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월이라고 말하지 마라 벌써 4월이라고 말하지 마라. 꿀벌은 꽃잎보다도 먼저 깨어나 그 노동(勞動)을 시작하였다. 겨울이라 해서 땅속의 구근(球根)들이 죽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봄을 설계하는 그 건축(建築)은 겨울의 침묵 속에서 마련되었고 삭풍(朔風) 속에서도 수액(樹液)은 4월의 강하(江河)처럼 흘렀더니라.
벌써 4월이라고 말하지 마라. 꽃나무들은 계절(季節)의 통신(通信)을 받지 않고서도 지금 일제히 문(門을) 열었다. 게으른 사람아! 눈을 비벼라. 당신이 홀로 잠에 취해 있을 때, 두더지는 땅 속에서 기어 나오고, 종달새는 이른 아침 구름 위에 떴다. 놀라지 마라. 천지(天地)가 창조(創造)되던 그 날부터 이미 이 4월은 있었느니라. 벌써 4월이라고 말하지 마라. 철새들의 그 민감한 날개는 예언자(예언자)처럼 남해의 바람보다 일찍 이곳에 왔다. 누가 모세의 지팡이를 부러워할 것인가? 당신의 손을 들어 홍해(紅海) 바다가 갈라지듯이, 딱딱한 돌덩어리에서 샘물이 흘러나오듯이 생명의 기적이 쏟아지는 것을 볼 것이다. 참새도 앉지 않던 앵두나무 가지에 꽃이 피는 것을 볼 것이다. 얼음이 녹은 자리에서 입김처럼 서리는 파란 잔디의 새싹들을 볼 것이다. 스케이트를 지치던 웅덩이에서 송사리 떼가 노는 것을 볼 것이다.
영하(零下)의 수은주(水銀柱) 밑에서 억눌리고 억눌려서 다시는 고개를 쳐들 수 없던 온갖 식물들이, 온갖 짐승들이 함성을 지르며 4월의 벌판으로 일제히 집합하는 것을 볼 것이다. 벌써 4월이라고 말하지 마라. 외로운 시인(詩人)들은, 박해받는 시인들은, 돌림받은 시인들은, 꿀벌보다도 먼저 넓은 하늘을 보았으며 철새보다도 일찍이 추운 겨울의 江들을 건너왔느니라. 시인들은 계절(季節)보다도 먼저 부활(復活)했느니라. 벌써 4월이라고 말하지 마라. 시인(詩人)들은 농부(農夫)처럼 이미 자기 밭을 갈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눈짓을 보내지 않아도 안다. 편지를 받지 않아도 안다. 詩人들의 言語는 가장 민감한 철새의 깃털처럼 봄을 예언(豫言)한다. 삼동(三冬)의 벌판 속에서도 씀바귀처럼 생명의 의지는 봄을 부른다. 벌써 4월이라고 말하지 마라. 詩人은 언제나 봄의 生命을 호명(呼名)해 왔느니라. 『문학사상』 1974. 3
이제야 알겠네
四月이 되니까 알겠네. 그토록 아프게 떨리던 가지에 편도화* 멍울들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니 알겠네. 겨울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얼음은 돌이 아니라는 것. 하늘과 땅은 차가운 바람만이 부는 空間이 아니는 것. 窓門은 언제나 닫아두어야만 하는 벽이 아니라는 것. 종달새 소리를 들으니 그것을 알겠네. 정말 알겠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미끄럽고 황량한 겨울 들길을 건너가는 것 일 수는 없지 않겠나. 금제(禁制)하고 명령하고 포복하기 위해서만 두 다리가 뻗쳐있는 것은 아닐 걸세. 외투킷 속으로만 기어들어 가라고 목이 붙어 있는 것은 절대로 절대로 아니라는 말이네.
더러는 웃어야하네. 햇볕이 따사로우면 거지라도 양달에서 이를 잡는 그런 즐거움은 있지 않던가. 꽃들이 눈을 뜨듯이, 대기의 축복 속에서 비록 0.2의 흐린 시선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바라볼 권리가 있는 걸세. 눈치나 보려고, 곁눈질만 하려고, 안경을 쓴 것은 아니라는 걸세. 보기 위해서 더러는 거짓말처럼 행복한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기 위해서 우리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네.
말하지 말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말게. 四月이라고 봄이라고 꽃이 피어 있다고 말하지 말게.
아지랑이는 손으로 만져볼 수도 코로 냄새를 맡을 수도 없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분명 저렇게 꿈틀거리며 존재하는 것이니까 섣불리 말로 증명하려 들지 말게.
움트는 것. 터져 나오는 것. 솟구쳐 오르는 것. 위로 위로 상승(上昇)하는 것. 부풀어 오르는 것. 껍질을 벗는 것. 무엇이든 안에서 겉으로 노출되는 그 힘들. 그런 것들을 사랑해야 할 걸세.
四月이 되니까 알겠네. 우리들의 영혼(靈魂)은 종달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를 수 없지만 편도화 멍울들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니 이제야 정말 알겠네.
『문학사상』, 197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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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1980년에 발간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 조용필 <바람이 전하는 말>1993. 8집 <<허공>>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거야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고독한 순간들을 그렇게들 살다갔느니 착한 당신 외로워도 바람소리라 생각하지마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그 꽃잎 지고나면 낙엽의 연기 타버린 그 재속에 숨어있는 불씨의 추억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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