교황청은 1831년 7월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처음에는 조선 선교를 주저하였으나 브뤼기에르 주교의 용감한 행동과 교황청의 설득으로 1833년 4월 조선교구를 담당하기로 결정하였다.
2)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브뤼기에르는 1792년 프랑스 나르본(Narbonne)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고 모교인 카르카손(Carcasone) 대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교수이며 사목자로서 지내는 동안 아시아 선교에 대한 열망이 생겨 182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고 이듬해 샴 왕국(Siam 현재의 태국)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1828년 샴 교구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평소 조선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파리외방전교회가 포교성으로부터 조선 선교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1829년에 자원하였다. 그는 조선 선교에 도움이 된다면 주교직을 수락한다고 하여 1829년에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후 그는 말레이시아의 서해안 페낭(Penang)에서 활동하면서 조선 입국을 계획하였다. 자신이 조선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소식을 들은 후 그는 1832년 8월 4일에 페낭에서 출발하여 싱가포르, 마닐라, 마카오, 복건, 남경, 직예, 산서, 서만자, 내몽골 등을 거쳐 조선을 향했다. 페낭에서 만난 중국인 왕 요셉이 동행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를 열성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3년 넘게 험난한 여정을 계속한 그는 건강을 잃어 1835년 10월 20일 마가자(마찌아즈)에서 선종하여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하였다.
6.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
1836년부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인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 조선인 성직자 양성
한국인 성직자 양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에 가장 먼저 입국한 모방 신부는 입국 즉시 신학생을 선발하였다. 1836년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를 선발하여 중국 마카오로 보냈다.
한편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해외에서 사제 양성을 하는 것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조선 내에서 사제를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통킹(베트남) 등 다른 지역의 선례를 따라 이미 성년에 이른 신자들 중에 몇 명을 선발하였는데 독신을 지키며 살아온 정하상(42세), 32세 된 홀아비 1명, 2명의 청년이 선발되었다. 3년 안에 사제품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으나 기해박해(1839)로 현실화되지는 못하였다.
2) 교회 정비
교우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시작된 조선 교회는 그 역동성만큼이나 부족한 면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성직제도라 할 수 있고, 성직자는 물론 교회 전체를 책임질 주요 지도자도 없이 지낸 기간이 많아 그 만큼 체계적이지 못한 면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우선 지역을 나누어 활동하며 정기적으로 성사를 집전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 회장을 임명하여 박해로 인해 자신들이 죽을 경우도 대비하였다. 회장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신부를 대신하여 가르치는 것과 죽을 위험에 있는 어린이에게 대세를 주는 일 등이었다.
기해박해(1839)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회장규조 會長規條>>는 당시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회장의 역할은 물론 신자들이 지켜야 할 본분이 무엇인지를 규정함으로써 비신자들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였다.
3) 사목 순회
선교사들의 활동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찾아가 미사를 거행하고 성사를 주는 일이었다.
“조선의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모방 신부는 조선말 배우는 데에만 전력을 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에게 그럴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모두가 성사 받기를 원하였으니, 그들은 고해를 하고 성체를 영하기 전에 자기들이 죽거나 선교사가 세상을 떠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한문을 아는 신자들은 글로 써서 고해성사를 받고,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남들에게 써달라고 하였다. 이들은 통역을 통해서 고해를 하게 하여 달라고 선교사에게 청하였다. 이런 열심을 보고 모방 신부는 한문으로 성찰방식을 만들어서 그것을 조선말로 번역하게 하려고 하였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중, 334쪽)
신자들의 이러한 열심은 박해의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다.
7. 기해박해(1839)
1) 박해의 원인
신유박해(1801) 이후 지역적인 박해가 자주 있었으나 조선 정부는 전반적으로 천주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새로운 지도층이 출현하여 활동한 결과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신자가 증가하여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해박해는 1837년부터 권력을 잡은 풍양 조씨가 이전의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으나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이 정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실행한 박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박해의 과정
공식적인 체포령이 내려지기 전 1838년 말부터 이미 박해는 시작되었다. 1839년 4월 우의정 이지연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 금수지교(禽獸之敎)로 규정하고 천주교 박멸정책을 건의하였다. 수렴청정을 하는 헌종의 대왕대비는 이를 받아들여 천주교를 전멸시키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인류가 전멸할 것이라며 엄명을 내렸다.
이후 포도청에 갇혀 있던 교우 9명이 5월 24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였고, 정해박해(1827) 때 잡혀 13년간 옥고를 치른 교우들도 같은 날 처형하였다. 밀고자에 의해 선교사 3명이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배교자의 밀고로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현석문 등이 체포되었고, 선교사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다.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두 선교사를 불러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고 돌려보낸 후 자수하였다. 8월 22일에는 다른 두 선교사들을 잡기 위해 충청도에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두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냈고, 청양 다락골에 숨어있던 모방, 샤스탕 신부는 9월 6일에 홍주에서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세 선교사는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9월 22일에는 정하상과 유진길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26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조신철 등 9명이 순교하였다.
