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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해상 팽창
Ⅰ. Estado : Portugal의 해외 거점 제국
1. Portugal
Portugal의 역사
Portugal의 선산시대는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와 함께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의 흔적은 약 2만 4,500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자취"가 공존하는 크로마뇽인으로, 이는 두 종 사이의 혼혈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또한 네안데르탈인의 특징이 드러나는 가장 최근의 흔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도 해당 종의 마지막 개체일 것으로 추정된다. 약 서기 5500년 전에는 중석기 문화가 나타났다. 신석기 시대에는 갈라이키족, 루시타니족,코니족과 같은 부족들의 기원인 선켈트족과 켈트족이 점령하였고,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이 체류하였다.로마인들은 기원전 45년 이후 처음 이 지역을 루시타니아로써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고 비리아투를 우두머리로 한 저항을 진압한 뒤, 도루강 북쪽의 갈라이키아(Gallaecia)를 세웠다. 로마는 포르투갈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라틴어는 포르투갈어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서기 406년부터 이베리아 반도로 반달족,부리족과 같은게르만족이 침공하였다. 이 중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은 이 지역에 첫 기독교 왕국을 세운다. 711년 무어인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해 알안달루스를 세웠다. 기독교도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쪽으로 모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운다. 레콩키스타중인 868년포르투갈 백국이 성립된다.
오늘날 포르투갈의 국경 안에 포함된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거주해 왔다.갈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 같은 켈트인들은 후에 로마 공화정에 통합되었고, 이후 수에비족과 서고트족같은 게르만족이 정착하였다. 8세기부터는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기독교도의 헤콩키스타 도중에 초기엔 갈리시아 왕국, 후엔 레온 왕국의 일부로 포르투칼레 백국(Condado de Portucale 혹은 Condado Portucalense)이 성립된다. 1139년 포르투갈 왕국의 성립과 1143년 독립 승인, 1249년 국경의 확립을 통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국가로 거듭난다.
알안달루스(Al-Andalus. 711~1492) 무어인들(Moors. Morocco에 사는 회교 인종)이 세운 나라. 스페인 최남단, 우엘바·카디스·세비야·말라가·코르도바·하엔·그라나다·알메리아 주 일대를 부르는 옛 이름. 고대 로마의 바에티카 속주와 대략 일치하는 지역으로 1492년에 카스티야(Castile) 그리스도교 왕국에 병합(병합. annexation)되었다. 아랍식 이름인 '알안달루스'는 원래 8세기에 스페인을 정복했던 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 대해 붙였던 이름이었으며, 5세기에 스페인을 침공했던 게르만계 부족인 반달족의 국가를 의미했다. 11세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할 무렵 '알안달루스'라는 이름은 그때까지 이슬람교도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을 가리켰는데 이후 이 지역을 알안달루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Originally an eastern county of the kingdom of León, in the 11th century, Castile became an independent realm with its capital at Burgos. The County of Castile, which originally included most of Burgos and parts of Vizcaya, Álava, Cantabria and La Rioja, inated most of the peninsula since the early 8th century.
The capture of Toledo in 1085 added New Castile to the crown's territories, and the battle of Las Navas de Tolosa(1212) heralded the Moors' loss of most of southern Spain. The kingdom of León was integratred in the Crown of Castile in 1230, and the following decades saw the capture of Córdoba(1236), Murcia(1243) and Seville(1248). By the Treaty of Alcaçovas with Portugal on March 6, 1460, the ownership of the Canary Islandswas transferred to Castile.
The dynastic union of Castile and Aragon in 1469, when Ferdinand II of Aragon wed Isabella I of Castile, would eventually lead to the formal creation of Spain as a single entity in 1516 when their grandson Charles V assumed both thrones. See List of Spanish monarchs and Kings of Spain family tree. The Muslim Kingdom of Granada (roughly encompassing the modern day provinces of Granada, Malaga and Almeria) was conquered in 1492, formally passing to the Crown of Castile in that year.
Castile 1065~1479) 수도 : Burgos1516
León (866~1230)
Aragon(1035~1479)
2. Portugal의 식민 제국 건설
가. 전통적 설명
⑴ 지리적으로 유리한 출발점 Europe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출발에 유리했다.
① 1253년부터 레콩키스타(Reconquista. Reconqueat. 8세기부터 Islam 세력의 지배를 받던 the Iberian Penisula(이베리아반도)에서 기독교권이 벌인 국토화복운동)으로 Islam 세력을 축출하고 영토 회복을 완수했으며 해외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여력을 가지게 되었다.
