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사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과 그 위상
이 논문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천사 김종덕의 학문과 사상 학술대회’(2020.11.17.)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
김지은 金知恩,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목 차
1. 머리말
2. 학문적 관계망의 형성과 특징
3. 퇴계학파 내 김종덕의 역할과 그 위상
4. 맺음말
1. 머리말
2. 학문적 관계망의 형성과 특징
3. 퇴계학파 내 김종덕의 역할과 그 위상
4. 맺음말
요약
천사 김종덕(1724~1797)은 이상정의 문인을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명으로, 평생 학문에 몰두하며 그 학맥 계승을 위해 힘쓴 인물이다. 이 글에서는 천사집川沙集에 남아있는 401통의 편지와 유자정급문록孺子亭及門錄에 수록된 130명의 문인을 중심으로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과 그 특징을 검토해 보았다. 그의 학문적 관계망의 인적 구성원은 이상정 가문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채워졌 으며, 당시 퇴계학맥을 이끌어가던 주요 가문과의 유대를 통해 이는 더욱 확충 되었다. 그 공간적 범위는 안동 의성을 중심으로 퇴계학파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스승으로부터 문인에 이르기 까지 김종덕 학문적 관계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이황’과 ‘이상정’이라는 두 인물이었으며, 이는 그 관계망을 구성하고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1759년 이상정의 문인이 된 것을 계기로 형성된 그의 학문적 관계망은 점차 퇴계학파의 주류로 편입되어 갔으며, 1770년대 후반부터는 학파를 이끌어가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상정의 기대와 신뢰는 그의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상정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자신의 학문적 관계망을 활용해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고, 이를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산집大山集 편찬 을 위한 노력과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의 완성, 이상정의 고산정사高山精舍 향사 享祀 청원 상소운동은 김종덕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과정이 었다. 그리고 이 모든 노력은 마침내 이상정을 이황의 적전嫡傳으로 위치시켜 놓는 결과로 완성되었다.
김종덕은 문인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관계망을 통해서도 학맥계승을 위한 노력 을 지속하였고, 스승의 학문을 전승하기 위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특히 그는 문인에 게 붕우朋友들 간의 논의와 협력을 통한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문인의 결속은 강화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문인들은 1794년 영남만인소에 참여하며 공론형성의 역할을 담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학문적 성과를 거두기 도 하였다. 김종덕은 그의 학문적 관계망을 적극 활용해 퇴계학맥이 19세기로 계승될 수 있는 가교架橋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인물로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1. 머리말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1724~1797)은 18세기 중 후반 영남 유학계를 대 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명이다. 경상북도 의성의 사촌沙村에서 태어난 김종덕은 안동김씨의 가학을 바탕으로 성장하였고, 1759년(영조 35) 36세의 나이에 이상정의 문인이 되었다. 타고난 자질과 노력으로 이상정의 문하를 대표하는 학자로 성장한 그는 평생을 학문에 몰두하며 강학과 저술을 통해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김종덕은 이황 이후 ‘김성일 장흥효 이현일 이재 이상정’으로 이어진 퇴계학맥의 흐름 속에서 이상 정을 이황의 적전嫡傳으로 위치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이상정을 중심으로 결집된 학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김종덕은 자신의 학문적 관계망을 적극 활용하였다. 혈연 지연 학연에서 출발하는 다양한 관계망은 개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많은 영향을 미친다.1 ‘학연’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적 관계망은 학자로서 의 삶에 집중하였던 김종덕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김종덕은 사승師承과 학문 활동을 통해 형성된 관계망을 바탕으로 퇴계학파의 주류 로 편입되었고, 그 관계망은 점차 문인으로 확대되었다.
이 글에서는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의 특징을 바탕으로 18세기 이상정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 내에서 그가 갖는 학문적 위상을 검토해보 고자 한다. 이때 당시 대표적인 소통매체로 쓰였던 ‘편지’는 관계망을 구성 하는 이들 간의 교류 내용과 그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총 19권 10책으로 구성된 천사집川沙集에는 권2 에서부터 권13에 이르기까지 401통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편지가 수록되 어 있다.2 문집의 상당 부분이 ‘편지’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김종덕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3 이와 함께 그의 문인록인 유자정급문록孺子亭及門錄 4 역시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 의 실상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5
먼저 2장에서는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핀 뒤, 편지의 수신자와 그 내용을 중심으로 관계망의 구성을 정리해 보겠다. 또 편지와 문인록에서 확인되는 학문적 관계망의 인적 공간적 범위를 분석하고, ‘스승 선배 동문 문인’으로 나누어 그 구성원과 교유 양상을 세부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 학문적 관계망의 규모와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3장에서는 18세기 퇴계학파의 중요 구성원으로서 김종덕이 갖는 그 위상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의 학문 활동을 ‘퇴계학파로의 편입, 이상정 사후 학맥계승을 위한 역할 수행, 문인을 통한 학문의 전승 노력’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이 어떻게 변화해 왔으 며 그 기능은 무엇이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지금까지 김종덕과 관련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 같은 시도는 18세기 영남학파의 중요한 일원이었던 김종덕의 학문 활동과 그 의미를 본격적으로 조명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김명자, 梅園日記(1603~1644)를 통해 본 예안 사족 金光繼의 관계망 , 대구사학 129 (대구사학회, 2017), 240쪽.
2 김성애는 川沙集 해제에서 ‘문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편지는 저자의 학문적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고 평하였다(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 or.kr/): 한국문집총간 해제 - 천사집).
3 학계에서 이뤄지는 조선시대 관계망을 주제로 한 연구에서도 일기와 함께 편지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이를 통해 향촌사족의 교유 내용과 그 특징을 규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고영진, 양반관료 류희춘의 관계망 사회적 네트워크와 공간 (태학사, 2009);
고영진,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 민족문화연구 81(고려대학교 민족 문화연구원, 2018);
김명자, 순조 재위기(1800~1834) 하회 풍산류씨의 현실 대응과 관계 망의 변화 , 국학연구 29(한국국학진흥원, 2016);
김명자, 梅園日記(1603~1644)를 통 해 본 예안 사족 金光繼의 관계망 , 대구사학 129(대구사학회, 2017);
김명자, 曆中日記 를 통해 본 18세기 대구 사족 최흥원의 관계망 , 국학연구 38(한국국학진흥원, 2019);
김선경, 16세기 성주 지역 사족의 교유 공감과 감성 , 역사연구 24(역사학연구소, 2013);
김정운, 17세기 예안 사족 金坽의 교유 양상 , 조선시대사학보 70(조선시대사학회, 2014);
전경목, 미암일기를 통해 본 16세기 양반관료의 사회관계망 연구 해배 직후 시기를 중심으로 , 조선시대사학보 73(조선시대사학회, 2015)).
4 孺子亭及門錄 은 필사본의 형태로 현재 문중의 金杭會씨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문인록은 생몰년을 기준으로 문인을 순서대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김종덕의 문인록은 그렇지 않다. 이와 함께 문인의 성명, 본관, 자, 호, 거주지, 과거 및 취재 상황, 문집존재 여부, 김종덕과의 관계만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孺子亭及門錄 은 김종덕 사후 문중에 의해 草稿의 형태로 만들어진 문인록일 것으로 추정된다.
5 문인집단에 대한 연구는 그 형성 과정 및 전개 양상, 해당 학자의 학문적 영향력과 관계망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이때 문인들을 일정한 기준과 형식으로 정리하여 수록한 문인록에 대한 분석은 문인집단 연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김지은, 정재 류치명의 문인록과 문인집단의 분석 , 조선시대사학보 85(조선시대사학회, 2018)).
2. 학문적 관계망의 형성과 특징6
1) 관계망의 형성과 구성
김종덕은 15세(1738년, 영조 14)에 퇴계집을 읽은 것을 계기로 퇴계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에 발을 들여놓았다. 20세에 갈라산葛蘿山에 올라 청량산을 바라보며 이황을 그리워했다는 연보의 기록은 그가 자신의 학문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7 이후 김종덕은 인근 학자들과의 교유 속에서 점차 자신의 학문적 관계망을 구축해 나갔다.
