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를 시작으로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 3월, 4월호, 5월호, 6월호, 7월호, (8월호 쉼), 9월호, 10월호, 11월 12월호, 2024년 1월호, 2월호, 3월호 이번이 열아홉번째 연재기고이다. (편집자 주)
이청준과 '숙명의 씨앗자루/ 이청준문학관을 위하여(19)
1, 작가의 삶과 작품 내용의 상관성 여부
어떤 소설가이든 그 자신의 원체험에만 의존하여 쓰는 것은 아니겠다. 문학적 상상력을 보태 재구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 그러나 이청준 소설의 일부 장면들은 그의 특별한 원체험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그 성장환경에 관하여 얼마 간 변형을 거쳐 추상화시킨 사례가 짐작된다. 그런 몇 상징적 상황에 관하여 이청준의 말을 빌리자면, "숙명의 씨앗자루", "백정시대"라는 표현 등이 있다. 거기에 "유약한 남성 인물"의 등장을 더할 수도 있겠다. 이청준은 이른바 '게 자루' 사건을 놓고서 "숙명의 씨앗자루"라 지칭했으며, 6.25 당시의 좌우대 립에 따른 무참한 갈등과 희생을 두고 "백정시대”에 직접 빗대었다. 그리고 그 '거세된 남성'이라는 표현을 바로 사용하지는 아니했지만 '자신의 가족과 주변에 대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유약한 남성상을 수차 등장시켰다. 오늘은 이청준 어린시절의 허기(虛飢)와 빈궁(貧窮)을 상징적으로 웅변하는 "숙명의 씨앗자루"를 먼저 살펴본다. 숙명(宿命)은 타고 날 때부터 정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말한다.
2, 숙명(宿命)의 씨앗자루
이청준의 어린 시절은 빈궁(貧窮)과 허기로 가득했다. 겨울철 보리밭에서 연(鳶)을 내내 날리면서 그 점심을 건너뛰는 핑계거리로 삼았다. 배앓이 핑계를 자주 대어 '꾀배' 별명도 있었다는데, 가난했다. 부모와 4남3녀였지만, 부친과 큰 형의 이른 죽음, 6.25 당시 외숙집의 참사와 더불어 그 집안 형편은 몇 뙈기 밭농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상태에서 광주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이른바 '게 자루'사건이 생겼다. 1954.4.3~4.4경의 일이겠다. 광주 친척집에 더부살이 가면서 인사치레용으로 마련한 '게 자루'를 챙겨들고 하루 버스길로 올라갔더니, 그 친척 그 누님이 그만 부패된 것이라면서 '게 자루'를 바로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그 전날에 갯벌에서 모친과 함께 잡아 담은 '칠게'자루였을 것. 그 칠게는 솥에 볶거나 또는 게장으로 담을 밑반찬이 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칠게 자루가 쓰레기로 내던져지는 순간에 소년 이청준도 내던져졌을 것. 그 날 저녁밥부터 먹지 못했을 것이며, 그 뭉개진 자존심으로 검은 숯이 되고 말았을 일. 이에 이청준에게 "숙명의 씨앗자루"로 남게 된 것이다. 그 '게 자루' 사건은 <키 작은 자유인, 1988> <들꽃 씨앗 하나, 2002> 등에도 등장 하는데, 이청준은 "숙명의 씨앗자루"라고 직접 언급하였다. 돌이켜, 이청준의 허기와 빈궁은 광주에서의 중고교 시절 내내 계속 되었다. 더부살이, 자취, 가정교사를 하면서 반(半)고아 상태가 되었다.
고향집에 남은 가족들도 정처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씌어 지지 않은 자서전, 1969>의 서두에는 “서울의 대학시절 역시 '허기'로 시작했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그 허기가 나중에 해결되더라도 어린 이청준의 상처 난 자존감이 회복되기는 쉽지 아니했을 것이다. 이에 이청준의 작품을 보면, 그 행간에 육체적 허기(虛飢), 거기서 야기된 정신적 허기가 가득한 장면들이 지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그 '혼자 겪는 허기(虛飢)'는 결국에 '혼자 하는 단식 (斷食/單食)'과 단념(斷念)이 되고, 그렇게 '혼자 사는 밀실(密室)'의 전깃불과 마주치면서, 역시 '혼자 있는 밀실'의 신문관을 마주치게 되는 것이리라. 이청준의 그 '혼자'시절에는 그 옆에 '우리, 함께'가 없었던 것 같다.