③ 세우타의 점령과 원거리 통상 비결 체득
1415년 the Strait of Gibraltar(지브롤터해협) 남쪽의 Ceuta를 점령하여 원거리 통상의 비결을 터득하고 십자군이라는 공격적 정신이 형성되었다.
⑵ 엔리케(앙리케)왕자의 탐험 여행 열정 고취
생애를 과학적 힝해 팀험과 Portugal의 상업 발전에 헌신한 엔리케왕자(Dom Enrique el Navegador. Henry the Navigator. 1394~1460)는 탐험 여행의 열정 고취시켰다.
나. 새로운 설명
⑴ Portugal은 무시할만한 소국이 아니었다.
중세에서 문예부흥기까지 유럽사를 주도했던 Venetia를 비교하고 더욱 그렇다.
⑵ 지정학적으로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있었다.
기독교권과 Islam권 경계에 있었다.
① 대서양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고 지중해권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으로 진출하였다.
② 수세기 동안 Islam 국가들과 접촉하여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⑶ 1358년 Lisbon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 아비즈(Aviz. Dinastina de Aviz. João, John I of Portugal1385~1580) 왕조가 들어서고 부르주아 계급이 전면 등장하여 해외 팽창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⑷ 반 몰락한 귀족들이 해외에서 요새를 건설하고 그곳을 지휘하는 인력을 제공했다.
3. Africa에서의 사업 방향
상업 이윤울 찾아 Africa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것 : bourgeois층 지지
Morocco의 군사 정복 추진 : 왕실과 귀족층지지
4. Asia에서의 사업
가, 진입 장벽 참입(무력 외교 power politics)으로 상업 거점 확대
인구 100만병중 해와 유출 인구가 10만명(10%. 남자의 35%)중 많은 수가 사망
나. 오스만 제국에 압박 타격
기존의 후추 교역로인 홍해 루트를 봉쇄하고 적의 적인 Persia 제국(사파비 왕조. Safavid dynasty. 薩非王朝. 1501~1736)과 partnership 맺어 압박: India 서해안의 Goa(1510. Levant로 가는 향신료 시장을 장악한 Gujarat 상인 통제. 총괄 군사 행정의 중심지), Malay 해협의 Malaca(1511. 동쪽으로 중국, 일본, Indonesia, Molaca, 서쪽으로 Bengal만과 인도양 교역 중추 역할), Persia만의 Hormuz(1515. Levant지역과 Persia를 향한 항로 통제) 등지의 상관과 Ceylon의 Colombo 요새(1518. Oman과 Bengal만 사이 교역 통제)가 핵심적인 기능 담당
다 1571년에 이르러 40여개의 상관과 요새 출현
라. 교역방식 : 군주자본주이 방식
⑴ carrreira(카레이라. 국왕선박로)
국왕 계정으로 사업하는 것.
국왕 소유의 선박에 국왕의 상품을 싣고 가서 거래를 하고 이익 역시 국왕에게 돌아간다. 상인과 선원은 임금을 받는 고용인에 불과하다.
⑵ cartaz(카르타스)
폭력을 통해 경제수익을 방식
1502년부터 Portugal 인들이 주요 항로의 길목을 지키면서 그 항로를 지나는 선박에게 안전통행증(safeguard)을 판매하는 것으로 해적행위와 약탈과 같으나 운영 방식을 합리화한 방식이다.
⑶ 조공(朝貢. paréas) 수취
국왕 돔 마누엘 1세(1469~1521)은 1521년 차울에 처음 요새를 건설한 후 2,000금 파고다를 요구했고 야자잎, 사과 열매, 금을 요구했다.
5. 위기와 기회
가. 쇠퇴의 원인
⑴ Asia에 널리 퍼진 기근(饑饉. 飢饉)으로 경기 자체의 불황
⑵ Portugal 상업 체제의 여러 문제
: 북 Africa의 jihad(성전). al – Qasr al – Kabir(알카스르 알카비르)전투에서 패전과 세바스티안 국왕 전사(1578)
⑶과잉 팽창 : 선택과 집중의 문제. 일본의 초기 성공과 중국의 실패
나. 아비즈왕조의 단절과 Spain에의 합병(1580~1640)
우리나라에 표착한 서양인
① 주앙 멘데스
선조 37년 1604년 6월 15일 34세 Portugal 상인 주앙 멘데스(之緩面第愁. 지완면제수)가 통영에 표착했다. 주앙 멘데스(Juan Mendes. 之緩面第愁. 지완면제수)는 당시 Cambodia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무역선을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나 통영 해안에 표착하여 중국인 16명, 일본인 32명, 흑인 1명 등과 함께 조선 수군에 체포되어 당시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던 일번인 통역에 의해 표류 경위 등을 조사를 받았다(비변사 내부문서 謄錄類抄(등록유초. 조선시대 국경수비일지). 이긍익의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
② 벨테브레(朴燕. 朴延. 1595~?)