6 자손과 문인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문집 간행 과정에서 해당 학자가 작성한 모든 편지가 문집에 수록되는 것은 아니다. 간행 당사자들의 여러 의도가 편지 선별 과정에 반영되기 마련이며, 그 기준은 스승 동문 문인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논의와 그 경향을 살필 수 있는 것이 중심이 되었다. 문인록 또한 간행 당사자들의 의도가 반영되었으며, 증보 과정에 서 추입과 삭제 등의 수정이 이뤄졌다. 그러므로 천사집에 수록된 편지와 유자정급문록 을 중심으로 학문적 관계망의 구성과 분포, 그 내용의 특징을 살피는 것은 ‘수록된 편지와 문인명단’이 갖는 자료적 한계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7 川沙集附錄 권1, 年譜 영조 19년(癸亥). 연보의 기록을 살펴보면 왕력과 간지가 1년의 오차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연보의 ‘영조 20년(癸亥)’은 실제로 영조 19년(癸亥, 1743)에 해당하는 것이다(이 글에서 연보의 왕력과 간지는 수정한 내용으 로 표기 하겠다.). 해당 내용에 나오는 ‘葛蘿臺’는 현재 안동시 남선면과 의성군 단촌면의 경계에 위치한 ‘갈라산’으로 추정된다.
34세가 되던 1759년(영조 35),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0~1781)에게 입문入門하면서 그의 학문적 관계망은 확대되었고,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1722~1797)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1724~1796)과 함께 ‘호문삼로湖門 三老’로 칭해지며 문인집단 내에서 그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8 그는 스승이 주관하는 강회 참석을 통해 동문들과 활발한 논의를 이어갔고,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는 편지로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학파 내에서 김종덕의 학문적 입지가 높아져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는 문인집단이 형성되었다. 김종덕은 28세(1751)에 문중의 일원을 중심으로 강학을 열어 심경 근사록 등 여러 경서와 성리서를 가르 쳤을 만큼 후학을 위한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이후 그는 자신의 집 사랑채인 초려草廬에서 제자들과 함께 강론을 행하였고,10 64세가 되던 1787년(정조 11)에는 문인들을 중심으로 ‘유자정孺子亭’이 지어져 교육과 저술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11 제자들을 통해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은 더욱 넓어졌으며, 그는 강론과 편지를 이용해 이상정으 로 계승된 퇴계학맥을 전승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처럼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 형성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인은 이상정 문하에 입문하면서 퇴계학파의 일원으로서 그 위치를 확보해 나간 것과 자신의 문인집단을 통해 그 영향력을 확산시켜 나간 것이다. 즉 스승인 이상정과 여러 선배 그리고 수많은 동문과 문인 등은 그의 학문적 관계망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8 東巖集 권14, 附錄 行狀(南漢朝) .
9 川沙集附錄 권1, 年譜 영조 20년(癸亥).
10 김종덕은 1796년(정조 20, 73세) 초려에서 행해진 제자들과의 문답 내용을 정리해 草廬問答(6권 3책)을 완성하였다.
11 南屛集 권3, 記跋 孺子亭記 ; 川沙集 권17, 記 孺子亭記 .
천사집에는 총 401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먼저 편지의 인원 구성 을 살펴보면 그 수신자는 모두 96명으로 확인된다. 각 수신자를 ‘스승. 선배, 동문, 문인, 지인, 친족’으로 분류하여 각 편지수와 해당 인원수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 1>과 같다.12
12 ‘선배’는 김종덕이 편지에서 ‘先生’이라 칭하진 않았으나 학문적으로 가르침을 받거나 존경의 뜻을 표한 인물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동문’은 이상정의 문인록인 高山及門錄에 수록된 인물이며, ‘문인’은 김종덕의 문인록인 孺子亭及門錄에 수록된 인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지인’은 문인록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 가운데 김종덕과 교유관계가 있던 인물을 포함시켰다. 단, 두 곳에 모두 기재된 경우에는 김종덕의 ‘문인’에 포함시켰고, 한 곳 이상의 문인록에 수록되어 있으나 김종덕과 친 인척 관계를 갖는 자는 모두 ‘친족’에 포함시켰다.
401통의 편지 중 동문 문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301통(75%)에 달하며, 해당인원 역시 96명 가운데 61명(63.5%)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김종덕 이 그들을 중심으로 한 관계망 속에서 활발한 학문적 토론을 이어갔음을 짐작 할 수 있게 한다. 또 이상정에게 보낸 36통의 편지는 개별 수신자로는 가장 많은 것으로 그와 스승의 각별한 관계를 보여준다.
다음으로 편지의 내용 구성에 대하여 살펴보자. 수록된 편지 내용의 대부분 은 학문수양의 방법과 관련한 질문과 답변, 학문적 이론에 대한 질의와 답변 논의 등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외 자신과 수신자의 일상과 관련된 안부, 시를 주고받으며 이를 감상하고 평가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표 2>는 수신자 분류별로 편지의 내용 구성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승에게 보낸 36통의 편지에서 그 절반이 학문수양의 방법에 관련한 것이며, 또 성리학 이론과 관련한 질의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편지가 많아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학문적 깊이를 더하고자 하였던 그의 노력을 알 수 있다.
또 스승의 일상과 신병 등을 묻는 안부의 편지가 5통이 있다. 선배들에게 보낸 편지 역시 학자로서의 자질을 완성해 나가고자 조언을 청하는 편지 내용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동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구성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스승의 학문과 퇴계학맥을 계승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지와 성리학 이론과 관련한 논의의 편지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로 간에 제자로서 ‘스승의 학문에 대한 존숭’과 학자로서 ‘학문적 수준의 심화’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인에게 보낸 편지는 제자들 에게 올바른 공부 방법과 수양의 자세를 가르쳐 주는 내용이 가장 많으며, 제자들의 학문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 다음이다.
학맥계승을 위한 내용 의 편지 역시 포함되어 18세기 이후 퇴계학맥의 전승에 기여한 김종덕의 역할을 살펴 볼 수 있다. 지인과 친족에게는 상대적으로 안부를 묻는 편지 가 많지만 서로의 학문적 진취를 독려하고 인식을 공유하는 내용 또한 포함되어 있다.
한편 그의 문인록인 유자정급문록 에는 총 130명의 문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36명이 <표 1>의 문인에 해당하는 인물이며, <표 1>의 친족에 포함되는 인물은 9명이다. 즉 문인록 수록 인물 중 45명의 중복인원을 제외한 85명이 그의 학문적 관계망의 구성원으로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기록의 부재라는 한계는 있지만 그들 역시 김종덕과의 관계 에서 <표 2>의 문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인적 공간적 범위와 특징
학문적 관계망의 범위와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편지 수신자를 대상으로 성관별 거주지별 분포 범위를 정리해보면 다음의 <표 3 4>와 같다.
<표3>과 같이 안동김씨와 한산이씨는 각 11명으로 편지 수신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그의 학문적 관계망에서 혈연과 학연 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
히 김종덕이 이상정 가문의 학자들과 활발히 교유하였고, 그 가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어 안동권씨 의성김씨가 각 6명, 전주 류씨가 5명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18세기 퇴계학파의 학문적 입지와 위상을 상징하는 도산서원 원장을 5명이상 배출한 가문이 예안 거주 가문 (진성이씨, 광산김씨) 외에 의성김씨(8명) 안동권씨(6명) 전주류씨(5명) 라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13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이 당시 퇴계학파를 이끌어가던 주요 가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관계망의 공간적 범위는 <표 4>에서처럼 안동과 의성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주변의 지역을 골고루 포괄하고 있다. 한성 거주자 2명도 확인 되는데 채제공蔡濟恭과 이병모李秉模가 그 대상이다.
