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니니, 아폴로와 다프네, 1622-1651년 경, 보르게제 미술관
아폴로의 슬픈 사랑
로마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4대강의 분수> 조각이 있는 나보나 광장을 가보았을 것이다. 이곳은 광장 주변의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거나 젤라토를 먹으면서 쉴 수 있는 명소의 하나다. 그런데 이 광장 한 복판에 있는 조각들이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년경) 라는 걸출한 조각가가 제작한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서 네 개의 강은 다뉴브, 갠지스, 나일, 그리고 라플라타 강을 의미하는데 각각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의미한다. 각각의 강은 네 명의 역동적이고 건장한 인체로 표현되었고 중앙에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분수의 물은 오벨리스크를 지탱하는 돌 밑에 있는 일종의 물탱크에서 공급되는데 당시로서는 어려운 기술이었고, 이 조각을 의뢰한 교황 이노첸트 10세는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베르니니는 당시 최고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였다. 국가의 힘이 커지고 지식이 보급되고 신대륙을 발견하는 등 격동의 시기였던 바로크시대에는 미술도 감정적이고 화려하고 격렬한 운동감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잘 부응했던 미술가가 베르니니였다. 베르니니는 젊었을 때부터 열정적인 감각과 역동적인 표현으로 미술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는 극적인 한 순간의 포착에 뛰어났는데 그런 의미에서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變身, Metamorphosis)>에 나오는 “아폴로와 다프네”는 그의 예술가적인 재능을 가장 잘 발휘하게 한 소재였다. 아폴로 신과 다프네의 이야기는 사랑의 신 큐피드의 화살에서 시작된다. 큐피드는 아폴로에게 황금빛 화살을 쏘아 아름다운 요정 다프네를 사랑하게 한다. 그러나 다프네는 큐피드가 쏜 납 화살을 맞아 아폴로의 구애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마술에 걸렸다. 아폴로가 다프네를 쫓아가 손이 거의 몸에 닫는 순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게 된 다프네는 강(江)의 신인 아버지 페네오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고 페네오스는 다프네를 월계수로 변하게 한다. 아폴로는 눈앞에서 다프네의 머리카락의 일부가 이미 이파리가 있는 나뭇가지로 변하고 발은 뿌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있다.
<아폴로와 다프네>의 감동은 이러한 슬픈 사랑의 서술보다는 조각 자체의 아름다움에서 온다. 피부, 나무껍질과 옷자락의 섬세한 묘사와 같은 조각기술의 극치는 실제 여성의 신체가 우리 눈앞에서 나무로 변신하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사실감을 준다. 두 남녀의 몸은 왼쪽에서 오른쪽 위로 향하는 대각선으로 공간을 침투한다. 인체와 인체 사이, 즉 아폴로와 다프네의 팔과 다리사이의 빈 공간도 절묘하게 엮어져 있다. 보는 사람의 시점은 아폴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정면의 약간 오른 쪽으로 계산되어 있다.
이 조각의 제작을 부탁한 사람은 바로 스키피오네 보르게제 추기경이었다. 그는 추기경 입장에서는 매우 세속적인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아폴로와 다프네>를 로마에 있는 자신의 개인 빌라에 놓고 감상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동성애자였다고 한다. 감각적인 남녀, 그리고 욕망의 좌절과 절망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그의 억압된 성향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빌라는 현재 보르게제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베르니니의 "4대 강의 분수"가 있는 나보나 광장, 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