Jan Janes Weltvree(朴燕. 朴延)은 네덜란드 리프 지방에서 태어나 1626년 홀란디아(Hollandia)호 선원으로 동양에 왔다가 인조 5년 1627년 네덜란드인 우베르케르크(Ouwerkerk)호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동료 선원 히아베르츠(Gijsbertz,D.)·피에테르츠(Pieterz,J.)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조선 관헌에게 잡혀 인조 6년 1628년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뒤 동료 2인과 함께 훈련도감에서 총포의 제작·조종에 종사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훈련도감군을 따라 출전, 분투했고 이 때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는 전사하였으나 벨트브레는 큰 공을 세운다.인조는 벨트브레를 설득해 귀화시켜 훈련도감에 편입시킨다. 1653년(효종 4) 하멜(Hamel, H.) 일행이 표류해 도착했을 때는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으며 이들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병영(兵營)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풍속과 말을 가르쳤다.
큰 키에 노란 머리, 푸른 눈을 지녔으며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견문한 동양 각 국의 풍물과 천기(天氣) 관측에 대해 즐겨 이야기하고, 자주 선악(善惡)과 화복(禍福)의 이치를 말해 도자(道者)와 같은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개신교의 나라 네덜란드 태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서울에서 조선 여자와 혼인해 1남 1녀를 두었는데, 이들의 거취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벨테브레는 조선에서 ‘선악화복(善惡禍福)’을 자주 거론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벨테브레는 전도자는 아니었으나, 신실한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한국으로 귀화해 살았던 사람이다.
③ 하멜
효종 4년 1653년 핸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53)이 제주도에 표착했다.
하멜은 1653년 제주에 표류한 후 약 10개월 동안 제주에서 생활했다. 하멜은 암스테르담 연합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던 스페르웨르호에서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무역을 주도했는데, 비단과 직물, 향신료를 싼 가격에 수입하고 그것을 다시 비싼 가격에 유럽에 팔던 무역회사였다. 스페르웨르호에 실렸던 무역품은 <효종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멜은 자신이 ‘길리시단자’, 즉 크리스천임을 밝혔다. 하멜의 제주 표류 사실을 보고받은 왕은 효종이었다. 당시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란 수습은 물론, 병기 개량을 위한 무기 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
‘박연’으로 이름을 개명한 벨테브레는 훈련도감 관원으로 통역을 위해 제주로 다시 내려온다. 하멜과 만남이 이루어진 벨테브레는 제주가 유배지이며 조선시대 200년 동안 육지 이동을 막은 ‘출륙금지법’으로 나갈 수 없으니, 자신과 같이 귀화하자고 설득하지만 하멜은 박연의 설득을 거부해 한양으로 압송됐고 다시 1656년 전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마침내 1666년 9월에 탈출해 다시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서 하멜표류기(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ie van 't Jacht de Sperwer. The journal of the unfortunate voyage of the jaght the Sperwer. 스페르베르호의 불운한 항해 일지)를 저술하였다.
6. 네덜란드와의 경쟁과 쇠퇴
가. Spain과 병합후 거점 상실
네덜란드와 영국 진입
1612년 시리암 항구 상실 : Myanmar와 India 사이의 교역 및 관세 통제 불가능
1622년 영국 Iran 연합군에게 Hormuz 해협 상실
1632년 후글리 상실 : Bengal과 교역 쇠퇴 및 Asia 내 교역 타격
Ceylon의 칸디 상실 : 네덜란드의 파트너
Goa : 네덜란드에 포위
일본에서 Portugal 상인 축출당함
1641년 네덜란드의 Malaca 점령(결정타)
관세(customs duties, a tariff on imported or exported goods)
1. 관세(customs duties, a tariff on imported or exported goods)의 의의
한 나라의 관세영역(customs territory, customs boundary, customs frontier, 관세선)을 통과하는 물품에 대하여 부과하는 조세
관세영역을 출입하는 물품 등에 대하여 법률이나 조약에 의하여 반대 급부 없이 강제적으로 징수하는 조세를 말한다.