김종덕은 1785년(정조9) 동생 김종경金宗敬의 죽음에 위로를 전해준 채제공에게 감사의 편지 를 보냈고,14 1789년(정조 3)에는 자신을 학행으로 의금부도사에 천거해 준 이병모에게 고마운 마음과 거절의 뜻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15 두 사람 과의 관계는 당시 김종덕의 학문적 입지가 지역을 상징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13 이 외 풍산류씨와 한산이씨가 각 4명, 진주강씨 창녕성씨 함양박씨가 각 3명, 경주이씨 안동김씨 예안김씨 풍산김씨 한양조씨가 각 2명의 원장을 배출하였다(우인수, 조선후기 도산서원 원장의 구성과 그 특징 , 퇴계학과 유교문화 53(경북대학교 퇴계문화연구소, 2013), 105~112쪽).
14 川沙集 권4, 書 答蔡尙書 濟恭 .
15 위의 책, 書 答李方伯 秉模 . 李秉模(1742~1806)는 1782년(정조 6) 12월부터 1785년 (정조 9) 2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다((증보)경상도선생안(上)(한국국학진흥원, 2005), 786~787쪽). 이병모는 관찰사로 재직하는 동안 김종덕의 학문적 명망을 인지하고 있었고, 편지를 주고받는 등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川沙集附錄 권1, 年譜 영조 7년 (癸卯)). 이에 조정에 돌아간 뒤 그를 천거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문인록을 대상으로 구성원의 성관별 거주지별 분포 범위를 살 펴보겠다.
<표 5>에서처럼 문인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관계망의 범위는 문중에 집중되었다. 130명의 문인 중 57명이 안동김씨로, 이는 김종덕이 의성을 중심으로 가학의 발전과 전승에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산이씨 안동권씨 의성김씨는 앞의 <표3>과 같이 문인을 중심으로 한 관 계망 내에서도 중요 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편 풍산류씨가 6명으로 세 번째로 많은 성관을 구성하고 있고, 전주류씨가 1명에 불과한 것은 문인을 중심으로 한 관계망에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또한 남양홍씨(2명) 등 <표3> 에서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성관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문인 구성원 의 변화는 관계망의 공간적 범위에도 영향을 미쳐 <표6>과 같이 그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은 한산이씨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당시 퇴계학맥을 이끌어가던 주요 가문과의 유대를 통해 그 영향력을 키워간 것으로 보인다. 문인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관계망 에서 혼인관계를 통해 풍산류씨가 다수 포함되었고, 상대적으로 전주류씨와의 관계망이 축소된 점은 주목할 만한 변화로 보인다.
관계망의 공간적 범위는 의성과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 영향권을 포괄하고 있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특히 김성일로 이어진 퇴계학맥이 주를 이루는 지역과(임하 임동 청송 봉화 영해 등)과 류성룡으로 이어진 퇴계학맥이 주를 이루는 지역(풍산 예천 상주 등)이 모두 관계망의 범위에 포함 되어 있어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이 갖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보다 자세한 분석을 위해 편지의 수신자 중 학문적 관계를 상징하는 ‘스승 선배 동문 문인’을 중심으로 그 구성원들의 명단과 김종덕과 주요 구성원들의 관계양상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1) 스승 선배
김종덕의 스승인 이상정과 함께 ‘선배’로 분류되는 구성원은 3명이 수록되 어 있다. 우선 이상정의 동생이자 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이광정과의 관계는 김종덕이 한산이씨 가문과 갖는 유대를 보여준다. 아울러 의성에 거주하고 있던 임필대와의 교류는 그의 아들 임이보任伊輔가 김종덕의 문인이 되는 데 까지 이어져 부자 모두 학문적 관계망의 구성원을 이루었다. 또 당시 퇴계학파를 대표하던 학자였던 최흥원은 이상정 및 김종경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가는 가운데 김종덕과도 관계망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16
16 苟齋 金宗敬(1732~1785)은 김종덕의 동생으로 이상정 최흥원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 며, 일찍부터 그들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는 김종덕 보다 한해 앞선 1758년에 이상정에 게 입문하였고, 이상정은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였다. 훗날 김종경이 급제(1774년, 영조 50)하여 관직에 진출하자 이상정은 그가 학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도록 수차례 경계를 표하였다(大山集 권25, 書 答金道彦 ; 권26, 書 答金道彦直甫 ). 최흥원 또한 일찍부터 김종경을 이상정의 학문을 이을 후배로 평가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하였다(百弗庵集 권5, 書 答金直甫 己卯 ). 최흥원의 문집에는 김종경과 그 형제들에게 보낸 14통(김종경 9통, 형제 5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2) 동문
이상정의 문인록인 고산급문록 수록 여부를 기준으로 정리한 동문의 명단은 <표 8>을 참조하기 바란다.
동문에게 보낸 132통의 편지 가운데 이종수 류장원에게 보낸 편지 수가 45통(34%)을 차지하고 있어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에서 이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김종덕은 이종수에게 중용 대학 서경 등 경전의 해석과 관련한 의문점을 논의하였고, 대산집 편찬 및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 완성에 대한 조언을 구하거나 이상정의 위패를 봉안하는 것과 관련한 서원 청원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등 제자로서 스승의 학맥계승을 위한 고민을 함께 나누었다.
류장원과도 주희와 이황의 저술을 읽으며 품은 해석의 문제를 논의하였고, 이상정의 학맥 계승을 위한 저술 작업과 서원 청원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였다.
그 다음으로 김종덕이 많은 편지를 보낸 대상은 이상정의 아들인 이완 이다. 두 사람은 학문적 동반자의 관계를 유지하며 그 수양 방법과 성리학적 이론들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개진하는 등 논의를 이어갔다. 또 김종덕과 이완은 대산집 편찬을 적극 주도하면서 이상정 사후 그 학문을 집대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함께 하였다.
한편 16통의 편지가 수록된 신체인과의 관계에서는 김종덕과의 학문적 유대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교유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신체인과 시를 주고받으며 감상을 표하거나, 학문 수양을 서로 독려해주며 안부를 전하 거나, 동료의 죽음에 함께 애도를 표하는 등 절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792년 만인소의 소두疏頭이자 이광정의 아들인 이우에게 보낸 편지도 12통으로, 아버지에 이어 그 아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종덕은 이우와 학문수양의 방법과 그 논의를 이어갔고, 만인소에서 큰 역할을 해준 것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3) 문인
편지에서 확인되는 문인 35명 중 고산급문록에도 함께 수록된 문인은 모두 9명으로, 이들은 이상정 사후 그 학맥의 전승에 따라 김종덕에게 입문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들은 김종덕의 문인이자 동문인 존재 들로 그에게 보다 각별하게 여겨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의 <표9>와 같이 김종덕이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문인 3명이 모두 이상정의 문인이 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이야순은 김종덕이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문인이다. 그는 퇴계 이황의 9세손으로 먼저 이상정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 후 이상정이 세상을 떠나자 1783년(정조 7) 김종덕에게 입문하였고, 과거시험을 포기 하고 학문에 몰두할 것을 결심하는 등 학맥 계승을 위해 노력하였다.18
18 定齋集 권28, 墓碣銘 通訓大夫行掌樂院主簿廣瀨李公墓碣銘 .
김종덕은 그에게 학문수양의 방법에 대한 지도뿐만 아니라 퇴계집 교정 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자문을 아끼지 않았고, 상례喪禮 제례祭禮에 대한 질문 에 수차례 답해 주었다. 이야순의 동생 이암순도 김종덕에게 입문하여 형제 가 함께 수학하며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17통의 편지가 남아있는 이병운은 이완의 맏아들로 이상정의 손자가 되는 인물이다. 이상정은 편지를 보내 김종덕에게 손자의 교육을 부탁하였 고,19 이병운은 1780년(정조 4) 김종덕의 문인이 되었다.20 김종덕은 이병운과 함께 대산집 편찬과 관련한 사항을 논의 하였고, 학문 수양의 자세 및 그 이론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병운에게 일상적인 안부를 묻거나 그가 여행 중 보내온 시를 평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학문적 관계 이상의 유대감을 나타내었다. 이병운의 동생 이병진21과 이병원22도 1789년(정조 13) 아버지 이완의 상을 마치고 김종덕에게 입문하여 가르침 을 받았다.
