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 부산면 내안리(內安里) 내동(內洞)마을
- 靈光金氏 長興派의 본산 -
1. 마을의 위치
내동마을은 장흥읍에서 북서쪽으로 4㎞, 면소재지에서는 서남쪽으로 3㎞지점에 있다. 북쪽으로는 수인산 끝자락인 수리봉과 경계하여 유치면 대리와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수인산 맥을 넘어 장흥읍 성불리와 경계한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있고 동쪽으로는 부산평야와 접해있는 해발 약 50m의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 좌측으로는 자미마을, 우측으로는 안곡마을, 방축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2. 마을이름의 유래와 연혁과 지명
1) 유래
내동 마을의 이름은 생긴 형상에 따라 나는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국이라 하여 비안낙지(飛雁落地)라 하고, 또 승려가 예불을 드리는 형국이라 하여 호승예불(胡僧禮佛)이라고도 한다. 또한 뒷산이 마치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흥룡동(興龍洞)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마을 뒷산의 큰 바위의 형상이 지아비 같다 하여 부암(夫岩)이라 하고, 이를 따라 夫山里 라고도 하였다. 이곳 夫岩은 억불산 며느리바위를 바라다보고 있어 망부암(望婦岩)이라고도 한다.
1914년 용계면의 일부가 합하여 현재의 부산면이 되기 전까지 부산방(夫山坊)의 치소가 이곳에 있었고 마을 이름도 흥룡동 혹은 부산리라 하였으나, 행정개편 이후 내안리 내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예전 번성기에 120여호 500여명이 거주하는 대촌 이었지만, 지금은 45호에 10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2) 연혁
내동마을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고려말기에는 위쪽은 공(孔)씨가 아래쪽은 장(張)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나 ,근거는 없고, 다만 마을주변 산에 장씨묘가 몇 기 있을 뿐이다.
정묘지(1747년)에는 흥룡동이라 하였고, 영광김씨와 홍덕장씨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경술지(1910년)에는 내동이라 하여 영광김씨, 홍덕장씨, 김해김씨, 남평문씨, 장흥위씨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광김씨(靈光金氏)가 흥룡동에 터를 잡고 세거한 것은, 기록에 근거하여 볼 때(그 이전일 수도 있다.), 조선조 단종 3년(1455년)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世祖)이 계유정란(癸酉靖亂)후 집권할 무렵, 입향조(入鄕祖)이며 세종조때 평강현감(平康縣監)과 이조참판(吏曺參判)을 지낸 경의(敬義)와 그의 큰 아들이며 의성현감(義城縣監)을 지낸 찬(瓚), 그리고 조선조 세종(1447년) 30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당시에 집현전 학자와 함께 이조랑청(吏曺郞廳)및 사인(舍人)으로 재직중이던 둘째 아들 필(筆)이 세조(世祖) 옹립에 불복하고 단종조(서기1453년)에 이곳 장흥으로 낙남(落南)하면수 부터다. 이후 이 마을을 중심으로 靈光金氏 집성촌을 이루고, 영광김씨 장흥파(靈光金氏 長興派)가 번성하게 된 것이다.
3) 마을의 지명들
내동마을 뒷 산맥인 수리봉에서 수인산으로 거룡하는 용맥에는 필봉(筆峯), 탕건봉(宕巾峯), 가마봉과 부암(夫岩), 몰(말)탄바위, 호랑이바위, 두꺼비 바위, 등이 있고 아래쪽 마을 뒤편으로는 노적(露積)을 쌓아 놓은 듯한 노적봉(露積峯)이 있어 추석날 저녁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보름달맞이를 했던 곳이다.
이중에서 부암(夫岩)바위는 내동마을을 중심으로 서북쪽 반자골 뒷 산등성(해발 약380m지점)에 높이가 약15m 쯤 되는 큰 바위의 형상이 마치 지아비 같다 하여 부암(夫岩) 이라고 하며, 흔히들 내동마을에서는 “지애비 바우”(멀리 떠난 부인를 기다리고 서있는 지애비 같이 생겼다)라고 불린다.