①관세는 재정수입 등을 목적으로 국가가 부과・징수한다.
②관세는 법률 또는 조약에 의하여 부과된다.
③관세는 대물세,간접세,소비세,수시세(임시세)이다.
④관세는 전가된다.
⑤관세는 급전납부를 원칙으로 한다.
⑥관세는 관세영역(customs territory)을 전제로 하여 부과된다.
⑦관세는 자유무역의 장벽이다.
2. 관세의 부과원칙
조세법률주의 : 조약 및 법률(예외 명령에 위임)
3. 관세부과대상
관세영역에 출입하는 모든 물품(수입관세만 부과되고 수출관세 및 통과관세는 부과되지 않는다).
4. 관세부과목적
가. 재정수입의 확보
나. 국내산업의 보호
다. 소비억제
라. 수입대체 및 국제수지개선
국제수지(國際收支. balance of payments, balance of international payments. B.O.P.)
국제수지는 일정한 기간에(¼년[1분기] 또는 보다 통상적으로는 1년에) 한 나라(의 거주자)와 여타 세계의 거주자들간의 모든 경제적 거래의 기록이다(The balance of payments of a country is the record of all economic transactions between the residents of the country and the rest of the world in a particular period (over a quarter of a year or more commonly over a year)).
가. 일정한 기간에(일정한 기간 동안에) : 유량(流量. flows). 통상 1년이나 1년 미만일수도 있고 1년 이상일 수도 있다.
나. 한 나라의 거주자와 여타 세계의 거주자 : 거주(국적)가 문제가 아니라 경제활동의 본거지. residents(거주자) : 자연인과 법인을 포함한 경제 거래 주체
다. 모든 경제적 거래 : 모든 형태의 거래
라. record(기록. 체계적으로 분류한) : 복식부기의 원리에 따라 조직적으로 기록한 것
Ⅱ. 관세의 종류
1. 과세목적
가. 재정관세(revenue duties)
나. 보호관세(protective duties) : 육성관세, 유지관세, 공황관세, 금지관세, 방위관세
2. 관세부과기회
가. 수출관세(export duties)
나. 수입관세(import duties)
다. 통과관세(transit duties)
3. 부과기준
가. 종가세(ad valorem duties
⑴ 수입물품의 가격×세율
⑵ 장단점
① 장점 : 세부담의 공평성, 시장가격의 등락에 관계 없는 과세부담의 균형유지
② 단점 : 복잡한 과세평가의 과정, 동일물품이라도 수출국에 따른 세액 차등
나. 종량세(specific duty)
⒝종량세(specific duties)
⑴ 수입물품의 수량×수량당세액
⑵ 영화용필름, 녹화된 비디오테입
⑶ 장단점
① 장점 : 세부담의 공평성(수출국이 달라도 세액 동일), 시장가격의 등락에 관계 없는 과세부담의 균형유지, 세액산출 용이 및 과세방법 간단,
② 단점 : 복잡한 과세평가의 과정, 동일물품이라도 수출국에 따른 세액 차등(관세부담의 공평 곤란), 인플레이션시 재정수입 확보 곤란
다. 혼합세(mixed duties) : 복합관세(compound tariff)
라. 선택세(alternate duties) : 밤, 은행 대추, 마늘, 참깨 등 63개
4. 관세율의 수
가. 단일세(single duties)
나. 다수세(multi-linear duties)
5. 관세율결정근거
가. 국정관세(national tariff) : 자주관세, 일반관세
⑴ 한 나라가 자국의 법령에 의해서 자주적으로 과하는 관세
⑵ 기본관세, 잠정관세, 탄력관세, 환급에 갈음하는 관세
나. 협정관세(conventional tariff)
⑴ 국가간의 통상조약 또는 관세조약에 의해 부과하는 관세
⑵ 양자협정관세 : 한국과 Chile 및 Singapore, EFTA
⑶ 다자협정관세
① WTO협정 일반양허관세
② WTO협정 개발도상국간 양허관세
③ ESCAP(Economic and Social Commission for Asia and the Pacific,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 개발도상국간 양허관세
1975년 5개 회원국 사이에 체결된 특혜 무역 협정으로 목적은 개발도상국간의 무역확대이며 1975년 한국, 인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라오스 등 5개 회원국 사이에 체결된 특혜 무역 협정이다. 관세, 비관세 장벽 제거를 통해 ‘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 위원회(ESCAP)’ 관할 내 개발도상국간의 무역 확대를 목적으로 현재 회원국간에 특정 품목(총 101개)에 대하여 양허관세(關稅讓許)를 실시하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에 양허관세를 시행하고 있는 품목은 18개로서 시아, 태평양 지역에서는 유일한 국제연합(UN) 산하의 개발도상국 특혜 무역 협정으로서 ESCAP 관할 내에서 한국이 참가하고 있는 유일한 무역협력기구이다.