조우원은 김종덕과 같이 의성에 거주한 인물로 부친의 권유로 1758년 (영조 34) 8세의 나이에 김종덕의 문인이 되었다. 이후 김종덕은 조우원을 이상정에게 입문하게 하였으며, 이상정 사후에는 다시 그가 맡아 가르침 을 주었다.23 그는 조우원에게 학문수양의 자세와 방법, 성리학적 이론의 의미 등을 가르쳐 주었다. 조우원의 동생 조우각도 김종덕의 문인이 되어 형과 함께 수학하였다. 이후 조우각의 영천 이거移居를 계기로 조우원 역시 영천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이는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의 범위가 확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도 김필병 정필규 류숭조 서활 등은 모두 김종덕의 문인을 대표 하는 인물들로서 김종덕은 이들을 통해 이상정으로 이어진 퇴계학맥을 전승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속을 통해 학문적 관계망을 유지해 나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김종덕이 퇴계학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진성이씨와 한산이씨의 후손들을 문인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을 통해 그 학맥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그 후손들이 김종덕에 게 수학하였다는 것은 이상정으로 계승된 퇴계학맥에서 그가 갖는 학문적 입지와 그 위상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스승으로부터 문인 에 이르기까지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이황’과 ‘이상정’이라는 두 인물이었다. 즉 이 2개의 키워드는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을 구성하고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19 大山集 권26, 書 與金道彦 .
20 김흥락은 묘갈명에서 이병운의 입문시기를 1791년이라 하였지만(西山集 권19, 墓碣銘 通訓大夫行淸安縣監贈通政大夫吏曹參議俛齋李公墓碣銘 ), 대산선생실기와 김종덕의 연보에 의하면 이병운이 김종덕의 문인이 된 해는 1780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大山實紀 권1, 年譜 (국역 대산선생실기(한국국학진흥원, 2012), 94쪽); 川沙集附錄 권1, 年譜 정조 4년(庚子)).
21 定齋集 권31, 行狀 內舅通德郞韓山李公行狀 . 22 위의 책, 권33, 行狀 內舅所庵李公行狀 .
23 국역 고산급문록(상)(영남퇴계학연구원, 2011), 411쪽.
3. 퇴계학파 내 김종덕의 역할과 그 위상
1) 이상정을 통한 퇴계학파로의 편입
7세부터 공부를 시작한 김종덕은 스스로의 자질을 바탕으로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황에 대한 존경과 함께 학문에 몰두하였고, 28세에 는 문중의 자제들을 가르쳤을 만큼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고 있었다. 다만 이때까지 김종덕은 학자로서의 삶과 ‘급제’의 의무감을 함께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 김종경은 김종덕에게 이상정의 문하에 나아가 함께 수학할 것을 권하였고, 아버지 김남응金南應(1702~1762)도 평소 친분관 계에 있었던 이상정에게 아들의 교육을 부탁하였다.24 그러나 김종덕은 과거에 매진하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유로 동생에게 먼저 이상정 문하에 들어갈 것을 말하며, 급제와 학문적 성취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5
29세부터 이상정의 문하에 나아가는 36세(1759년)까지의 시간은 김종덕이 교유관계를 넓혀가며 학자로서의 삶을 선택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29세에 향시에 합격하였고, 30세에는 생원에 입격하며 급제를 위한 노력 을 지속하였다.26
이와 함께 인근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이론들을 주제로 토론을 하거나 성리대전 주자서절요 퇴계집 등을 읽으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나아가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1708~1766) 이 그의 집에 방문하여 머물거나27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59)에 게 요청하여 5대조 김사원金士元(1539~1601)의 행적行蹟을 받는 등28 당 시 퇴계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에게 점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아 가고 있었다.
또한 정식으로 문하생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의 친분을 바탕으로 이상정과 지속적으로 교유를 이어갔다. 그동안 김종경은 수차례 이상정을 방문하며 학자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었고,29 그 기대는 김종덕 등 형제들에게로 이어졌다.
김종덕은 이상정과 함께 1757년 고무동鈷鉧洞30, 1758년 묵계서원黙溪書院을 유람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이상정을 통해 학문을 대하는 자세와 학자로서의 삶에 대한 많은 조언을 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학자와 관료 사이에서 고민하였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학문의 뜻을 세우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마침 내 다음해(1759년) 1월, 36세의 김종덕은 49세의 이상정을 찾아가 입문入 門하였고 3월에는 이상정이 김종덕의 집을 방문해 머무는 등 그는 본격적 으로 이상정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의 일원이 되었다.31
입문 직후 김종덕은 편지를 보내 스스로의 본원本原을 함양할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전하면서, 효율적인 방안에 대해 가르침을 줄 것을 청하였다.32 이에 이상정은 ‘급하게 자신을 몰아세 우는 생각을 버리고 학문의 기본이 되는 대학 논어 맹자 등을 반 복해서 읽으면 책속의 의리義理가 마음과 뜻을 차분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마음이 길러질 것’이라 하며 그를 격려해 주었다.33
1760년 김종덕은 스승에게 관직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하겠다고 하며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포부를 밝혔다.34 그해 11월 이상정은 고운사孤雲寺에서 심경을 강론하였고, 김종덕은 그의 문인 자격으로 처 음으로 강론에 참석하였다.35
이후 이상정은 김종덕에게 ‘타고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과거공부를 이유로 도道에 나가길 주저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는 데, 이번 강회에서 보니 학문을 대하는 눈빛부터 달라졌다’고 하며 기쁜 마음을 표하였다.36 이어 최흥원에게 김종덕이 늦게나마 학문에 뜻을 두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큰 기대를 나타내었다.37
이상정 문하로의 입문은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 형성의 시작을 의미하 는 것이었다. 문집에 남아있는 401통의 편지 중 1759년 이전의 편지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며 친분을 이어오던 신체인에게 단계별 독서의 중요성 을 말한 편지 1통이 전부이다.38 그 외 400통의 편지는 모두 1759년 이상 정에게 보낸 편지를 시작으로 그 이후에 쓰여 진 것이다.
학파 내에서 김종덕이 동문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43세가 되던 1766년 전후로 추정된다. 1759년부터 1765년까지 작성된 20통의 편지는 이상정에게 올린 16통의 편지를 제외하면 그 수신 자가 친족에 한정되어 있었다.39 그러나 1766년에는 선배 임필대任必大에 게 아들 김경진金慶進의 관례 참석을 요청하거나,40 동문인 권제경權濟敬, 이우강李宇綱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등 그들과의 유대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편지가 등장하는 것이다.41
이 당시 김종덕은 이상정 및 그 문인들과 함께 강론을 행하거나, 성리설 性善說 (1765) 선악개천리설善惡皆天理說 함양설涵養說 조사존망설操舍 存亡說 (1766) 등을 저술하며 학술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또 1769년 9월 에는 7박 8일의 일정으로 이우李㙖 권렴權濂 등 수 십 인과 함께 이상정을 모시고 청송의 옥계玉溪를 유람하면서 퇴계학파의 일원으로 유대를 쌓는 시간 을 갖기도 하였다.42 이와 함께 점차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서의 명망도 얻어갔다.
45세가 되던 1768년(영조 44)에는 도학道學으로 관찰사의 천거를 받았고,43 2년 뒤인 1770년에는 의성현령 서명민徐命敏(1733~1781)이 강학 을 열어 그를 강장講長으로 초청해 향교에서 대학을 강론하기도 하였다.44
1770년 5월, 고산정사高山精舍의 완공은 이상정과 그의 문인들에게 연구 와 강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고, 그 결속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45 김종덕은 이상정이 고산정사의 터를 살필 때부터 함께하였으며, 고산정사 를 중심으로 한 학술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문인들과의 학문적 교유를 이어 갔다. 1773년(영조 49)에는 자신의 문인이었던 종제從弟 김종준金宗駿 족 질從姪 김당진金堂進 아들 김경진을 이상정 문하에 입문시킴으로써 퇴계학맥의 흐름에 속에 가학을 위치시켜 이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 주었다.
