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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學問
[이후경(李厚慶) 등]
선생은 나이 13세 때 덕계(德溪 오건(吳健)) 오 선생(吳先生)에게 《주역(周易)》을 배웠는데, 겨우 건괘(乾卦)와 곤괘(坤卦) 두 괘를 읽고 그 나머지는 다 유추하여 통달하니, 오 선생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오 선생은 일찍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공의 뛰어난 재주와 큰 기량으로는 반드시 장차 세상에 나가 쓰일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시속에 따라 우선 과거에 급제한 다음에 평소 원하는 대로 행동을 취하려 하지 않는가.” 하였다. 선생은 항상 시속의 과문(科文)이 사람을 얽어매는 폐단이 되는 것을 한탄하고 개연히 도를 수행할 뜻을 지녔다. 관례(冠禮)를 행한 뒤에는 과거 시험을 치르는 것을 그만두고 성현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 이후경(李厚慶) -
선생은 젊어서부터 의지를 굳게 다지고 힘써 실천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목표로 삼았다. 스승에게 수학할 때 잠깐의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으며 문리(文理)가 나날이 통해지고 논리가 나날이 원만해졌다. 덕계가 제생에게 칠석변(七夕辨)을 지으라고 하자, 선생은 그 즉시 배덕수(裵德秀)를 불러다가 종이에 받아쓰게 하였는데 멈추지 않고 글을 불러 댔으며 말마다 모두 정대(正大)하였다. 덕계는 크게 감탄하여 말하기를, “문장만 뛰어날 뿐 아니라 기국과 식견도 이미 보통 사람을 초월하니, 후일 그가 이룬 경지는 반드시 보통의 무리가 미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하였다. - 문위(文緯) -
선생은 선군자(先君子 정사중(鄭思中))를 일찍 여의고 백씨(伯氏) 참찬공(參贊公 정괄(鄭适))과 함께 모부인(母夫人 성주 이씨(星州李氏))을 받들어 모시고 살았는데, 백씨도 의리를 좋아하고 선을 즐긴 선비였다. 선생은 집에 들어와선 효제(孝弟)를 행하고 나가서는 학문에 종사하여 의심나는 부분을 스승에게 묻고 미진한 것은 형에게 도움을 받아 문장과 덕행이 점점 진보하므로 같은 또래의 무리가 탄복하였다. - 문위 -
선생은 나이 22세 때 향공 초시(鄕貢初試)에 합격하였다. 이 당시 선생은 매우 독실히 학문을 추구하고 기타의 것을 추구하는 데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으므로 서울에 가서는 회시(會試)를 보지 않고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더한층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여 비록 한가로이 지낼 때도 웃옷을 벗은 적이 없고 태만한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 반드시 밤이 깊은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첫닭이 울면 일어났으며 온종일 단정히 앉아 멈추지 않고 글을 강독하였다. - 이서(李𥳕) -
선생은 젊었을 적에 퇴도(退陶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을 찾아가 《심경(心經)》을 배웠다. 어렵고 의심나는 부분을 묻되 하나를 가르쳐 주면 그 나머지는 유추하여 다 알았다. 이 선생은 덕계 오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크게 감탄하고 칭찬하였으며, 후일에 대유(大儒)가 될 것임을 알았다. - 이서 -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차려입은 뒤에 가묘(家廟)를 참배하였다. 물러나 서실(書室)로 들어가서는 궤안(几案)을 정돈하고 서책을 편 뒤에 성현을 마주 대하듯 경건한 자세로 조용히 앉아서 글을 강론하고 익혔다. 정신을 집중하여 깊이 사색하고 문장의 내용을 완미하여 그 깊은 뜻을 탐구하면서 반드시 밤이 깊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 최항경(崔恒慶) -
계해년(1563, 명종18) 봄에 퇴계 선생을 찾아가 뵙고 의심나는 문제를 질문하였는데, 이 선생은 순서에 따라 학문을 하는 성문(聖門)의 학문 방향을 말해 주었다. 이에 비로소 전일에 지향했던 공부의 방향이 분명히 정해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내면을 향해 노력한 결과 규모가 날로 넓어지고 사업 또한 날로 커졌다. - 문위 -
선생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뛰어난 학덕을 지니고 초연하게 살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명함을 품에 품고 찾아뵈었다. 남명은 선생의 말씀을 들어 보고는 지조가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칭찬하였다. - 문위 -
선생은 약관(弱冠) 이후 과거 공부를 멀리하고 느긋하게 옛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목표로 삼았다. - 곽근(郭赾) -