이곳의 夫岩이 장흥읍 억불산의 며느리바위를 바라보고 있어 망부암(望婦岩)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이 바위가 건강한 남성의 만근(滿根)형상으로 생겼다고 해서 부암(夫岩)이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뒷산에 夫岩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내동을 夫山里라고 하였다.1914년 용계면의 일부가 합하여 부산면이 되기 전까지 부산방(夫山坊)의 치소(면소재지격임)가 이곳에 있었기에 부산면의 명칭도 여기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내동 마을은 뒷산맥을 아래로 서당골과 반자골이 있다. 서당골은 부산면 내안리 산28-1번지인 몰탄바위 밑에 반야암(般若菴)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이절이 폐사 되자 영광김씨 서재로 운영되면서 서당골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그 후 소실되어 지금도 암자의 주춧돌과 깨어진 기와장이 있고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내동 마을의 뜻 깊은 지명으로는,
= 각시-둠벙(내동 복판에 있는 연못으로 각시가 빠졌다함)
= 구시-둠벙(소 먹이를 주는 구유와 닮은 연못)
= 도깨비보(날이 굿으면 도깨비가 나온다는 보)
3. 마을의 문화유적 유물
1) 흥룡단(興龍壇), 부산면 내안리 835번지에 있으며, 동학때 수성군 의병장으로 싸우다 순절한 오남 김한섭과 중암 김평묵의 학덕과 순절을 기리기 위하여 배향한 단터이다.
2) 반야암터, 부산면 내안리 산28-1번지에 있다.
조선조 후기에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유지만 남아있지만 반야암(般若菴)과 서재(일명 興龍齋)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물탄바위 밑에 수인사의 말사로 여겨지는 절이 있었다 한다. 이절이 폐사되자 영광김씨 서재로 운영되다가 불에 타 없어졌다. 지금도 암자의 주춧돌과 깨어진 기와장이 있고 우물이 그대로 있다.
3) 오래된 고택
영광김씨 화수정(花樹亭,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며 내부에는 6장의 현판이 걸려 있다. 영광김씨 제실로 약 27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영광김씨 영모재(永慕齋),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안곡에 있으며 영광김씨의 제실이다)
김기홍씨 사당(家廟, 1칸 배집으로 건립연대는 약 200년이다. 장흥에 있는 사당중에서는 유일하게 벽화가 있다.)
원모재, (내안리 628번지에 소재, 상자전(箱子殿) 참봉 김활(金活)의 제각, 해방 후 인곡(仁谷) 김정채(金正采) 선생이 후학을 위해 강학하던 서재. 인곡 김정채는 현 전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성대학 동양 철학과 교수로 50년~51년도에 재직) 등이 현존해 있다.
또한 중국 한나라때 역사서인 한전(漢鐫)3권을 비롯하여 사기평림(史記評林,중국의 고대역사서)28권, 학남집을 비롯하여 오남집 7권, 월봉실기1권, 지운집 3권 등 많은 고문 고서가 보관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4) 역사유적, 백제 초기의 석실묘와, 사장거리 고인돌, 마을입구의 영광김씨 세장비(世庄碑), 북동쪽 평지등 2개의 고인돌군이 있다. 사장거리의 고인돌군은 병아리 바위라 불리워 왔으며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마을입구의 고인돌군은 많이 파괴된 상태다.
또한 마을 입구에 있는 인곡 김정채선생 유적비(1982년 문제자들이 건립,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이 찬하고 문인 고영완이 씀, 연고자 김기홍)
열부 청풍김씨 행적비(1993년에 건립, 영광김씨 처식(處植)의 처로 열행이 독실하여 향천으로 장흥읍지에 등재되어 있음, 연고자 김중구)가 있다.
고싸움과 줄다리기 - 옛날에 정월 대보름이 되면 집집마다 짚을 거두어 고줄을 들이고 인접 접경지인 장흥읍의 기양, 예양, 신흥, 남동, 동동, 주민들과 부산면의 내동, 자미, 용두, 유랑, 용동 주민들이 편을 갈라 고싸움과 줄다리기를 하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를 하였다. 현재는 고싸움과 줄다리기는 우리군의 문화제 행사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는 형편이다.