1775년에는 임필대의 문집인 강와집剛窩集 교정에 참여하였고, 1777 년에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1738~1816)가 김종덕의 집에 방문하는 등 그의 학문적 관계망은 점차 당시 퇴계학파의 중요 구성원들로 채워져 나갔다. 또 1778년 새로 부임한 의성현령 서탁수徐琢修(1735~1794)46가 김종덕을 방문한 것은 향촌 사회 내에서 갖는 그의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 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47
동문에게 보낸 편지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1766년 이후 그는 신체인 (1771 1774 1778년)과 권제경(1771 1772년)에게 안부를 묻거나 학문 수양의 방법을 고민하는 편지를 보내었다. 그리고 1779년에 처음으로 이종수에게 보낸 편지가 등장한다.48 여기서 김종덕은 이종수에게 이황의 행록行錄을 읽은 소감과 그 개선사항을 조언 하는 등 이황의 행적을 효과적 으로 정리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보낸 이 편지는 1770년대 중반 이후 김종덕이 이종수와 함께 학파 내에서 퇴계학맥의 전승과 발전을 고민하는 주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정 사후 김종덕은 이종수 류장원과 학맥 계승의 책임자로 써 수많은 논의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출발이 바로 1779년 이 편지인 것이다.
1759년 이상정의 문인이 된 것을 계기로 형성된 그의 학문적 관계망은 이상정의 기대와 스스로의 노력 속에서 퇴계학파의 주류로 편입되어 갔다.
1760년대 중반 이후 김종덕은 강회 참여와 저술활동 등으로 학파 내에서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이는 지역사회에서의 명망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770년대 후반에는 퇴계학맥의 계승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학파 를 이끌어가는 위치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24 大山集 권7, 書 答金重余 南應 辛未 . 이때 이상정은 아들의 배움을 요청한 김남응의 요청을 자신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스승을 구하지 않고, 그 형제들이 함께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하며 김종덕 형제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었다.
25 川沙集 권19, 行狀 仲弟正言君家狀 .
26 崇禎三癸酉式年司馬榜目.
27 川沙集附錄 권1, 年譜 영조 31년(乙亥). 28 위의 책, 권1, 年譜 영조 31년(戊寅).
29 이상정은 百弗庵 崔興遠(1705~1786)에게 편지를 보내 김종경의 志尙을 칭찬하며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였고,(大山集 권9, 書 答崔汝浩 ) 최흥원 역시 김종경의 명민함을 말하며 이상정의 가르침으로 더욱 발전해 가길 바라는 마음을 전한 바 있다(百弗庵集 권4, 書 與李景文 ).
30 고모동은 의성현 북쪽 鼎山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이상정은 동생 이광정에게 보낸 편지에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며 시내는 맑고 차가우니, 머물러 은둔하여 단속하는 장소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大山實紀 권1, 年譜 (국역 대산선생실기(한국국학진흥 원, 2012), 73쪽)).
31 川沙集附錄 권1, 年譜 영조 35년(己卯).
32 川沙集 권2, 書 上大山先生 己卯 .
33 大山集 권24, 書 答金道彦 宗德 庚辰 .
34 川沙集 권2, 書 上大山先生 庚辰 .
35 大山實紀 권1, 年譜 (국역 대산선생실기(한국국학진흥원, 2012), 79쪽.).
36 大山集 권24, 書 答金道彦 . 37 위의 책, 권9, 書 答崔汝浩 壬午 .
38 川沙集 권6, 書 與申子長 體仁 丙子
39 1760년 李述靖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 1편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뱃소래를 읊은 歌詞를 평가한 내용이다(위의 책, 권6, 書 答李善述 述靖 庚辰 ).
40 위의 책, 권4, 書 與任剛窩 必大 丙戌 .
41 川沙集 권7, 書 答權匡伯 濟敬 丙戌 答李伯維 宇綱 丙戌 .
42 1769년 9월 16일부터 9월 24일까지의 옥계 유람을 마치고 김종덕은 玉溪遊山錄 을 작성해 그 과정과 감회 등을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위의 책, 권17, 記 玉溪遊山錄 ).
43 연보에 의하면 당시 義興縣監 洪述祚가 사람을 보내 김종덕에게 “道薦에 들었으니 그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게 하라(金某入於道薦, 使之知之.).”라고 전하였고, 김종덕은 웃으며 “그로 하여금 알게 하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使之知之者, 何意也.)”라고하며 그 자리를 거절하였다(川沙集附錄 권1, 年譜 영조 44년(戊子).
44 위의 책, 권1, 年譜 영조 46년(庚寅). 김종덕과 이상정은 이 강학에 대한 정보를 편지를 통해 서로 공유하였다(川沙集 권2, 書 上大山先生 庚寅 ; 권25, 書 答金道彦 ). 45 김명자, 大山 李象靖(1711~1781)의 학문적공동체 형성과 그 확대 大山日記를 중심으로 , 조선시대사학보 69(조선시대사학회, 2014), 219~221쪽.
6 승정원일기 1420책, 정조 2년 5월 25일(甲申) 10/34.
47 川沙集附錄 권1, 年譜 정조 2년(戊戌).
48 川沙集 권5, 書 與李學甫 宗洙 己亥 .
2) 학맥계승을 위한 사명과 역할
이상정은 김종덕을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김종덕이 정식으로 입문한 후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스승으로 극진이 높여 말한 것에 대하여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의리가 있다’고 하며 편히 대해줄 것을 부탁하였다.49
그리고 많은 편지에서 김종덕을 ‘붕우朋友’로 칭하며 학문적 동반자로 예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771년(영조 47) 이상정 은 자신이 31세에 완성한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를 다시 교감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를 김종덕에게 보내 도움을 청하였고,50 스승의 부탁에 김종덕 은 의심나거나 수정할 부분을 정리해 편지를 보내었다.51 이를 받아 본 이상정은 ‘한집안 사람 같은 김종덕에게 교감을 받아 보완하게 되어 매우 다행이다’며 감사를 전하였고, 그를 ‘뜻을 같이하는 사람同人’라고 하며 특별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였다.52
이상정은 제자들에게 김종덕을 이종수 류장원과 함께 그 문하를 대표하는 학자로 꼽았다. 유사遺事에 의하면 그의 문인 도길모都吉謨(1724~1782) 가 이우에게 그 문하에서 누가 가장 뛰어난지를 물었고, 이우가 곤란해 하며 그 일을 이상정에게 말하자 이상정은 ‘김종덕의 독실함’과 함께 이종 수 류장원을 언급하며, 이우에게 그들의 학문 자세를 칭찬할 만 하다고 하였다고 한다.53
시간이 흐를수록 김종덕에 대한 이상정의 신뢰는 더욱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1780년(정조 4) 71세의 이상정은 손자 이병운의 관례冠禮를 준비하면서 김종덕에게 자字를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고,54
나 아가 그에게 손자의 교육을 부탁하며 친자제親子弟처럼 여기며 가르침을 줄 것을 희망하였다. 즉 이상정은 삶을 정리해 가는 과정 속에서 손자의 교육을 김종덕에게 일임할 만큼 그의 학문적 성취와 인격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781년 이상정은 7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죽음을 앞둔 시점 에서 김종덕에 대한 이상정의 마음은 더욱 특별하였다. 1781년 10월부터 이상정의 병세가 짙어졌고, 11월 12일 이후에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동생 이광정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일 김종덕의 방문에 이상정은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 그 반가움을 표하였고, 12월 4일에는 기력이 조금 돌아오자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며 바로 김종덕을 불러달라고 하였다.
그는 12월 9일 이상정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 곁을 지켰으며, 이후 이종수와 함께 상례喪禮가 되어 호상護喪을 맡은 류도원柳道源(1721~1791)을 도와 상사喪事를 주관 하였다.55
49 大山集 권24, 書 答金道彦 宗德 庚辰 . “兄我年紀不甚遠, 且有兄弟之義, 而稱謂直處 以尊少, 極甚未安, 幸改之如何.”
50 위의 책, 권26, 書 答金道彦兄弟 壬辰 .
