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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그늘이~~~ 그것은 마음에 생긴 감기 증세였다. 많이 아펐다.
나에게는 일찍 찾아들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생긴 여러 가지 의문들... 그것이 바로 단초였다.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몰랐고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증세는 호전되지 않고 갈수록 수렁이었다. 때로는 학교 운동장을 달려 가 달리기도 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농구와 야구에 심취해 보기도 하였지만 그때뿐이었다. 혼자, 혼자만의 공간에 갇혔을 때가 항상 문제를 자꾸 일으켰다.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할 때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적셨다. 이 시기 무렵 아버님 서가에 정리되어 있는 책에 눈 길이 자주 가게 된다. 서가에는 두 종류의 책이 꽂혀 있었다. 아버님이 모아 놓은 소설책들 김동인의 배 첫 번째 발간된 창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림 위주로 발간된 화보집은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과 일본의 온천과 후지산을 비롯한 산 내용들이었다. 책과 어울리는 그곳의 작은 여행 기념 물건들도 책꽂이 상단에 놓여 있었다. 책들은 아버님의 소장품이고 여행 화보 책들은 어머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두 분이 만나게 딘 동기도 알게 된다. 남대문로에 있던 동쪽 건물에서 아버님은 전력회사에서 근무하시고 서쪽에 있던 금융기관에서 운영하는 도서관 사서직으로 근무하시던 어머님은 우연히 근처 책방에서 만나신 후 동산 방축이라 불리던 청계천 남쪽 둑을 걸어 테이트를 즐기셨단다. 그리고 어쩌다 뚝섬까지 가는 날이 있을 경우 전력회사에서 동시에 운영하는 기동차를 타고 동대문으로 돌아오시는 것이 그날의 테이트 끝이셨단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후 두 분은 화동 4명을 앞세우고 뚝섬에서 놀이배를 빌려 타시고 한강을 가로질러 당시 경기 광주에 속했던 봉은사 대웅전 앞에 서서 혼례를 치르셔서 태어난 칠 형제 중 한 녀석이 바로 나다. 마음에 독감이 들 무렵 아버님의 소장하신 소설책을 통하여 김유정을 만나게 된다. 대부분 그 당시 1920년- 40년대에 발행된 한국 단편들을 섭렵한다. 그 책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나의 삶의 값진 등대 역할해 준 것이다. 혈의 결합은 고유의 인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한 성질은 불변으로 내리내리 전승되어 흔적을 남기며 본모습을 유지한다. 아무리 진화하여도 그 본성만큼은 허물 수 없는 것이다.
최초의 마음 감기 증세는 성장판과 더불어 함께 자라기 시작한다. 해방 전의 책과 해방 이후의 책을 본 후 다시 6.25 동란 후 겪는 시대적 아픔이 녹아 있는 책인 전집류를 사들여 탐독하게 되는데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젊은 느티나무의 사랑 이야기가 인상적이었고 회전목마는 강렬한 우생학적 논리를 전달해 왔다. 이 시기가 지나자 감기 증세는 더욱 깊어져 쇼펜하우어의 자살론을 읽으며 허무주의에 관심을 갖다 다시 야스퍼스의 실존론에 힘 입어 간신히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어서 서양철학서와 동양종교서적에 매달리는데 특히 법구경은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세속에 묻혀 살며 동경하던 피안의 저 너머는 아직도 미열로 달래고 있는 중이다. 누구나 생명을 지닌 자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누군 그 흔적이 너무 무거워 남길 수 없다 하지만 싫든 좋든 자신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흔적을 집성해 놓는 것이 바로 평전(評傳)이란 이름의 책이다. 나의 흔적은 나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바로 나의 평전이 되는 것이다. 문자나 그림으로 남기지 않아도 마음으로나마 정리하여 준비한 후 훗날 별리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유언으로 남기는 것이 생명의 도리가 아닌가 한다.
기분 좋은 환경에서 시작된 문학산책의 시간은 봄 볕처럼 아늑했다. 봄날 가장 봄볕을 가장 즐길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유리창 안에 누운 의자를 펼쳐 놓고 책을 읽다 오수를 즐기는 것이다. 꼭 느낌은 어머님 품 속 같다. 그러한 기분으로 생가에서 작가의 기념회관으로 다시 광장을 지나 작가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전시관으로 그리고 실레길의 한 가지인 금병의숙 느티나무 길과 금병산 전망대 오르는 샛길까지 탐방한 것은 봄 같은 겨울날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은 동백꽃이 활짝 핀 싸리나무 문 앞마당, 감자 세 알을 전해주는 광경에서 멈춰 버렸다. 이곳에서 두 편의 소설을 간추려 설명하는 영화를 보게 된다.