④ UNCTAD 개발도상국간 특혜무역제도(GSPT)
6. 기타
가. 특혜관세(preferential duties) : 기존(지역) 특혜관세와 일반특혜관세
나. 차별관세(differential duties)
다. 탄력관세(flexible duties) : 행정부가 관세율을 탄력적으로 조정변경
나. America 대륙의 식민화
⑴ 정복(팽창 과정)
Portugal : 상업 지향적
Spain : 정복 지향적. 정복지에 요새화된 도시 건설. 장복자에게 주변 토지 분양
극도의 파괴성 : 살인, 약탈, 전염병. 강제노역
약탈로 업은 부는 다음 탐험 비용으로 충당
Cortez(스) 1519년 Cuba에서 출발하여 본토에 상륙한 다음 해안 지역에 베라크루스라는 도시를 직접 건설하고 총사령관이 된후 더 내륙으로 들어가서 1521년 Azteca 제국을 멸망시켰다.
Pizzaro(1471?-1541))는 1533년 경우 180명의 군인과 27마리의 말을 가지고 수만명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Inca 제국를 멸망시키고 encomienda(엔코미엔다)라는 가족한 조세 조공 체제를 만들어 냈다.
⑵ encomienda(엔코미엔다)
스페인은 자국 출신의 식민통치자에게 원주민 보호를 조건으로 하여 식민지의 토지와 원주민에 대한 통치권 일체를 위탁하는 엔코미엔다(Encomienda)제도를 실시했다. 1503년에 제정된이 제도의 목적은 아메리칸 인디언의 지위를 규정하여 신대륙 발견직후에 행해진 강제 노역의 악습을 줄이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디언을 노예화하는 제도로 악용되었다. 원주민들을 해적이나 적대관계에 있는 부족으로 보호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조공과 노동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이 제도로 인해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보호하고 개종시킨후 종교적으로 교육시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교화를 통한 영혼의 구제와 보호라는 명분을 제공했을뿐이었고, 실질적으로 이 제도는 노동력 착취를 위한 노예제의 또 다른 형태였다. 스페인 군주나 교회는 이 제도를 크게 반기지는 않았는데, 봉건적 구조로 발전하여 세습이 이루어지는 것을 꺼렸으며, 가혹한 노동착취가 가톨릭 윤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 통치 기간 내내 이 제도는 지속되었으며, 18세기 이후에 대토지 소유 제도인 아시엔다(hacienda. 평야지대에 자리잡은 거대한 농장을 뜻하는 단어이나 폭 넓게 대항해시대 중남미에서 대토지 소유제도를 지칭하는 말)가 나타나면서 점차 소멸되었다
7. 수탈에 대한 논쟁
Las Casas(라스 카사스) : 인디안 권리 옹호
Juan Gines de Sepulveda(후안 기네스 새풀베다) : 인디언 지배 합리화
1542년 인디오의 노예화와 가혹한 착취를 규제하는 신법(Leyes Nuevas) 대체
Mexico 핵심부에 대한 정복 : 1520~1570년대 이후 안정화단계(식민지시대)
8. 새로운 Mexico 문화 형성
Spain 문화 +American Indian 문화
다양한 하위 문화(subcultures) 혼재
인종의 혼합
mestizo=Spanish[Portuguese] +American Indians
mulatto=blacks+whites(흑백혼혈아)
sambo=American Indians+blacks
quadroon 백인과 반백인과의 혼혈아(흑인의 피를 1/4를 받은 사람)
octoroon 흔백혼혈아(백인과 quadroon과의 1/8과의 혼혈아. 흑인의 피를 1/8 받음)
tentenelaire(뗀떼넬아이레. 허공에 걸려 있는 사람) quadroon+mulatto
ladino 문화 = 주류 Spain 문화 +일부 American Indian 문화
혼합문화
creole 문화 =Africa 문화 +American Indian 문화
9. 식민지 교역
수출품 : 가축(소, 양, 돼지, 말), 쌀, 밀, 사탕수수, 포도, 커피, 양파, 올리브, 복숭애, 배, 꿀벌, 바나나, 수지(獸脂), indigo, 코치닐, 목재(재목용과 염색용)
수입품 : 칠면조, 호박, pineapple, cacao, 콩, vanilla, 옥수수, tomato, 감자, 따옹, casaba, pigment, 고구마, 담배, 고추
10. 토르데시야스조약(the Treaty of Tordesillas)
스페인과 포르투갈간의 유럽 대륙외 지역에 대한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494년 6월 7일 스페인의토르데시야스에서 맺은조약
제214대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PP. VI,Papa Alessandro VI. 재위 1492.8.11.~1503.8.18)
The Treaty of Tordesilla
s, signed in Tordesillas, Spain on 7 June 1494, and authenticated in Setúbal, Portugal, divided the newly discovered lands outside Europe between the Portuguese Empire and the Spanish Empire(Crown of Castile), along a meridian 370 leagues west of the Cape Verde islands, off the west coast of Africa. That line of demarcation was about halfway between the Cape Verde islands (already Portuguese) and the islands entered by Christopher Columbus on his first voyage (claimed for Castile and León), named in the treaty as Cipangu and Antillia(Cuba and Hispaniola).