51 川沙集 권3, 書 上大山先生稟目 退溪書節要 .
52 大山集 권26, 書 答金道彦別紙 退陶先生書節要 . “而事同一家, 不能終隱. 乃蒙一一 校勘, 改補舛漏, 爲幸甚大. ( ) 固所望於同人耳.”
53 大山實紀 권4, 遺事 (국역 대산선생실기(한국국학진흥원, 2012), 259쪽). 54 川沙集 권3, 書 上大山先生 庚子 ; 大山集 권26, 書 答金道彦兄弟 壬辰 . 55 大山實紀 권9, 考終日記 (국역 대산선생실기,(한국국학진흥원, 2012), 481~487쪽).
김종덕에 대한 이상정의 신뢰는 이상정 사후 그가 학맥계승의 담당자로 서 사명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782년 이후 쓰인 300통이 넘는 편지는 동문과 문인 등 자신의 학문적 관계망을 활용해 그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하였던 김종덕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주요 동문들 의 문집에서 김종덕에게 보낸 편지가 확인되는 것 또한 이 시점부터 이다. 즉 류도원은 1783년,56 이종수와 김굉金㙆(1739~1816)은 1785년,57 류 장원은 1786년부터58 각 문집에 김종덕에게 학문적 논의 및 학맥계승과 관련한 논의가 담긴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김종덕은 학파를 중심 으로 한 관계망에서 한 축을 담당하며 구성원들과 함께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먼저 김종덕은 이광정 이완이 중심이 되어 1782년부터 시작된 대산집 을 편찬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종덕은 작업의 시작부터 교정에 참여 하였고,59 이완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교정본을 등사하여 담당자들이 나누 어 교감할 것과 퇴계집 교정 방법에 따라 단계적으로 일을 진행시킬 것을 조언하였다.60
이후에도 꾸준히 이완에게 편지를 보내 진척상황을 점검하였고,61 교정의 과정에서 이상정의 학문적 논의에 대한 제자들 간의 견해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62 이완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아들이자 김종덕의 문인인 이병운이 대산집 발간을 담당하였으며, 김종덕은 이병운에게 문집의 교정 및 발간을 서두르고 보급방안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였다.63
대산집 편찬과 관련해 류장원 이종수와의 논의도 이어졌다. 그는 1783년 류도원과 류장원 형제에게 편지를 보내 대산집 편찬의 진척상 황을 말하며 교정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64 류장원에게 교정과정에 서 대두된 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기도 하였다.65 이종수와도 대산집 편찬에서의 협력과 그 내용에 대한 학문적 내용에 대한 질의를 이어갔으며,66 1787년에는 후산정사後山精舍67에서 그와 함께 대산집을 교정하였다.68 4년 뒤 보낸 편지에서도 대산집의 교정본 발간이 늦어지 는 데 아쉬움을 표하며 이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부탁하는 등69 동문들과 함께 이상정의 학문을 집대성 하는 일에 꾸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김종덕은 이상정의 유업遺業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상정은 기호학파 내에서 이뤄진 퇴계학의 심경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이황의 정론을 담은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을 편 찬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70 이상정은 이 일을 김종경에 주어 완성하게 하였으나, 1785년 책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이에 김종덕이 동생의 작업을 이어 동문들과의 논의 및 수정을 거쳐 스승의 뜻을 완성한 것이다.71
김종덕은 이광정에게 편지를 보내 심경강록간보의 교정 및 편찬 작업 이 지체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라 하며 이 일에 대한 완성의 의지를 보였다.72 그는 1785년 4월 김종경의 사망 이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심경강록간보 교정에 매진하였다.73
그 과 정에서 이종수 류장원 신체인에게 교감을 요청하였고,74 1794년에는 문 인 이야순과도 그 내용의 오류를 점검하였다.75 간행을 앞둔 시점까지 류장원에게 교정의 마무리를 위해 고산서당에서 회합을 가질 것을 제안하 며 반드시 참석해줄 것을 부탁하는 등76 심경강록간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김종덕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1795년 이종수 류장원과의 마지막 교감작업과 이종수의 모산서당茅山書堂에서 7일간의 교정 작업을 거친 뒤 심경강록간보가 완성되었다.77 이후 이상정의 문인으로 봉화에 거주하던 김희분金熙奮(1760~1822)이 그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자, 김종 덕은 일일이 답을 해주며 학파의 종합된 논의를 거쳐 완성한 심경강록간 보에 대하여 그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78
학맥의 계승과 그 발전을 위한 김종덕의 역할은 이상정을 고산정사에 향사享祀하기 위한 과정에서 더욱 발휘 되었다. 이상정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783년(정조 7)부터 문인들 사이에서 이상정을 향사하기 위난 논의 가 시작되었고, 상소를 통해 향사를 실현시키자는 주장이 모아졌다.79
그 러나 김종덕은 신중하였다. 그는 동문인 권이숙權以肅에게 편지를 보내 이상정의 향사를 침착하게 추진할 것을 당부하였고, 무엇보다 지역 내 유생 들의 공론을 단일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며 이종수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80 결국 강당 등 건물을 갖추어 상소를 청하는 것으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1790년 고산정사의 강당이 완성되었다. 이에 다시 향사를 청하는 상소 운동에 대한 논의와 준비가 본격화 되었다. 한편 이와 함께 유생들 사이에 는 ‘김성일 류성룡 정구 장현광’의 문묘종사를 청하기 위한 상소운동이 함께 논의 되고 있었다.81
이 소식을 들은 김종덕은 난감해 하며 이종수와 김굉에게 편지를 보내 향사를 청하는 상소를 유보하더라도 유생들의 공론 을 수합하여 그 어떤 혐의도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조언하였다.82 김종덕은 왕명王命으로 사당의 향사가 금지된 현실 속에서 이상정의 고산정사 향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지역 내 공론을 하나로 모아 유생의 힘을 결집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침내 1794년 이상정의 고산정사 향사를 청하는 김종덕의 소장疏章이 완성되었고, 소두疏頭에는 이상정의 문인이었던 황경희黃敬熙가 뽑혔다. 황경희 외 10여 인이 상소를 위해 서울로 출발하였는데, 그 일행에는 김종덕의 종제從弟이자 문인으로 이상정에게도 수학하였던 김종준金宗駿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김종덕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상소의 성공을 위해 처신을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였다.83 그러나 그들은 소를 올릴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김종덕은 상소가 중단된 것에 아쉬움을 표하며, 강압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방법이 아니라 소본疏本을 보여주면서 공론을 형성해 다시 청원을 추진 할 것을 류장원에게 권유하였다.84
비록 청원은 실패하였지만 10년이 넘는 진행과정에서 김종덕은 중추적 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동문에게 협조를 구하며 신중하게 이를 준비 하였고, 향사를 청하는 소장을 직접 작성하는 등 학파내 그 대표성을 분명 히 하였다. 특히 김종덕은 그 소에서 이상정을 “도산陶山의 적전嫡傳”이라 고 칭하며, 스승의 학문을 퇴계학의 직계直系로 규정하였다.85
김종덕은 이상정에 의해 부여된 입지를 기반으로 그 사후 자신의 학문적 관계망을 활용해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고, 이를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 을 기울였다. 그는 주요 동문과의 활발한 교유 속에서 학문적 논의를 이어갔고, 그들은 서로 간의 자문을 아끼지 않으며 스승의 학문을 발전시 켜 나갔다. 이 모든 노력은 마침내 이상정을 이황의 적전으로 위치시켜 놓는 결과로 완성되었다.
56 蘆厓集 권3, 書 答川沙金道彦(宗德)直夫景蘊(宗發)弘輔(宗燮) 癸卯 .
57 后山集 권6, 書 答金道彦 宗德 乙巳 ; 龜窩集 권5, 書 與川沙金公 宗德 乙巳 .
58 東巖集 권3, 書 答金道彦 宗德 丙午 .
59 川沙集附錄 권1, 年譜 정조 6년(壬寅).
60 川沙集 권7, 書 與李致道 埦 壬寅 與李致道 . 61 위의 책, 권7, 書 與字致道 甲辰 .