선생이 퇴계 선생을 뵙고 돌아온 뒤에 이 선생은 선생을 칭찬해 마지않으며 말하기를, “자질이 영민한 데다 학문에 전념하고 선을 좋아하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후손에게 전한 경사가 어찌 그만한 여운이 없겠는가.” 하고, 이어 덕계에게 편지를 보내 영재(英材)를 얻은 것을 축하하였다. - 이서 -
선생은 속수(束脩)를 싸들고 남명 선생의 문정(門庭)을 찾아가 뵙고서 경(敬)과 의(義)에 관한 가르침을 깊이 새겨듣고 실천적인 노력을 더욱 독실히 하였다. - 이서 -
선생은 일생 동안 노력을 들일 때 오로지 주자(朱子)에게서 그 법을 취하였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ㆍ《주자어록(朱子語錄)》ㆍ《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에 힘을 다하여 언제나 그 글을 읽을 적에는 주자의 말씀을 곁에서 직접 듣는 것처럼 실감하였다. 심지어 주자가 도를 강론하고 머무르던 장소에 대해서까지 모두 그 경관을 상상하며 느낌을 자아내었다. - 이육(李堉) -
선생은 매일 어김없이 첫닭이 울면 일어나 등불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글을 강론하며 송독하였다. 또 어떤 때는 등불을 켜지 않고 앉아 부단히 심성을 함양하면서 가끔 곁에 모시고 있는 자제에게 묻기를, “너희들의 마음은 지금 무슨 일을 생각하고 있으며 어디로 달려가고 있느냐? 흩어진 마음을 거두는 것이 곧 학문하는 자의 첫째가는 공부이다.” 하였다. - 이서 -
선생이 무흘(武屹)에 계실 당시 내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을 적의 일이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선생이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아 눈을 감고 아무 말 없이 있는데, 어깨와 등줄기가 꼿꼿한 가운데 그 기상이 온화하면서도 근엄하여 마치 흙으로 빚은 사람 같았다. 자정쯤에 이르러서야 눈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달빛이 휘영청 밝고 산천은 정적이 감돌았다. 선생은 방문을 열고 나가 중당(中堂)에서 산보하는데 기분이 유쾌하여 스스로 즐거워하는 흥취가 있었다. 내가 묻기를, “오늘 밤 선생님의 모습이 증점(曾點)이 무우대(舞雩臺)에서 바람을 쏘이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했던 기상과 염옹(濂翁 주돈이(周敦頤))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은 기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그것을 배우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대의 말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 배상룡(裵尙龍) -
선생의 학문은 무엇보다 남들이 보지 않는 면에 힘을 들여 내면의 아름다운 덕이 은연중에 나날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정적인 공부로 심성을 보전하여 기르는 방도며 일 없이 쉬는 때의 법도에서부터 동적인 공부로 말씀을 하거나 발걸음을 떼는 부분까지 옛사람이 이미 행한 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이 없어 모두 규범이 있고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았다. - 문위 -
무흘은 골짝이 깊고 천석(泉石)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빈객이 드물어 사람을 응대하는 일이 다소 뜸했으므로, 서적을 열람하며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신해년(1611, 광해군3) 이전 7, 8년 동안은 무흘에 머물러 있는 때가 많았다. - 배상룡 -
글들을 열람할 때는 언제나 두세 줄을 한 번에 흘낏 보아 넘어갔으나 뜻이 매우 중요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다른 글을 널리 조사하여 서로 참고하고 과연 맞는지를 알아봄으로써 그 의미를 완전히 알았다. - 배상룡 -
선생은 산중에 들어앉아 산 밖의 세상일에 관해서는 전혀 듣지 않았으며, 글을 저술하고 책을 편집하는 여가에 성현의 경전을 읽어 유쾌하게 스스로 만족해하는 흥취가 있었다. 항상 옛사람의 말을 송독하고 그것을 벽에 기록하기를, “깊은 산속에서 흙을 쌓아 집을 짓고 쑥대를 엮어 문을 만들어 달고는 그 속에서 거문고를 타고 질장구를 두드리며 고대 명왕(明王)의 고상한 기풍을 읊조리면 이 또한 충분히 그 낙을 얻어 비명에 죽을 우려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배상룡 -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본주(本州 성주(星州)) 수령이 되었을 때 선생이 학문을 강론할 장소가 없다는 이유로 선생을 위해 작은 정사(精舍)를 지어 주고 계숙(溪塾)이라 이름하였다. 선생은 만년에 심의(深衣)와 복건(幅巾) 차림으로 그곳에 근엄하게 단정히 앉아 매일 원근의 사우들과 도리를 강명하고 학문을 논하였다. - 최항경 -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 매우 영민하였다. 학문에 뜻을 둔 이후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여 서책에 대해 읽지 않은 것이 없고 행실에 대해 힘쓰지 않은 것이 없으며, 사무에 대해 익히지 않은 것이 없고 기예에 대해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술(醫術)까지도 모두 공부하여 통하였다. 관혼(冠婚)의 의식과 상제(喪祭)의 제도에 대해서도 모두 정밀히 탐구하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강명하며 말하기를, “천지간의 도리를 강구하는 일을 우리 유자(儒者)가 사업으로 삼지 않는다면 세상에 누가 그것을 담당할 것인가.” 하였다. - 문위 -