Treaty of Zaragoza
Spain과 Portugal 양국은 동남아의 말루쿠 제도(Moluccas)의 귀속을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말루쿠 제도는 당시의 귀중품이었던 향신료의 일대 산지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말루쿠 제도’라고 하는 것은 현대에서 말하는 마크 제도, 부루섬과 스람섬(세람섬)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한 말루쿠 해를 둘러싼 섬도 "말루쿠 제도"로 분류되어 향신료 산지로 유명했다. 물리적인 충돌도 있었으나 양국은 원만히 해결하고자 했다. 1525년에 Portugal 주앙 3세와 Spain 카를로스 1세의 막내 여동생 카타리나와 결혼을 하였고, 1526년에 카를로스 1세는 주앙 3세의 누이 이사벨과 혼인을 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Spain은 외교적 문제와 말루쿠 제도에 파견에 드는 비용과 관리의 어려움 등이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남미 대륙에 대한 탐험과 정복전과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등에서 전쟁으로 많은 군비가 필요하기도 했다. 양국은 협상을 통해 1529년 4월 22일에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하였다. 사라고사 조약은 말루쿠 제도의 동쪽 297.5리그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두 번째 경계로 했다. 이 위치적으로는 부루섬의 동쪽 1425km, 동경 144도 30 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자오선은 뉴기니섬 중앙부를 통과한다. Portugal은 이 조약을 통해 말루쿠 제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는 대신 스페인에게 35만 듀카트를 배상금으로 지급하였다. 이에 따라 Portugal의 마카오의 권익이 승인되었다. 스페인은 호주 전역에 대한 우선권을 획득했지만, Portugal에 의한 조사를 금지한 흔적은 없다. 필리핀은 자오선의 서쪽인데 이 조약에서 Spain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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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즈왕조(House of Aviz)의 시대를 연 주앙((João, John I of Portugal)
On the morning of 21 August 1415, King John I of Portugal led his sons and their assembled forces in a surprise assault that would come to be known as the Conquest of Ceuta. The battle was almost anti-climactic, because the 45,000 men who traveled on 200 Portuguese ships caught the defenders of Ceuta off guard and suffered only eight casualties. By nightfall the town was captured. On the morning of 22 August, Ceuta was in Portuguese hands. Álvaro Vaz de Almada, 1st Count of Avranches was asked to hoist what was to become the flag of Ceuta, which is identical to the flag of Lisbon, but in which the coat of arms derived from that of the Kingdom of Portugal was added to the center; the original Portuguese flag and coat of arms of Ceuta remained unchanged, and the modern-day Ceuta flag features the configuration of the Portuguese shield.
11, 국가와 자본의 결합: 동인도회사에서 제국으로
가.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 East India Company,EIC)는 대항해 시대에 유럽 7개국에서 아시아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세워진 회사들이다.
나. 영국 동인도회사(1600~1858)년 설립
영국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1600~1708), 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1708~1873)는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칙허 회사이다.
설립
1595년 네덜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설립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1600년 12월 31일 특허장을 발급받아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 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제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고 1665년 사원 유한책임제도를 확립하였다.
성장
1656년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 조례 개정 이후 있은 뒤에 찰스 2세시대에 근대식 주식회사로서 확립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는 모든 면에서 연합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VOC)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극심한 갈등관계에 있다가 때로는 평화분위기로 급변하기도 했는데 1619년 양국은 협정을 체결하여 아시아에서 두 회사 간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하고 두 회사의 합병안까지 나왔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4차례 전쟁을 치렀다.