기억해야 할 자료가 화면에 뜨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살짝 들었다. 모두 섯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종료 후 아무 생각 없이 문학촌을 떠나 실레 이야기 길을 찾아 나선 곳이다. 금병의숙 느티나무와 전망대로 가는 샛길까지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서 김유정역 앞 상가 커피점까지 왔다. 각자 준비해 온 행동식을 털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은 미비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급화되어 갔고 질이 또한 좋아져 갔다. 마시고 먹으며 문학산책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었다. 시간이 갈수록 깊이 빠져 있다가 된서리를 맞은 것은 핸드폰 영향 때문이었다. 나의 핸드폰이 사라진 것이다.
요즈음 세상에 나의 분신은 바로 핸드폰이다. 나를 디지털화하여 압축시켜 놓은 것이 바로 핸드폰이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것을 털어 내려면 핸드폰을 털면 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며 누구와 어울리고 무엇을 사고..... 나의 무엇의 대답은? 모두 핸드폰에 농축되어 있다. 나를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는 흉기를 나 스스로 좋다고 한 시도 놓지 않고 사는 것이 바로 현대인들이다. 얼마나 바보짓인가! 공포가 밀려왔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통신사와 통화다. 여기부터 장애가 생긴다. 연락할 수단이 전화기인데 분실하였으니 타인의 전화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만약 혼자라면... 생각만 하여도 아득해진다. 신속을 요구하는 일인데.... 타인에게 빌려?? 녹녹하지 않다. 동행자가 있어 다행이다. 기억해야 할 자료가 화면에 뜨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살짝 들었다. 모두 섯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종료 후 아무 생각없이 문학촌을 떠나 실레 이야기 길을 찾아 나선 곳이다. 금병의숙 느티나무와 전망대로 가는 샛길 까지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서 김유정역 앞 상가 커피점까지 왔다. 각자 준비해 온 행동식을 털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은 미비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급화 되어 갔고 질이 또한 좋아져갔다. 마시고 먹으며 문학산책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었다. 시간이 갈수록 깊이 빠져 있다가 된서리를 맞은 것은 핸드폰 영향 때문이었다. 나의 핸드폰이 사라진 것이다.
요즈음 세상에 나의 분신은 바로 핸폰이다. 나를 디지털화하여 압축 시켜 놓은 것이 바로 핸드폰이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것을 털어 내려면 핸드폰을 털면 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하며 누구와 어울리고 무엇을 사고 ..... 나의 무엇의 대답은? 모두ㅡ 핸폰에 농축되어 있다. 나를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는 흉기를 내 스스로 좋다고 한 시도 놓지 않고 사는 것이 바로 현대인들이다. 얼마나 바보짓인가! 공포가 밀려 왔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통신사와 통화다. 여기부터 장애가 생긴다. 연락할 수단이 전화기인데 분실하였으니 타인의 전화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만약 혼자라면... 생각만하여도 아득해 진다. 신속을 요구하는 일인데.... 타인에게 빌려?? 녹녹하지 않다. 동행자가 있어 다행이다. 이래저래 혼자는 디지털시대지만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참 많다. 그래 인간은 적어도 함께라는 공동체 인식 안에서 진화되어야 멸종을 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114와 연결하여 발신을 제한하고 수신만 남겨 놓은 상태에서 위치 추적을 시도하였지만 복잡한 과정이 자꾸 말썽을 일으켜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생각과 기억을 중심으로 핸드폰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결과는 영화를 보면서 빈 옆자리 의자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극장 마감시간 직전이라 관람객이 없었다는 사실이 희망을 주었다. 동행인들에게 민폐의 긴 그림자를 안겨주고 상봉역으로 원점회귀, 해산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위로의 저녁식사를 준비하겠다 하여 함께 몇 번 찾아갔던 식당으로 안내 저녁 만찬을 즐기다 다시 역으로 그리고 선로 위 전철 안에서 안녕의 인사를 나눔 하고 이별하였다.