62 위의 책, 권7, 書 與李致道 乙巳 .
63 川沙集 권12, 書 與李際可 丁巳 答李際可 . 64 위의 책, 권4, 書 與柳叔文(道源)叔遠(長源) 癸卯] . 65 위의 책, 권4, 書 與抑叔遠別紙 .
66 위의 책, 권5, 書 答李學甫 .
67 그의 5대조 김사원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김종덕은 이 곳에서 동문 문인들과 함께 강론을 행하는 등 그의 학문적 관계망 형성에서 중요한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68 川沙集附錄 권1, 年譜 정조 11년(丁未).
69 川沙集 권5, 書 答李學甫 .
70 이상호, 퇴계 사후, 학파 성립과 전승의 관점에서 본 ‘퇴계학’ 이론의 정착과정(1) 심경부주를 중심으로 , 국학연구 42(한국국학진흥원, 2020), 209~210쪽.
심경은 남송시대 주자학자인 陳德秀(1178~1235)가 마음의 수양과 관련한 내용을 발췌해 편집하여 1234년 간행한 것이다. 이후 명나라 초기 성리학자인 程敏政(1146~1499) 이 周敦頤 張載 程顥 程頤 朱熹 등 여러 학자의 말을 추가하여 1492년 心經附註를 간행하였다. 이황은 이 심경부주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는 그의 학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김기주, 退溪心學의 특징과 그 전승 心經講錄刊補를 中心으로 , 범한철학 37(범한철학회, 2005), 215~217쪽). 이황의 심경부주에 대한 입장은 그 제자였던 李德 弘의 心經質疑와 李咸亨의 心經講錄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17세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 내에서 이황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본격화 되자 이상정은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그 문인들과 함께 心經講錄刊補 편찬하여 퇴계학을 정리하고자 하였다(이상호, 위의 논문, 2020).
71 心經講錄刊補 心經講錄刊補序 .
72 川沙集 권4, 書 答李小山 .
73 川沙集附錄 권1, 年譜 정조 9년(乙巳).
74 川沙集 권5, 書 擬與李學甫 乙巳 ; 권4, 書 答柳叔遠 ; 권6, 書 答申子長 已酉 . 75 위의 책, 권9, 書 答李健之夢叟 甲寅 . 이와 관련해 이야순은 1795년 심경강록간보 간행을 축하하며 자신의 의견이 교정과정에서 채택된 것에 큰 기쁨을 표하였다(廣瀨集 권3, 書 答川沙先生 ).
76 川沙集 권4, 書 答柳叔遠 乙卯 .
77 川沙集 권9, 書 與李健之夢叟 .
78 위의 책, 권10, 書 答金舜叟 熙奮 丙辰 與金舜叟 丁巳 .
79 大山實紀 권10, 高山誌 (국역 대산선생실기(한국국학진흥원, 2012), 556쪽).
80 川沙集 권6, 書 答權支國 以肅 甲辰] .
81 이 과정에서 안동유림 사이에서 ‘鶴厓(학봉 서애)’ ‘厓學(서애 학봉)’의 序次문제가 다시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그 결과 19세기 안동유림의 첨예한 분열을 초래하였다(권오영,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돌베개, 2003), 342쪽). 82 川沙集 권5, 書 與李學甫 ; 권8, 書 答金子野 .
83 위의 책, 권13, 書 與從弟凝之 宗駿 甲寅 . 84 위의 책, 권4, 書 與柳叔遠 甲寅 答柳叔遠 .
3) 문인을 통한 학문의 전승과 결속 강화
김종덕의 문집에서 문인에게 보낸 169통의 편지 중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1783년 임이보에게 보낸 답장이다.86 즉 이상정 사후 학문적 관계망 을 활용한 김종덕의 활동이 본격화된 시점과 맞물려 문인을 중심으로 한 관계망 역시 활발하게 조직화 되어 간 것이다.
그는 문인을 중심으로 한 관계망을 통해 이황과 이상정으로 상징되는 학맥의 정립과 그 계승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다. 김종덕은 이야순에게 퇴계집 교정과 관련한 자신의 견해와 수정사항에 대하여 수차례 조언해 주었고,87 이병운과 이헌에게는 대산집 간행과 교정에 대한 자문을 아 끼지 않았다.88 그는 문인들에게 이상정의 학문이 주자학으로부터 전해진 퇴계학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활발한 강학과 저술을 통해 스승의 학문을 전승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85 大山實紀 권10, 高山誌 (국역 대산선생실기(한국국학진흥원, 2012), 559쪽).
86 상례 제례와 관련한 임이보의 질문에 김종덕이 자신의 견해를 답한 것이다(川沙集 권6, 書 答任公弼 伊輔 癸卯 ).
87 위의 책, 권9, 書 答李健之 野淳 戌申 與李健之 庚戌 答李健之 . 88 위의 책, 권10, 書 答李章彦 .
김종덕은 문인에게 학문수양의 방법과 그 자세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우선 그는 문인들에게 강론講論에 그치는 공부가 아니라 일상생활 에서의 실천을 중시하는 공부를 강조하였다.89 일상생활에서의 실천, 즉 하학下學을 우선하는 공부는 이상정이 강조했던 것으로90 그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을 통해 학문의 기본을 세운 후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의리를 구하는 것이 순리라 하였다.
김종덕의 이 같은 생각은 소학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그는 학문의 출발은 소학에서 시작해야하며, 그 가르 침을 기본으로 실천한 뒤에야 경전을 읽을 수 있는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91 나아가 소학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학문은 속학俗學 또는 구이口耳의 학문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하며, 일용日用의 공부에 매진 할 것을 강조하였다.92
김종덕이 문인들에게 무엇보다 강조한 학문수양을 위한 자세는 ’동료와 함께 하는 공부’였다. 그는 1784년 이병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부하는 가운데 의혹이 있으면 붕우朋友들과 함께 공유해야 쉽게 해소될 것이라며 그 중요성을 말하였다.93 이 당시 김종덕은 스승의 학문을 정리 계승하는 과정에서 많은 동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논의를 이어갔고, 다양한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를 통해 그의 학문적 관계망은 더욱 견고해 졌으며, 서로간의 협력으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해나갈 수 있었다.
89 川沙集 권10, 書 答鄭明應 .
90 이상정은 안정복(安鼎福, 1712~1791)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下學’ 지향적 학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영남의 선비들이 四七說과 관련한 上達공부에만 집중하고 있는 현실을 염려하는 등 일상에서의 실천이 공부의 기본이라는 생각을 밝히기도 하였다(大山 集 권14, 書 答安百順 庚寅 ).
91 川沙集 권12, 書 答洪聖導 濬源 壬子 答鄭國輝 鳳休丁巳 . 92 위의 책, 권10, 書 答鄭明應 乙卯 ; 권12, 書 答洪聖導 . 93 위의 책, 권12, 書 答李際可 秉運甲辰 .