영란전쟁(the Anglo-Dutch Wars)
① 1652~1654
② 1665~1667
③ 1672~1674
④ 1780~1784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 사업은 향료 무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패배하여 17세기말까지는 인도로 후퇴하게 되어,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서부 인도의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었다.(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국의 작가 가일스 밀턴의 저서인 《향료전쟁》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로부터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 이외 강제를 가하였다. 회사는 단순한 기업에 그치지 않고, 내륙 지방에 대한 토지와 주민의 지배를 확대하고, 1765년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1526~1857) 황제로부터 양도받으면서 벵골의 토지 소유자가 되어 인도의 정치 권력자·영토 지배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초창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쟁보다 무역 자체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1600년 설립된 이후 1세기 동안 이사회는 "우리의 사업은 전쟁이 아닌 무역이다"라고 강조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도와의 무역에 주력했는데, 특히 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약하고 유럽의 경쟁국들이 가장 적었던 벵골과 마드라스가 주요한 활동지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근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무력으로 충돌했다. 프랑스는 세포이로 알려진 인도 병사들을 정규군으로 수용하여 전투능력을 증대하면서 영국보다 우위를 점했다. 1750년대 영국 동인도회사도 세포이를 수용했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 두 나라는 각각 10,000명에 달하는 무장한 병력(대부분 인도인들)을 인도해안에 배치했다.
청나라 진출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1759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직원을 베이징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6대황제 건륭제(乾隆帝. 1735년 ~ 1796년)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廈門. 아모이)의 항을 폐항하고 광주항만 개항을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公行)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1780년대부터 청나라와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광둥 무역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공행(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상인의 무역을 제한했다. 또한, 무역 기간이나 물품도 통제하여 유럽 상인들이 별다른 수입을 올리지 못하였다.
해산
1680년대 국왕 챨스 2세가 회사에 대하여 징병권, 사관임명권, 교전권(交戰權) 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이 보강되었다. 경쟁 상대인 신동인도 회사를 합병하고, 로버트 클라이브가 1757년에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서 독자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하에 들어갔다.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 이양 등으로 그 사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832년2월 26일, 동인도 회사는 광주(廣州)에 와 있던 영국인 간첩휴 해밀튼 린제이에 염탐을 시켰다. 그는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호의 선주를 사칭하고, 카를 귀츨라프와 함께 광동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남오(南澳), 하문(廈門), 복주(福州), 영파(寧波), 상해(上海), 위해(威海) 등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경제·군사 정보를 수집하여 영국의 외무대신 헨리 존 템플에게 건네주었다. 7월 22일(음력 6월 25일)에 이 배는 공충도 홍주의 고대도(古代島) 뒷바다에 나타났다. 이 배의 선원들과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는 한자문으로 문답을 나누었다.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는 그 책임을 물어 회사 운영을 정지시켰고, 인도 통치의 기능을 모두 빅토리아 왕에게 헌납하도록 한 다음, 동인도 회사를 1874년에 해산했다.
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602~1799) 1602년 설립
연합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VOC) 흔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Perusahaan Hindia Timur Belanda. 인니어)는 네덜란드에서 인도, 동남아시아지역으로의 경제적 진출을 위해 1602년에 세운 칙허 회사이다. 다국적 기업이며, 처음으로 주식을 발행한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하다.
조선에 억류된 서양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헨드리크 하멜과 얀 야너스 벨테브레도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어 일한 선원이었다.
동인도 회사 설립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본부
네덜란드 상인은 동인도 물산을 리스본에서 발트해 상품과의 교환으로 획득하고 있었는데, 스페인 의 압력으로 물러나게 되자, 동인도와의 직접무역의 기운이 높아져 먼저 1594년 암스테르담에 장거리회사(네덜란드어판)가 설립되었으며, 그 후 동종의 회사 설립과 합병과정을 거쳐 1600년 암스테르담에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연달아 홀란트 등에 약 10개의 동인도 기업회사가 난립했다. 이 때문에 각 기업간의 불이익이 초래되었고 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서도(적에게 타격을 가하고 조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통합이 필요하게 되어 의회의 요구에 따라 동인도 무역의 여러 회사는 160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통합되었다.
독점권 인정
제34조 동인도회사의 독점권 인정
희망봉 동쪽과 마젤란 해협 서쪽 사이에 대한 항해권을 독점권을 인정하고 다른 선박이 어긴 경우 그 선박과 상품을 압수할 것을 규정하였다.