분실 사실을 확인하고 슬퍼하는 핸드폰의 주인 모습! 그래도 슬픔과 교차되는 희망의 꿈을 V자로 연출하는 모습이 더 겹다.
다음날 아침! 모든 것을 바쁘게 움직였다. 폰이 없으니 묵은 손 노트를 꺼내고 사용을 중지한 핸드폰을 다시 꺼내 충전을 한 후 그 속에 남아 있는 주소록을 찾았다. 그리고 도청에 근무하는 고위직 후배를 찾아 문화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사무관을 소개받았다. 여차저차 어쩌고 저쩌고~~ 충분하게 연락을 취한 후 반은 안심하고 있던 차 급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 분실 지역 관계자와 통화가 되었고 분실 지역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자 5분 후 재통화를 요청해 왔다, 책상 위 일반 전화기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전 화밸이 울렸다. 찾았다는 전갈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찾으러 올라가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찰칵~! 그래서 단독 재 문학산책 길이 생긴 것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책과 커피와 소품을 챙긴 후 카메라도 챙겼다. 소풍 가듯 집을 나선 것 이다.
혼잡은 잠깐
자기 자리를 잡자
다들 자기 자리가 꽃자리다.
심심풀이로
모습을 꽃으로 환생시켰다.
장미꽃이 건너에 피었고
옆으로 수선화와 앵초가
가지런하다
혼자 핀 해바라기는
창 너머 들판에 기대었다.
그사이 열차는 섰다
찾아 가 수인사를 나누고 목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등을 돌려 나왔다. 볕은 어제처럼 봄볕이었다. 공연 광장을 가로질러 동으로 난 길을 찾아 올랐다. 시루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잠시 서서 갈 길을 살펴보았다. 민가 끝 자락에 새 길이 보였다. 분명 여염집을 위한 길이 아니었다. 외지인을 위한 길이 분명하였다. 새로 난 길이 분명하였다. 마음이 앞서면 그곳은 길이 생기기 마련이다. 열린 개천은 얼지 않았다. 물소리가 정겹게 다가온다. 물소리는 이상하게도 사람 걸음을 탐하며 따라온다. 걸음에 음률이 실려 그런지 가볍다. 그 리듬을 훼방 놓은 것은 개 짖는 소리였다. 여러 마리 진도견이 무겁고 질긴 쇠사슬로 포승 당한채 짖고 있었다. 일단 그 모습에 안도하게 된다. 성큼성큼
나무 계단을 오르자 여자 노인이 계단 가장자리에 앉아 해바라기 중이다. 귀를 후벼 파는 모습을 보고 발걸음에 긴장이 든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자 큰 건물이 나왔다. 옛적엔 없던 건물이 들어 선 곳이다.
책과 인쇄라는 옥호가 눈길을 끈다. 김유정이 불러 들인 시설이 분명하였다. 실레마을은 김유정이 먹여 살린다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주차장과 정원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음악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자세한 견학은 뒤날로 미루고 산으로 접근하기로 하였다. 몇개의 무덤을 지나고 원창고개 마루방향으로 틀어 산으로 다가 갔다.
허접한 농막을 벗어나자 비로서 소나무 숲이 나온다.
인간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하늘의 뜻을 지니고 있다. 창조적인 질서 혜택은 결국 인간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이를 증명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나의 들숨에서 들어있는 산소는 나무의 날숨에서 만들어 지고 나무가 광합성으로 몸전체를 키우는 것은 나의 날숨에 들어 있는 이산화탄소를 나무가 들숨으로 흡수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일심동체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다. 자연이 바로 나의 몸이다. 이러한 자각이 있어야 자연과 완성된 교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생명체에게는 무엇 보다도 각자 필요한 공기가 중요하다. 내가 버리는 것을 마시고 내가 마실 것을 주는 관계 구성은 창조성이 아니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이 글을 좋아 했다. 천지동근(天地同根) 일심동체(一心同體) 같은 뿌리이며 같은 마음이 바로 자연과 인간관계다. 이 자각이 우선되었을 때 인간은 자연과 교감이 가능한 것이다.