5) 전승농부가 - 이 마을에는 마을 고유의 농부가 가 전해오고 있다.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내 말을 들어보소
저 건너라 갈비봉에 비가 묻어오는디
허리에다 우장을 두르고 논에 잔지슴을 메어 불거나”
6) 기타 - 신정(新亭)에 병사(兵使)를 지낸 황보겸(皇甫謙)의 묘소가 있다고 전하나 찾기가 어렵다. 풍암 문위세(文緯世)의 초당터라 하여 전해온 곳도 있다.
4. 마을의 인물들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문필가와 인재들이 배출되는 것을 보면 이 마을 서당이 마을의 향학을 장려함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산 중턱의 서당골에 수인사(修仁寺)소속인 ‘반야암’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나, 폐사된 이후 김필 선생이 서당으로 개설하여 월봉 김광원, 진사 방호 김희조, 진사 은암 김몽룡, 학남 김우, 오남 김한섭등 30여명의 문사를 배출하였다.
1) 영광김씨(靈光金氏) 장흥파(長興派) -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태용(台用)을 파조(派祖)로 하는 장흥파(長興派)는 그의 증손(曾孫) 찬(璨)과 필(㻫)이 세종(世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과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각각 지냈는데, 이들 형제는 삼도(三道)의 관찰사(觀察使)등 요직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을 세웠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고 벼슬을 버린 후 장흥(長興)으로 낙남(落南)한 절신으로 이들의 후손들이 오늘날 장흥(長興)지방에 집중세거하고 있다.
필(㻫)의 손자(孫子) 광원(光遠)은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고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벼슬에 천거되어 승문원(承文院)의 습독(習讀)을 지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장흥(長興)의 월봉산(月峰山)에 들어가 학문(學問)과 후진양성으로 일생을 마치니 사람들은 그를 <호남사표(湖南師表)>라 불렀다.
영광 김씨 참판공 김필은 조선 세종 때 의정부 검사사인, 전라도 감찰사, 이조 참판을 지내다 단종때 계유정란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그만두고 낙남하여 지금의 장흥읍 송암리 359번지에 ‘사인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북쪽을 바라보며 주군을 그리며 충절을 지켰다.
2) 전대의 인물로는 김경의(영광, 통정대부 행 평강현감 가선대부 이조참판). 김필(영광, 1401~1449, 경상. 충청. 경기 감사). 김광원(영광, 1478~1550, 이조참판 겸 성균관제주. 시호 문절. 예양서원 향사). 김귀년(영광, 1507~1597, 선교량 의금부도사)등 19분의 수없는 공신이 배출된 마을이다.
또한 1894년(고종 31년)강진에서 동학군이 관아를 습격하자 동료들은 도망가고 없는 관아를 지키기 위해 민중의 추대로 수성장이 되어 성을 지키다 죽음을 당한 김한섭(1838~1894, 자는 致容. 호는 吾南)의 태생지이기도 한다.
3) 현대의 인물로는 김재구(1990년, 육군 중장). 김세옥(1998년, 경찰청장, 현 청와대 경호실장). 김옥채(1996년, 전 전남, 광주농협지부장). 김창남(2001년, 서울 지방 국세청 이사관). 김전근(1998년 판사 현 변호사). 김옥전(2000년 경무관. 전 치안감, 부산 경찰청장). 김기홍(1998년 전 전남대 서기관). 김정길(1980년 경감). 김종대(1990년 해병대령). 김두석(1980년 해군중령). 김홍섭(1987년 육군 중령). 김희태(1998년 도 문화재 전문위원). 김명환(1980년 중등교장). 김준경(1985년 초등교장, 아동문학가, 세종 아동문학상-77년. 대구시 문화상-87년 대한민국 동요대상-96년). 김재훈(1985년 초등교장). 김기성(1998년 인하공대 교수). 김재승(1998년 중등교장). 김석린(현 여수종고 교장). 김중구(현 장흥초등학교 교장). 김정환(전 전남일보 부사장). 김기철(의사). 김태균(의사). 김임규(의사). 김광재(의사). 김현옥, 김현정, 김현(김재승씨의 자제로 3형제가 전문의). 김경옥(의사). 김종구(현 K/T,서울 서부본부국장, 이사관) 남효섭(한의사). 김승환(전북대법대교수, 2009년 헌법학회장)씨 등이 있으며, 현대에 장흥의 한학자로 칭송받는 김태경(2002년 작고, 한학자 전, 장흥향교 전교)의 태생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