조선 정부는 11월 23일에 척사윤음을 한문과 한글로 작성하여 반포하여 박해를 일단 마무리하였다. 여론이 학살을 중지하자는 쪽으로 기울었고, 대부분의 주동자들이 처형되었으므로 더 이상 박해를 확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3) 박해의 결과
기해박해로 서울에서는 200여 명,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각각 100여 명, 강원도와 경상도에서도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기해일기>>에 따르면 54명이 참수되었고, 옥사한 이들이 60명이었다.
기해박해는 정치적인 갈등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교우의 처형은 없었고, 집권층 외에는 박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위기위식은 강화되었다. 세 명의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한 것이 드러나면서 천주교를 외세의 적과 동일시하였다. 중국에서 있었던 황건적과 백련교도의 난을 잘 알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반국가 단체로 인식하였다.
박해의 영향으로 국경의 검문이 강화되어 서양 선교사들의 육로 입국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와 일부 조선인 밀사들만이 육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기해박해가 신유박해와 구분되는 점 중의 하나는 교회 자체가 존폐의 위기에 놓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을 담당하는 파리외방전교회가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고, 중국에서 양성되고 있는 한국인 성직자들이 곧 바로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유진길과 유대철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은 1791년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1822년에 우연히 <<천주실의>>를 보고 교우를 수소문하여 배운 후 입교하였다. 1823년에 정하상을 만나 자신의 역관 신분을 이용하여 성직자 영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9월 22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1826년에 태어난 유대철(베드로)은 유진길의 아들이다. 기해박해가 일어나 아버지가 체포되자 자신도 순교의 열망이 생겨 관헌들에게 자수하였다.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사형에 처해져야 했으나 14세의 어린 나이여서 옥에서 비밀리에 교수되었다.
8. 병오박해(1846)
1) 선교사들과 김대건 신부의 입국
기해박해 이후 페레올(Ferréol) 주교가 1843년 제3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김대건 신학생에게 조선에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도록 지시하였다.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이듬해 1월 조선에 단독 입국하여 해로(海路)를 모색하였다. 이어 4월 30일에 조선인 교우 11명과 함께 제물포를 출발하여 난항을 거듭한 후 6월 4일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연안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제주도로 표류한 끝에 10월 12일 강경에 도착하였다. 불가능에 가까운 항해 끝에 성공은 했지만 이러한 방법의 위험성도 깨달은 항해였다. 이후 새로운 길을 모색한 끝에 백령도 인근에서 이루어지는 조선과 중국의 고기잡이 기간을 이용한 입국 방법이 자리를 잡았다.
2) 병오박해의 과정
병오박해는 4대 박해 중 하나로 분류되지만 규모도 크지 않고 기간도 길지 않았으나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고 순교하였기에 중요 박해 중의 하나로 여긴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들의 입국을 위해 작성한 편지와 해도(海圖)를 전달하기 위해 백령도 인근 순위도에 갔다가 6월 5일에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와 그와 관련된 교우들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프랑스 세실(Cécille) 함장이 이끄는 함대가 충청도 외연도에 나타나 기해박해 때 처형된 세 선교사들에 대해 항의하며 답변을 요구하였다. 이 원정으로 인해 옥에 갇혀 있는 이들이 서양 선박을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어 처형이 앞당겨졌다.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되었고 이후 옥에 갇힌 교우들도 차례로 순교하였다.
다른 선교사들은 체포되지 않았고 조선 정부도 더 이상 신자들을 색출하지 않았다. 페레올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병오일기>>를 작성하여 홍콩으로 보냈다. 이 자료에 힘입어 9명의 병오박해 순교자들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품에 오를 수 있었다.
9. 박해 속의 성장
1) 병오박해 이후의 교회
병오박해 이후 병인박해(1866) 전까지는 조선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잠시 평온을 누리며 성장한 시기이다.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로부터 1865년에 입국한 브르트니에르 신부까지 모두 17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고 1849년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한국인 사제로서의 장점을 살려 큰 활약을 하였다.
철종(1849년 즉위) 때에는 천주교 탄압이 완화된 상태였다. 철종의 경우 신유박해 때에 할아버지 은언군이 천주교와 연루되어 처형되었고, 할머니 송 마리아와 큰어머니 신 마리아가 순교한 내력이 있어 천주교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간의 박해를 허락한 임금들이 단명하거나 후사가 없자 철종 때에 이르러서는 천주교를 박해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다.
고종(1864년 즉위) 초기에도 평온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박해의 종결도 기대해볼 만하였다. 고종의 유모인 박 마르타가 열심한 신자였고, 고종의 어머니 민씨 부인(흥선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 경문과 교리문답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즉위하자 베르뇌 주교에게 감사의 미사도 봉헌하였다. 실권자인 흥선 대원군 역시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적대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는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여 1865년에는 2만 3천여 명의 교우를 헤아리게 되었다.
2) 성직자 양성과 관할구역 설정
해외에서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조선 내에 신학교 설립이 계획되었다. 그 결과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장주기(요셉) 회장이 제공한 초가집에 마련된 신학교는 3명의 입학생을 시작으로 하여 한때 10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공부하였으나 병인박해로 폐쇄되었다.
교우들의 증가하고 선교사들이 계속 입국함에 따라 1861년 10월에는 조선교구를 8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담당 성직자를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