김종덕의 경험은 동료와 함께하는 공부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790년 이원묵에게 사우師友 와 함께 논의하고 강구하는 노력을 포기한 채 혼자서 하는 공부는 편벽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하였으며, 1792년에는 이병운에게 편지를 보내 사 소한 의문이라도 붕우들과의 질문 토론을 통해 해결한다면 그 요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조언하였다.94
2년 뒤 박세현에게도 붕우에게 잘못이 있으면 서로 규제하고 의혹이 있으면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학문적 발전을 이루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일러주었다.95 김종덕과 함께 초려 후 산정사 유자정 등에서 행해진 강론과 학문적 논의는 문인들이게 스승의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함께 하는 공부를 중요시 한 김종덕의 가르침은 문인들의 결속을 강화시 켰고, 그 학문적 진취를 가능하게 하였다. 문인들의 결속은 1792년 영남만 인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28년(영조 4) 일어난 무신란 이후 영남은 ‘역향逆鄕’으로 인식되었으며 정계에서 소외되었다. 1788년(정조 12) 채제공의 우의정 임명은 영남 남인들에게 중앙 정계로 재진출 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그해 11월 채제공의 주선으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이 정조에게 전해졌고, 정조는 영남을 우호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1792년(정조 16) 3월 정조는 규장각 각신 이만수李晩秀를 경상도로 파견해 옥산서원과 도산 서원의 치제致祭를 명하였고, 특히 서학西學의 확산 속에서도 정학正學을 지키고 있는 영남의 선비들을 치하하며 도산서원에서 영남의 유생을 대상 으로 별시를 거행하게 하였다.96
이 소식을 들은 69세의 김종덕은 문인 김시인에게 편지를 보내 그 감회를 전하며, 이 소식을 함께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하였다.97
영남 남인들은 정조의 우호적 조치에 부응하며 채제공과의 공조를 통해 1792년 윤4월 27일, 이우를 소두로 유생 10,057인이 연명한 영남만인소 를 올렸다. 그들은 사도세자의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그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역도逆徒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조는 이우 등을 직접 불러 비답을 내리는 등 큰 호의를 보여주었다. 이에 영남 남인들은 5월 7일 10,368인이 연명한 2차 영남만인소를 올리기에 이른다.98 김종덕은 신체 인에게 만인소가 무사히 진행될 수 있길 바란다는 바람을 표하였고, 만인 소에서 소두의 역할을 수행하고 무사히 귀향한 이우에게는 축하를 건네 며 영남의 상황에 기대를 표하였다.99 그는 영남을 대표하는 원로 학자로 서 영남만인소와 관련한 지역의 논의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문인들은 영남만인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영남 남인의 공론형성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30명의 문인 중 1792 년 윤4월 27일 만인소에 참여한 문인은 모두 78명이었고, 5월 7일 만인소 에 참여한 문인은 73명이었다.
두 만인소에 참여하지 않은 문인 가운데 1792년 당시 그 나이가 20세 미만 이었던 문인이 12명이었던 것을 감안한 다면, 문인의 상당수가 영남만인소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서로간의 논의를 바탕으로 영남만인소의 취지에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그 참여를 통해 영남 남인이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태었다. 이 같은 문인들의 결속은 이상정의 고산정사 향사 과정에 서 유생의 힘을 결집시켜 하나의 공론을 모으는 것을 강조한 김종덕의 주장 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문인들의 학문적 성취와 관련해서는 그들 가운데 생生 진進 및 출사 出仕의 경우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100
<표 10>과 같이 130명 중 소과 대과 음관 등으로 출사의 기회를 얻은 문인은 모두 19명으로 이는 전체 문인의 15%에 달하는 수치이다. 이 가운 데 문과 급제자는 3명이고, 소과 입격자는 14명이다.
이들은 출사의 자격 을 얻은 자신의 입지를 바탕으로 김종덕의 문인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관계망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스승 의 학문을 계승하고 그 뜻을 결집시키는 데 기여하며, 문인 집단의 학문적 입지와 영향력을 대변하는 구성원으로 존재하였다.
김종덕은 문인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관계망을 통해 이황-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맥계승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으며, 스승의 학문을 전승하기 위한 학문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일상생활의 실천을 위한 학문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함께 무엇보다 동료와의 논의와 협력 에 기반한 공부의 중요성을 문인들에게 강조하였다. 그 결과 문인의 결속 은 강화 되었으며, 그들의 학문적 진취에도 도움을 주었다. 김종덕의 문인 들은 이후 19세기 영남 유학계의 구성원으로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스승으 로부터 계승된 퇴계학맥은 그들 활동의 구심점이 되었을 것이다.
94 川沙集 권11, 書 答李寡尤 ; 권12, 書 與李際可 . 95 위의 책, 권10, 書 答朴希彦 甲寅 .
96 정조실록 권34, 정조 16년 3월 2일.
97 川沙集 권8, 書 與金明汝 壬子 .
98 영남만인소와 추진배경과 과정, 그 의미는 김문식 외, 만인의 청원, 만인소(한국국학 진흥원, 2019)에 수록된 김문식 이상호 이욱 권오영 이수환 김형수의 논고를 통해 자세 히 살펴볼 수 있다.
99 川沙集 권6, 書 答申子長 壬子 ; 권7, 書 與李穉春 壬子 .
100 김종덕의 가르침이 과거를 지향하는 학문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소과 대 과 등은 개인의 학문적 성취를 확인하는 중요한 기회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4. 맺음말
천사 김종덕(1724~1797)은 이상정의 문인을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생 학문에 몰두하며 그 학맥 계승을 위해 힘쓴 인물이다.
이 글에서는 천사집에 남아있는 401통의 편지와 유자정급문록 에 수 록된 130명의 문인을 중심으로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의 특징과 학파 내에 서 그가 갖는 학문적 위상을 검토해 보았다.
먼저 편지에서 확인되는 관계망의 인원은 모두 96명으로 그들은 ‘스승, 선배, 동문, 문인, 지인, 친족’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김종덕은 스승 선배 동문 문인 등 학문적 관계를 상징하는 구성원들과 학문수양의 방법 및 학문적 논의 질의 답변을 내용으로 지속적으로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관계망의 구성원은 혈연 및 학맥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채워졌다. 특히 이상정 가문과의 활발한 교유와 함께 당시 퇴계학파를 이끌어가던 주요 가문과의 유대를 통해 그 구성원을 확충하였다. 관계망의 공간적 범위는 의성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스승으로부터 문인에 이르기 까지 김종덕 학문적 관계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이황’과 ‘이상정’이라는 두 인물이었다. 그는 퇴계학맥 을 상징하는 이 2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관계망을 구성 하였으며, 이를 활용해 자신의 학문적 입지를 다지고 그 학맥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 였다.
1759년 이상정의 문인이 된 것을 계기로 형성된 그의 학문적 관계망은 점차 퇴계학파의 주류로 편입되었다. 김종덕은 학문 활동과 지역사회의 명망에 힘입어 1770년대 후반부터는 학파를 이끌어가는 위치를 확보하였 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이상정의 기대와 신뢰는 그의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고, 그가 학맥계승의 담당자로서 사명을 갖게 하였다. 이상정이 세상을 떠난 후 김종덕은 자신의 학문적 관계망을 활용해 스승 의 학문을 계승하고, 이를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산집 편찬을 위한 노력과 심경강록간보의 완성, 이상정의 고산정사 향사 청원 상소운동은 김종덕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과정이었 다. 그는 주요 동문과의 학문적 논의를 이어가며 스승의 학문을 발전시켜 나갔다. 나아가 그들은 이상정을 이황의 적전嫡傳으로 위치시키는 등 그 학문적 가치의 정체성을 드높였다.
학파 내에서 김종덕의 학문적 입지가 높아져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는 문인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 역시 그의 학문적 관계망에 주요 구성원을 이루었다. 김종덕은 문인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관계망을 통해 학맥계승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또 학문의 기본은 일상생활의 실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상정의 학문적 가르침을 전승하였다. 특히 김종덕 은 학문수양의 방법에서 무엇보다 붕우朋友들 간의 논의와 협력을 통한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문인의 결속 강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 로 보인다.
그의 문인 상당수가 1794년 영남만인소에 참여하면서 영남 남인의 공론형성에 기여한 것이다. 아울러 동료와 함께하는 공부는 문인들 이 소과와 대과 등에서 학문적 진취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종덕은 그의 학문적 관계망을 적극 활용해 학파 내에서 자신의 명망을 확보해 나갔고, 그 위상을 바탕으로 동문 및 문인 등과 활발한 교유를 이어갔다. 학자로서 보여준 그의 삶은 퇴계학맥이 19세기로 계승될 수 있는 가교架橋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2020. 10. 20 : 논문투고
∙ 2020. 10. 29 ~ 11. 18 : 심사
∙ 2020. 11. 19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
참고문헌
승정원일기, 정조실록.
廣瀨集, 南屛集, 蘆厓集, 大山集, 東巖集, 百弗庵集, 西山集, 心經講錄刊補, 定齋集, 川沙集, 川沙集附錄, 后山集.
孺子亭及門錄
[출처] 천사 김종덕의 학문적 관계망과 그 위상|작성자 류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