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오면 모두 ‘바이바이(byebye)’다. 영화는 깜빡거리는 커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합니다.”
마우스를 움직여 프린트 아이콘을 클릭한다. ‘지잉, 슥슥’ 소리를 내며 A4 용지 한 장이 프린터 밑으로 미끄러져 나온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다. 직업 상담사로 일한 지 올해로 12년째이지만 올해만큼 자주, 짧은 기간에 이직한 적은 여태껏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참기가 어려워진다.
올초 영화는 계약직으로 2년간 다니던 여성센터를 그만두고 작은 복지회관의 직업소개팀 팀장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닌 지 3일 정도 되었을 때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는 판단이 선 후 일주일만에 그만두었다. 아무 대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곳으로 옮기기 전 함께 일했던 지인이 다른 일자리를 제안했었다. 복지회관 쪽이 직급과 연봉이 더 높았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한 터였다. 아직 그 제안은 유효했다. 영화는 지인이 소개한 직업전문학교에서 다시 면접 봤고, 그곳에서 6개월 정도 근무했다. 가을학기가 시작될 무렵 몇 년 전 일했던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다시 자리를 옮겨 이곳에서 지금까지 4개월여 정도를 일했다. 첫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을 후회했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었다. 12월 초 대학원에서 알게 된 교수가 회사를 새로 차린다는 이야기를 대학원 동기를 통해 듣게 되었고 교수와의 면담을 통해 며칠 전 그곳에서 일하기로 얘기가 되었다.
직업상담사. 영화는 30대 중반이 되었을 때 직업교육을 통해 이 일을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작은 유통회사에서 일했다. 어쩌다 한번 시작한 이 일은 그 후로 계속되었다. 계약직으로 여기서 몇 년, 또 저기서 몇 년을 전전하며 12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이는 40을 훌쩍 넘었고 현실적으로 다른 일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흔하디흔한 이야기. 그러니까 결코 이 일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아니, 지독히도 벗어나고 싶다.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은 어떨까요? 어느 그때 한 지인이 권한다. 직업상담사로 일하다 프리랜서 헤드헌터로 이직하는 경우는 흔하니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변변한 학벌도, 번듯한 외국계 기업이나 대기업 경력도, 그렇다고 창업 이력도 없는 헤드헌터를 누가 믿고 쓰겠는가. 속된 말로 ‘급’이 안된다. 12년 경력도, 창업 대학원 석사 학위도 이 앞에선 힘을 잃는다. 그렇게 그 일이 안 맞는데 대학원은 왜 갔어요?지인이 또 묻는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안 그러면 불안하거든. 나이가 더 들어 이 지긋지긋한 일마저 할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웠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혼자 사는 나이 든 여자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부여잡고 있는 것마저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외엔. 아무래도 이 진저리나는 일을 평생 꾸역꾸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것 같다.
직업을 바꿔보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보육교사 등 자격증도 몇 개 땄다. 최후의 수단으로 창업도 고려했다. 곧 접기는 했지만, 마카롱 팔아 대박 난 동네 작은 가게 이야기를 듣고 주말마다 베이커리 클래스에서 빵 만드는 법도 배웠다. 대학창업지원센터에서 제안서 쓰는 일을 하며 정부지원금을 받는 사업 아이템도 꽤 많이 보았다. 한참 유행하는 자기계발서도 몇 권 읽었고 저자들이 하는 강연도 몇 번 참석했다. 결론은 다시 돌아 돌아 제자리로 왔지만. 오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까지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직업상담사조차도 직업상담이 필요하다.
주변에 성공담들은 차고 넘친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다던가, 돈보다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다던가, 우연히 시작한 사업으로 대박쳤다는 이야기들. 유튜버, 인플루언서 기타 등등. 그럴수록 월급 받는 거 외에 별다른 재주도, 흥미도 없는 스스로의 무능력함에 깊은 무력감이 몰려온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더 이상 어떠한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
밤마다 침대에 누우며 생각한다. 제발 아침이 오지 않기를. 영원한 밤이 계속되기를. 아침에 눈 뜨기가 괴롭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사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아침은 무심히도 다시 밝아온다. 격렬한 저항감을 꾹 누르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일상. 습관적으로 몸을 움직이지만 마비된 듯 어떠한 일에도 무감하다.
너무 지친 걸까. 조금이라도 쉬어야 할까. 20년 남짓 일을 하면서 3년 전 딱 한 번, 3개월 정도 실업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첫 한 달은 좋았다. 그러나 좀 지나자 몸은 편했지만 불안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워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고, 결국 쉬려고 했던 기간도 다 채우지 못한 채 다시 돌아왔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초조하다. 부모님 빚 갚은 것을 제하고, 20년간 직장생활 하는 동안 수중에 남은 돈이란 고작해야 얼마 안 되는 전세보증금이 전부니까.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노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돈 생각만 하면 도저히 쉴 용기가 나지 않는다. 뾰족한 수가 나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한다.
영화는 프린트했던 사직서를 팀장에게 제출했다.
일주일 후, 새해가 시작되는 때에 맞춰 새로운 곳으로 출근하게 될 것이다. 이쪽 지옥에서 저쪽 지옥으로. 새해의 찬란한 아침이 밝아 오면.
프로필
하고싶은 일이 별로 없어,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기보단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며 살려 한다. 힘든 일은 가능한 피하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일만 한다. 보통은 누워서 지낸다.
첫댓글 우와~ 몰입하며 읽게 글을 쓰시네요.
내 사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아침... ㅠㅠ 그런 아침 미워요.. 영화에게도 저쪽 지옥의 아침 말고 편안하고 즐거운 아침이 빨리 찾아오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