실레이야기 길 중
1번 지점의 명칭은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 길이다. - 들병이란? 술을 담은 병에 볏짚을 싸매고 다니면서 술을 팔던 아낙을 이야기 한다. 남편에게 장애가 있거나 사고로 직업을 갖을 수 없을 때 아낙은 남편을 이끌고 타지를 떠돌며 술을 팔아 생계를 책임졌다. 인제나 홍천에서 이 산길을 넘어 들병이들이 마을로 들어 왔다. 유정도 옥주와 사랑 고백도 짝사랑으로 끝나고 형의 행실로 인하여 가세가 몰락하여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었고 숙식 또한 시집간 누이에게 얹혀 살아야 하는 절박감속에 귀향하여 한 동안 들병이들과 어울려 지냈었다. 그러한 일들은 경험이 되어 그의 작품속 곳곳에 그려졌다.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아내, 소낙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나는 이곳에 서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들병이들이 다녀 간 후 마을에는 많은 이야기 꺼리가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유정은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이야기를 풀어 소설을 쓴 것이다.
잠시 묵상중에 있다 다시 길을 열었다. 낙엽송이 버린 솔가지가 수북하여 발바닥 촉감이 부드러웠다.
안내판을 깃점으로 길을 두 갈래로 열린다 직선 길로 올라가면 병금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그렇지 구비길을 돌고 돌아 나가면 실레 이야기길로 이어 걷는 길이다. 이 길을 곧장 오르면 소설제목을 따라 걷는 길이 된다. 이야기길을 따라 걸어도 전망대 지나 50m 정도 오르막을 오르면 정상으로 가는 길을 또 만날 수 있다. 북사면 길이라 가파름 보다는 휘돌아 나가는 멋이 깃들어 있는 산길이다. 그래 걷기가 편하다.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시루형태의 지형이 아름답지만 난개발이 이어져 보기 흉한 곳이 많아 김유정의 감성과 뒤틀린 곳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실레마을 전체가 문학적 환경이 살아나려면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재정적 지원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옛 모습을 재현하고 그곳에서 살아 가는 사람들이 거주하려면은 일정 행정의 도움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길을 열었다.
우리나라 산의 지형은 동고서저(東高西低) 형이다. 동쪽은 가파르고 짧고 서쪽은 길고 완만하며 물 길이 있어 사람들은 그 주변에 몰려 살아왔다. 이에 반해 북쪽은 빛이 적어 산세가 일정하고 수목도 허술한 편이다. 반면에 남사면은 늘 수목의 종류도 다양하고 숲의 구성도 우거진다. 그리고 지맥은 남쪽으로 발달되어 있다. 금병산도 비슷한 조건이다. 대부분 육산으로 오르고 내리는 산 길이 조급하지 않고 적당한 구배라 걷기에 편하다. 담숨에 오르 내리며 걷다 보니 한 고개를 넘는 것이 재미가 있는 편이다. 단 눈이 쌓여 있고 서릿발이 지층을 뚫고 솟아 오른 것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두번 째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에 들어 섰다. 가난한 부부가 겨드랑에 날개가 달린 아이를 낳자 마을사람들은 나쁜일이 생기다면 아이의 날개를 짤라버리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리고 함께 태어난 용마도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길이다. 김유정의 두포전이라는작품에 있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김유정 집필하다 숨을 거둬 미완으로 남았으나 동화작가인 현덕이란 친구의 집필에 의하여 완성된다. 현덕은 김유정이 창신동, 신당동, 효제동 등으로 전전할 때 악화되는 병을 고쳐 주려고 늘 찾아와 위로 해주던 문우였다. 서울을 떠나 누이가 살던 광주 중부면 상산곡동 100번지로 옮겨 갈 때 배웅해 주었고 유정의 죽음을 고교동창인 안희남에게 알린 사람도 현덕이었다. 이 사람은 후에 월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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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난간이 없었는데 새로설치한 곳도 있고 이정표도 새롭게 설치하려는지 기초를 만들어 놓은 곳이 여러곳 있었다.
이 언덕받이를 넘어서면 산국농장 금병도원길이다.
옛적에 이 길로 다녔던 길인데 이제는 사유지라는 이유로 막아 버렸다.
이 길은 동백꽃과 유정의 사랑의 작품 배경이다. 산지기 시인 김희목이 가꾸는 과일밭이다.
이 곳에서 문학촌 마을까지 1.7km 이고 전망대 가지는 1.5km 이다.