제35조 국가 기능 부여(국가 밖 국가)
내덜란드 전국의회를 대신하여 아시아의 국가 및 영주들과 조약 체결, 전쟁 선포, 요새와 상관 건설, 군인 충원등 국가가 할 수 있는 여러 기능등을 대신할 수 있다.
동양무역의 번성
16세기에는 향료무역을 경영한 포르투갈 인이 몰루카 제도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나, 16세기 말 네덜란드 상인이 자와섬의 반탐에 상관을 열고 개척의 기초를 이룩했다.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자 이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정부는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동양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자카르타)에 총독정청을 두어 포르투갈, 영국세력을 쫓아내고,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량 20여곳에 상관들을 차지하고 내트워크를 구축하고 동양무역에 우월적 지위를 확립하여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하였다.
일본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여 당시 국제 결제 수단이었던 은화의 수입원을 마련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동양 국가들 간의 국제 무역 또한 장악하였다.(로마 가톨릭을 전도를 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과는 달리,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를 탄압하던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를 유일한 거래상대로 여겼다)
점령지역에서는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여 많은 수탈을 행했다. 자와(자바)의 토후를 지배하고,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을 값싼 월급으로 고용했으며,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상품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남방의 향료,커피,쪽(藍),설탕의 획득에는 원주민의 봉건적인 공납이나 약탈이라고 보는게 정확할 매상을 강요하였고, 가장 중요한정향(丁香), 육두구(肉荳蔲)는 생산지를 한정시켜 노예재배제를 실시하였다.
인도의 네덜란드 및 기타 유럽인들의 정착지
회사의 번영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세계적 지위의 상징이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과의 대립에서 점차 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영국세력에게 압도되어 1799년 동인도회사는 해산, 네덜란드 정부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때, 자와는 영국에게 점령되어 래플즈에 의해 식민정책의 대개혁이 단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 다시 네덜란드의 통치가 시작되어 강제재배제가 시행되었다. 즉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번영과 경제적인 회복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뉴기니,발리,보르네오,수마트라등이 네덜란드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갔다.
19세기말부터 원주민의 자각이 높아져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가, 전후 원주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다. Denmark 동인도회사 1616년 설립
덴마크 동인도 회사(Ostindisk Kompagni)는 크리스티안 4세의 특허장에 의해 설립된동인도 회사이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 이어 4번째 동인도 회사이며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라. Portugal 동인도회사 1628년 설립
마. France 동인도회사 1664년 설립
프랑스 동인도 회사(La 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rientales)는 1604년에 설립되었고 1664년 장밥티스트 콜베르에 의하여 재편성되어, 인도 동해안의 찬데르나고르, 퐁디세리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오스트리아계승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Österreichischer Erbfolgekrieg,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0~1748년)은 거의 모든 유럽의 강대국이 얽힌 전쟁이다. 이 전쟁은 여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 법〉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계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각국이 개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때에는 뒤플렉스의 지휘 아래 영국을 압도, 지배지의 인구는 3천만에 달했다.
인도에서 프랑스는 뒤늦게 참여하여 1740년대부터 영국과 본격적인 식민지쟁탈전을 벌였고 두 나라의 동안도회사는 상업 활동 수준을 넘어서 치열한 정치 군사 싸움을 하였다
뒤플렉스 소환 후 7년전쟁때에는 원조한 토후(土侯. 벵골 태수 시라지 웃다 울라군. Siraj –ud- Daulah)가 플라시 전투(the Battle of Plassey.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 토후국과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로 1757년 6월 23일 발발했다. 7년 전쟁(the Seven Years; War. 1756~1763)의 일환이었던 이 전투는 벵골내에서 영국의 주도권을 확실시하게 되었고, 이후 100년간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에서 영국에 패하여 이후 세력을 잃고 1769년에 해산했다.
회사는 해체되었지만, 찬데르나고르, 퐁디세리 등의 무역항들은 1949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유지한다.
바. Sweden 동인도회사1731년 설립
스웨덴 동인도 회사Svenska Ostindiska Companiet)는 1731년에 민간 회사에 의해 설립된 스웨덴의 동인도 회사이다. 주로 중국 (청나라)과의 무역을 중시했다. 또한 조직의 중심이 된 것이, 스코틀랜드 사람이나 네덜란드 사람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스웨덴 동인도 회사가 아니다. 본거지는 예테보리이며, 당시 스웨덴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의 식민지 전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사. Austria 동인도회사 1775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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