선생의 학문은 경전을 널리 탐구하여 그 대의(大義)를 깨쳤으며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에 더욱 힘을 들였다. 특히 정(靜) 자와 경(敬) 자에 대한 공부에 한층 더 노력하였다. - 최항경 -
선생은 머물러 사는 실(室)을 경의재(敬義齋), 당(堂)을 경회(景晦), 헌(軒)을 망로(忘老)라 이름하였으며 본연의 천성을 지켜 보전하고 경(敬)과 의(義)를 함께 견지하는 공부를 늙어 갈수록 더욱 독실히 하였다. - 이천봉(李天封) -
산천암(山泉菴)은 무흘(武屹)의 시내에서 동쪽으로 수십 보 거리에 있다. 방과 대청마루가 각각 한 칸씩인데 샘물이 바위틈에서 쏟아져 나오므로 그것을 취해 암자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선생은 종일토록 무릎을 꿇고 앉아 글을 읽기도 하고 사색하기도 하며 항상 덕을 수양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 배상룡 -
산중의 경치와 명칭이 혹시 옛글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것을 본떠 이름을 붙였다. 이는 옛사람으로 자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름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생각함으로써 보다 더 절실히 가슴에 느끼어 체험하는 내실을 다지자는 것이었으니, 이는 다른 사람은 누구도 엿볼 수 없는 점이었다. - 배상룡 -
계유년(1573, 선조6)에 선조(宣祖)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를 발탁할 것을 명하였을 때 김동강(金東岡 김우옹(金宇顒))이 부수찬(副修撰)으로 입시하여 아뢰기를, “정구(鄭逑)는 학문이 통명(通明)한데 이황(李滉)에게 수학하고 또 일찍이 조식(曺植)의 문하에 왕래하였습니다. 본디 재주와 식견을 지녔고 또 학행이 있으니, 마땅히 포의(布衣)로 불러 입대(入對)하게 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물어보고 그 인품을 살펴본 다음에 벼슬을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최항경 -
선생은 말하기를, “학문은 반드시 옛글을 공부해야만 밝아지고 도리는 반드시 몸소 실천한 뒤에 얻어지는 법이다. 보고 들은 것이 풍부하기만 하고 실제 자기 몸에 소유하지 못한 경우는 모두 잠꼬대요 허울에 지나지 않으니, 그것을 무엇에 쓰겠는가. 아무쪼록 으슥하여 마음이 해이해지기 쉬운 장소와 심리가 미묘하게 작용하는 순간에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어야 비로소 학문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였다. - 문위 -
선생은 염락관민(濂洛關閩)의 글을 널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주자어류》와 《주자대전》에 대해서는 그 뜻을 강명하는 공력을 더 깊고 절실하게 기울였다. 또한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을 더욱 존중하여 믿었기 때문에 만년에 《심경발휘(心經發揮)》를 편집하여 후학의 교재로 제공하였다. 학문에 뜻이 있는 자는 이 책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문위 -
내가 일찍이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을 적에 우리 집의 종이 와서 나에게 매를 잃어버렸다고 알렸다. 나는 그 종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여기저기 샅샅이 뒤져 찾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생이 무슨 이유로 갑자기 돌아가려 하느냐고 묻기에 내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선생은 정색하며 말씀하기를, “만일 그대의 풀린 마음을 수렴하는 정성이 언제나 도망간 매를 찾는 것처럼 절실하다면 옛날 학자보다 못할 것을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 배상룡 -
선생은 이미 퇴도 선생의 문정에 올라가 《심경》을 질문하면서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써 실천하였으며, 또 남명 선생을 찾아뵙고 높은 기풍을 흠모하였다. 그리고 대곡(大谷 성운(成運)) 성 선생(成先生)에게 찾아가 안부를 살핀 뒤에 그를 존경하고 사모한 나머지 종유하며 질문함으로써 식견이 보다 더 크고 넓어졌다. 뜻을 독실히 다지고 힘써 실천하여 그 나름대로 회암(晦菴 주희(朱熹))과 퇴계 이후에 유학의 종지(宗旨)를 얻은 자는 오직 우리 선생 한 사람뿐이다. - 이후경 -