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 바디메오의 구원
- 허윤욱(여천교회) -
마가복음 10장 46~50절의 소경 바디메오를 생각하면서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바디메오는 소경 거지였다. 그는 소경인 것만으로도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으나 거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자이기도한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아마 이 여리고 도시에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었을까? 주님께서 이 불쌍한 소경 거지 바디메오를 구원하셨는데 이 일을 생각하면 진실로 주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소경 거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지 아니한가?
사람들은 자기의 처지에서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좋은 입장만 생각하며 자기의 그보다 못한 입장과 형편을 원망하며 슬퍼하고 비관하는 중에 있지 아니한가?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평안보다는 원망과 불안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 도시, 이 사람들 중에 자기가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와같이 불행한 처지에 있는 바디메오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 10:46,47).
바디메오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특별한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러한 만큼 바디메오는 자신을 불쌍하고 큰 죄인이라고 한탄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본래 디메오라는 이름은 아람어 '타매'를 원형으로 한 말인데 "존경"이라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그는 존경받아야 할 사람인데 거지가 된 것이다. 아마 디메오의 집안이 본래 부자요 존경받는 집안이었는데 그가 성장하면서 망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도 본래 처음 창조시에는 모든 만물에게 존경과 섬김을 받도록 창조되었고 하나님께도 사랑받는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사단에 미혹되어 눈이 멀어버린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한 이래로 인생들은 눈 먼 소경 거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눈 먼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달려들고 있는가. 참으로 불쌍 한 죄인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은 눈 먼 가운데 그대로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불쌍한 소경들이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빈정대지 말고 속히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라.
“네가(예수)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7).
둘째로 바디메오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그의 말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병원 환자들 에게 전도해 보면 자신의 병상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겸손해진 사람들도 많지만 상당한 경우가 오히려 더 마음이 악하여져 심지어 하나님을 증오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자신의 교만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 느냐”라고 대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슬픈 일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셋째로 그는 환경을 이긴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을 때 주변에서 잠잠히 하라고 윽박 질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더 강하고 힘차게 예수님을 불렀다. 오늘날 많은 믿고자 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방해꾼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그들이 결단을 내리고 주 앞에 나오고 싶어도 사람과 환경을 의식하여 결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예수 믿으면 직장이나 친구들 에게 소외되지 않을까 사업에 손해되지 않을까 등 사단이 주는 생각이나 환경을 이기지 못하여 망서리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이는 폭력적인 핍박이 두려워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단은 여러 모양으로 믿는 길을 방해한다. 죄인들의 눈이 열려 하나님을 만나면 사단은 자기의 종을 빼앗 기는 것인데 마지막 발악을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들이여, 전도 그 자체는 전투다. 사단의 손아귀에서 그대를 구출하려는 전투이다. 그대의 길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사단의 술수다. 믿음을 얻기 위해 그대가 치르는 어떤 희생도 지옥에서 건짐 받는 것보다 크지 못하리라.
넷째로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꾸밈없이 “보기를 원하나 이다”라고 대답했다. 복잡하고 순수하지 못한 자기 생각을 버리고 정직하게 한 대답이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순수하게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나오는 것이 제일 좋다. 당신이 추하면 추한대로 오라. 주님은 그대로를 기뻐하신다. 잘 꾸미려는 당신을 하나님은 추하게 보신다. 은밀하게 우리야의 아내를 간음하고 그 남편까지 암살했던 다윗이 선지자 나단 앞에서 얼마나 정직하였던가. 그는 정직하게 자기 잘못을 시인하였으므로 주님의 긍휼을 입었던 것이다(삼하 12:1).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라. 진실하라. 그러면 은혜를 주시리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자는 자기 영혼을 살리거니와 정직을 잃어버린 자 는 자기 영혼을 망케 하는 것이리라.
다섯째로 바디메오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 항목은 다른 항목보다 더 중요하다. 믿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죄인의 구원은 믿음 외에 다른 방법이 없거늘 사단은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바디메오는 믿음을 갖되 정확 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구약의 말씀에 의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본문 47절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나님을 움직이고 예수님을 불러 세울 수 밖에 없는 놀라운 고백인 것이다.
신약성경 첫 머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라”로 시작되고 있다. 일찌기 이사야는 다윗의 아비 이새를 들어 그의 뿌 리에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바 있다(사 11:1, 행 13:21-24).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세상에 오시고 성경대로 사시고 죽으시고 성 경대로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주님은 결단코 다시 오실 것 이다(고전 15:3,4).
바디메오는 성경대로 순수히 믿는 믿음이 있었다.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은 낙서로 꽉차있는 칠판과 같아서 온갖 더러운 사상 즉 주의, 무신론, 불가지론 등으로 더럽혀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거짓인 것을 저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염 마음을 가지고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으로 인하여 바리새인과 변론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한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을 억지로 부상하며 예수께서 하나님되심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놀라운 결론을 그들에게 주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너희가 본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 이 실제로 영적 소경이면서 자신은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런 현상은 무신론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만연 되어있는 현상인 것이다.
소경들이여, 소경들이여, 본다고 하지 말고 겸손히 주님 앞에서 자신이 소경임을 고백하고 구원을 받으시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짤막한 말씀이 바디메오를 구원한 것이다. 그는 멸망의 지옥에서 원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후 주님을 좇아갔던 것이다. 그가 단순히 질병에서만 구원받았다면 천국에 갈 수 없었으려니와 이제는 생명수 강가에서 그를 볼 수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가 질병에서 구원받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면서부터 소경이므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았던 설움과 고통을 단번에 해결받았던 것이다. 참으로 십자가 영적, 육적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대의 모든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는 예수 앞에 그대의 모습 그대로 오시라, 구원을 얻으시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