김유정이 말하는 동백꽃은 남녘에서 피는 동백꽃이 아니다. 알싸하고 향깃한 냄새가 나는 노란색 생강나무 꽃이다. 강원도에선 이 꽃을 동박이 꽃 또는 동백꽃이라 부르는 것이다. 봄을 부르며 피는 이유는 같으니 첩첩산골에 살던 산촌 사람들은 迎春(영춘) 맞이 꽃으로 생강나무를 동백이라 부른 것이다.
5.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 길은 19살 산골 나드네가 병든 남편을 몰래 물레방앗간에 숨겨 놓고 노총각 덕돌이와 위장 결혼했다가 도망간 이야기가 깃든 길이다. 소설의 제목은 산골 나그네다. 들병이들의 전형적인 이야기 소설이다. 문학관이란 이름으로 모방속국에서 드라마로 제작하여 80년 대초 방영한 적이 있다. 일찍 타계한 남성 탈렌트의 명연기가 이 드라마를 빛내었고 그 상대역으로 미모의 배우 정윤희가 열연을 했었다.
이 비탈길만 올라 서면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를 새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망이 웃자란 나무들이 막아버려 조망할 수 없었다. 말로만 전망대다. 전망대 기능을 볼 수 없는 곳이다. 시계를 열어 주려면 전지작업은 필수다. 그리고 주변에 속성으로 자라는 나무를 심어 운치를 정돈해야 야 하는데...... 너무 형식적이다. 겨우 보이는 것은
얼마전에 들어 선 책과 인쇄 건물이다. 시선이 투명해야 올바른 전망대다. 이 앞에 나무들을 전지해 주어 시선을 도와야 한다. 해마다 그렇게 하려면 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럴바에 침엽수를 심어 웃자란 후 가지만 제대로 쳐주면 늘 시계도 열리면서 운치를 더 해주니 일석 이조가 된다.
흙의 색이 참 곱다. 토양이 생활환경을 만든다 했던가! 흙의 모양과 성질따라 그 곳에 살아가는 인성도 흙을 닮아간는 것이 바로 민족성이 된다. 사막은 기회을 늘 엿보고 극복을 하는 삶을 주기에 .... 사계절에 정주하며 살아 가는 농토형 민족들은 안주하는 성격들이라 외방인들과 다투거나 침략의 의도를 거부한다. 소통이 없으니 대처방법도 몰라 결국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하는 이유는 식민지 시대에 살던 지식인들 고뇌가 근대문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산허리 아래를 쓸적보며 걸음에 힘을 보태어 주었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6.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이 나온다 유정의 소설 가을에서 복만이가 소장수 황거풍에게 매매계약서를 쓰고 아내를 팔아 먹은 후 덕냉이로 도망치던 오갯길이다.
이곳에서 길은 삼거리 길로 바뀐다. 좌측으로 돌아 올라가면 2.73km 걸어 가면 금병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소요시간은 약 1시간10분에서 20분 정도 소요된다. 그리고 중1리로 내려가 실레마을을 지나 문학촌까지 가려면 시간은 약3km로서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복만이 고갯길에서 5분정도 내려 서면 중 1리로 바로 내려 갈 수 있는 샛길이 있다. 어제 탐방했던 지점이 나온다.
샛길로 가는 이정표 앞에서 잠시 망서렸다. 갈까? 말까? 하루사이 다시 찾은 문학촌 탐방 조금은 피곤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홀가분하게 정리한 후 내리막 길을 선택하고 유유작적 내려 걸었다. 이제부터는 전부 내리막 길이다.
유정의 소설 소낙비에서 춘호처가 도라지, 더덕을 찾아 맨발로 짚신을 끌며 돈 이원을 마련할 궁리하던 길이다. 이곳에서 전철에서 만난 사람들과 조우한다. 이것저것 물어와 이곳으로 오르는게 좋다고 했더니 올라 오고 있었다. 문학관을 전부 탐방하고 오는 중이란다 많은 도움을 주셔서 유익하게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고 반색을 하며 인사를 한다. 손을 들어 앞으로 갈 길에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돌아 섰다.
8. 소설 산골에 나오는 도련님만 생각하는 이쁜이에게 석숭이가 사랑을 고백하던 수작골 길이다.