3, 허기와 밀실의 방사(放射) 효과
요컨대, 허기(虛飢)는 결코 혼자의 일로 끝나지 아니했다. 소설가 이청준은 그 허기를 기점으로 삼아 여러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그 육체적 허기로 초래된 '위궤양 통증은 물론이었지만, 그 정신적 허기를 극복하는 '거부의 단식(斷食) 행위'로 치달았다. 어린 시절에는 그 허기로 인한 외로움 속에서 '엄마의 자궁과 같은 '피난처 밀실'을 찾아 위로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 성인 시절에 이르러 그 밀실은 여러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밀실의 역할은 다원적이다. 위로의 공간이 되지만, 한편으로 공포의 현장이 되었다. 사회적 고립과 단절에 따른 '지하실, 입원실, 고문실'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 밀실 신문실에서 매번 전깃불과 신문관을 상대하여야 했다.
소설가 이청준은 그 개인적 허기, 사회적 허기와 단식 체험에 바탕하여 여러 변주를 시도하였다. 전깃불 공포와 바깥의 부정확한 '소문의 벽'으로 가려진 밀실이 있었다. 그런 밀실 공간에 '가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어린 이청준 혼자 늘상 감추었던 '허기'는 그에게 드디어는 '부끄러움의 원죄 (原罪)의식'을 뿌려주었을 지도 모른다. 이에 평론가들은 이청준 소설을 두고 '욕망에 대한 금욕과 윤리성의 문제 등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요컨대, 혼자갈 수 밖에 없었던 독행자 이청준은 '어린 날 허기체험을 겪으면서 '외로움, 괴로움, 그리움, 단식, 사회적 공포, 진술거부증, 바깥의 소문' 등의 두터운 '벽' 앞에서 "소설가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늘 고민하였다. 그러면서 떠나온 노모와 고향이 늘 그리웠으나, 그 젊은 날에는 어떤 화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잔인한 도시, 서울 살이의 괴로움과 외로움이 계속 되었다.
4, 관련된 작품들
<퇴원, 1965, 등단작> 허기와 공복(空腹)이 일상화 되면서, 그 정신까지 헐어진 '위궤양 환자가 되고 말았다. 외로움과 괴로움이 가중되었다. 의사 친구의 환대 속에 간호사가 준 거울로 자신의 얼굴,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 또한 병실의 창문 바깥 풍경을 보면서 생각한다. 병원에서 세 끼를 챙겨 먹게 되면서 그 무기력을 회복했다. 병원을 걸어 나와 다시 출발한다.
<매잡이, 1968> 사라져가는 풍속과 세태 속에 매잡이 곽노인'은 결국 죽음으로 가는 단식(斷食)을 선택한다. 마지막 매잡이의 자존심은 어떤 타협도 불허했다. 일각에서는 카프카의 <단식광대)와 비교하지만, 이청준의 <매잡이>에게 단식은 그 풍속의 미학과 자부심을 지키는 수단에 불과하였던 반면에 카프카의 <단식전업 광대>에게 단식은 그 생업적 또는 예술적 목적에 해당하였다.
<조율사, 1972> 조율사(調律師)는 실연을 위한 악기들의 소리값과 질서를 점검하는 전문가이다. 그런데 나와 친구들은 실제 연주를 하지 못하는 상태임에도 마냥 만나서 공(空)염불 조율만 거듭한다. 이제 나에게도 육체적 허기와 사회적 허기가 중첩된다. 나는 현실거부의 몸짓으로서 유사죽음의 강을 넘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치료행위로서 단식에 스스로 돌입 한다. 단념(斷念)의 가사(假死)상태에 이르다가 살아 난다. 그 시절의 단식의 꿈'을 체험했던 것.
<소문의 벽, 1972> 사회적 허기(虛飢)는 개인적 허기와 고립에서 비롯된다. 소설가 박준에게 밀실의 진술 공포증이 반복되고, 신문관의 추궁이 계속된다. 그는 밀실 골방에서 가사(假死)에 이르는 체험에 관하여 <괴상한 버릇>이란 소설을 썼다. 그는 바깥 '소문의 벽'소문의 옷' 속에서 그저 '미친 사람 또는 정신병자'라 취급된다.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 소설가는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
<뺑소니 사고, 1974> 사회적 저명인사의 '속임수 금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식기간 중에 '부정한 빵'을 먹었다 한다. 목격자는 뺑소니 사고를 당하여 사망한다.
《추기》
1) <광대의 가출, 1993> <사라진 밀실을 찾아서, 1994> 참고
2) 소설 <매잡이>에는 '천관(天冠)리'라는 이름의 산골이 등장한다. 고려 시대에 장흥부에는 '응방(鷹坊)'이 있었다.
3) <조율사, 1972> <소문의 벽, 1972> <씌어지지 않은 자서 전, 1969>은 '이란성 삼둥이' 작품이라 칭할 만 하다.
박형상 변호사(前 서울중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