산신각으로 가는 길에서 잠시 망서렸다. 수아리 저수지에 드는 빛이 아름답게 느껴져 망서린 것이다. 사실 그길은 샛길로서 좁은 길이지만 저수지 풍광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오후 빛이라.... 이 방향으로 가면 산신령 길과 송이 따먹던 송림길은 오늘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수아리 저수지, 오후의 풍광을 마음에 담고 싶었다.여행이나 순례를 하면서 모든 풍광을 안고 떠날 수는 없다. 허접한 추억도 추억이라 치부한다면 그것은 낭비다. 뭉쿨하게 만들었던 서정 감흥적 잔상이 진짜 추억이다. 그런것 한 두개면 족하다. 그것이 바로 대표성을 지닌 마음의 표린이기 때문이다. 고운 옷처럼 마음에 부드럽고 고운 자태가 수놓아지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아주 잔잔한 행복이다. 이처럼 고운 풍광이 느껴지는 수아리 저수지~~ 풍광이 좋은 곳이다.
누군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근년들어 조상들에게 안식의 터로 선물해 버렸다. 가장 좋은 장소에....벌써 마음을 떠난 몸은 수이리로 가는 송림 사이로 접어 들었다.
송림 사이를 벗어나자 수아리 저수지 풍경이 차 오른다. 역시 잘 결정한 일이었다.
반영과 명암. 그리고 빈가지에 홀로 걸린 낙엽이 힘들게 살던 말년에 유정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유정은 갈곳이 없어 광주 중부면 상산곡동 100번지 누이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 머물며 안회남에게 편지를 보낸다. 1936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김유정은 형수가 사는 단칸 셋방에 함께 살며 폐결핵이 더욱 악화되어 고생하였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매형 유세준(다섯째 누나인 김유흥의 남편)의 집으로 내려가면서도 자신의 조카 김진수를 데리고 갈 정도로 조카에 대한 애정을 쏟았던 김유정은 죽기 11일 전인 3월 18일에 방안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글을 썼는데, 친구 안회남 앞으로 남긴 「필승전」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김유정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고 있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렬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채리지 않으면 이 몸을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라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둬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허거든 네가 적극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결국 유정의 소원은 이룰 수 없었다.1937년 3월 29일 오전 6시 삶의 끈을 놓는다. 사인은 폐결핵이다. 그의 나이 30세다. 분명 요절이었다. 김유정의 유해는 가족에 의해 광주에서 서울 서대문 밖의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 후 한강에 뿌려진다.
먹먹해진 마음을 추수리고 징검다리 두 개를 건너 뛰었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섰다. 이곳은
11번재 이야기 길로 응오가 자기 논의 벼를 훔치던 수아리 길이다. 실레마을에 있던 유일한 다랭이 논이 있는 곳이다. 유정은 만무방이란 소설에서 체면도 없이 막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것은 아마 친형 유근에 대한 배신감에서 온 어려운 심사를 글로 옮긴 것이 아닌가 한다. 자신의 논의 벼단을 훔치려다 형 응칠에게 걸린 응오의 내용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시작되는 길목이다. 이곳에서 어제 문학소녀들과 함께 다가 갔던 전망대로 가는 샛길을 응시하다 금병의숙 앞으로 다가 갔다.
파란 표시 옆으로 난 계단이 바로 전망대를 질러 가는 길이다.
금병의숙으로 가는 길에 책방을 발견하였다. 역시 유정이 선물한 책방이다. 유관된 시설들이 어울려야 제대로 문학촌 모습이 완성되는 법인데... 이 책방도 내실이 있게 발전하여 실레마을의 한 역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동리 선생은 김유정의 紀績碑(기적비)를 세우며 휘호를 적어 주었다.
김유정 본인은 자신의 고향을 춘천으로 생각하여, 「오월의 산골작이」라는 수필에서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찍굵찍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친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친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아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50호밨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그러나 산천의 풍경으로 따지면 하나 훔잡을 때 없는 귀여운 전원이다. 산에는 기화이초로 바닥을 틀었고 여기저기에 졸졸거리며 내솟는 약수도 맑고 그리고 우리의 머리위에서 골골 거리며 까치와 시비를 하는 노란 꾀꼬리도 좋다.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데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대하면 마치 딴 세상 사람을 보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유정의 고향은 실레마을이라 알고 있지만 달리, 김유정의 셋째 누나였던 김유경은 김유정의 출생지가 서울 진골(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현재 실레마을의 주민들 가운데 김유정이 춘천에서 태어났음을 증언하는 사람은 없다.
느티나무, 동리목이다.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챙기고 끝없이 소통의 장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유정은 이곳에 학교를 인가 받아 교육을 시킨다. 고목은 힘을 잃었는지 긴 볼트를 박아 서로 붙잡아 주고 있었다. 꼭 이런방식을 택해야 하였는지 모르겠다. 나무를 관통하여 ..... 오히려 보호메트를 감싸고 쇠줄을 감아 친후 중간에 조임 조절기를 달아 당겨 놓았다면.... 안타깝다. 이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 목적으로 오래토록 서서 관찰해 두었다. 지름을 확인하고 높이와 둘레도 확인해 두고 여러장의 사진을 찍어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한 후 관리부서에게 민원을 넣어 볼 생각이다. 겨울빛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움추려 들었다. 동시에 허기도 몰려 왔다 해가 더 떨어지기 전에 공소참례를 해야했기에 자리를 이동하였다.
인기척이 없었다. 컹컹컹 개짖는 소리만 정적을 케내고 있었었다. 소리의 뜻이 몹씨 경계의 신호다. 그리고 거부의 의사가 뚜렸하게 느껴졌다. 공소 하나만 있던 신남역 마을로 들어 가는 초입에 있던 신남공소. 김유정 이야기가 자리를 잡으면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장익주교님은 천주교에 귀의 한다. 부친께서 셩험하신 여러가지 현실적인 혼란에 영향을 입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군부에 정권을 빼앗긴 장면정권~~ 말도 많고 탈도 많았었다.
그분의 아들은 주교가 되어 봄내로 들어와 강원도 북부지역을 사목 지역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다. 그리고 은퇴한 노사제가 되어 실레마을에 정주하셨다. 간간하게 들리는 요즈음 소문, 노환으로 힘들어 하신다는 소식이 들려 왔었다. 사제관 정문 옆에 보면 작은 철제문이 바로 공소 접근로이지만 사제관에서 바로 북쪽으로도 공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다. 늘 그문에는 개그림을 붙여 놓고 개조심이란 표말을 붙여 놓았다. 그만큼 개가 집을 잘 지킨다는 뜻이다. 뵙고 가고 싶어 인 기척을 내어 보았지만 깜깜, 마음 참례만 올리고 돌아 나왔다.
그때 허기가 느껴졌다. 행보가 더 귀한 생각에 때를 잊은 것이다. 어디로 갈까? 그러다 주말에만 늘 다니신다는 식당이 떠올라 그리로 갔다. 주인 아낙은 느릿하면서도 포근한 사람이다. 참모나 어머니같은 기분을 풍기는 사람이다. 공소와 담장이 맞물려 있는 식당이다. 대부분 2인 이상 주문을 받는 메뉴가 많아 선택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여러개의 음식을 시키자 즉시 아낙은 주방에 소리친다. 이왕하는 김에 1인 추가하여 한접시 담아 내드리라 한다. 이래서 사람들이 이 아낙을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리고 소담을 나누다 주교님 안부를 묻자 마침 오늘 점심식사를 하시고 가셨다는 전갈을 준다. 용태에 대하여 묻자 많이 안좋아 보이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식복사가 계시나 주말에는 휴가를 주신다는 주교님,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속으로 언젠가 빠른 시일내에 게획을 잡고 연통을 넣은 후 방문해 인사를 드리려 한다.
첫댓글 김유정 문학관을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못했지만 이글을 보니 더 가보고 싶네요
내 핸드폰과 조우 천만다행이네요 실레마을과 김유정의 빠른 죽음 지금 같았으면 결핵은 병도 아니건만 ~~
마지막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애절하네요
오늘 저녁에는 김유정 문학관 관장과 공적으로 만나요 우리 협회 부지회장인 여성 문인 이십니다
아주 순수하시고 능력있으신 분 이셔요 만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시는 분 중 한분이십니다
그렇군요! 20년도부터 관리권이 강원도청으로 넘어 간다는군요. 지금은 김유정 기념사업회에서 주관했었는데.. 계약만기로 다시 단독 응찰하였다가 다시 포기하는 바람에 위탁관리자가 나타나지 않아 어쩔수 없이 강원도청 문화담당관련협회에서 떠 안았다는군요!. 그리고 참석하지 못한 문학소녀들을 위하여 다시 한번 더 할 계확도 있습니다.
찬미예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